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을 못보는 작곡가들이 있었다 1
연주자 중에도 앞을 못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작곡가 중에 앞을 못보는 사람들이 있다. 작곡가로서 인정을 받아 활동하기 이전부터 앞을 못보게 된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작곡가로서 활동하는 중에 시력을 잃어서 앞을 못보게 된 사람들도 있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지 작곡가로서 앞을 볼수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 아닐수 없다. 앞을 못보는데 어떻게 악보를 그릴수 있으며 피아노를 연주 할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비록 앞을 볼수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승리로서 훌륭한 작품들을 남기고 놀라운 연주를 한 것을 보면 두 눈이 성한 우리들로서 배울 점이 많다고 아니할수 없다. 음악의 역사에 기록된 작곡가 중에서 앞을 못보는 작곡가들로서는 누가누가 있는지 찾아본다. 우리 귀에 생소한 작곡가들도 있을 테지만 실은 우리만 몰랐지 그분들은 나름대로 당대에 뛰어난 인정을 받았던 작곡가 또는 연주가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름의 알파벳 순서로 소개한다.
○ 오귀스탱 바리에(Augustin Barié: 1883-1915). 프랑스의 작곡가 겸 오르가니스트이다. 바리에는 파리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손이 무척 컸다. 그래서 오르간의 건반을 두손가락으로 11개나 동시에 누를수가 있었다. 바리에는 가장 연주하기 어렵다는 오르간 작품들을 어려움 없이 연주했다. 예를 들면 세자르 프랑크의 오르간 협주곡이다. 웬만한 사람이면 손가락이 닿지 않아서 치지 못할 터인데 바리에는 문제 없이 연주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바리에는 소년시절에 왕립맹아학교(Institut National des Jeunes Aveugles)에 다녔다. 바리에는 이미 소년시절부터 음악에 대하여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맹아학교를 나온 바리에는 이어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였다. 바리에는 1906년에 파리음악원이 주는 최우수상(Premier prix)을 받을 정도로 오르간 연주와 작곡에서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다. 바리에는 파리의 생제르맹 데프레(St Germain-des-Prés)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아니, 장님이 어떻게 이런 중요한 직책을 맡을수 있느냐?'고 의아해 했지만 바리에는 어느누구보다도 뛰어난 오르간 실력을 보여주었다. 또는 그는 왕립맹아학교의 오르간교수로서 봉직하였다. 바리에는 가장 훌륭한 즉흥곡 연주자 겸 작곡가였다. 바리에는 장님이면서도 가장 훌륭한 프랑스의 낭만주의 비루트오소 오르가니스트였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오르간을 위한 곡이었다. 예를 들면 교향곡 제5번과 '3중주곡'(Trois Pieces)이다. 바리에는 한창 나이인 31세 때에 뇌출혈로 급서했다. 결혼한지 얼마 안되어서였다.
1905년 파리음악원 오르간과 교수와 학생들. 윗줄 가운데 먼산 바라보고 있는 학생이 오귀스탱 바리에
○ 샤를르 오귀스트 드 베리오(Charles Auguste de Bériot: 1802-1870). 벨기에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이다. 베리오는 벨기의 중부 플람스브라만트주의 주도인 뢰번(루뱅)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뢰번에는 베리오의 이름을 따온 거리가 있어서 그를 기리고 있다. 베리오는 여덟살 때인 1810년에 파리로 가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베리오는 비오티와 파가니니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두 사람 모두 비루투오소 연주가들이다. 베리오는 샤를르 10세 국왕의 실내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고 나중에는 네덜란드의 윌리엄 1세를 위해서 봉사했다. 그러면서 그는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리사이틀을 가져 이름을 떨쳤다. 베리오는 뛰어난 테크닉의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동시에 뛰어난 테크닉의 피아니스트였다. 음악의 연혁에서 그런 경우는 대단히 드믄 경우였다. 베리오는 내친 김에 청나라의 베이징까지 가서 바이올린 연주회를 가졌다. 그런데 당시 청나라의 황제는 베리오의 바이올린 연주회를 반대했다고 한다. 베리오는 유명한 소프라노인 마리아 말리브란(Maria Malibran: 1808-1836)과 동거하였다. 스페인 출신의 마리아 말리브란은 그때 이미 결혼한 상태였지만 이혼이 성립되지 않아서 베리오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동거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아들 샤를르 윌프리드 드 베리오를 두었다. 샤를르 윌프리드는 나중에 유명한 피아노 교수가 되었다. 그의 제자로서는 모리스 라벨, 리카르도 빈녜스, 엔리크 그라나도스 등이 있다. 베리오와 말리브란은 1836년에 마침내 말리브란의 이혼이 성립되어 결혼식을 정식으로 올렸다. 멘델스존은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여서 바이올린 솔로가 반주하는 가곡을 작곡해서 헌정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것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말리브란은 베리오와 결혼식을 올린 그 해에 영국 방문 중에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했고 결국 그것 때문에 남편 베리오와 세살 짜리 아들 샤를르 윌프리드를 뒤로한채 세상을 떠났다.
