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러시아의 차이코브스키

영욕이 점철된 생애, 차이코브스키

정준극 2015. 8. 9. 20:31

영욕이 점철된 생애, 차이코브스키

 

표트르 일리이치 차이코브스키

 

근대 러시아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를 손꼽으라고 하면 대체로  보로딘, 림스키 코르사코프, 무소르그스키 등이 포함되어 있는 ‘5인조 국민음악파’ 중에서 선발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건 무리가 있는 일이다. 5인조 국민음악파에 속하지 않았으면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또 다른 위대한 작곡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음악에 대한 지나치리만치 뜨거운 열정으로 자학적이라고 할 만큼 작곡활동에 열정을 쏟아 부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성격이 지나치게 예민하고 소심하여 다른 사람과의 접촉조차 꺼린 사람이었다. 그는 심히 고독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전문분야에서 높은 성공을 거두어서 사람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었지만 이와 함께 절망과 고통의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이었다. 표트르 일리이치 차이코브스키이다. 어떤 점들이 그를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도록 했는가?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떨어져 살아야 했다. 기숙학교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가 의지하고 사랑했던 어머니기 일찍 세상을 떠난 것도 큰 충격과 좌절을 가져다 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절친한 친구인 니콜라이 루빈슈타인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성인이 되어서는 무려 13년동안 그를 후원해주고 격려해 주었으며 돌보아 주었던 나데츠다 폰 메크와 정신적으로만 사모의 감정을 가지고 있어야 했던 것도 마음에 큰 부담을 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동성애! 그의 생전에 그가 동성연애자이었던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결혼까지 한 그가 동성연애자였다는 것은 본인 자신에게 있어서도 말할수 없는 부담이었을 것이다. 물론 일부 학자들은 동성애라는 항목이 그의 음악활동에서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마음에도 없었던 결혼생활.

 

'유진 오네긴'. 메트.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테너 마리우츠 크비시앙

 

그래서인지 그는 누구보다도 격정적인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음악은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듯, 폭포에서 물이 쏟아지는 듯 격정적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멜로디는 한없이 아름답다. 슬픔과 비탄이 가득히 넘쳐 있는 아름다움이다. 그의 생애는 마치 그의 음악처럼 극심한 번뇌 속에서 한줄기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는 노력의 연속이었다. 그의 생애는 한마디로 영광고 오욕이 점철된 것이었다. 표트르 일리이치 차이코브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가 바로 그 사람이다. 차이코브스키는 어떤 작곡가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러시아에서 가장 뛰어난 작곡가이다. 어떠한 음악적 특성이 있는가? 글링카와 마찬가지로 하모니를 비롯한 형식적인 테크닉은 서유럽에서 도입하였지만 관현악에는 슬라브적인 웅대함이 넘쳐있다. 또 한가지, 우울하면서도 연민의 정을 자아내게 하는 멜로디는 진실로 러시아적이다. 눈덮힌 광활한 시베리아에서 차가운 겨울 바람과 함께 들려오는 듯한 멜로디이다. 그는 53세에 콜레라를 이겨내지 못해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의도적으로 중병에 걸리게 했다고 주장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누가 일부러 콜레라에 걸려서 생명을 단축하려 했을 것인가?

 

차이코브스키의 발레 '백조의 호수'에서 오데트의 솔로

 

