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 팟푸리

오페라에 표현된 해방과 독립의 염원

정준극 2016. 1. 2. 19:06

오페라에 표현된 해방과 독립의 염원 - 1

나부코, 이집트의 모세, 윌리엄 텔, 르 시드, 맥베스, 그리고 휘델리오

 

우리나라의 8월은 해방을 생각하는 달이다. 더구나 2015년의 8월은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달이어서 새삼 의미가 깊었다. 일제의 36년 식민지 압박에서 벗어난지도 어느덧 70년이 흐른 셈이다. 그렇지만 해방의 감격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1945년 그대로라고 생각된다. 통일과 독립과 해방은 모든 같은 민족이면서도 분열되어 있는 나라들, 강대국으로부터 억압받고 있는 백성들의 한결같은 염원이다. 클래식 음악에서, 특히 오페라에서 그런 염원이 표현되어 있는 작품들이 있다. 그런가하면 실제로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했던 음악가들도 있다. 조국의 통일과 해방을 그린 클래식 음악으로서는 역시 오페라가 가장 대표적이다. 오페라는 스토리가 있는 음악작품이기 때문에 그런 염원들을 자유스럽게 표현할수 있다. 노예생활로부터의 해방, 속박으로부터의 독립,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주제로 삼은 오페라들이다. 예를 들면 베르디의 ‘나부코’, 로시니의 ‘이집트의 모세’와 ‘윌리엄 텔’, 마스네의 ‘르 시드’ 등이다. 그런 오페라들에 대하여는 나중에 소개해 드리도록 하고, 그보다도 음악가 자신들이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경우를 찾아보도록 하겠다. 그런 음악가 중에서는 아마 폴란드의 얀 파데레브스키를 먼저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폴란드의 수상 겸 외무장관을 지낸 작곡가 얀 파다레브스키

 

얀 파데레브스키(Jan Padarewski: 1860-1941)는 유럽에서 1차 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해서 그동안 강대국들의 속박에서 지내야 했던 나라들이 독립을 외치던 때에 폴란드의 수상 겸 외무장관을 지낸 사람이다. 그러고 보면 파데레브스키는 모든 음악가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 아닌가 싶다. 파데레브스키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이면서 작곡가였다. 조국 폴란드의 독립과 해방을 염원하여서 작곡한 교향곡 ‘폴로니아’는 파데레브스키를 대표하는 위대한 작품이다. 마치 핀란드의 얀 시벨리우스가 ‘핀란디아’라는 교향시를 작곡한 것과 같다. 파데레브스키는 음악가이면서 독립운동가였다. 1919년에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렸을 때에는 폴란드의 대표로서 참석해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의해서 폴란드가 러시아의 속박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의 이런 주장으로 인해서 마침내 폴란드는 독립할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파데레브스키는 훌륭한 애국자였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강대국들은 폴란드의 포즈난이라는 지역을 독일에 속하도록 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 독립하는 폴란드에 속하도록 할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에 파데레브스키는 포즈난을 찾아가서 주민들에게 뜨거운 애국적인 연설을 하여 모두를 감동시켰고 결국 포즈난은 폴란드에 속하게 되었다. 파데레브스키는 그후 폴란드가 1939년에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아 점령당하자 미국으로 망명해서 미국에서 폴란드의 해방을 위해 헌신적인 활동을 하다가 1941년에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미국 정부는 파데레브스키를 ‘자유를 위한 위대한 투사’라면서 크게 기념하였다.

