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명작 오페라

셰익스피어 오페라 대점검

정준극 2015. 12. 22. 20:46

셰익스피어 오페라 대점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바탕으로 오페라를 만든 것은 지금까지 약 2백 편이나 된다. 이만하면 대단한 기록이다. 다른 어느 문호의 작품보다도 월등히 많게 오페라로 만들어졌다. 만일 셰익스피어가 지금까지 살아서 자기의 작품들이 오페라로 만들어진 것을 두루 본다면 '아니 이렇게나 많이? 정말 수고들 많이 하셨네!'라면서 놀라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보다도 자기의 오리지널이 이런저런 이상한 내용으로 너무나 변질된 것을 보고 더 놀라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사실상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오페라로 만드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원작의 전체적인 내용과 철학과 사상을 오페라라고 하는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 집어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혹 엉뚱한 방향의 오페라가 탄생하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오페라는 원작과 너무 동떨어져서 실망을 안겨다 주는 것이기도 했다. 대본이 가장 문제이다. 셰익스피어의 기가막히게 훌륭한 운율을 레시타티브, 아리아, 중창, 합창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배우이면서 오페라 매니저인 데이빗 개릭(David Garrick)이 대본을 쓴 '템페스트'(The Tempest: 1756)의 대본은 심하게 말해서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거세한 것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골자를 다 빼버린 대본이라는 얘기였다. 또 다른 예로서 로시니의 '오텔로'(Otello: 1816)의 대본은 '마치 원작을 십자가에 처형한 것과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바이런 경이 그렇게 얘기했다. 위대한 작품을 오페라로 만드는 것은 어쨋든 어려운 일이다. 지금까지 나온 셰익스피어 원작의 오페라들이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점검해 본다.

 

'템페스트'의 한 장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프로스페오에 사이몬 킨리사이드, 미란다에 이사벨 레오나드.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오페라로 만든 첫번째 경우는 대체로 헨리 퍼셀의 '요정 여왕'(The Fairy Queen: 1682)으로 보고 있다. 셰익스피어 원작의 '한여름 밤의 꿈'을 바탕으로 삼은 오페라이다. 하지만 이건 완전한 오페라라고 보기가 어렵다. 대사체가 너무 많고 노래 부분은 별로 없다. 그나마 음악다운 음악이라고는 간주곡 정도이다. 그래서 오페라의 장르에서는 세미 오페라(Semi-opera)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오페라가 되려다가 만 작품이라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내용도 '한여름 밤의 꿈'의 한 단면만을 발췌한 것이어서 원작을 충실히 반영했다고 보기가 어렵다. 헨리 퍼셀의 오페라로서 '디도와 이니아스'(Dido and Aeneas: 1689) 역시 세미 오페라로 분류되지만 그나마 겨우 음악적으로는 인정받을 만한 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디도와 이니아스'의 대본은 더블린 출신의 시인 겸 극작가로서 영국의 계관시인이 된 네이엄 테이트(Nahum Tate: 1652-1715)가 썼다. 네이엄 테이트의 대본은 가급적 셰익스피어의 의중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었다. 그런 테이트인데 당시 변덕스러운 관중들의 기호도 맞추는 대본을 써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리어 왕'(King Lear: 1681)에 대한 대본이다. 이 대본에 의하면 리어왕의 셋째 딸인 코르델리아는 나중에 죽지 않고 살아서 에드가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산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원작을 이렇게 각색한 버전은 당시로서 상당한 호응을 받아서 영국의 각 극장에서 향후 150년 동안 테이트의 대본으로 '리어 왕'에 대한 연극과 음악극 등이 자주 공연되는 실적을 올렸다. 테이트는 '디도와 이니아스'에서 비르질(Virgil)의 스타일을 충실히 추종하였다. 비르질(또는 베르길리우스)은 로마의 시성으로 '아이네이스'(이니아스)의 원작자이다. 그런데 테이트는 '디도와 이니아스'에서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두가지 예외를 추가하였다. 하나는 맥베스의 마녀 장면과 같은 장면을 추가한 것이다. 그래서 이니아스의 운명적인 결심을 주저하도록 만들었다. 다른 하나는 머큐리의 역할이다. 테이트의 대본에서 머큐리는 마녀들이 보낸 말하자면 이니아스를 속이기 위한 미끼와 같은 역할이며 아울러 디도의 마음에 상처를 줄 목적의 존재로 표현했다. 이렇듯 원작에 없는 추가 내용이지만 그 내용만으로 훌륭한 연극이 성립될수 있기 때문에 1700년에는 그 장면만을 '법에는 법대로'(Measure for Measure)의 극중에 나오는 극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사실상 극중의 극으로 사용하거나 또는 영화관에서 2본 동시상영과 마찬가지의 추가 공연은 18세기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 통상적인 것이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면, 헨델의 목가적인 오페라인 '아치스와 갈라테아'(Acis and Galatea)는 1724년 드러리 레인에서 '템페스트'의 후편으로서 공연되었다.

