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러시아의 차이코브스키

방황과 죽음

정준극 2015. 8. 13. 09:37

번뇌의 방황과 고독한 죽음

 

황량한 시베리아. 차이코브스키라고 하면 어쩐지 자꾸 시베리아가 생각이 난다.

 

차이코브스키는 부인 안토니나와의 별거 이후 거의 1년 동안을 외국에서 지냈다. 그러면서 '유진 오네긴'을 완성했으며 교향곡 제4번의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했고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했다. 차이코브스키는 주로 스위스의 클라렌스 몽트로에서 지냈다. 차이코브스키가 모스크바로 돌아온 것은 1879년 가을이었다. 그는 모스크바에 돌아온 날에 그를 반기는 친구들에게 모스크바에는 12월까지 머물다 떠나겠다고 말했다. 그만큼 모스크바에 머무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차이코브스키는 모스크바음악원이 그의 교수직 사임을 공식적으로 수락하자 '이제는 더 이상 얽매일 곳도 없다'면서 모스크바를 떠나 가고 싶은 대로, 발길 닫는 대로 여행을 다녔다. 차이코브스키는 그동안 가보고 싶었던 러시아의 시골들을 찾아가 보았으며 유럽의 여러 장소를 방문하였다. 우울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는 러시아의 시골은 그야말로 차이코브스키가 마음 속으로 그리던 장소였다. 차이코브스키의 여행이 가능했던 것은 경제적으로 폰 메크 부인의 후원을 넉넉히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이코브스키는 여행을 다니면서 사람들과는 되도록이면 부딪치지 않았다.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으며 누가 찾아오는 것도 마다하였다. 그러면서 오로지 작곡에만 전념하였다. 하지만 부인 안토니나와의 불편한 관계는 그를 계속 괴롭혔다.

 

성페터스부르크 음악원 학생시절의 차이코브스키

 

안토니나는 차이코브스키와 이혼하겠다고 하더니 얼마 후엔 '내가 누구 좋으라고 이혼을 해요'라면서 거절했다. 차이코브스키는 동생 모데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속아서 결혼했다. 물론 동성애에 대한 나의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결혼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안토니나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싫으니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라면서 괴로운 심경을 토로한 일이 있다. 차이코브스키는 안토니나와 헤어지기 위해서 될수만 있으면 안토니나에게 모욕을 주고 고통을 주었다. '아니, 차이코브스키가 그럴수가 있나?'라는 소리를 듣고도 남을만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토니나는 죽어라고 이혼을 거절하였다. 그것이 차이코브스키를 항상 따라 다니며 괴롭혔다. 그래도 차이코브스키는 구차하게 자기의 감정을 작품에 반영하지 않고자 노력하였다. 그 시대에 작곡된 음악들을 들어보면 알수 있다. 아마 차이코브스키가 그 시대에 작곡한 작품 중에서 자기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쏟아 부은 곡은 피아노 트리오일 것이다. 차이코브스키가 평생 친구였던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의 죽음을 애도하여서 작곡한 것이다. 차이코브스키의 명성은 러시아에서도 높아졌지만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도 크게 높아졌다. 러시아에서는 어느덧 차이코브스키가 너무 지나치게 서유럽의 음악 스타일을 추구하고 있다는 비난이 사라졌다. 러시아 문화예술가들의 사고방식이 변했던 것이다. 한가지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면 1880년에 모스크바에서 푸슈킨 기념상을 제막하는 자리에서 도스토예브스키의 연설 내용이다. 도스토예브스키는 러시아 문화예술계 사람들이 지금까지 지나치게 국수주의적인 자세를 유지해 왔다고 비난하면서 푸슈킨이야말로 러시아 문화예술가들에게 '세계적인 연합'(유니버살 유니티)을 주장한 선구자적인 인물이라고 치켜 세웠다. 사회적인 분위기가 이렇게 돌아가자 과거에 차이코브스키에 대하여 '서유럽 음악을 지나치게 추종하는 인물'이라면서 비난하던 소리가 사라졌다.

 

니콜라이 루빈슈타인. 차이코브스키의 피아노 3중주곡은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의 서거를 애도하여서 작곡된 것이다.

 

젊은 인텔리겐챠 사이에서는 차이코브스키를 떠받들고 추종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알렉산더 베누아, 에롱 바크스트,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등이 차이코브스키의 열렬 추종자였다. 1880년에 모스크바의 '그리스도 구세주 대성당'이 낙성될 예정이었다. 1881년은 알렉산더 2세의 짜르 재위 25주년을 기념하는 해가 된다. 그리고 1882년에는 모스크바 만국예술산업 박람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은 차이코브스키에게 '여보게, 이럴 때에 무슨 좋은 작품을 하나 작곡해 보게나.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 말일세'라고 말하면서 작곡을 적극 권고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차이코브스키는 1880년 10월부터 러시아의 여러 행사들을 기념하는 작품의 작곡에 착수하였다. 차이코브스키는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번에 새로 만든 곡은 과거의 곡들과는 전혀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대단히 소란하고 큰 소리가 나는 곡입니다. 이 곡에는 개인적인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습니다. 아마 예술적인 장점도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 곡을 완성했다는 것을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1812년 서곡'이었다.

