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집중탐구 150편

59. 자코모 마이에르베르의 '위그노'(Les Huguenots)

정준극 2016. 9. 3. 12:06

위그노(Les Huguenots) - The Huguenots - 레 위그노

자코모 마이에르베르의 5막 그랜드 오페라

1572년 성바르톨로메 대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가톨릭과 개신교의 반목 중에 꽃피는 사랑 이야기


자코모 마이에르베르


위그노(Huguenot)는 16세기에 프랑스에서 성장한 개신교(프로테스탄트)를 말한다. 잘 아는 대로 1517년 마르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이어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로마 가톨릭를 거부하는 개신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칼빈에 의한 새로운 신앙운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16세기 중반부터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는 칼빈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가톨릭을 단호히 거부하는 개신교가 발전하게 되었으니 이들을 위그노라고 불렀다. 위그노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볼테르 등 계몽주의자들이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을 독일어의 Eidgenosse, 즉 연합(Confederate)을 의미하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 바탕이라는 설명이다. 독일어의 Eidgenosse가 Huguenot로 변천한 것은 Eidgenosse를 잘못 표기해서 Eignot가 되었고 그것이 발전하여서 Huegnot가 되었다는 얘기다. 프랑스에서 위그노라는 단어는 기록에 의하면 1560년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프랑스는 원래부터 로마 가톨릭이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의 여파로 프랑스에서도 개신교가 일어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극단적인 박해를 펼쳤다. 가장 대표적인 박해가 1572년 8월 24일 성바르톨로뮤 축일을 기하여 주로 파리에서 가톨릭 세력이 위그노 교도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종교적인 이유를 떠나서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성바르톨로메오 축일에 파리에서만 약 3천명의 위그노 교도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위그노 교도들의 재산피해도 막대하였다.


성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 그림


자코모 마이에르베르(Giacomo Meyerbeer: 1791-1864)는 성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 사건이 일어난지 2백 60여년이 지난 때에 가톨릭 귀부인과 위그노 귀족과의 사이에서 피어난 아름답고도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를 내용으로 삼아 오페라를 만들었으니 바로 '위그노'이다. 마이에르베르의 '위그노'는 전 5막으로 구성된 대하장편 오페라이다. 공연시간이 무려 3시간 반 이상이 걸린다. 그렇지만 음악이 뛰어나기 때문에 전편을 통해서 지루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대본도 뛰어나서 많은 감동을 갖게 해준다. 대본은 당대의 대본가인 외진 스크리브(Eugene Scribe: 1791-1861)와 저명한 시인인 에밀 드샹(Emile Deschamps: 1791-1871)이 공동으로 완성했다. 외진 스크리브는 수많은 오페라 대본을 완성한 사람인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대본 몇 가지를 들어보면 부엘듀의 '하얀 옷의 여인', 오버의 '프라 디아블로', 역시 오버의 '구스타브 3세', 알레비의 '유태여인', 도니체티의 '돈 세바스티앙', 베르디의 '시실리의 저녁기도', 그리고 마이에르베르를 위해서는 '위그노'를 비롯해서 '예언자, '아프리카 여인'의 대본을 썼다. 에밀 드샹은 베를리오즈의 오라토리오 '로미오와 줄리에트'의 대본을 쓴 이외에도 외진 스크리브와 공동으로 '위그노', '예언자'의 대본을 써서 음악사에서 기억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마이에르베르, 스크리브, 드샹 이상 세 사람이 모두 1791년에 태어났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겠지만 흥미있는 일이다. 음악의 역사에서 1791년이라고 하면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바로 그 해이다. 그 해에 세 사람이 태어난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스크리브와 드샹은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마이에르베르는 프러시아의 베를린 인근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대본을 쓴 외진 스크리브와 에밀 드샹