우리가 보통 차이코브스키라고 부르는 이 위대한 작곡가의풀네임은 피터 일리이치 차이코브스키(Peter Ilyich Tchaikovsky)이지만 그건 영어식 표현일 뿐이다. 원래의 러시아식 표기는 표트르 일리이치 차이코브스키(Pyotr Ilyich Chaykovsky)이다. 그는 53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생애를 살면서 교향곡, 협주곡, 오페라, 발레곡, 실내악, 그리고 러시아정교회의 전례를 위한 종교음악들을 남겼다. 교향곡! 해방후 사회가 혼란했을 때 우리는 명동의 음악다방에서 차이코브스키의 '비창 교향곡'을 들으면서 인생이 무엇인지를 논하기도 했다. 그 시대의 청년들로서 차이코브스키의 교향곡 제6번 '비창'(Pathetique)을 모른다면 대학생 축에 들지 못했었다. 협주곡! 얼마나 열정에 넘쳐 있는 차이코브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이던가! 밴 클라이번의 연주를 들으면서 감격에 넘쳐 있었다. 바이올린 협주곡 D 장조는 또 어떠한가? 아름다운 주제 멜로디를 마음에 담느라고 정신이 없었지 않았던가! 발레곡! 우리는 차이코브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보고 발레의 아름다움에 비로소 눈을 떴으며 해마다 송년이면 '호두까기 인형'을 구경하기 위해 주머니를 털어야 했다. 그리고 오페라! 사람들은 차이코브스키가 '유진 오네긴' 한편 만을 작곡한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는 모두 10편에 이르는 많은 오페라를 남겼다. '오를레앙의 처녀', '마제파', '스페이드의 여왕', '이올란타' 등등...차이코브스키를 새롭게 평가하게 만드는 오페라들이다. 그리고 종교음악! 차이코브스키의 러시아정교회의 전례를 위한 종교음악은 숭고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마치 다른 세상에 온듯 평온하다. 그의 '천사의 찬양'(Cherubical Hymn)을 들어보라. 마음조차 숙연해 짐은 어쩔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차이코브스키라고 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1812년 서곡'과 '이탈리아 기상곡'(Capriccio Italien)을 잊을수 없을 것이다. 제목은 '이탈리아 기상곡'이지만 러시아의 광활하고 웅장한 자연이 그대로 펼쳐지는 곡이다. 그의 수많은 작품들이 오늘날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세계인의 가슴을 깊이 적셔 줄 것이다. 러시아 출신의 작곡가 중에서 차이코브스키만큼 세계에 감동을 준 작곡가는 아무래도 내세우기가 힘들것 같다.

 

차이코브스키 가족들. 왼쪽으로부터 표트르 차이코브스키, 어머니 알렉산드라 안드레예브나, 여동생 알렉산드라, 누이 치나이다, 동생 니콜라이와 이폴리트, 아버지 일리야 페트로비치 (쌍둥이 동생인 아나톨리와 모데스트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1848년. 차이코브스키가 8세 때의 사진. 

 

표트르 일리이치 차이코브스키는 1840년 4월 25일(혹자는 5월 7일이라고도 주장함) 제정러시아의 비야트카 총독령의 작은 마을인 보트킨스크(Votkinsk)에서 태어났다. 비야트카는 오늘날의 우드무르트(Udmurt) 공화국으로 볼가연방지역에 속한 러시아의 작은 자치령이다. 우드무르트공화국은 러시아 중부 도시인 카잔과 예카테리나부르크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 차이코브스키가 태어난 보트킨스크 마을은 우드루므트 공화국의 동쪽 끝에 있다. 차이코브스키가 태어날 당시의 보트킨스크는 광산마을로서 개발된지 얼마 안되는 마을이었다. 1840년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강화도령 철종이 임금이 되기 전으로 헌종 6년이었다. 프랑스에서는 1840년이 뜻깊은 해였다. 에밀 졸라가 태어났고 알퐁스 도데가 태어났으며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이 태어났고 화가 클로드 모네가 태어난 해였다. 이탈리아의 천재적 바이올리니스 겸 작곡가인 니콜로 파가니니가 세상을 떠난 해가 1840년이다. 아무튼 우리의 위대한 차이코브스키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러시아의 시골 중에서도 시골에서 태어났다. 차이코브스키의 아버지와 그 위의 선조들은 제정러시아의 군대에서 복무했던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말하자면 군인 집안이었다. 차이코브스키의 아버지인 일리야 페트로비치 차이코브스키는 제정러시아 광산부에 속한 광산엔지니어로서 군대 계급은 중령이었다. 일리야 페트로비치 차이코브스키는 캄스코-보트닌스크 철공소의 매니저였다. 차이코브스키의 할아버지인 페트로 페트로비치 차이카는 세인트 페터스부르크에서 의학훈련을 받고 군의관의 조수로서 복무했으며 나중에 비아트카 지방의 글로초브(Glazov)라는 마을의 시장을 지냈다. 차이코브스키의 증조부인 표도르 차이카는 코사크 출신의 군인으로서 표트르 대제 휘하의 부대에 복무하였으며 1709년의 저 유명한 폴타바 전투에도 참전하여 전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그러고보면 차이코브스키는 용맹스런 코사크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고 볼수 있다.

