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집중탐구 150편

[참고자료] 샤를르 10세는 누구? -1-

정준극 2016. 6. 13. 20:30

[참고자료] 샤를르 10세는 누구? -1-

로시니의 오페라 '렝스로의 여행'의 보이지 않는 주인공

부르봉 왕조의 마지막 왕


샤를르 10세


로시니의 오페라 '렝스로의 여행'(Il viaggio a Reims)은 각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렝스에서 열리는 샤를르 10세의 대관식을 보려고 가는 중에 교통편을 구하지 못해서 결국은 도중의 여관에 머물게 되었는데 비록 대관식에는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냥 보내기가 미안해서 여관에서 마을 사람들까지 불러서 축하파티를 갖는다는 내용이다. 이 오페라에는 주역들이 14명이나 나오지만 상징적인 주인공은 무대에는 나타나지 않는 샤를르 10세이다. 그러면 도대체 샤를르 10세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대탐구를 시작한다. 프랑스의 근대사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다면 이럭저럭 참고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로시니의 오페라 '렝스로의 여행'의 한 장면. 현대적 연출.


샤를르 10세는 1824년부터 1830년까지 6년 동안 프랑스의 왕으로 존재했던 사람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수상해서 결국 왕좌에서 쫓겨나 추방생활을 해야 했다. 추방생활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괴르츠(고리치아)라는 곳에서 했다. 지금은 이탈리아의 영토인 곳이다. 샤를르 10세는 1757년에 베르사이유에서 태어났다. 그러다가 양노원에나 가야하는 나이인 67세에 왕이 되어서 73세까지 6년 동안 왕 노릇을 하다가 1830년의 7월 혁명으로 왕좌에서 쫒겨났고 타향살이 6년만에 객지에서 요단 강을 건너갔다. 그래서 유서깊은 부르봉 왕조는 샤를르 10세로 인하여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나저나 당시에는 국가정세가 하도 비상해서 언제 무슨 혁명이 일어나서 나라의 주인이 바뀔지 모르는 때였다. 그래서 왕이 되었어도 옛날의 왕들처럼 백성들에게 군림하는 왕 노릇을 하기가 쉽지 않던 때였다. 말하자면 자유와 평등사상 때문에 왕을 왕으로 생각하지 않는 백성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샤를르 10세를 샤를르 왕이라고 부르는 대신에 어릴 때부터의 호칭인 아르투아 백작(comte d'Artois)으로 부르기를 선호했다. 따지고 보면 샤를르 10세는 루이 17세의 삼촌이었다. 그런데 루이 17세는 대관식을 갖지 못했던 왕으로서 유명하다. 또한 샤를르 10세는 루이 16세와 루이 18세의 동생이었다. 샤를르 10세는 마침내 둘째 형인 루이 18세의 뒤를 이어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는 했다. 조카가 왕이었고 형이 두명이나 왕이었으니 그만하면 가정환경이 대단하다고 말할수 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아버지는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왕세자는 되었지만 왕이 되지는 못했다. 