마이에르베르가 '위그노'를 작곡한 것은 파리 오페라의 권유때문이었다. 당시 파리 오페라 단장인 루이 데지레 베롱(Louis-Desire Veron)은 변호사로서 오페라에 조예가 깊은 아돌프 그레뮤(Adolphe Cremieux)의 간곡한 제안으로 '위그노'를 내용으로 삼는 오페라로 만들기로 했으며 작곡은 당시 오페라 '악마 로베르'(Robert le diable)로서 대성공을 거둔 마이에르베르에게 의뢰키로 결정했던 것이다. 마이에르베르는 '위그노'를 완성하기 위해 5년이란 세월을 투자했다. 그만큼 대작을 만들고자 했다. 마이에르베르는 '악마 로베르'보다 더 웅장하고 더 화려한 무대를 만들고자 했다. 말하자면 더 사치스러운 무대를 만들고자 했다. '위그노'는 과연 지금까지 볼수 없었던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전형이었다. 무대는 그렇다고 치고 스토리도 대단히 드라마틱했다. 멜로드라마적인 요소가 풍부한 스토리였다. 오케스트라의 음악은 깊은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아리아 또는 앙상블은 매우 수준이 높은 기교를 필요로 하는 고난도의 것이어서 오페라 팬들을 매료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요건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었다. 여기에 또 한가지 추가된 것이 있다.마이에르베르의 완벽주의였다. 자기만의 색채가 있는 오페라를 완벽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마이에르베르가 '위그노'를 작곡 중에 있을 때에 파리에서는 비슷한 세팅의 오페라가 공연되고 있었다. 페르디낭 에롤드의 Le pre aux clercs(사제의 들판)라는 오페라였다. 이 역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다만, 지금은 아쉽게도 잊혀져 있다.


'위그노'는 1836년 2월 29일 파리 오페라에서 초연되었다. 하필이면 2월 29일이었다. 위대한 작곡가 로시니의 생일을 기념하여서인지 모르겠다. '위그노'는 초연부터 대성공이었다. 5막이나 되는 장시간 공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무대장치에 매료되고 음악에 매료되었으며 스토리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나중에 엑토르 베를리오즈는 '위그노'를 '음악적 백과사전'이라며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유명한 평론가인 아서 엘슨(Arthur Elson)도 1901년에 '위그노'는 지극히 아름다운 수많은 파사지(악절)를 포함하고 있는 작품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예를 들면 마르셀의 전투노래(Piff Paff), 정워에서의 밝고 즐거운 장면, 위그노 병사들의 진군 합창인 라타플란(Rataplan: 진군 북소리), 병사들의 장검(Poignard)에 대한 대단히 인상적인 축복기도 노래 등이다. 그중에서도 라울이 발렌틴에게 작별을 고하는 장면의 음악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클라이막스로서 남아 있다. 그러나 이렇듯 감동적이고 인상적인 음악들이 있다고 해도 '위그노'는 20세기 초반에 들어와서 무대에서 사라지기 시작했고 오늘날 스탠다드 레퍼토리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우선 제작비가 막대하기 때문에 리바이발을 주저한다는 것이다. 어떤 오페라는 무대 장치가 거의 필요 없어서 제작비가 별로 들지 않는데 '위그노'는 무대장치 등 비용이 엄청나게 들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한다. 또 다른 이유는 주연급 성악가들을 한꺼번에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이다. '위그노'를 공연하려면 정상급 소프라노 2명, 메조소프라노 1명, 테너 1명, 바리톤 2명, 베이스 1명이 필요하다. 게다가 테너 파트인 라울의 역할은 모든 오페라의 테너 역할 중에서 가장 힘든 역할의 하나라고 볼수 있다. 라울은 장시간에 걸친 전5막에 모두 등장해야 한다. 그리고 라울의 아리아들은 대단히 고난도의 기교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 여기에 어려운 고음을 자주 내야 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아무리 테크닉이 있는 테너라고 해도 마이에르베르의 작곡 의도를 충분히 살려서 장시간에 걸쳐서 우아하고 감성적인 음성을 유지하해야 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테너 주인공은 전공연을 통해 스태미나가 있어야 하며 뛰어난 테크닉이 있어야 한다.


1840년대 브뤼셀에서 공연된 '위그노'의 무대 스케치


초연에서 여주인공 발렌틴의 역할을 맡은 소프라노 코르넬리 팔콘(Cornelie Falcon)과 남주인공 라울의 역할을 맡은 테너 아돌프 누리(Adolphe Nourrit)는 뛰어난 음성과 연기로서 평론가들로부터 대찬사를 받았다. 소프라노 코르넬리 팔콘으로서는 '위그노'의 초연이 사실상 그의 경력을 마무리하는 중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위그노' 이후 목소리가 갑자기 나빠져서 더 이상 오페라에 출연할수 없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위그노'가 어찌나 성공을 거두었던지 파리 오페라에서 초연을 가진 이래 70년 동안 파리 오페라에서만 1천번 공연을 기록한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1천번째 공연은 1906년 5월 16일이었다. '위그노'는 1천회 공연을 기록한 후에도 계속 공연되었다. 계속된 공연의 마지막은 1936년이었다. 독일에서 나치가 기승을 부렸고 프랑스의 정세가 흉흉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근년에 있어서 호주의 세계적 소프라노인 조앤 서덜랜드(Joan Sutherland)와 유명한 지휘자인 리챠드 보닝(Richard Bonynge)은 '위그노'의 부흥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인물들로 기억되고 있다. 한시대를 풍미하다가 2010년에 스위스에서 세상을 떠난 조앤 서덜랜드는 '위그노'에서의 마르게르트 드 발루아의 역할을 너무너 훌륭하게 수행하여서 마치 마르게리트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리챠드 보닝은 실제로는 조앤 서덜랜드의 부군으로서 '위그노'의 해석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그가 지휘한 연주가 마치 '위그노'의 모법답안처럼 되어 있을 정도이다. 조앤 서덜랜드가 1990년 10월에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고별공연을 했을 때 맡은 역할이 마르게리트였다. 물론 리챠드 보닝이 오페라 오스트레일리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공연이었다.