 

핀란드의 아울리스 살리넨이 작곡한 '리어 왕'의 피날레 장면

 

돌이켜 보면, 오페라는 1600년대에 이탈리아의 플로렌스에서 꽃을 피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에 런던에서는 '햄릿'(1603)이 발표되었다. '햄릿'은 당시의 어느 연극보다도 심리적인 연기가 중요하게 여겨지기 시작한 작품이다. 하기야 코미디라면 그저 치고 받기만 해도 웃음을 선사하지만 '햄릿'과 같은 연극은 심리적인 연기가 중요한 것이다. 한편, 오페라는 이탈리아에서 계속 번창하였다. 1637년에는 베니스에서 처음으로 일반대중을 위한 오페라 극장이 문을 열 정도로 번창했다. 그런데 청교도가 주도하는 런던에서는 1642년에 모든 극장의 문을 닫도록 했다. 연극이던지 음악극이던지 모두 저속한 오락에 불과하기 때문에 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두 나라 사이에는 그만한 차이가 있었다. 이탈리아 오페라가 런던에 상륙한 것은 18세기 초였다. 이탈리아 오페라는 런던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리챠드 레버릿지(Richard Leveridge)가 만든 오페라 '피라무스와 티스베의 코믹 마스크'(A Comick Masque of Pyramus and Thisbe: 1716)가 공연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서 스토리를 가져온 오페라였다. 만일 셰익스피어가 살아 있었다면 이 오페라를 보고 '형편없고 버릇없는 것'이라고 한마디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30년 후에 독일의 요한 프레데릭 람페(Johann Frederick Lampe)가 또 다시 '한여름 밤의 꿈'을 바탕으로 '피라무스와 티스베'라는 제목의 '모방 오페라'(Mock opera)로 만들었다. 모방오페라의 특징은 원작을 조롱하고 비웃는 것이다. 이 오페라에는 마치 벌컥 성을 내는 것과 같은 아리아가 나오는가 하면 스토리도 억지로 해피엔딩으로 만들어 놓았다. 가장 최근에 '피라무스와 티스베'를 오페라로 만든 경우는 캐나다 퀘벡 출신의 바바라 몽크 펠드만(Barbara Monk Feldman: 1950-)이다. 2010년에 초연되었다.

 

캐나다 퀘벡 출신의 바바라 몽크 펠드만이 작곡한 '피라무스와 티스베'의 무대. 2010년. 캐나다 오페라 컴페니

 

이탈리아에서 수입된 오페라가 영국에서 인기를 끌기는 했지만 반대로 적대감을 갖는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위대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바탕으로 만든 이탈리아의 오페라들에 대하여 '아니, 우리의 위대한 작품을 저렇게 저속하게 변질시켜도 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Francesco Gasparini)가 작곡한 '암블레토'(Ambleto: 햄릿)이 런던에 상륙한 것은 1712년이었다. 유명한카스트라토인 니콜리니(Nicolini)가 타이를 롤을 맡아서 인기를 끌었던 오페라였다. 그러나 한두번 공연된 후에 소리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위대한 '햄릿'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느냐는 비난이 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프란체스코 마리아 베라치니(Francesco Maria Veracini)가 작곡한 '로잘린다'(Rosalinda: 1744)라는 오페라도 있다. 셰익스피어 원작의 '멋대로'(As You Like It)을 바탕으로 만든 오페라이다. 이탈리아 스타일의 목가적인 점잖은 오페라였다. 역시 카스트라토 소프라노들이 출연하였다. 그런데 '암블레토'와 똑 같은 처지가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원작과는 너무나 동 떨어진 내용이어서 실망들을 했던 것이다. '오해'(Gli quivoci: 1786)라는 오페라가 있다. 모차르트의 유일한 영국 제자인 스테픈 스토레이스(Stephen Storace)가 작곡한 오페라이다. 이탈리아 스타일로 작곡한 오페라이다. 그래서 오페라 부파라고 분류되는 작품이다. 셰익스피어의 '실수연발'(The Comedy of Errors)을 원작으로 삼은 오페라이다. 대본은 비엔나에서 이름을 떨치던 이탈리아 출신의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가 작성했다. 로렌초 다 폰테는 모차르트를 위해 '피가로의 결혼', '여자는 다 그래', '돈 조반니'의 대본을 쓴 사람이다. 그만한 사람이 쓴 대본이어서 역시 훌륭했다. '오해'는 비엔나의 부르크테아터에서 초연을 가진 이래 유럽의 여러 극장에서 대인기를 끌며 공연되었다. 그렇지만 런던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지나치게 모차르트 스타일이라는 이유 때문에 다시는 다시 공연되지 못하였다. 사족인지 모르지만 스테픈 스토레이스의 여동생은 유명한 소프라노인 낸시 스토레이스이다. 낸시 스토레이스는 비엔나에 있을 때에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에서 수잔나의 이미지를 창조한바 있다.

