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을 못보는 작곡가들이 있었다 2
○ 갸스통 길베르 리테즈(Gaston Gilbert Litaize: 1909-1991). 프랑스의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이다. 오르간연주라고 하면 프랑스를 우선 꼽는데 그 프랑스의 오르간 연주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연주자로서 갸스통 길베르 리테즈를 꼽고 있다. 리테즈는 태어난후 얼마 되지 않아서 앞을 못보게 되었다. 원인을 알수 없는 병에 걸렸는데 그 여파로 눈이 멀게 되었던 것이다. 리테즈는 프랑스 동북부 보스제(Bosges) 지역의 메닐 쉬르 벨비트(Ménil-sur-Belvitte)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눈이 보이지 않게 된 리테즈는 우선 맹아햑교에 다녀야 했다. 그후 1927년에는 파리음악원에 들어가서 마르셀 뒤프레와 앙리 뷔서에게서 오르간과 작곡을 배웠다. 리테즈는 파리음악원에 있는 중에 오르간연주로, 즉흥곡, 푸가, 작곡으로 1등상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칸타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로서 로시니상을 받았고 1938년에는 프리드롬(Prix-de-Rome)의 2등상을 받았다. 앞을 못보는 음악도로서 프리드롬의 경연대회에 출전한 것은 리테즈가 처음이라고 한다. 리테즈는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순회연주를 했고 미국에도 두번이나 가서 연주회를 가졌다. 리테즈는 보스제 지방의 브뤼예레(Bruyerés)에서 1991년에 세상을 떠났다.
갸스통 길베르 리테즈
○ 조지 알렉산더 맥파렌(Sir George Alexander MacFarren: 1813-1887). 영국의 작곡가 겸 음악학자이다. 런던에서 태어난 조지 알렉산더 맥파렌의 아버지는 댄싱 마스터, 극본가 겸 저널리스트였다. 맥파렌은 일곱 살 때에 일링(Ealing)이라는 곳에 있는 닥터 니콜라스 학교에 들어갔다. 맥파렌의 아버지가 이 학교의 무용선생이어서 그 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집떠나서 그런지 맥파렌의 건강은 이상하게도 점점 악화되었고 아울러 시력도 나빠졌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커다란 돋보기 렌즈를 가지고 다니면서 글씨를 읽어야 했다. 맥파렌은 10살 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시력 치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치료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맥파렌의 시력은 더욱 나빠졌다. 그러기를 몇 십년이나 보냈다. 그러다가 1860년, 47세가 되었을 때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곡에 대한 열정은 버릴수가 없었다. 맥파렌은 피아노곡과 실내악등을 남겼다. 맥파렌은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작곡을 위해서 전속 사보가를 한 사람 두었다. 나중에 작곡가로서 활동한 올리베리아 프레스코트(Oliveria Prescotte)였다. 맥파렌는 1844년에 오페라 콘트랄토이며 피아니스트인 나탈리아와 결혼했다. 독일 북부의 뤼베크 출신이었다. 맥파렌은 1883년 국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맥파렌은 1887년 기관지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조지 알렉산더 맥파렌
○ 피에르 알렉산드르 몽시니(Pierre Alexandre Monsigny: 1729-1817). 프랑스의 작곡가 겸 음악교육자였다. 몽시니는 앙드레 그레트리, 프랑수아 앙드레 필리도르와 함께 프랑스 음악에서 오페라 코미크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인물이다. 이들의 발판으로 훗날 부엘듀, 오버, 구노, 비제, 마스네 등이 프랑스 오페라 코미크를 꽃피게 만들었다. 폴 뒤카는 몽시니에 대하여 '프랑스의 모든 작곡가 중에서 몽시니야말로 진정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는 음악으로 진정한 인간적인 감정을 표현한 작곡가였다. 그는 청중과의 대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의 공정한 느낌은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난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몽시니가 앞을 못보게 된 것은 말년이기 때문에 전성기에 음악활동을 하는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몽시니는 생토메르 부근의 포켕베르그(Fauquembergues)에서 태어났다. 학교는 생토메르(Saint-Omer)의 왈룽예수회대학을 다녔다. 몽시니가 음악에 뜻을 둔 것은 소년시절부터였다. 몽시니의 집은 가난했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도 바쁜 생활이었다. 몽시니가 스므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몽시니는 장남으로서 남은 식구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했다. 몽시니는 주머니에 동전 몇 개와 바이올린만을 들고 아는 사람의 추천장 하나를 들고 파리로 갔다. 파리에 가서 바이올린을 연주해서 돈을 벌어 동생들을 보살필 생각이었다. 