파리 오페라에서의 마이에르베르 그랜드 오페라 공연 스케치.


'위그노'는 파리에서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대성공을 거두며 공연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그노'를 19세기에 가장 성공을 거둔 오페라의 하나라면서 찬사를 보냈다. 미국 초연은 프랑스어 지역인 뉴올리언스에서 1839년 4월이었다. 런던 초연은 그보다 3년 후인 1842년 6월 코벤트 가든에서였다. 한편, '위그노'란 제목이 종교적으로 예민한 면이 있어서 일부 국가에서는 제목을 바꾸어서 첫공연을 가졌다. 비엔나에서는 '귈프와 기벨린'(The Guelfs and the Ghibellines)이라는 제목이었고 로마에서는 '크뢴발트의 레나토'(Renato di Croenwald)라는 제목이었으며 독일의 뮌헨에서는 '영국성공회교도와 청교도'(The Anglicans and the Puritans)라는 제목이었다. 귈프와 기벨린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신성로마제국의 영주들과 독일을 중심으로 한 신생 중산층인 상인계급과의 갈등을 표현한 내용이다. 비엔나가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그런 내용으로 바꾼 것이다. 프랑스에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인 위그노의 갈등을 영국에서는 성공회와 청교도와의 갈등으로 비유하여 대본을 고친 공연이었다. 소련에서는 음악은 그대로 두고 대본은 새롭게 바꾸어서 공연했다. 새로운 대본은 역사적 사건인 '12월 봉기'를 내용으로 삼았다. '12월 봉기'는 1825년 12월 26일에 러시아 혁명가들이 일으킨 무장 봉기를 말한다. 이때 봉기를 주도했던 사람들을 '12월 당원'이라고 불렀으며 러시아어로는 데카브리스티(Dekabristi)라고 했다. 비록 혁명은 실패했지만 '12월 당원'들의 순교는 러시아의 암담한 현실에 불만을 품은 다음 세대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것이었다. 소련은 그런 내용이 아마도 프랑스의 '위그노' 사건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위그노'는 1858년 런던 코벤트 가든의 현재 극장이 새로 오프닝을 가졌을 때 기념공연되었다. 1890년대에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에서 공연되었을 때에는 '위그노'를 '일곱 스타들의 밤'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당대의 초호화 일급 성악가들 일곱명이 동시에 무대를 장식하는 대공연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당대의 릴리안 노르디카(Lilian Nordica), 넬리 멜바(Nellie Melba), 소피아 스칼키(Sofia Scalchi), 장 드 레츠케(Jean de Reszke), 에두아르 드 레츠케(Edouard de Reszke), 빅토르 모렐(Victor Maurel), 폴 플랑송(Pol Plancon)이었다.


1858년 런던 여왕폐하극장에서의 '위그노'공연 스케치. 성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 장면


근자에 이르러 '위그노'는 그나마 주로 콘서트로서 공연되는 경향이지만 그런 중에도 유럽의 일부 극장에서는 과감하게 리바이발을 추진하여서 오페라 애호가들을 기쁘게 만들었다. 1974년에는 라이프치히에서 공연되었고 1999년에는 런던의 로열 오페라, 그리고 빌바오(Bilbao)에서 공연되었으며 2004년에는 메츠(Metz), 2005년에는 리에즈(Liege), 2011년에는 브뤼셀에서 공연되었고 2012년에는 오패라 뒤 랭(Opera du Rhin)이 스트라스부르(Strassbourg)에서 공연하였다. 1975년에 뉴올리언즈에서 공연된 것은 마리사 갈바니(Marisa Galvany), 리타 셰인(Rita Shane), 수잔느 마르세(Susanne Marsee), 엔리코 디 주세페(Enrico Di Giuseppe), 도미니크 코사(Dominic Cossa), 파울 플리스카(Paul Plishka)의 스타급 성악가들이 주역을 맡은 대서사시적인 것이었다. 뉴욕의 아난데일 언 허드슨(Anandale-on-Hudson)에서 열리는 바드 섬머스케이프(Bard SummerScape)는 2009년에 '위그노' 전막을 제작한 일도 있다. 가장 최근의 공연은 2014년 뉘른베르크 슈타츠테아터(Staatstheater)에서였다. 오페라 드 니스(Opera de Nice)와 공동제작한 공연이었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마르게리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 S). 나바르(Navarre)의 왕비