 

바르샤바의 오콜니크 공원에 있는 얀 파다레브스키 기념상. 이 기념상은 원래 1차 대전이 끝난 후에 바르샤바의 주물공장에서 제작되었다. 그후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하고 대포를 만들기 위해 철물을 수집하기 시작하자 주물공장은 파다레브스키의 동상을 급히 지하에 파묻고 감추었다. 그후 종전이 되자 폴란드 역사박물관이 접수하여 보관하고 있었으나 국내 정세가 혼돈하여서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6년에 역사박물관의 창고에 있는 동상을 찾아내어 역사박물관에 전시코자 하였으나 그 일도 여러 사정상 지연되었다. 그러다가 1978년에 모든 사람들이 볼수 있는 공원에 설치키로 결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파데레브스키에 앞서서 1830년대에 조국 폴란드가 제정 러시아의 억압을 받게 되자 조국을 떠나서 살 수밖에 없었던 쇼팽의 경우도 있다. 쇼팽은 폴란드가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될 것 같자 그러한 상황아래에서는 음악활동을 할수 없다고 생각해서 폴란드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쇼팽은 20세의 젊은 나이로 조국 폴란드를 떠날 때에 작은 병에 폴란드의 흙을 담아서 가지고 떠났다. 쇼팽을 그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폴란드의 흙을 몸에 간직하고 다녔다고 한다. 아마 자기의 생전에는 조국의 땅으로 돌아갈수 없다는 것을 미리 짐작이라도 했던 모양이다. 쇼팽이 폴란드를 떠나고 나서 한달 후에 러시아가 군대를 앞세워서 폴란드를 침공해서 점령했다. 그때가 1830년이었다. 폴란드 국민들이 러시아의 침략에 항거해서 봉기한 것이 저 유명한 1830년의 폴란드 봉기사건이다. 거의 1년 동안을 끈 전국적인 봉기로 수많은 폴란드 국민들이 희생되었다. 쇼팽은 프랑스에 있으면서 조국 폴란드가 러시아의 군화에 짓밟히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자 더욱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쇼팽은 피아노 음악으로서 그러한 마음을 표현했다. 쇼팽의 유명한 폴로네이스는 조국 폴란드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는 곡이다. 폴로네이스는 프랑스어로 폴란드라는 뜻이다. 폴로네이스는 폴란드가 오리진인 농부들의 춤곡이다. 4분의 3박자여서 왈츠와 같은 형태의 춤곡이다. 쇼팽은 여러 곡의 폴로네이스를 작곡했지마는 그중에서 ‘영웅’이라는 제목의 폴로네이스가 가장 유명하다. 러시아에 항거하는 조국의 국민들을 모두 영웅으로 보고 작곡한 것이다. 조국을 사랑하는 열정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는 곡이다. 쇼팽은 결국 다시는 폴란드로 돌아가지 못하고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바르샤바의 라치엔키 공원에 있는 쇼팽 기념상. 쇼팽은 생전에 고국 폴란드를 다시 찾아가지 못하고 세상 떠난 후에 그의 모습이 바르샤바에 영구히 보존되었다.

 

로시니의 마지막 오페라인 ‘귀욤 텔’(윌리엄 텔)은 오스트리아의 학정에 시달리는 스위스 주민들이 귀욤 텔의 주도로 독립운동을 벌여 마침내 스위스에서 오스트리아를 몰아낸다는 내용이다. 로시니의 오페라 ‘귀욤 텔’은 독일의 유명한 시인인 프리드리히 쉴러가 쓴 대서사시 ‘빌헬름 텔’을 바탕으로 삼은 작품이다. 쉴러의 원작 제목은 ‘빌헬름 텔’이지만 로시니가 이 오페라를 파리에서 작곡하고 파리에서 처음 공연했기 때문에 제목이 프랑스식으로 ‘귀욤 텔’이 되었다. 몇 년 후에 나폴리에서 이탈리아에서는 처음으로 공연될 때에는 제목을 이탈리아식으로 ‘구글리엘모 텔’이라고 붙였다. 그리고 나중에 영국에서 공연될 때에는 영어식으로 ‘윌리엄 텔’이라고 했는데 우리에게는 ‘윌리엄 텔’이라는 제목이 귀에 익어서 그렇게들 부르고 있다. 오페라 ‘윌리엄 텔’의 시기는 13세기이다. 당시에 스위스의 상당 지역은 오스트리아 제국이 점령해서 통치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가 임명한 총독은 게슬러라는 사람이었다. 게슬러는 자기의 모자를 거리 한 복판의 장대에 올려놓고 누구든지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은 모자에 대해서 인사를 하라고 명령했다. 만일 모자에 대해서 인사를 하지 않으면 자기를 무시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오스트리아 제국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역으로 다스리겠다고 말했다.