 

스테픈 스토레이스의 '오해'. 셰익스피어의 '실수연발'을 바탕으로 삼은 오페라이다.

 

영국에서 이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를 추구했던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예를 들면 존 크리스토퍼 스미스(J.C. Smith)였다. 존 크리스토퍼 스미스는 시인 데이빗 개릭과 합동하여 '템페스트'와 '요정들'(The Fairies: 1755)을 만들어냈다. '요정들'은 '한여름 밤의 꿈'을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좀 웃기게 만드느라고 그랬는지 서막에 부제를 달았는데 '시뇨르 셰익스피어렐리'(Signor Shakespearelli)라고 이탈리아식으로 붙였다. 런던 사람들은 위대한 셰익스피어를 이탈리아 사람으로 비유한데 대하여 당연히 심사가 흔들려서 스미스의 오페라들은 몇 번 공연된 후에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약 20년 후에 데이빗 개릭의 '템페스트' 대본을 토마스 라인리(Thomas Linly: 1756-1778)가 다시 사용하여 음악을 붙여서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한여름 밤의 꿈'도 그렇지만 '템페스트'는 오페라보다는 뮤지컬로서 그나마 성공적이었다. 19세기에 들어서자 유럽의 몇 몇 작곡가들은 셰익스피어의 비극보다는 코믹한 내용의 희극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비엔나의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와 독일의 칼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Carl Ditters von Dittersdorf)가 그러했다. 독일의 폰 디터스도르프는 1796년에 '윈저의 유쾌한 부인들'(Die lustigen Weiber von Windsor)를 내놓았고 비엔나의 살리에리는 1799년에 '활슈타프'(Falstaff)라는 제목의 오페라를 내놓았다. 1849년에는 독일의 오토 니콜라이(Otto Nicolai)가 셰익스피어의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The Merry Wives of Windsor)를 바탕으로 같은 제목의 독일어 오페라를 만들었다. 제목은 독일어로 Die lustigen Weiber von Windsor라고 했다.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니콜라이는 '셰익스피어의 코미디를 오페라로 만드는 것은 모차르트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고 말한바 있는데 자기가 직접 오페라로 만들어서 성공을 거둔 것이다. 독일의 헤르만 괴츠(Hermann Goetz)는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The Taming of the Shrew)를 바탕으로 독일어 오페라인 Der Widerspenstigen Zähmung(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만들었다. 웑작에 충실하였지만 괴츠의 오페라에서는 케이트가 페트루키오를 첫눈에 사랑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바꾸었다. 셰익스피어는 대체로 여주이공을 앞에 내세우기를 꺼려했다. 그의 작품에서 여주인공을 제목으로 삼은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을 보면 알수 있다. 모두 남자들이다. 오텔로, 햄릿, 맥베스, 리어왕...그런데 괴츠는 19세기 독일의 패션에서 볼수 있듯이 여주인공을 앞에 내세운 것이다.

