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 팟푸리

위대한 작곡가들의 국적 에피소드

정준극 2016. 1. 2. 10:38

유럽의 정치 판도에 따라 국적이 바뀌다

베르디는 프랑스인으로, 도니체티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출생

요한 슈트라우스는 독일의 작은 공국 시민으로 귀화

 

[헨델은 영국인]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조지 프리데릭 헨델을 독일의 음악가라고 알고 있다. 헨델은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엄연히 영국인이다. 헨델은 27세의 젊은 나이에 런던에 정착했다. 헨델은 이탈리아에서 작곡 활동을 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아서 영국으로 건너갔다. 더 좋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헨델은 런던에서 계속 독일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가 15년이 지난 1727년, 그가 42세 때에 마침내 영국으로 귀화하였다. 헨델은 영국 국민으로서 32년을 살다가 1759년에 런던에서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헨델은 독일의 할레에서 태어났다. 할레는 독일 중부 라이프치히 인근의 도시이다. 하지만 독일이라기보다는 정확히 말하면 마그데부르크 공국의 할레에서 태어났다. 독일은 통일을 이루기 전에 수많은 작은 국가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마그데부르크 공국이었다. 헨델의 독일식 이름은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이었다. 나중에 영국으로 귀화하고 나서 영어식으로 조지 프리데릭 헨델(George Frideric Handel)로 이름을 바꾸었다. 헨델의 아버지의 이름도 게오르그 헨델이었는데 마그데부르크 공국에서 이름난 이발사 겸 외과 의사였다. 헨델은 그의 아버지가 63세 때에 늦동이로서 태어났다.

 

독일(당시에는 마그데부르크 공국)의 할레에 있는 헨델의 생가

 

헨델은 1750년, 그가 65세 때에 독일 여행을 마치고 마차를 타고 런던으로 돌아가는 중에 네덜란드의 헤이그 부근에서 마차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었다. 헨델은 가까스로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사고로 인하여 심한 백내장을 앓게 되었다. 헨델은 당시 최고의 의사에게서 수술을 받았으나 치료가 되지 못했다. 헨델은 그로부터 9년 후에 병마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해서 결국 세상을 떠났다. 헨델의 장례식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국장에 준하여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장례식에는 무려 3천 명 이상의 조객이 참가하였다. 헨델의 묘소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내에 마련되었다.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구역에 있는 헨델의 묘역과 기념상. 악보에는 오라토리오 '메시아' 중에서 '내 주는 살아 계시고'가 적혀 있다.

 

[오스트리아제국의 도니체티]

‘사랑의 묘약’으로 유명한 게타노 도니체티(Gaetano Donizetti)는 이탈리아 작곡가이다. 1797년 오늘날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 지방의 베르가모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제국의 국민으로 태어났다. 당시 롬바르디를 비롯한 북부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제국의 통치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북부 이탈리아를 오스트리아제국이 통치하게 된 것은 1815년 비엔나회의의 결과이다. ‘회의는 춤춘다’(Der Kongress tanzt)라는 유명한 말이 나온 비엔나회의는 나폴레옹시대를 마감하고 유럽의 지도를 새로 그리는 회의였다. 결과, 프랑스가 장악하고 있던 이탈리아 북부는 오스트리아제국의 관할 아래에 두었고 이탈리아 중부는 로마 교황청의 우산 아래에 두었으며 ‘두개의 시실리’라고 하는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는 스페인 계통의 왕을 두어 통치하게 했다. 그러므로 도니체티는 엄밀히 말해서 태어났을 때 오스트리아제국의 국민이었다.

 

도니체티 생가에 마련된 기념관

 

도니체티는 베르가모에서 태어났다고 했지만 실은 베르가모의 성밖에 있는 허술한 집의 창문도 없는 지하실에서 태어났다. 그만큼 가난한 집이었다. 아버지 안드레아 도니체티는 마을 전당포의 관리를 맡아 겨우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 게타노 도니체티와 형제들을 학교에 보내지 못했다. 어린 게타노 도니체티는 베르가모 대성당의 소년성가대원이 되어 숙식을 해결하였다. 그러다가 변성이 되자 성가대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우연히 베르가모에 온 독일의 오페라 작곡가 시몬 마이르의 관심을 끌어서 그에게서 작곡을 공부하게 되었다.