몽시니는 가톨릭 교회의 어떤 기관에 겨우 취직해서 지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파리 오페라에서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의 '하녀 마님'(La serva padrona)을 볼 기회가 있었다. 몽시니는 오페라야 말로 자기가 가야할 길이라고 결심했다. 얼마후 몽시니는 파리 오페라의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들어갈수 있었다. 몽시니는 남모르게 오페라를 작곡했다. 코믹 오페라인 Les aveux indiscrets 라는 것이었다. 1759년에 생제르맹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상당한 호응을 받았다. 1777년에는 Félix(또는 L'enfant trouvé)를 발표했다. 대성공이었다. 그로부터 몽시니는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784년에는 55세라는 나이에 아멜리라는 여인과 결혼을 했다. 5년을 무난히 살다가 헤어졌다. 그때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당국은 몽시니의 작품이 반혁명적이라고 하며 모두 압수해 가거나 폐기했다. 그로부터 몽시니의 가족의 생활은 빈곤에 허덕여야 했다. 여기에 몽시니는 몇년이나 건망증에 시달려야 했다. 몽시니가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직원들이 몽시니가 연금을 받을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얼마후 몽시니는 파리음악원에 직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1840년에는 정부로부터 기사작위와 함께 레종도뇌르 훈장을 받아다. 1813년에는 그레트리의 뒤를 이어 파리음악원의 원장이 되었다. 몇년 지나서부터는 눈이 나빠지더니 결국은 완전히 실명했다. 몽시니는 1817년 향년 88세로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피에르 알렉산드르 몽시니
○ 마리아 테레지아 파라디스(Maria Theresia Paradis: 1759-1824). 오스트리아의 여류 작곡가이다. 다섯살도 되기 전에 시력을 잃었다. 모차르트가 피아노 협주곡 18번 B 플랫 장조를 마리아 테레지아 파라디스에게 헌정했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 파라디스의 아버지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비서 겸 궁정 자문관을 지낸 사람이다. 아버지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에 대한 충성심과 존경심으로 딸의 이름에 마리아 테레지아를 넣었다. 파라디스는 17세 때에 유명한 안과의사인 메스머 박사로부터 시력회복을 위한 치료를 받았다. 치료는 2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파라디스와 메스머 박사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번졌다. 실제로 두 사람 사이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당사자 이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 그런 소문이 나돌자 메스머 박사는 체면도 있고 해서 더 이상 함께 치료생활을 하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떠났다. 파라디스의 시력은 치료를 받는 중에 좀 진전이 있는듯 싶었으나 치료를 중단하자 결국은 얼마 가지 못해서 완전 실명되었다. 파라디스는 작곡과 피아노 연주에 더욱 전념하였다. 파라디스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피아노 4중주를 위한 시실리엔느 E 플랫 장조이다. 그런데 표절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베버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 작품번호 10번으로부터 멜로디를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아마 파라디스를 시기하던 사무엘 두쉬킨이라는 사람이 그런 소문을 내지 않았을까 라는 추측이다. 파라디스는 1789년부터 1797년 사이에 오페라 다섯편, 칸타타 세편 등을 작곡했다. 그러다가 1797년 오페라 '리날도와 알치나'()가 실패하자 그 후로부터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파라디스는 아버지의 재산으로 1808년에 비엔나에 개인 음악학교를 설립하여 주로 소녀들에게 성악과 피아노를 가르쳤다. 파리디스는 1824년 향년 65세로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 테레지아 파라디스. 어릴 때에 실명했다.
○ 요세프 프로크슈(Josef Proksch: 1794-1864). 체코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이다. 독일계로서 딸인 마리 프로크슈 역시 체코에서 알아주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였다. 프라크슈는 체코의 만체스터라고 불리는 중세의 고도 리베레츠(Liberec)에서 태어났다. 그는 13세가 되던 해에 사고로 시력을 잃었다. 프로크슈는 1830년에 프라하에 음악아카데미(Musikbildungsanstalt)를 설립했다. 그의 피아노 레슨은 여러 명의 학생들이 동시에 피아노를 연주하게 해서 고칠 점은 고치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그후 1백여년 동안 효과적인 피아노 레슨 방법으로 이용되었다. 그의 제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베드리치 스메타나였다.
