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샤를르 10세는 누구인가? -2-
할아버지가 루이 15세, 큰 형이 루이 16세, 조카가 루이 17세, 둘째 형이 루이 18세
그리고 골수 왕권주의자
렝스대성당에서의 샤를르 10세 대관식
형인 루이 18세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다음 프랑스 국왕은 동생인 샤를르 필립에게 돌아갔다. 샤를르 필립은 샤를르 10세이다. 1824년 5월 29일에 렝스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관례에 따라서 주교가 샤를르의 머리에 성유를 바르는 것으로 대관식이 진행되었다. 렝스대성당은 전통적으로 프랑스 국왕들이 대관식을 갖는 장소였다. 그러나 1775년 이후에는 시절이 하수상해서 렝스대성당에서 대관식이 치루어지지 못했다. 루이 18세도 렝스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갖지 않았다. 나폴레옹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루이 18세의 정통성 여부를 두고 거센 논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당사자인 루이 18세는 자칫 국론이 분열되어 부르봉 왕조에 누가 될 것 같아서 대관식을 갖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파리의 노트르 담 대성당에서 스스로 왕관을 쓰고 황제가 되었다. 그러다가 샤를르 10세는 선조들의 정통을 이어 받아 국왕이 되었다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관례에 따라 렝스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샤를르 10세는 처음에 백성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 피비린내 나는 혁명을 종식시킬 군주로서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샤를르 10세에 대한 인기가 시들해졌다. 샤를르 10세는 1824년에 대관식을 가지고 왕이 되었는데 3년 후인 1827년 부터는 '뭐 저런 왕이 다 있어?'라는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올 정도였다. 급기야 1827년 4월 샤를르 10세가 파리에서 국방군을 사열하는 때에 '샤를르인지 무언지는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는 백성들의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대규모 소요사태로까지 발전되었다. 반샤를르 데모에는 국방군의 일부 병사들도 합세하였다.
샤를르는 국방군이 자기에게 반기를 들었다고 생각해서 버릇을 고쳐준다는 명목 아래 국방군 조직을 해체하였다. 하지만 부대만을 해체한 것이지 병사들은 그대로 두었으며 더구나 무기도 그대로 소지하도록 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국방군은 형식상 해체되었지만 언제라도 무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 나올수 있기 때문에 잠재적인 위협이 되었다. 1827년에는 의회 선거가 있었다. 샤를르는 의회의 과반수를 점유하는데 실패했다. 그러자 샤를르는 한때는 런닝 메이트니 뭐니해서 함께 손 잡고 나가던 빌렐르 수상을 전격 해임했다. 후임 수상은 장 바티스트 마르티냑이란 사람이 임명되었다. 원래 샤를르는 마르티냑을 싫어했지만 그래도 의회의 운영을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그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마르티냑 수상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샤를르는 그를 임명한지 7개월만에 전격 해임했다. 후임으로는 쥘르 드 폴리냑을 임명했다. 폴리냑이 누구냐하면 마리 앙뚜아네트와 절친한 친구인 마담 폴리냑의 오빠였다. 그러나 폴리냑도 의회를 장악하는데 실패했다. 폴리냑 수상은 수상 자리를 계속 지키기 위해 의회 소집을 하지 않았다. 소집을 하면 다수 의원들이 반정부 주장으로 난리를 칠 것이니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기를 다섯 달이나 지냈다. 의회를 왜 개최하지 않느냐는 함성이 빗발치듯 했다. 마침내 샤를르는 의회를 열지 않을수 없어서 1830년 3월에 의회를 소집하고 개원연설을 했다. 그러나 샤를르의 개원 연설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와서 많은 반발을 샀다. 의회는 왕이 장관들을 임명하려면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샤를르는 그것이 못마땅해서 차제에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다시 치룰 생각을 했다. 의회는 왕명에 의해 즉시 휴회로 들어갔다.
