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하우스/유명 오페라극장 2

우크라이나 국립오페라 하우스 - 키에프 오페라

정준극 2015. 2. 3. 19:06

우크라이나 국립오페라 하우스(National Opera House of Ukraine) - 키에프 오페라

풀 네임은 국립 오페라-발레 아카데미 극장(National Academic Theater of Opera and Ballet)

또는 타라스 셰브첸코 국립극장(Taras Shevchenko National Theater)

 

우크라이나 국립오페라하우스

 

우리는 보통 '우크라이나 국립오페라하우스'라고 부르지만 풀 네임은 '타라스 셰브첸코 국립극장'(Taras Shevchenko National Theater)이다. 그런가하면 '국립오페라-발레 아카데미극장'(National Academic Theater of Opera and Ballet) 또는 '타라스 셰브첸코 국립 오페라-발레 아카데미 극장'이라고도 부른다. 타라스 셰브첸코(1814-1861)는 우크라이나의 위대한 국민시인이며 정치가였다. 우크라이나 국립 오페라 하우스는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극장 중의 하나이다. 오데사 오페라와 르비브(리비우)오페라와 함께 우크라이나의 3대 오페라 극장 중의 하나이다. 우크라이나 국립오페라하우스는 키에프의 블라디미르스카야 거리에 있다. 현재의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은 거장 빅토르 슈레터(Vicor Shreter)가 1890년대 말에 완성한 것이다. 원래 이 극장은 1867년 설립되었다. 당시 페르디난드 버거라는 사람이 주도하여 오페라단을 설립했고 그 오페라단이 발전하여서 키에프 오페라단이 되었던 것이다. 키에프 시의회는 페르디난드 버거가 설립한 오페라단이 이미 1856년에 건설된 시립극장을 사용하도록 허락했다. 사람들은 시립극장에 오페라단이 상주하게 되자 이 극장을 '러시아 오페라'라고 불렀다. 1867년 11월에 첫 오페라 공연이 있었다. 알렉세이 베르스토브스키(Alexey Verstovsky)의 '아스콜드의 무덤'(Askold's Tomb)이라는 오페라였다. 이 오페라의 스토리는 키에프의 옛 전설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키에프 시민들의 상당한 환영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국립오페라하우스

 

초기의 공연은 대체로 러시아 오페라들이었다. 미하일 글링카의 '루슬란과 루드밀라', 알렉산더 다르고미츠스키의 '루살카', 안톤 루빈슈타인의 '마카비스'(Maccabees), 알렉산더 세로프의 '마귀의 힘'(The Power of the Fiend) 등이었다. 여기에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베버의 '마탄의 사수', 도니체티의 '람메무어의 루치아', 그리고 베르디의 오페라들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여서 공연했다. 1896년 2월 4일, 차이코브스키의 '유진 오네긴'의 오전 공연을 마친 후에 뜻밖에 불이 났다. 촛불 하나를 끄지 않고 둔 것이 원인이 되어 화재가 일어났다. 극장 전체가 불에 탔다. 극장에 붙어 있었던 유럽에서 가장 큰 음악도서실도 불에 탔고 그동안 사용했던 오페라 의상이나 무대 장치도 모두 불에 탔다. 그후 키에프 오페라단은 몇 년 동안 다른 장소를 빌려서 오페라를 공연해야 했다. 베르고니 극장(지금은 레시야 우크라인카 러시아 드라마 국립극장), 솔로브초브 극장(지금은 이반 프랑코 국립극장), 심지어는 크루티코프 서커스 야외극장에서도 공연했다.

 

키에프 시의회는 대화재 이후 새로운 오페라 극장을 당연히 건설키로 하고 국제 공모를 통해 설계를 모집했다. 생페터스부르크 출신의 독일계 러시아 건축가인 빅토르 슈뢰터(Victor Schröter: 1839-1901)가 선정되었다. 외관은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랐지만 내부는 고전스타일로서 비엔나 모던(Vienna Modern)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외관이나 오디토리움의 장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무대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무대 중의 하나를 마련한 것이다. 엔지니어링도 당시로서는 첨단이었다. 1901년 9월 29일 개관식이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빌헬름 하르트벨드(Wilhelm Hartweld: 1859-1927)이 작곡한 '키에프 칸타타'가 연주되었고 이어 미하일 글링카의 '짜르를 위한 삶'(Life for the Tsar)가 공연되었다. 이후 키에프 오페라의 무대는 러시아의 유명한 성악가들과 발레 댄서들이 화려하게 장식하여 키에프의 문화수준을 빛내 주었다. 때로는 유럽의 유명 오페라 스타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공연도 몇몇 있었다. 예를 들면 바그너의 '발퀴레',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사드코', 아리고 보이토의 '메피스토펠레' 등이었다. 1911년 9월 14일의 공연 중에는 러시아 수상 표트르 스톨리핀(Pyotr Stolypin)이 유태인 사회주의자인 드미트리 보그로프에게 피살되는 사건도 있었다.

 

우크라이나 국립오페라하우스

 

1차 대전 이후 키에프가 더욱 성장하게 되자 키에프 오페라의 활동도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상설 오케스트라가 마련되어 여러 지휘자들을 초청해서 연주를 했다. 그러다가 1933년에 독일 출신의 쿠르트 아들러가 첫 상임지휘자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재단장 공사가 이루어졌다. 공사를 통해서 특히 백스테이지를 확장하였다. 분장실이 배나 넓어졌다. 합창 연습실도 새로 마련되었다. 오케스트라 피트도 사이즈가 커졌다. 더 규모가 큰 오케스트라가 연주할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국립오페라하우스는 키에프의 중심에 우뚝 자리잡고 있어서 키에프를 대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