요제프 프로크슈
○ 호아쿠인 로드리고(Joaquin Rodrigo: 1901-1999). 스페인의 작곡가 겸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 로드리고라고 하면 우선 그가 작곡한 '아란후에스 협주곡'(Concierto de Aranjuez)가 생각난다. 아련한 기타 음향이 가슴을 적시는 곡이다. 그런데 실제로 로드리고는 그런 훌륭한 기타협주곡을 작곡했으면서도 기타를 연주할줄 몰랐다. 그는 피아니스트였다. 로드리고는 앞을 보지 못하는 음악가였다. 세살 때에 장질부사의 영향으로 눈이 멀게 되었다. 세살 때에 그렇게 되었으니까 평생을 소경으로 지낸 것이다. 로드리고는 풀 네임이 호아쿠인 로드리고 비드레(Joaquin Rodrigo Vidre)이다. 로드리고는 또 다른 호칭을 가지고 있다. 아랑후에스의 정원 후작(Marquésa de los Jardines de Aranjuez)이다. 일반인에게 귀족의 작위를 주게 되면 남작이 보통인데 로드리고는 후작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그것도 세습할수 있는 작위였다. 그래서 로드리고가 세상을 떠나자 유일한 딸인 세실리아가 아버지의 작위를 상속받아서 아랑후에스 후작이 되었다. 로드리고는 20세기가 막 시작된 1901년에 스페인의 남부 발렌시아 지방의 사군토(Sagunto)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장질부사에 걸려 그 여파로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로드리고는 어릴 때부터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났다. 여덟살 때부터 피아노, 바이올린을 배웠고 16세 때부터는 화성학을 비롯한 작곡기법을 배웠다. 그의 대표작인 '아랑후에스 협주곡'은 1939년, 2차 대전 중에 파리에서 당대의 기타리스트인 레지노 사인스 데 라 마사(Regino Sainz de la Maza)를 위해서 작곡한 것이다. 그런데 로드리고는 훗날 부인 빅토리아 카미(Victoria Kamhi)가 결혼후 첫 아기를 유산했을 때 위로하기 위해 작곡한 것이라고 밝혔다. 로드리고는 터키 출신의 피아니스트인 빅토리아 카미를 1933년 파리에서 만나 결혼하였다. 결혼식은 발렌시아에서 가졌다. 로드리고는 스페인 작곡가에게 주는 최고 훈장인 Premio Nacional de Musica를 받았고 1991년에는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으로부터 후작의 작위를 받았다. 로드리고는 1999년에 세상을 떠났다. 로드리고는 부인 빅토리아와 함께 아랑후에스 공동묘지에 합장되었다.
피아노 앞에서의 로드리고. '아란후에스 협주곡'으로 유명하다.
○ 샬로트 앙투아네트 수얼링(Charlotte Antoinette Seuerling: 1782/84-1828). 스웨덴의 콘서트 소프라노, 하프시코드 연주자, 작곡가, 시인이다. '앞 못보는 노래처녀'(The Blind Song-Maiden)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듯이 노래를 잘 불렀다. 원래 이름은 샬로타 안토니아 수얼링(Charlotta Antonia Seuerling)이었으나 당시 사회에서는 프랑스풍이 유행이어서 이름도 프랑스 스타일로 바꾸었다. 샬로타 수얼링은 19세기에 스웨덴과 이웃 핀랜드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던 Sang i en melankolisk stund(멜랑콜리한 순간의 노래)를 작곡했다. 물론 다른 작품들도 남겼다. 샬로타 수얼링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유랑극단을 운영하면서 직접 배우로서 출연도 하던 사람들이었다. 샬로타 수얼링은 네살 때에 천연두 백신을 잘못 맞아서 눈이 멀게 되었으며 이른바 마마자국이 있어서 얼굴이 얽었다. 그래서 샬로타 수얼링는 평생을 부끄러워하면서 지냈다. 샬로타 수얼링의 생애에 있어서 페르 아론 보리(Per Aron Borg)라는 사람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비교적 부유한 자선가이며 음악학자였던 페르 아론 보리는 어린 샬로타 수얼링의 음악적 재능을 높이 평가해서 피아노 레슨을 받도록 했고 이어 다른 공부도 시켰다. 샬로타 수얼링에게 음악이론을 직접 가르친 사람도 페르 아론 보리였다. 샬로타 수얼링은 시작(詩作)에도 재능이 있어서 시를 쓰고 그 시에 멜로디를 붙여서 노래를 만들기를 좋아했다. 샬로타 수얼링는 영민하여서 과학과 외국어와 의학까지 공부하였다. 페르 아론 보리는 1808년에 스웨덴 최초의 농아-맹아학교를 설립했다. 샬로타 수얼링은 이 학교를 위해 적극 봉사하였다. 샬로타 수얼링은 러시아의 생페터스부르크의 맹인학교 운영을 위해서도 봉사하였다. 샬로타 수얼린은 스웨덴으로 돌아와서 지내다가 5년후에 세상을 떠났다.