6월에 총선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샤를르는 역시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했다. 샤를르는 다음 달인 7월에 국가비상시에는 헌법의 효력을 정지할수 있다는 조항을 내걸어 헌법의 효력을 정지했다. 이어 샤를르는 네가지 칙령을 선포했다. 언론을 검열한다는 것, 새로 선출한 의회를 해산한다는 것, 선거인단 제도를 개선한다는 것, 9월에 총선을 다시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칙령이 정부기관지인 르 모니퇴르 유니베르살(Le Moniteur Universel)에 실리자 반정부 성격의 신문인 르 나쇼날(Le National)은 즉각적으로 샤를르를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자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에는 파리의 유력 저널리스트들 43명이 서명하였다. 저녁이 되자 시민들이 왕궁 앞에 모여서 '부르봉을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경찰이 시위대를 막아서자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 나갔다. 당국은 거리의 가로등을 모두 꺼버렸다. 다음날인 7월 27일 아침, 경찰이 르 나쇼날 신문사를 급습하고 신문발간을 중지시켰다. 밤사이에 그나마 잠잠했다가 아침이 되어 다시 왕궁 앞에 모인 시위대들은 경찰이 르 나쇼날을 점거했다는 소식을 듣자 흥분해서 왕궁을 수비하고 있던 군인들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이에 정부군은 발포하기에 이르렀다. 시위는 계속되어 저녁 때 쯤해서는 시위대가 도시의 거의 전부를 장악하고 파괴와 약탈을 시작하였다. 샤를르는 마르몽 원수를 즉각 불러서 폭도들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마르몽 원수가 이끄는 군대의 일부 병사들마저 군대를 이탈하여 시위대에 가담하였다. 오후에 들어서서 마르몽 원수는 나머지 병사들을 이끌고 튈러리 궁전 안으로 퇴각할수 밖에 없었다.
시민들을 이끄는 리버티. 들라크루아 작
의회 측은 다섯 명의 대표단을 마르몽 원수에게 보내어 샤를르가 이미 선포한 네가지 칙령을 철회토록 요구했다. 그러나 샤를르는 칙령을 철회하기는 커녕 내각의 장관들을 모두 해임하였다. 저녁 때에 의회의 대표들이 따로 모여서 샤를르를 왕좌에서 내려 오도록 하고 대신 오를레앙의 루이 필립을 새로운 왕으로 삼자고 결의했다. 오를레앙의 루이 필립은 족보로 보았을 때 루이 13세(재위 1661-1701)의 후손이 된다. 의회는 반정부 시위대들과 협의하여 오를레앙의 루이 필립을 새로운 왕으로 삼기로 했다는 발표문을 인쇄해서 파리 시내 도처에 게시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부터는 정부의 모든 행정업무가 좋게 말해서 반정부 시위대에 의해서, 나쁘게 말해서 폭도들에 의해서 마비되었다. 사태가 시시각각으로 위협적으로 되어 가고 있는 때에 그레소 장군이 샤를르를 만나서 파리 시민들이 궁전을 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니 우선 당장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했다. 샤를르는 시내에 있는 생클루(Saint Cloud) 저택을 떠나서 파리 교외의 베르사이유로 피신키로 했다. 베르사이유로 가는 길은 아수라장이나 마찬가지였다. 부대를 이탈래서 피난을 떠나는 병사들, 오합지졸처럼 보이는 병사들 등으로 혼란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총관리인인 베라크 후작은 샤를르 일행이 베르사이유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나가서 샤를르를 만나 베르사이유는 안전하지 못하니 다른 데로 가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사실상 그때 쯤해서 베르사이유 수비대는 혁명세력에 동조하여 모두 삼색의 휘장을 두르고 있었다. 샤를르는 트리아농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때가 새벽 다섯시였다. 그러나 트리아농도 안전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샤를르는 일행과 함께 베르사이유 서남쪽에 있는 랑부이예(Rambouillet)로 향하였다. 샤를르 일행이 랑부이예에 도착한 것은 자정 직전이었다.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는 바람에 그만큼 강행군이었다.
