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베르가모의 도니체티

전성기의 도니체티

정준극 2014. 11. 9. 21:54

로마, 나폴리, 밀라노, 그리고 팔레르모

1822년부터 1830년까지의 활동

그리고 1830-38년간의 국제적 명성

 

'그라나타의 초라이다' 음반 커버. 도니체티의 첫 성공작이다.

 

[로마에서의 성공]

도니체티는 19세 때인 1816년 첫 오페라를 완성했다. Il pigmalion(피그말리온)이다. 이듬해인 1817년에는 Olympiade(올림피아드)와 L'ira di Achille(아킬레의 분노)를 완성했고 21세 때인 1818년에는 Enrico di Borogogna(보로고냐의 엔리코)와 Una follia(광란)를 작곡했다. 그리고 22세 때인 1819년에는 러시아 페터 대제의 이야기를 다룬 Il falegname di Livonia(리보니아의 목수)와 I piccioli virtuosi ambulante(순회하는 작은 악사), 그리고 Le nozze in villa(마을 결혼)를 작곡했다. 그러나 그가 정작 오페라 작곡가로서 인정을 받고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5세 때인 1822년부터였다. Zoraida di Granata(그라나타의 초라이다)라는 작품으로였다. 사실상 그 이전의 오페라들은 대개가 1막의 간단한 작품들이었다. 그리고 어떤 것은 첫 공연 이후 스코어가 분실되는 바람에 오늘날 그것이 과연 어떤 오페라였는지 알 길이 없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Le nozze in villa 이다. 만투아에서 1820/21년 카니발 시즌에 한번 공연되었으나 스코어가 분실되는 바람에 이후로 당연히 한번도 다시 공연된 일이 없다. 청년 도니체티는 1819년에 '마을 결혼'을 작곡하고 나서 한동안 그에게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는 요청이 없자 과연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를 신중하게 생각해 보기 위해 일단 고향 베르가모로 돌아가서 숙고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베르가모 구시가지


그때까지만 해도 도니체티의 오페라라는 것은 우선 관중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그들의 입맛에 맞는 음악을 만든 것이었다. 도니체티는 어떤 오페라를 완성하고 나서 첫번째 공연에서 관중들의 관심을 끌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죽으나 사나 관중들의 기호에 맞는 작품을 만드는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당시의 관중들은 로시니 스타일의 음악에 익숙해 있었고 로시니 음악을 잣대로 하여 새로 나오는 다른 음악들을 비교 평가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도니체티도 로시니 스타일의 음악을 모방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생각이 많은 젊은 도니체티는 과연 그렇게 해서 밥을 먹고 이름을 날려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베르가모에 돌아온 도니체티는 일단 오페라 작곡은 옆으로 밀어두고 기악곡이나 합창곡들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오페라에 대한 일종의 열정은 떨쳐 버릴수가 없었다. 도니체티는 교회음악을 작곡하면서 한편으로는 로마의 아르젠티나 극장장인 조반니 파테르니(Giovanni Paterni)와 연락하여 새로운 오페라 작곡에 대한 협상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1821년 6월 쯤해서 오페라 한 편을 작곡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Zoraida di Granata(그라나타의 초라이다)이다. 대본을 베르가모에서의 학교 친구인 바르톨로메오 메렐리가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도니체타가 어떤 경로로 로마의 아르젠티나 극장과 협상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수단 좋은 메렐리가 중간에 다리를 놓아서였는지, 또는 스승인 마이르가 도니체티를 위해 전부터 알고 지내던 파테르니에게 부탁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도니체티가 로마의 시인이며 오페라 대본가인 자코포 페레티(Jacopo Ferretti)를 소개받아 알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베르가모의 스승인 마이르가 소개해 주었다. 페레티는 나중에 도니체티를 위해 여러 편의 대본을 썼다.

 

베르가모의 도니체티 극장


1821년 10월에 도니체티는 '그라나타의 초라이다'의 첫 제작을 위해 로마에서 지냈다. 그때 도니체티는 바셀리라는 집안의 안토니오라는 청년과 친밀하게 지내게 되었다. 안토니오에게는 비르지니아라는 여동생이 있었다. 당시 13세의 비르지니아는 귀엽고 예쁘게 생겼으며 총명한 소녀였다. 청년 도니체티는 비르지니아를 마음에 두었다. 그리고 7년 후인 1828년 도니체티는 비르지니아와 결혼하였다. 도니체티가 31세 였고 비르지니아는 20세였다. 비르지니아는 도니체티와의 사이에서 세 자녀를 두었다. 불행하게도 도니체티의 자녀들은 모두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1837년에 비르지니아의 친정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비르지니아도 그 해에 역시 콜레라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비운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도니체티가 이미 그 때에 매독에 걸려 있었고 부인인 비르지니아도 감염되어서 세상을 떠났다는 주장이 있었다.