 

'귀욤 텔'의 더치 오페라 무대(텔에 니콜라 알라이모)

 

윌리엄 텔은 아들과 함께 지나가다가 일부러 게슬러의 모자에 대해서 인사를 하지 않았다. 게슬러 총독은 당장 윌리엄 텔을 붙잡아서 ‘그대가 활을 잘 쏜다고 하는데 어디 저 멀리 그대의 아들을 세워두고 머리 위에 사과를 얹어 놓고 화살을 쏘아서 맞히면 용서하겠다’고 말했다. 아무리 활을 잘 쏜다고 해도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머리 위에 있는 사과를 맞춘다는 것은 정말이지 할수 없는 일이다. 그러자 멀리 서 있던 윌리엄 텔의 아들인 제미가 ‘아버지, 걱정하지 마시고 어서 쏘세요. 아버지는 할수 있어요’라고 소리쳤다. 그 말에 용기를 얻은 윌리엄 텔은 활을 쏘아서 사과를 맞추었고 이어 독재자 게슬러를 몰아냈으며 결국은 오스트리아로부터 스위스의 해방을 쟁취하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스위스의 해방에는 윌리엄 텔의 헌신도 컸지만 윌리엄 텔의 아들 제미가 아버지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바람에 가능했다고 볼수 있다.

 

'귀욤 텔'의 몬테칼로 무대

 

오페라 ‘윌리엄 텔’은 1829년 파리에서 처음 공연되어 찬사를 받았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당시 북부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통치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당국의 검열에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제국에 대하여 반기를 든 인물을 혁명적인 인물로 영광스럽게 표현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나마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서는 1833년에 여러 부분을 수정해서 겨우 첫 공연을 가졌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그로부터 약 50년 지나도록 공연허가를 받지 못했다. ‘윌리엄 텔’의 1막에서 주인공이 부르는 L'Helvétie pleure sa liberté(스위스는 자유를 빼앗겨서 신음하고 있다)는 스위스가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항거를 하는 도화선이 된 아리아이다. 오페라 ‘윌리엄 텔’은 네 시간이나 걸리는 그랜드 오페라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거의 공연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서곡만은 콘서트의 스탠다드 레퍼토리로서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서곡의 후반부에 나오는 스위스 기병들의 진군을 표현한 부분은 힘차고 경쾌하기 때문에 더욱 사랑을 받고 있다. 이 부분의 음악은 영화나 텔레비전에서도 자주 인용되었는데, 특히 미국에서 1949년부터 1957년까지 인기를 끌었던 텔레비전 연속 드라마인 ‘론 레인저’의 시그날 음악으로 사용되어서 대단한 사랑을 받았다. 한마디만 덧붙인다면, 로시니는 ‘귀욤 텔’을 작곡하고 ‘이제는 작곡도 할 만큼 다 했으니 더 이상 작곡을 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하고 무슨 고집인지 하여튼 정말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38년 동안 한가한 생활을 하며 생애를 보냈다.

 

'귀욤 텔'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 무대

 

로시니의 또 다른 오페라로서 민족의 해방을 그린 ‘이집트의 모세’가 있다. 고대 이집트(애굽)에서 오랜 세월 동안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대한 지도자인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미리 예비해 놓으신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게 된다는 이야기는 모든 예술분야의 좋은 소재가 되어 왔다. 기독교의 성경과 유태교의 토라에 기록된 모세의 사건을 우리는 보통 출애굽 또는 영어로 엑소더스라고 부른다. 모세의 출애굽을 다룬 오페라로서는 여러 작품이 있지만 로시니의 ‘이집트의 모세’가 단연 대표적이다. 이밖에도 현대음악의 기수라고 하는 오스트리아의 아놀드 쇤버그가 ‘모세와 아론’이라는 오페라를 만든 것이 있고 또 우크라이나의 지휘자 겸 작곡가인 미로슬라브 스코리크라는 사람이 2001년에 완성한 ‘모세’라는 오페라도 있다.

