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대학도시 비엔나

비엔나대학교(University of Vienna)

정준극 2015. 3. 14. 10:49

비엔나대학교(Universität Wien) - University of Vienna - Die Uni

독일어 사용 지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대학교

14세기에 루돌프 4세가 설립...우리나라는 고려 공민왕 시절

 

1884년의 비엔나대학교

 

비엔나대학교는 일찍이 1365년 3월 12일에 오스트리아 대공인 루돌프 4세가 설립했다. 1365년이면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공민왕 시절이다. 원나라의 노국대장공주가 고려의 정사를 이리저리 하던 시절이다.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4세는 비엔나대학교를 설립한 공로 한가지만으로도 역사에서 길이 기억되고 있다. 물론 루돌프 4세가 특별히 뛰어나게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비엔나대학교를 설립했다기 보다는 당시에는 군주만이 학교를 설립할수 있었기 때문에 루돌프 4세의 이름이 기록에 남게 되었다고 보면 된다. 또한 당시 보헤미아의 왕인 샤를르(칼) 4세가 프라하에 대학을 세우고 목에 힘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모습이 보기 싫어서 비엔나에 대학교를 세웠다고도 볼수 있다. 비엔나대학교는 1365년에 설립되었으므로 2015년으로 설립 650주년을 기념한다. 비엔나대학교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에 있는 대학교 중에서는 가장 연륜이 깊은 대학교이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이라고 하면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 일부, 폴란드 일부 등을 말한다. 비엔나대학교는 동구에 있는 대학교 중에서는 세번째로 오래된 대학교이다. 첫번째는 앞에서 언급한 프라하의 샤를르대학교(칼대학교)이며 두번째는 크라코브의 야기엘로니아대학교(Jagiellonian University)이다. 비엔나대학교는 당시 오스트리아 대공인 루돌프 4세가 주도하여 설립했지만 그의 두 동생들도 상당한 재정기여를 했다. 알베르트 3세 대공과 레오폴드 3세 대공이다. 그래서 처음에 이 대학교를 호칭할 때에는 '알마 마테르 루돌피나'(Alma Mater Rudolphina)라고 불렀다. 루돌프 형제들의 학교라는 의미 쯤으로 해석할수 있다.

 

비엔나대학교를 설립한 루돌프 4세. 그는 비록 26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정치, 문화,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남겼다. 비엔나대학교를 처음 설립한 것은 대표적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설립자'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군주를 대공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독일의 변방국으로서 공작이었다. 그는 또한 성슈테판 대성당을 현재의 모습으로 확장하였다.

 

루돌프 4세(Rudolf IV: 1339-1365)는 보헤미아의 샤를르 4세 왕(Charles IV: 1316-1378)이 1348년에 프라하에 대학교를 세우자 그에 대응해서 합스부르크의 수도인 비엔나에도 대학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비엔나대학교를 설립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대학교가 대학교로서 인정을 받으려면 신학대학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루돌프 4세는 교황으로부터 인가를 받지 못했다. 뒷 얘기에 따르면 보헤미아의 샤를르 4세가 교황에게 압력을 넣어서 비엔나대학교에 신학대학을 설치하는 것을 인가하지 말도록 했다고 한다. 프라하의 샤를르대학교에 신학대학이 하나 있으면 되었지 또 무슨 비엔나에 신학대학이 있어야 하느냐는 주장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엔나대학교는 신학대학 인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가 루돌프가 세상을 떠난지 20년 후인 1385년에 겨우 인가를 받아 그로부터 명실공히 대학교로서 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비엔나대학교는 프라하대학교에 비하여 후발이었지만 발전의 속도가 빨랐다. 역시 신성로마제국에서 프라하는 시골이고 비엔나가 수도라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 그리하여 얼마후에는 비엔나대학교가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대학교로 성장발전하였다. 특히 15세기 중반에는 인본주의 사상에 따른 인문학이 크게 발달하여서 너도나도 새로운 학문을 배우기 위해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로 몰려왔고 그리하여 비엔나대학교는 학생수 6천명이 넘는 대학교가 되었다.

