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베르가모의 도니체티

도니체티와 메렐리

정준극 2014. 11. 8. 20:55

도니체티와 메렐리

임프레사리오 겸 대본가, 라 스칼라 매니저 역임

 

바르톨로메오 메렐리

 

바르톨로메오 메렐리(Bartolomeo Merelli: 1794-1879)라는 사람이 있었다. 임프레사리오 겸 대본가였다. 1829년부터 1850년까지 무려 20여년 동안은 밀라노 라 스칼라의 매니저로서 활동했던 사람이다. 메렐리는 라 스칼라의 매니저로 있으면서 청년 베르디를 만나 베르디에게 '나부코' 대본을 주며 음악을 붙여 오페라로 만들어 보라고 권유한 일이 있다. 첫 오페라와 두번째도 실패로 돌아간 베르디는 고향 부세토로 돌아가서 평범한 음악가 생활을 하려고 했으나 메렐리의 권유로 '나부코'를 만들었고 대성공을 거두자 그로부터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메렐리와 관련하여서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얼마후 페피나라는 애칭의 스트레포니는 메렐리와의 관계를 끊고 지내다가 나중에는 베르디와 결혼하여 베르디의 두번째 부인이 되었다. 그 메렐리가 베르가모 사람이었다. 도니체티와 오래된 학교 친구였다. 1818년 볼로냐에서 베르가모로 돌아온 도니체티는 우연히 메렐리를 만났다. 메렐리는 자기가 쓴 오페라 대본인 '보로고냐의 엔리코'(Enrico di Borogogna)를 도니체티에게 주면서 오페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메렐리가 대본을 쓴 '보로고냐의 엔리코'는 어느 극장으로부터 위촉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니체티는 우선 작곡부터 하고 그것을 공연할 극장은 나중에 찾아 보는 것으로 약속하고 메렐리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베니스의 산 루카 극장(Teatro San Luca)의 임프레사리오인 파올로 찬클라(Paolo Zancla)가 도니체티와 연결이 되어 '보로고냐의 엔리코'가 완성되면 공연하겠다는 약속이 되었다. 산 루카 극장은 나중에 골도니극장(Teatro Goldoni)라고 이름을 바꾼 극장이다. 그리하여 '엔리코'는 1818년 11월 14일 베니스의 산 루카 극장에서 처음 공연될수 있었다. 하지만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때 산 루카 극장은 새로 내부장식을 했었다. 사람들은 오페라 공연보다는 새로 장식된 내부를 구경하는 데 더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다가 주역을 맡은 소프라노 아델라이데 카탈라니가 무대 공포증이 있다고 하면서 초연을 앞두고 출연을 취소하는 일이 생겼다. 도니체티는 카탈라니를 위해 작곡한 소프라노 아리아 몇 곡을 당장 고쳐야 했다. 베니스의 신문인 Nuovo osservatore veneziano(누오보 오세르바토레 베네치아노)는 11월 17일자 신문에서 '엔리코'와 관련하여 도니체티라는 작곡가가 당면한 이런저런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글을 게재했다. 이에 대하여 도니체티는 '무슨 일이던지 언제나 예상치 못했던 일이 생길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음악적인 표현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그 다음날 오페라가 막을 내리자 도니체티는 관중들의 환호에 응답해서 무대인사를 해야 했다. 그때 도니체티는 불과 21세의 청년이었다.

 

'보로고냐의 엔리코'가 대단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자 도니체티는 다음 작품에 도전했다. 역시 메렐리가 대본을 쓴 Una follia(광란)이라는 오페라였다. '광란'은 '엔리코'로부터 한 달 후에 초연되었다. 그저 그런 반응을 받았다. 그후에는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는 의뢰가 없었다. 도니체티는 베니스에 하릴없이 머물러 있을수도 없어서 일단 고향인 베르가모로 돌아갔다. 베니스에서 '엔리코'에 출연했던 성악가들이 베르가모로 와서 '엔리코'를 공연했다.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 26일이었다. 그후 도니체티는 베르가모에서 교회음악 또는 기악곡들을 몇 곡 작곡하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1819년 하반기쯤 되어서 베니스의 산 사무엘레 극장으로부터 오페라 의뢰가 들어왔다. 게라르도 베빌라쿠아 알도브란디니라는 사람이 대본을 쓴 Il falegname di Livonia(리보니아의 목수)는 그렇게 해서 탄생했고 1819년 12월에 산 사무엘레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도니체티는 '리보니아의 목수'를 작곡하면서 Il nozze in villa(마을의 결혼)의 음악을 가다듬었다. 메렐리의 대본인 '마을의 결혼'은 1819년에 완성되었지만 1820/21년 카니발 시즌에 만투아에서 초연되었다. 오늘날 '마을의 결혼'이 어떤 오페라인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만투아에서의 초연 이후 스코어가 완전히 분실되었기 때문이다.

