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베르가모의 도니체티

도니체티와 마이르

정준극 2014. 11. 8. 09:11

도니체티와 마이르

도니체티를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로 이끌어준 스승

 

요한 시몬 마이르

 

누구에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해 준 사람이 한 사람쯤 있기 마련이다. 위대한 작곡가의 경우에도 그런 사람들을 간혹 찾아 볼수 있다. 예를 들어서 베르디에게는 부세토의 안토니오 바레찌라는 사람이 있었다. 청년 베르디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하고 밀라노에 가서 음악공부를 하도록 도와 준 사람이었다. 만일 바레찌의 격려와 후원이 없었더라면 베르디는 아마 부세토라는 작은 도시에서 작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일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베르디는 나중에 바레찌의 딸인 마르게리타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마르게리타는 베르디의 성공을 보지 못하게 세상을 떠났다. 푸치니는 작곡가인 에밀카레 폰키엘리의 지도와 도움을 많이 받았다. 폰키엘리는 푸치니가 오페라를 작곡하도록 격려하였고 푸치니의 오페라가 공연될수 있도록 주선도 해주었다. 만일 폰키엘리의 격려와 도움이 없었더라면 푸치니는 루카에서 음악선생이나 하며 평생을 지냈을지도 모른다. 도니체티에게는 요한 시몬 마이르(Johann Simon Mayr: 1763-1845)가 있었다. 보통 시몬 마이르 또는 이탈리아 식으로 시모네 마이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독일 바바리아 출신이다. 마이르는 바바리아에서 음악과 함께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1802년에 베르가모 대성당의 지휘자 겸 음악감독의 자리를 맡게 되어 고향 잉골타트를 떠나 베르가모에 와서 살기 시작했다. 마이르는 뛰어난 오페라 작곡가였다. 무려 70여 편의 오페라를 남겼다. 거의 모두 베르가모에 있으면서 작곡한 것들이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오늘날 스탠다드 레퍼토리에 포함될 정도의 작품은 거의 없다. 아무튼 도니체티에게 마이르의 격려와 후원이 없었더라면 아마 도니체티는 고향마을인 베르가모에서 아버지와 함께 직물공장의 노동자로 평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마이르는 훌륭한 음악교육자이기도 했다. 뜻한바 있어서 대성당(바실리카 산타 마리아 마지오레)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음악학교를 설립했다. Lezioni Caritatevoli(레치오니 카리타테볼리: 자선학교)라는 학교였다. 대성당 소년성가대원들을 위한 학교로 시작했으나 음악공부에만 국한하지 않고 일반 문학 공부도 시켰다. 자선학교이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정식 학교에 다닐수 없는 어린이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물론 이 학교의 어린이들은 거의 모두 대성당의 소년성가대원으로 활동했다. 공부시켜주고 먹여주고 재워주므로 가난한 집 아이들은 이 학교에 들어가고 싶어했다. 게타노 도니체티의 아버지인 안드레아는 아들 셋과 딸 셋을 두었는데 게타노 도니체티는 아들 중에서 막내였다. 안드레아는 맏아들인 주세페와 막내 아들인 게타노를 학비 걱정이 없는 마이르의 자선학교에 들여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맏아들 주세페는 그때 이미 18세였으므로 너무 나이가 많아서 입학하지 못했고 9살인 게타노 만이 들어갈수 있었다. 그때가 1807년이었다. 도니체티는 마이르의 학교에 들어가서 첫 석달동안 시험기간을 거쳤다. 소년성가대원으로서 자질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기간이었다. 미안한 얘기지만 도니체티는 우수한 성가대원이 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푸가와 대위법 등을 가르쳤더니 놀랍게도 이해가 빨랐다. 도니체티가 노래를 잘 부르지 못했던 것은 핑게 같지만 그때 후두염(diffetto di gola)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이르는 도니체티의 전반적인 음악적 재능을 간파하고 계속 자선학교에 머물러 있도록 주선했다. 그때 만일 마이르가 도니체티의 음악적 재능을 무시하고 학교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그가 남겨 놓은 위대한 벨칸토 오페라들을 듣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도니체티는 마이르의 자선학교에서 1815년까지 9년을 지냈다. 그런 중에 도니체티가 자선학교를 떠날 뻔 했던 때도 있었다.

 