 

비엔나대학교 본관 호프. 겨울

 

신성로마제국 내에 있는 다른 대학들도 그런 형편이지만 비엔나대학교도 형식적으로는 교황의 대학교나 마찬가지였다. 로마 교황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기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로마 교황이 대관식을 해 주어야 황제로서 인정을 받는 형편이었으니 교황의 권세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수 있다. 그러는 중에 마르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잘 아는대로 1517년이었다. 비엔나대학교는 그 와중에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바람에 좌절의 시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게다가 1529년에는 오토만 터키군의 비엔나 공성이 있었고 이어 흑사병이 돌았다. 비엔나는 황폐화되었고 대학교육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터키의 1차 비엔나 공성이 있던 해에는 단지 30명만이 학생으로서 등록했을 뿐이었으니 터키의 공성으로 얼마나 큰 타격을 받았는지 짐작할수 있다. 터키의 공성은 겨우 막을 내렸지만 종교개혁의 여파는 스러지지 않고 있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비엔나대학교가 종교개혁에 들떠서 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페르디난트 1세는 가톨릭과 대학교가 더욱 밀접한 유대관계로 묶여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당시에 예수회가 반종교개혁 운동의 선봉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는 1551년에 대학교 내에 예수회 종단이 들어와서 활동하도록 했다. 그러자 대학교 자체와 예수회 사이에 분규가 생기게 되었다. 페르디난트 2세 시대에는 예수회를 더욱 지원하여서 예수회가 신학부 및 철학부의 교육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비엔나대학교는 비록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종교개혁의 여파로 몸살을 앓고 있었지만 로마 가톨릭을 옹호하는 든든한 방패로서 150여년을 견디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중반에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실제적인 정치를 맡게 되자 대학교를 로마 가톨릭의 우산 아래에 두지 않고 황실 산하에 두도록 했다. 대학교도 개혁이 필요했던 것이다. 예수회는 다른것은 몰라도 교수진을 임용할 때에 일반인들은 거의 거론하지 않고 다만 예수회 사람들만 중용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개인 주치의인 제라르 반 스비텐이 대학교의 개혁을 책임맡아 수행하였다. 반 스비텐은 신학이나 철학보다도 자연과학과 의학에 큰 비중을 두었다. 그는 의과대학생들의 임상경력을 특히 강조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뒤를 이은 요제프 2세는 계몽군주로서 대학교의 개혁을 차근차근 추진해 나갔다. 요제프 2세는 1783년부터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강의를 하도록 했고 개신교도들과 유태인들도 학교에 등록할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를 알현하는 비엔나대학교 책임자들

 

1848년에 학생 노동자들의 혁명이 일어났다. 물론 혁명은 성공을 하지 못해서 정부를 전복하지는 못했지만 그 여파는 각계에 크게 미치었다. 우선 비엔나대학교에서는 철학부가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와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과거에는 철학이 신학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비엔나대학교는 학문적인 자유를 크게 누리기 시작했다. 비엔나대학교는 원래 현재의 독토르 이그나즈 자이펠 플라츠를 중심으로 해서 자리 잡고 있었다. 모세 기념상과 예수회 교회가 있는 바로 그 장소이다. 그러다가 프란츠 요셉 1세 황제가 링슈트라쎄를 건축하게 되자 링슈트라쎄의 쇼텐링에 웅장한 대학교 건물을 갖게 되었다. 1877년부터 1844년간에 거장 하인리히 폰 페르스텔(Heinrich von Ferstel)이 설계하고 건설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스타일의 건물이다. 예전 대학교 건물이 있던 독토르 이그나즈 자이펠 플라츠에는 대학교 건물로 사용했던 건물들이 남아 있고 대학교 건물로 사용되던 건물은 현재 오스트리아 학술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비엔나대학교에는 1897년부터 여자도 대학교에 입학할수 있게 되었다. 대학교가 설립된지 532년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전공은 찰학에 한정되었다. 그후 1900년에는 의과대학에도 들어갈수 있게 되었고 1919년에는 법과대학, 1923년에는 개신교 신학부, 그리고 1946년에는 마침내 가톨릭 신학부에 들어 갈수 있게 되었다. 비엔나대학교에 처음 들어간 여학생인 엘리제 리히터는 1907년에 문학부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한편, 여자가 비엔나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경우는 1897년 취리히에서 이미 의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은바 있는 가브리엘레 포산너 폰 에렌탈이었다.