샤를르는 공식적으로 8월 2일에 양위문서에 서명하였다. 이에 의하면 샤를르는 왕세자인 앙굴렘 공작을 제쳐 놓고 손자를 총애하여서 손자인 앙리에게 양위한다고 선언했다. 앙리는 당시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왕세자인 앙굴렘 공작은 크게 분노하여 양위각서에 함께 서명하지 않겠다고 버텼지만 아버지 샤를르 10세의 뜻이 하도 완강해서 결국 서명하고 말았다. 그런데 의회 의원 중에서 샤를르를 추종하는 일부 사람들이 랑부이예까지 찾아와서 샤를르에게 '폐하 그러시면 안됩니다. 아니, 아직 어린 앙리에서 양위를 하다니요. 이 나라를 도탄에서 구한 것이 누구입니까? 통촉하시옵소서'라고 읍소하는 바람에 샤를르는 솔깃해서 얼마 후인 8월 9일에 '에 또! 지난 번에 서명한 양위각서는 무효이며 짐이 계속 프랑스의 국왕으로서 재임할 것이니 그렇게들 아시오'라고 선언했다. 양위각서에 서명한지 7일만의 일이었다. 그러는 중에 시민폭도들 1만 4천명이 샤를르를 잡아서 족치겠다고 하면서 랑부이예로 진격해 온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샤를르는 8월 16일에 영불해협을 정기 운항하는 우편선을 겨우 얻어 타고 영국으로 피난의 길을 떠날수 밖에 없었다. 당시 영국의 수상은 나폴레옹을 워털루 전투에서 물리친 웰링턴 공작이었다. 웰링턴 공작은 프랑스의 왕과 가족들이 갑자기 영국으로 건너오게 되지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겠는가?'라면서 내심 당황해 했다. 웰링턴 수상은 오는 사람들의 길을 막고서 그들을 되돌려 보낼수는 없으므로 일단 받아 들이기는 하되 왕족이니 뭐니하는 것들은 숨기고 일반 시민처럼 행세하도록 했다. 그래서 샤를르 10세 자신은 '폰티유 백작'이라는 가명을 썼고 다른 식구들도 모두 적당한 이름을 찾아서 신분을 감추었다. 아무튼 영국 사람들은 부르봉 왕가의 사람들을 별로 달갑게 맞이하지 않았다. 영국 사람들은 샤를르 일행이 런던에 도착할 때 일부러 샤를르를 환영한답시고 프랑스 혁명세력이 사용하는 삼색깃발을 흔들며 환영했다.
샤를르가 잠시 머물렀던 랑부이예의 샤토
샤를르가 영국으로 도망갔다는 소문이 나돌자 샤를르에게 돈을 빌려 주었던 빚쟁이들이 런던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샤를르가 주로 첫번 피난 때에 빌려 쓴 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를르의 식구들이 런던에서 궁색하지 않게 생활할수 있었던 것은 샤를르의 와이프가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런던의 은행에 상당액의 돈을 저금해 놓은 것이 있어서였다. 샤를르 일행은 처음에 도셋의 럴워스 카슬(Lulworth Castle)에서 지내도록 되었으나 얼마후에 저 멀리 북쪽의 에딘버러에 있는 홀리루드 궁전(Holyrood Palace)에서 지내도록 되었다. 그런데 며느리가 되는 베리 공작부인도 어찌어찌 하다가 에딘버러 인근의 리젠트 테라스(Regent Terrace)라는 곳에 살고 있었다. 문제는 샤를르와 베리 공작부인의 관계가 아주 서먹서먹했다는 데에 있었다. 베리 공작부인이 누구냐하면 샤를르의 둘째 아들로서 일찍 죽은 베리 공작의 미망인이었다. 즉, 샤를르의 둘째 며느리였다. 샤를르의 둘째 아들인 베리 공작(샤를르 페르디낭)과 베리 공작부인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앙리이며 샤를르는 손자인 앙리를 귀여워해서 랑부이예에 피난해 갔을 때에 앙리에게 양위까지 했다가 며칠 후에 그런 양위는 무효라고 주장했던 바이다. 