샤를르 10세의 할아버지인 루이 15세


여기서 잠시 샤를르 10세의 가족상황부터 살펴보자. 샤를르 10세의 할아버지는 루이 15세이다. 루이 15세는 워낙 대단한 남자라서 자녀를 공식적으로 10명이나 두었다. 3남 7녀였다. 위로만 딸 셋을 두었다가 네번째로 아들 루이가 태아났다. 장자였기 때문에 당연히 왕세자(도팽)로 책봉되었다. 왕세자인 루이는 역시 대단한 남자여서 4남 4녀를 두었다. 큰아들이 브루군디 공작인 루이이며 둘째가 나중에 루이 16세가 된 루이 필립이고 셋째가 나중에 루이 18세가 된 사람이며 넷째가 나중에 샤를르 10세가 된  '렝스로의 여행'의 주인공인 샤를르 필립이다. 샤를르 10세의 아버지인 루이는 왕세자로 책봉되어 차기 왕위를 계승해야 했으나 그의 아버지인 루이 15세가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는 바람에 계속 왕세자 신세였다가 3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서 왕이  되지 못했다. 왕세자 루이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왕세자 자리는 루이의 큰 아들인 부르군디 공작(역시 이름은 루이)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되느라고 새로 왕세자가 된 부르군디 공작마저 1761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불운이 생겼다. 그래서 순서에 입각하여 둘째 아들인 루이 필립이 왕세자가 되었으니 그가 나중에 루이 15세의 뒤를 이어 루이 16세가 된 사람이다. 루이 16세는 왕세자일 때에 잘 아는대로 마리 앙뚜아네트와 결혼했으며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1793년 길로틴의 이슬로 생을 마감한 사람이다. 이상의 이야기를 다시 장리해보면, 샤를르 10세의 큰 형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둘째 형이 나중에 루이 16세가 되었으며 셋째 형은 프로방스 백작으로서 나중에 루이 18세가 되었다. 그러면 루이 17세는 어디있는가? 루이 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 사이에서 태어난 루이 오귀스트가 어린 나이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프랑스의 왕으로서 루이 17세가 되었으나 1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병마와의 싸움에 져서 저 세상으로 떠났다. 그러자 루이 16세에게는 더 이상 후손이 없으므로 순서에 따라서 루이 16세의 동생인 프로방스 백작이 루이 18세로서 1814년부터 1824년까지 명목상 10년간 프랑스의 왕이 었으며 그가 후손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동생인 샤를르 필립이 샤를르 10세로서 왕이 되었던 것이다. 루이 18세는 왕위하고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이나 멀었는데 운명이 무엇인지 아무튼 참으로 복잡한 과정을 거쳐 왕이 되었다. 복잡한 과정이라고 말한 것은 그가 나폴레옹 때문에 1815년에 100일 동안 왕의 행세를 하지 못한 것이 대표적인 일이었다. 


샤를르 10세가 대관식을 가진 렝스의 노트르 담 대성당. 유명한 파리의 노트르 담 대성당과 모습이 흡사하다.


근대 프랑스 왕가의 사정은 너무 복잡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어려우며 더구나 사람들의 이름이 전부 루이, 샤를르, 필립 등등 비슷비슷해서 혼돈이 일어날수 있으므로 여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샤를르 필립(샤를르 10세)의 가족 사항을 언급하자면, 샤를르 필립의 큰 형인 부르군디 공작은 왕세자였으나 샤를르가 고작 4살 때에 세상을 떠났고 그로 인하여 샤를르 필립의 아버지가 왕세자가 되었으나 그도 1765년에 샤를르 필립이 8세 때에 왕이 되어 보지 못한채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샤를르 필립의 둘째 형인 루이 오귀스트가 왕위 계승 영순위인 왕세자가 되었다. 루이 오귀스트가 나중에 루이 16세가 된 사람이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샤를르 필립의 어머니인 작소니의 마리아 요제파가 남편의 죽음을 애석해 하다못해 남편 루이가 세상을 떠난지 다음 해에 역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폐결핵이었다. 9살에 불과한 샤를르 필립은 형들이야 있지만 사실상 부모없는 고아가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할아버지 루이 15세가 왕으로 있었다. 루이 15세는 큰아들 왕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손자들을 극진히 사랑했는데 그 중에도 샤를르 필립을 자기와 너무 닮았다고 해서 총애하였다. 그러런 중에 튼튼하던 루이 15세가 1774년에 천연두에 걸려 자리를 보전하고 눕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향년 64세로서 세상을 하직하였다. 따라서 각본에 의해서 손자인 루이 오귀스트가 루이 16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루이 16세는 왕세자로 있었던 1770년에 신성로마제국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망내 딸인 마리 앙뚜아네트(마리아 안토니아)와 결혼하였다. 샤를르 필립의 형인 루이 오귀스트가 루이 16세로서 프랑스의 왕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20세였다. 루이 오귀스트는 마리 앙뚜아네트와 결혼하여서 네 자녀를 두었는데 첫째가 딸 마리 테레스 샬로트였고 둘째가 아들 루이 조세프이지만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고 셋째가 아들 루이 샤를르로서 나중에 루이 17세가 된 사람이다. 그리고 망내딸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를 두었다. 형인 루이 오귀스트가 왕이 되고 그의 아들이 생존하게 되자 샤를르 필립은 왕위 계승 서열에서 한층 멀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다 아는 사실이지만 루이 17세가 된 루이 오귀스트는 마리 앙뚜아네트와의 부부관계가 원활치 못해서 고생을 하다가 겨우겨우 네 자녀를 두게 되었지만 그 중에서 둘은 설명한 대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둘은 남았지만 혁명의 영향으로 무진 고생을 하다가 겨우 아들 루이 샤를르가 나중에 루이 17세가 되었지만 그것도 단명이었다. 하기야 단명으로 치자면 루이 17세(루이 오귀스트)를 따라갈 사람이 없을 듯 하다. 루이 17세는 1791년 10월에 왕위에 올라서 이듬해인 1792년 9월에 왕좌에서 물러나야 했으니니 고작 1년도 넘기지 못하고 비운을 맞아야 했다. 반면에 루이 17세의 아버지인 루이 16세는 1774년(미국이 독립한 해)에 왕위에 올라서 1793년 10월 1일에 단두대에서 이슬처럼 짧은 인생을 마쳤으니 17년이나 왕위에 있은 셈이다.


