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차이코브스키에 대한 이얘기 저얘기
피아노 앞의 차이코브스키
차이코브스키는 53년이라는 비교적 길지 않은 생애를 살았지만(1840-1893) 음악의 역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수많은 걸작들을 남긴 위대한 작곡가이다. 그가 남긴 전체 작품 수는 정확히 말해서 169개에 이른다. 차이코브스키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작곡했다. 교향곡, 관현악곡, 협주곡, 실내악, 피아노곡, 바이올린곡, 오페라, 발레, 그리고 심지어는 러시아정교회의 제례를 위한 합창음악도 만들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뛰어난 작품들은 무대음악이라고 말할수 있다. 차이코브스키는 음악으로서 러시아의 발레를 높은 수준으로 올려 놓은 사람이었다. 차이코브스키는 근대 러시아의 작곡가들 중에서 아마 최초로 국제적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러시아의 작곡가 중에서 세계적으로 차이코브스키만큼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도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차이코브스키는 1891년 뉴욕의 카네기 홀이 개관될 때에 참가하였다. 이탈리아나 영국의 음악가들은 미국을 자주 찾아갔었지만 러시아 음악가로서는 차이코브스키가 특별했다. 차이코브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음악원에서 유럽의 전통적인 음악수업을 받았다. 그래서 당시 러시아 국민음악파인 '5인조'(The Five)로부터는 달갑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지내야 했다. 러시아의 것은 도외시하고 외국 문물에만 집중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인지 차이코브스키는 국제적으로 인기있는 작곡가가 되었지만 러시아에서는 지나치게 서유럽적인 음악가라고 하여서 외면을 당해야 했다. 그러는데 1880년 모스크바에서 푸쉬킨의 기념상을 제막하는 행사로부터 그에 대한 인식에 새로워졌다. 이 행사에서 도스토예브스키는 기념사를 통해서 '푸쉬킨은 평소에 러시아가 서구와 손을 잡아야한다고 주장하셨다'라고 강조했다. 즉, 서구문화를 알지 못하면 러시아의 발전을 기대할수 없다는 얘기였다. 도스토예브스키의 메시지는 러시아의 전역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었다. 러시아가 우물안 개구리처럼 있어서는 발전을 이룰수가 없다는 얘기여서 많은 공감을 얻었다. 그로부터 서구취향적인 차이코브스키의 음악은 오히려 존경을 받았다. 심지어 차이코브스키를 마치 비밀종단의 지도자처럼 추종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식인들이라고 하는 알렉산드르 베노이스(Alexandre Benois), 레온 바크스트(Leon Bakst), 세르게이 다이길레프(Sergei Diaghilev) 등이 그러했다. 아무튼 차이코브스키에 대한 인식은 전혀 새롭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차이코브스키에 대한 이 얘기 저 얘기를 정리해 본다.