 

베르가모의 도니체티 극장 인근에 있는 도니체티 기념상. 극장 오픈과 때를 같이하여 제막되었다.

 

도니체티는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서 ‘폴리우토’라는 오페라를 공연하게 되었지만 당시 나폴리공국의 왕이 ‘폴리우토’의 내용이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하여 공연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실망한 도니체티는 다시는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을 위해 작곡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차제에 이탈리아를 떠나 파리로 왔다. 도니체티는 파리에서 ‘연대의 딸’ 등으로 인기를 끌었고 나중에는 비엔나에도 자주 가서 활동하며 명성을 쌓았으나 나쁜 병에 걸려 그만 정신착란까지 일으켜서 결국은 파리에서 정신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했다. 그때 도니체티는 49세였다. 당시 파리에서 도니체티가 살던 구역의 경찰서장은 구역 내의 정신질환자의 관리까지 맡고 있었다. 도니체티의 친지들이 그를 고향인 베르가모로 데려가겠다고 했지만 경찰서장은 안 된다고 하며 반대했다. 그래서 친지들이 몰래 도니체티를 데리고 베르가모로 왔다. 도니체티는 51세라는 비교적 활동적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에도 베르가모는 오스트리아제국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도니체티의 오페라는 그후에 등장하는 베르디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베르가모의 도니체티 극장. 도니체티 탄생 1백주년을 기념하여 1897년에 봉헌되었다.

 

[프랑스인으로 태어난 베르디]

오페라의 황제라고 하는 주세페 베르디는 북부 이탈리아의 부세토 인근에 있는 르 론콜르(Le Roncole)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지명에서 볼수 있듯이 르 론콜르는 프랑스식 명칭이다. 그것은 당시 그 지방이 프랑스의 제1제국에 합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제1제국은 파르마와 피아첸자 공국을 프랑스 영토에 합병하고 데파르트망 타로(Departement Taro)라고 불렀다. 데파르트망은 우리식으로 경기도, 강원도의 도(道)라고 볼수 있다. 르 론콜르는 프랑스 제1제국과 오스트리아제국의 국경선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었던 마을이었다. 아무튼 프랑스의 영토였으므로 베르디는 태어난후 부세토의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에도 프랑스식으로 조셉 포르튀냉 프랑수아(Joseph Fortunin Francois)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베르디는 프랑스 국민으로 태어났다.

 

론콜레 베르디 마을의 베르디 생가

 

프랑스 제1제국은 1815년, 비엔나회의를 여파로 파르마공국과 인근의 피아첸자 및 구아스탈리아를 영유하게 되었다. 이들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는 그후 거의 60여년이 지난 1871년에 이탈리아가 독립왕국을 수립하고 수도를 로마로 정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베르디가 58세 때의 일이었다. 통일 이탈리아를 염원하였던 베르디는 신생 이탈리아 왕국의 상원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베르디는 태어날 때에 프랑스 국민이었지만 1901년 세상을 떠날 때에는 이탈리아 왕국의 국민이었다. 그리고 베르디의 고향인 르 론콜르는 최근 론콜레 베르디(Roncole Verdi)라는 지명으로 바뀌었다.

 

부세토의 베르디 기념상

 

[요한 슈트라우스는 작소니 코부르크 공국의 시민]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비엔나에서 태어났지만 나중에는 독일에 있는 작은 공국인 작세 코부르크 고타(Saxe-Coburg-Gotha)의 시민이 되었다. 작세 코부르크 고타는 현재의 독일 중부 바바리아와 튜링기아에 걸쳐있는 작은 나라였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오스트리아 사람이 아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조국인 오스트리아를 버리고 작세 코부르크 고타라고 하는 작은 공국의 시민이 된 것은 오로지 결혼 때문이었다.

