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기념상/링슈트라쎄 기념상

전쟁과 파치슴에 대한 경계 기념물

정준극 2015. 9. 23. 10:21

전쟁과 파치슴에 대한 경계 기념물

링 슈트라쎄 인근의 기념물 탐방

 

오스트리아는 스스로 원했건 그렇지 않았건 나치와 한 통속이 되어 2차 대전을 치루었다. 오스트리아는 1938년에 이른바 국민투표를 통해 히틀러의 나치와 합병하였다. 비엔나에 개선장군처럼 들어닥친 히틀러는 노이어 부르크의 계단에 올라서서 헬덴플라츠에 구름같이 모인 20만 비엔나 시민들에게 '이제 오스트리아는 고향으로 돌아갔다'라고 소리쳤고 군중들을 환호로서 화답하였다. 그후 나치는 오스트리아의 전국민에게 전시동원령을 내려서 젊은이들을 전선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유태인 사냥에도 열을 올렸다. 전쟁은 1945년에 막을 내렸다. 오스트리아는 하나의 독립국가가 아니며 독일 제3제국에 소속된 영토이기 때문에 독일의 우산 아래에서 패전국이 되었다. 4대 강국이 군대를 보내어 오스트리아를 분할하여 신탁통치했다. 그리고 특별히 비엔나도 4대 강국이 분할하여 관리했다. 그러기를 10년이나 했다. 오스트리아가 영세 중립국으로서 재출범한 것은 1955년이었다.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나치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는 제스추어를 취했다. 나치에 협조했던 사람들을 가려서 불이익을 주기 시작했다. 그런 한편으로는 전쟁과 파치슴을 잊지 말고 경계하자는 결심을 다짐했다. 비엔나는 그러한 다짐의 일환으로 시내 곳곳에 전쟁과 파치슴을 경계하자는 조형물들을 세웠다. 물론 유태인들이 억울하게 박해를 당한 것을 잊지 말자는 기념비도 세웠다. 우선 링 슈트라쎄를 따라서 설치되어 있는 그런 조형물들만을 소개한다. 오스트리아를 이해하려면 이런 조형물들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

 

1. 어제와 오늘(Gestern-Heute)

 

2차 대전의 폐해를 상기하여 더 이상의 전쟁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표현한 조형물이다. 후버트 빌판(Hubert Wilfan)이 제작했고 1993년 제막되었다. 8개의 돌로서 서클을 만들었고 가운데에는 너무 그루터기와 같은 기둥, 그리고 매끈하게 다듬은 석조 기둥을 두었다. 여덟개의 돌은 1945년에 소련군의 포격으로 슈테판스돔에 불이 붙어 지붕이 파괴되고 일부 벽면이 부서지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 슈테판스플라츠에 흩어져 있던 돌맹이들 중에서 가져온 것이다. 서클을 벗어나서 길가 쪽으로는 삼각형의 작은 철제 조형물이 있다. 각 면에 이 조형물의 제목(게슈테른-호이테), 제작자, 연도를 적었다. 링 슈트라쎄의 라트하우스파르크에 있다. 이 기념물에서 어제와 오늘을 어떻게 느낄수 있을 것인가? 모르겠다.

 

게슈테른-호이테. 도대체 이 돌맹이들을 보고 어제와 오늘을 어떻게 느낄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훌륭한 작품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2. 비엔나 병사(Wehrmann)

 