 

도니체티의 부인인 비르지니아 바셀리

 

이듬해 2월에 도니체티는 로마를 떠나서 나폴리로 갔다. 그로부터 도니체티는 나폴리에서 생애의 상당 기간을 산 카를로 극장(Teatro San Carlo)과 테아트로 누오보(Teatro Nuovo)와 인연을 맺으며 보냈다. 도니체티의 이름은 이미 나폴리에서도 잘 알려져 있어서 극장들과 얘기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나폴리의 조르날레 델 레뇨 델레 두에 시칠리에(Giornale del Regno delle due Sicilie) 신문은 도니체티를 소개하면서 "도니체티는 금세기에 가장 위대한 마에스트로인 마이르의 제자이다. 도니체티는 비록 젊은 나이이지만 이미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제 그의 영광을 우리도 함께 나누기로 했다. 그의 음악 스타일은 우리들에게 깊은 감명을 줄 것이다. 그는 로마에서도 더 할수 없는 찬사와 갈채를 받은바 있다."라고 썼다. 산 카를로의 극장장인 도메티코 바르바자가 이 기사를 보고 도니체티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도대체 어떤 청년일까?'라는 궁금증이었다. 이와 함께 산 카를로보다 작은 극장들인 테아트로 누오보와 테아트로 델 폰도(Teatro del Fondo)도 같은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 테아트로 누오보는 2월 말에 광고를 내고 그해 오페라 시즌에는 도니체티의 작품도 포함된다고 일단 선전했다. 5월 12일에 도니체티의 첫번째 새로운 오페라인 La Zingara(집시 여인)가 테아트로 누오보에서 무대에 올려졌다. '집시 여인'은 28회 연속 공연을 가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집시 여인'은 7월에 다시 시작하여 20회 공연을 더 가졌다. 나폴리의 신문들은 '집시 여인'에 대하여 찬사를 보냈다. 도니체티가 당시 21세의 음악도였던 빈첸초 벨리니를 처음 만난 것도 '집시 여인'의 나폴리 공연 때였다. 도니체티는 벨리니보다 4살 위였다. 그러니 동년배나 다름 없었다. 도니체티가 나폴리를 위해 작곡한 두번째 오페라는 단막의 코미디인 La lettera anonima(익명의 편지)였다. 역시 큰 호응을 받았다.

 

'집시 여인' 음반 표지

               

도니체티는 그해 8월에 한 편의 오페라를 더 작곡키로 하고 대본은 유명한 펠리체 로마니가 맡는 것으로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로마니는 다른 작곡가들로부터 대본을 맡은 것이 너무 많아서 도니체티의 오페라에 예정대로 대본을 맞추어 주지 못했다. 그래서 예정된 공연일로부터 불과 3주 전인 10월 초에 가서야 겨우 오페라를 완성해서 공연할수 있게 되었다. Chiara e Serefina(키아라와 세레피나) 또는 I pirati(해적)이라는 작품이다. 이 오페라는 출연키로 되어 있던 성악가들 중에서 몇 명이 별에 걸려 출연하지 못하게 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어쨋든 10월 3일 공연되었고 비록 좋은 평은 받지 못했지만 12회의 연속 공연을 가졌다. 이어 도니체티는 로마의 아르젠티나 극장과 계약을 맺어서 '조라이다'를 공연하되 페레티가 대본을 고쳐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원래 '초라이다'의 대본은 나폴리의 안드레아 레오네 토톨라라는 사람이 썼다. 도니체티는 대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심지어는 '이건 대사이라기 보다는 개가 짖는 것 같다'라고까지 혹평을 했었다. 페레티는 '초라이다'의 대본을 대폭 다시 쓰는 일을 맡은 이외에 도니체티를 위해 또 하나의 오페라 대본을 쓰기로 약속했다. 이번에는 테아트로 발레에서 공연할 오페라였다. L'ajo nell'imbarazzo(당황한 가정교사), 또는 Don Gregorio(돈 그레고리오)라는 작품이었다. 도니체티는 로마에서의 일들을 마친후 나폴리로 다시 돌아왔다.