 

'이집트의 모세'. 뉴욕시티오페라 무대

 

로시니의 ‘이집트의 모새’는 로시니가 36세 때의 젊은 나이에 완성한 작품이다.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 앞까지 와서 하나님께 간구하여 홍해의 물을 갈라 백성들을 무사히 건너게 하는 장면은 이 오페라의 압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해 오던 바로(파라오)의 군대는 홍해의 물이 합쳐지는 바람에 모두 물속에 잠겨 죽임을 당한다. 로시니의 ‘이집트의 모세’는 강대국의 핍박을 받고 있는 많은 민족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준 오페라였다. 19세기 초반의 세계는 강대국들이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던 때였다. 특히 중남미와 아프리카에서 그러했다. 그러한 때에 로시니의 오페라 ‘이집트의 모세’는 억압받고 있는 많은 나라들의 백성들에게 용기와 신념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이었다. 로시니의 ‘이집트의 모세’에서 모세를 비롯해서 모세의 형인 아론,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이 하나님의 높으신 권능을 찬양하며 부르는 노래는 대단히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곡이다. ‘하늘의 보좌에서’(달 투오 스텔라토 솔리오)라는 곡이다. 이 곡은 파가니니가 바이올린 변주곡으로 만들어서 더 유명해 졌다.

 

'이집트의 모세', 현대적 연출. 페사로 로시니 페스티발 무대

 

조국의 통일과 해방을 위해 모든 힘을 쏟은 음악가로서는 아무래도 베르디를 빼놓을 수가 없다. 주세페 베르디는 조국 이탈리아가 여러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시대에 태어났다. 베르디가 태어난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 지방은 지역의 전략적인 중요성 때문에 어떤 때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고 또 어떤 때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베르디가 태어난 당시에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베르디가 태어난 마을의 명칭도 프랑스식으로 르 론콜레였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따진다면 베르디는 프랑스 국적으로 태어났던 것이다. 르 론콜레는 오늘날 ‘론콜레 베르디’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를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베르디는 그의 오페라를 통해서 억압받고 있는 백성들의 고통을 표현했고 아울러서 조국 통일과 해방의 염원을 표현했다. 그러한 베르디의 음악은 당연히 전체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크나 큰 감동을 주어서 강대국들에 의해 분열된 이탈리아의 통일을 앞당기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베르디는 그의 오페라를 통해서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이탈리아가 강대국의 압박에서 벗어나 하나의 통일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던 것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중에서 아마 ‘나부코’ 만큼 이탈리아 통일 해방 운동에 영향을 끼친 작품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오페라라는 새로운 음악의 장르가 창조되었을 때에는 오페라의 주제가 주로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의 이야기, 또는 위대한 왕이나 영웅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외디푸스, 아킬레스, 오르페오, 알체스테, 안티고네 등등은 바로크 오페라 시대에 가장 흔하게 채택되었던 오페라의 주제였다. 하지만 계몽사상이 전파되고 자유와 평등에 대한 사상이 솟아나기 시작한 19세기 초반부터는 시대적인 여망에 부응해서 억압받고 있는 나라, 핍박받고 있는 백성들이 해방을 염원하는 내용의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해서 많은 감동을 주었고 또한 실제로 많은 나라, 많은 민족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나부코'에서 히브리 포로들

 