베르만(Wehrmann)은 원래 소방대원을 말하지만 이 경우에는 1차 대전이 시작되자 전쟁터에 나가 조국을 위해 싸운 병사들을 말한다.  또한 직접 전선에는 투입되지 않았지만 후방에서 전쟁을 도운 방위군을 말하기도 한다. 이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전사하면 누군가는 유족들인 전쟁미망인들과 전쟁고아들을 도와야 하기 때문에 그 운동의 일환으로 목재 병사상을 만들어서 세웠던 것이다. 라트하우스 인근의 베르만 목상은 1차 대전이 일어난 이듬해인 1915년에 준공되었다. 원래는 슈봐르첸버그플라츠에 세웠었다. 그러다가 시청(라트하우스) 옆의 펠더하우스(Felderhaus)의 외벽으로 옮겼다. 우니페어지태트링의 프리드리히 슈미트 플라츠(Friedrich Schmidt-Platz)이다. 제작자는 요제프 뮐너(Josef Müllner)로서 재질은 보리수나무(린덴바움)를 사용했다. 요제프 뮐너는 폭스가르텐의 테세우스템펠 앞에 있는 '달리는 젊은 선수'(Jügendliche Athlet)를 제작한 사람이다. 비엔나의 베르만 기념상은 양대 전쟁을 거치면서 쇠락해 졌으나 2007년에 보수를 마쳤다. 하단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Der Wehrmann Wiens gemahnt an die Zeit da unerschopflich wie des Krieges Leid die Liebe war und die Barmherzigkeit. 굳이 번역하면, '비엔나 출신의 병사들은 전쟁과 같은 파괴적인 시기를 경계한다. 우리는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들과 슬픔과 사랑을 함께 한다. 그리고 그들을 도와야 한다'이다. 이글은 오토 케른스포흐(Otto Kernsfoch)가 썼다.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전쟁에 나간 젊은이들을 생각하여서 못을 박기 시작했다. 하기야 목상을 만들어서 설치하고 그에게 못을 박는 관습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온 관습이다. 비엔나 베르만에 박힌 못은 순식간에 50ak만개가 넘게 되었다. 빼내어서 팔아 돈을 만들었고 그러면 또 그 자리에 못들을 박았다. 너무 많은 못을 박았기 때문에 한쪽 발이 파손되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은 못을 박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베르만 목상에 못을 박는 얘기는 다른 항목에 자세히 설명있으니 참고 바람.]

 

 

펠더하우스에 설치되어 있는 베르만과 원래 기념상에 너무 많은 못을 박아서 발쪽이 손상되어 있는 모습

 

3. 법 집행을 위한 희생(Exekutive)

 

부르크링의 헬덴플라츠에 있다. 플로리안 샤움버거(Florian Schaumberger)의 제작으로 2002년 제막되었다. 임무를 다하려다가 희생된 경찰 또는 헌병(Gendamen)들을 추모하기 위한 조형물이다. 두개의 석조 조형물이 서로 맞대어 있는 형상이며 중간 가운데는 비어 있는데 이는 경찰들의 투명성을 강조한 것이다. 하단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Opfer in Erfüllung der Pflicht den in Dienst Polizisten und Gendamen rewidmet. 이다. 대략 번역하면 "경찰 및 헌병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희생된 분들에게 헌정한다'이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비엔나가 미영불소의 분할통치를 받고 있을 때부터 2000년 이 기념조형물이 제막될 때까지 토털 354명의 법집행 요원들이 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희생되었다. 여기에는 경찰관들도 있지만 일반 공무원도 포함되어 있다.

 

헬덴플라츠 부르크토르 안쪽에 세워져 있는 기념조형물

부르크토르 옆 공간에 있다.

 

4. 나치 희생자(Nazi-Opfer)

 

프란츠 요제프스 카이(Franz Josefs-Kai)의 모르친플라츠(Morzinplatz)에 있다. 레오폴드 그라우잠(Leopold Grausam)이 설계하여 1985년에 제막되었다. 상단에는 '결코 잊지말자'(Niemals Vergessen)이라고 적혀 있다. 무엇을 그리도 절실하게 잊지 말자고 했는가? 파치슴의 만행을 결코 잊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서 기념조형물의 타이틀도 '파치슴 희생자 기념비'(Denkmal Opfer des Faschismus)이다. 조형물의 한 가운데 있는 남자는 나치의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온갖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 당한 보통 사람을 의미한다. 왼편에 있는 석재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Hier sand das Haus der Gestapo. Er war für die Bekenner österreichs die Holle. Es war für viele von ihnen der Vorort des Todes. Es ist in Trümmer gesunken wie das 1000 jahrige Reich. Österreich ist wieder auferstanden und mit ihm unsere Toten, die unsterblishcen Opfer.' 이다. 얕은 실력이지만 번역하면, '여기에 게슈타포(비밀경찰)의 집이 있었다. 이곳은 자기의 신념에 따라 말한 사람들에게는 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이곳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였다. 이곳은 천년 역사의 제국이 산산조각 되는 곳이었다. 오스트리아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불멸의 희생자들과 함께 일어설 것이다.'이다. 원래 이 장소에는 모르친 호텔이 있었다.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비엔나로 진입한 나치는 이 호텔에 비밀경찰 본부를 설치하고 나치에 반대하는 지식인들, 유태인들 등을 체포하여 고문으로서 나치에 협조하겠다는 자백을 받아 냈지만 결국은 거의 모두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그래서 비엔나의 시민으로서 혹시라도 모르친 호텔로부터 잠시 들렸다 가라는 초청장을 받으면 그것은 곧 무자비한 고문과 비참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5. 전쟁과 나치슴 경계(Krieg und Faschismus)