 

헤르만 괴츠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뮌헨 슈타츠오퍼

 

여자들이 오페라의 주인공으로 되지 못하던 시대는 지났다. 오페라 세리아의 시대는 지나가고 로맨틱 오페라의 시대가 온 것이다. 로맨틱 오페라에서 비로소 프리마 돈나가 등장한다. 그리고 과거에는 카스트라토가 여성 역할을 맡아서 무대를 압도했으나 로맨틱 오페라의 시대로부터는 여성이 직접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는 여성의 역할을 주로 소년들이 맡아서 했다. 아무튼 여성의 역할은 남성에 비해서 열세였다. 그런 패션이 오페라에서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다만, '멋대로'(As You Like It)를 오페라로 만든 '로잘린다'(Rosalinda)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를 오페라로 만든 '클레오파트라'는 예외일 것이다. 한편, 제목은 비록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이어서 여성들이 주인공인 것처럼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팔슈타프가 주인공인 경우도 있다. 그런데 19세기 오페라에서 사정이 달라졌다. 로시니의 '오텔로'(1816)는 로시니의 여러 오페라 중에서 아마 처음으로 비극으로 끝나는 내용일 것이다. 그 '오텔로'에서 데스데모나의 역할은 과거 다른 어느 오페라에서보다 뛰어났다. 오페라 '오텔로'에는 세명의 테너가 나온다. 오텔로와 사악한 이아고와 사랑을 거절 당한 로드리고이다. 로시니의 오페라에서 데스데모나는 이 세 사람들을 모두 압도한다. 뿐만 아니라 데스데모나는 그의 아버지인 베이스 브라반쇼(Brabantio)보다도 더 뛰어났다.

 

로시니의 '오텔로'는 또 한가지 오리지널과 다른 점이 있다. 오리지널에서는 데스데모나의 손수건이 사건의 발단이 되고 있다. 그러나 로시니의 '오텔로'에서는 손수건 대신에 의례적인 편지를 등장시켰다. 이탈리아의 오페라에서는 간혹 편지가 다른 사람에게 잘못 전달되었다든지 또는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적혀 있지 않아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로시니는 그런 패션을 인용한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알면 원작을 훼손했다고 통탄할 일이지만 로시니의 팬들은 손수건보다는 편지를 더 선호하였다. 로시니가 택한 대본은 18세기에 프랑스의 장 프랑수아 뒤시스(Jean-Francois Ducis)가 번역하여 만든 것이다. 빅토르 위고와 알프레드 드 비니(Alfred de Vigny)는 로시니의 편지 장면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하였으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 얘기를 하고 웃었다고 한다. 그런데 프랑스의 유명한 확인 외진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는 오히려 편지 장면으로 깊은 감동을 받아서 작품으로 그렸는데 이 그림에서는 오텔로가 주인공이 아니라 데스데모나가 주인공인 것으로 표현하였다. 로시니는 '오텔로'의 피날레 파트에서 무대를 지나치는 곤돌라 사공의 입을 통해서 단테의 '연옥'편에 나오는 구절을 읊조리는 것으로 설정했다. 데스데모나는 그 구절을 듣고 직접 하프를 치면서 저 유명한 '버들의 노래'를 부르고 이어 대단히 감동적인 기도 장면에 들어간다. 그 후 오텔로가 등장하여 데스데모나를 증오하여서 살해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도록 했다. '오텔로'는 로시니의 오페라 중에서 이같은 방법으로 끝을 맺는 유일한 작품이다. 그리고 로시니의 이같은 설정은 그후 19세기에 유행하였던 여러 오페라에 영향을 주는 것이 되었다.

 

손을 잡고 있는 이아고와 오텔로. 베르디의 '오텔로'에서

 

