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 팟푸리

오페라 속의 팜 파탈(Femme fatale)

정준극 2016. 1. 2. 20:20

오페라 속의 팜 파탈(Femme fatale)

델릴라, 카르멘, 살로메, 클레오파트라, 룰루 등이 대표적 팜 파탈

 

‘팜 파탈’(Femme fatale)은 ‘남자들을 파멸로 이끄는 치명적인 여인’이라는 뜻이다. 한글 사전에는 ‘팜 파탈’을 ‘요부’(妖婦)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한 팜 파탈은 예술 작품의 주인공으로 제격이다. 인간의 속성은 원래 비열하고 저속하기 때문에 팜 파탈이 되었든 요부가 되었던 호기심과 함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페라는 그런 호기심을 자극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수 있다. 실제로 팜 파탈에 속하는 여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오페라만 해도 여러 편이 있다. 델릴라, 살로메, 카르멘, 클레오파트라, 쿤드리(파르지팔), 룰루 등이다. 도니체티의 오페라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의 타이틀 롤인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도 팜 파탈의 범주에 당연히 포함된다. 16세기의 실존인물인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는 나중에 교황이 된 알렉산더 6세의 딸이었다. 그런데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와 관련되는 남자들은 모두 독살되거나 비명에 죽임을 당하였다. 때문에 그를 팜 파탈의 전형으로 간주하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삼손과 델릴라'. 호세 카레라스와 아그네스 발차

 

역사적으로 보면 고대로부터 팜 파탈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여럿 있었다. 실존 인물인 경우도 있지만 단순히 전설, 신화, 상상 속의 여인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아프로디테(비너스), 사이렌, 스핑크스, 스킬리아, 메데아 등이다. 아프로디테(비너스)는 여신이지만 예술작품에서는 요부로 등장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에 나오는 비너스는 탄호이저를 유혹하여 파멸의 길로 몰아넣고자 했기 때문에 팜 파탈의 반열에 들어간다. 바다의 요정인 사이렌은 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노래를 불러 뱃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어 결국 배가 암초에 부딪쳐 파손되고 뱃사람들을 죽게 만든다는 존재이다. 사이렌들은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율리세의 조국 귀환’(Il ritorno d'Ulisse in patria)에 등장하며 현대작품으로는 독일의 아우구스트 분게르트의 오페라 ‘오디세이의 귀환’(Odysseus Heimkehr)에도 등장한다. 신화에 나오는 ‘스핑크스’는 얼굴 생김새가 대체로 몸체가 동물처럼 되어 있으나 얼굴 모습은 여자처러 되어 있는데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어 맞추지 못하면 재앙을 준다고 해서 팜 파탈의 범주에 포함하고 있다. 오페라에서는 외디푸스 신화와 관련하여 스핑크스가 등장한다. 예를 들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외디푸스 렉스’(Oedipus rex)에서는 스핑크스가 테베의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맞추지 못하자 테베에 저주를 주어 무서운 역병이 돌게 한다. 그러나 외디푸스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알아 맞혀서 테베에 대한 저주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그 수수께끼라는 것은 '아침에는 네발로, 점심에는 두발로, 저녁에는 세발로 걷는 것이 무어냐?'는 것이고 대답은 보나마나 '사람'이었다. 루마니아의 게오르그 에네스쿠의 오페라 ‘외디프’에도 스핑크스가 등장한다.

 

'외디푸스 렉스' 무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또 다른 팜 파탈로는 메데아와 클리템네스트라가 있다. 메데아는 콜키스의 공주로서 마법과 요술에 능한 여인이었다. 메데아는 용사 제이슨을 사랑하여 아버지 이이테스의 뜻을 거역하고 제이슨이 황금양털을 차지하도록 도와준다. 메데아는 제이슨과 함께 콜키스를 떠나 다른 곳에서 제이슨의 부인으로서 몇 년을 같이 살며 두 아이까지 낳는다. 그런데 얼마후 제이슨이 코린토 크레온왕의 딸 크레우사와 결혼코자 한다. 그 사실을 알게된 메데아는 제이슨에게 복수하기 위해 크레우사에게 짐짓 축하의 선물로 결혼 가운(웨딩드레스)을 보낸다. 누구든지 그 가운을 입으면 불이 붙어 죽는다는 무서운 가운이다. 결국 크레우사는 가운을 입자마자 불에 타서 죽는다. 메데아는 제이슨에 대한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 두 아이들까지 살해한다. 그후 메데아는 아테네로 가서 이게우스왕과 결혼한다. 케루비니의 ‘메데아’는 1953년 마리아 칼라스가 라 스칼라에서 타이틀 롤인 메데아의 역할을 맡은 후부터 크게 각광받게 되었다.