 

1구 알베르티나 전시관 앞에 작은 광장이 있다. 헬무트 칠크 광장(Helmut-Zilk-Platz)이다. 여기에 비엔나 출신의 조각가인 알프레드 흐르들리카(Alfred Hrdlicka)의 '전쟁과 나치슴에 대한 경계'(Mahnmal gegen Krieg und Faschismus)라는 제목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1988년 11월 24일 제막되었다. 이 장소에는 원래 필립호프(Philiphof)라는 주거 건물이 있었다. 비엔나 그륀데차이트(Gründezeit)의 대표적인 건물이었다. 그러나 1945년 3월에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었다. 나중에 건물의 잔해를 살펴보니 수백명의 남녀노소 가릴 것이 없는 시민들이 폭격으로 죽어 있었다. 비엔나 시당국은 그 자리를 정리하여 자그마한 광장으로 만들고 이 장소의 의미를 더 할수 있는 조형물을 세우기로 했다. 그래서 흐르들리카의 '전쟁과 나치슴에 대한 경계'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심되는 조형물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Tod der Gewalt (폭력과 권력에 의한 죽음)이다. 그런데 그 조형물의 아랫쪽에 아주 작은 조형물이 하나 있는 것을 볼수 있다. 어떤 노인이 바닥에 엎드려 있는 모습이다. 노인은 유태인이고 거리를 청소하고 있는 중인 것 같다. 1938년 11월의 크리스탈나하트에 나치는 유태인들을 붙잡아서 길바닥을 걸레로 깨긋이 청소토록했다. 나치를 비롯해서 비엔나 시민들은 유태인이 길바닥을 청소하는 모습을 보고 재미있다고 웃기만 했다. 바로 그 장면을 연상케하는 조각 작품이다. '엎드린 유태인'(Knieden Jude) 라는 타이틀의 조형물이다.

 

 알프레드 흐르들리카가 제작한 '전쟁과 파치슴을 경계하는 기념비'

'전쟁과 파치슴을 경계하는 기념비'의 일부인 '엎드려 있는 유태인'(Knieden Jude). 누가 피처럼 붉은 페인트를 쏟아 부었다. 늙은 유태인은 걸레를 들고 길바닥을 닦고 있는 모습이며 등에는 가시철조망이 묶여있다.

 

6. 오스트리아 유태인 홀로코스트 희생자 기념비(Mahnmal für die Österreishischen Jüdischen Opfer der Shoa) 또는 Mahnmal für die 65.000 ermordeten österreichischen Juden und Jüdinnen der Schoah(쇼아로 살해된 오스트리아 유태인 6만 5천명을 추모하는 기념비)

 

1구 유덴플라츠의 한 가운데에 있다. 영국의 여류조각가인 레이첼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가 완성하여 2000년 10월 25일 오스트리아 대통령인 토마스 클레슈틸이 특별히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을 가졌다. 이날은 오스트리아가 독립 중립국이 됨을 경축하는 '오스트리아 국가축제일'(National Feiertag)의 하루 전날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유태인 쇼아기념비인 이 조형물은 나치에 의해 강제수용소로 끌려갔거나 요행히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지는 않았지만 무한한 핍박을 받아서 더 이상 이 세상에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통틀어서 기념하고 상고하는 조형물이다. 이 조형물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자료는 본 블로그의 다른 항목을 참고하시기 바람.