루이 16세. 마리 앙뚜아네트의 남편.


다시 샤를르 필립으로 돌아가서 그는 1773년, 16세가 되던 해에 할아버지 루이 15세의 주장에 의해 사보이 왕가의 마리 테레스(Marie Therese)와 결혼하였다. 그의 형으로서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뚜아네트와 결혼한 루이 오귀스트는 비록 1770년에 결혼했지만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해서(루이 오귀스트가 임포텐스여서) 당장 자녀를 갖지 못했지만 비교적 어린 나아의 샤를르 필립은 결혼하자마자 무슨 부부금슬이 그렇게도 좋은지 당장 자녀들을 두기 시작했다. 그런면에서는 형보다 축복받은 셈이었다. 샤를르 필립과 사보이의 마리 테레스는 결혼 이듬해인 1775년에 아들 루이 앙투안을 생산하였다. 애기 아빠인 샤를르 필립은 그때 17세의 청소년이었다. 이렇게 태어난 루이 앙투안은 다음 세대의 부르봉 왕가의 첫 아이가 되는 셈이었다. 그때만 해도 왕위에 오른 루이 16세는 자녀가 없었다. 샤를르 필립은 첫 아이를 가진지 3년 후인  1778년에 둘째 아들을 생산하였다. 샤를르 페르디낭이었다. 그해에 참으로 다행하게도 루이 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는 겨우 자녀를 생산할수 있었다. 큰 딸 마리 테레스 샬로트였다. 아무튼 마리 앙뚜아네트 왕비가 비록 딸이기는 했지만 자녀를 낳는 바람에 마리 앙뚜아네트가 선천적 불임이라느니 하는 소문은 게눈 감추듯이 사라졌다. 


샤를르 필립과 결혼한 사보이의 마리 테레스(1756-1805). 초상화를 그린 화가가 잘 그려서 그렇지 실은 상당히 아니올시다로 생겼다고 한다.


샤를르 필립은 생기기를 잘 생겨서 베르사이유에서 상당히 인기가 높았다. 나이는 많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할아버지인 루이 15세는 자기를 붕어빵처럼 닮았다고 하면서 총애했다. 반면에 부인인 마리 테레스는 집안이 좋다는 것일뿐이지 생긴 것은 '아니올시다'였다. 당시 비슷한 나이의 각국 왕실 여자들 중에서 가장 못생겼다는 얘기였다. 그러다보니 명색이 남편이라는 샤를르 필립은 나이도 어린 입장에서 좋게 말해서 로맨스가 많았고 나쁘게 말해서 천방지축으로 바람이나 피면서 지냈다. 실제로 여러 여인들이 샤를르 필립의 하룻밤 애인이 된 후에 버림을 받는 바람에 '어디 두고보자'라며 가슴을 한을 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중에도 샤를르 필립이 늙어서까지 애인으로 삼아서 뜨겁게 지낸 여인이 있었다. 샤를르보다 일곱살 아래인 루이스 드 폴라스트론(Louise de Polastron)이라는 여인이었다. 형수인 마리 앙뚜아네트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폴리냐크 공작부인의 남동생의 부인이 되는 여자였다. 샤를르 필립과 루이스의 스캔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루이스는 폐병으로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샤를르는 임종을 앞둔 루이스에게 세상이 끝날 때까지 다른 여자는 생각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바 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켰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는 별도의 항목에서 다루고자 한다. 홍미롭기 때문이다.]