 

'메데'. 사라 코너리. BBC

 

메데아(프랑스어로는 메데)를 주인공으로 하여 여러 오페라들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것은 마르크 안투안 샤펜티에(1643-1704)의 ‘메데’(Medée)이다. 1693년에 파리에서 초연되었다. 그리고 1953년에 마리아 칼라스가 맡아서 열광을 받았던 케루비니의 작품도 대표적이다. 오페라의 연혁에서 글룩과 파치니의 오페라 경연대회는 유명한 일화이다. 파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글룩과 파치니 중에서 누가 더 훌륭하냐를 판정하는 별 이상한 다툼이었다. 두 사람에게 같은 제목으로 오페라를 만들도록 하여 그것을 보고 판단하자는 이벤트였다. 그때의 내어준 제목이 '메데'였다. 벨칸토 시기에 활동했던 사베리오 메르카단테의 ‘메데아’도 있지만 어쩐 일인지 오늘날 거의 공연되지 않고 있다. 현대에는 미국의 벤자민 리스가 1791년에 만든 ‘고린도의 메데아’가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엘렉트라’에 나오는 클리템네스트라도 팜 파탈에 속한다. 아가멤논장군이 트로이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탈출하여 돌아오자 그의 부인 클리템네스트라와 간부 이지스투스가 음모하여 암살한다. 사실상 두 사람은 아가멤논이 트로이에 잡혀있는 동안 스스로 그리스의 왕이 되어 통치하고 있었다. 클리템네스트라는 딸인 엘렉트라를 동물처럼 대하며 구박한다. 아가멤논의 딸인 엘렉트라는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와 어머니의 간부인 이지스투스를 증오하여 동생 오레스테스와 함께 처절한 복수를 한다. 이와 비슷한 스토리가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다. 프랑스의 앙부르아즈 토마가 ‘햄릿’을 오페라로 만들었다. 덴마크 햄릿 왕이 부인 게르트루드와 동생 클라우디우스에 의해 독살 당한다. 클라우디우스는 덴마크의 왕이 되고 전왕의 왕비였던 게르트루드는 시동생인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여 왕비가 된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 선왕인 아버지를 죽인 삼촌에게 복수하는 내용이다. 클라우디스도 팜 파탈의 열전에 포함된다.

 

엘렉트라. 관중과 함께

 

세기의 미인이라는 클레오파트라도 팜 파탈의 열전에 포함된다. 클레오파트라와 시저, 그리고 안토니우스(안토니)에 얽힌 이야기는 오페라의 소재로서 훌륭하다. 헨델이 ‘이집트의 줄리오 세자레’(Giulio Cesare in Egitto)는 오늘날에도 자주 공연되는 오페라이다. 타이틀은 '줄리오 세자레'로 되어 있어서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이 오페라에서 팜 파탈인 클레오파트라가 주인공인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도메니코 치마로사도 ‘클레오파트라’라는 타이틀의 오페라를 만들었다. 두 말하면 잔소리이지만 클레오파트라와 줄리어스 시저의 사랑 이야기이다. 미국의 사무엘 바버는 ‘안소니와 클레오파트라’라는 오페라를 만들었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에 비교적 충실한 작품이다. 독일의 칼 하인리히 그라운은 1742년에 ‘시저와 클레오파트라’를 작곡했다.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카우어는 1814년에 단막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작곡하여 비엔나에서 초연을 가졌다. 미국의 헨리 킴벌 해들리는 1920년에 ‘클레오파트라의 밤’(Cleopatra's Night)이라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쥘르 마스네의 ‘클레오파트라’를 빼놓을 수 없다. 가장 관능적인 클레오파트라를 만날수 있기 때문이다.

 

헨델의 '줄리오 세자레'에서 클레오파트라. 다니엘르 드 니스. 메트로폴리탄

 

구약성서에 거론되는 인물들 중에서도 팜 파탈로 인정을 받는 인물들이 있다. 릴리스(Lilith)는 실존인물은 아니지만 릴리스를 상징하는 구절이 구약성서 이사야 34장에 나온다. 여러 짐승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릴리스라는 것이다. 유태교 신화에 의하면 릴리스는 첫 여자 악마라고 한다. 어떤 전설에는 릴리스가 아담의 첫 부인이었으며 뱀으로 모습을 바꾸어 이브에게 선악과를 먹도록 했고 이어 아담도 먹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릴리스를 팜 파탈의 범주에 포함하고 있다. 오페라에는 릴리스가 직접 등장하는 경우가 아직 없다. 다만, 미국의 현대 작곡가인 헨리 몰리코네가 작곡한 뮤지컬 ‘호텔 에덴’에는 릴리스가 등장한다. ‘호텔 에덴’은 에덴동산을 현대의 미국 팜비치에 있는 호텔로 바꾸어 놓은 작품으로 1막에 아담, 이브, 릴리스가 나온다.

