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베르가모의 도니체티

파리, 비엔나, 밀라노, 나폴리

정준극 2014. 11. 14. 07:01

파리, 비엔나, 밀라노, 나폴리

유럽을 주름잡았던 도니체티

 

도니체티는 파리에서 지내다가 1840년에 이탈리아에서 해야 할 일들이 궁금해서 돌아갔다. 당시 도니체티는 여러 이탈리아의 극장으로부터 모두 10편의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생각나는 대로 작곡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어떤 것은 도니체티의 생전에 공연되지 못한 것도 있다. 밀라노에 도착한 도니체티는 Le fille du regiment의 이탈리아어 버전을 준비하였다. 도니체티는 그 일을 마치자 곧바로 파리로 돌아갔다. 그 전해에 완성해 놓았던 L'ange de Nisida(니시다의 천사)의 프랑스어 버전인 La favorite(라 화보리트)의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라 화보리트'는 파리에서 1840년 12월 초에 초연되었다. '라 화보리트'의 초연이 있은지 며칠 후 그는 다시 밀라노로 급히 갔다. 크리스마스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크리스마스를 보낸 그는 곧이어 아무튼 무슨 역마살이 그렇게도 끼었는지 또 파리로 갔다. 이듬해인 1841년 2월까지는 Rita(리타 또는 두 남자와 한 여인)를 완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리타'는 예정대로 공연되지 못하고 1860년에 가서야 비로소 초연을 가졌다. 그후 도니체티는 또 다시 밀라노로 갔다. 밀라노에서는 주세피나 아피아노 스트린젤리라는 여인의 집에 머물렀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부인 마르게리타가 세상을 떠난후 아마 처음으로 가정적인 분위기를 맛보며 지냈던 것 같다. 밀라노에서 도니체티는 라 스칼라에서의 Maria Padilla(마리아 파딜라)의 초연을 돌보았으며 비엔나를 위한 Linda di Chamounix(샤무니의 린다)의 작곡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샤무니의 린다'는 비엔나의 합스부르크 황실이 위촉해서 작곡을 시작한 것으로 1842년 3월 말에 비엔나에서 초연이 예정되어 있어서 서둘러야 했다. 이와 함께 도니체티는 비엔나 궁정극장에서 일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라 화보리타'(라 화보리트)의 한 장면

 

도니체티는 비엔나로 가기 전에 잠시 시간을 내어 볼로냐에서 로시니의 Stabat Mater(성모애상)의 초연을 지휘했다. 1842년 3월 중순이었다. 도니체티는 볼로냐에서 로시니의 '성모애상'을 세번이나 지휘했다. 로시니는 도니체티가 자기의 '성모애상'을 훌륭하게 지휘했다는 얘기를 듣자 세번째 연주회에는 직접 참석했다. 이때가 도니체티와 로시니가 처음 만난 때였다. 실은 두 사람 모두 볼로냐음악원 출신이다. 그래서 비록 로시니가 도니체티보다 다섯 살이나 위이지만 두 사람의 만남은 마치 오랜 친구처럼 각별한 것이었다. 도니체티가 지휘하는 '성모애상'을 들은 로시니는 자기의 '성모애상'을 자기의 의중에 따라 지휘할수 있는 사람은 이탈리아에서 도니체티 한 사람 밖에 없다고 선언하면서 도니체티를 극그 칭송했다. 볼로냐에는 그의 오랜 친구로서 처남이 되는 안토니오 바셀리가 살고 있었고 다른 친구들도 여러 명이나 살고 있었다. 안토니오를 비롯한 도니체티의 친구들은 도니체티에게 이제 그만 객지 생활을 하고 볼로냐에 정착해서 후진들이나 양성하며 지내라고 강권하였지만 도니체티의 방랑벽은 막을수 없었다. 도니체티는 1842년 4월 초에 비엔나에 도착했다. 로시니의 추천장을 하나 간직하고 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걸 최대한으로 활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도니체티는 비엔나에서 '샤무니의 린다'의 리허설에 관여하였다. '샤무니의 린다'는 비엔나의 캐른트너토르극장(현재의 자허호텔 자리에 있었음)에서 그해 5월에 초연을 가졌다. 대단한 성공이었다. 이와 함께 도니체티는 벌써부터 얘기되어 있었던 비엔나 궁정교회의 음악감독 겸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한때 모차르트가 맡아했던 직책이었다.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성모애상). 도니체티가 볼로냐에서 초연을 지휘했다.

