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베르가모의 도니체티

벨카토의 거장

정준극 2014. 11. 5. 21:52

벨칸토의 거장 도니체티..불행한 삶을 살다

태어날 당시에는 프랑스 속령의 시살팽 공화국 시민

 

주세페 릴로시가 그린 도니체티 초상화

 

게타노 도니체티는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의 거장이다. 그는 생전에 67편의 오페라를 남겼다. 그중에는 오늘날 스탠다드 레퍼토리로 되어 있는 '람메무어의 루치아' '사랑의 묘약' '라 화보리타' '연대의 딸' '돈 파스쿠알레' '루크레치아 보르지아' '로베트로 르쿠브러' '샤무니의 린다' 등이 있다. 도니체티는 이탈리아의 벨칸토 작곡가이다. 그러나 도니체티 당시에 이탈리아를 둘러싼 유럽의 정세는 매우 복잡하여서 엄밀히 말해서 도니체티를 이탈리아의 작곡가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지경이다. 도니체티는 1797년 11월 29일 베르가모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당시 베르가모는 이탈리아와는 별도로 독립성을 지닌 치살피네 공화국(Cisalpine Republic)에 속한 도시였다. 치살피네 공화국은 프랑스 혁명 이후에 나폴레옹이 만든 공화국으로 이를 프랑스어로 Républiques sœurs(자매 공화국)이라고 불렀다. 프랑스와 자매와 같은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돕는다는 뜻에서였다. 치살피네 공화국(프랑스어로는 시살팽 레푸블리크)은 1797년에 수립되었다. 바로 그 해에 도니체티가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도니체티는 이탈리아 시민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우산 아래에 있는 치살피네(시살팽) 공화국의 시민으로 태어난 것이다. 치살피네 공화국은 처음에는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만을 영토로 삼았으나 후에는 모데나와 볼로냐, 그리고 에밀리아까지 영토를 확대하였다. 돌이켜 보건대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 모데나, 밀라노 등은 국가간의 세력다툼으로 어느 때는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가 또 어느 때는 오스트리아 영토로서 존재하였다. 그러다가 훗날 이탈리아의 통일이 이루어지자 원래대로 이탈리아의 영토가 되었다. 도니체티는 1848년에 롬바르디의 베르가모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베르가모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그러므로 도니체티는 프랑스의 영향을 받는 지역에서 태어나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도니체티가 프랑스 또는 오스트리아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도니체티는 이탈리아의 작곡가이다.


도니체티의 고향 베르가모의 중심지. 오늘날 모습


도니체티, 로시니, 벨리니를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의 3대 거장이라고 말한다. 다시말해서 도니체티의 오페라들은 거의 모두 벨칸토 오페라의 장르에 속한다. 그런데 오늘날 벨칸토 오페라들은 제대로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베르디나 푸치니 또는 바그너에 밀려서이다. 오늘날 음악학자들이나 음악이론가들 또는 평론가들은 벨칸토 오페라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지기 않고 있다. 음악적으로 내세울만한 가치가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이다. 벨칸토 오페라가 어떠하길래 그런 감정을 받는 것일까? 음악학자들 등등은 벨칸토 오페라가 순수하고 진실한 음악성을 추구하지 않고 대중들의 입맛에 맞는 음악을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에 좋은 점수를 줄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벨칸토 오페라는 스타 몇 사람만을 중심으로 음악이 만들어 진다는 점도 지적한다. 그래서 그들이 각광을 받으면 그것으로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벨칸토 오페라의 또 하나 특징은 주인공들이 많은 시련을 겪도록 해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동정심을 갖도록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파조의 드라마라고 보면 된다. 아무튼 이러한 것이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의 특징들이므로 예술적 견지에서는 별로 후한 점수를 주기가 어렵다는 얘기들이다.

 

청년시절의 도니체티

 