 

모스크바의 그리스도구세주대성당. 차이코브스키는 이 성당의 완공을 기념하여 '1812년 서곡'을 작곡했다.

 

1881년 3월에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이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로마에서 휴일을 보내고 있던 차이코브스키는 급히 파리로 향하였으나 이미 장례식은 끝나고 기차로 러시아로 운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차이코브스키는 운구위원으로서 기차와 함께 러시아로 갔다. 그해 12월에 차이코브스키는 '피아노 트리오 A 단조'를 완성하고 '위대한 예술가를 추모하여 헌정한다'고 했다. 물론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의 서거 1주기 기념으로 모스크바음악원에서 처음 연주되었다. 이 작품은 많은 사랑을 받아서 차이코브스키의 생전에 가장 자주 연주된 작품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1893년 11월 차이코브스키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모스크바와 생페터스부르크에서 동시에 이 곡이 연주되어 그를 추모하였다. 차이코브스키의 유일한 엘레지였다. 그후 차이코브스키는 1884년부터 '이제는 사회와 함께 지내야 겠다'라고 생각하여 은둔생활에서 벗어나서 사람들과 만나고 모임에도 참석하며 지내기 시작했다. 그해 3월에 짜르 알렉산더 3세는 차이코브스키에게 성블라디미르훈장을 수여하였다. 이로써 차이코브스키는 세습귀족의 반열에 오를수가 있었으며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짜르를 알현할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차이코브스키는 누구나의 차이코브스키가 되었다. 러시아에서 그의 작품들을 자주 들을수 있게 되었다. 그럴 즈음에 생페터스부르크에서 한스 폰 뷜로브의 지휘로 초연된 '오케스트라 조곡 제3번'은 차이코브스키의 명성을 더 한번 높여준 대성공의 작품이었다. 차이코브스키는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생애에서 이처럼 성공을 거둔 적은 없었습니다. 청중들이 모두 나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술가로서 가장 가슴 뿌듯한 순간이었습니다. 살고 있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리고 작곡을 할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지를 알게 해 주는 연주회였습니다.'라고 썼다.

 

모스크바음악원 대연주회장

 

1885년에 짜르는 우악스럽게도 차이코브스키에게 생페터스부르크의 볼쇼이 카메니 극장에서 '유진 오네긴'을 공연토록 할 것이니 좀 들여다보아 달라고 당부했다. '유진 오네긴'은 그보다 6년전인1879년에 모스크바의 말리 극장에서 초연되어 관심을 끌었었다. 그러나 생페터스부르크에서는 음악원에서 학생들이 공연을 했을 뿐이었다. 생페터스부르크에는 볼쇼이 카메니 극장보다 더 규모가 큰 마리인스키 극장이 있었지만 짜르가 우정 볼쇼이 카메니 극장에서 '유진 오네긴'을 공연토록 하라고 지시한 것은 차이코브스키의 오페라가 제정러시아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대신하는 역할을 하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유진 오네긴'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차이코브스키는 짜르로부터 1년에 3천 루블이라는 종신연금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궁정작곡가로서의 역할도 맡았다. 이렇게 되자 차이코브스키는 보다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였다. 그는 러시아  음악의 발전을 위해서 작곡가로서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하는 것도 대단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차이코브스키는 모스크바음악원도 자주 모습을 보였다. 모스크바음악원장은 그의 제자였던 세르게이 타네예프(Sergei Taneyev)였다. 차이코브스키는 학생들이 실기시험에 참석하여 자문을 하였고 음악원 내에 해결하기 어려운 민감한 사항이 생기면 원만하게 처리하는 역할도 했다. 차이코브스키는 러시아음악협회의 모스크바지부장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국제적으로 저명한 음악가들을 초청해서 직접 연주회를 지휘하도록 하는 일도 수행하였다. 여기에는 요한네스 브람스, 안토닌 드보르작, 쥘르 마스네 등이 포함되었다.

 

차이코브스키를 후원했던 짜르 알렉산더 3세

 