패르 아론 보리. 스웨덴 최초의 농아-맹아학교를 설립했다. 샬로타 수얼링의 음악적 재능을 높이 평가해서 그를 많이 후원하였다. 샬로타 수얼링은 얼굴에 마마자국이 있어서 부끄럽다고 생각하여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
○ 올리버 쇼(Oliver Shaw: 779-1848). 미국의 초기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다. 쇼는 로우드 아일랜드의 뉴포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사고를 당했고 이어 황열병에 걸려 고생하였으며 결국은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그는 오르간을 공부했다. 그는 작곡가로서 주로 보스턴과 프로비덴스에서 활동했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이 토마스 무어의 시에 의한 것이다. 그는 1810년에 친구들과 함게 Psallonian Society를 설립했다. 주로 종교음악에 대한 연구와 연주를 하는 그룹이었다.
올리버 쇼의 사진은 이것 밖에 없다.
○ 헨리 토마스 스마트(Henry Thomas Smart: 1813-1879). 영국의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이다. 런던에서 태어난 스마트는 삼촌이 유명한 지휘자인 조지 스마크경이고 아버지 헨리 스마트는 음악출판가로서 오케스트라 감독도 맡아하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보다는 관록있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스마트는 법학을 공부했으나 얼마후에 음악을 위해서 법학공부를 그만두었다. 스마트는 당시에 대단히 저명한 작곡가로서 존경을 받았으나 미안하게도 오늘날에는 거의 잊혀진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작곡한 Regent Square는 오늘날에도 찬송가로 편곡되어 널리 불려지고 있다. 우리나라 개신교 찬송가 118장 '영광 나라 천사들'이 바로 그 곡이다. 스마트는 상당히 많은 량의 오르간곡들을 작곡했다. 풍부한 멜로디의 오르간곡들이다. 칸타타도 여러 편을 남겼다. '던커론의 신부'(The Bride of Dunkerron)은 1864년 버밍햄 페스티발을 위해 작곡한 것이다. 오라토리오 '야곱'은 글라스고우를 위해 작곡한 것이다. 오페라로는 '베르타'(Bertha)가 있다. 스마트는 1879년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세상을 떠나기 15년전 쯤부터 눈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얼마후에는 완전 실명되었다. 스마트는 앞을 보지 못하면서 작곡을 할 때에는 딸 엘렌에게 딕테이션을 하면 엘렌이 오선지에 옮겨 적었다.
헨리 토마스 스마트. 50세가 지나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 챨스 존 스탠리(Charles John Stanley: 1712-1786). 영국의 작곡가 겸 오르가니스트로서 두살 때에 사고로 난로에 엎으러져서 아마 불 때문이었는지 재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로부터 눈이 멀었다. 비록 어릴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였으나 뛰어난 오르가니스트로서, 그리고 작곡가로서 생애를 보냈다. 스탠리는 1712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두살 때 눈을 다쳐서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지만 음악적인 재능은 천부적이었다. 일곱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했고 아홉살 때부터는 오르간을 연주했다. 스탠리는 11살 때인 1723년에 런던의 올 할로우스 브레드 스트리트(All Hallows Bread Street)성당의 오르가니스타 세상을 떠나자 그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었다. 사례금은 아직도 소년이기 때문에 1년에 20파운드였다. 그후 14살 때에는 홀본(Holborn)의 성안드레 성당의 오르가니스가 되었다. 그리고 17세 때에는 옥스포드대학교에서 음악학사 학위를 획득하였다. 이것은 옥스포드에서 음악학 학사로서는 가장 연소한 경우였다. 1734년에는 인너 템플 협회(Society of Inner Temple)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었다. 이 직책은 그가 세상 떠날 때까지 유지했던 것이다. 인너 템플 협회에서 스탠리의 오르간 또는 하프시코드 연주는 너무나 뛰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들으러 왔다. 자주 찾아오는 청중 중에는 헨델도 포함되어 있었다. 스탠리는 바이올린도 뛰어나게 연주했다. 스탠리는 동인도회사의 에드워드 알론드의 딸인 사라와 결혼했다. 사라는 지참금으로 매년 7천 파운드를 제공했다. 스탠리는 앞을 못보지만 기억력만큼은 놀랄만했다. 헨델의 오라토리오를 여러 편이나 암기해서 지휘했다. 그리고 카드 게임을 잘했다. 기억력이 너무 좋아서 친구들이 무슨 카드를 내놓았고 무슨 카드를 손에 쥐고 있는지를 모두 기억해서 번번히 이겼다. 새로 오라토리오가 나와서 그가 오르간 반주를 해야할 것 같으면 처제인 앤에게 한번 그 곡을 연주해 보라고 해서 꼭 한번 듣고서 모두 완전히 암기했다. 앤은 스탠리를 위해서 악보의 필사를 했다. 스탠리의 작품으로는 오페라 Teraminta가 있고 칸타타로서 '헤르큘레스의 선택'(The Choice of Hercules)등 12편을 남겼다. 또한 오라토리오로서는 '입다'(Jephtha), '이집트의 멸망'(The Fall of Egypt), 짐리(Zimri) 등이 있고 이밖에도 다수의 기악곡을 남겼다. 대단하다. 스탠리는 향년 74세로서 1786년에 세상을 떠났다.