그러니 앙리의 어머니인 베리 공작부인은 시아버지인 샤를르가 야속하다면서 '아니, 우리 앙리를 왕으로 만들어 놓은 지가 며칠이나 된다고 왕위에서 내려가라고 하시었소?'라면서 불만을 털어 놓았다. 샤를르는 영국에서 피난 생활을 하는 중에 둘째 며느리가 자기 아들 앙리의 왕위를 보장하라고 요구하자 처음에는 '무슨 얘기냐, 내가 결정한 사항인데 왜 말이 많으냐?'면서 말도 듣지 않았지만 둘째 며느리가 자꾸 불평을 털어 놓자 하는수 없이 앙리에게 곧 다시 양위를 해서 왕이 되는데 문제가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앙리의 어머니인 베리 공작부인은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는지 1831년에 영국을 떠나 네덜란드를 거쳐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를 지나 나폴리의 친정 집으로 돌아갔다.
샤를르 일행이 잠시 체류하였던 에딘버러 인근의 홀리루드 궁전
그런데 베리 공작부인도 좀 지나쳐서 '언제까지 샤를르의 말을 믿고 기다릴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나름대로 공작을 꾸미기 시작했다. 베리 공작부인은 친정인 나폴리를 떠나 1832년 4월에 프랑스 남부의 마르세이유에 도착해서 혁명정부를 뒤엎는 봉기를 꾸미디가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샤를르는 영국에서 며느리의 그런 소식을 듣고는 너무나 당황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며느리 때문에 왕권을 되찾는 것이 영 불가능 해 질리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더구나 당황스러운 것은 감옥에 갇혔던 베리 공작부인이 어떤 연줄을 동원했는지 하여튼 석방되었으며 곧 이어 나폴레옹을 추종하는 귀족인 루케시 팔리 백작이라는 사람과 재혼을 한 것이다. 샤를르는 그래도 일국의 왕의 며느리였는데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홀짝 재혼한 것을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왕족이 왕족이 아닌 사람과 결혼하면 왕족의 신분을 잃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샤를르는 그런 관점에서 베리 공작부인의 공작부인 호칭을 취소하고 또한 앙리를 비롯한 아이들은 절대로 만나지 못하도록 했다. 영국에 있던 샤를르 가족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란시스 1세의 배려로 프라하에 가서 지내게 되었다. 그래서 샤를르는 1832년 겨울부터 1833년 봄까지 프라하의 흐라드쉰(Hradschin) 궁전에서 지냈다. 1933년 9월에 부르봉 왕조의 주요 인물들이 프라하에서 앙리, 즉 보르도 공작의 13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모임을 가졌다. 재혼한 앙리의 어머니(과거에 베리 공작부인)도 프라하에 와서 아들의 생일을 축하코자 했으나 시아버지인 샤를르가 안된다고 해서 곤란한 입장에 있었다. 그러다가 부르봉 가족 중의 누가 샤를르에게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러 왔으니 한번 얼굴이라도 보게 해 주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느냐'고 설득하는 바람에 겨우 만나도록 허락했다. 베리 공작부인이 낳은 다른 아이들은 어머니가 재혼했다는 것을 알고 '우리 어머니 맞아?'라면서 아예 만나지 않았다.