‘나부코’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벨론 제국의 느브갓네살 왕의 이탈리아어 표기인 나부코도노소르를 줄여서 부르는 이름이다. 강대한 바벨론 제국의 나부코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솔로몬이 세운 성전을 파괴했으며 수많은 히브리 사람들을 포로로 데려갔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히브리인들은 바벨론의 유프라데스 강가에 앉아서 언제쯤이면 조국인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갈수 있을지, 또 언제나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지을수 있을지를 노래한다. 그것이 ‘날아라 금빛 날개를 타고’(Va, pensiero)라는 제목의 유명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다. 구절구절마다 조국 이스라엘의 해방을 염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노래이다. ‘나부코’ 3막에 나오는 히브리 포로들의 합창은 곧바로 이탈리아의 국민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어찌보면 히브리 포로들의 신세와 강대국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는 이탈리아 백성들의 신세가 같다고 생각해서였던 것 같다. ‘나부코’가 첫 공연을 가진 다음날부터 사람들은 모두 ‘날아라 금빛 날개를 타고’를 함께 불렀다. 이탈리아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는 노래였다. 이 노래가 이탈리아 통일 운동에 활력소가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에피소드이다. ‘날아라 금빛 날개를 타고’는 이탈리아의 국가가 없었던 당시의 비공식적인 국가로서 전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날아라, 나의 생각이여 금빛날개를 타고 날아라

부드럽고 따뜻한 바람이 불고

향기에 찬 우리 조국의 비탈과 언덕으로 날아가 쉬어라

요단의 강둑과 시온의 무너진 탑들을 기억하라

오, 너무나 사랑하는 빼앗긴 조국이여

오, 절망에 찬 소중한 추억이여 예언자의 금빛 하프여

그대는 어찌하여 침묵하고 있는가?

우리 가슴속의 기억에 다시 불을 붙이고

지나간 시절을 이야기해다오

예루살렘의 잔인한 운명처럼 쓰라린 비탄의 시를 노래 부르자

우리에게 참을 힘을 주는 노래로

주께서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리라

 

'나부코' 무대. 베로나

 

베르디의 오페라 중에서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주제로 삼은 작품으로서는 ‘나부코’ 이외에도 ‘제루살렘 해방’(예루살렘 해방), ‘아틸라’, ‘시실리의 저녁기도’, ‘돈 카를로’, ‘조반나 다르코’(잔 다크), 그리고 ‘맥베스’ 등이 있다. 그리고 불후의 걸작인 ‘아이다’도 따지고 보면 포로로 잡혀온 에티오피아 백성들이 자유와 해방을 갈망하는 주제라고 볼수 있다. 오페라의 황제인 베르디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오페라로 만드는 것을 일생일대의 사명으로 생각했다. 베르디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에서 ‘맥베스’ ‘오텔로’ ‘활슈타프’를 오페라로 만들었다. 베르디는 셰익스피어의 5대 비극 중의 하나인 ‘리어 왕’도 오페라로 만들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리어 왕의 그 복잡한 심리상태를 음악으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오텔로’는 베르디가 ‘아이다’를 마지막으로 해서 다시는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가 친구들의 간청으로 16년 만에 할수 없이 다시 작곡을 시작하여 완성한 것이다. ‘활슈타프’는 베르디의 마지막 오페라 작품이다. ‘오텔로’를 작곡하고 나서 ‘이것이 끝이다’라고 했다가 다시 친구들의 간청에 못이겨서 마지막으로 작곡한 것이 ‘활슈타프’이다.

 

'오텔로'. 메트로폴리탄 무대

 

‘맥베스’는 스코틀랜드가 무대입니다. 마녀들이 맥베스 장군에게 앞으로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자 그 말을 곧이 듣고 부인과 함께 음모를 꾸며서 스코틀랜드의 던칸 왕을 살해하고 왕이 됩니다. 억울하게 암살 당한 던칸 왕의 아들인 말콤은 영국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왕이 된 맥베스는 백성들을 탄압합니다. 백성들은 조국 스코틀랜드를 떠나 영국으로 향하면서 ‘억압받고 있는 조국’이라는 합창을 부릅니다. 그리고는 언젠가는 폭군을 물리치고 평화스러운 스코틀랜드를 만들게 되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비장하고 아름다운 합창입니다. 나중에 폭군 맥베스는 결국 암살당한 던칸 왕의 아들 말콤과 충신들의 반격을 받아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합니다. 스코틀랜드 난민들의 합창인 ‘억압받고 있는 조국’을 들으시겠습니다.

