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하우스/유명 오페라극장 2

트빌리시 '국립오페라-발레극장'

정준극 2015. 2. 10. 16:16

트빌리시 오페라발레극장(Tbilisi Opera and Ballet Theater)

트빌리시 국립오페라발레극장(Tbilisi State Opera and Ballet Theater)

트빌리시 국립오페라(Tbilisi State Opera)

자카리아 팔리아수빌리 트빌리시 국립오페라발레 아카데미 극장(Zakaria Paliashvili Tbilisi Stae Academic Theater of Opera and Ballet)

 

무어 스타일의 트빌리시 국립오페라-발레 극장

 

트빌리시(Tbilisi)는 조지아(Georgia)의 수도이다. 조지아는 그루지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지아는 유라시아의 코카서스 지역에 있는 인구 5백만의 국가이다. 조지아는 동서 유럽의 교차지역에 있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동서문물의 교류가 활발했던 곳이다. 조지아는 과거 구소련에 소속되어 있다가 공산 구소련이 붕괴되자 독립국가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조지아라는 이름은 이 나라 백성들이 중세로부터의 성자인 성조지(성게오르그)를 숭배하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성조지는 용(악마)을 물리친 용감한 기사이다. 미국에도 조지아주가 있는데 이는 동유럽의 조지아 나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미국의 조지아주는 영국 조지 2세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조지아의 주요 종교는 동방정교회이다. 하지만 이슬람교도 인구의 약 10%를 점유하고 있다. 조지아는 조지아어로 사카르트벨로(Sakartvelo)라고 하는데 이는 전통부족의 이름에서 따온 명칭이라고 한다. 아무튼 우리에게는 아직도 생소한 조지아라는 나라의 오페라 활동은 어떠하며 대표적인 오페라 극장은 어떠한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일 것이다.

 

트빌리시 오페라 발레 극장은 자카리아 발리아쉬빌리 트빌리시 국립 오페라 발레 아카데미 극장이라는 긴 이름이 정식 명칭이다. 트빌리시 오페라 발레 극장은 트빌리시의 중심가인 '자유 광장'의 쇼타 루스타벨리*Shota Rustaveli) 거리에 있다. 자카리아 팔리아쉬빌리(Zakaria Paliashvili: 1871-1933)는 조지아 클래식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위대한 작곡가이다. 대표작으로는 오페라 '다이시'(Daisi)가 있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오페라극장들을 보면 대체로 그나라 인물의 이름을 기념으로 붙인 경우가 많다. 트빌리시도 예외가 아니어서 국립오페라극장에 작곡가 자카리아 팔리아쉬빌리의 이름을 붙였다. 원래 현재의 '자유 광장'에 있는 오페라극장의 건물은 1896년에 거의 다시 짓다시피하여 완성한 것이다. 그전에 있던 건물은 1874년의 대화재로 완전 파손되어서 20년도 더 지나서야 재건했던 것이다. 그 전의 극장은 1837년에 착공하여 14년만인 1851년 11월 9일에 개관되었다. 이렇듯 공사기간이 길었고 또한 화재로 전소된 것을 재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정치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 것은 조지아가 인근 강대국들로부터 계속 괴로움을 당해 왔으며 더구나 19세기 초부터는 제정러시아의 그늘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 사회에서 제대로 발전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 것은 조지아가 이웃 아제르바이젠처럼 석유가 펑펑 나서 나라의 경제가 단단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트빌리시 오페라 발레 극장의 포이어

 

조지아는 1801년에 제정러시아에 합병되었다. 어쨋든 러시아의 울타리에 있게 되었기 때문에 트빌리시에도 다른 위성국가들의 수도와 마찬가지로 국가오페라-발레 아카데미극장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생각 뿐이지 실제로 어디어 어떤 규모의 오페라극장을 세워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에 1844년에 제정러시아는 미하일 보론초프(Mikhail Vorontsov) 장군을 조지아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이름난 외교관이기도 했던 보론초프는 문화예술에도 지극한 조예가 있어서 여러 문화행사들을 후원하고 여러 문화단체들을 설립했다. 보론초프는 특히 오페라에 관심이 많았다. 보론초프 총독은 총독궁에서 트빌리시로서는 첫 오페라의 공연을 가졌다. 1845년 9월의 일이었다. 그후 1주일에 두번 정도는 총독궁에서 공연을 가졌다. 주로 보데빌이나 코미디였다. 보론초프는 제정러시아 극장으로부터 예술가들을 초청하여 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물론 러시아어 공연이었으나 어떤 공연은 조지아어로 번역되어 공연되기도 했다. 보론초프 총독을 그럴게 아니라 아예 트빌리시에 오페라극장을 하나 번듯하게 짓자고 제안했다. 미래에 트빌리시 도시의 중심지가 될 곳에 짓기로 했다. 에르비안 광장의 루스타벨리 거리의 부지가 선정되었다. 보론초프의 예상은 적중했다. 나중에 그 지역은 트빌리시의 중심지가 되었다. 원래 도시의 이름은 티플리스(Tiflis)였으나 1936년에 트빌리시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극장이름에 자카리아 팔리아쉬빌리의 이름도 붙여졌다. 그건 그렇고 오페라극장 부지는 총독부가 무료로 제공하였다. 이는 이 극장이 완성되면 트빌리시 시당국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오디토리움

 