 

비엔나의 유덴플라츠에 있는 쇼아 기념비

 

6. 러시아 적군 기념비(Russendenkmal) - Erbsendenkmal(완두콩 기념비)

 

비엔나의 중심지역에 소련 적군 병사가 높이 서있는 기념비가 있다. 슈봐르첸버그플라츠에 있다. 팔레 슈봐르첸버그의 앞 광장이다. 소련군은 2차 대전의 막바지에 비엔나를 겨냥한 서부전선에 제3 우크라이나 전선(3rd Ukranian Front)을 투입하였다. 소련군이 말하는 전선(Front)라는 것은 여러 사단의 연합을 말한다. 스탈린은 제3 우크라이나 전선에 특명으로 비엔나 탈환을 지시했다. 비엔나는 전략적으로도 중요했지만 전후에 연합군과 흥정할수 있는 도구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엔나 점령을 위한 전투는 치열한 것이었다. 무려 1만 7천여명의 소련 적군 병사들이 전사했다. 이에 대항하는 독일군이 얼마나 전사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그 정도는 될 것이닫. 소련군은 1945년 4월 14일 비엔나를 점령하자마자 1만 7천여명의 소련군 전사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비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아울러서 2차 대전 중 소련군의 업적을 내세우고 또한 비엔나를 공동 관할하게 된 미,영,불 군대보다 우세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 대대적인 기념비 제작을 서둘렀다. 후보지로서 서너 곳이 논의 되었다. 호프부르크의 헬덴플라츠도 고려되었다. 1938년에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나서 히틀러가 비엔나 시민들 앞에서 '이제 오스트리아는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외친 장소였다. 

 

슈봐르첸버그플라츠의 소련 적군 병사 기념비

 

그러나 최종적으로 슈봐르첸버그플라츠가 선정되었다. 슈봐르첸버그플라츠에 높은 기념비를 세우면 다른 연합군을 내려다볼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당시 소련군은 슈봐르첸버그플라츠의 바로 옆에 있는 임페리알 호텔을 사령부로 사용하고 있었다. 한편, 프랑스군은 라디슨 호텔에, 영국군은 브리스톨 호텔에, 미군은 그랜드 호텔에 각각 사령부를 두고 있었다. 소련군은 슈봐르첸버그플라츠에 높은 기념상을 세우면 이들 각국의 사령부들을 위압적으로 내려다 볼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상 적군 병사상은 기관총을 메고 마치 비엔나 시내 전체를 경비하는 듯한 모습으로 내려다 보고 있다. 무명의 적군 병사는 높이가 12미터이며 그 아래의 대좌는 높이가 20미터이다. 설계는 S.G. 야코블레브(Yakoblev)라는 사람이 맡았다. 전체적인 설계는 무명의 소련 적군(赤軍: Red Army) 병사의 기념상을 중심으로 뒷편에 아치형의 콜로네이드를 세우는 것이었다. 공사에는 포로로 잡힌 독일 병사들이 동원되었다. 패전한 것도 억울한데 전쟁에서 이긴 소련군을 위해 공사를 한다는 것이 여간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어쩔수가 없었다.

  

우리는 보통 소련 적군 기념비를 보면서 적군 병사가 하나만 있는줄 아는데 실은 그 뒤에 두 명이 더 있다. 기관총 탄약통을 들고 앞으로 돌진해 나가는 듯한 모습이다.