 

현재의 7구 노이바우의 레르헨펠더 슈트라쎄(Lerchenfelder Strasse) 15번지에 있었던 요한 슈트라우스가 태어난 집. 당시에는 장크트 울리히 슈트라쎄(St Ulrich Strasse)였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1862년, 37세 때에 7세 연상의 메조소프라노 헨리에타 트레프즈(일명 예티)와 처음 결혼하였다. 슈테판성당에서였다. 예티는 비엔나 사교계에서 발이 넓은 여자였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예티의 후원에 힘입어서 결혼후 합스부르크 궁정무도회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궁정무도회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은 일반 시민들을 위한 왈츠가 궁정무곡으로서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였다. 첫 번째 부인 예티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미국 순회연주를 주선하는 등 그의 음악활동을 적극 지원하였으나 얼마후 세상을 떠났다. 일설에 의하면 자살했다고 한다. 하지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요한 슈트라우스와 결혼하기 전에 다른 남자와의 관계에서 낳은 아들 중의 하나가 말썽을 일으켜 심적 고통이 많았고 한편 오페레타 ‘박쥐’를 작곡하던 요한 슈트라우스가 젊고 예쁜 소프라노와 스캔들을 일으키자 괴로운 마음에서 자살했다는 얘기다.

 

슈타트파르크에 있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 황금상의 상단

 

예티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요한 슈트라우스는 몇 주 후에 여배우 안젤리카 디트리히(일명 릴리)와 두 번째 결혼을 하였다. 비엔나의 칼스키르헤에서였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50세가 넘은 초로(初老)였지만 릴리는 20대의 젊은 여인이었다. 릴리는 낭비벽이 있었고 더구나 바람을 피는 바람에 요한 슈트라우스는 결국 이혼을 결심하였다. 릴리는 테아터 안 데어 빈(빈강변극장)의 매니저와 좋아지내게 되어 이혼도 하기 전에 요한 슈트라우스를 떠나 아예 그의 집에 가서 살았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이혼을 하려고 애썼지만 가톨릭 사회여서 이혼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요한 슈트라우스는 독일로 가서 개신교 국가인 작세 코부르크 고타 공국의 시민권을 얻어 이혼을 성사시키고 아예 그곳에서 세번째 부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비엔나의 9구 알저그룬트의 뮐너가쎄(Mullnergasse) 3번지에 있는 요한 슈트라우스 왕조 기념관. 지그문트 프로이드 박물관 인근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가족들에 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세번째 부인은 요한 슈트라우스가 회계사로 고용한 아델레 도이치라는 여인이었다. 아델레와 결혼한 요한 슈트라우스는 그때까지 느끼지 못했던 마음의 평안을 얻어 작곡에 전념하여 오페레타 ‘집시남작’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완성하여 다시한번 최고의 인기를 끌게 되었다. 아델레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유태계였다. 그러나 훗날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나치는 위대한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의 할아버지와 요한 슈트라우스의 부인인 아델레가 유태계라는 사실을 숨기느라고 노력했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1899년, 향년 74세로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묘소는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첸트랄프리드호프)의 음악가 묘역에 있다. 세 번째 부인 아델레와 합장되어 있다.

 

비엔나 중앙공공묘지 음악가 묘역에 있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묘비 중간부분. 세번째 부인 아델레와 합장되어 있다.

 

[드보르작과 스메타나도 오스트리아 국민]

오페라 ‘루살카’ 등을 작곡한 안토닌 드보르작(1841-1904)은 오늘날 체코공화국의 작곡가로서 알려져 있지만 체코공화국은 그가 활동하던 당시에 오스트리아제국에 속한 보헤미아였다. 그러므로 드보르작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민으로서 태어났다. 한편, 그가 세상을 떠날 당시에는 오스트리아제국이 헝가리와 결속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되었다. 그러므로 드보르작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국민으로서 세상을 떠났다. 보헤미아는 1차 대전이 끝나자 체코로 독립하였지만 드보르작은 그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국민으로서 남아 있어야 했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도는 비엔나였다. 그런 관계로 드보르작은 비엔나에도 자주 갔었다. 드보르작은 1897년에 비엔나예술가재단의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897년에 비엔나에서 브람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고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이듬해인 1898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셉 황제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이처럼 드보르작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여러 관계를 맺으며 활동했다.

 

프라하 교외의 넬라호체베스(Nelahozeves)에 있는 드보르작 생가와 기념상. 당시에 오늘날의 체코공화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한 보헤미아였다.