착공은 1847년 4월이었다. 이탈리아 건축가인 조반니 스쿠디에리(Giovanni Scudieri)가 설계했다. 스쿠디에리는 오데사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나 특별히 트빌리시로 초청했다. 그리하여 오랜 공사 끝에 1851년에 트빌리시 오페라극장을 완성했다. 트란스코카서스 지역에서는 처음 생긴 오페라극장이었다. 무어 스타일이었다. 인간이 만들어 낼수 있는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매력적인 극장이었다.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은 7백석 규모였다. 극장의 내부는 파리의 디자이너가 맡았다. 화려한 색갈의 베베트와 금색과 은색을 혼합한 치장이었다. 그리고 매우 값비싼 비단도 사용했다. 가장 특별한 것은 샹들리에였다. 무게가 무려 1,218 kg가 되는 거대한 샹들리에였다. 마르세이유에서 제작되어 배편으로 흑해를 거채 쿨레비(Kulevi)에 도착하였고 그곳으로부터 트빌리시까지 2백 km 이상이나 되는 거리를 버팔로들이 끄는 마차에 실려 운반되었다. 다행히 그 샹들리에는 오늘날 까지도 모습을 볼수 있다. 미술작업은 러시아 화가인 그리고리 가가린이 맡았다. 보론초프 총독은 초대 극장장으로 작가인 블라디미르 솔로구브(Vladimir Sollogub)를 임명했다.

 

트빌리시 오페라-발레 극장의 샹들리에

 

1851년 4월 12일에는 대개관식이 거행되었다. 티플리스의 저명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무대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연은 하지 못했다. 대신에 가장무도회를 개최하였다. 성니노여자대학교를 위한 자선무도회였다. 사실상 극장장으로 임명된 솔로구브는 러시아로터 이탈리아 오페라단을 초청해서 개관기념 공연을 가지려했다. 이탈리아 오페라단은 러시아 이곳저곳을 순회공연하고 있었다. 트필리스(트빌리시)로부터 초청을 받은 이탈리아 오페라단은 노보체르카스크(Novocherkassk)로부터 여러 대의 마차에 타고 트릴리스로의 여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코카서스 산맥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마차 여행이 너무 힘들어서 모두들 기진맥진하였고 더러는 병에 걸리기도 했다. 이들이 남부 러시아의 스타브로폴(Stavropol)에 도착하여서는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어서 결국 트필리스에는 가지 못하겠다며 초청을 거절했다. 그러다가 다시 설득을 당해서 결국 트필리스에 도착하긴 했다. 조지아의 군인들이 이들을 호위했다. 3월에 러시아를 떠난 이들은 10월에야 트필리스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1월에 티플리스 오페라극장은 이탈리아 순회 오페라단에 의한 공식적인 첫 오페라 공연을 가졌다. 도니체티의 '람메무어의 루치아'였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극장측은 지휘자 프란치스코 바르비에리 등을 일반 대중들이 기다리고 있는 쿠라 강변으로 안내하였다. 쿠라 강에는 작은 배들이 무수히 떠서 이탈리아 오페라단의 공연을 축하하는 행사들을 밤새도록 가졌다. 이탈리아 오페라단은 트필리스의 환대에 감동하여서 석달 동안 더 머물면서 12편의 오페라를 공연했다. 그 덕분에 트필리스 오케스트라의 실력이 크게 높아지고 새로운 악기들과 스코어들을 구비하게 되었다. 또한 다른 지역에 있던 연주자들이 트필리스로 와서 트필리스 오페라 극장의 오케스트라에 멤버로 활동하였다.  

 

1870년대, 화재가 나기 전의 트빌리시 오페라 발레 극장

 

1874년 10월 11일에 벨리니의 '노르마'를 공연하기 직전에 뜻하지 아니한 불이 났다. 바로 길 건너에는 소방서가 있었다. 그런데 불이 났다고 소방서에 연락했지만 소방서원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서 움직이지 아니했다. 나중에야 나타난 소방서원들은 사다리도 가져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소방서가 일부러 불이 더 나게 하고 사람들이 다치게 만들려고 늑장을 부렸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아무튼 극장은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다. 수많은 음악서적들, 의상들, 배경장면들, 소도구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가린의 그림도 사라졌다. 당장 새로 복구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극장측은 비록 무대는 사라졌지만 공연은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여름극장'이라는 명칭으로 다른 장소에서 소규모 공연을 계속했다. 그리고 12월에는 화재 때문에 무조건 연기되었던 '노르마'를 공연하였다. 한편, 시 당국은 새로운 극장 설계를 공모했다. 독일계로서 생페터스부르크에서 활동하고 있는 빅토르 슈뢰터(Viktor Schröter)가 선정되었다. 그렇게 시작되었지만 공사는 더디기만 했다. 새로운 총독인 미하엘 니콜라에비치의 설계 승인을 받은 것은 1880년이었다. 그렇게 해서 공사가 추진되었지만 가다가 또 중지하기를 반복하였으며 마침내 완공된 것은 1896년이었다. 그러나 제정러시아의 정치불안과 1차 대전 등 수없는 불안정 속에서 트빌리시 오페라 발레 극장은 모진 수난을 받으면서 견디어 왔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트빌리시 오페라 발레 극장은 몽세라 카바예와 호세 카레라스를 초청하여 조지아 대통령 미헤일 사카쉬빌리의 취임 축하 갈라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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