차이코브스키는 지휘자로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음악을 증진하는데 기여한다는 생각에서 자주 지휘를 맡았다. 1887년 1월에는 모스크바의 볼쇼이극장에서 그의 오페라 '체르비츠키'(짜리나의 샌달)를 공연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지휘자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지휘를 못하게 되자 극장측은 차이코브스키에게 에스오에스를 쳐서 대신 지휘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차이코브스키에게 있어서 오페라 지휘는 그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무대공포증을 극복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후 그는 러시아의 여러 도시와 유럽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지휘를 하는 일이 많아졌다. 1891년에는 미국의 초청을 받아 지휘를 하기도 했다. 카네기 홀의 준공을 기념하는 음악회에서 뉴욕음악협회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그의 '대관식 축제 행진곡'(Festival Coronatiton March)를 지휘했다. 그보다 앞서 1888년에는 생페터스부르크에서 그의 교향곡 제5번의 초연을 지휘했다. 그로부터 1주일 후에는 교향곡 제5번과 함께 음조시 '햄릿'(Hanlet)을 초연을 지휘했다. 두 작품 모두 대단한 찬사를 받으며 연주되었다. 차이코브스키는 1892년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원(Academie des Beaux-Arts) 회원으로 추천되었다. 러시아 예술가로서는 조각가 마르크 안토콜스키에 이어 두번째의 경사였다. 이듬해인 1893년 초에는 영국의 캠브릿지대학교로부터 명예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뉴욕의 카네기홀. 미국에 간 차이코브스키는 이 연주회장의 개관식에서 '대관식축제행진곡'을 지휘했다.

 

차이코브스키는 1893년 10월 28일과 11월 9일에 생페터스부르크에서 그의 교향곡 제6번 '비창'(파테티크)의 초연을 지휘했다. 모든 사람들이 기립하여 뜨거운 박수를 보냈고 차이코브스키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로부터 9일 후인 11월 18일에 차이코브스키는 향년 53세로서 세상을 떠났다. 아내도 없이, 자녀도 하나 없이 세상을 떠났다. 혹자는 차이코브스키가 10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11월 6일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지만 현재로서는 11월 18일이 가장 신빙성이 크다. 차이코브스키는 생페터스부르크의 알렉산더 네브스키(Alexander Nevsky) 수도원에 있는 티크빈(Tikhvin)묘지에 안장되었다. 차이코브스키의 묘지의 부근에는 러시아의 위대한 작곡가들인 알렉산더 보로딘, 미하일 글링카,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의 묘지가 있었다. 나중에는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밀리 발라키레프의 묘지도 추가되었다. 차이코브스키 이외에도 티크빈 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위대한 예술가들은 다음과 같다.

 

19세기 초반 생페터스부르크의 알렉산더 네브스키 수도원. 1710년에 표트르 대제가 설립한 수도원이다. 이곳 수도원묘지에 차이코브스키의 묘소가 있다.

 

- 밀리 발라키레프(Mily Balakirev: 1836-1910). 작곡가

- 알렉산더 보로딘(Alexander Borodin: 1833-1887). 작곡가

- 세자르 쿠이(Cesar Cui: 1835-1918). 작곡가

- 표도르 도스토예브스키(Fyodor Dostoyevsky: 1821-1881). 작가

- 알렉산더 글라추노프(Alexander Glazunov: 1865-1936). 작곡가

- 미하일 글링카(Mikhail Glinka: 1804-1857). 작곡가

- 이반 크릴로프(Ivan Krylov: 1769-1844). 작가

- 아르키프 쿠인드치(Arkhip Kuindzhi: 1842-1910). 화가

-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 1839-1881). 작곡가

- 마리우스 페티파(Marius Petipa: 1818-1910). 발레 마스터 겸 안무가

-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 1844-1908). 작곡가

- 안톤 루빈슈타인(Anton Rubinstein: 1829-1894). 피아니스트, 작곡가, 지휘자

- 블라디미르 스타소프(Vladimir Stasov: 1824-1906). 평론가

- 표도르 스트라빈스키(Fyodor Stravinsky: 1843-1902). 오페라 베이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아버지

 

생페터스부르크 알렉산더 네브스키 수도원의 티크빈묘지에 있는 차이코브스키의 묘소

 

차이코브스키의 사인은 콜레라로 알려져 있다. 며칠 동안 생패터스부르크의 교외에 있는 어느 마을에서 지낼 때에 깨끗하지 못한 마을의 강물을 마셨기 때문에 콜레라가 걸렸다는 얘기다. 그런데 어떤 유별난 사람들은 차이코브스키가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일부러 콜레라에 걸려 죽을 병을 자초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리하여 차이코브스키의 사인이 과연 무엇이냐를 놓고서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논란이 자주 있었다. 하지만 자살이 아니라 병마와 싸우다가 이기지 못해서 세상을 떠났다는 의견 쪽으로 기울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차이코브스키가 담배를 자주 피웠고 술도 자주 마셨기 때문에 원래부터 지병이 악화되었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정확한 사인은 모르고 있다. 차이코브스키의 음악은 클래식 음악 팬들이 사랑하는 음악들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렇고 '1812년 서곡'이 그렇다. 그리고 세편의 위대한 발레곡(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미녀)과 '슬라브 행진곡'(Marche Slave) 등 모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곡들이다. 여기에 그의 첫번째 피아노 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여섯 편의 심포니 중에서 후반의 세편,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과 '유진 오네긴' 도 대단한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들이다. 또한 '만프레드 교향곡', '리미니의 프란체스카', '이태리 기상곡'과 '현을 위한 세레나데'는 콘서트에서 자주 연주되는 레퍼토리이다.

 

 1830년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의 오리지널 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