 

차이코브스키의 고향인 보트킨스크의 차이코브스키 기념상

 

차이코브스키의 어머니 알렉산드라 안드레예브나는 실상 아버지 일리야 페트로비치 차이코브스키의 두번째 부인이다. 차이코브스키의 아버지는 차이코브스키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또 다시 결혼하였다. 차이코브스키의 어머니 알렉산드라는 아버지 일리야보다 18년 연하였다. 차이코브스키의 어머니 알렉산드라는 그의 친정 아버지가 프랑스 쪽이었다. 차이코브스키의 부모는 모두 예술적인 소양이 풍부한 사람들이었으며 특히 음악공부도 했었기 때문에 음악에 문외한들은 절대로 아니었다. 당시 제정러시아에서는 대도시인 세인트 페터스부르크나 모스크바를 떠나서 멀리 시골에서 사교생활을 하자면 그나마 예술에 취미가 있는 것이 도움이 되었고 특히 음악적인 소양은 필수였다. 그런 의미에서 차이코브스키의 부모들도 예술과 음악에 대한 소양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었다. 차이코브스키에게는 네명의 남자 형제(니콜라이, 이폴리트, 그리고 아나톨리와 모데스트의 쌍둥이)가 있었고 누이동생으로서 알렉산드라가 있었다. 차이코브스키의 누이로서는 차이코브스키의 아버지 일리야의 첫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딸 치나이다가 또 있었다. 차이코브스키는 특별히 누이인 알렉산드라와 남자 동생들인 쌍둥이와 친하게 지냈다. 쌍둥이 동생 중에서 아나톨리는 나중에 법률가로서 이름을 날렸고 모데스트는 문학적인 재능이 뛰어나서 극본가, 대본가, 번역가로서 활동했다. 동생 모데스트는 나중에 차이코브스키의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과 '이올란타'의 대본을 썼다. 누이인 알렉산드라는 레브 다비도프라는 사람과 결혼해서 일곱 자녀를 두었다. 차이코브스키는 일곱 명의 조카들 중에서 특히 블라디미르 다비도프를 좋아해서 친밀하게 지냈다. 다비도프 가정은 카멘카(Kamenka)라는 마을에 별장이 있는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훗날 차이코브스키는 정신적으로 방황하던 시절에 이곳 카멘카의 누이 집을 피난처로 여기고 와서 지내기도 했다. 카멘카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체르카시 오블라스트 지역에 있는 카미안카(Kamianka)이다.

 

카미안카의 차이코브스키 기념상

                               