 

성서에 나오는 여인 중에서 대표적인 팜 파탈들로서는 델릴라와 살로메를 빼놓을 수 없다. 프랑스의 카미유 생상스가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를 작곡했다. 그런데 델릴라에 대하여는 구약성서 사사기 14장으로부터 16장까지 자세히 나오지만 살로메에 대하여는 마태복음 14장 6-11절과 마가복음 6장 21-28절에 막연하게 헤로디아의 딸로서 등장할 뿐이다. 헤로디아의 딸에게 살로메라는 이름을 붙여준 사람은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이다. 그가 1893년에 내놓은 희곡의 제목이 ‘살로메’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희곡 ‘살로메’에서 살로메가 세례 요한을 깊이 사랑하였다는 내용을 넣었다. 성경에는 그런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유명한 ‘일곱 베일의 춤’ 역시 오스카 와일드의 창작이다. 이 희곡을 바탕으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오페라 ‘살로메’를 작곡하였다. ‘살로메’는 1905년 12월 드레스덴 궁정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킨 오페라였다. 특히 살로메가 쟁반에 담은 세례 요한의 머리를 들고 키스까지 하는 장면은 차마 눈뜨고 볼수 없는 참혹한 장면이어서 어떤 극장에서는 공연금지의 결정을 내린 일도 있다.

 

'살로메. 셰릴 바커. 오페라 오스트레일리아

 

중세의 후반기, 즉 계몽시기에 등장하는 오페라의 팜 파탈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은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에 나오는 ‘밤의 여왕’일 것이다. ‘밤의 여왕’은 딸 파미나 공주에게 자라스트로를 죽이라고 단검을 건네주며 만일 말을 듣지 않으면 ‘내 딸도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인 것을 보면 팜 파탈의 범주에 포함해도 무난할 것이다. 바그너의 '파르지팔'에서 쿤드리도 대표적인 팜 파탈이다. 쿤드리는 사악한 마법사(사탄)인 클링조르에 예속되어 있는 여인으로서 성배를 지키는 기사들을 유혹하여 타락시키는 역할을 한다. 쿤드리는 파르지팔도 유혹하지만 파르지팔은 순진하기 때문에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쿤드리는 나중에 성배에 의해 저주가 풀어져서 성배를 찬양하는 진실한 여인이 된다. 그렇다고 해도 수많은 기사들을 유혹하여 파멸로 몰아넣은 이력은 지워지지 않기 때문에 팜 파탈로 분류한 것이다.

 

마술피리에서 '밤의 여왕'. 에카테리나 바카로바

 

오페라의 팜 파탈로는 델릴라 이외에도 단연 카르멘을 꼽지 않을수 없다. 카르멘은 돈 호세에 의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지만 평소의 행색으로 보아 팜 파탈로 인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현대에 와서도 몇 명의 팜 파탈이 오페라에 등장한다. 우선 알반 베르크의 ‘룰루’(Lulu)를 들지 않을수 없다. ‘룰루’의 무대는 1830년대, 독일의 어느 마을이다. 룰루와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죽는다. 그러는 와중에 룰루는 동성연애까지 한다. 그러다가 일이 잘못되어서 창녀가 된다. 룰루는 결국 잭 리퍼라는 무지막지한 남자를 만나 오히려 죽임을 당한다. 그러므로 룰루를 팜 파탈로 선정하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다만, 내용이 너무 외설적이고 폭력적이어서 미성년 관람불가이다.

 

'룰루'. 잘츠부르크 페스티발

 

소련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므첸스크구의 레이디 맥베스'에 나오는 여주인공인 카테리나노 단연 팜 파탈에 속한다. 자기를 못살게 구는 시아버지를 독살하고 이어 남편인 치노비까지 죽이기 때문이다. 오페라의 제목에 맥베스라는 이름이 나오지만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다만, 주인공 카테리나가 맥베스 부인처럼 악랄한 여인이기 때문에 그런 제목을 붙인것 같다. 쇼스타코비치기 1930년에 작곡한 것으로 전4막이지만 2막으로 줄여 공연된다. 이 작품이 구소련에서 선보이자 스탈린 당국은 공연금지령을 내렸다. 병리적인 자연주의와 에로티즘이 가미되어 있으며 공산 사회주의의 적인 브르조아적 발상이 담겨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스탈린도 서민들의 치정극인 이 오페라를 보고나서 이것은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고 비판했다. 관영 신문은 스탈린의 코멘트를 즉각 보도하였다. 그리하여 이 오페라는 스탈린이 죽은지 10년후인 1963년에야 겨우 수정본이 다시 무대에 오를수 있었다. 스탈린 당시 쇼스타코비치는 자기의 작품을 알아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비판으로 신작활동을 억제하려는 소련 공산당에 환멸을 느끼고 한 때 자살까지 하려 했다. 그러나 참고 견뎠으며 교향곡 제5번으로 재기하였다. 그러고보면 베르디의 '맥베스'에 나오는 맥베스 부인도 팜 파탈이 아닐수 없다. 남편 맥베스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도록 하기 위해 온갖 비행을 다 저지르기 때문이다.

 

'므첸스크구의 레이디 맥베스'. 메트로폴리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