 

마찬가지로 오페라 ‘팔려간 신부’ 등을 작곡한 체코의 베드리치 스메타나도 정확히 말하면 오스트리아제국의 국민이었다. 스메타나는 1824년 프라하 동쪽의 리토미슬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접경지대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 있는 리토미슬성의 포도주 제조공장과 저장고가 있는 건물에서 태어났다. 당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는 모두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제국이 통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보헤미아에서 태어났지만 독일어가 공용어였다. 스메타나가 1884년에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제국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스메타나는 프라하의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스메타나가 태어난 리토미슬성의 포도주 공장 건물(동편)

 

[리스트는 헝가리 작곡가]

피아노의 대가인 프란츠 리스트는 작곡가로서 피아노 작품만을 작곡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젊은 시절에 ‘돈 상슈’라는 오페라도 작곡했던 일이 있다. 프란츠 리스트(1811-1886)의 국적문제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조금 다르다. 국제적인 음악자료에서는 리스트를 오스트리아 작곡가로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리스트가 헝가리왕국에 속한 지역에서 태어났지만 당시 헝가리왕국은 오스트리아제국에 속하여 있었기 때문에 그를 오스트리아의 음악가로 분류한 것이다. 리스트는 헝가리왕국의 소프론 지방에 있는 도보르얀(Doborjan) 마을에서 태어났다. 도보르얀은 독일어로 라이딩(Raiding)이라고 부른다. 당시에는 헝가리에서도 독일어가 공용어였다. 리스트도 독일어를 배우고 사용했다. 라이딩은 2차 대전후 오스트리아의 부르겐란트주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리스트를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라고 인정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리스트 자신이 자기는 절대로 오스트리아 국민이 아니고 헝가리 국민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리스트는 평생동안 헝가리왕국의 여권을 지니고 다녔다. 이름도 헝가리식으로 페렌츠 리스트(Liszt Ferencz)라고 썼다. 다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리스트는 헝가리 말을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고 한다. 오늘날 헝가리에는 프란츠 리스트음악원, 리스트극장 등 리스트를 기념하는 건물들이 다수 있다.

 

오스트리아 부르겐란트의 라이딩 마을에 있는 리스트 생가와 흉상. 라이딩은 당시에 헝가리 왕국에 속한 도보르얀이었다.

 

[레하르는 오스트리아 작곡가]

오페레타 ‘메리 위도우’로서 유명한 프란츠 레하르(1870-1948)도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로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코마롬은 당시에는 헝가리왕국이었고 오늘날에는 슬로바키아의 코마르노(Komarno)이다. 그래서 비록 일부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레하르가 헝가리의 작곡가라고 주장하는 측이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슬로바키아의 작곡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프란츠 레하르의 아버지의 이름도 프란츠 레하르인데 아버지 프란츠 레하르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보병연대의 군악대장이었다. 어머니 크리스티네 노이브란트는 독일계 헝가리 여인이었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프란츠 레하르는 보헤미아의 프라하에서 음악공부를 했다. 프란츠 레하르의 다른 형제들은 모두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에서 공부를 하고 직업을 가졌는데 프란츠 레하르는 비교적 늦게 비엔나에 진출했다. 프란츠 레하르는 2차 대전이 끝난 후인 1948년 잘츠부르크 인근의 바드 이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비엔나보다도 잘츠부르크 지방을 더 사랑했다.

 

바드 이슐의 레하르 빌라

 

[마이에르베르와 오펜바흐는 독일인]

모차르트가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난 해에 프러시아의 수도인 베를린에서 태어난 자코모 마이에르베르(1791-1864)는 분명히 독일인이지만 파리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작곡가로 분류되고 있다. 그는 베를린의 부유한 유태인 금융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야곱 리브만 베르(Jacob Liebmann Beer)였다. 그러다가 26세 때에 이탈리아로 유학 가서 지내면서 야곱을 이탈리아식으로 자코모(Giacomo)로 고쳤다. 자코모 마이에르베르는 곧이어 파리로 가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름은 그대로 이탈리아식을 유지하였다. 그는 향년 73세로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특별열차로 베를린으로 이송되어 베를린의 유태인 공동묘지인 쇤하우저 알리에 안장되었다.

 

파리 북부역(Gare du Nord)에서 거행된 마이에르베르 영결식. 마이에르베르의 시신은 기차로 베를린으로 운송되었고 베를린에서 매장되었다. 보라, 얼마나 많은 인파가 영결식에 모였는지를.