차이코브스키의 어린 시절에 있어서 프랑스에서 온 패니 뒤르바흐(Fanny Dürbach)는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었다. 뒤르바흐는 차이코브스키가 네살 때인 1843년에 차이코브스키 집안의 가정교사로 초청되어 온 여자였다. 그때 뒤르바흐는 26세의 지성적인 여자였다. 뒤르바흐는 차이코브스키의 형인 니콜라이와 사촌 한명을 가르치기 위해 왔다. 차이코브스키는 너무 어려서 무엇을 가르쳐 줄 형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코브스키는 공부를 하겠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뒤르바흐 양은 어쩔수 없이 간간히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가르쳐주었다. 차이코브스키는 머리가 우수했는지 여섯 살 때에는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아주 그럴듯하게 잘 하는 아이가 되었다. 어린 차이코브스키는 조숙했었는지 젊고 예쁜 뒤르바흐 선생님을 무척 좋아했다. 뒤르바흐도그런 차이코브스키를 상당히 보살펴주며 예뻐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던 뒤르바흐는 차이코브스키의 초기 작품에 대하여도 여러 조언을 하고 도와주었다. 반면에 차이코브스키의 어머니는 차가운 성격이었고 우울한 모습이었으며 가까워지기 어려운 존재였다. 물론 나중에 학자들은 차이코브스키의 어머니가 어린 차이코브스키를 무척이나 귀여워하고 사랑했다고 하지만 어린 차이코브스키로서는 아무래도 자기에게 친절한 뒤르바흐 선생님이 더 좋았을 것이다.

 

차이코브스키 영화에서 가정교사인 뒤르바흐가 어린 차이코브스키를 잠 재우기 위해 동화 '백조의 호수'를 읽어주고 있다.

 

차이코브스키는 다섯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다른 아이들보다 조숙하였던 그는 피아노를 배운지 3년 만에 피아노를 아주 능숙하게 칠수 있었고 악보를 잘 보았다. 차이코브스키의 부모는 어린 차이코브스키의 피아노 공부를 위해 여러가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피아노 선생을 채용했는가 하면 오케스트라 공부를 위해 오케스트리온이라는 커다란 악기를 사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코브스키의 부모는 차이코브스키가 열살 때에 그를 세인트 페터스부르크에 있는 제국법률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당시에 러시아에서는 음악가로서 밥을 벌어 먹기가 힘들므로 법률가를 만들어서 안정된 생활을 할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더구나 차이코브스키의 부모들은 수입이 불안정하므로 어린 차이코브스키가 자기 몫을 할 때에는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게 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세인트 페터스부르크에 있는 학교에 보내기로 생각한 것은 차이코브스키의 부모가 모두 세인트 페터스부르크에서 학교를 다녔었기 때문이었다. 제국법률학교는 귀족집안의 자제들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일반 서민들의 자제들을 가르치는 학교였다. 이곳을 졸업하고 나면 공무원이 되기가 쉬웠다. 그런데 이 학교에 입학할수 있는 나이는 최소한 12살이었다. 그때 차이코브스키는 열살이었다. 그래서 제국법률학교의 예비학교에서 2년을 지내야 했다. 세인트 페터스부르크의 제국법률학교 예비학교는 차이코브스키의 집으로부터 무려 1천 3백 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어린 차이코브스키는 집을 떠나서 혼자서 기숙학교에서 지내야 했다. 2년간의 예비학교를 마친 차이코브스키는 7년 동안의 본격공부를 위해 제국법률학교에 들어갔다.

 

생페터스부르크의 차이코브스키 묘지 조각.

 

차이코브스키가 집을 떠나 세인트 페터스부르크의 예비학교에서 지낼 때인 1854년, 그의 어머니가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차이코브스키는 겨우 14세였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지내야 했고 게다가 사랑하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차이코브스키는 심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 공황장애 상태가 되었다. 그가 한창 십대의 소년 시절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그의 전생애를 통해서 정신적인 부담으로 남았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지 25년이 지난 때에 차이코브스키가 그의 후원자인 나데츠다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순간이라도 어머니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합니다.'라고 썼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어머니의 죽음을 마음 속에 두고 있었는지를 잘 알수 있다. 차이코브스키는 어머니를 추모하여서 Momma Bit The Big one 이라는 왈츠를 작곡했다. 그런데 혹자는 차이코브스키의 어머니가 매독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차이코브스키의 아버지도 콜레라에 걸렸으나 얼마후 완전히 회복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위해 잠시 집에 와서 있었던 차이코브스키를 당장 예비학교로 보냈다. 아버지는 학교 공부가 어린 차이코브스키의 마음을 돌려 줄 것으로 생각했다. 학교에 돌아온 차이코브스키는 친구들과 어울리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중에서 평생을 가까운 친구로 보낸 학생은 알렉세이 아푸크틴(Aleksey Apukhtin)과 블라디미르 제라르드(Vladimir Gerard)였다. 음악은 친구들을 묶어 주었다. 차이코브스키와 친구들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오페라 구경을 갔다. 로시니, 벨리니, 베르디, 모차르트의 오페라들이었다. 차이코브스키는 오페라를 보고 와서 친구들 앞에서 그 오페라의 주제 음악을 즉흥곡으로 만들어 연주하기도 했다. 차이코브스키는 이 때가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때였다고 털어 놓은 일이 있다.