고르치아의 스트라솔도 궁전. 샤를르와 식구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1835년 3월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란시스 1세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 프란시스 1세의 뒤를 이어 새로 황제가 된 페르디난드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대관식을 프라하의 흐라드쉰 궁전에서 갖고 싶어했다. 샤를르를 비롯한 부르봉 식구들은 더 이상 프라하에 머물기가 어려워서 온천장인 테플리츠(Teplitz)로 자리를 옮겼다. 페르디난드는 샤를르 일행이 자기 때문에 집을 내주고 다른 곳으로 갔다고 생각해서 미안한 나머지 프라하의 키르헨버그(Kirchenberg) 성을 구입하여 샤를르가 임시로나마 지내도록 했다. 그러나 갑자기 콜레라가 창궐하는 바람에 샤를르의 키르헨버그 입주는 계속 연기되었다. 샤를르는 프라하 일대의 날씨가 너무 추워서 자꾸 감기에 걸리자 지중해 쪽으로 내려가서 따듯하게 지내고 싶어했다. 그래서 1835년 10월에 더 이상 추워지기 전에 고르치아(Gorzia: Goertz))로 발길을 옮겼다. 고르치아는 당시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한 영토였으니 지금은 이탈리아에 속해 있는 지역이다. 샤를르는 고르치아에 왔지만 무슨 운명인지 그동안 걸리지 않던 콜레라에 걸렸고 약 한달 후인 11월 6일에 파란만장의 이 세상을 떠났다. 고르치아의 주민들은 참으로 착해서 샤를르의 서거를 애도하여 창문마다 검은 조기를 게양하였다. 샤를르의 시신은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인 코스타녜비카(Kostanjevica)의 성모수태고지 교회에 안치되었다. 지금의 슬로베니아 노바 고리차(Nova Gorica)가 그곳이다.
고르치아(현재의 슬로베니아 노바 고리차)에 있는 코스타녜비카 수도원 영묘의 샤를르 10세 석관과 아들 우이 19세의 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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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아 백작(Comte d'Artois)과 루이스 드 폴라스트론(Louise de Polast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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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6세의 막내 동생인 아르투아 백작(1755-1824)은 미인들을 사랑했다. 잘 생기기도 했지만 지위가 지위니 만치 마음이 가는 대로 여러 여인들과 애정행각을 가졌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단 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의 부인은 아니었다. 루이스 에스파르베 드 뤼상(Louise d'Esparbes de Lussan)이라는 여인이었다. 결혼해서 남편이 있는 부인이었다. 루이스는 1764년에 태어났으니까 아르투아 백작보다 아홉살 아래였다. 루이스의 어머니는 루이스가 태어난지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열두살 때까지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팡테몽(Panthemont) 수녀원으로 들어가서 5년 동안 지냈다. 루이스는 아름다운 나이인 17세 때에 수녀원 생활을 접고 집안에서 주선해 준대로 플라스트론 자작인 드니(Denis)와 결혼하게 되었다. 드니 드 폴라스트론은 가브리엘르 드 폴리냑(Gabrielle de Polignac)의 오빠였다. 가브리엘르 드 폴리냑은 마리 앙뚜아네트 왕비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가정교사였다. 가브리엘르 드 폴리냑은 루이스를 처음 만나자마자 수줍어하면서도 상냥하고 수수하면서도 매력이 있는 루이스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래서 왕비의 시녀(lady-in-waiting)가 되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로부터 루이스는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지내게 되었다. 가브리엘르 드 폴리냑은 루이스가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우린 언제나 같이 지내요. 나에게는 정말 동생과 같은 존재지요. 정말 사랑스러운 아가씨랍니다'라고 말하면서 기뻐했다. 그런 루이스가 가브리엘르 드 폴리냑의 오빠인 드니 드 폴라스트론과 결혼하게 되었다. 루이스는 마치 복덩어리와 같은 존재였다. 왜냐하면 루이스가 드니 드 폴라스트론과 결혼하자 남편인 드니 드 폴라스트론은 그렇게 바라던 대령으로 진급했기 때문이다. 다만, 신혼부부로서 미안한 것은 대령이 된 드니 드 폴라스트론이 연대를 지휘하기 위해 1년 동안 부대에 가서 지내야 했다.