샤를르 오귀스트 드 베리오
말리브란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하여는 조금 더 설명을 하고 싶다. 런던에서 말리브란의 인기는 대단했다. 말리브란은 소프라노이지만 콘트랄토의 음역도 커버할수 있는 놀라운 재능의 성악가였고 게다가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였다. 말리브란은 1834년에 공연을 위해 런던에 갔었다. 말리브란은 공연 일정이 바뻐서 1836년초까지 런던에 있다가 잠시 밀라노에 가서 오페라에 출연하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 1836년 5월에 마이클 윌리엄 발프의 오페라 '아르투아의 처녀'(The Maid of Artois)에서 타이틀 롤을 맡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오페라는 발프가 특별히 말리브란을 위해서 작곡한 것이었다. '아루투아의 처녀'를 성공적으로 마친지 두달 후인 7월에 음악제에 참석하기 위해 만체스터에 간 말리브란은 연주회에서 환호하는 관중들에게 답하기 위해 앙코르를 부르려고 하는 중에 갑자기 정신을 잃고 무대에 쓰러졌다. 얼마전에 말을 타고 가다가 말이 날뛰는 바람에 떨어져서 부상을 입은 것이 있는데 아마 그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얼마후 정신을 차린 말리브란은 오늘은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못하겠으니 다음날 예정되어 있는 다른 연주회에서 노래를 부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말리브란은 관중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다음날 아침에 28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만체스터 교회에서 말리브란의 영결예배가 거행되었다. 그후 말리브란의 시신은 벨기에의 브뤼셀 부근에 있는 라에켄(Laeken) 공동묘지의 영묘로 옮겨졌다.
당대의 성악가인 마리아 말리브란. 베리오와 결혼하였다.
베리오는 파리음악원의 강사자리를 제안받았지만 '교수를 주어도 갈까 말까인데...'라면서 거절했다. 베리오는 41세 때에 조국 브뤼셀음악원의 바이올린 강사가 되었고 이어 프랑스-벨기에 바이올린 연주자 협회를 설립했다. 베리오는 50세가 되던 1852년부터 갑자기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6년후인 1858년부터는 완전히 시력을 상실했다. 작곡가들 중에는 아주 어려서부터 앞을 볼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베리오는 다행이라고 할까 아무튼 56세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였다. 몇년 후에는 왼쪽 팔이 마비되어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는 커녕 잡지도 못하게 되었다. 결국 베리오는 수술을 받아 왼쪽 팔을 절단해야 했다. 앙리 뷰땅, 하인리히 빌헬름 에른스트, 위베르 레오나르 등은 베리오의 제자였다. 베리오는 생전에 상당히 많은 작품을 작곡했다. 주로 바이올린곡이었다. 오늘날 베리오의 작품들은 거의 잊혀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교육용으로 작곡한 바이올린곡들은 오늘날에도 바이올린 학생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들이 되었다.
