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 팟푸리

조국의 오페라 발전에 기여한 디바들

정준극 2016. 1. 1. 13:55

위대한 디바들의 조국 오페라 발전에 대한 기여

핀란드국립오페라단을 창시한 소프라노 아이노 아크테

키르스텐 플라그스테드는 노르웨이 오페라단 초대 단장 활동

 

세상에는 수많은 오페라극장들이 있고 수많은 오페라단들이 있다. 국립오페라극장은 그 나라의 문화예술을 보여주는 랜드마크이며 국립오페라단은 그 나라 오페라의 수준을 상징하는 자부심이다. 오페라극장이 한 나라의 음악활동의 심장이라고 하면 오페라단은 영혼인 셈이다. 오페라의 역사에 있어서 위대한 활동을 했던 디바들이 자기 조국의 오페라 발전을 위해 헌신한 경우가 더러 있어서 감동을 주고 있다. 국가를 대표하는 오페라단을 창설하고 발전시킨 디바들도 있지만 무대를 떠난 후에도 음악감독이나 연출가로 활동하여 오페라 무대를 더욱 빛낸 프리마 돈나들도 있다. 과연 그들에게서 본받을 점들은 무엇인가?

 

[핀란드 국립오페라단을 설립한 아이노 아크테]

헬싱키 출신의 소프라노 아이노 아크테(Aino Ackte: 1876-1944)는 핀란드 최초의 전문 오페라단을 설립하고 몇 년 동안 그 오페라단의 단장으로서 핀란드 오페라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디바이다. 아이노 아크테는 핀란드의 성악가로서는 최초로 국제무대를 빛낸 디바이다. 파리오페라에서 <파우스트>의 마르게리트로 이름을 떨쳤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살로메>로서 찬사를 받았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그러한 아크테에 대하여 ‘세상에서 살로메 역할을 완벽하게 해 낼수 있는 단 하나뿐인 여인’이라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이노 아크테

 

1900년대 초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며 활동했던 아크테는 조국을 잊지 못하고 핀란드로 돌아와서 1911년에 ‘나라 오페라단’(Kotimainen Ooppera)을 설립했다. 핀란드 최초의 본격 오페라단이었다. 몇 년 후 이 오페라단은 ‘핀란드 오페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아크테가 설립한 ‘핀란드 오페라’는 오늘날 ‘핀란드 국립오페라’(1956)의 전신이다. ‘나라 오페라단’이 처음 설립되었을 때 핀란드의 음악인들은 아크테에게 초대 단장이 되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아크테는 이를 사양하고 오페라 출연에만 전념하였다. 음악인들은 그의 뛰어난 재능과 국제적인 명성을 감안 할 때에 그가 ‘핀란드 국립오페라’를 맡으면 크게 발전할수 있다고 믿어서 그에게 재차 단장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고 마침내 아크테는 1938년부터 2년 동안 핀란드 국립오페라단의 단장을 맡아 핀란드의 오페라를 정상궤도에 올려놓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아크테는 우선 레퍼토리를 선정할 때에 핀란드의 창작오페라도 반드시 포함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핀란드 국립오페라’가 1년에 약 20편의 오페라를 공연하되 그중에서 최소한 4-6편은 반드시 핀란드 초연이 되도록 했고 또한 초연의 오페라 중에서 반드시 1편은 핀란드 작곡가에 의한 오페라를 공연토록 한 것이다. 이어 그는 오페라단에 최소한 30명의 전속 성악가, 60명의 전속 합창단, 120명의 오케스트라가 있어야 한다고 강력이 주장하여 그대로 실현시켰다. 그런가하면 오페라 인구의 저변확대를 위해 평일 오전에 마티네 콘서트를 개최하여 사람들의 발길을 오페라 극장으로 향하도록 했다. 물론 마티네 콘서트는 무료입장이어서 누구든지 부담 없이 오페라 아리아와 합창을 엔조이 할수 있게 했다. 한편,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이벤트, 관객과의 출연자와의 대화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였다. ‘핀란드 국립오페라’의 외국 순회공연도 적극 추진했다. 아크테는 1912년에 헬싱키에서 ‘국제 사본린나 오페라 페스티발’을 조직하였고 그후 수차례에 걸친 국제오페라 페스티발을 성사시켰다. 장 시벨리우스는 아크테의 그러한 헌신적인 기여를 높이 치하하여서 음조시 ‘루오노타르’(Luonnotar)를 아크테에게 헌정했다. 아크테는 오페라 대본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핀란드를 대표하는 오페라인 ‘유하’(Juha: 아아레 메리칸토 작곡)의 대본은 아크테가 쓴 것이다. 소프라노 아이노 아크테는 ‘핀란드국립오페라’를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단으로 발전시킨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겸손했다.