 

'당황한 가정교사'의 한 장면

                 

나폴리에 돌아온 도니체티는 산 카를로를 위해 오페라 세리아 한편을, 테아트로 누오보를 위해 오페라 부파 한편을 작곡했다. 1823년 7월에 산 카를로에서 공연된 Alfredo il grande(알프레도 대왕)은 별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9월에 테아트로 누오보에서 공연된 2막의 코미디(farsa)인 Il fortunato inganno(행운의 사기)도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다. 고작 3회 공연으로 막을 내려야 했다. 도니체티는 나폴리에서의 두 오페라 공연을 어쨋든 마치고 곧바로 로마로 돌아갔다. 이듬해 1월에 아르젠티나 극장에서 '초라이다'의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도니체티는 '초라이다'의 로마 공연을 위해 오리지널에 다섯 곡을 새로 추가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추가했는데도 오리지널보다 덜 인기를 끌었다. 물론 대본은 페레티가 대폭 수정한 것이다. 페레티의 '초라이다' 대본은 그가 만든 여러 오페라 대본 중에서 베스트라고 할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공연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로마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은 한달 후인 2월에 초연을 가진 L'ajo nell'imbarazzo(당황한 가정교사)였다. 관중들이 어찌나 열광했던지 도니체티는 성공이란 것이 과연 이런 것이로구나를 비로소 실감했다고 한다.

 

'행복한 사기' 음반

 

1824년, 나폴리로 돌아온 도니체티는 영국 낭만주의 오페라에 처음으로 도전했다. 그 첫 작품이 오페라 세미세리아인 Emilia di Liverpool(리버풀의 에밀리아)였다. 이 오페라는 그해 7월에 테아트로 누오보에서 단 7회의 공연을 기록하였다. 조르날리 지는 평론을 통해서 이 오페라가 세미세리아 장르의 취약점을 보여준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도니체티 자신은 이 오페라의 음악을 '예쁘다'(Pretty)라고 표현했다. 이듬해인 1825년은 로마 가톨릭의 희년이었고 또한 나폴리 왕국의 페르디난드 1세가 서거했기 때문에 도니체티의 활동도 제약을 받을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신에 팔레르모에서 1825-26년 시즌의 음악감독 자리를 얻을수 있었다. 도니체티는 팔레르모에서 '당황한 가정교사'의 1824년도 버전을 무대에 올렸고 또한 새로운 오페라인 Alahor in Granata(그라나타의 알라호르)를 올릴수 있었다. 그러나 도니체티의 팔레르모 경험은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극장의 오페라 공연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했고 성악가들을 배치하는 것도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라나타의 알라호르'는 원래 1825년 11월쯤 공연할 예정이었으나 여러 사정상 다음 해 1월에야 무대에 올릴수 있었다. 도니체티는 팔레르모를 떠나 나폴리로 돌아왔다. 그해 여름 나폴리에서는 몇 작품이 성공을 거두었다. '당황한 가정교사'를 수정한 '돈 그레고리오'가 성공을 거두었고 한 달 후에 공연한 단막의 멜로드라마인 Elvida(엘비다)도 성공을 했다. '엘비다'는 두 시실리의 마리아 왕비의 생일을 위해 마련한 작품이었다.

 

도니체티에게는 1827-28년에 세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첫번째는 대본가 도메니코 질라르도니(Domenico Gilardoni)를 만나 함께 일하게 된 것이다. 질라르도니가 도니체티를 위해 첫번째로 쓴 대본은 Otto mesi in due ore 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1833년까지 지속되었다. 두번째의 사건은 나폴리의 임프레사리오인 바르바자가 도니체티에게 앞으로 3년간 12편의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하도록 위촉한 것이다. 이와 함께 도니체티는 나폴리 왕립극장의 음악감독자리를 맡게 되었다. 로시니가 맡았던 자리였다. 도니체티에게는 로시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왕립극장에 속하여 있으면서 다른 극장을 위해 오페라를 작곡할 자유가 주어졌다. 마지막 사건은 1927년에 도니체티가 비르지니아 바셀리와 약혼을 발표한 것이다. 비르지니아는 로마에 살고 있는 아가씨로서 도니체티가 약혼을 발표할 당시에 18세였다. 도니체티와 비르지니아는 1828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나폴리에 새 집을 얻어 신혼살림을 꾸렸다. 그로부터 두 달 후에 도니체티는 또 다른 오페라 세미세리아인 Gianni di Calais(칼레의 자니)를 완성했다. 대본은 질라르도니였다. 도니체타와 질라르도니의 네번째 합작품이었다. 이 오페라는 나폴리 뿐만 아니라 로마 등지에서도 성공을 거두며 공연되었다.