챨스 존 스탠리. 두살 때 실명했다. 74세까지 살면서 뛰어난 오르가니스트로서, 훌륭한 작곡가로서 활동했다.
○ 페트코 스타이노프(Petko Staynov: 1896-1977). 블가리아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이다. 불가리아 음악전통을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 헌신했다. 그래서 불가리아에서는 국민적인 음악가로서 높은 추앙을 받고 있다. 스타이노프는 여섯살 때에 눈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결과 다른 쪽 눈도 영향을 받아서 11살 때에는 결국 두 눈을 모두 못 보게 되었다. 그는 소피아맹아학원에 다닐 때부터 음악적인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스타이노프는 음악공부를 더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1920년, 열네살 때에 독일의 브라운슈봐이크로 가서 1년 동안 음악공부를 했다. 이어 1923년에는 드레스덴음악원에서 작곡과 피아노를 전공한 후 졸업했다. 그는 1927년, 24세 때에 소피아로 돌아와서 그때부터 소피아맹아원에서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불가리아 음악의 발전을 위해 작곡도 하고 연주도 하며 지냈다. 그는 서구적인 음악정신을 불가리아 음악에 접목코자 노력하였다. 스타이노프는 불가리아의 가장 창의적인 작곡가로서 존경을 받았다. 스타이노프는 1977년, 향년 81세로서 소피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페트코 스타이노프. 불가리아 음악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 요세프 안토닌 스테판(Josef Antonín Stepan: Joseph Anton Steffan: 1726-1797). 고전주의 시대의 보헤미아 작곡가 겸 하프시코디스트이다. 스테판은 보헤미아의 코피들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학교 교장선생이면서 마을 성당의 오르가니스트였다. 스테판은 15세 때에 프러시아군대에 들어가느니 음악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하고 비엔나로 갔다. 그는 비엔나에서 게오르그 크리스토프 봐겐자일로부터 본격적인 음악 레슨을 받았다. 그후 그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딸들인 마리아 카롤리나와 마리아 안토니아의 피아노 선생이 되었다. 마리아 안토니아는 훗날 프랑스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였다. 그는 49세 때에 한쪽 눈에 안질이 걸리더니 얼마 후에는 두눈 모두 안보이게 발전했다. 그는 합스부르크 궁전에서의 직위를 사임하고 비록 앞을 보지 못하지만 집에 들어 앉아서 작곡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주로 종교음악과 실내악을 작곡했다. 스테판은 1797년 비엔나에서 향년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요셉 안토닌 스테판. 쇤브룬 궁전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 카롤리나 보크(Karolina Bock: Bertha Carolina Mathilda Tammelin, née Bock: 1836-1915). 스웨덴의 배우, 오페라 메조소프라노, 피아니스트, 작곡가, 드라마 교사이다. 아버지는 왕립궁정오케스트라의 단원이었다. 카롤리나는 연극학교를 나온후 왕립스웨덴오페라단과 왕립연극극장에 주연급으로 다니게 되었다. 그래서 오페라에도 출연했고 연극에도 출연했다. 메조소프라노로서는 베버의 '오베론'에서 퍼크(Puck) 역할이 대표적이었으며 연극배우로서는 프란스 헤드베리(Hedberg)의 Brollopet pa Ulvasa에서 잉그리드 역할이 대표적이었다. 카롤리나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14세 때에 이미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다. 작곡가로서는 스웨덴 민요에 바탕을 둔 가곡과 피아노 곡들을 남겼다. 카롤리나가 언제부터 시력이 나빠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린 시절부터였다는 얘기다. 그후 평생을 통해서 시력에 어려움을 겪다가 말년에 실명의 정도까지 이르게 되자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은둔하였다. 카롤리나는 1915년, 1차 대전 중에 향년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카롤리나 보크. 스웨덴의 배우, 성악가, 피아니스트, 작곡가였다.