 

호수의 나라 핀랜드의 핀랜드국립오페라극장

 

[노르웨이 국립오페라 단장을 지낸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

노르웨이가 낳은 20세기 최고의 바그너 소프라노인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Kirsten Flagstad: 1895-1962)도 노르웨이 오페라의 발전을 위해 많은 기여를 한 디바이다. 플라그스타드는 1958년부터 1960년까지 노르웨이 국립오페라의 초대 단장을 지내면서 노르웨이 국립오페라를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플라그스타드는 노르웨이 동부의 하마르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현재 하마르에는 ‘키르스텐 플라그스테드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다. 그는 1935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의 초청을 받아 미국에 건너가서 무려 20여 년 동안 메트로폴리탄 최고의 프리마 돈나로서 존경과 찬사를 한 몸에 받으며 활동했다. 플라그스타드는 바그너의 엘자, 브륀힐데, 이졸데 등으로서 스웨덴의 비르기트 닐슨과 함께 금세기 최고의 바그너 소프라노라는 인정을 받았다. 플라그스타드는 메트로폴리탄에서 1935년부터 1941년까지 무려 70회나 이졸데의 역할을 맡았다. 그가 이졸데를 맡은 날은 사람들이 티켓을 구하느라고 극장 앞에 장사진을 치는 것이 보통이었다.

 

'로엔그린'에서 엘자.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

 

조국 노르웨이를 사랑했던 그는 마침내 메트로폴리탄을 떠나 오슬로로 돌아와서 노르웨이 국립오페라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노르웨이에 최초의 국립오페라-발레단이 설립된 것은 1957년이었다. 플라그스타드는 이듬해인 1958년부터 초대 단장을 맡아서 노르웨이 오페라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가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노르웨이 작곡가에 의한 오페라를 발굴하여 무대에 올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선음악회도 자주 주관하였다. 그는 1960년에 골수암 진단을 받아 투병생활을 하다가 1962년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67세였다. 플라그스타드는 노르웨이를 빛낸 세계적인 디바로서 국가적인 사랑을 받았다. 노르웨이의 100 크로너 지폐에 플라그스타드의 모습을 넣은 것만 보아도 알수 있는 일이다. 또한 노르웨이 항공의 셔틀 여객기에도 플라그스타드의 모습을 넣어 세계에 자랑했다.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는 노르웨이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자랑이었다.

노르웨이 지폐 100 크로너에 나타난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

 

[스웨덴 왕립오페라단에 기여한 비르기트 닐슨]

오페라의 연혁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바그너 소프라노라고 할 것 같으면 우선 스웨덴의 비르기트 닐슨(Birgit Nilsson: 1918-2005)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비르기트 닐슨의 스톡홀름 왕립오페라극장과 왕립오페라단에 대한 애정은 특별했다. 스톡홀름 왕립극장은 그가 오페라에 처음 출연했던 곳이었고 그가 세계적인 소프라노로서 도약하게 된 발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르기트 닐슨은 기회 있을 때마다 왕립오페라극장과 왕립오페라단을 위해 출연도 하고 재정지원도 하였다. 비르기트 닐슨은 1946년에 스톡홀름의 왕립오페라극장에서 ‘마탄의 사수’의 아가테로서 데뷔하였다. 실은 아가테를 맡은 소프라노가 갑자기 병이 나서 출연할수 없다고 하여 고작 3일 전에 아가테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고 무대에 데뷔하였던 것이다. 이듬해에는 베르디의 ‘막베스’에서 레이디 막베스를 맡아서 그야말로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그로부터 비르기트 닐슨은 세계의 무대를 누비는 뛰어난 드라마틱 소프라노로서 한 세기를 풍미하였다. 닐슨은 돈나 안나, 아이다, 토스카, 비너스, 지글린데, 젠타, 마샬린, 그리고 투란도트로서 모두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이졸데. 비르기트 닐슨

 

그보다도 그가 세계의 음악계를 위해 기여한 것은 사재를 털어 ‘비르기트 닐슨상’을 제정한 것이다. 비르기트 닐슨은 평생을 통한 오페라 출연과 레코딩 등으로 많은 재산을 모을수 있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기의 전재산을 투입하여 ‘비르기트 닐슨 재단’을 설립하고 그 재단이 매 3년마다 세계의 오페라를 위해 기여한 사람이나 단체를 선정하여 상을 주도록 했다. 비르기트 닐슨은 2005년 12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임종에 앞서서 재단 사람에게 밀봉 봉투를 하나 주고 3년 후에 개봉하여 첫 수상자를 발표하라고 부탁했다. 비르기트 닐슨상의 첫 번째 수상자는 닐슨 자신이 선정했던 것이다. 상금은 무려 1백만불(약 10억원)이었다. 제1회 수상자는 닐슨이 정한대로 스페인의 테너 겸 지휘자 겸 음악행정가인 플라치도 도밍고에게 주어졌다. 도밍고는 오페라 역사상 최대인 130개의 역할을 소화한 테너 겸 바리톤이다. 도밍고는 지휘자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인본주의자여서 많은 자선활동을 했다. 도밍고에 대한 시상식은 스톡홀름의 왕립오페라극장에서 스웨덴 국왕인 구스타브 16세가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제2회 비르기트 닐슨상은 2011년에 이탈리아의 지휘자인 리카르도 무티가 받았다. 이때부터는 국제심사위원회가 구성되어 수상자를 선정했다. 제3회 수상자로는 2014년 빈필이 선정되었다. 170년이 넘는 전통과 역사를 통해서 오페라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적 때문이다. 스웨덴국립은행은 2014년부터 500 크로너의 지폐에 위대한 소프라노 비르기트 닐슨의 초상화를 넣어서 발행하고 있다.