셰익스피어의 열정 팬으로 유명한 엑토르 베를리오즈는 '베아트리스와 베네딕트'(Beatrice et Benedict: 1862)에서 소프라노들을 주인공으로 앞에 내세웠다. 셰익스피어의 '헛 소동'(Much Ado About Nothing)을 바탕으로 삼은 '베아트리스...'에서는 메시나 총독인 레오나토의 딸 에로(Hero)와 레오나토의 조카인 베아트리스(Beatrice)가 소프라노로서 모두 주인공이다. 베를리오즈는 실로 셰익스피어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영감을 받은 작품은 합창 교향곡인 '로미오와 줄리엣'(Romeo et Juliette: 1839)이다. 사실상 '로미오와 줄리엣'은 오페라 작곡가라면 누구나 한번쯤 시도해 볼만한 스토리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무려 20여 개에 이르는 각종 버전이 나왔다. 그런데 '로미오와 줄리엣'을 오페라로 만들면서 어떤 작곡가들은 로미오의 역할을 메조소프라노가 부르도록 해놓았다. 예를 들면 이탈리아의 니콜라 안토니오 칭가렐리(Nicola Antonio Zingarelli)와 니콜라 바카이(Nicola Vaccai)이다. 과연 로미오를 여성이 맡았을 때 그 오페라가 주는 감동은 배가 될 것인가 아니면 감소될 것인가? 베를리오즈는 '로미오를 어떻게 여자가 부르도록 하느냐?'면서 반대했다. 베를리오즈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보라! '로미오와 줄리엣' 버전에서 가장 유명한 빈첸초 벨리니(Vincenzo Bellini)의 '캬퓰레티가와 몬테키가'는 로미오를 메조소프라노가 맡도록 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 이 오페라가 볼로냐에서 공연되었을 때 로미오와 줄리엣은 당대의 그리시 자매들(Grisi Sisters)이라고 하는 주디타 그리시와 줄리아 그리시가 맡아서 대화제가 되었다. 두 자매가 부르는 사랑의 듀엣은 그야말로 대단한 사랑을 받았다. 그러므로 로미오를 반드시 남자가 맡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한편,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어떠한가? 이 오페라에서 줄리엣은 어느 소프라노보다도 대단한 고도의 테크닉과 감정을 표현할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상대방인 로미오를 압도하고 있다. 이것은 앙브루아즈 토마의 '햄릿'(Hamlet" 1868)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펠리아는 햄릿보다도 더 두드러졌다. 남자 주인공보다도 여자 주인공이 더 압도적이어야 하는 패션이 그대로 표현된 작품들이 더 있다. 사베리오 메르카단테의 '암레토'(Amleto: 1822)와 그로부터 꼭 100년 후에 나온 리카르도 찬도나이의 베리스모 오페라인 '줄리에타와 로메오'(1922)이다. 메르카단테의 '암레토'에서는 타이틀 롤인 암레토를 메조소프라노가 부르도록 되어 있다.

  

세익스피어의 '멋대로'를 바탕으로 삼은 베를리오즈의 '베아트리스와 베네딕트'. 휴스턴 무대

 

샤를르 구노와 앙브루아즈 토마의 오페라들은 대본을 주로 쥘르 바르비에와 미셀 카레가 공동으로 작성했다. 두 사람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다른 오페라들의 대본들도 써서 아주 유명했다. 두 사람이 쓴 구노의 '로메오와 줄리에트'의 대본은 오리지널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다만, 오리지널에는 없는 사환 스테파노를 추가한 것이 다르다. 스테파노는 오페라에서 대단히 아름다운 아리아를 부르도록 했다. 구노의 '로메오와 줄리에트'가 오리지널과 다른 점은 하나 더 있다. 수면에서 깨어난 줄리에타가 로미오와 함께 열정적인 듀엣을 부른 후에 두 사람이 함께 죽기로 하는 장면이다. 원작에 따르면 줄리에타가 깨어나서 보니 로미오는 이미 독약을 마시고 죽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구노의 오페라에서는 두 사람이 기독교 신앙에 어긋나는 자살을 하게 된데 대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내용의 노래를 부른다. 구노의 오페라는 막이 오르자마자 캬퓰레티가에서 열리는 무도회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이것도 오리지널과는 다른 내용이다. 그런데 무도회가 열리는 것은 좋은데 지나치게 극적으로 구성했다는 것이 원작을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줄수도 있다. 줄리엣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 너무 화려하게 처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로미오의 정체를 줄리엣에게 알려주는 장면도 원작과는 다르다. 이 장면은 원래 유모가 얘기해 주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오페라에서는 탈보트가 알려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줄리엣의 거짓 죽음 장면도 다르다. 오페라에서는 줄리엣의 아버지가 파리스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줄리엣의 손을 잡고 교회로 들어갈 때에 기절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대체로 이런 차이들이다. 그러나 어쨋든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오페라로서 성공할수 있는 모든 요건을 구비한 것이다. 그래서 구노의 다른 걸작인 '파우스트'와 함께 불후의 명작으로 간주되고 있다.

