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러시아의 차이코브스키

불행한 결혼과 동성애 생활

정준극 2015. 8. 12. 10:59

동성애의 2중생활과 불행한 결혼

차이코브스키와 여인들

 

위대한 작곡가의 사생활에 대한 논란으로서는 차이코브스키만큼 말이 많은 경우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특히 제정러시아라는 엄격한 사회구조 속에서의 스캔들이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차이코브스키는 점잖게 생긴 사람이 도무지 그럴 것 같지 않았지만 동성애자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애자로서 결혼도 하였고 그런가하면 결혼까지 한 입장에서 부인 이외에 마음 속의 다른 여인을 오랫동안 사모도 하였으니 그런 면에서 보면 차이코브스키는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 아닐수 없었다. 차이코브스키가 비록 동성애자였다고 하더라도 사정상 그럴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해할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러므로 동성애라는 단 한가지 상황만을 생각하여 이론적으로 그의 연애생활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는 주장만 내세운다면 미안한 일이 될수도 있다. 차이코브스키는 평생을 거의 독신으로 지냈다. 거의라고 말한 것은 그가 1877년에 37세의 나이로 결혼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차이코브스키가 모스크바음악원의 교수로 있을 때에 학생이었던 안토니나 밀류코바(Antonina Miliukova)와 결혼했다. 그 결혼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맞지 않는 것이었다. 차이코브스키는 안토니나와 고작 두달 반을 살다가 정말이지 견디기가 어려워서 떠났다.

 

차이코브스키는 과거 모스크바음악원의 제자였던 안토니나와 1877년에 결혼하였다.

 

그런 차이코브스키에 대하여 식구들은 그나마 이해를 하고 차이코브스키의 심정을 지지해 주었다. 훗날 나데츠다 폰 메크(Nadezhda von Meck) 부인도 그런 차이코브스키를 후원해주고 이해해 주었다. 나데츠다 폰 메크는 철도사업으로 거부가 된 사람의 미망인이었다. 나데츠다 폰 메크는 무려 13년 동안이나 차이코브스키를 경제적으로 후원해주고 정신적으로 위로가 되어 주었다. 두 사람은 13년이란 긴 세월동안 연락하며 지냈지만 서로 만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차이코브스키는 나데츠다 폰 메크로 인하여 그나마 안정된 상황 속에서 작곡에만 전념하고 지낼수 있었고 그리하여 불후의 명곡들이 탄생할수 있었다. 차이코브스키는 제자였던 안토니나와 결혼하기 전에 벨기에 출신의 소프라노인 데지레 아르토트를 좋아해서 결혼할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불발로 끝났다. 차이코브스키가 호모라고 했는데 대부분의 호모들이 그렇듯이 그도 한 남자와만 관계를 유지한 것이 아니라 여러 남자들과 연애감정을 가지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주로 상대방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래도 전문적으로 또는 직업적으로 같은 분야에 있으면 생각과 취미가 비슷할수 있을 것이므로 동성애로 발전할 가능성이 컸었다.

 

차이코브스키와 13년 동안이나 후원자 겸 친구 겸 멀리있는 이성으로서 지냈던 나데츠다 폰 메크

 

차이코브스키의 동성애에 대하여 두가지 의견이 있다. 하나의 의견은 음악학자인 데이빗 브라운(David Brown) 등이 내세운 것으로 '차이코브스키는 자기 자신이 마음속에 사회적으로 기피되고 있는 사항인 동성애에 오염되고 더렵혀졌다고 생각하였으나 그것을 자기의 운명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여서 그로부터 도저히 벗어날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속 괴로운 마음에서 동성애에 더렵혀진 상태로 계속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다른 의견은 차이코브스키가 자기의 동성애 성격에 대하여 원래 타고나기를 그런 것이기 때문에 죄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자연스러운 것이니 어쩔수 없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차이코브스키는 은밀한 중에 동성애자로서 2중생활을 하며 살았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동성애가 공공연하게 알려지면 사회적로부터 지탄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여 걱정하고 고민하였다. 당시 제정러시아에서는 남자가 되었던 여자가 되었던 동성간의 연애는 상당한 처벌을 받았다. 유럽의 모든 기독교 나라에서도 그러했지만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인식이 크게 작용했다. 창세기에 의하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아담을 만드셨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아담을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자를 만드셔서 둘이 함께 살게 하시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다니 그건 하나님의 원래  의도에 어긋하는 말이 안되는 얘기라는 것이었다. 제정러시아에서 동성애자는 체포하여 감옥에 가둘수 있고 모든 권리를 박탈 당하며 함께 먼 지방으로 유배를 보내거나 러시아로부터 추방하는 처벌을 했다. 그리고 동성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돌면 일단 경찰이 감시를 하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제약은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기 보다는 하나의 사회 규범으로서 이해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동성애자로 악인이 찍히면 앞날을 보장받을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차이코브스키와 결혼까지 약속했던 소프라노 데지레 아르토트