 

도니체티는 1842년 7월에 비엔나를 떠나 밀라노와 베르가모를 찾아갔다. 고향 베르가모를 찾아간 것은 스승인 마이르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하지만 실은 도니체티의 병세가 더욱 심각해지기 시작한 때였다. 베르가모에서 오랜만에 스승 마이르를 만나 회포를 풀었던 그는 이어 나폴리로 갔다. 나폴리는 도니체티에게 쓰라린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사랑하는 아내 마르게리타가 1837년에 세상을 떠난 곳이고 그 전에는 그의 세 아이들도 세상을 떠난 곳이기 때문이다. 도니체티는 1838년에 나폴리를 떠나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4년만에 다시 찾아간 것이다. 우선 산 카를로 극장과 해결하지 못한 계약건이 있었고 또 하나는 그가 살던 집을 처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나폴리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며칠씩이나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병세가 조금 호전이 되나 싶자 '마리아 파딜라'와 '샤무니의 린다'의 이탈리아어 번역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러면 안된다고 하자 그는 '하나님은 내가 무슨 일을 할수 있는지 알고 계시다'라며 걱정들 하지 말라고 말했다. 도니체티는 1842년 9월에 파리로 돌아갔다. 건강이 나빠진 것을 알면서도 움직일수 있을 때에 열심히 움직이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그는 파리에서 두 편의 이탈리아어 오페라의 수정본을 만들었다. 그럴 때에 파리의 이탈리아극장의 새로운 감독으로 취임한 쥘르 자냉(Jules Janin)이란 사람이 도니체티에게 이탈리아극장을 위해 새로운 오페라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샤무니의 린다'

 

쥘르 자냉의 아이디어는 도니체티가 오페라 부파를 작곡하되 당시 파리에서 크게 활동하고 있던 줄리아 그리시(Giulia Grisi), 안토니오 탐부리니(Antonio Tamburini), 루이지 라블라세(Luigi Lablache) 등이 출연하는 것으로 고려해서 음악을 만들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코믹 오페라인 Don Pasquale(돈 파스쿠알레)였다. 무려 3개월이나 공연이 계속된 대성공이었다. 도니체티는 '돈 파스쿠알레'의 공연을 준비하면서 갑자기 살바도레 카마라노가 주세페 릴로를 위해 쓴 Il conte di Chalais(샬레의 백작)이라는 오페라를 수정해서 새로운 오페라로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했다. '샬레의 백작'은 1839년에 공연되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한 작품이었다. 도니체티는 '샬레의 백작'을 바탕으로 해서 불과 24시간 만에 Maria di Rohan(로한의 마리아)라는 오페라를 만들었다. 아마 도니체티가 만든 오페라 중에서 가장 짧은 시간에 완성한 작품일 것이다. 도니체티가 또 다른 작품으로 구상한 것은 외진 스크리브의 대본에 의한 Dom Sebastien, roi de Portugal(포르투갈의 왕 돈 세비스티앙)이었다. 1843년 11월에 파리에서 초연을 갖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돈 파스쿠알레' 현대식 연출. 도니체티 최고의 코믹 오페라. 하인들의 합창의 장면.

 

도니체티는 1843년에 들어서서 매독(syphilis)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아울러 정신착란(bipolar disorder) 증세도 보였다. 매독이 심해지면 뇌에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니체티는 자기가 아직도 생각하고 움직일수 있을 때에 할수 있는 일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파리에서 '돈 파스쿠알레' 등으로 대성공을 거두어 이제는 조용히 지낼수도 있었지만 다시 마음을 정리하여 비엔나로 향하였다. 도니체티는 아마 마지막 생각인지 모르지만 비엔나에서는 프랑스 드라마 한편을, 나폴리에서는 오래전부터 계획하였던 Ruy-Blas(루이 블라)를 완성하는 일을(결국은 시작도 하지 못했음),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를 위해서는 벨기에 주제의 오페라를, 그리고 파리 오페라를 위해서도 무언가 한 편의 오페라를 작곡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파리 오페라를 위해서는 포르투갈 주제의 오페라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국 Dom Sebastien이 완성되었고 11월 중순에 초연을 가질수 있었다. 전 5막의 그랜드 오페라였다. 그러나 2월 초에가서 그는 자기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나폴리와의 약속 때문에 나폴리에서 1844년 1월에 공연 예정으로 Caterina Cornaro(카테리나 코르나로)의 작곡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카테리나 코르나로'는 예정대로 나폴리에서 공연되었으나 작곡자인 도니체티는 건강문제로 참석하지 못했다. 오페라 코미크를 위해서는 Ne m'oubliez moi 라는 작품을 추진하였으나 역시 건강상의 문제로 취소하지 않을수 없었다.