브뤼셀음악원에 있는 베리오 기념상
○ 니콜라스 보스레(Nicolas Bosret: 1799-1876). 벨기에의 작곡가 겸 오르가니스트이다. 벨기에의 중부 나뮈르주의 주도인 나뮈르(Namur)에서 태어났고 그곳의 생루(St Loup)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생애를 보냈다. 보스레는 일곱살 때에 사고로 시력을 잃었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음악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보스레는 정규학교에는 다니기가 어려워서 생루대성당의 오르가니스로부터 오르간 연주법과 작곡법에 대한 개인 레슨을 받았다. 베리오는 비록 앞을 보지 못하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오르간을 연주했고 여러 작품들을 남겼다. 보스레는 1851년에 Li Bia Bouquet라는 곡을 작곡했다. 베리오가 태어난 나뮈르는 벨기에의 왈룽 지역에 속하는데 그는 이 노래를 왈룽어로 작곡했다. 이 노래는 대단한 인기를 끌어서 1857년 나뮈르시 당국은 이 노래를 나뮈르시의 찬가로 지정했다.
벨기에의 나뮈르에 있는 보르세 흉상
○ 루돌프 브라운(Rudolf Braun: 1869-1925).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이다. 비엔나에서 태어난 브라운은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장님이었다. 그의 가정형편에 대하여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어릴 때에 맹아학교에 다녔고 피아노를 배워서 앞을 못보는 상태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여 사례금을 받아 겨우 생활했다고 하니 어려운 형편임을 짐작할수 있다. 그러나 그의 피아노 재능은 실로 뛰어나서 12살 때에 비엔나남성합창단(Wiener Männergesangverein) 연주회에 출연하여 피아노 연주를 해서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이후 그는 작곡에도 전념하여 27세 때인 1896년에는 자기의 작품만으로 연주회를 가지기도 했다. 1906년에는 구스타브 말러가 비엔나 궁정오페라(현 슈타츠오퍼)에서 브라운의 인형극음악의 초연을 지휘하여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브라운은 음악대학에도 다니지 못했고 음악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교수의 칭호를 부여했다. 1923년에 쇤베르크는 몇명의 신인 작곡가들을 위해 후원금을 주선하였는데 브라운도 쇤베르크의 도움을 받았다. 쇤베르크의 주선에 의해서 재정지원을 받은 다른 작곡가들로서는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 요제프 마티아스 하우어 등이 있다. 파울 비트겐슈타인(Paul Wittgenstein)은 왼손만 있는 피아니스트였다. 브라운은 그를 위해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A 단조'등 일곱 곡의 작품을 작곡했다. 이 작품은 사정상 브라운이 세상을 떠난 2년 후에 비트겐슈타인의 연주로 초연되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카덴차가 종전의 관례와는 달리 마지막 악장에 위치하는 것이었다. 이같은 새로운 기법은 그후 슈만, 그리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차이코브스키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브라운은 1925년 비엔나에서 향년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비엔나 남성합창단 연주. 1930년대. 브라운은 이미 1920년대 중반에 비엔나남성합창단의 연주회에 출연하여 피아노 연주를 했다.
○ 파블로 브루나(Pablo Bruna: 1611-1679). 스페인의 작곡가 겸 오르가니스트이다. 브루나는 어릴 때에 천연두에 걸린 것이 잘못되어 실명하였다. 브루나는 세라고사 지방의 중세고도인 다로카()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브루나를 '다로카의 눈먼 분'(El ciege de Daroca)이라고 부르며 존경하였다. 브루나가 어떤 경로로 음악교육을 받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1631년 다로카의 산타 마리아 대학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보면 비록 앞을 보지 못하는 입장이지만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음을 알수 있다. 브루나가 20세의 청년이었을 때였다. 그후 브루나는 산타 마리아 성당의 음악감독으로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봉사했다. 현재 브루나가 남긴 작품 중에서 오르간 작품 32편만이 남아 있다. 그의 오르간 작품들은 거의 모두 티엔토(tiento) 형식으로 되어 있다. 4단의 키보드를 가진 오르간 연주작품이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4단의 키보드 오르간이 전형적이었다. 티엔토는 15세기에 스페인에서 비롯한 음악 장르로서 훗날 다른 나라에서 유행한 환상곡(판타지)와 흡사한 스타일이다.
다로카의 산타 마리아 성당. 파블로 브루나가 오르가니스트, 음악감독으로 봉사했던 곳이다.