샤를르 필립이 평생의 애인으로 삼았던 루이스 드 폴라스트론. 아주 조신하고 예쁘게 생겼다. 원래 이름은 루이스 데스파르베 드 뤼상이지만 폴라스트론 자작인 드니와 결혼했기 때문에 루이스 드 폴라스트론이 되었다.


샤를르는 형수가 되는 마리 앙뚜아네트와도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샤를르가 마리 앙뚜아네트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12살 때인 1770년으로 그때 마리 앙뚜아네트는 훗날 루이 16세가 된 루이 오귀스트와 결혼하기 위해 비엔나를 떠나 처음으로 프랑스에 왔었다. 그후 어느때 부터인지 파리에서는 샤를르와 마리 앙뚜아네트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얘기인즉 샤를르가 형수인 마리 앙뚜아네트를 먼저 유혹했고 마리 앙뚜아네트는 그 유혹에 넘어가서 두 사람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기야 샤를르의 형인 루이 오귀스트는 마리 앙뚜아네트와 결혼했지만 성불구자여서 부부관계가 원활치 못했고 때문에 아이도 갖지 못했으며 이로써 마리 앙뚜아네트는 내심 불만이 넘쳐 있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샤를르와 마리 앙뚜아네트는 마치 짝궁처럼 붙어서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마리 앙뚜아네트의 문화 활동에서였다. 왕비(마리 앙뚜아네트)는 농촌생활이 그립다고 하면서 베르사이유 궁전의 한쪽에 농가를 짓고 그 집에서 생활하는 일이 많았다. 그 집을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이라고 불렀다. 말이 농가이지 실은 상당한 규모여서 집안에 연극을 할수 있는 무대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왕비는 연극을 보는 것도 좋아했지만 자기가 무슨 배우라고 하여튼 연극에 직접 출연하는 경우도 많았다. 왕비는 주로 목장의 아가씨, 양치는 아가씨, 시골 아낙네 등의 역할을 했다. 그럴 때면 상대역은 언제나 샤를르였다. 샤를르는 목장 아가씨의 애인 역할, 농장의 집사 역할, 농부 역할을 맡아했다. 둘이서는 아주 궁합이 잘 맞아서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고 한다.


마리 앙뚜아네트


왕비와 샤를르의 콤비에 대한 에피소드 중에 대표적인 것 하나만을 소개코자 한다. 1775년에 샤를르는 불로뉴 숲(Bois de Boulogne)에 작은 사냥숙사 하나를 샀다. 샤를르는 작은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큰 집을 세우기로 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정말로 할 일도 없었는지시동생인 샤를르가 새로운 집을 3개월 이내에 완성하지 못하는데에 내기를 걸었다. 샤를르는 당대의 건축가인 프랑수아 조세프 벨란저에게 새로운 집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새로운 집은 샤토 드 바가텔르(Chateau de Bagatelle)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벨란저는 열심히 노력해서 불과 63일만에 샤토 드 바가텔르를 완성했다. 토털 건축비는 2백만 리브르 정도가 들었다. 아무튼 왕비가 내기에 졌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샤를르의 사치가 지나치다는 것이 문제였다. 샤를르는 샤토 드 바가텔르를 짓고 나서 더 씀씀이가 많아졌다. 도처에 빚이었다. 1770년대 말에는 그렇게 진 빚이 2천 1백만 리브르를 넘었다. 형인 루이 16세가 보다 못해서 빚을 모두 갚어주기는 했지만 하여튼 왕실의 사치는 도가 지나쳐서 돈을 물쓰듯 했으니 왕실의 재정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한편, 자녀를 생산하지 못해서 안절부절했던 왕과 왕비는 큰 딸을 낳은 후에 마침내 아들을 낳았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고 다시 딸을 낳았으며 1781년에는 대망의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루이 조셉이었다. 왕세자인 루이 조셉은 세례를 받을 때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요셉 2세가 대부가 되는 것으로 준비했으나 정작 세례식에는 요셉 2세가 올수 없어서 샤를르가 대신 왕세자의 대부 역할을 했다.