 

비엔나대학교 도서열람실

 

1920년대에 들어와서 대학교는 학생단체들의 반민주주의 및 반유태주의 활동으로 인하여 혼란 속으로 빠져 들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가르침과 배움의 자유를 요구했다. 그때 학생들의 주장이 그래도 관철되어 오늘날까지 효력을 보고 있는 것은 오스트리아 기본법의 17조에 명시된 '과학과 과학을 가르침은 자유이다'라는 조항이다(Science and its teaching are free). 그러던중 유태계의 모리츠 슐리크 교수가 강의실로 가다가 과거에 대학교에 다녔던 어떤 청년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터졌다. 나중에 그 청년은 나치의 협조로 석방되었다. 나치는 그때부터 이미 비엔나대학교를 장악하는 공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1938년에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비엔나대학교는 더욱 큰 몸살을 앓게 되었다. 교수진들과 학생들이 인종문제, 또는 사상문제로 대학교를 떠나야 했다.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교수들이나 학생들도 상당히 많았다. 전쟁이 끝나고 소련군이 점령하자 대학교는 그나마 안정을 찾았다. 대학교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오스트리아가 독립국이 된 한참 후인 1970년대 중반부터였다. 그리고 1993년과 2002년에 대학교 개혁운동이 일어나서 대학교의 실질적인 운영을 교수들이 맡게 되었다. 과거 250년이 넘게 정부의 직접 콘트롤을 받았던 대학교는 이제 그런 간섭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얼마후에는 의과대학이 본부에서 분리되어 별도의 독립 대학교가 되었다.

 

독토르 이그나즈 자이펠 플라츠에 있는 예수이텐키르헤(예수회교회)의 화려한 내부

 

비엔나대학교는 하나의 종합 캠퍼스를 갖고 있지 않다. 학교라고 하면 강의실이 있어야 하고 실험실이 있어야 한다. 비엔나대학교의 강의실과 실험실 등은 비엔나 시내의 60여 곳에 흩어져 있다. 링슈트라쎄의 역사적인 건물은 대학교본부이다. 보통 '디 우니'(Die Uni)라고 부르는 건물이다. 대학교의 다른 중요한 건물들은 주로 1구와 9구 알저그룬트에 있다. 새로 지은 거대한 강의실 건물은 보통 엔이게(NIG)라고 부른다. Neues Institutgebäude(노이에스 인스티투트게보이데)의 약자이다. 대학교본부 건물의 뒷편, 우니페어지태츠슈트라쎄(Universitätsstraße) 7 번지에 있다. 또 다른 종합강의실 건물도 있다. 우체트아(UZA)라고 부르는 건물이다. 9구 알탄슈트라쎄(Althanstrasse)에 있다. 비엔나구종합병원(알트 아카하) 구내에도 강의실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 있다. 법학부 건물은 따로 있다. 비엔나대학교의 실험온실은 2구에 있다. 생화학부와 기타 관련 학부도 별도의 건물에 있다. 천문학 연구와 관련한 천문대도 대학교 소관이다. 대학교스포츠연구실(USI)은 어느 학생이든지 체력단련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비엔나 시내를 벗어나서도 대학교 소속의 건물들이 있다. 니더외스터라이히, 오베르외스터라이히, 잘츠부르크에 있다. 주로 생물학, 체육, 천체물리학 관련 연구실험시설들이다.

 

엔이게라고 불리는 새로운 강의실 건물이다.