○ 안토니오 데 카베손(Antonio de Cabezón: 1510-1566). 스페인의 르네상스 작곡가 겸 오르가니스트이다. 어릴 때부터 앞을 못보게 되었지만 뛰어난 음악적 재능으로 왕족들을 위해 봉사할 정도로 명성을 얻었다. 카베손은 당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만 보면 처음으로 가장 괄목할만한 키보드 작곡가였다. 카베손은 스페인 북부 부르고스 인근의 카스트리요 모타 데 후디오스(Castrillo Mota de Judios)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카베손은 어릴때부터 음악적 재능이 많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앞을 못보게 되자 절망중에 있었으나 다행히 팔렌시아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부터 개인 레슨을 받을수 있었다. 당시에 스페인은 황금기에 진입하고 있었다. 1516년 샤를르 5세에 의해 카스티유와 아라곤은 하나의 왕 아래에 연합하였다. 샤를르 5세는 할아버지 막시밀리안에 세상을 떠나자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영토들을 상속받았고 그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가 되었다. 이러한 때에 카베손이 활동하였던 것이다. 카베손의 개인생활이나 경력에 대하여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아빌라 출신의 루이사 뉴네스 데 모코스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다고 되어 있다. 그의 아들 중에서 에르난도 데 카베손(Hernando de Cabezón: 1541-1602)은 작곡가가 되어 활동했다. 카베존은 1566년에 마드리드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토니오 데 카베손. 초상화에서는 장님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어렸을때 앞을 못보게 되었다.
○ 칼 콘 하스테(Carl Cohn Haste: 1874-1939). 덴마크의 피아니스트,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이다. 다섯살 때에 눈에 염증이 생겼으나 적당한 치료를 받지 못해서 그런지 얼마후 부터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스테는 왕립덴마크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본격적으로 배웠으며 1896년, 그가 22세 때에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 데뷔하였고 이어 그가 다녔던 왕립맹아학교의 음악선생으로 활동하였으며 덴마크맹인연맹의 초대 회장을 지냈다. 20세기에 덴마크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곳에서 활동했던 맹인 오르가니스트들은 대체로 하스테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었다. 하스테는 그같은 공적으로 1928년에 왕실로부터 가시의 작위를 받았다.
칼 콘 하스테가 다녔던 덴마크왕립음악원
○ 야콥 반 에이크(Jacob van Eyck: 1590년경-1657). 네덜란드의 귀족으로서 뛰어난 음악가였다. 풀네임은 요키르 야콥 반 다이크(Jonkheer Jacob van d'Eyck)이다. 반 에이크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가였다. 특히 카리용(Carillon)의 연주로서는 당대에서 최고였다. 세상에는 별별 악기가 다 있지만 카리용이라는 것은 주물로 만든 종들을 엮어서 소리를 내게 하는 악기이다. 보통 교회 종탑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연주용으로서 이동식 카리용도 있다. 반 에이크는 그런 카리용 연주의 대가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카리용 악기에 사용되는 종들의 주물 전문가 겸 튜닝 전문가였다. 눈이 안보이는 사람들은 대개 청각이 예민하기 때문에 튜닝에 있어서는 남들보다 뛰어났다. 그는 또한 오르가니스트이며 레코더(Recorder)라는 악기의 대가(Virtuoso)였고 작곡도 하였다. 한마디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반 에이크는 헤우스덴(Heusden)이라는 작은 마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반 에이크는 태어날 때부터 앞이 보이지 않는 장님이었다.
욘키르 야콥 반 에이크. 카리용 악기의 대가였다.
어려서부터 카리용의 연주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35세 때에 집을 떠나 우트레헤트(Utrecht) 대성당 종탑에 설치되어 있는 카리용의 연주자가 되었다. 우트레헤트에서 카리용 연주자로서 반 에이크의 명성은 대단히 높아서 멀리서부터 그의 연주를 보려고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 에이크를 찬양하는 사람들 중에는 유명한 철학자인 르네 데카르트도 있었다. 데카르트는 반 에이크의 음향에 대한 지식과 종의 주조와 튜닝에 대한 전문성을 높이 치하하였다. 데카르트는 결국 반 에이크의 제자가 되어 카리용 연주를 공부했다. 데카르트는 우트레헤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반 에이크의 작품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플루트의 기쁨의 정원'(Der Fluyten Lust-hof: The Flute's Garden of Delights)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유럽 역사상 솔로 목관악기 작품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반 에이크는 앞을 볼수 없기 때문에 이 작품을 작곡하면서 말로서 얘기하면 다른 사람이 오선지에 그렸다.