 


베르가모의 도니체티 기념조형물

 

[1830-38년의 국제적 명성]

도니체티는 1830년에 그의 이름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린 작품을 발표했다. Anna Bolena(안나 볼레나)였다. 1830년 12월 26일 밀라노의 카르카노 극장(Teatro Carcano)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타이를 롤은 당대의 소프라노 주디타 파스타가 맡았고 상대역인 퍼시는 역시 당대의 테너 조반니 바티스타 루비니(Giovanni Battista Rubini)가 맡은 초연이었다. '안나 볼레나'는 대인기를 얻었다. 1930년부터 1834년 사이에 이탈리아 전역의 중요한 극장에서는 거의 모두 '안나 볼레나'가 공연되었다. 이어 1840년대에는 유럽의 다른 도시들에서 공연되었다. 스토리의 주무대인 런던에서는 밀라노 초연 바로 다음 해인 1831년에 공연되었다. 아무튼 '안나 볼레나'로서 도니체티의 명성은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높이 치솟았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832년에는 도니체티 최대의 코믹 오페라인 L'elisir d'amore(사랑의 묘약)이 나왔다. '안나 볼레나'의 뒤를 이은 대성공작이었다. 혹자들은 '사랑의 묘약'이 19세기 오페라 부파 중에서 최대걸작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제 도니체티는 이탈리아 최고의 벨칸토 오페라 작곡가로서 위치를 굳건히 하게 되었다. '사랑의 묘약' 이후 도니체티의 열정은 활화산처럼 솟아 올랐다. 나폴리에서는 1831년에 Francesca di Foix(푸아의 프란체스카)와 La romanziera e l'uomo nero(흑인의 로맨스)가 공연되었고 1832년에는 Fausta(파우스타)가 공연되었다. 밀라노에서도 동시에 두 오페라가 공연되었다. 1831년에 Le convenienze ed inconvenienze teatrali(극장의 편리함과 불편함), 1832년에 Ugo, conte di Parigi(파리지 백작 우고)가 공연되었다. 로마에서는 1833년에 Il furioso all'isola di San Domingo(산 도밍고 이솔라의 분노)와 Torquato Tass(토르쿠아토 타소)가 공연되었다. 리보르노에서는 Otto mesi in due ore(e두 개의 황금 사이에 있는 오토)가, 플로렌스에서는 Parisina(파리지나)가 선을 보였다. 도니체티는 그야 말로 동분서주의 입장이었다.

 

도니체티의 또 다른 걸작인 Lucrezia Borgia(루브레치아 보르지아)는 1833년, 그 와중에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초연되었다. 도니체티의 명성은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로서 이젠 더 할 나위 없이 굳건해 졌다. 그러는 중에 도니체티는 이탈리아를 떠나 파리로 가서 활동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이탈리아에서는 당국의 검열이 심해서 오페라의 주제도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탈리아 오페라 관객들의 소란스럽고 지성적이지 못한 태도에 질려서 어디론가 도피를 하고 싶었는데 로시니와 벨리니도 이탈리아를 떠나서 파리에서 활동했던 것을 기억하고 그 발자취를 따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도니체티는 파리의 이탈리아극장에서 1835년에 Maria Faliero(마리아 팔리에로)를 초연하였다. 그런데 '마리아 팔리에로'는 벨리니의 '청교도'(I puritani)와 스토리가 비슷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해에 도니체티는 로마에서 '람메무오의 루치아'의 이탈리아어 대본에 의한 공연이 예정되어 있어서 그 공연을 감독하기 위해 다시 이탈리아에 발을 들여 놓았다. 이탈리아어 대본은 살바도레 카마나로가 맡았다. 카마라노는 이후 도니체티를 위해 8편의 오페라의 대본을 썼다. '람메무어의 루치아'는 스코틀랜드의 문호 월터 스콧 경의 '람메무어의 신부'(The Bride of Lammermoor)를 바탕으로 삼은 오페라이다. '람메무어의 루치아'는 도니체티의 수많은 오페라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람메무어의 루치아'는 벨칸도 오페라의 전성기를 장식한 정상의 작품이다. '람메무오의 루치아'는 벨리니의 '노르마'와 같은 수준의 작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의 피날레 장면