 

토마의 '햄릿'은 초연 이후 어쩐 일인지 더 이상 각광을 받지 못했는데 1990년대에 들어와서 새롭게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오페라에서는 햄릿이 어머니인 거트루드와 사랑하는 오펠리아가 적극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독약을 마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햄릿'은 당시 프랑스 제2제국이 막을 내리기 2년 전에 작곡된 것이다. 프랑스가 수많은 문제점들과 미궁의 사건들을 안고 있던 때였다. 거트루드는 현재의 남편인 클라우디우스가 자기의 전남편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햄릿이 오펠리아를 거부한 것은 오펠리아의 아버지인 폴로니우스가 선왕의 살해사건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이다. 햄릿이 삼촌인 클라우디우스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유랑극당을 동원하여 비슷한 상황을 설정한 장면에서 미친것으로 보이는 햄릿이 클라우디우스의 머리에서 왕관을 벗겨내는 장면이 있다. 오페라는 이 장면을 레제 마제스테(Lese-majeste), 즉 왕권모독이라고 간주하였다. 마지막 장면은 무덤 장면이다. 햄릿에게 선왕의 혼령이 세번째로 나타난다. 이번에는 혼련의 모습이 분명하게 보인다. 혼련은 햄릿에게 무언가 속히 단행을 하라고 촉구한다. 이에 햄릿은 클라우디우스 왕을 죽인다. 그리고 왕권의 정당하고 적법한 것으로 돌려 놓는다. 이로써 햄릿은 비통에 젖어 있는 나라를 안정시킨다. 오페라는 백성들이 '햄릿 만세, 우리들의 왕 만세'(Vive Hamlet! Vive notre roi!)'라고 소리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바탕으로 삼은 오페라들의 행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원작을 충실히 반영한다기 보다는 이상한 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경우가 있어서 셰익스피어 애후가들을 실망시키고 있다. 이탈리아의 마리오 차프레드(Mario Zafred: 1922-1987)의 '암레토'(Amleto: 1961) 또는 스위스 출신의 프랑크 마르틴(Frank Martin: 1890-1974)의 '폭풍'(Der Sturm: 1956)은 이야기하는 듯한 음악 때문에 셰익스피어의 단어들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한편,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을 오페라로 만든 경우는 어떠한가? 프랑스의 레이날도 한(Reynaldo Hahn: 1874-1947)이 1935년에 만든 '베니스의 상인'(Le marchand de Venise)과 이탈리아의 마리오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Mario Castelnuovo-Tedesaco: 1895-1968)가 1961년에 만든 '베니스의 상인'(Il mercante di Venezia)은 공연시간만 지나치게 길지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로시니의 '오텔로'는 로시니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도전한 첫번째 케이스이다. 로시니는 그 이후로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에 도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로시니의 '오텔로'는 오리지날 연극에 버금하는 인기를 끌었다. 버나드 쇼는 로시니의 '오텔로'에 대하여 '로시니의 오텔로는 셰익스피어 스타일로 쓴 이탈리아 오페라이다. 셰익스피어의 오텔로는 이탈리아 스타일로 쓴 연극이다'라고 말했다. 베르디의 '오텔로'의 대본을 쓴 아리고 보이토는 로시니의 대본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에서 대본을 썼다. 아리고 보이토는 '오텔로'의 무대를 순전히 사이프러스에만 한정하였다. 다른 오페라에서는 베니스의 장면이 나오는 것과 대조적이다. 보이토는 데스데모나와 오텔로가 결혼문데로 데스데모나의 아버지와 맞서는 장면을 삭제하였다. 다른 오페라에서는 그 장면이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에 보이토는 오텔로가 데스데모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을 듀엣으로 상당히 길게 설정하였다. 아마 이 장면은 모든 오페라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장면일지도 모른다. 이아고의 '크레도'는 비록 음악적으로는 트릴이 사용되었고 반음계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지만 대단히 인상적인 아리아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마지막에 la morte e il nulla(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독백하는 것은 당시의 도덕개념과는 차이가 나는 허무주의적인 선언이 아닐수 없다. 그리고 이아고의 '크레도'는 19세기에 메피스토펠레스 스타일의 인물이 일종의 패션으로 되어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작곡가이기도 한 보이토는 그 자신이 '메피스토펠레'(Mefistofele)라는 오페라를 작곡한바 있다.

 

베르디의 '활슈타프'는 셰익스피어의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The Merry Wives of Windsor)를 바탕으로 삼은 것이지만 셰익스피어의 또하나 희곡인 '헨리 4세'에서도 모티브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예를들어 활슈타프의 저 유명한 스피치가 그렇다. '헨리 4세'에 나오는 스피치와 흡사한 것이다. 베르디는 '활슈타프'에서 활슈타프인 존 경에게 깊은 비중을 두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베르디는 미스 퀴클리와 그의 친구들에게도 많은 비중을 두었다. 그리고 언제나 유쾌하기만 한 장면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질투심 많은 포드씨의 장면은 유쾌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서정적인 면도 잊지 않았다. 펜튼과 나네타의 사랑의 장면이다. 마지막 장면의 푸가인 Tutto nel mondo e burla(All the world's a joke)는 '멋대로'(As You Like It)에 나오는 스피치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 '멋대로'에서는 '세상 모두는 무대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활슈타프'에서는 '세상 모두는 조크이다'라는 말로 대체되어 있다.