또 하나 벨칸토 오페라가 별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이것이 저것 같고 저것이 이것같기 때문이다. 음악이 서로 비슷비슷해서 어떤 것이 새로운 음악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이 오페라에 사용했던 음악을 저 오페라에 가사만 바꾸어서 그대로 쓰는 경우가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작곡가들에게는 스피드가 중요했다. 예를 들어서 서곡만 해도 전에 만들어 놓았던 서곡을 새로운 오페라에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둘러치기 또는 돌려치기를 하는 것은 당시로서 하나의 관례였는데 이는 오페라를 작곡하는 사람들이 관중에 대하여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극장에서의 관중들이란 사람들은 오페라를 관람하러 왔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오페라를 진실되게 감상하는 사람은 극히 드믈었다. 오페라가 공연되고 있는 중이라고 해도 아는 사람들끼리 큰 소리로 서로 웃고 떠드는 것은 보통이고 음식물을 가져와서 먹어대는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한쪽에서는 아예 테블을 놓고 도박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에게는 오페라극장에 왔다는 것이 중요했으며 오페라의 내용 등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작곡자들로서도 그저 적당히 울고 짜거나 웃고 떠드는 오페라를 만들면 그만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예술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해서 도니체티의 오페라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도니체티의 오페라에는 도니체티만의 귀중한 특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도니체티의 오페라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전통에 중점을 둔 것이다. 이탈리아 오페라는 무엇보다도 노래에 중요한 비중을 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도니체티의 오페라도 노래에 중점을 둔 것이다. 도니체티는 가장 이상적인 오페라는 아름답고 풍부한 감정의 노래가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한 시몬 마이르. 1763년 독일 잉골슈타트에서 태어났으며 1845년 이탈리아의 베르가모에서 세상을 떠난 오페라, 칸타타 작곡가. 도니체티가 오페라 작곡가로서 경력을 시작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작곡가로서 도니체티의 재능은 어린 시절부터 발견된 것이었다. 도니체티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정식으로 음악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도니체티에게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은 시몬 마이르(Simon Mayr)였다. 시몬 마이르는 당대에 알아주는 오페라 작곡가였다. 시몬 마이르는 도니체티가 오페라 작곡가로서 성공하는 길을 마련해 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청년 도니체티로 하여금 오페라 성공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 준 사람이었다. 예를 들어서 도니체티의 초기 작품 중의 하나로서 마이르의 지도를 받아 작곡한 '그레나타의 초라이데'(Zoraide di Grenata)는 예상 외로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도니체티는 이 오페라의 성공으로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길을 확실히 걷기로 결심했다. '그레나타의 초라이데'와 관련해서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첫 공연이 예정되어 있는 날의 바로 전 날에 주연급 성악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일이 생겼다. 도니체티는 갑자기 교체된 사람을 위해 그날 밤으로 음악을 수정해서 다음날 아침에 연습을 겨우 마치도록 하고 첫 공연을 가졌다. 그런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도니체티의 음악적 재능에 대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도디체티는 당시의 다른 오페라 작곡가들과는 달리 성공이 늦은 셈이었다. 도니체티는 25세 때인 1822년부터 나폴리에서 오페라 작곡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도니체티는 주로 유쾌하고 즐거운 내용의 오페라를 만들었다. 도니체티가 처음으로 성공 다운 성공을 한 것은 1830년 '안나 볼레나'(Anna Bolena)로였다. 밀라노의 카르카노극장에서 첫 공연을 가진 작품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33세 청년의 작품으로서는 대단한 반응을 얻은 것이었다. 더구나 '안나 볼레나'에는 당대의 정상급 성악가들이 출연해서 관심을 끌었다. 소프라노 주디타 파스타(Giuditta Pasta)가 타이틀 롤을 맡았고 테너 조반니 바티스타 루비니(Giovanni-Battista Rubini)가 헨리 퍼시 경을 맡았으며 베이스 필리포 갈리(Philippo Galli)가 엔리코(헨리 8세)를 맡은 배역이었다. 밀라노에서 대성공을 거둔 '안나 볼레나'는 곧 이어 파리, 런던, 마드리드, 드레스덴, 하바나에서 공연되어 국제적으로 도니체티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1830년 유명한 소프라노 주디타 파스타가 밀라노에서 '안나 볼레나' 초연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던 모습

 

'안나 볼레나'는 에너지가 넘쳐 있는 작품이며 불꽃놀이할 때의 불꽃 처럼 화려한 음악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도니체티는 일찍부터 영국 또는 스코틀랜드에 대하여 일종의 낭만적인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다. 아울러 그는 광란에 대하여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안나 볼레나'는 그런 그의 관념이 충실하게 표현된 작품이다. 도니체티가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저 멀리 있는 나라, 어두운 로맨스가 있는 나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니체티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인 '람메무어의 루치아'(1835)도 그런 배경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월터 스콧 경의 소설을 바탕으로 삼은 '람메무어의 루치아'는 비극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로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루치아는 원하지 않은 결혼으로 인하여 결혼의 초야에 신랑을 칼로 난자하여 죽이고 자신은 정신이상을 일으켜 역시 쓰러진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루치아의 애인 에드가르도도 무대 위에서 절망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도니체티의 '루치아'는 19세기 관중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고전 소설 '마담 보바리'의 한 구절을 보면 여주인공인 엠마가 '루치아'의 공연을 보고 마음 속으로 많은 감명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엠마도 루치아처럼 현실세계에서 멀리 도피하고 싶다는 내용이다.