 

도니체티는 나폴리의 산 카를로와의 계약도 파기할수 밖에 없었고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와의 계약도 파기할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비엔나가 남아 있었다. 비엔나에서 도니체티의 임무는 1845년 5월부터 시작되는 캐른트너토르 극장의 이탈리아 오페라 시즌을 돌보아 주는 것이었다. 비엔나의 이탈리아 오페라 시즌에는 베르디의 '나부코'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니체티는 '나부코'를 1842년 3월에 밀라노에서 보고 대단한 감동을 받은 일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나부코'를 그가 직접 감독하게 된 것이다. 비엔나에서의 임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로한의 마리아'의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비엔나의 이탈리아 오페라 시즌은 도니체티의 '샤무니의 린다'로서 시작되었고 이어 베르디의 '나부코'가 공연되는 것으로 장식되었다. 모두 대성공을 거두었다. '나부코'는 베르디의 오페라로서는 비엔나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이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오페라 시즌에는 도니체티의 '돈 파스쿠알레'도 포함되었고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도 포함되었다. 마지막으로 '로한의 마리아'가 공연되었다. 도니체티는 친구 안토니오 바셀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장난 삼아서 이렇게 썼다. '어제 밤에 <로한의 마리아>가 공연되었는데 참으로 슬프게도 출연했던 성악가들 모두의 뛰어난 재능은 내가 받은 찬사와 갈채에 미치지 못하였다. 모든 것이 다 잘 진행되었다. 모든 것이!'라고 썼다. 말하자면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선언이었고 대만족이라는 얘기였다.

 

'로한의 마리아'

 

도니체티는 비엔나에서의 이탈리아 오페라 시즌이 끝나자 마자 7월에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파리에 돌아오자 마자 '동 세바스티앙'의 완성을 서두르지 않을수 없었다. '동 세바스티앙'은 도니체티의 오페라 중에서 가장 긴 오페라였고 또한 가장 긴 시간을 들여서 완성한 작품이었다. 첫 공연은 파리 오페라에서 11월 13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다음 날 저녁에는 '로한의 마리아'가 파리의 이탈리아 극장에서 예정되어 있었다. 파리는 그만큼 도니체티에 대하여 열광이었다. 두 공연 모두 대성공이었다. 그해(1844) 12월에 그는 다시 비엔나로 갔다. 파리의 친구들은 도니체티의 건강을 생각해서 구태여 비엔나에 갈 필요가 어디 있느냐면서 가지 말라고 권고했지만 그는 병세가 완연한데도 불구하고 비엔나로 향하였다. 비엔나의 사람들은 도니체티의 건강 상태가 매우 열악하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더구나 도니체티는 가끔씩 정신을 놓고 멍하니 있는 경우도 있어서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당시 도니체티는 파리 오페라와 이듬해 초에  공연할 오페라 한편을 작곡한다는 계약을 맺은바 있다. 도니체티는 파리 오페라에 연락해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우니 다른 작곡가를 찾아보라고 제안했다. 그때 마이에르베르의 Le Prophete(예언자)도 파리 오페라에서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도니체티는 자기의 새로운 작품 대신에 '예언자'가 공연되기를 내심으로 바랐다. 5월이 되어 그는 터키에 있는 동생에게 편지를 보내어 파리로 와서 함께 이탈리아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동생 주세페는 1828년부터 오토만 제국 황실의 마무드 2세 술탄에게 봉사하고 있었다. 파리 오페라는 도니체티의 새로운 작품을 1845년 11월에 공연하는 것으로 연기해 주었다.