러시아 프스코프 오블라스트(Pskov Oblast)의 푸쉬킨스키예 고리(Pushkinskiye Gory)에 있는 스뱌토고르스크(Svyatogorsk) 수도원 묘지의 푸쉬킨 묘소
- 차이코브스키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서 관현악곡인 '로미오와 줄리엣', 교향시인 '템페스트', 서곡인 '햄릿', 극음악인 '햄릿'을 작곡했다. '템페스트'(The Tempest)는 차이코브스키가 1873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이 초연의 지휘를 했다. 템페스트는 폭풍우라는 뜻이지만 그와 은 격정을 말한다. 차이코브스키는 나데츠다 폰 메크(Nadezhda von Meck: 1831-1894)부인으로부터 사실상 템페스트와 같은 감정을 받았었다. 차이코스브키가 부유한 기업인인 나데츠다 폰 메크 부인을 알게 된 사연은 이러하다. 폰 메크 부인은 젊은 바이올리니스트인 이오시프 코테크를 후원하였다. 이오시프 코테크는 차이코브스키의 제자이기도 했지만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 이오시프 코테크를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이 폰 메크 부인에게 소개하였다. 그러던 차에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코브스키의 교향시 '템페스트'를 듣고 크게 감동하였고 루빈슈타인에게 차이코브스키에 대하여 여러가지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폰 메크 부인이 차이코브스키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오시프 코테크는 폰 메크 부인을 만나서 그러지 말고 차이코브스키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어 그의 음악에 관심이 깊다는 얘기를 하라고 권면하였다. 그래서 폰 메크 부인인 차이코브스키에게 편지를 썼다. 다만, 본명을 감추고 '열렬한 찬미자'(fervent admirer)라고 썼다. 그리하여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코브스키의 음악적 후원자가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단 한번도 만난 일이 없다. 그저 1877년부터 1890년까지 13년에 걸쳐서 편지만 주고 받았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편지는 무려 1천 2백여 통이나 되었다고 하니 계산해 보면 며칠에 한번씩 편지를 주고 받은 셈이다.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코브스키가 실의에 빠져 있을 때에 위로가 되었고 다시 정신을 차릴수 있는 힘디 되어주었다. 예를 들어서 차이코브스키는 그의 교향곡 5번이 비판을 받자 실의에 빠져 있었지만 폰 메크 부인의 격려로 실의를 잊고서 다시 작곡에 전념할수 있었다. 두 사람은 13년 동안 한번도 만난 일이 없다고 했지만 실은 1879년 8월에 우연히 마주친 일은 있다. 하지만 차이코브스키가 폰 메크 부인을 알아보았는지 어떤지는 모르기 때문에 실은 만남이라고까지 말하기는 어렵다. 차이코브스키가 1873년에 완성한 교향시 '템페스트'는 구조에 있어서 그가 이전에 작곡한 '로미오와 줄리엣 환상적 서곡'과 비슷한 점이 있다. 격정적인 주제가 전편을 누비는 구성이다. '템페스트'에서는 미란다와 페르디난도가 처음 만난 이후 사랑의 열정이 마치 폭풍처럼 몰아치게 된다. 이것이 차이코브스키와 폰 메크 부인과의 관계와 같다고 볼수는 없지만 실상 두 사람이 편지로나마 열정을 함께 나누었던 것은 숨길수 없는 사실이다.
나데츠다 폰 메크 부인
- 차이코브스키의 대표적인 오페라인 '유진 오네긴'(Eugene onegin)은 차이코브스키와 그의 부인 안토니나와의 관계를 비유하여서 반영한 작품이라는 얘기가 있다. 오페라 '유진 오네긴'은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시골 소녀인 타티아나는 마침 휴가를 위해 시골을 찾아온 오네긴을 사랑하게 된다. 오네긴은 도시의 멋쟁이 청년이다. 타티아나는 오래 전부터 자기가 읽은 소설을 통해서 그런 멋쟁이 남자를 마음 속으로 그려 왔는데 현실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소설에서는 오네긴은 바이런의 시에 등장하는 영웅과 같은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니 꿈많은 문학소녀 타티아나가 오네긴을 만난 순간 사랑에 빠지지 않을수 없었다. 타티아나는 오네긴에게 편지를 보내서 수줍은 사랑고백을 한다. 그러나 오네긴은 타티아나에게 자기를 잊어 달라고 말하고 떠난다. 그로부터 몇년이라는 세월이 흐른다. 상황은 극적으로 변해 있다. 타티아나는 비록 퇴역장군이지만 부유한 렌스키 공작의 부인이 되어 있다. 타티아나는 그의 저택에서 열린 무도회에서 우연히 오네긴을 다시 만난다. 이번에는 오네긴이 타티아나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오네긴을 거부한다. 그러나 타티아나의 마음 속엔 아직도 오네긴의 모습이 남아 있다. 이러한 소설 이야기는 흥미롭게도 차이코브스키의 실제 생활에서 엿볼수 있다. 1877년이었다. 마침 차이코브스키가 '유진 오네긴'을 작곡하고 있던 때였다. 차이코브스키는 전에 제자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로부터 장문의 편지 한장을 받는다. 마치 오페라에서 오네긴이 타티아나로부터 사랑의 고백하는 편지를 받는 것과 같다. 안토니나는 모스크바음악원을 졸업하고서 음악으로 생활을 하지 않고 양장점에서 옷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안토니나는 차이코브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표트르, 당신은 잊을수가 없어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수 없어요. 