 

'람메무어의 루치아'의 광란의 장면(안나 네트렙코).


도니체티는 생애의 후반기에 그의 선배들인 로시니나 벨리니가 그랬던 것 처럼 파리로 가서 지냈다. 로시니와 벨리니는 이탈리아에 있을 때보다 파리에서 더 뛰어난 작품들을 만들어냈지만 도니체티는 이탈리아에 있을 때에 '마리아 스투아르다' '루크레치아 보르지아' '사랑의 묘약'과 같은 뛰어난 작품들을 이미 만들었다는 것이 특이하다. 도니체티가 파리에 있으면서 처음 내놓은 작품은 '순교자'(Les martyres)였다. 사실상 '순교자'는 도니체티가 이탈리아에서 한달 전에 만들었던 '폴리우토'(Poliuto)를 개작한 것이다. '폴리우토'는 이탈리아에서  내용이 종교적으로 온당치 않다는 이유로 금지를 당했었다. 도니체티의 '순교자'는 앞으로 나올 카미유 생 상스의 '삼손과 델릴라'의 앞길을 예비한 장엄한 작품이다. 파리에서 처음 선보인 '순교자'는 그런대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도니체티의 이름을 높여준 것은 비극이 아니라 코믹한 '연대의 딸'(La fille du regiment)과 '돈 파스쿠알레'(Don Pasquale)였다. '돈 파스쿠알레'는 도니체티가 파리의 이탈리아극장을 위해 단 2주 만에 완성한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도니체티에게 놀람을 표시하자 도니체티는 '즐거운 내용의 오페라를 작곡하게 되면 마음이 말하고 머리가 달려가기 때문에 손도 빨리 움직이며 쓰게 된다'고 말했다.

 

'돈 파스쿠알레'의 한 장면. 노리나를 처음 만난 돈 파스쿠알레


도니체티는 1840년에 비엔나에 어떤 자리가 있으니 오라는 초청을 받았다.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탈리아 북부의 상당부분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는 관계가 나빳지만 도니체티는 그런 것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비엔나의 자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베르디의 오페라는 이탈리아의 독립과 해방을 갈망하는 오페라들을 썼다. 특히 1848년의 '레냐뇨 전투'(La battaglia di Legnano)는 외세에 저항하는 이탈리아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베르디는 그 외세를 오스트리아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도니체티는 정치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도니체티의 비엔나 생활은 질병으로 인하여 괴로운 것이었다. 어쩌다가 매독에 걸렸던 것이다. 도니체티는 1845년부터는 더 이상 작업을 할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심지어는 말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걷지도 못했다. 도니체티는 자기 마음을 콘트롤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정신이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의 작품에 광란의 장면을 표현하기를 즐겨했다. 광란으로부터 일종의 희열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자신이 광란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사촌인 안드레아는 그를 더 이상 비엔나에 둘수 없다고 판단해서 파리로 데려왔다. 이어 고향인 베르가모로 돌아왔다. 도니체티는 1848년에 그가 태어났던 베르가모에서 숨을 거두었다. 도니체티는 25년 경력에 모두 67편의 오페라를 남겼지만 그 중에서 오늘날에도 공연되고 있는 작품은 5-6편에 이를 뿐이다. 그러나 잊혀져 있는 오페라 중에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석과 같은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카테리나 코르나로'(Caterina Cornaro), '돈 세바스티앙'(Don Sebastien), 로베르토 드브로(Roberto Devereux) 등이다. 도니체티의 작품들은 1950년대와 60년대에 들어와서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LP가 확산되고부터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마리아 칼라스와 조앤 서덜랜드의 기여가 컸다. 그렇지만 아직도 다른 수많은 작품들은 세계의 오페라 극장들로부터 잊혀져 있다.

 

도니체티의 오페라들은 상당수가 잊혀져 있다. 그러나 그중에는 보석과 같은 것들도 있다. 키프러스의 여왕 카테리나 코르나로(재위: 1474-1489)의 이야기를 다룬 '카테리나 코르나로'는 도니체티가 가장 왕성한 작곡활동을 하던 시기에 쓴 것이다. 시기적으로 '돈 파스쿠알레'와 '샤무니의 린다' 사이에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카테리나 코르나로'는 도니체티의 생전에 마지막으로 초연된 작품이다. 18844년 1월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사진은 '카테리나 코르나로' 음반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