 

도니체티는 1844년 비엔나의 이탈리아 오페라 시즌에도 봉사해 줄것을 약속한바 있다. 도니체티는 비록 건강이 좋지 않지만 약속을 했으므로 비엔나로 갔다. 이탈리아 오페라 시즌에는 벨리니의 '노르마'와 도니체티의 '샤무니의 린다', '돈 파스쿠알레' 그리고 베르디의 '에르나니'가 비엔나 초연을 갖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도니체티는 5월 30일에 '에르나니'의 비엔나 초연을 지휘했다. 결과는 베르디의 다음과 같은 따듯한 편지로 표현되었다. 베르디는 도니체티의 지휘에 감사하다는 내용을 적었고 편지의 말미에 '당신을 가장 깊이 존경하는 당신의 가장 헌신적인 종 베르디가 보냅니다'라고 썼다. 베르디가 이정도로 겸손한 표현을 했다는 것은 그가 진실로 도니체티를 존경했다는 것을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한편, 도니체티의 동생인 주세페는 터키의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떠나 6월 초에 비엔나에 도착했다. 주세페가 비엔나에 와서 보니 형 게타노(도니체티)의 건강이 생각보다 훨씬 위중하였다. 두 사람은 며칠을 더 지체하다가 마침내 다음달인 7월 중순에 조심조심해서 베르가모로 출발하였다. 두 사람이 베르가모에 도착한 것은 비엔나를 떠난 날로부터 7-8일 후였다. 그후 1844년의 하반기는 그야말로 '애처로운 안절부절'이었다. 도니체티는 베르가모에 정착해서 건강을 돌보지 않고 그저 일을 위해서 이곳저곳으로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마치 백조가 마지막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았다. 사람들은 그런 도니체티를 보고 안타깝고 동정적인 마음을 가졌다.

 

게타노 도니체티의 동생 주세페 도니체티. 오토만 터키 황실의 고위직을 맡아했다.

 

도니체티가 1844년 여름과 가을에 어디를 얼마나 여행했느냐는 것은 다음과 같다. 건강도 좋지 않는 마당에서 그렇게 돌아 다녔으니 무리가 가도 대단히 갔을 것이다. 도니체티는 베르가모에서 약 26 마일 떨어진 이세오 호반의 로베레라는 마을에서 며칠을 지내다가 다시 베르가모로 돌아왔다. 이어 7월 31일에는 밀라노에 갔다. 이어 8월 3일에는 친구 안토니오 돌치와 함께 제노아로 갔다. 이곳에서 병세가 악화되는 바람에 예정보다도 오래인 8월 10일까지 머물렀다. 이어 배를 타고 나폴리로 갔다. 도니체티는 나폴리에서 로마에 있는 친구 안토니오 베셀리에게 편지를 보내고 로마를 가려고 하는데 아마 그를 만나는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썼다. 도니체티는 9월 14일 친구 안토니오를 만나기 위해 로마로 갔다. 잘 아는 대로 안토니오는 세상 떠난 도니체티의 부인 마르게리타의 오빠이다. 10월 2일에는 나폴리로 돌아왔다. 산 카를로에서 '로한의 마리아'를 11월 11일에 공연키로 되어 있어서 그 관계로 나폴리로 돌아왔던 것이다. 산 카를로에서의 '로한의 마리아'는 엄청난 성공이었다. 이어 11월 14일에는 기선을 타고 제노아로 떠났다. 나폴리에서 제노아까지 무려 닷새가 걸려서 11월 19일에나 도착했다. 며칠후 다시 밀라노로 갔다. 이틀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베르가모에 11월 23일 돌아왔다. 베르가모에 돌아온 도니체티는 스승 겸 친구인 시몬 마이르가 중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예정보다 며칠 더 베르가모에 머물면서 되도록이면 마이르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도니체티는 11월 말에 베르가모를 떠나 비엔나로 향했다. 마이르는 그로부터 며칠 후인 12월 2일에 세상을 떠났다.

 

도니체티는 12월 5일에 비엔나에 도착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건강이 좋지 않다. 의사의 손에 맡기도 있다'고 썼다. 사람들은 도니체티가 아무런 소리 없이 조용히 지내고 있으니까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도니체티는 절망 중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또 다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몸은 거의 반이나 망가져있다. 그런데 내가 두 발로 서 있다니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다'라고 썼다. 1845년에 접어 들어서도 도니체티의 상태는 호전될 것 같지 않았다. 파리에서 '동 세바스티앙'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지만 도니체티는 그것을 기뻐할 여유도 없었다. 도니체티는 런던으로부터의 작곡 의뢰도 거절할수 밖에 없었다. 파리의 이탈리아 극장도 도니체티에게 새로운 오페라의 작곡을 부탁했다. 이탈리아 극장은 임프레사리오인 바텔을 직접 비엔나에 보내어 도니체티에게 상당히 좋은 조건으로 오페라 작곡을 의뢰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도니체티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자기의 건강이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다. 1845년 중반쯤 해서는 밖에 나돌아 다니는 일도 힘들었다. 4월에는 비엔나에서 베르디의 I due Foscari(두 사람의 포스카리)가 초연되었지만 도니체티는 첫날 공연을 가보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네번째 공연 때에 겨우 기운을 차려서 구경을 갔었다. 도니체티는 5월 말쯤해서 마침내 비엔나를 떠나 파리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한다.