파리의 볼로뉴 숲에 있는 샤토 드 바가텔르. 샤를르기 원래 있던 사냥숙사를 허물고 새로 지은 집이다.


샤를르가 정치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1786년이다. 그때 프랑스의 왕실은 과거의 전쟁들 때문에 거의 파산지경에 까지 이르렀었다. 그래서 재정개혁의 요구가 있게 되었고 이때 샤를르가 간여하게 된 것이다. 과거의 전쟁들이란 7년 전쟁과 미국독립전쟁을 말한다. 프랑스는 승산없는 이들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만을 탕진하였던 것이다. 샤를르는 우선 귀족들의 재정특권들을 제약하는 일들을 지지했다. 그러나 세금에 관한 특권등은 제약하더라도 귀족으로서 사회적인 특권들은 유지하도록 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특권도 그대로 인정하는 일에 동조했다. 샤를르는 프랑스의 재정을 개혁하기 위해서 왕실까지 개혁하거나 전복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선은 필요하다. 그러나 파괴는 안된다'였다. 루이 16세는 프랑스의 재정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150여년 만에 처음으로 1789년 5월에 에스테이츠 제느랄(Estates General)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 참석한 샤를르는 사람이 자기 분수를 알아야하는데 누이인 엘리사베스와 함께 왕인 루이 16세의 말은 한귀로 흘려보내면서 대단히 보수적인 입장을 주장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즉 평민계급을 대표하는 제3 에스테이츠의 투표권을 증대하여서는 안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자 형인 루이 16세가 샤를르의 주장을 못마땅해 했다. 루이 16세는 샤를르에 대하여 '왕보다 더 왕권주의적이다'(plus royaliste que le roi)라고까지 말하면서 못마땅해 했다. 제3 에스테이츠의 사람들은 왕실 사람들이 제3 에스테이츠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자 참지 못하고 다음 달인 1789년 6월에 따로 '국민회의'(즉 의회)를 구성하고 새로운 헌법을 만들고자 했다. 


샤를르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재무장관인 자크 네커 사건으로부터였다. 샤를르는 당시 수상이던 드 브레퇴일(de Breteuil) 남작과 손을 잡고 재무장관인 자크 네커를 해임하고 왕실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재무장관을 임명키로 합의하였다. 그런데 샤를르는 자기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과시하고 싶어서인지 하여튼 드 브레퇴일 수상과는 미리 한마디 상의도 없이 7월 11일에 자크 네커 장관을 해임조치했다. 그러자 드 브레퇴일 수상은 무시 당했다고 생각해서 대단히 분노했고 드 브레퇴일 수상이 펄펄 뛰었다는 소식을 들은 샤를르는 '지가 뭔데'라면서 오히려 드 브레퇴일 수상을 비난했다. 이로부터 두사람의 관계는 동맹이 아니라 원수처럼 되었다. 그러면 자크 네커 재무장관의 해임은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간단히 말해서 저 유명한 1789년 7월 14일의 바스티유 감옥 난입사건이 일어나게 만들어준 것이었다. 시민들이 바스티유를 침공해서 점령하자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는 샤를르 때문에 이 난리가 생겨난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손은 안으로 굽는다고 샤를르와 가족들에게 파리를 떠나서 어디서 조용히 좀 있도록 권했다. 그래서 바스티유가 함락된지 사흘 후에 샤를르는 왕실 가족들 몇 명과 궁정 사람들 몇 명과 함께 외국으로 나가게 되었다. 샤를르는 우선 자기 부인의 친정인 사보이로 피난 가기로 결정했다. 한편, 파리에서는 루이 16세가 의회와 여러 사안을 두고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의회는 의외로 강경했다. 1791년 3월에 의회는 이른바 섭정법이라는 것을 통과시켰다. 만일이 16세가 뜻하지 아니하게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루이 16세의 유일한 적자인 루이 샤를르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섭정을 미리 선정해 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프로방스 백작이나 오를레앙 공작 중에 한사람을 섭정으로 삼거나 두 사람 모두 여의치 못하면 의회가 섭정을 선출한다는 것이다. 원래 왕세자인 루이 샤를르가 어려서 왕이 된다면 섭정 영순위로서는 삼촌인 샤를르가 맡아야 하는 것이 무리가 없는데 의회는 샤를르를 밉게 보아서 아예 섭정이고 무어고의 우선순위에서 제외해 버렸다. 