아르투아 백작의 평생의 연인이었던 루이스 드 폴라스트론
가브리엘르 드 폴리냑은 결혼 한 후 남편과 헤어져 지내야 하는 루이스의 처지를 이해하고서 노느니 염불한다고 마리 앙뚜아네트 왕비의 시녀로 들어가게 주선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루이스는 처음에 궁정 생활을 한다는 것에 대하여 썩 내키지 않아 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가브리엘르 드 폴리냑은 마리 앙뚜아네트 왕비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왕자와 공주들의 가정교사였다. 그러니 귀족 집안 출신의 예쁘고 조신한 여인 한 사람을 왕비의 시녀가 되도록 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루이스는 그렇게 해서 베르사이유 궁전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처음으로 왕비를 만나서 인사를 드릴 때부터 실수 투성이어서 보는 사람들을 아주 민망하게 만들었다. 루이스는 새로 들어온 시녀로서 왕비에게 인사를 드리기 전에 여러가지 사전 교육을 받았다. 예를 들면 드레스는 되도록이면 화려한 것으로 입을 것, 머리의 가발에는 파우더를 많이 뿌릴 것 등등이었다. 물론 인사드리는 법 등 예절에 대하여도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다. 그런데 정작 왕비를 처음 만나서 인사를 드리게 되자 루이스는 마치 얼어붙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전에 교육 받은 것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 듯이 행동했다. 왕비가 매우 기쁜듯이 루이스에게 다가와서 가볍게 포옹하였는데도 그저 아무 말도 못하고 뻣뻣이 서 있기만 했다.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은 왕비를 모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로부터 궁정에서는 루이스에 대한 뒷말들이 많았으며 여자들은 루이스를 보고 일부러 피하기까지 했다. 아마도 저런 어리석고 무례한 여인과는 알고 지내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가브리엘르 드 폴리냑
그런데 남자 한 사람이 루이스에게 접근해서 따듯하게 말을 건네었다. 아르투아 백작이었다. 루이 16세의 동생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 왕비로서는 시동생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 배경에다가 잘 생기기까지 했다. 예쁜 여자들이라면 그저 한번쯤 품에 안지 않고는 못배기는 사람이었다. 아르투아 백작은 베르사이유의 카사노바로 이름나 있었다. 그런 그가 루이스를 한번 만나고서는 그만 푹 빠지고 말았다. 수줍어하면서도 부드럽고 지성적이며 조신한 루이스를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드니는 마담 드 폴리냑의 아파트에서 지내는 시간이 부쩍 많아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루이스와 가까워지고 싶어서였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아하 아르투아 백작이 이번에는 정 순진한 루이스를 유혹하려는가 보다'라면서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다만, 왕비는 시동생의 평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루이스를 조용히 불러서 아르투아 백작을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루이스는 아르투아 백작을 아주 점잖고 젠틀한 신사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왕비가 그렇게 얘기하자 믿으려 하지 않았다. 루이스는 너무나 순진해서 도대체 다르투아 백작이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도 못했다.
세월은 흘러서 어느덧 1년이 지났다. 연대에 들어가서 지내야만 했던 남편 드니 드 폴라스트론이 집으로 돌아왔다. 루이스는 임신을 하였고 얼마후 아들을 낳았다. 이름을 루이라고 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 왕비가 대부모가 되어 주었다. 루이스는 엄마가 되어서 아이를 기르는 것을 신이 허락한 은총으로 생각하여 너무 행복해 했다. 아르투아 백작은 그런 루이스를 보고 더욱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다. 마침내 아르투아 백작은 루이스에게 대단히 열정적인 러브레터를 보냈다. 편지를 받은 루이스는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 했다. 그리고 '어째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것일까'라면 절망하기도 했다. 루이스는 아르투아 백작의 러브레터를 정말 가까운 친구 몇 명에게 보여주고 도대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의견을 물어 보았다. 뾰족한 해결책이 없었다. 루이스는 마지막 방법으로 전에 자기에게 아르투아 백작을 조심하라고 충고해준 마리 앙뚜아네트 왕비에게 편지를 보여주고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가르쳐 달라고 간청했다. 왕비는 루이스에게 베르사이유를 떠나서 파리에 가서 남편과 함께 지내도록 하라고 조언하였다. 다만, 왕비의 시녀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을 때에만 베르사이유로 오라고 덧붙여 말해주었다.