 

당시의 손바닥만한 사회에서 차이코브스키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은 은밀한 중에 상당히 알려졌을 것이다. 그런데 차이코브스키의 시대에는 아마도 그런 처벌들이 완화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귀족사회에서 동성애 케이스가 가끔씩 생기기 때문에 완화했던 것 같았다. 또한 표트르 대제에 의해 러시아에 서유럽의 문물과 사상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다보니 인간의 자유에 대한 하나의 계몽사상이 확장되었다는 것도 고려할수 있다. 그리하여 1890년대의 제정러시아에서는 동성애가 사회적으로 심하게 지탄을 받아야 할 정도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코브스키는 법률을 공부했기 때문인지 사회 규범을 잘 알고 있어서 자기의 동성애 감정을 일부러 내세우지 않고 조심했다. 차이코브스키는 어찌해서 동성애를 추구하게 되었는가? 가까운 친구라고 해도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저 추측만 했을 뿐이었다. 차이코브스키가 이성애도 유지해야 하고 결국 2중생활을 해야 한다고 결심한 이유도 그저 추측 뿐이다. 우선 그의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서 결혼을 생각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가정을 가지는 것도 안정된 생활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차이코브스키는 원래 아이들을 사랑했다. 아이들을 위해 나중에 '호두까기 인형'을 비롯한 동화의 세계를 음악으로 만든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이러니 저러니 얘기가 많지만 다 줄이고 결론만 말하자면 그가 이성애와 동성애를 동시에 추구하는 2중생활을 했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그의 작품세계에 크게 영향을 준 일은 없다는 것이다.

 

차이코브스키의 동생인 모데스트. 차이코브스키의 평생 친구처럼 지냈다. 대본가여서 '스페이드의 여왕'과 '이올란타'의 대본을 썼다.

 

돌이켜 보건대 차이코브스키가 결혼을 생각했지만 이루지 못한 일이 있다. 상대는 벨기에 출신의 소프라노 데지레 아르토트(Désirée Artôt: 1835-1907)이었다. 차이코브스키보다 5살 연상이었다. 데지레는 이탈리아 오페라단과 함께 러시아에서 순회공연을 하고 있었다. 차이코브스키는 그때 모스크바에서 데지레를 처음 만났다. 차이코브스키가 29세 때인 1869년이었다. 데지레는 놀랄만큼 뛰어난 재능의 성악가였다. 뛰어난 재능 뿐만 아니라 뛰어난 미모도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데지레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오페라의 여신이었다. 차이코브스키와 데지레는 서로에게 끌려서 당장에 열화와 같은 연애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얼마후 두 사람은 결혼하기로 굳게 약속했다. 그런데 데지레는 한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했다. 차이코브스키를 사랑하여서 결혼을 하기는 하겠는데 무대 생활은 포기할수 없으며 또한 러시아에서 살 생각은 없다는 것이었다. 벨기에에 가서 살던지 프랑스에 가서 살자는 것이었다.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은 차이코브스키에게 유명한 성악가의 그늘 밑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지 생각이나 해 보았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런 생활을 한다면 창조성이니 무어니 하는 것은 꿈도 꾸지 말라고 경고했다. 차이코브스키는 그런 얘기를 듣고나자 혼란스러워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동성애 생활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차이코브스키는 데지레와 결혼하기로 언약을 맺었으므로 체면상 없던 일로 하자고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차이코브스키는 아버지와 장시간에 걸쳐 결혼하는 것이 좋으냐 어떠냐를 가지고 의논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차이코브스키에게 '기왕에 결혼하려고 마음 먹었으면 어찌하겠느냐? 그대로 실행하라'고 말했다.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브. 차이코브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초연했다. 그는 드레스덴에서 리스트의 딸인 코제마와 결혼했다. 나중에 코제마는 바그너의 부인이 되었다. 차이코브스키는 폰 뷜로브를 매우 존경했다.

