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 팟푸리

벨칸토 오페라의 세계

정준극 2016. 1. 3. 20:28

벨칸토 오페라의 세계

로시니, 도니체티, 벨리니

 

‘벨칸토’(Bel canto)라는 오페라의 장르가 있다. ‘벨칸토’라는 말은 ‘아름답게 노래 부르기’라는 뜻의 이탈리아 오페라 용어이다. 벨(bel)은 아름다운이라는 뜻이며 칸토(canto)는 노래라는 뜻이다. ‘벨칸토’는 성악 창법(발성법)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오페라의 장르이기도하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자주 감상하고 있는 오페라들은 사실상 모두 이 장르에 속하여 있는 오페라들이다. ‘벨칸토 오페라’는 19세기 초에서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에서 꽃을 피웠던 오페라의 한 장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800년으로부터 1850년까지의 기간에 이탈리아에서 발전한 오페라를 말한다. 벨칸토 오페라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작곡가들은 로시니, 벨리니, 도니제티의 3인이다. 물론 이탈리아의 다른 작곡가들도 벨칸토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대표적인 작곡가로서는 사베리오 메르카단테, 조반니 파치니, 미셀 카라타,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던 시대의 자코모 마이에르베르를 들 수 있다. 마이에르베르의 작품 중에서는 ‘당주의 마르게리타’, ‘이집트의 십자군'(Il Crociato in Egitto)이 대표적인 벨칸토 오페라이다. 하지만 벨칸토 오페라라고 하면 아무래도 벨리니, 도니체티, 로시니의 세 사람을 우선 생각하게 된다. 그만큼 이 세 사람은 오페라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테너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 도니체티의 '사랑의 묘약'에서 네모리노. 네모리노의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은 벨칸토 아리아의 전형이다.

 

'벨 칸토'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페라의 역사를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15세기와 16세기에 있어서 오페라라는 것은 왕궁이나 지체 높은 귀족들의 저택에서 여흥으로 공연되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부유한 왕족들이나 귀족들은 자기들만의 오케스트라와 성악가들을 보유하고 오페라를 공연하여 자기들의 부와 지위를 과시하며 즐거워했다. 따라서 당시에는 오페라라는 것이 왕족이나 귀족들의 탄생, 세례, 결혼, 서거, 귀빈접대 등 중요한 경우를 위해 만들어지고 공연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왕궁에서나 개인 저택에서의 오페라 공연은 무대의 규모가 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성악가들은 그다지 큰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사실 관중들도 별로 많지 않았다. 그리고 관중들이라는 사람들은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일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저 옆 사람과 담화를 나누거나 먹고 마시는 일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17세기 초에 베니스에 일반인을 위한 오페라 전용극장이 생기자 성악가들은 극장 안 객석의 구석구석까지 소리를 내 보낼수 있어야 했다. 이와 함께 드라마의 내용에 따른 감정의 표현도 충실하게 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개발된 것이 벨 칸토창법이다.

 

그러나 심각한 오페라, 또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순수오페라인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가 거의 모든 무대를 점령하고 있던 18세기 중반까지는 벨칸토라는 말이 그다지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오페라 세리아의 전성시기에는 다 카포 아리아와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카스트라토의 음성이 무대를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다 카포 아리아라는 것은 아리아를 처음부터 다시 한 번 부르는 스타일을 말한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에 들어와서는 그저 아름답게 노래 부르는 것보다는 자기의 감정을 넣어서 보다 힘 있고 열정적으로 노래 부르는 것이 더 어필하게 되었고 그래서 벨칸토 스타일이 나타났다. 왜냐하면 19세기에는 극장의 규모도 상대적으로 커졌다는 이유도 있지만 오페라가 보다 드라마틱해졌기 때문에 오케스트라 반주보다 더 크고 더 깊이 있게 노래를 불러야 했던 것이다.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로지나와 피가로. 아름다운 벨칸토 아리아들이 계속 나온다.