피난길에 오른 샤를르는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지내다가 그것도 여의치 못해서 독일의 트리어로 갔다. 트리어에는 그의 삼촌이 되는 작소니의 클레멘스 벤체슬라우스가 차기 대주교로 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샤를르는 군대를 마련해서 바스티유 함락에 대응하는 반혁명 공격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파리에서 마리 앙뚜아네트가 샤를르에거 급서를 보내어 왕실 가족들이 파리로부터 피난을 떠난 후에 반혁명 공략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며 더구나 몽메디 장군이 프랑스 정규군을 규합해서 폭도들에게 반격을 가할 계획을 하고 있으니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는 바람에 파리 공격을 연기하였다. 이어 샤를르는 트리어에서 코블렌츠로 자리를 옮기고 이곳에서 역시 파리의 폭도들을 피해서 피난을 나온 프로방스 백작과 합세하여 프랑스 침공계획을 재차 수립하였다. 이와 함께 프로방스 백작은 유럽의 여러 나라로 특사로 떠나서 지원군을 요청토록 했으며 한편 샤를르는 트리어에 프랑스 망명정부와 비슷한 조직을 설치하였다. 8월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프러시아 황제는 필리니스 선언을 통해서 유럽 제국은 프랑스의 위기에 적극 관여해 줄것을 요청하였다. 사태는 샤를르 쪽에 유리한 듯이 보였다. 그러다가 어느덧 해가 바뀌어 1792년이 되었다. 프랑스 의회는 새해 첫날을 맞이해서 결의문을 발표하고 외국으로 떠난 프랑스의 역적들에 대하여는 그들의 직위를 무효로 하고 그들의 영지는 모두 국가가 압수한다고 했다. 이와 함께 부르봉 왕조는 이제 필요 없으므로 폐지한다는 후속조치가 1792년 9월을 깃점으로 발효되도록 했다. 샤를르는 혁명세력이 너무나 강력해서 도무지 반격을 가할 여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독일을 떠나 영국으로 다시 피난의 길을 떠났다. 그후 프랑스에서는 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의 가족들이 모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으며 루이 16세 왕과 마리 앙뚜아네트 왕비는 결국 이듬해인 1793년에 콩코르드 광장에서 만인이 환시하는 중에 사형에 처해져 저 세상으로 떠났다. 그리고 어린 왕세자인 루이 샤를르도 얼마후 감옥에서 병마를 이기지 못해서 죽었다. 


루이 17세. 아버지는 루이 16세이고 어머니는 마리 앙뚜아네트였다.


영국의 조지 3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샤를르를 환대하여 어려움 없이 살도록 했다. 샤를르는 런던에서도 지냈고 에딘버러에서도 지냈다. 이때 샤를르의 옆에는 정부인 루이스 드 폴라스트론이 있었다. 한편, 역시 추방 길에 오른 샤를르의 형 프로방스 백작은 1795년에 루이 16세의 유일한 아들인 루이 샤를르가 잠시 명목상으로 루이 17세가 되었으나 1년도 넘기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혁명의 파도가 채 가시지도않은 형편에서 루이 18세가 되었으나 프랑스 혁명의 불길이 다시 세차게 타오르는 바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루이 18세는 영국에 있던 동생 샤를르 필립을 이탈리아의 베로나에 가서 지내도록 주선했다가 그 후에는 미타우의 제글라바 성에서 지내도록 배려해 주었다. 샤를르 필립은 이롯에서 1799년 자기의 아들 루이 안투안과 길로틴에서 세상 떠난 형인 루이 16세의 유일하게 생존한 딸인 마리 테레스와의 결혼을 주관하였다. 1807년에 루이 18세는 영국으로 건너가 지내게 되었는데 동생인 샤를르 필립이 여러가지로 도와주었다. 세월이 흘러 1814년이 되었다. 부르봉 왕가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프랑스에서 부르봉 왕가를 복원할수 있을까를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 이들은 프랑스내의 왕당파들과 긴밀히 연락하여서 군대를 마련하여 혁명정부를 타도할 계획까지 세웠다. 1814년에 런던에 있던 샤를르는 런던의 자택을 아무도 몰래 빠져 나와서 프랑스 남부로 향하였다. 프랑스 남부에는 왕정복구를 위한 연맹군이 거점을 차리고 있었다. 런던에 함께 있던 루이 18세는 왕명으로서 샤를르를 육군 중장에 임명하였다. 연맹군은 위세를 떨치며 진군하여서 마침내 3월 31일에는 파리를 혁명군으로부터 탈환하였다. 그리고 1주일 후에는 나폴레옹이 폐위되었다. 프랑스 상원은 루이 18세가 왕권을 회복했다고 선언했다. 샤를르는 연맹군과 함께 파리에 입성하여 육군 중장으로서 실권을 쥐고 형인 루이 18세가 런던으로부터 파리로 돌아 올 때까지 상황을 장악하였다. 샤를르가 파리에 먼저 입성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에 그는 비밀경찰을 조직하여 모든 사항을 철저하게 감찰하게 하였다. 샤를르는 이같은 비밀경찰 업무를 루이 18세가 귀국한 후에도 루이 18세에게 보고하지 않은채 5년이나 더 운영하였다. 아마 나중에 자기가 왕이 되면 통치수단으로 운영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샤를르의 아버지인 루이 왕세자