                    

그런데 참으로 어이없게도 얼마 후에 데지레가 차이코브스키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이탈리아 오페라단에 속해 있는 스페인 출신의 어떤 바리톤과 결혼해 버리고 말았다. 일이 그렇게 되자 차이코브스키로서는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코브스키는 데지레를 잊지 못해서 그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 Bb 단조와 음조시인 파툼(Fatum)에 데지레를 생각하는 마음을 담았다. 그후 차이코브스키는 데지레를 몇번 모임에서 만난 일이 있다. 그리고 1888년에는 데지레의 부탁으로 '여섯 곡의 프랑스 노래'(Op 65)를 작곡했다. 훗날 차이코브스키는 데지레야 말로 그가 사랑했던 유일한 여인이라고 털어 놓았다. 차이코브스키는 데지레와 이상하게 헤어지고 난지 7년 후에 모스크바음악원 시절에 제자였던 이오시프 코테크(Iosif Kotek)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가 몇 달 후에 차이코브스키는 이오시프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오시프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며 눈물을 보였지만 차이코브스키는 이오시프를 멀리하였다. 그런데 일이 또 이상하게 되느라고 이오시프와 결별하던 때에 10년 넘게 막역한 친구로서 지낸 블라디미르 쉴로브스키(Vladimir Shilovsky)가 어떤 여자와 갑자기 결혼식을 올렸다. 솔직히 말해서 차이코브스키와 쉴로브스키는 말이 친구이지 친구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관계를 유지해 왔었다. 다시 말해서 차이코브스키의 동성애 상대방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웬 여자와 결혼을 하자 차이코브스키로서는 또 다시 마음에 충격과 좌절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하여튼 별 일도 다 있다. 차이코브스키는 동생 모데스트에게 자기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털어 놓은 일이 있다. 그러면서 언젠가 동성애자라는 것이 밝혀지면 식구들이 난처해 질수도 있기 때문에 적당한 여자와 결혼할 생각이 있다고까지 얘기한바 있다. 실제로 차이코브스키는 동성애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이성과의 결혼 계획도 자꾸 틀어졌고 동성과의 관계도 계속되지 못하였다. 

 

차이코브스키와 10년이 넘게 동성애의 관계에 있었던 블라디미르 쉴로브스키. 차이코브스키보다 12년 연하였다. 쉴로브스키는 시인 겸 작곡가 겸 극본가로서 재능이 많았다. 그런데 어떤 여자와 결혼했다.

 

차이코브스키는 37세이던 1877년에 모스크바음악원의 제자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Antonina Miliukova: 1848-1917)와 결혼하였다. 제자이지만 차이코브스키와는 여덟살 아래일 뿐이었다. 안토니나는 오래전부터 차이코브스키를 몹시 사모하여서 어느때부터인가는 계속 열정적인 편지를 보내어 사랑을 호소하였고 결국은 결혼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차이코브스키는 마침내 제자 안토니나의 일방적이고도 열정적인 프로포즈에 감동하여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다. 따지고보면 이제 두 사람의 결혼을 방해할 아무런 장애물도 없었다. 차이코브스키는 동생 아나톨리와 연로한 아버지에게 이미 안토니나와 약혼했다는 사실을 통보했지만 다른 식구들이나 친구들에게는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혼식 전날에 가서야 동생 모데스트와 사샤 또는 그래도 친구로 남아 있는 블라디미르 쉴로브스키에게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실제로 결혼식에는 동생 아나톨리만 오라고 했다. 그런데 차이코브스키는 결혼식을 마치자 마자 '아, 내가 실수를 해도 큰 실수를 했다. 공연히 결혼했다'고 하면서 후회하였다. 신혼부부는 신혼여행을 갔지만 차이코브스키는 신혼여행 내내 안토니나와는 정신적으로나 이성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생각만 했다. 차이코브스키는 자기의 섹스 감정에 대하여, 즉 동성애자이면서도 양성애자인 것을 안토니나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고 싶었으나 안토니나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잠시나마 미세스 차이코브스키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 좀 잘 살지!

 

차이코브스키는 결혼이란 것을 하고 나서 시간이 지나자 결혼이라는 것은 안토니나가 되었던 누가 되었던 자기에게는 도무지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차이코브스키는 동생 사샤에게 보낸 편지에서 '혼자 사는 생활에 너무나 익숙하다보니 누구와 함께 밤낮으로 지내야 하는 결혼이 낯설기만 하다. 자유를 잃은 느낌이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결혼을 했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체면이  높아지거나 개인적인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까지 서슴치 않았다. 아무튼 차이코브스키는 결혼을 하긴 했지만 경제적으로도 쪼들렸고 작곡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상당히 좌절해 있었다. 차이코브스키는 안토니나와 결혼하고 나서 두달 반 동안만 함께 지내고 별거에 들어갔다. 차이코브스키는 휴식을 하고 자기가 과연 누구냐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기 위해 스위스의 클라렌스로 가서 혼자 지냈다. 서로 별거는 했지만 차이코브스키와 안토니나는 법적으로 이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로 한번도 동거한 일이 없으며 자녀도 물론 없다. 안토니나는 대단한 여자여서 나중에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세 자녀를 두었다. 차이코브스키는 결혼의 실패에 대하여 안토니나도 책임이 있다는 얘기를 한번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또 다시 어떤 여인을 사랑한다든지 또는 어떤 남자와 애정적인 관계를 갖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스위스의 클라렌스. 차이코브스키가 안토니나와 결혼을 후회하고 집을 떠나 한동안 은거했던 곳이다.