 

'활슈타프'에서 나네트와 펜튼

 

벤자민 브리튼의 1960년도 오페라인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은 아마도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가장 성공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이 작품은 그보다 앞서 나온 두 편의 오페라, 즉 랄프 본 윌렴스의 '사랑에 빠진 존 경'(Sir John in Love: 1929)과 구스타브 홀스트의 '수퇘지의 머리 위에서'(At the Boar's Head; 1925)와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게 하는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이 오페라들에서는 옛날 엘리자베스 시대의 노래들이 간간히 흘러 나온다. 일단은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다. 브리튼의 '한여름 밤의 꿈'은 대본을 브리튼 자신과 동료인 피터 피어스가 공동으로 작성했다. 오페라에서 작곡가가 대본까지 함께 만든다면 그보다 이상적인 것은 없다. 피터 피어스는 '한여름 밤의 꿈'의 초연에서 리산더의 역할을 직접 맡기까지 했다. '한여름 밤의 꿈'의 대본은 실로 오리지널 텍스트를 변형하지 않은채 트리밍한 것이어서 줄거리에 손상이 있거나 주인공들의 상황이 바뀌어진 것은 없다. '한여름 밤의 꿈'의 오프닝은 마치 모리스 라벨의 '어린이와 마법'(L'Enfant et les dortileges)을 보는 것과 같다. 브리튼은 관중들에게 초자연의 세계 속으로 직접 안내하여 갔다. 브리튼은 오페라의 흐름에서 서로 개성이 다른 세 그룹의 출현과 서로간의 연관을 환상적으로 마련했다. 요정들은 지난 날에 대한 향수를 표현한 것 같다. 하프와 타악기로 반주를 하며 어린이들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 그렇게 느껴진다. 오베론의 역할은 카운터테너이고 티타니아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이다. 티타니아의 역할은 마치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에서 '밤의 여왕'을 보는 것과 같다. 브리튼이 '한여름 밤의 꿈'을 작곡할 대에 오베론은 카운터테너인 알프레드 델러(Alfred Deller: 1912-1979)를 위해 썼다고 한다. 알프레드 델러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레퍼토리들을 가장 뛰어나게 해석한 카운터테너로 알려진 사람이다. 퍼크(Puck)는 세개의 별개 세계, 즉 궁전과 나라와 초자연의 세계를 중재하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또한 무대와 관중들을 중개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퍼크는 대사만을 말하는 역할인데 주로 10대의 청소년이 맡도록 하고 있다. 한편, 연인들에게는 아무런 아리아도 만들어주지 않았다. 펜튼과 나네트는 떨어질래야 떨어질수 없는 연인사이이면서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입장이다. 이 점은 마치 모차르트의 '여자는 다 그래'에서 연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 혹시 모차르트가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간접적이나마 받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브리튼의 '한여름 밤의 꿈'은 테세우스와 히폴리타의 궁정에서 화해하고 결혼식을 올리는 것으로 막을 내리지만 실제로 음악적인 클라이맥스는 티타니아와 보텀의 러브 신이다.

 

브리튼의 '한여름 밤의 꿈'. 티타니아와 버톰.

 

최근에 유럽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오페라로 시도한 경우는 독일의 아리베르트 라이만(Aribert Reimann)의 '리어'(Lear: 1978)과 이탈리아의 루치아노 베리오(Luciano Berio)의 '왕이 듣도다'(Un re ascolto: 1984)일 것이다. '리어'는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바탕으로 삼은 것이며 '왕이 듣도다'는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프랑스의 작곡가인 파스칼 뒤사팽(Pascal Dusapin)의 '로미오와 줄리엣'(Romeo et Juliette: 1988)은 작곡자가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보다가 감동을 받아서 작곡한 오페라이다. 벨기에의 작곡가인 필립 뵈스만스(Philippe Boesmans: 1936-)의 '겨울 동화'(Wintermarchen: 1999)는 셰익스피어의 스타일에 영향을 받은 오페라이다. 토마스 아데(Thomas Ades: 1971-)의 '템페스트'는 셰익스피어의 오리지널을 새로운 버전으로 만든 오페라이다. 하지만 원작의 아이디어를 가장 충실하게 반영한 버전이라는 평을 받았다. 아데의 '템페스트'는 2004년 런던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초연되었다. 대본은 므르디스 오크스(Meredith Oakes)가 썼다. 오리지널과는 전혀 다른 대본을 썼지만 그 자체로서 훌륭했다. 아데의 '템페스트'는 2005년 최우수 작품으로서 올리버상을 받았다. 이 오페라에서는 특별히 아리엘의 파트를 음악적으로 처리한 것이 뛰어나다. 아리엘의 콜로라투라 노래는 초자연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루치아노 베리오의 '왕이 듣도다'.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의 또 다른 무대이다.