루이 18세가 영국으로부터 귀국하자 파리 시민들은 그를 열렬하게 환영하였다. 루이 18세는 파리의 튈러리 궁에 자리를 잡았다. 샤를르는 파빌리온 드 마르(Pavillon de Mars)에서 지냈다. 1789년의 혁명 때에 혁명세력들이 휩쓸었던 곳이었다. 그리고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샤를르의 큰 아들인 앙굴렘 공작은 파빌리온 드 플로르(Pavillon de Flore)에서 지냈다. 두 저택 모두 세이느 강을 내려다 보는 곳에 있었다. 앙굴렘 공작부인은 파빌리온 드 플로르에 들어서자 지나간 일들이 생각나서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1792년 8월에 혁명분자들은 앙굴렘 공작부인과 식구들을 이 건물에 억류하였다. 앙굴렘 공작부인은 혁명분자들이 이 건물을 지키고 있던 스위스 수비대를 모두 학살하는 끔찍한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그래서 다시 그 장소에 들어서자 그때 일을 생각하고서 그만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루이 18세는 동맹군의 의견을 쫓아서 새로운 자유헌법을 초안했다. 이것이 유명한 1814년 헌장(Charter of 1814)였다. 이 헌장으로 상하 양원이 수립되었고 9만명의 선거인단이 구성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종교의 자유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루이 18세는 다시 왕좌를 차지한지 1백일을 맞게 되었다. 그러다가 1815년에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하여 파리에 입성하여 다시 정권을 잡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것을 '1백일'(Hundred Days)라고 부른다. 그러나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를하여 결국 몰락을 하자 다시 왕좌에 오른 루이 18세는 나폴레옹의 잔영을 모조리 청소하기 위해 이른바 '백색 테러'(White Terror)를 실시하였다. 우선 부르봉 왕조에 등을 돌리고 나폴레옹을 추종하던 공무원들을 솎아 내어 모두 공직에서 해임하였다. 그 수가 무려 7만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워털루 전투 이후 어찌할줄 모르고 남아 있던 나폴레옹 군대의 잔여 부대들을 모두 해산했고 이와 함께 고급 장교들은 강제로 군복을 벗거나 추방 당했다. 그 중에서 네이 원수(Marshal Ney)는 반역의 죄로서 처형을 당했고 브륀 원수(Marshal Brune)는 성난 군중들의 손에 살해되었다. 나폴레옹을 추종했던 사람들 중에서 약 6천명이 재판을 받고 유죄판결을 받았다. 남부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에 반대하는 폭도들이 나폴레옹을 추종했던 사람들을 색출하여 린치를 가했다. 특히 마르세이유에서는 나폴레옹에 의해 억지로 끌려온 이집트의 노예 용병들, 즉 맘루크(Mamluk)들이 이집트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갑자기 몰아닥친 폭도들에 의해서 병영에서 집단 학살 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혁명 전의 튈러리 궁