 

생페터스부르크의 마리인스키 극장

 

이렇듯 차이코브스키가 음악에 심취하고 음악적인 재능을 보여주자 그의 아버지는 특별히 음악교사를 한 사람 고용해서 차이코브스키를 가르치도록 했다. 뉘른베르크 출신의 루돌프 퀸딩거(Rudolph Kündinger)였다. 차이코브스키는 법률학교 공부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음악공부에 전념하였다. 차이코브스키는 19세 때인 1859년에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이 되었다. 얼마후에 그는 말하자면 사무관과 같은 직책으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3년 동안 공무원으로 일했다. 차이코브스키는 1861년에 니콜라이 차렘바(Nikolai Zaremba)가 운영하는 음악이론 교실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음악교실은 미하일로브스키 궁전(현재의 러시아박물관 건물)에서 열렸다. 이 음악교실은 러시아음악협회(RMS)가 운영하였다. 러시아음악협회는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안톤 루빈슈타인이  짜르 알렉산더 2세의 숙모인 엘레나 파블로브나 대공녀의 후원으로 1859년에 설립한 단체이다. 러시아음악협회의 목적은 재능있는 러시아 국내 음악가들을 발굴하여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그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 음악을 도입하는데 주력하였고 필요하다면 러시아 음악가들을 유럽으로 보내어 공부시키는 노력을 기울였을 뿐이었다. 러시아음악협회가 주관하여 젊은 음악인들을 교육하는 음악교실은 1862년에 문을 연 생패터스부르크음악원의 모태가 되었다. 차이코브스키는 생페터스부르크음악원의 초기 학생으로서 등록하였다. 그러나 공무원직은 그 후에도 1년간 더 유지하였다. 차이코브스키는 음악원에서 차렘바(Zaremba)로부터 화성학, 대위법 등을 배웠고 루빈슈타인으로부터는 작곡기법을 배웠다.

 

차이코브스키가 최초 학생 중의 하나로 등록한 생페터스부르크음악원

 

차이코브스키는 생페터스부르크음악원을 졸업한 다음 다시 공무원으로 일할 생각을 했다. 당장 작곡가로서는 생계를 꾸려가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때에 안톤 루빈슈타인 원장의 동생인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이 차이코브스키에게 '모스크바에 새로 음악원을 설립코자 하니 음악이론 교수로 가는 것이 어떠냐?'고 문의해 왔다. 모스크바음악원은 신설이고 재정이 넉넉치 않아서 교수라고 해도 월급이 50루블 밖에 되지 않았지만 차이코브스키는 자기의 음악적 재능을 살릴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서 그같은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한 때에 차이코브스키의 작품인 Characteristic Dances 라는 것을 1865년 9월에 생페터스부르크의 파블로브스크 공원에서 마침 제정러시아를 방문 중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지휘로 연주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차이코브스키의 작품으로서는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서 공연되는 것이었다. 차이코브스키는 아무래도 자기가 갈길은 음악뿐이라는 생각을 굳혔다. Characteristic Dances는 나중에 차이코브스키가 그의 오페라 '보예보다'에 '시골아가씨들의 춤'(Dances of the Hay Maidens)라는 타이틀로 삽입하였다.

 

생페터스부르크의 파블로브스크 공원. 차이코브스키의 작품이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공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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