 

스웨덴의 500 크로네 지폐에 등장한 비르기트 닐슨

 

[몰도바 오페라에 기여한 마리아 비에수]

몰도바공화국이 어떤 나라인지 생소하고 또한 마리아 비에수(Maria Biesu: 1935-2012)라는 소프라노도 누군지 잘 모르겠지만 동유럽의 몰도바공화국은 마리아 비에수를 국가적인 보배로 생각하고 있다. 몰도바(또는 몰다비아)는 마리아 비에수의 뛰어난 활동과 조국 몰도바에 대한 애정을 깊이 인정하여서 국립오페라-발레극장의 명칭을 ‘마리아 비에수 몰도바 오페라-발레극장’이라고 명명했다. 한편, 몰도바공화국의 수도인 키시너우에서는 벌써 몇 년 전부터 ‘마리아 비에수 국제오페라-발레 페스티발’(Va Invita Maria Biesu)이 열리고 있다.

마리아 비에수는 24세 때인 1961년에 키시너우의 몰도바국립오페라-발레극장에 합류했다. 토스카로서 처음으로 오페라 무대에 데뷔하였다. 마리아 비에수는 뛰어난 성악적 재능과 연기력으로 인하여 곧 몰도바 국립극장의 프리마 돈나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타티야나(유진 오네긴), 리사(스페이드의 여왕), 그리고 초초상(나비부인)으로 누구도 따라 올수 없는 높은 경지를 이룩했다. 1967년 토쿄에서 열린 미우라 다마키 기념 제1회 국제성악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하지하여 ‘금세기 최고의 초초상’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몰도바는 이를 기념하여 마리아 비에수의 초초상 우표를 발행했다.

 

초초상의 마리아 비에수

 

[뉴욕시티오페라에 기여한 비벌리 실스]

20세기 최고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인 비벌리 실스(Beverly Sills: 1929-2007)는 1980년 은퇴한 후에 거의 10년 동안 뉴욕시티오페라(NYCO)의 총감독으로서 활동했으며 1994년에는 링컨센터 이사장으로, 2002년부터 2005년까지는 메트로폴리탄 이사장으로 활동하여 미국 오페라의 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하였다. 비벌리 실스는 NYCO의 오페라단장을 맡아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으나 반드시 오페라단장을 해야 기여할수 있는 것은 아니라면서 사양하고 그저 음악감독으로서 만족하였다. 오페라의 단장은 행정력도 있어야 하고 음악적으로도 성악과 기악에 대한 지식이 높아야 하며 아울러 스테이지에 대한 이해가 높은 사람이 맡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뉴욕시티오페라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는 비벌리 실스의 이같은 겸손의 주장을 바탕으로 하여 더욱 내실을 다지는 발전을 할수 있었다.

 

카르멘의 비벌리 실스

 

[터키의 디바 레일라 겐서]

앙카라에는 앙카라오페라극장도 있지만 ‘터키의 디바’(La Diva Turca)라고 불리는 소프라노 레일라 겐서(Leyla Gencer: 1928-2008)를 기념하는 ‘레일라 겐서 극장’도 있다. 레일라 겐서는 초기에 잠시 앙카라오페라극장에서 활동했지만 생애의 대부분을 밀라노의 라 스칼라를 중심으로 보냈다. 미모와 미성, 여기에 뛰어난 연기력을 지닌 레일라 겐서는 70개가 넘는 오페라의 역할을 언제라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특히 도니체티와 베르디의 여주인공 역할에서 높은 재능을 보여주었다. 라 스칼라 데뷔는 1957년 미미(라 보엠)로였다. 무대를 압도하는 놀라운 노래와 연기였다. 그후로 사람들은 레일라 겐서에 대하여 ‘여왕’(La Regina)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레일라 겐서는 1950년까지 앙카라오페라극장의 합창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산뚜짜(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로서 일약 주목을 받게 되었고 결국 앙카라오페라극장에서의 산뚜짜 역할이 그를 나폴리와 밀라노로 인도해 주었다.

 

레일라 겐서

 

터키정부는 레일러 겐서가 터키의 국가위상을 크게 높였다고 인정하여 앙카라에 ‘레일라 겐서 극장’을 건축했다. 주로 오페라를 공연하고 있다. 한편, 기존의 앙카라오페라극장으로서도 레일라 겐서를 기념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극장 외부에 레일라 겐서의 동상을 세웠다. 2004년에 터키정부는 레일라 겐서를 기념하는 은화를 발행했다. 이스탄불에는 ‘레일라 겐서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이스탄불은 1996년 이래 ‘국제 레일라 겐서 성악경연대회’를 열고 있다. 그보다 앞서 1988년에는 터키 대통령이 레일라 겐서를 ‘국가예술가’로 명명했다.

 

앙카라의 레일러 겐서 오페라 앤 아트 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