 

독일 출신으로 파리에서 활동하다가 파리에서 세상을 떠난 또 한 사람의 유명한 작곡가가 있다.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로 유명한 자크 오펜바흐이다. 그는 1819년에 쾰른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자크 오펜바흐는 프랑스의 작곡가로 분류되고 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야곱 오펜바흐였다. 마이에르베르의 이름도 야콥이었던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야곱 오펜바흐는 프랑스로 가서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자크로 고쳤다. 오펜바흐의 아버지는 유태교회당의 칸토(Cantor: 성가대지휘자, 독창자 겸 음악감독)였다. 당시에 쾰른은 프러시아에 속한 도시였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오펜바흐는 프러시아 출신이다. 쾰른은 오펜바흐를 기념하여서 오퍼 쾰른(Oper Köln: 쾰른시립오페라극장)이 있는 장소를 오펜바흐플라츠(오펜바흐광장)라고 이름 붙였다. 오펜바흐는 14세 때에 파리로 가서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였다. 그후 1880년, 6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파리에서 프랑스인으로서 살았다. 오펜바흐의 묘소는 몽마르트에 있다.

 

 

자크 오펜바흐

 

[나치의 핍박을 피해 국적을 바꾼 음악가들]

나치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고 나아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활약하던 많은 유태인 음악가들이 미국으로 망명하여 미국 시민이 되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아놀드 쇤베르크(1874-1951)일 것이다. 쇤베르크는 비엔나 레오폴드슈타트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다가 나치의 유태인 핍박이 심각해지자 1934년에 미국행을 감행하였다. 쇤베르크의 원래 이름은 Schönberg 라고 쓰지만 미국에 온 후로는 Schoenberg라고 썼다. 영어의 알파벳에는 ö가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발음도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아니라 아놀드 쇤버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쇤버그는 로스안젤레스에서 1951년에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1974년에 비엔나로 옮겨져 중앙공동묘지의 명예묘역에 안장되었다.

 

오페라 ‘화가 마티스’ 등으로 유명한 파울 힌데미트(1895-1963)는 독일의 하나우에서 태어났다. 힌데미트는 유태인은 아니었지만 그의 음악이 퇴폐적이라고 해서 나치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견디지 못한 그는 1938년 스위스로 도피성 이민을 갔고 1940년에는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6년에 미국시민이 되었다. 힌데미트는 1953년 건강이 악화되어 취리히로 돌아왔고 196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암수술을 받은후 세상을 떠났다.

 

오페라 ‘죽은 도시’로 유명한 에리히 코른골트(1897-1957)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브르노에서 태어났다. 브르노는 당시 모라비아에 속해 있었으나 현재는 체코공화국의 도시이다. 비엔나에서 활동하던 그는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나치로부터 퇴폐음악을 만든다는 핍박을 받자 1934년에 할리우드로부터 영화음악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에 미국으로 귀화했다. 그는 ‘우리는 모두 비엔나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히틀러는 우리를 유태인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코른골트는 1957년 할리우드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페라 ‘마하고니 도시의 흥망’과 ‘일곱가지 큰 죄악’ 등으로 유명한 쿠르트 봐일(1900-1950)은 독일 데사우의 유태인 구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태교 회당의 칸토였다. 나치의 핍박을 받은 그는 1933년에 독일을 탈출하여 파리로 갔고 이어 뉴욕에 도착했다. 봐일은 미국에서 독일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독일어로 말도 하지 않았고 글도 쓰지 않았다. 그만큼 독일에 대한 거부감이 컸었다. 봐일은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페라 ‘조니가 연주하다’(Jonny spielt auf)를 발표하여 관심을 끈 에른스트 크레네크(1900-1991)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당시의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체코 출신이었다. ‘조니가 연주하다’는 흑인이 주인공이다. 나치는 흑인을 증오하여 크레네크의 음악을 퇴폐음악으로 규정하였다. 나치는 퇴폐음악을 추방해야 한다는 선전포스터에 크레네크의 ‘조니가 연주하다’의 포스터를 그대로 사용했다. 그러면서 나치는 크레네크를 유태인이라고 몰아 붙였다. 크레네크는 유태인이 아니었고 굳이 밝히자면 체코인이었다. 나치의 핍박을 견디지 못한 크레네크는 1938년 미국행을 감행하였다. 그는 1945년 전쟁이 끝나자마자 미국시민이 되었다. 그리고 1991년 캘리포니아 주의 팜스프링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