제게는 어떤 다른 남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일순간의 일이 아닙니다. 나의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자라온 감정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수 없고 그러지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감정을 부서트리고 싶지도 않습니다.'라고 썼다. 차이코브스키는 그해 5월 20일에 안토니나를 찾아가서 만났다. 그리고 자기는 절대로 안토니나를 사랑할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는데 한 달 후에 차이코브스키는 무슨 마음의 변화가 있었는지 안토니나를 찾아가서 청혼을 하였다. 아마 그때 차이코브스키가 동성연애자라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에 그런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청혼을 했던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결혼은 재앙이었다. 그리고 결혼한지 6주 후에 두 사람은 영원한 별거에 들어갔다.
차이코브스키와 부인 안토니나 밀류코바. 차이코브스키는 안토니나와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나 당시에 차이코브스키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나돌자 그런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안토니나와 갑자기 결혼했다는 얘기가 있다.
- 차이코브스키의 대적인 작품 중의 하나인 '1812년 서곡'은 차이코브스키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작품이지만 실상 그가 열정을 가지고 작곡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쩔수 없이 형식적으로 작곡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차이코브스키는 '1812년 서곡'을 1812년 사건의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곡했다. 1812년 사건이란 나폴레옹이 유럽제패의 야욕으로 러시아를 침공하여서 모스크바까지 점령하였으나 추위와 식량부족을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다가 은인자중하고 있던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던 사건을 말한다. 1882년은 그 전투가 있은지 70년이 되는 해였다. 1880년대 초반에 러시아에서는 세가지 큰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1812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이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짜르 알렉산더 1세가 세우는 성당이었다. 그리고 1881년에는 짜르 알렉산더 2세의 대관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또한 1882년에는 모스크바 예술산업 대전시회(박람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그래서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은 차이코브스키에게 이런 국가적인 행사들을 축하하는 작품을 작곡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차이코브스키는 1880년 10월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6주 후에 '1812년 서곡'을 완성하였다. 차이코브스키는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새로운 작품은 대단히 소란스럽고 큰 소리만 나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덧붙여서 '자기가 열정을 가지고 작곡하지 않았기 때문에 따듯함이라든지 애정이 없는 작품이며 그런 이유로 예술적인 가치가 없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당국은 차이코브스키의 '1812년 서곡'을 1881년 새로 완공되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의 앞 마당에서 군악대는 물론 모스크바 전교회의 종소리와 군대의 대포까지 동원해서 처음 연주할 계획이었으나 일이 그렇게 되지 못했다. 가장 큰 원인은 알렉산더 2세가 1881년 3월에 암살당했기 때문이었다. 대성당의 공사도 지연되었고 모스크바 대전시회도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1812년 서곡'은 조금 시간을 늦추어서 1882년 8월 20일에 대전회장의 연주홀에서 평범한 관현악곡으로 초연되었다. 하기야 1812년 전투의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에 초연되기는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은 1883년에 완공되었으나 1930년대에 스탈린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철거되었고 그후 1994년에 재건을 시작하여 1999년에 완공되었다.
모스크바의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1883년에 완공되었으나 스탈린이 철거하였고 다시 1994년에 재건에 착수하여 1999년 12월 31일에 완공하였다. 차이코브스키의 '1812년 서곡'은 원래 이 대성당이 완공되면 그 앞마당에서 군악대와 대포를 동원하고 성당의 종을 울리며 연주할 계획이었다.