'루치아'(람메무어의 루치아)는 오페라의 장르로 볼 때 드라마 트라지코(dramma tragico)에 속한다. 벨칸토 오페라의 정상은 역시 코미디가 아니라 드라마 트라지코, 즉 비극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의 얘기이다. 도니체티는 드라마 트라지코로서 당시 벨칸토 오페라의 정상을 차지하였다. 작품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마침 당시에 로시니는 이미 은퇴를 선언하여서 고향집으로 낙향한 입장이었고 벨리니는 젊은 나이에 '루치아' 이전에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도니체티가 이탈리아 오페라의 리더로서 남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유럽에서는 바다 저 쪽의 한 구석에 있는 스코틀랜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관심들이 높아지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인들의 자유를 향한 전쟁, 가문간의 원한으로 인한 갈등, 이에 따른 원수 집안 젊은이들의 로맨스, 여기에 전설과 신화까지 곁들인 이야기는 유럽 본토 사람들에게 흥미를 안겨주는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월터 스콧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조합하여서 소설로서 엮어 냈다.

 

'람메무어의 루치아'. 비엔나 슈타츠오퍼. 안나 네트렙코

 

유럽 사람들은 스코틀랜드 뿐만 아니라 영국의 튜도 왕조에 대하여도 관심이 많았다. 특히 헨리 8세와 그의 여섯 부인들, 블라디 메리라고 불리는 잉글랜드의 메리 1세, 앤 볼레인의 딸로서 여왕이 된 엘리자베스 1세, 그리고 비운의 메리 스투어트(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에 대한 이야기는 유럽 본토 사람들이 좋아하는 주제였다. 이같은 배경 아래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역사적인 인물들은 도니체티 오페라의 주인공들로서 자주 등장하였다. '안나 볼레나' 전후를 통해서 그런 오페라들이 여러 편이나 등장했다. Elisabetta al castello di Kenilworth(케닐워스 성의 엘리사베타)는 외진 스크리브의 대본 Leicester(레이체스터)와 빅토르 위고의 Amy Robsart(에이미 로브사트)를 바탕으로 삼은 오페라이다. 이어서 쉴러의 희곡을 바탕으로 삼은 Maria Stuarda(마리아 스투아르다)가 나와서 1835년 12월에 라 스칼라에서 초연을 가졌다. 이어 '도니체티의 세명의 여왕 시리즈'에서 세번째에 해당하는 Roberto Devereux(로베르토 드브러)를 내놓았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에섹스 경 로버트 드브러와의 관계에 대한 스토리이다. '로베르토 드브러'는 1837년 10월 나폴리의 산 카를로에서 초연되었다. 이 모든 드라마 트라지코로 인하여 도니체티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여러 극장으로부터 작곡 의뢰가 줄을 잇게 되었다. 예를 들면 참으로 오랫만이 베니스의 라 페니체를 위해서 Belisario(벨리사리오)를 만들었고 파리 오페라로부터도 작곡 의뢰를 받은 것이다.

 

'안나 볼레나'. 바르셀로나 리체우 무대

               

도니체티는 1838년 10월에 나폴리를 떠나 파리로 향하였다. 도니체티는 다시는 나폴리를 위해서 어떤 작품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왜냐하면 당시 나폴리 왕은 도니체티가 산 카를로에서 Poliuto(폴리우토)를 공연하려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나폴리 왕은 성스러운 주제를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면서 '폴리우토'를 금지했다. 도니체티는 파리 오페라에서 '폴리우토'를 Les martyrs(순교자)라는 타이틀로 바꾸어 공연할수 있었다. 1840년 4월에 파리 오페라에서 초연된 '순교자'는 도니체티가 처음으로 시도한 프랑스 스타일의 그랜드 오페라였다. 대성공이었다. 그후 도니체티는 1840년 파리를 떠날 때까지 Lucia di Lammermoor의 프랑스어 버전인 Lucie de Lammermoor의 파리 공연을 돌보았고 또한 La fille du regiment(연대의 딸)을 완성했다. '연대의 딸'은 도니체티가 프랑스어 대본을 사용한 첫 오페라였다. '연대의 딸'도 '루치아'에 버금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연대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