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작곡가로서의 명성
오페라 작곡가로서 차이코브스키의 활동을 소개하기 전에 러시아 국민음악파인 '5인조'(The Five)와 차이코브스키의 관계에 대하여 잠시 설명코자 한다. 차이코브스키가 아직도 16세의 청년으로서 생페터스부르크의 제국법률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에 안톤 루빈슈타인은 음악을 애호하는 귀족들을 설득하여서 러시아음악협회의 설립을 지원할 것을 당부했다. 이와 함께 평론가인 블라디미르 스타소프(Vladimir Stasov)와 18세의 젊은 피아니스트인 밀리 발라키레프(Mily Balakirev)가 회동하여 러시아음악의 국민주의적 발전을 도모키로 합의했다. 이들과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유럽 스타일에 젖어 있는 오페라들은 이제 그만하고 러시아 전통 민속을 바탕으로 삼는 러시아 국민주의적 오페라들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나는데 의견을 함께했다. 이들은 러시아 국민주의적 오페라를 발전시는 데에는 마하일 글링카의 오페라들을 모델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고 내세웠으며 한술 더떠서 러시아에는 서유럽식의 음악원이 필요없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돌이켜보면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의 근대화를 위해 서유럽의 문물을 적극 도입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였지만 세월이 지나서 알렉산더 2세 때에는 '러시아적인 것을 찾아서 발전시키자'라는 주장이 강력해졌다. 아무튼 이러한 '러시아 음악 재발견' 프로젝트에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확대되었다. 군대의 요새건축 전문가로서 제정러시아군의 장교인 세자르 쿠이, 공무원인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 해군 사관인 니콜리아 림스키 코르사코프, 그리고 이들보다 나중에 화학자인 알렉산더 보로딘이 '러시아 음악 재발견'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발라키레프와 마찬가지로 음악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음악적인 재능은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이들 다섯 명의 음악가들을 '모구차야 쿠츠카'(Moguchaya kuchka)라고 불렀으니 영어로 번역하면 '막강한 한줌'(The Mighty Handful) 또는 '5인조'(The Five)이다.
안톤 루빈슈타인. 생패터스부르크음악원의 창시자
발라키레프와 스타소프의 노력은 느닷없는 주장 때문인지 1830년대에 러시아의 지식인층에서 대단한 논란이 되었다. 러시아의 예술가들은 서유럽의 문화를 도입하여 러시아적인 것으로 동화시켜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한지, 그렇지 않으면 서유럽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러시아만의 새롭고 활기에 넘친 문화예술을 개발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었다. 안톤 루빈슈타인은 서유럽에서 음악을 공부하였고 서유럽의 음악 스타일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평론가이기도 한 루빈슈타인은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하지 않은 아마추어들이 작곡을 한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비난했다. 루빈슈타인은 '연마없는 창조성은 재능의 쓰레기일뿐이다'라고 말했다. 루빈슈타인은 생페터스부르크에 러시아 최초의 전문음악원을 설립하였다. 당연히 서유럽으로부터 초빙되어 온 사람들이 교수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러시아의 국민주의적 음악가들은 서유럽에서 온 교수들을 외계인이라고 불렀다. 발라키레프는 루빈슈타인을 음악적 보수주의자라면서 공격했다. 그리고 작곡을 비롯한 음악활동은 반드시 전문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할수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도 반대의견을 펼쳤다. 무소르그스키가 발라키레프의 공격전선에 합세하였다. 무소르그스키는 루빈슈타인이 설립한 음악원이 순수한 러시아 학생들의 마음을 오염시키는 곳이며 나아가 러시아 전통에 대한 증오심 및 혐오심을 키워주는 곳이라고 내세웠다. 그러면서 음악원의 교수들이란 사람들은 '반음악적인 의상을 입은 허수아비들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차이코브스키를 비롯한 음악원의 학생들은 논쟁의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논쟁의 핵심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음악원장인 루빈슈타인은 학생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잠자코 있으라는 함구령을 받았다. 루빈슈타인은 '학생들은 그저 열심히 공부나 하면 된다'고 말했다.