 

파리에 온 도니체티는 점점 오한과 두통이 나고 심지어 구토까지 하는 심한 지경에 이르른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제대로의 치료를 한번도 받지 않았다. 사실 그런 증세는 거의 10년 전부터 그랬었고 파리에 돌아온 1845년 여름에는 그 정도가 심해졌을 뿐이다. 그러다가 주위의 친구들이 도저히 참을수가 없어서 도니체티가 병원에서 특별 검진을 받도록 했다. 매독이 뇌조직까지 침투한 것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심한 정신질환도 경험하였던 것이다. 매독전문의인 리코르 박사는 도니체티가 당장 모든 일을 중지해야 한다고 말하고 약물 치료를 병행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안정을 위해 요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아울러서 아무래도 파리 보다는 기후가 좋은 이탈리아에 가서 지내는 것이 건강을 회복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겨울에 여행을 하는 것은 좋지 않으므로 내년 봄까지 기다렸다가 이탈리아로 가라고 권유했다. 멀리 콘스탄티노플에서 도니체티의 건강상태를 걱정하던 동생 주세페는 자기의 아들 안드레아를 파리로 보내어 삼촌인 도니체티를 특별히 보살펴 주도록 했으며 이와 함께 필요하다면 특수병원에 입원시키라고 지시했다. 파리에 온 안드레아는 도니체티와 함께 호텔 만체스터에 묵으면서 여러가지 조치를 강구하였다. 1846년 새해가 되었다. 1월 달에 전문의들은 도니체티의 건강에 대한 보고서를 내고 '어떤 결정을 할수 없을 정도의 정신상태'이므로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결론 지엇다. 이제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요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정신병원에 수용토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더구나 덜컹거리는 마차를 타고 파리에서 머나먼 베르가모로 며칠 씩이나 걸려서 가는 것은 병세를 더욱 악화시킬수 있는 일이므로 당장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것은 무리라고 입을 모았다. 또한 의사들은 병세가 더욱 악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치료도 병행하기 위해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했다.

 

도니체티의 조카 안드레아는 삼촌 도니체티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기로 결심했다. 다만, 도니체티에게는 정신적인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서 사실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마침 마땅한 시설이 하나 있었다. 온천장처럼 생각되는 곳이었다. 겉으로 보면 마치 시골집처럼 생긴 곳이지만 의료시설이 잘 되어 있는 곳이었다. 안드레아는 도니체티에게 비엔나로 가는 것이라고 하면서 함께 마차를 타고 파리를 떠났다. 그런데 마침 도니체티는 비엔나의 캐른트너토르 극장과의 약속에 따라 2월 12일까지는 비엔나에 가서 일을 보아야 했다. 또 한 대의 마차에는 주치의인 리코르 박사가 타고 따라갔다. 파리를 떠난지 서너시간 쯤 지나서 이들은 파리 교외의 세이느강변에 있는 이브리 쉬르 세이느의 메종 에스퀴롤(Maison Esquirol)이라는 농가처럼 생긴 저택에 도착했다. 도니체티에게는 마차를 수리해야 할 일이 생겨서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 집은 아주 편안한 여인숙이라고 소개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자 도니체티는 자기가 아무래도 어떤 시설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파리의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급히 써서 보냈다. 하지만 그 편지는 안드레아가 단속하여서 결코 전달되지 못하였다. 그렇게하여 도니체티는 어쩔수 없이 시설에서 몇 달을 보내야 했다. 파리에서 친구들이 면회를 오기도 했다. 친구들은 시설의 직원들이 도니체티를 아주 편하게 대하여 주고 있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도니체티도 마음을 정리하고 하자는 대로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치료는 효과가 있기도 했지만 그러다가 원래대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렇게해서 5월이 되었다. 안드레아는 아무래도 도니체티를 이탈리아로 데려가서 지내야 할 것같다고 생각했다. 날씨 때문이었다. 의사들도 지체없이 이탈리아로 떠날 것을 권고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도니체티는 매독환자이고 정신병 환자이기 때문에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날수 있었다. 파리 경찰은 도니체티가 과연 여행을 해도 좋을지를 결정하기 위해 다시 한번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결과, 경찰청 소속의 의사들은 도니체티가 여행을 떠나면 병세가 더욱 악화되고 위험해 질 것이므로 가지 않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안드레아는 파리에 남아 있는 것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우선 자기가 베르가모로 가서 모든 것을 준비하기 위해 9월초에 베르가모로 떠났다. 이때 안드레아는 아직은 미완성인 Le duc d'Albe(알바 공작)의 악보와 완성된 Rita(리타)의 악보를 가지고 갔다. 어느덧 해가 바뀌어 1847년이 되었다. 1월에 파리에 살고 있는 도니체티의 친구인 에두아르 폰 라노이 남작이 베르가모의 안드레아를 찾아왔다. 라노이 남작은 도니체티의 병세가 도무지 호전되지 않으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말하면서 동생인 콘스탄티노플의 주세페에게 편지를 보내어 도니체티로 하여금 전에 그를 치료했던 의사들로부터 계속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주세페는 그것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서 베르가모에 있는 아들 안드레아를 다시 파리로 보냈다. 