루이스가 베르사이유를 떠나서 파리에 가서 살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르투아 백작은 대단히 상심하였다. 그런데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라고 말했다는데 아르투아 백작은 '내 사전에는 포기란 없다'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르투아는 모든 수단과 방법과 지혜를 동원해서 루이스를 만나는 일에 주력하였다. 한번은 아르투아는 루이스가 오페라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높은 가발을 쓰고 만토를 입고 변장하여서 오페라에 가서 루이스를 먼발치에서나마 보고 온 일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리 이상한 가발을 쓰고 이상한 옷을 입었어도 그가 아르투아 백작인 것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아는 체를 할 필요가 없었다. 아르투아 백작이 루이스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이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아르투아가 자기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남편을 배신하고 아르투아를 비밀리에 만나거나 편지를 주고 받는 일은 꿈에라도 생각하지 않았다. 루이스는 이처럼조신하고 성실한 부인이었으며 엄마였다. 아무튼 루이스는 아르투아와 관련된 어떠한 유혹도 피하기로 굳게 결심한 숙녀였다. 이러한 상태가 1789년 7월까지 지속되었다. 7월 혁명으로 아르투아와 마담 폴리냑은 모두 다른 나라로 피신을 해야 했다. 루이스와 가족들은 이탈리아의 토리노로 피난을 갔다. 루이스는 토리노에 있으면서 아르투아가 돈이 없어서 빈곤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루이스는 할아버지에게 결혼지참금을 주지 않은 것이 있으니 미안하지만 그것을 달라고 해서 돈을 들고 독일의 코블렌츠로 갔다. 루이스의 코블렌츠 도착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말할수 없는 센세이션을 일으켜 준 것이었다. 아르투아 자신도 자기의 눈을 믿을수 없을 정도였다. 아르투아는 파리를 떠나 독일로 피난을 가면서 다시는 루이스를 만나려고 하지 않겠다고 마음 속으로 굳게 결심했는데 그 루이스가 지금 자기의 눈 앞에 있으니 놀랄수 밖에 없었다.
아르투아는 자기의 어려움을 알고 도우려는 루이스의 갸륵한 마음씨에 깊이 감동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사람들이 자기와 루이스가 비밀스런 연인 사이라고 믿으면 어떻게 하나라고 걱정을 했다. 그런데 참으로 사람 일이란 알다가도 모를 것이어서 어느새 루이스는 아르투아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때 아르투아와 수행원들은 영국으로 건너가서 에딘버러의 홀리루드 궁에서 지내게 되었다. 루이스는 미리 에딘버러에 가서 아르투아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오니까 그때부터 아예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루이스와 아르투아의 사랑은 루이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슬픔을 안겨 주는 것이기도 했다. 루이스는 신앙심이 깊고 경건한 여인이었다. 그런 입장에서 그리고 기혼부인으로서 남편 이외의 다른 남자와 동거하고 있느니 그것은 양심에 거슬리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 루이스는 그 때문에 괴로워 하면서도 아르투아가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고 있으므로 행복을 느끼기도 했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 헤어져서 원점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루이스와 아르투아는 가끔 함께 런던에 가기도 했다. 아르투아는 런던에 가면 도박을 했다. 돈을 따서 생활비로 쓰고 빚도 갚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아르투아는 여러 식솔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생활비가 부족해서 힘들게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런던에서의 도박이 항상 운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어서 괴로움은 심해가기만 했다.