세자르 쿠이,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 알렉산더 보로딘
밀리 발라키레프
루빈슈타인의 제자인 차이코브스키도 '5인조'의 공격 목표가 되었다. 이들은 차이코브스키가 자기들의 노선을 따르지 않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5인조' 중에서도 세자르 쿠이는 원래가 프랑스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좋아서 러시아에 남아서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5인조'의 루빈슈타인 및 차이코브스키 공격에는 세자르 쿠이가 언제나 앞장 섰다. 쿠이가 차이코브스키의 마음에 상처를 준 일은 차이코브스키의 졸업작품인 칸타타에 대하여 참담하리만치 형편없다는 평론을 쓴 것이었다. 차이코브스키는 마치 러시아의 사회에서 버림받은 듯한 심정이었다. 1867년에 루빈슈타인은 러시아음악협회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자리에서 사임했다. 밀리 발라키레프가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그때 차이코브스키는 모스크바음악원의 음악이론 교수였다. 차이코브스키는 러이사음악협회 오케스트라를 위해 Characteristic Dances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한바 있다. 하지만 루빈슈타인이 나가고 발라키레프가 새로운 지휘자가 된 마당에 과연 약속을 지켜야 할지 걱정이었다. 차이코브스키는 '5인조'의 수석이나 마찬가지인 발라키레프가 자기의 음악에 대하여 적대감을 갖고 있다면 문제라고 생각했다. 과거에 차이코브스키는 발라키레프가 찬사를 보낸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을 호의적으로 말하지 않았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아무튼 '5인조'는 차이코브스키의 이념이나 목적과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약속은 약속이므로 지키기로 하고 스코어를 보냈다. 다만, 악보와 함께 발라키레프에 게 보낸 편지에서 '별로 신통치 않은 작품이니 연주에 포함하지 않아도 상관 없습니다'라고 썼다. 그런데 바로 그 즈음에 '5인조'에서 발라키레프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었다. 그런 입장에서 발라키레프는 차이코브스키의 작품을 받자 은근히 두둔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종전 같으면 생페터스부르크음악원 출신이고 더구나 루빈슈타인의 직계 제자였기 때문에 비난의 표적이 되었는데 사정이 조금 달라져서 이제는 발레키레프가 차이코브스키에게 찬사를 보내는 입장이 되었다. 발라키레프는 차이코브스키에게 보낸 답장에서 '당신은 참으로 훌륭한 작곡가올시다.'라고 썼다. 그로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무난해졌다. 2년 후인 1869년에 발라키레프는 차이코브스키의 환상적 서곡인 '로메오와 줄리엣'의 연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는 '5인조'가 차이코브스키의 작품들을 반갑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5인조'는 차이코브스키의 두번째 교향곡인 '리틀 러시아'도 진정으로 환영하였다. 차이코브스키도 '리틀 러시아'에서 전통적인 서유럽 양식의 음악보다는 러시아의 전통 민속음악을 포함하였다. 그것이 '5인조'로부터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7년후에 차이코브스키는 이 교향곡의 오프닝 악장을 서유럽식으로 대폭 수정하였다. 아무튼 차이코브스키는 '5인조'와 별 탈 없이 친밀하게 지내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자기 자신만의 독립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차이코브스키는 마찬가지로 생페터스부르크음악원의 보수적인 입장으로부터도 거리를 두었다.
차이코브스키는 생페터스부르크에 있을 때 이 건물의 어떤 방에서 살았다. 건물 외벽에 기념명판이 붙어 있다.
작곡가로서 차이코브스키는 초년에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저 수없는 노력을 기울인 후에야 작곡가로서 인정을 받고 명성을 떨칠수가 있었다. 안톤 루빈슈타인의 동생인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이 차이코브스키의 음악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도 역시 평론가였기 때문에 가끔씩은 차이코브스키의 음악에 비평을 가해야 했다. 예를 들어서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은 차이코브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형편없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오늘날 차이코브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이 세계 3대 피아노 협주곡의 하나로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의 비평은 그저 비평을 위한 비평이라고만 생각되는 것이었다. 차이코브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은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이 초연을 거부했기 때문에 독일의 한스 폰 뷜로브가 초연을 맡았다. 모스크바에서의 초연에서 한스 폰 뷜로브는 피아니시모를 뛰어나게 표현하여 차이코브스키를 크게 감동시켰다. 한스 폰 뷜로브는 피아니스트로서, 지휘자로서 차이코브스키의 음악을 널리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차이코브스키의 작품들이 차츰 성공을 거두게 된 배경에는 연주자들의 기여가 컸다. 이름난 연주자들이 너도나도 차이코브스키의 작품들을 연주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에 이에 따라 인기를 높일수가 있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러시아 청중들의 태도가 바뀐 것이었다. 러시아의 청중들은 연주자들의 뛰어난 연주 재능에 박수를 보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런 태도를 버리고 음악 자체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향으로 변하였다. 차이코브스키의 음악은 기교보다는 깊이있는 음악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니콜라이와 안톤 루빈슈타인 형제.