 

'벨 칸토' 스타일의 특징은 대충 다음과 같다.  ‘벨 칸토’라는 용어는 ‘아름답게 노래부르기’라는 의미이지만 반드시 아름답게 노래 부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벨칸토’ 창법의 몇가지 중요한 특색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노래는 완벽한 레가토(legato)를 이루어야 한다. 중간에 노래가 끊어지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불러야 한다.

- 고음에서는 가벼운 톤으로 불러야한다. 고음에서 무겁게 노래를 불러서는 안된다. 심지어는 활세토를 사용해도 좋다.

- 경쾌하고 유연성 있는 테크닉으로 노래를 불러야 한다. 장식음도 적절히 사용할수 있어야 한다. 아드 리비툼은 아리아에도 해당하는 것이다.

- 비브라토를 삼가하고 또한 호흡이 끊어지는 것을 피해야 한다.

- 듣기에 기분 좋은 음성이어야 한다. 음성이 집중되어야 있어야 한다. 비명을 지르듯 외치거나 고함 소리를 내면 안된다.

- 깨끗한 소리가 나가도록 해야 한다. 허스키소리, 탁한 소리 등은 안된다.

- 분명하고 맑은 딕션이 이루어져야 한다. 가사의 전달이 정확해야 한다.

 

벨리니의 '노르마'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마리아 칼라스

 

‘벨칸토 오페라’라고 하면 넓은 의미에서 벨칸토 창법에 의한 오페라를 말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로시니, 도니체티, 벨리니가 활동하던 시기의 이탈리아 오페라들을 말한다. 이들은 웅장하고 화려한 오페라들을 작곡했다. 이 시기에 프리마 돈나 소프라노와 비르투오소 테너라는 초특급 성악가들이 탄생하였다. 그러다보니 카스트라토 역할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벨칸토'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이다. 그렇게 늦게 정립된 배경에는 독일과 프랑스에서 벨칸토에 대한 거부반응이 있었던 것도 한 몫을 했기 때문이었다. 독일에서는 벨칸토가 독일적인 보다 무겁고 보다 강력한 스타일의 오페라를 발전시키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다. 독일에서는 마치 대중들 앞에서 연설하는 것과 같은 독일식 오페라의 스타일을 강조하고 있었다. 바그너의 혁명적인 음악드라마(악극)는 대표적이다. 바그너는 이탈리아식으로 노래 부르는 것, 즉 벨칸토를 창법을 공공연히 비난했다. 그러면서 이탈리아에서는 G 또는 A의 음을 어떻게 둥글게 내는 것이 좋으냐면서 법석을 떠는데 과연 무엇하는 짓인지 모르겠다고 까지 말했다. 바그너는 새로운 독일적 창법을 주창했다. 정신적으로 충만하여 열정에 넘쳐 있는 노래를 불러서 감정을 최대한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그너의 ‘탄호이저’에서 볼프람이 부르는 ‘저녁별의 노래’(O du, mein holder Abendsttern)을 들어보면 그런 느낌을 받을수 있다. 프랑스 사람들도 이탈리아의 벨칸토 스타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나치게 장식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프랑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카스트라토 음성에 대하여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마치 활짝 핀 꽃처럼 화려하고 장식적이기만 한 가사를 반대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오페라의 가사라는 것은 감정과 의사를 솔직하게 전달해야 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카스트라토, 그리고 그 후의 이탈리아 벨칸토는 그저 소리에만 신경을 쓰느라고 가사는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된다는 식이라는 견해였다.

 

바그너의 '탄호이저'의 무대. 바그너의 노래들은 벨칸토 스타일을 배격하는 것이다.