그러던중 1804년에 루이스의 사촌인 마담 드 공토(Madame de Gontaut)라는 여인이 루이스를 못본지 한참이나 되어서 에딘버러로 찾아왔다가 루이스의 건강이 아무래도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루이스는 얼굴이 창백했고 기침을 자주 했다. 하지만 참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였고 아르투아 자신도 루이스의 병세를 알지 못했다. 마담 드 공토는 급히 런던에 연락에서 왕실 주치의를 오라고 했다. 의사는 폐결핵이라고 진단했다.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르투아는 너무나 상심하여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루이스는 휴식과 안정이 필요했다. 마담 드 공토는 루이스를 위해서 시골에 작은 집 한채를 마련했다. 그러나 루이스는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했다. 항상 죄의식 때문이었다. 마침내 신부님을 모셔와서 고해성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신부는 루이스에게 아르투아를 떠나서 다시는 함께 있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하나님은 그대의 죄를 모두 용서하신다'라고 말해 주었다. 루이스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마지막으로 한번만 아르투아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아르투아는 말할수 없이 상심하여서 더 이상 루이스의 옆에 있지를 못하고 홀리루드 궁으로 돌아갔다. 아르투아는 1주일 후에 다시 루이스를 찾아왔다. 루이스는 이제 임종을 앞두고 있었다. 루이스는 아르투아에게 오직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맡기라고 부탁했다. 아르투아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말을 들은 루이스는 그제야 마음의 평화를 얻은듯 숨을 거두었다. 루이스가 세상을 떠난 후, 아르투아는 자기의 방탕했던 생활을 크게 참회하고 그후부터는 평생동안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자선활동에 전념하였다.
아르투아 백작. 나중에 샤를르 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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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의 부르봉 왕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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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163801715). 네 아들을 두었으니
- 루이(Grande Dauphin)(1661-1711)
- 루이(Comte de Vermandois)
- 루이 오귀스트(Duc de Maine)
- 루이 알렉산드르(Comte de Toulouse)
그런데 왕세자로 책봉된 루이(그랑 도팽)이 루이 14세보다 먼저 서거. 그랑 도팽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 루이(Le Petit Dauphin)(1682-1712)
- 필립(de Spain)
- 샤를르(Duc de Berr)였다.
그중에서 큰 아들 프티 도팽이라고 불리는 루이가 왕세자가 되었으나 역시 할아버지 루이 14세보다 먼저 서거. 프리 도팽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 루이(Duc de Brittany)
- 루이(1710-1774)였다.
그런데 큰 아들인 브리타니 공작 루이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둘째 아들 루이가 루이 15세로서 왕이 되었다. 루이 15세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 루이(왕세자)
- 필립(Duc d'Anjou)였다.
큰아들 루이는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아버지 루이 15세보다 먼저 서거. 큰 아들 루이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 루이(Duc de Burgundy)
- 루이 오귀스트(나중에 루이 16세)
- 루이 스타니슬라스 사비에(나중에 루이 18세)
- 샤를르 필립(나중에 샤를르 10세)였다.
큰 아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둘째 아들인 루이 오귀스트가 루이 16세로서 왕이 되었고 마리 앙뚜아네트와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둘째 아들이 어린 나이에 루이 17세가 되었으나 1년도 지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삼촌이 루이 스타니슬라스 사비에가 루이 18세가 되었고 이어 그에게도 후사가 없어서 루이 18세의 동생인 샤를르 필립이 샤를르 10세로서 왕이 되었던 것이다.
샤를르 10세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 루이 앙투앙(1775-1844). 나중에 루이 19세로서 불린 사람인데 샤를르 10세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 샤를르 페르디낭(Duke of Berry). 형이 세상을 떠나자 왕세자가 되었고 그도 세상을 떠나자 유복자로 태어난 샹보르 백작 앙리가 앙리 5세로서 프랑스의 왕이 되었다. 이렇게 적어 놓아도 무어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이 통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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