차이코브스키는 작곡가로서 오페라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비교적 일찍부터 작곡을 시작한 것을 보면 오페라는 좀 늦은 편이었다. 첫 오페라는 그가 29세 때인 1869년, 알렉산더 오스트로브스키 원작의 '보예보다'(The Voyevoda)였다. 그러나 차이코브스키는 이 오페라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부 음악은 나중에 다른 오페라에 사용하였고 전체 스코어는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다. 다음 오페라는 1870년의 운디나(Undina)였다. 전체 공연을 이루어지지 않았고 발췌곡만 공연되었다. 역시 만족하지 못하고 악보를 파괴했다. 이 두 오페라의 사이에 '만드라고라'(Mandragora)라는 오페라의 작곡을 시도했다. 꽃과 곤충들의 짧은 합창만을 완성했을 뿐이며 그 다음은 아무런 진척을 이루지 않았다. 아무런 구박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첫 오페라는 '오프리츠니크'(The Oprichnik)였다. 1874년에 초연되었다. 대본은 알렉산더 오스트로브스키가 맡기로 했다. 그러나 무슨 사연인지 잘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사이가 멀어졌다. 게다가 원작자인 이반 라체크니코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차이코브스키는 직접 대본을 쓰기로 결심했다. 다만, 프랑스의 위대한 대본가인 외진 스크리브의 스타일을 많이 참조했다. 세자르 쿠이는 '오프리츠니크'를 무성격의 작품이라면서 언론을 통해 심한 공격을 퍼부었다. 무소르그스키는 이 오페라가 대중들의 저속한 취미에 부합하는 것일 뿐이라면서 무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프리츠니크'는 아직까지도 러시아에서 가끔씩 공연되는 오페라로서 존속하고 있다.
'오프리츠니크'의 무대
오페라 '대장장이 바쿨라'는 고골의 '크리스마스 이브'를 바탕으로 삼은 작품이다. 대본은 야코브 폴론스키가 썼다. 원래 알렉산더 세로프(Alexander Serov)를 위해 만든 대본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더 세로프가 세상을 떠나자 누구든지 그 대본으로 오페라를 만들어도 좋다고 되었으며 심사를 하여 가장 우수한 작품은 제국마리인스키 극장에서 초연된다는 발표가 있었다. 차이코브스키가 우승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1876년의 초연은 별로 환영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사족이지만 차이코브스키가 세상을 떠난 후에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똑 같은 스토리를 바탕으로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오페라를 만들었다. 그후 차이코브스키는 정말로 훌륭한 오페라를 하나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해서 푸슈킨 원작읭 '유진 오네긴'을 오페라로 만들었다. 오늘날 불멸의 명작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차이코브스키의 마지막 두 편의 오페라(스페이드의 여왕, 이올란타)의 대본은 그의 동생 모데스트 차이코브스키가 썼다.
'유진 오네긴'의 한 장면
[차이코브스키의 오페라 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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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대본 |
원작 |
초연 |
초연장소 |
1 |
보예보다(The Voyevoda) |
알렉산더 오스트로브스키(1823-1886) |
알렉산더 오스트로브스키의 '볼가의 꿈' 극본 |
1869 |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1869) |
2 |
운디나(Undi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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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완성 (1869) |
3 |
오프리츠니크(The Oprichnik) |
차이코브스키 |
이반 아체크니코프(Ivan Lazhechnikov: 1792-1869)의 비극 '오프리츠니크' |
1874 |
생페터스부르크 마리인스키 극장 |
4 |
대장장이 바쿨라(Vakula the SmithL Kuznets Vakula) |
야코프 폴론스키(Yakov Polonsky: 1819-1898) |
고골의 '크리스마스 이브' |
1876 |
생페터스부르크 마리인스키 극장 |
5 |
유진 오네긴(Eugene onegin: Yevgeni onegin) |
차이코브스키와 콘스탄틴 쉴로브스키(Konstantin Shilovsky) |
알렉산더 푸슈킨 |
1879 |
모스크바 말리 극장 |
6 |
오플레앙의 처녀(The Maid of Orleans) |
차이코브스키 |
프리드리히 쉴러 |
1881 |
생페터스부르크 마리인스키 극장 |
7 |
마제파(Mazeppa) |
빅토르 브레닌(Victor Brenin: 1841-1926) |
알렉산더 푸슈킨 |
1884 |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 |
8 |
체레비츠키(Cherevichki) |
야코프 폴론스키 |
고골의 '크리스마스 이브' |
1887 |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 |
9 |
마법녀(The Enchantress: The Sorceress) |
이폴리트 쉬파친스키(Ippolit Shpazhinsky: 1848-1917) |
이폴리트 쉬파친스키의 소설 |
1887 |
생페터스부르크 마리인스키 극장 |
10 |
스페이드의 여왕(The Queen of Spades: Pique Dame: Pikovaya dama) |
모데스트 차이코브스키 |
알렉산더 푸슈킨 |
1890 |
생페터스부르크 마리인스키 극장 |
11 |
이올란타(Iolanta: Iolanthe) |
모데스트 차이코브스키 |
헨리크 헤르츠(덴마크 Henrik Hertz)의 Kong Renes Datter(르네 왕의 딸) |
1892 |
생페터스부르크 마리인스키 극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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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예보다'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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