○ 루이 빅토르 쥘르 비에르느(Louis Victor Jules Vierne: 1870-1937). 프랑스의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 루이 비에르느는 비엔느군의 뿌아티에(Poitiers)에서 태어났다. 태어난후 6개월쯤 되었을 때에 시력을 잃기 시작했다. 선천성 백내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록 앞을 볼수 없지만 음악에 대한 비상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루이 비에르느는 두살 때에 누가 그를 위해서 슈베르트의 자장가를 피아노로 연주하자 금방 따라서 피아노의 건반을 눌렀다고 한다. 루이 비에르느는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였다. 그후 노트르 담 드 파리 사원의 주오르가니스트로 봉사하기 시작했다. 1900년부터 1937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직분을 수행하였다. 루이 비에르느는 신체적으로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도 매우 힘든 삶을 살았다. 종교적으로 볼때 영적인 시험을 줄곧 받으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한 배경은 그의 작품 속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는 어릴 때에 선천성 백내장으로 고통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사물을 완전히 볼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뿌옇게나마 알아 볼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판단으로 보아서는 법적으로 완전한 시각장애자였다. 그는 결혼을 했지만 부인과 상당기간 동안 별거하였고 마침내 이혼하였다. 그것이 그를 정신적으로 괴롭혔다. 게다가 그는 외아들 자크를 1차 대전의 전쟁터에서 잃었다. 그의 형인 르네도 1차 전쟁 중에 전사했다. 그러던중 루이 비에르느는 파리의 어느 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해서 한쪽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 의사는 골절된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기적적으로 낫게 되어 외다리의 신세는 면할수 있었다. 그러나 다리를 제대로 사용할수가 없었다. 오르가니스트로서는 대단한 낭패가 아닐수 없었다. 다행하게도 재활의 노력으로 1년후에는 다리를 다시 사용하여 오르간의 페달을 밟을수 있게 되었다. 이런 여러 난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은 그가 친절하고 인내하며 오히려 제자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는 사람이었다며 존경과 찬사를 보냈다. 루이 비에르느는 1737년 6월의 어느날 노트르 담 드 파리에서 그의 1750번째 오르간 리사이틀을 하는 중에 심장마비를 일으켰으나 참고 연주를 계속하다가 마지막 부분에 가서 그만 오르간 앞에서 쓰러졌고 다시는 회생하지 못했다. 그는 페달의 저음 E를 누르는 순간 의식을 잃었다고 하는데 발로 페달을 계속 누르고 있는 바람에 저음 E만이 성당 안에 메아리처럼 울려퍼졌다고 한다. 청중들은 그가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온 힘을 다해서 오르간을 연주를 한데 대하여 무한한 박수를 보냈다. 그는 평소에 노트르 담 드 파리의 오르간 앞에 앉아 있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는데 그 소원을 이룬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그에 앞서서 1931년 그에게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였다.
루이 비에르느. 그는 평소에 오르간 앞에 앉아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었다.
[이밖에도 또 있지만 지면상 생략]
ö ü é ä è ó ž í á
'클래시컬 뮤직 팟푸리 > 클래시컬 뮤직 팟푸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대한 작곡가들의 별난 죽음 (0) | 2017.02.02 |
---|---|
위대한 작곡가들의 별난 죽음 추가 (0) | 2016.10.12 |
앞을 못보는 작곡가들이 있었다 1 (0) | 2016.04.04 |
다른 작곡가들에게 영광을 (0) | 2015.03.27 |
가장 아름다운 음악 (0) | 2014.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