1809년에 도니체티는 변성기가 되어서 더 이상 소년성가대원으로 노래부르기가 어렵게 되었다. 대성당의 소년성가대 연습지휘자는 마이르에게 도니체티가 더 이상 성가대원으로 활동할수 없다고 보고했다. 마이르는 이듬해인 1810년에 도니체티를 지방예술학교인 Academia Carrara(아카데미아 카라라)에 들어가서 작곡공부를 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런데 도니체티가 과연 이 예술학교에 다녔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대신, 마이르의 자선학교에 계속 남아 있었다는 기록은 있다. 그러는 중에 1811년 마이르는 다시 한번 도니체티를 배려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때 마이르는 Il piccolo compositore di musica(일 피콜로 콤포시토레 무지카: 어린 작곡가)라는 일종의 오페라를 작곡하고 자선학교의 어린 학생 다섯명으로 출연진을 삼은 일이 있다. 이 오페라는 장르로서 보면 화르사(farsa: 익살극)이었으며 형태로 보면 마이르 뿐만이 아니라 다른 작곡가들도 음악을 기여한 파스티치오(pasticcio)였다. 아무튼 마이르는 이 오페라의 다섯 명 출연진 중에 도니체티를 주역인 '어린 작곡가'로 선정했다. 마이르는 도니체티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하여 도니체티가 음악공부를 더 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고 그에게 오페라에 대한 인식을 심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14세에 불과했던 도니체티가 마이르의 오페라에서 부른 아리아의 가사는 '아, 축제의 신 바커스여, 나는 이 아리아로서 세상의 모든 박수를 받게 되리라. 사람들은 나에게 '브라보, 마에스트로여'라고 소리칠 것이리라. 그러면 나는 아주 공손한 자세로 머리를 숙여 답례하리라. 신문마다 나에 대한 찬사가 넘치리라. 나는 어떻게 해야 내 자신이 영원한 인물이 될지 알고 있도다'라는 내용이다. 어린 작곡가(도니체티)가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나면 나머지 네 명의 출연자들이 어린 작곡가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그러면 어린 작곡가는 '나의 작곡 재능은 마치 천둥번개와 같이 순식간이며 환상적이다'라고 자랑스럽게 대꾸를 한다. 마이르의 오페라에는 왈츠도 나온다. 도니체티가 왈츠를 연주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왈츠의 가사도 도니체티에게 일임했다. 아무튼 비록 정상적인 오페라에 비해서 보잘것 없는 작품에 불과하지만 도니체티는 마이르의 속 깊은 배려로 이 오페라에 출연하여서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꿈과 이상을 갖게 된다.

 

그런 공연이 있은 후 2년 동안 도니체티는 과연 앞날에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결정을 하지 못하며 불안정한 시간을 보냈다. 도니체티의 아버지는 음악이고 무어고 때려 치우고 돈벌이를 해서 집안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도니체티는 베르가모에서 상당히 알려진 음악인물이 되었다. 자꾸 시간이 지날수록 도니체티의 음악적 재능이 발굴되었던 것이다. 마이르는 도니체티의 아버지인 안드레아를 만나서 도니체티가 훌륭한 음악가가 되기 위해서는 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마이르는 배르가모에 있는 Congregazione di Carita 라는 자선단체로부터 도니체티가 음악공부를 계속한다면 2년 동안 학비 전액을 부담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마이르는 도니체티에게 볼로냐에 가서 음악공부를 계속하라고 말했다. 당시에 볼로냐는 음악활동이 뛰어났던 도시였다. 마이르는 도니체티를 위해 악보 출판가인 조반니 리코르디에게 도니체티를 잘 부탁한다는 추천장을 써 주었다. 마이르의 추천장이라고 하면 무시할수 없었던 때였다. 마이르는 또한 도니체티가 볼로냐에서 거처할 숙소를 위해 프란체스코 삼피에리라는 귀족에게도 소개장을 써주었다. 그리하여 도니체티는 리체오 무지칼레(Liceo Musicale)에서 저명한 음악교사인 스타니슬라오 마테이(Stanislao Mattei) 신부로부터 음악구조 등에 대하여 본격적인 레슨을 받게 되었다.

 

도니체티가 잠시 다녔던 볼로냐의 음악학교(Liceo musicale)

 

볼로냐에서 공부하기 시작한 도니체티는 스승인 마이르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1816년에 완성한 '피그말리온'(Il pigmalione), 1817년에 미완성으로 남겨 놓은 '올림피아데'(Olympiade)와 '아킬레의 분노'(L'ira d'Achille)는 비록 당장 극장에서 공연되지는 못했지만 10대의 학생 작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훌륭했다. 물론 스승인 마이르의 지도와 조언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수준으로 보면 정규 오페라에 손색이 없는 것들이었다. 도니체티의 첫 오페라인 '피그말리온'은 그의 생전에 공연되지 못하였다. '올림피아데'와 '아킬레의 분노'는 미완성이기 때문에 당시에는 물론 현재까지도 공연되지 못하였다. 1817년에 도니체티는 스승인 마이르의 요청으로 베르가모로 돌아왔다. 도니제티 자신도 볼로냐에서 아무런 성공을 기대할수 없다고 생각했던 터였기에 스승의 권유에 따라 베르가모로 돌아갔다. 베르가모에 돌아온 도니체티는 이번에는 오페라 대신에 피아노 곡과 현악 4중주곡에 더 열심을 보였다. 그리고 현악 4중주단의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다. 도니체티는 이같은 활동을 통해서 음악적 시야를 높일수 있었다. 시몬 마이르는 1845년 베르가모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소는 베르가모의 산타 마리아 대성당 안에 마련되었다. 마이르가 세상을 떠난지 3년 후인 1848년에는 도니체티도 베르가모에서 세상을 떠났다. 도니체티의 묘소는 마이르 묘소의 바라 옆에 마련되었다.

 

시몬 마이르가 음악감독 겸 지휘자로 있었던 베르가모의 산타 마리아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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