카리용. 보통 23개의 종으로 구성된다. 손으로 키보드를 누르거나 발로 페달을 누르면 줄이 연결되어 있어서 종을 치게 만든다.
○ 미구엘 데 푸엔야나(Miguel de Fuenllana: 1500년경-1579). 스페인의 르네상스 시대 작곡가 겸 비후엘리스트(vihuelist)이다. 비후엘은 15세기에 기타와 비슷한 악기를 말한다.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프리드리히 쉴러의 희곡 '스페인의 왕자 돈 카를로'를 바탕으로 만든 오페라이다. 스페인의 왕 필립 2세와 왕세자 돈 카를로, 그리고 돈 카를로와 결혼키로 약속되었으나 정책상 부왕인 필립 2세와 결혼한 프랑스의 이사벨(엘리사베스) 드 발루아 공주의 이야기를 담은 오페라이다. 그 스토리는 실제로 있었던 내용이다. 그 당시에 미구엘 데 푸엔야나가 활동했다. 푸엔야나는 마드리드에서 태어났지만 가문의 뿌리가 시우다드 레알() 지방의 푸엔야나에 있기 때문에 이름에 푸엔야나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푸엔야나는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다. 푸엔야나가 공부를 어떻게 해서 작곡가 및 연주자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고 다만 한마디만 강조한다면 그는 1554년에 필립 2세의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비훌라를 위한 작품을 작곡해서 헌정했다는 것이다. 이사벨 드 발루아 공주가 필립 2세와 결혼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마드리드로 올 때에 일단의 프랑스 음악가들을 데리고 왔다. 이들은 스페인 궁전에 머물면서 음악활동을 하고 싶어 했다. 푸엔야나는 이들의 음악활동을 지도하고 후원하였다.
미구엘 데 후엔야나. 필립 2세와 이사벨 왕비의 총애를 받았다.
○ 알프레드 홀린스(Alfred Hollins: 1865-1942). 영국의 오르가니스트, 작곡가 겸 음악교사이다. 스코틀랜드에서 리사이탈리스트로 유명했다. 홀린스는 영국 요크셔어의 헐(Hull)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태어날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였다. 홀린스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숙모집에 가서 지내야 했다. 메리 숙모는 홀린스에게 피아노 레슨을 시켜주었다. 홀린스는 천성적으로 퍼펙트 피치에 대한 감각이 있어서 피아노의 건반 두개를 동시에 눌러도 어떤 음인지 정확히 맞추었다고 한다. 홀린스는 1878년에 어퍼 노우드(Upper Norwood)에 있는 왕립맹아일반대학(Royal Normal College for the Blind)에 입학하였다. 이 대학의 학장은 홀린스의 음악적 재능을 매우 우수하게 보았다. 홀린스는 대학의 주선으로 크리스탈 궁전(Crystal Palace)의 연주회에 출연하여 베토벤의 '황제 협주곡'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이어 윈저성에서도 빅토리아 여왕이 임재한 가운데 피아노를 연주하여 찬사를 받았다. 홀린스는 뉴질랜드와 호주에서 순회연주를 했다. 이어 남아프리카에도 가서 요한네스부르크와 케이프 타운에서 피아노 연주회를 가졌다. 1925년에는 미국에 가서 1년 동안 65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연주회를 가졌다. 홀린스는 은퇴후에 A Blind Musican Looks Back(맹인 음악가의 회고록)라는 책을 썼다. 홀린스는 이어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 가서 연주회를 가지며 지냈다. 홀린스는 1942년에 향년 76세로서 에딘버러에서 세상을 떠났다.