- 차이코브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세계 3대 피아노 협주곡에 들어갈 만큼 위대한 작품이다. 차이코브스크는 이 협주곡을 친구이며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이 초연의 연주를 맡아 주기를 바랬다. 그런데 루빈슈타인은 이 협주곡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차이코브스키는 이 협주곡을 1875년에 완성했고 몇 년 후인 1879년에 처음 수정하였고 1888년에 다시 수정하였다. 그만큼 정성을 들인 작품이었다. 이렇게 수정을 거듭한 이면에는 루빈슈타인의 비난이 큰 몫을 했다. 루빈슈타인은 차이코브스키가 처음 보여준 악보를 보고나서 친구들에게 '파사지들은 조각조각 분해되다시피 되어 있고 작품의 구성이 서투르게 되어 있다. 정말로 형편없이 작곡되어서 도저히 구제할 도리가 없을 정도이다. 한마디로 수준이하의 작품이다. 굳이 말하자면 전체 악보 중에서 겨우 두세 페이지만 쓸모가 있다. 그래서 다른 작곡가들이 작곡해 놓은 것을 가져다가 대신 연주하고 싶을 정도였다. 제발 부탁이지만 나머지 파트들은 버리던지 또는 완전히 새로 써야 한다'고 말했다. 그 소리를 들은 차이코브스키는 독일의 피아니스트이며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브를 선택했다. 또한 차이코브스키는 그의 피아노 협주곡이 말할수 없이 참혹한 비판을 받자 아는 얼굴이 없는 곳에서 연주되어 새로운 평가를 받고 싶어서 한스 폰 뷜로브를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한스 폰 뷜로브는 마침 미국으로 떠나던 참이었다. 그는 차이코브스키의 부탁을 받고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미국에서 연주키로 약속했다. 그래서 차이코브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1875년 10월 25일 보스턴에서 처음 연주되었다. 청중들은 너무나 감동하여서 끊이지 않고 박수를 보냈다. 그래서 한스 폰 뷜로브는 마지막 악장을 앙코르로서 다시 연주했다. 한편, 차이코브스키는 루빈슈타인의 비판을 받고 속이 상했지만 참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루빈슈타인은 1888년에 마지막으로 수정된 악보를 보고서 전에 비난했던 것을 후회하고 그 후로부터 차이코브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열렬한 챔피온이 되었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러시아 초연은 보스턴 초연이 있은지 1주일도 안된 1875년 11월 1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였다. 러시아 피아니스트 구스타브 크로스가 연주했다.
왼쪽으로부터 니콜라이 루빈슈타인, 한스 폰 뷜로브. 구스타브 크로스.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은 역시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안톤 루빈슈타인의 동생이다. 한스 폰 뷜로브는 리스트의 딸로서 나중에 바그너와 재혼한 코지마의 첫 남편이었다.
- 차이코브스키는 발레음악으로서 세계를 압도했다. 그의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은 불멸의 명작이다. 그 중에서도 '호두까기 인형'은 어린이나 어른이나 가장 사랑하는 발레작품으로서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의례껀 공연되는 작품이다. 그런데 차이코브스키는 '호두까기 인형'에 대하여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아했다. 디즈니 영화인 '환타지아'에서 '호두까기 인형'의 모음곡에 대하여 해설자인 딤스 테일러는 '차이코브스키가 실은 이 발레음악을 정말로 싫어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알수 있다. 차이코브스키는 '호두까기 인형'의 음악이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음악과 비교할 때에 지나치게 단순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호두까기 인형'은 제국마리인스키극장이 어린이들을 위해 특별히 차이코브스키에게 작곡을 의뢰한 작품이다. 마리인스키가 그렇게 부탁한 것은 바로 전에 발표된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대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안무는 예에 의해서 당대의 안무가인 마리우스 페피타가 맡기로 했다. 페피타는 ETA 호프만의 극본인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대왕'을 바탕으로 해서 두개의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하나는 어린이를 위한 판토마임용 시나리오였고 다른 하나는 '사탕왕국으로의 여행'을 내용으로 삼은 것이었다. 차이코브스키는 시나리오들을 읽어 본후에 주인공인 클라라가 생쥐대왕의 괴롭힘을 당하는 내용을 보고 기분이 섬뜩할 정도로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로 얼마전에 여동생인 샤샤가 쥐가 전하는 질병 때문인지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주인공인 클라라에게서 여동생 샤샤의 모습을 떠올렸던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호두까기 인형'에는 여러 파트에서 멜랑콜리한 색채가 칠해져 있다. 예를 들면 2막 피날레에서 사탕요정과 왕자의 파드두, 또는 '꽃의 왈츠'의 멜로디에서 그러하다.