 

소련 적군 병사는 황금 헬멧을 쓰고 있다. 그만큼 나라가 부강해서 병사들의 철모를 황금으로 만들어 준다는 말인가? 가슴에는 소련군의 유명한 기관총인 슈파긴(Shpagin)을 메고 있다. 그 기관총으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을까? 오른 손으로는 소련 깃발을 잡고 있다. 왼손으로는 소련의 문장이 그려진 황금 문장을 붙잡고 있다. 적군 병사 기념상은 높이가 12 미터가 된다. 소련 적군 병사의 기념상이 있는 광장의 앞 큰길에는 위대한 슈바르첸버그공자의 기마상이 있지만 바로 뒤에 있는 소련 적군 병사의 위세 때문에 눈에 잘 보이지 않을 경우가 있다. 비엔나 시민들은 소련군이 비엔나를 점령하고나서 몇 주일 동안 저지른 만행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군복을 입은 강도들이었다. 나치도 건드리지 않았던 궁전들과 교회들의 귀중한 문화재와 예술품들을 약탈하였다. 소련은 비엔나의 적군 기념상을 '영웅적인 러시아 병사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라고 말했지만 비엔나 사람들은 무명의 약탈자들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라고 불렀다. 러시아군인들이 얼마나 약탈을 일삼았으면 그런 비난이 나왔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해준다. 비엔나 시민들은 소련 적군의 기념상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패전국의 국민으로서 감히 소련이 세운 기념상을 철거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비엔나는 궁리 끝에 적군 병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방안을 생각해 냈다. 그 앞에 물줄기가 높이 올라가는 분수를 세워서 보이지 않도록 하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호흐슈트랄브룬넨(Hochstrahlbrunnen)이다. 실제로 분수의 물줄기가 높이 치솟으면 적군 병사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해 준다. 비엔나 시민들은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다만, 겨울에는 분수를 가동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겨울에 일부런 적군 병사의 모습을 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므로 그나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2007년에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비엔나를 방문해서 이 기념상 앞에 헌화를 했다. 그러면서 '비엔나 시민들이 이 기념상을 파괴하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소련 적군 병사. 기관총을 메고 수류탄을 허리에 찼다. 한 손에는 소련 깃발을 다른 한 손에는 소련 문장을 붙들고 있다.

 

기념상의 하단에는 길 문장이 적혀 있다. 다 소개하기는 힘들고 앞 줄만 소개하면, '오스트리아를 파치슴으로부터 해방시킨 소련 장병들에게 바치는 기념비'라고 되어 있다. 마치 소련만이 단독으로 오스트리아를 나치로부터 해방시켰다는 듯이 들려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씁쓸한 기분을 갖게 해주는 문장이다. 베를린의 동물원 앞에도 비엔나의 적군 병사 기념비와 비슷하게 생긴 소련전승기념비가 있다. 그건 그렇고, 비엔나의 소련 적군 기념비는 여러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이 Heldendenkmal der Roter Armee이다. '적군 영웅 기념비'이다. 영어로 표기하면 Hero's Monument of the Red Army 이다. 그런가하면 Befreiungsdenkmal(해방기녀비) 또는 Siegesdenkmal(전승기념비)라고도 한다. Erbsendenkmal(에르브젠덴크말)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에르브제(Erbse)는 완두콩을 말하지만 일반적으로 콩을 말한다. 말하자면 '콩 기념비'이다. 그런 명칭이 붙은 사연은 전쟁이 끝나자 스탈린이 자기가 무슨 자비스런 사람이라고 오스트리아의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완두콩 1천 톤을 즉시 전달해 준데서 비롯한 것이다. 별로 맛도 없는 완두콩을 주고는 독일군 포로들을 강제노역시켜서 기념상을 세워서 잘났다고 내세우는 것을 풍자한 명칭이 아닐수 없다. 기념상이 된 무명의 적군 병사를 에르브젠프린츠(콩 왕자: Erbsenprinz)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비엔나의 어떤 언론인은 세네카의 말은 인용하여서 '선물이란 어떤 일을 했기 때문에 또는 어떤 물건을 주었기 때문에 주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선물을 준 사람, 또는 어떤 일을 해준 사람의 의도가 무엇이냐가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적군 병사 기념비는 1945년 8월 19일에 제막되었다. 고작 4개월이라는 대단히 단기간 내에 완성된 기념비이다. 패전한 독일군 포로들(주로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수고가 많았다.

 

분수를 높이 솟구치게 하면 과연 소련 적군 병사의 모습을 가릴수 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더욱 보이지 않는다.

 

 

 

ä  ö  ü  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