 

벨칸토 3인방이라고 하는 벨리니, 도니체티, 로시니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세 사람은 거의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거의 같은 시대에 활동하였다. 세 사람 중에서 로시니가 가장 먼저 태어났고 로시니보다 5년 후에 도니체티가 태어났으며 도니체티보다 4년 후에 벨리니가 태어났다. 벨리니는 참으로 안타깝게도 겨우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렇지만 가장 아름다운 여러 오페라들을 남겼다. 도니체티는 51세에 세상을 떠났다. '람메무어의 루치아'와 같은 비극적인 오페라와 '사랑의 묘약'과 같은 코믹한 오페라에서 모두 뛰어났다. 로시니는 상당히 장수하여서 76세에 세상을 떠났다. '세빌리아의 이발사'와 같은 주로 코믹한 내용의 오페라들을 남겼다.

 

- 벨리니: 노르마, 청교도, 몽유병자, 캬퓰레티가와 몬테키가 등

- 도니체티: 람메무어의 루치아, 돈 파스쿠알레, 라 화보리타, 사랑의 묘약, 안나 볼레나, 마리아 스튜아르다 등

- 로시니: 세빌리아의 이발사, 세미라미데, 귀욤 텔(윌렴 텔),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 라 체네렌톨라(신데렐라) 등

 

로시니의 '세미라미데'. 소프라노 조앤 서덜랜드와 메조소프라노 마릴린 혼

 

세계의 오페라극장에서 평균적으로 가장 많이 공연되고 있는 오페라들은 거의 모두 이들 세 사람의 작품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고 있는 ‘사랑의 묘약’은 도니체티의 벨칸토 오페라이다. 로시니, 도니체티, 벨리니에 의한 벨칸토는 이탈리아에서 18세기 중반에 대인기를 끌었지만 19세기 중반에 와서는 인기가 시들해졌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은 보다 심각하고 보다 열렬한 노래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이다. 베르디의 작품이 대표적이었다. 베르디의 노래를 부르려면 보다 감정에 충실해야 하며 열정을 품어야 했다. 그저 소리만 아름답게 내면 곤란했다. 다시 말해서 드라마틱한 효과가 큰 노래를 불러야 했다. 예를 들어 테너의 경우, 그전까지 테너들의 노래는 음역이 그다지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그러다보니 부르기에 편했고 듣기에도 편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에 들어와서 오페라의 내용이 보다 극적으로 기울어지게 되자 테너들도 소리를 부풀려서 드라마틱한 소리를 내야했다. 우선 고음을 시원하게 내면 그것만으로도 박수를 받았다. 그래서 테너들은 약간 무리를 해서라도 하이 C 음, 또는 그보다 높은 하이 D 음을 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테너들은 소리 내기에 편한 두성이나 팔세토(falsetto)를 사용하는 대신에 흉성을 사용하여 직접 소리를 냈다. 소프라노와 바리톤들도 동료 테너들의 패션을 따라 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베르디의 드라마틱한 작품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그래야 했다.

 

도니체티의 '연대의 딸'. 베르가모의 도니체티 극장 무대. 토니오의 아리아는 하이 C를 여러번 내야하는 고난도의 것이다.

 

벨칸토 오페라는 한때 사양길에 접어들었던 때도 있었지만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은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왜 사양길에 접어들어야 했을까? 벨칸토를 싫어하여 비난하는 사람들의 영향이 커서였다. 비유하자면 마치 바그너의 영향이 하도 커서 베르디 추종자들이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지내던 것과 같다. 벨칸토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벨칸토가 유행에 뒤떨어진 구태의연한 것이며 발성에 있어서도 알맹이가 결여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상당수 사람들은 벨칸토가 그저 추억 속의 우아하고 세련되며 감미로운 톤으로 발성하는 테크닉을 말하거나 또는 그 발성법을 사용하여 노래를 부르는 오페라라고 보았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들어와서 벨칸토가 부활하는 현상이 생겼다. 역시 노래는 아름다워서 마음에 와 닿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벨칸토 오페라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성악가들은 물론이고 세계의 성악가들이 벨칸토의 부활을 위해서 대단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벨칸토라고 하면 성악가들이 자기들의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는 노래 스타일을 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