알프레드 홀린스. 태어나서부터 앞을 볼수 없었지만 퍼펙트 피치에 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 야로슬라프 예체크(Jarosalv Ježek: 1906-1942). 체코공화국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이다. 작품으로서는 클래식과 재즈, 연극의 막간음악, 영화음악등을 남겼다. 예체크는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양복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예체크는 태어나서는 그렇지 않았는데 몇 년 후부터 이상하게 앞을 구별하지 못하더니 열살 때부터인가는 아예 앞을 보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체크는 음악적인 재능을 버리지 못해서 프라하음악원에 들어가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예체크는 1934년부터 체코의 초현실주 그룹에 참여하였다. 비록 앞을 보지는 못하지만 그의 작곡 기법은 초현실주의를 따르는 것이었다. 몇년후 나치가 체코를 점령하자 예체크는 동료 작곡가 몇 명과 함께 간신히 프라하를 빠져 나와서 뉴욕에 도착할수 있었다. 예체크는 전쟁이 나기 전에 체코의 아방 갸르드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음악세계를 개척해 나갔다. 예체크는 미국에서 1942년 전쟁 중에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36세라는 젊은 나이였다. 예체크는 세상을 떠나기 1년전인 1941년에 체코에서 이민온 프란세스 베사코바(Frances Becaková)와 결혼하였다. 예체크는 실내악곡, 피아노곡, 오케스트라곡 등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스트라빈스키, 쇤버그, 그리고 프랑스의 레직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야로슬라브 야체크
○ 요제프 라보르(Josef Labor: 1842-1924).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작곡가, 오르가니스트이다. 후기 낭만주의에 속한 작곡가이다. 라보르는 보헤미아의 호로비세(Horovice)라는 곳에서 철공장 직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비엔나에서 교육을 받고 활동을 했기 때문에, 그리고 당시는 보헤미아가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음악가로 분류하고 있다. 라보르가 눈이 멀게된 것은 세살 때였다. 천연두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오늘날 같으면 천연두 정도는 쉽게 치료할수 있기 때문에 실명을 한다든지 하는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당시에는 의료기술이 발달하지 못하고 위생이 좋지 않아서 의외로 불행한 운명을 받아들이며 살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식구들과 함께 비엔나에 온 라보르는 비엔나맹아학교에 다녔고 이어 오늘날의 비엔나국립음대의 전신이라고 할수 있는 비엔나악우회음악원(Konservatorium der Gesellsachft der Musikfreunde)에 들어가서 눈이 보이지 않는 처지에 브루크너의 교수인 시몬 제흐터(Simon Sechter)에게서 작곡을, 에두아르드 피커르트(Eduard Pickhert)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비엔나에서 라보르는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가족들과 한 식구처럼 지냈다. 당시 비트겐슈타인의 저택에서는 저녁에 이브닝 음악회가 열리는 일이 많았다. 라보르는 이 음악회에서 요한네스 브람스, 클라라 슈만, 구스타브 말러, 브루노 발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같은 쟁쟁한 음악가들과 어울리며 지냈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이 1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한 손을 잃고 돌아오자 라보르는 다른 어느 사람보다도 먼저 그를 위해서 왼손을 위한 피아노곡을 작곡하겠다고 제안했다. 훗날 비트겐슈타인은 왼손만을 위한 피아노 곡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모리스 라벨, 벤자민 브리튼,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프란츠 슈미트에게 부탁했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형으로서 철학자 겸 작가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라보르에 대하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섯 명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라면서 찬사를 보냈다. 여섯 명은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그리고 라보르를 말한다.
요제프 라보르. 보헤미아 출신으로 비엔나에서 활동했다.