샤를르는 형인 루이 18세의 자유주의적 진보 사상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특히 '1814년 헌장'을 수용한 것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간혹 언성을 높여서 형 루이 18세의 정책을 비판하였다. 특히 루이 18세가 진보적인 인물들을 각료로 임명하자 이럴 수는 없다고 하면서 계속 그렇게 한다면 프랑스를 떠나 다른 나라에 가서 살겠다고 위협적인 말을 퍼부은 적도 있었다. 샤를르는 왕권주의를 신봉했고 왕당파들을 후원하였다. 샤를르는 의회를 장악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의회내에서 어깨에 힘깨나 주는 몇몇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포섭하였다. 초왕권주의자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폴리냑 공작부인의 오빠가 되는 쥘르 폴리냑, 영향력있는 작가인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과 장 바티스트 드 빌렐르 등이 포함되었다. 루이 18세는 샤를르와 그를 추종하는 초왕권주의자들이 자기를 미워해서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여 자기와 자기의 가족들을 외국으로 추방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내심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나중의 일이지만 실제로 샤를르를 추종하는 초왕권주의자들은 루이 18세를 외국으로 추방하였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가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도무지 모르는 경우가 있는데 샤를르의 경우도 그러하다고 하면 그러하다. 샤를르의 젊은 아들인 베리 공작(Duke of Berry)이 1820년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에 파리 오페라에서 저격을 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생긴 것이다. 베리 공작의 죽음으로 온 식구들이 깊은 슬픔에 빠진 것은 물론이지만 샤를르는 혹시나 왕위 계승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걱정부터 했다. 왜냐하면 샤를르의 큰 아들인 앙굴렘 공작에게는 자녀가 하나도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그 다음의 왕위 계승 순위인 베리 공작마저 아들이 없이 새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샤를르의 아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의회는 남자만 왕위에 오를수가 있다는 현행법을 고쳐서 딸도 왕위에 오를수 있도록 하자는 논란을 벌였다. 그러는데 얼마 후에 베리 공작의 미망인인 카롤린이 임신한 사실이 알려졌고 1820년 9월에 건강한 아들을 출산했다. 앙리였다. 앙리는 태어나자 보르도 공작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프랑스 국민들은 앙리가 태어나자는 '하늘이 주신 선물'이라면서 대단히 기뻐했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모금을 해서 샤토 드 샹보르(Chateau de Chambord)를 매입하여 앙리 탄생축하 선물로 주었다. 앙리의 삼촌할아버지가 되는 루이 18세는 앙리에게 '샹보르 백작'이라는 타이틀을 추가로 하사하였다. 그로부터 앙리는 샹보르 백작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샤를르의 손자인 앙리가 태어난 것을 축하해서 국민들이 돈을 모아 선물로 산 샤토 드 샹보르


루이 18세가 프랑스의 왕이 된지도 어언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 1824년이 되었다. 그런데 루이 18세는 1824년에 접어 들면서부터 양쪽 다리와 척추가 썩어 들어가는 이상한 병에 걸려 고통을 당했다. 그러다가 결국 병마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여 1824년 9월 16일에 요단 강을 건너가고 말았다. 동생인 샤를르가 샤를르 10세로서 프랑스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렝스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로시니가 오페라 '렝스로의 여행'을 작곡한 것은 샤를르 10세의 대관식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샤를르는 왕이 되자 우선 부르봉 왕가의 단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당시에 프랑스에서는 오를레앙 왕가도 있어서 부르봉 왕가와 마치 라이발처럼 되어 있었다. 샤를르 10세는 오를레앙 공작가의 사람들, 즉 자기의 사촌들에게도 부르봉 왕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폐하'(Royal Highness)라는 호칭을 사용토록 했다. 오를레앙 가문을 대표하는 오를레앙 공작은 루이 16세가 비참하게 세상을 하직하자 자기가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었다. 물론 아우성은 아우성으로 끝나고 오를레앙 공작은 공연히 스타일만 구기게 되었다. 하여튼 그 때문에 루이 18세는 오를레앙 공작의 식구들은 '폐하'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한바 있었다. 샤를르는 옛날 일은 다 잊어버리고 이제는 부르봉 왕조의 부흥을 위해 손을 잡고 헌신하자고 제스추어를 취했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