 

그러한 때에 지성적이며 아름답고 부유한 나데츠다 폰 메크(Nadezhda von Meck) 부인이 나타났다. 폰 메크 부인은 철도사업으로 돈을 많이 번 부호의 미망인이었다. 예술을 애호하여서 러시아의 가난한 예술가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했다. 폰 메크 부인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로서는 목재로 큰 돈을 번 사람, 방직으로 큰 돈을 번 사람, 역시 철도사업으로 많은 돈을 번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주머니에 돈이 넉넉하자 사회적인 명예를 얻고 싶었던지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일들을 펼쳤다. 주로 러시아의 젊은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그런데 폰 메크 부인은 다른 부자들과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다른 사람들은 러시아적인 예술가만을 후원했지만 폰 메크 부인은 서유럽적인 예술가를 후원했다. 그것이 차이코브스키였다. 또 한가지 폰 메크 부인이 다른 부호들과 달랐던 것은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를 어떻게 후원하고 있다는 것을 남들에게 알리기를 좋아했지만 폰 메크 부인은 남들이 알지 못하게 했다. 폰 메크 부인은 우연한 기회에 차이코브스키의 음악을 듣고는 어쩌면 이렇게 자기의 심정을 잘 표현한 곡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있는 때에 폰 메크 집안에 음악가로서 고용되어 있는 이오시프 코테크가 폰 메크 부인에게 '제가요, 차이코브스키 선생님을 잘 아는데요, 어떨까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작품을 하나 작곡해 달라고 부탁하면요, 그래서 이 집에서 손님들을 위해 연주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라고 말했다. 이오시프는 잘 아는 대로 차이코브스키의 모스크바음악원 시절 제자로서 한때 차이코브스키와 좋아 지내어서 결혼까지 생각했었던 여자였다. 폰 메크 부인은 그러지 않아도 차이코브스키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던 때에 그런 소리를 듣자 그렇게 하라고 부탁했다. 그것이 차이코브스키가 37세 때인 1877년의 일이었으니 잘 아는대로 안토니나 밀류코바와 결혼했다가 별거하기 시작한 때였다.

 

1958년에 소련 정부가 발행한 차이코브스키 기념 우표

 

그로부터 차이코브스키와 폰 메크 부인의 플라토닉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폰 메크 부인은 1년에 6천 루블을 차이코브스키의 생활비로 후원하였다. 6천 루블이 지금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당시로서는 상당한 금액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차이코브스키는 폰 메크 부인과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지금은 어떤 곡을 어떻게 작곡하고 있는지 등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물론 개인적인 얘기도 적지 않게 썼다. 폰 메크 부인과 차이코브스키가 주고 받은 편지는 무려 1천 통이 넘는다. 1년에 거의 1백통에 달하는 편지를 주고 받았다는 것이며 다시 말해서 적어도 사나흘에 한번은 편지를 주고 받았다는 계산이니 대단하기는 대단했다. 그런데 세상에 어느 누구보다도 가깝게 마음을 털어 놓는 편지를 주고 받았으면서도 단 한번도 직접 만나서 차라도 한잔 마신 일은 없다. 그러기를 13년이나 계속했다. 이 기간 중에 차이코브스키의 주요 작품들이 만들어진 것은 역사적인 일이었다. 그러다가 1890년에 폰 메크 부인으로부터의 경제적 후원이 끊어졌다. 알아보니까 폰 메크 부인도 경제적으로 매우 심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차이코브스키는 폰 메크 부인과의 관계가 끊어진 후 거의 3년 동안 후회와 자책으로서 말할수 없는 정신적인 방황을 겪으며 지냈다. 한편, 폰 메크 부인은 부인대로 차이코브스키에 대한 섭섭함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면서도 이성적으로 단 한번도 접근해 오지 않았던 것이 섭섭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전혀 사실과 다르다는 얘기였다.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코브스키를 이성적인 상대로서 생각한 일이 없었다는 것이 나중에 주변 사람들의 한결같은 얘기였다.

 

차이코브스키가 어릴 때 치던 피아노. 보트킨스키 차이코브스키 기념관. 어릴때부터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났던 차이코브스키가 인생을 살면서 그토록 견디기 어려운 좌절과 번뇌와 방황의 시기를 보낼 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