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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곡가들의 별난 죽음 추가

정준극 2016. 10. 12. 18:39

위대한 작곡가들의 별난 죽음 추가


위대한 작곡가들이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으로, 우아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별난 죽음을 맞이했다면 본인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독자들로서는 흥미는 있다. 이제 몇몇 위대한 작곡가들의 쇼킹한 죽음을 소개한다. 자살도 포함된다. 하기야 자살은 자연사가 아니므로 별난 죽음이기는 하다. 정신병원에서 지내다가 생을 마감한 경우도 일반적인 일은 아니므로 포함한다.


○ 챨스 앙리 발렌탱 알캉(Charles Henri Valentin Alkan: 1813-1888)은 당대의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였다.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유태계였다. 알캉은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사람들은 알캉을 신동이라고 불렀다. 알캉은 불과 6세 때에 파리음악원에 들어갔다. 아직 코흘리는 어린애가 무얼 알랴마는 그대로 부모들은 조기교육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어린 알캉을 음악학교에 들여보냈다. 알캉은 학생시절에 여러 상을 받았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사회에서 여러 저명인사들과 친교를 돈독히 하며 지냈다. 그가 친분을 유지한 인물들은 예를 들면 프레데릭 쇼팽, 프란츠 리스트, 조르즈 상드, 빅토르 위고 등이었다. 알캉이 남긴 작품은 거의 모두 피아노 작품이었다. 그는 성격이 특별해서 마치 기인처럼 괴짜였고 또한 신경이 무척 예민하였다. 그는 친구 쇼팽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세상이 싫고 귀찮아서 은둔생활로 들어갔다. 일체의 피아노 연주를 하지 않았으며 사교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집에서 성경을 연구했고 탈무드를 읽었다. 그는 서재에서 높은 선반에 있는 탈무드 사본 하나를 꺼내려다가 무거운 책들이 쏟아지는 바람에 책들에 깔려서 숨을 거두었으니 참으로 별난 죽음이었다. 그런데 최근 발견된 어떤 서한에 따르면 알캉이 서재에서 무거운 책들에 깔려서 죽은 것이 아니라 부엌에서 죽었다고 한다. 알캉은 자기 집 부엌에서 코트 걸이 아래에 쓰러져 있었는데 아마도 갑자기 혼절했고 이어 심장마비가 와서 죽은 것이 아니겠느냐는 추측이다. 그는 향년 74세였다.  


챨스 앙리 발렌탱 알캉

 

○ 장 마리 르클레르(Jean-Marie Leclair: 1697-1764)는 18세기에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비르투오소 바이올리니스였다. 그는 생전에 오페라 1편, 바이올린 소나타 48편, 기타 실내악 등을 작곡했다. 르클레르는 첫번째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재혼하였는데 당시로서는 드믈게도 그가 61세의 노년일 때에 이혼하였다. 얼마후 그는 파리에 아파트를 하나 구입했다. 그런데 거리가 좋지 않은 곳이었다. 사건들이 많이 생기는 곳이었다. 그러던중 1764년 10월 22일 친구가 그의 집을 찾아갔더니 그가 서재에서 칼에 찔려 죽어 있었다. 르클레르가 67세 때였다. 범인은 오리무중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이혼한 부인이 돈을 뜯으러 왔가가 거절당하자 칼로 찔러서 죽인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했지만 물론 근거는 없었다. 또 다른 이론은 조카인 귀욤 프랑수아 비알이라는 사람이 역시 돈을 얻으러 왔다가 거절 당하자 찔러 죽였다는 것이지만 이 경우에도 경찰은 증거가 없어서 그를 체포하거나 제판에 회부한 일이 없다. 그의 죽음은 아직도 미스테리이다.


장 마리 르클레르


○ 베드리치 스메타나(Bedrich Semtana: 1824-1884)는 체코 국민음악의 아버지로서 추앙을 받고 있지만 그의 생애는 영욕이 점철된 것이었다. 작곡가로서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수 없는 불행이다. 음을 듣지 못하니 음악인으로서 그만한 불행은 없다. 우리는 베토벤이 말년에 귀가 들리지 않아서 참으로 아타까운 입장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잇지만 스메타나가 귀가 멀어서 고생했다는 얘기는 잘 모르고 있다. 베토벤의 경우는 몇 년을 두고 귀가 나빠졌지만 스메타나의 경우는 단 몇 주만에 나빠진 경우이다. 스메타나는 오랫동안 귀울음으로 고생을 했다. 이빨은 아파도 참지만 귀울음은 도저히 참을수 없다는 말처럼 정말로 속상한 병이다. 더구나 스메타나의 경우는 귀울음(이명)의 피치가 아주 높아서 그저 하루종일 앵하는 모기소리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스메타나는 건강도 건강이지만 사회적으로 그리고 가정적으로 대단히 힘든 경우를 경험해야 했다. 우선 가정적으로는 첫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4 자녀 중에서 세명이 모두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첫번째 부인도 얼마후에 세상을 떠났다. 스메타나는 재혼하여서 두 자녀를 더 두기는 했다. 사회적으로는  체코음악계에서 어쩐 일인지 스메타나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부류들이 있어서 여러번이나 말도 안되는 음모와 계략 때문에 무척 마음 고생을 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식으로 스메타나가 체코 국민음악의 아버지로서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자 체코음악계를 장악하려는 무리들이 스메타나를 모함하여 괴롭혔던 것이다. 여기에다가 스메타나는 귀도 귀지만 심장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 1882년, 그가 58세 때에는 심장마비가 와서 거의 죽을뻔 한 일도 있었다. 그래서 의사들은 스메타나에게 이날로부터 절대로 작곡을 하면 안되며 그저 마음 편하게 먹고 쉬라고 강력 충고했지만 그는 오페라 작곡을 미루어 둔 것이 있어서 계속 작업을 하였다. 그러다가 1884년 4월 초에는 식구들과 친구들의 주선으로 프라하정신병원에 입원해서 한달쯤 지내다가 5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에 진행성 중풍이었다. 의사들은 그런 증세가 아마도 그가 젊었을 때 얻은 매독이 합병증을 일으켜서 그랬다고 보았다. 점잖은 양반이 그러면 안되는데 매독이라니...