 

과거에도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바탕으로 삼은 오페라들이 상당수가 나왔지만 1945년 2차 대전 이후에도 현대 작곡가들에 의한 셰익스피어 오페라들이 상당수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 단 몇 작품만이 레퍼토리로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대표적인 경우는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바탕으로 삼은 콜 포터(Cole Porter)의 '키스 미 케이트'(Kiss Me Kate: 1948)과 1957년에 나온 레오나드 번슈타인(Leonard Bernstein: 1918-1990)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이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뉴욕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아무리 '로미오와 줄리엣'을 바탕으로 삼은 것이라고 해도 기본적은 줄거리에는 차이가 많다. 예를 들어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는 줄리엣의 자살 같은 것은 나오지도 않는다. 아무튼 이 두 작품은 뮤지컬과 오페라의 중간에 위치한 랜드마크라고 할수 있다. 어찌보면 오페라보다는 뮤지컬이 더 성공적인 도전이라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기도 하다.

 

번슈타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뉴욕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와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는 여러 면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도입부가 그렇고 초자연적인 힘을 나타내는 것이 그러하며 현명한 마법사와 못된 하인의 등장이 그러하다. 아마도 모차르트는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슐레겐(August Wilhelm von Schlegel)이 '템페스트'를 독일어로 번역한 것을 참고로 삼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심지어는 '마술피리'가 '템페스트'의 후편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또한 모차르트의 '여자는 다 그래'는 나중에 레오 들리브(Leo Delibes)가 프랑스어 버전의 '사랑의 헛수고'(Love's Labour's Lost)라는 오페라로 재제작한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그런가하면 '여자는 다 그래'가 되었던 '사랑의 헛수고'가 되었단 이것들은 모두 셰익스피어의 코미디인 '12야'(Twelfth Night) 또는 '한여름 밤의 꿈'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이 아니겠느냐는 얘기다. 한편, 베를리오즈의 '트로이 사람들'(Les Troyens: 1863)은 셰익스피어적인 시스템에 의해서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사실상 '트로이 사람들'에서 디돈(디도)과 에네(이니아스)의 사랑의 듀엣은 on such a night 라는 구절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베니스의 상인'의 5막 1장에서 로렌초와 제시카의 대화의 구절이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의 피날레. '템페스트'의 후편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흡사한 면이 있다.

 

1874년에 초연된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는 알렉산더 푸슈킨의 원작을 대본으로 삼은 것이지만 일각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역사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보리스의 광란의 장면은 '맥베스'에 나오는 광란의 장면을 특히 참고했다는 것이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스타일에 있어서 셰익스피어의 전형적인 스타일인 서사시적 요소와 드라마적 요소를 혼합한 것이며 러시아 인민들과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짜르 보리스의 비극을 혼합한 것이라는 얘기다. 이것은 '리어 왕'에서 어릿광대와 '가난한 톰'(에드가)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반영한 것과 다름이 없다. 그리고 살해당한 짜레비치와 그의 상대방이 되는 인물의 설정은 '리챠드 3세'에서의 인물 설정과 흡사하다. 오페라의 아버지라고 하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알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몬테베르디의 마지막 오페라인 '포페아의 대관식'(L'Incoronazione di Poppea: 1643)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세팅과 흡사한 면이 있다. 그렇게 흡사한 것은 오히려 잔 프란체스코 말리피에로(Gian-Francoesco Malipiero), 또는 사무엘 바버(Samuel Barber)의 작품보다도 세팅이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보다 더하다. 몬테베드리의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처럼 희극, 비극, 풍자, 그리고 센티멘탈한 요소까지 혼합되어 있다. 그리고 야먕과 욕망도 함께 조명되어 있다.

 

몬테베르디의 '포페아의 대관식'. 토론토.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세팅과 흡사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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