 

비엔나대학교가 수여하는 학위는 학사, 디플로마, 석사, 박사이다. 현재 모두 187개의 학위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학사 프로그램은 55개이며 석사 프로그램은 116개이다. 그리고 4개의 디플로마 프로그램이 있고 박사 학위 프로그램은 12개이다. 비엔나대학교는 2012/13년도 학년에 기본학위인 학사와 디플로마 학위를 1만 9백여명에게 수여했다. 석사학위는 1천 1백 30여명이었고 박사학위는 585몀이었다. 비엔나대학교는 영어로 진행하는 석사학위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예를 들면, Quantitative Economics, Management and Finance; Science-Technology-Society; Environmental Sciences; Middle European Interdisciplinary Master Programme in Cognitive Science; European Master in Health and Physical Activity; English Language and Linguistics; Anglophone Literature and Cultures, East Asian Economy and Society; Economics; Botany; Ecology and Ecosystems; Molecular Microbiology, Microbial Ecology and Immunobiology 등이다. 비엔나대학교의 연구과제에 참여하고 있는 인력은 약 7천명에 이른다. 그중에서 약 1천명은 대학교 당국이 아니라 제3기관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아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비엔나대학교가 중점두고 있는 연구 프로젝트는 가톨릭 및 개신교 신학, 법률, 경제과학, 콤퓨터과학, 언어 및 문화 연구, 역사 문화 연구, 사회과학 및 심리학, 생명과학, 자연과학, 수학, 스포츠과학, 사범교육 등이다.

 

강의실

 

비엔나대학교는 15개 단과대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기에 4개의 센터가 있다.

1. 가톨릭 신학부(Facullty of Catholic Theology)

2. 개신교 신학부(Faculty of Protestant Theology)

3. 법학부(Faculty of Law)

4. 비즈니스, 경제학, 통계학부(Faculty of Business, Economics and Statistics)

5. 콤퓨터 과학부(Faculty of Computer Science)

6. 역사 문화 연구부((Faculty of Historical and Cultural Studies)

7. 언어 및 문화 연구부(Faculty of Philological and Cultural Studies)

8. 철학 및 교육부(Faculty of Philosophy and Education)

9. 심리학부(Faculty of Psychology)

10. 사회과학부(Faculty of Social Sciences)

11. 수학부(Faculty of Mathematics)

12. 물리학부(Faculty of Physics)

13. 화학부(Faculty of Chemistry)

14. 지구과학, 지리 및 천문학부(Faculty of Earth Sciences, Geography and Astronomy)

15. 생명과학부(Faculty of Life Sciences)

 

1. 번역연구 센터(Center for Translation Studies)

2. 스포츠과학 및 대학스포츠 센터(Center for Sport Science and University Sports)

3. 분자 생물학 센터(Center for Molecular Biology)

4. 사범교육 센터(Center for Teacher Education)

 

링슈트라쎄의 우니페어지태트 링에 자리잡고 있는 비엔나대학교 본부건물

 

현재까지 비엔나대학교와 관련이 있는 인물로서 노벨상을 받은 사람들은 15명에 이른다.

- 로버트 바라니(Robert Barany: 1876-1936). 생리학/의학. 1914년. 스웨덴 우프살라에서 별세

- 리하르트 아돌프 치그몬디(Richard Adolf Zsigmondy). 화학. 1925년

- 율리우스 바그너 야우레그(Julius Wagner-Jauregg: 1857-1940). 생리학/의학. 1927년

- 한스 피셔(Hans Fischer: 1881-1945). 화학. 1930년

- 칼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 1868-1943). 생리학/의학. 1930년. 뉴욕에서 별세

-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 물리학. 1933년

- 오토 뢰비(Otto Lowi: 1873-1961). 생리학 또는 의학. 1936년. 뉴욕에서 별세

- 빅토르 프란시스 헤스(Voctor Francis Hess: 1883-1964). 물리학. 1936년. 미국 마운트 버논에서 별세

- 리하르트 쿤(Richard Kuhn). 화학. 1938년

- 막스 페루츠(Max Perutz). 화학. 1962년

- 칼 폰 프리슈(Karl von Frisch). 생리학 또는 의학. 1973년

-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 1903-1989). 생리학/의학. 1973년

- 프리드리히 하예크(Friedrich Heyek: 1899-1992). 경제학. 1974년

-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 문학상. 1981년

- 엘프리데 옐리네크(Elfriede Jelinek). 문학상.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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