 

'맥베스'의 무대. 잘츠부르크 페스티발

 

음악의 성인이라고 하는 베토벤은 평소에 오페라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 또는 교향곡을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런 베토벤에게 어느날 친구들이 ‘여보게 오페라를 만들면 잘만하면 돈을 많이 받을수 있다네’라고 말하며 오페라를 만들 것을 부추켰다. 베토벤은 그때 생활이 좀 어려웠다. 그렇다고 귀족들에게 굽실대면서 후원을 바라기도 싫었다. 베토벤은 오페라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잘하면 오페라로 돈을 벌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한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문제는 마땅한 스토리를 찾는 것이었다. 베토벤의 머리 속에는 항상 자유를 향한 외침이 들어 있었다. 억울하게 압박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마침 그런 내용의 극본이 하나 있었다. 프랑스의 장 니콜라스 부일리라는 사람이 쓴 ‘레오노레’라는 것이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는 남편을 구출하기 위해 부인인 레오노레가 휘델리오라는 가명으로 남장을 하고 감옥의 보조원으로 들어가서 결국은 남편 플로레스탄을 사형집행 직전에 구원한다는 내용이다.

 

'휘델리오'. 비엔나 테아터 안 데어 빈 무대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인 ‘레오노레’는 그렇게 해서 베토벤이 35세 때에 비엔나에서 초연을 가졌다. 당시 비엔나는 프랑스군대가 점령을 하고 있었다. 베토벤이 모처럼 작곡한 오페라가 첫 공연을 가진다고 하니까 프랑스 장교들이 많이 참석했다. 프랑스 장교들은 억압에서 자유를 갈구하는 내용에 대해서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특히 정치범으로 억울하게 갇혀 있는 죄수들이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을 찾듯이 억압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합창을 부르자 프랑스 장교들은 마치 자기들이 비엔나를 군화로 짓밟은 것을 풍자하는 것 같다고 생각해서 애써서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레오노레’의 초연은 그렇게 해서 생각지도 않았는데 실패로 돌아갔다. 베토벤은 오페라 ‘레오노레’를 더 이상 꺼내지 않고 접어 두려고 했으나 친구들이 ‘그러지 말고 좀 수정해서 다시 무대에 올려보는 것이 좋겠다’고 격려했다. 베토벤은 ‘레오노레’를 여러번 수정했다. 결국 초연으로부터 9년 후인 1814년에 타이틀도 ‘휘델리오’라고 바꾸어서 비엔나의 다른 극장에서 무대에 올렸다. 이번에는 대성공이었다.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때에는 이미 프랑스군대도 철수한 후였다. 베토벤의 오페라 ‘휘델리오’는 억압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의 불빛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막에서 휘델리오라는 이름으로 가장한 레오노레는 남편이 어느 감옥에 갇혀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간수장 로코에게 부탁해서 어두운 감방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모두 마당에 나오도록 해서 햇빛을 받고 산책토록 한다. 죄수들이 모두 마당으로 나오면 그 중에서 남편 플로레스탄을 찾을수 있다고 생각해서이다. 죄수들은 모처럼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밝은 햇빛을 바라볼수 있게 되어서 기쁨에 들떠 있다. 이때 죄수들이 부르는 노래가 ‘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O welche Lust)이다. 자유에 대한 기쁨을 웅장하게 표현한 노래이다.

 

'휘델리오'의 피날레. 로스안젤레스 오페라 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