 

도니체티는 1822년, 그가 25세 때에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의 임프레사리오인 도메니코 바르바자(Domenico Barbaja)로부터 오페라 작곡 의뢰를 받았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La zingara(집시 여인)으로서 그해 5월에 나폴리의 테아트로 누오보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그로부터 도니체티는 나폴리에 가서 살기 시작했다. 도니체티는 1844년 1월 Caterina Cornaro(카테리나 코르나로)를 완성할 때까지 20여년을 나폴리에 본거지를 두고 활동했다. 도니체티는 나폴리에서 무려 51편의 오페라를 선보였다. 그러므로 혹자는 도니체티를 나폴리의 작곡가라고까지 말했다. 도니체티는 1830년 이전에 주로 코믹 오페라로서 성공을 거두었다. 반면에 순수 오페라(오페라 세리아)는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도니체티의 진짜 첫 성공은 순수 오페라였다. 1822년에 로마에서 공연된 Zoraida di Granata(그라나타의 초라이다)였다. 이어 1830년에는 Anna Bolena(안나 볼레나)를 내 놓았다. 이것 역시 순수 오페라였다. 도니체티는 '안나 볼레나'로서 비로소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도니체티를 코믹 오페라의 대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잘못된 인식이다. 도니체티의 진면목은 순수 오페라, 비극 오페라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안나 볼레나' 이후 도니체티가 대성공을 거둔 오페라는 '사랑의 묘약'(1832) '돈 파스쿠알레'(1843)와 같은 코믹 오페라인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도니체티는 역사적인 드라마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따른 오페라들이야 말로 도니체티가 코믹 오페라의 작곡가가 아니라 순수 비극 오페라의 작곡가라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었다. 1835년에 나폴리에서 첫 선을 보인 '람메무어의 루치아', 이어서 1837년의 Roberto Devereaux(로베르토 드브러)는 도니체티가 어떤 작곡가인지를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람메무어의 루치아'는 도니체티가 대본가 살바도레 카마라노(Salvadore Cammarano: 1801-1862)와 처음으로 콤비를 이루어 완성한 작품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때까지의 도니체티의 오페라들은 모두 이탈리아어 대본으로 된 것이었다. 나폴리 출신의 카마나로는 도니체티를 위해 '루치아'뿐만 아니라 '벨리사리오'(1836), '칼레 공성'(1836), '톨로메이의 피아'(1837), '로베르토 드브러'(1837), '루덴츠의 마리아'(1838), '폴리우토'(1838), '로한의 마리아'(1843)의 대본을 제공했다. 카마라노는 베르디를 위해 '일 트로바토레'(1853)의 대본을 썼다.

 

도니체티를 위해 '람메무어의 루치아'의 대본을 썼고 베르디를 위해서는 '일 트로바토레'의 대본을 쓴 살바도레 카마라노

 

당시 이탈리아, 특히 나폴리에서는 모든 공연에 대한 당국의 검열이 거세었다. 도니체티는 그런 검열에 대하여 점점 분노를 터트렸다. 도니체티는 1836년 경부터 파리에서 활동하고 싶은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파리에서는 오페라의 주제를 선택하는 일이 자유스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리에서는 작곡료를 더 많이 주었으며 작곡가로서 모두들 대우해 주었다. 도니체티는 1838년에 파리 오페라로부터 오페라 두 편을 작곡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리하여 파리에 간 도니체티는 그로부터 거의 10여년 동안 파리에서 지내며 여러 편의 프랑스어 대본의 오페라들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이탈리아에서 공연되는 그의 오페라들에 대하여도 수정을 하거나 감독을 하였다. 파리에서 처음 공연된 오페라는 1835년의 Marino Faliero(마리노 팔리에로)였다. 이어 1839년에는 프랑스어 버전인 Lucie de Lammermoor(람메무어의 루시)가 공연되었고 1840년 4월에는 '순교자'(Les martyrs)였다. 이 오페라는 나폴리에서 검열로 인하여 공연금지되었던 '폴리우토'의 프랑스 버전이었다. 1840년에는 La fille du regiment(연대의 딸)도 처음 공연되었다. 이후 두어 편의 오페라가 더 초연되었고 이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이미 공연했던 오페라들의 수정본들도 일부 공연되었다. 도니체티는1840년대에 들어서서 나폴리, 로마, 파리, 비엔나 등지를 자주 왕래하며 지냈다. 주로 오페라 공연 때문이었다. 혹은 다른 작곡가들의 오페라 공연도 돌보아 주는 일을 했다. 그러다가 1843년 경부터 병세가 급작히 악화되어 도무지 작업을 할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매독으로 인한 고통이 심해지자 이와 함께 정신착란 증세도 보였다. 결국 도니체티는 어쩔수 없이 정신병원에 입원되어야 했다. 그리고 1847년 말쯤해서 친구들이 그를 베르가모로 데려왔다. 도니체티는 베르가모에서 1848년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