○ 프란체스코 델리 오르가니(Francesco degli Organi: 1325년경 또는 1335년-1397).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 오르가니스트, 성악가, 시인, 그리고 악기 제작자이다. 프란체스코 델리 오르가니는 여러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프란체스코 일 치에코(Francesco il Cieco), 프란체스코 다 피렌체(Francesco da Firenze), 훗날에는 프란체스코 란디니(Francesco Landini)라고 불렸다. 여기에서는 란디니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이름이야 어떻든 그는 14세기에 그의 고향인 피렌체에서뿐만 아니라 전 이탈리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유명한 작곡가였다. 란디니는 피렌체(플로렌스)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프란체스코 다 피렌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유명한 화가였다. 란디니는 어릴 때에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천연두의 여파 때문이었다. 란디니는 어릴 때부터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나서 비록 앞을 보지는 못하지만 음악공부에 진력하였다. 결과, 그는 여러 악기를 전문가 이상으로 연주할수 있었다. 악기 중에서도 특히 루트 연주는 뛰어났다. 란디니는 다재다능한 중에 악기 제조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가 개발하고 제작한 악기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시레나 시레나룸(syrena syrenarum)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루트와 설터리(psaltery)라고 하는 현악기를 합한 것이다. 란디니는 1361년, 좀 늦었지만 그가 36세 때에 피렌체의 산타 트리니타(성삼위일체) 수도원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고 얼마 후에는 피렌체에서도 유명한 산 로렌조 성당의 오르가니스가 되었다. 란디니는 오르간 곡과 실내악 등을 작곡했다. 그는 자기의 작품으로 청중에게 다가가는 힘이 매우 강력해서 어떤 평론가는 '란디니의 멜로디를 듣고 있으면 마치 가슴이 터지는 듯한 감격을 느끼지 않을수 없다'라고 말했다. 란디니는 70세 초반에 피렌체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소는 산 로렌조 성당에 있다. 란디니는 이탈리아 트레센토(trecento) 스타일의 가장 앞선 개척자였다. 트레센토란 이탈리아에서 문화예술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와 그 시기를 대표하는 예술사조를 말한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탈리아 아르스 노바'(Italian ars nova)이다. 란디니가 활동했던 시기는 교회가 모든 것을 주관하던 때였으나 그는 주로 세속적인 음악을 남겼다.
프란체스코 란디니. 그가 개발한 새로운 악기인 시네라 시레나룸을 연주하고 있는 그림.
○ 장 랑글레(Jean Langlais: 1907-1991). 프랑스 작곡가 겸 오르가니스트이다. 주로 네오클래시컬 음악을 작곡했다. 그는 주로 미사곡, 오르간 음악 등을 작곡했는데 어떤 것은 그레고리아 테마를 담고 있는 것이다. 랑글레는 브리타니 지방의 라 통트넬르(La Fontenelle)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몽셀 미셸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랑글레는 어린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할수 있지만 2살 때에 녹내장에 걸렸고 이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랑글레는 파리에 있는 국립맹아학교에 다녔는데 그때에 오르간을 공부했다. 이어 파리음악원에 들어간 그는 오르간으로 여러 상을 받았으며 폴 뒤카, 마르셀 뒤프레 등으로부터 작곡을 배웠다. 랑글레는 파리음악원을 졸업한후 모교인 국립맹아학교로 돌아가서 음악교사로서 활동하였다. 그후 전쟁 직후인 1945년에는 파리에 있는 상트 클로틸드 성당(Basilica de Sainte Clotilde)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어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까지 활동했다. 상트 클로틸드 성당에서는 세자르 프랑크와 투르느미르도 오르가니스트로 봉사했다. 이 두 사람과 랑글레를 포함하여 오르간의 세 성인(organiste titulaire)이라고 부른다. 랑글레는 콘서트 오르가니스트로서도 이름을 떨쳤다. 그래서 유럽의 여러 도시를 방문하여 연주회를 가졌고 나중에는 미국까지 가서 순회연주를 했다. 랑글레는 마리 루이스 자크와 재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랑글레는 1991년 향년 84세로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대표작은 네파트 미사곡인 Messe dolennelle, 또 다른 미사곡인 Missa Salve Regina 등이다.
오르간을 연주하는 장 앙글레. 앞을 못보는 마당에 어려운 오르간곡을 연주하다니 천재임에 틀림없다.
○ 프리미티보 라사로 마리티네스(Primitivo Lázaro Martínez: 1909-1997). 스페인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이다. 라사로는 부르고스의 푸엔테몰리노스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세살 때에 무슨 영문인지 앞을 못보게 되었다. 라사로는 비록 앞을 볼수 없지만 음악적인 재능은 살리고자 했다. 그래서 마드리드왕립음악원에 들어가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했다. 라사로는 피아니스트로서 스페인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면서 연주회를 가져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라사로는 작곡뿐만 아니라 편곡에 있어서도 놀라운 솜씨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재능있는 지휘자이기도 했다. 그는 1936년부터 살라만카에 거주하면서 개인 오케스트라를 설립했다. 라사로는 1939년부터 후엘바에서 지내다가 1997년에 세상을 떠났다.
프리미티보 라사로 마리티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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