 

안드레아는 4월 하순에 파리에 도착했다. 도니체티의 상태는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마차를 타고 산책을 나갈수도 있었다. 친구들도 자주 찾아왔다. 어느 날에는 베르디도 찾아왔었다. 그러나 도니체티는 사실상 경찰에 의해 연금상태였다. 그런 상황에 대하여 도니체티의 동생인 주세페는 못마땅했다. 도니체티가 비엔나에 가고 싶으면 가도록 해야 하고 이탈리아에 가고 싶으면 가도록 해야 하는데 파리 경찰이 정신질환의 사람을 여행 보낼수 없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꼼짝 못하고 파리에 있어야 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플 주재의 오스트리아 대사에게 탄원서를 내고 도니체티가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에 베르가모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관할 아래에 있었고 도니체티는 사실상 오스트리아 제국의 시민이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정부의 노력으로 도니체티는 프랑스로부터 외국 여행의 허락을 받았다. 도니체티는 베르가모의 귀족인 스코티 저택에서 머물도록 미리 주선이 되었다. 도니체티는 조카 안드레아, 베르가모에 살고 있는 동생 프란체스코, 주치의 렝뒤 박사, 간호원인 안투안과 함께 기차를 타고 아미엥으로 갔다가 이어 브뤼셀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두대의 마차로 독일을 거치고 스위스의 알프스를 넘어서 베르가모에 도착했다. 베르가모에 도착한 것은 10월 6일이었다. 베르가모의 시장과 여러 친지들과 친구들이 도니체티를 따듯하게 환영하였다.

 

도니체티는 스코티의 저택에서 지금까지 누리지 못했던 편안한 나날을 보냈다. 커다란 안락의자에 앉아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다. 말수가 적어지고 누가 무어라고 해도 대답을 별로 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혼자서 중얼거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옆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싫어했다. 다만, 소프라노 조반니나 바소니(Giovannina Basoni)가 찾아와서 도니체티가 작곡한 오페라 중에서 아리라를 불러 줄 때엔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조반니나 바소니는 나중에 스코티 남작의 부인이 되었고 도니체티의 사후에 여러 기념사업을 주도하였다. 테너 조반니 바티스타 루비니가 찾아와서는 조반니나 바소니와 함께 '루치아'에 나오는 듀엣을 불렀다. 그런데도 도니체티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볼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상태는 1848년이 되었어도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4월 1일에 뇌졸증이 일어났고 그 후에도 몇 번이나 그런 경우가 발생했다. 도니체티는 더 이상 음식을 들지도 못했다. 그리고 결국은 4월 8일 오후에 숨을 거두었다. 도니체티는 발테세(Valtesse)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후 19세기 말에 베르가모의 바실리카 산타 마리아 마조레로 이장되었다. 스승인 마이르의 묘소 옆이다.

 

도니체티의 묘소가 있는 베르가모의 바실리카 산타 마리아 마조레(성모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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