'호두까기 인형'에서 '꽃의 왈츠'
- 차이코브스키의 죽음은 아직도 미스테리에 쌓여 있다. 차이코브스키는 1893년 11월 6일, 그의 교향곡 6번 '비창'의 초연이 있은지 9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콜레라로 알려졌다. 차이코브스키는 세상을 떠나기 5일 전에 네브스키 프로스펙트에 있는 레이너스(Leiners)라는 식당에 갔었다. 차이코브스키는 식당에서 냉수 한잔을 시켜서 마셨다. 당시에 모스크바에서는 콜레라가 기세를 부리기 시작했고 당국은 누구던지 물을 마실 때에는 꼭 끓인 물을 마시도록 당부했다. 그런데 차이코브스키는 아마도 끓이지 않은 찬물을 마셨던 모양이다. 그런데 레이너스 식당에서는 얼마든지 끓인 물을 주문해서 마실수 있는데 차이코브스키는 그냥 찬물을 주문했고 그대로 마셨던 것이다. 차이코브스키는 다음날부터 콜레라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흘 후에 숨을 거두었다. 차이코브스키에 대한 사인은 '오염된 식수 이론'이 주도적이다. 그렇지만 다른 이론도 있다. 자서전 작가인 안소니 홀든은 차이코브스키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창남과 섹스를 할 때에 비위생적으로 했기 때문에 콜레라에 감염되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이어서 '끓이지 않은 물을 마셨기 때문이라는 것은 동성애 섹스의 행위를 감추기 위한 하나의 변명이다'라고 내세웠다. 또 하나의 이론은 차이코브스키가 조카인 블라디미르 '밥' 다비도프를 미칠정도로 좋아했지만 아무런 희망이 없자 실망하여서 의도적으로 냉수를 마시고 콜레라에 감염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살을 기도했다는 것이다. 차이코브스키는 그러한 절망감을 교향곡 6번 '비창'에서 표현했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음악학자인 알렉산드라 오를로바라는 차이코브스키가 동성애 스캔들 때문에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서 BBC의 다큐멘타리인 '자랑 또는 편견'(Pride or Prejudice)는 차이코브스키의 죽음에 대한 특집을 만들었는데 이에 의하면 차이코브스키가 코렐라로 사망했다고 하지만 실상 콜레라의 증상은 비소중독과 비슷하다고 전제하고 따라서 비소(청산가리)를 마시고 자살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전했다. 차이코브스키의 자살과 관련해서 또 다른 주장도 있다. 짜르 알렉산더 3세가 차이코브스키에게 자살을 지시해서 자살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차이코브스키가 그의 동생인 모데스트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관리인의 아들을 유혹해서 동성애를 가졌다는 진정이 있어서 자살을 명령했다는 것이다. 어느 경우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차이코브스키는 행복하지 못한 생애를 보내고 한창 나이에 세상을 하직한 것만은 틀림없다.
차이코브스키 묘소. 알렉산더 네브스키 수도원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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