베드리치 스메타나


○ 후고 볼프(Hugo Wolf: 1860-1903)도 스메타나처럼 매독으로 정신질환이 생겨서(정신허탈증) 세상을 떠난 경우이다. 슬로베니아 오리진인 오스트리아의  후고 볼프는 어쩌면 말할수 없이 슬프고도 혼란스러운 생애를 보낸 작곡가이다. 볼프도 음악신동이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성격이 괴퍅하고 반항적이며 또한 변덕이 심했다. 그런가하면 자주 우울증에 걸려서 주변 사람을을 어렵게 만들었다. 아무튼 그러는 바람에 음악학교에서 여러 번이나 퇴학을 당해야했다. 그래도 무슨 인연인지 어떤 돈많은 사람이 후원자가 되는 바람에 생활하는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볼프는 바그너를 무척 존경했다. 그러나 바그너처럼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곡은 작곡하지 않았다. 그저 피아노와 솔로를 위한 가곡들을 작곡했다. 볼프는 시에 대하여 말할수 없는 애착을 가졌다. 그래서 다른 작곡가들이 거들떠보지 않은 시들을 찾아서 음악을 붙이기를 좋아했다. 볼프는 말을 생각나는대로 함부로 하는 성격이어서 적들이 많았다. 그는 그가 생각하기에 우수하지 않은 작품에 대하여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 예를 들면 브람스와 안톤 루빈슈타인의 가곡을 우수하지 않다고 보았다. 볼프는 1897년 초부터 정신질환의 증세를 보였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매독의 영향 같았다. 결국 그때로부터 작곡에서 손을 놓아야 했다. 주변 사람들이 볼프에게 아무래도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겠다고 말하자 볼프는 절망하여서 강에 빠져 죽을 생각을 했다. 볼프는 정신병원에서 1903년 2월 22일에 완전히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입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볼프의 여성 편력에 대하여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지만 한가지는 분명했다. 볼프는 친한 친구이며 후원자인 하인리히 쾨헤르트의 부인인 멜라니와 불륜의 관계를 가졌다. 그런 사실이 밝혀졌지만 하인리히는 볼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좋은 친구로서 남았다. 멜라니는 볼프가 말년에 힘들어 할때 그를 자주 찾아갔었다. 그러다가 볼프가 세상을 떠나자 슬픔에, 그리고 남편을 속였다는 죄책감 때문에 1906년에 자살했다.


후고 볼프

  

○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는 한 때 자살하려 했었다. 리스트만큼 살면서 무한한 에너지를 방출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로서, 작곡가로서, 지휘자로서, 임프레사리오로서 그는 너무나 바쁜 생활을 했다. 고향은 오늘날 오스트리아에 속한 라이딩이란 곳이지만 전생애를 유럽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지냈다. 리스트는 평생을 결혼하지 않았지만 젊은 시절에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 대단한 사이여서 딸 코지마까지 두었다. 그리고 생애의 말년에는 종교에 귀의하여서 사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 리스트인데 자살하려 했던 것은 60이 지나서부터 웬일인지 기운이 부치고 열정이 떨어지며 의욕이 저하되어서 '아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구나'라는 자괴감과 절망감, 그리고 무기력한 기분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것이다. 리스트는 어느날 친구들에게 '슬픔이 나의 영혼을 마치 수의처럼 감싸고 있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하지만 그는 자살을 끝내 감행하지 못했다. 가톨릭에서 자살은 죄악이기 때문이었다. 1881년 7월, 봐이마르의 어떤 호텔에 묵고 있었던 리스트는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서 굴러 넘어졌다. 발과 다리가 부어 올랐다. 친구들은 걱정을 했지만 리스트는 아무렇지도 않다면서 평상시와 다름없이 지냈다. 그러나 얼마후에는 낙상의 후유증 때문인지 몸이 붓기 시작했다. 게다가 천식이 심해졌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또한 왼쪽 눈에 백내장이 생겨서 힘들었고 게다가 심장질환까지 보였다. 결국 리스트는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나기는 했지만 온 몸에 병이 아닌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세상 떠나기 전에는 세상에는 자기 혼자뿐이라는 고독감이 심해졌고 죽음에 대한 선입관이 강했었다. 리스트는 1886년 향년 74세로 7월 30일에 바이로이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식적인 사인은 폐염이었다. 바그너의 부인이며 딸인 코지마와 함께 바이로이트 음악축제 준비를 위해 불철주야 고생했기 때문에 폐염에 걸렸는 생각이다. 또한 의사가 치료를 잘못해서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도 있었다. 리스트는 자기 의사와는 달리 바이로이트 시립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리스트의 오랜 친구인 카미유 생상스는 교향곡 3번 '오르간 교향곡'을 리스트에게 헌정했다. 이 교향곡은 리스트가 세상을 떠나기 몇 주 전에 런던에서 초연되었다.


노년의 프란츠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