- 발렌틴(Valentine: S). 생브리 백작의 딸. 개신교도인 라울과 사랑하는 사이

- 라울 드 낭지스(Raoul de Nangis: T). 개신교 귀족. 우연히 발렌틴을 만나 깊이 사랑하게 됨.

- 위르뱅(Urbain: S). 마르게리트 왕비의 시종. 바지역할

- 마르셀(Marcel: B). 라울의 늙은 하인. 위그노의 노병. 가톨릭과의 전투에서 앞장서는 독실한 위그노.

- 네브르 백작(Le comte de Neveres: Bar). 가톨릭 귀족. 발렌틴과 약혼했으나 왕비의 권고로 파혼.

- 생브리 백작(Le comte de Saint-Bris: Bar). 가톨릭 귀족. 발렌틴의 아버지

- 부아 로제(Bois-Rose: T). 위그노 병사

- 모르베르(Maurevert: Bar). 타반느(Tavannes: T). 코쎄(Cosse: T), 토레(Thore: T), 드 레츠(De Retz: Bar), 메뤼(Meru: Bar). 가톨릭 귀족들

- 레오나르(Leonard: T). 네브르 백작의 시종


 

'위그노'의 1836년 파리 초연에서 발렌틴을 맡은 소프라노 코르넬리 팔콘, 라울을 맡은 테너 아돌프 누리, 마르게리트 드 발루아를 맡은 소프라노 줄리 도러스 그라스(왼쪽으로부터)


스토리는 1572년 일어난 성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을 정점으로 하고 있다. 이날 수천명의 프랑스 개신교도(위그노)들이 카돌릭 교도들에 의해 학살을 당하였다. 프랑스의 가톨릭은 위그노가 프랑스의 개신교에 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워해서 그런 만행을 저질렀다. 성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은 프랑스 개신교와 가톨릭의 반목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이지만 오페라에서는 오히려 그보다는 위그노인 라울과 가톨릭인 발렌틴의 사랑이야기를 중점으로 삼고 있다. 당시 프랑스의 왕은 샤를르 9세였다. 모후인 메디치의 캐서린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을 진정시키기 위한 정치적 제스추어로서 자기의 딸 마르게리트 드 발루아와 개신교 리더인 나바르의 앙리와의 결혼을 주선하였다. 이야기는 그로부터 시작된다. 막이 오르기 전에 비교적 짧은 전주곡이 연주된다. 짧기 때문에 서곡이 아니라 전주곡이다. 마이에르베르는 원래 별도의 서곡을 생각했으나 극적인 효과를 더하기 위해 간단한 전주곡으로 대체했다고 한다. 전주곡에서는 전투를 암시하는 둥둥 북소리와 함께 마르틴 루터가 작곡한 '내 주는 강한 성'(Ein feste Burg: A Mighty Fortress is Our God)이 여러 템포로서 연주된다. '내 주는 강한 성'은 개신교, 즉 위그노들을 상징하는 멜로디이며 노병으로서 독실한 위그노인 마르셀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마르게리트 드 발루아의 조앤 서덜랜드


[1막] 1572년 8월, 투랭(Touraine)에 있는 네브르 백작의 성이다. 투랭은 파리에서 서쪽으로 한시간 거리에 있는 지역이다. 투랭지방의 중심도시는 투르(Tours)이며 또한 역사적 도시인 시농(Chinon)도 투랭에 속한다. 시농은 일찍이 1429년에 잔다크가 미래의 프랑스 왕이 될 샤를르 7세를 처음 대면한 곳으로 유명하다. 투랭 지역은 파리에서 가깝기 때문에 과거에 여러 프랑스 왕들이 저택을 가지고 살던 지역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정원의 유명한 샤토들이 많아서 '프랑스의 정원'이라는 별명을 듣고 있는 곳이다. 라울과 발렌틴이 숙명처럼 처음 만난 앙부아성도 투랭 지역에 있다. 네브르 백작은 궁정에서도 무시하지 못하는 귀족으로서 가톨릭 귀족들의 리더나 마찬가지인 사람이다. 그리고 비록 가톨릭이지만 프랑스의 평화를 위해서 위그노와의 화합을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다. 막이 열리자 네브르 백작이 가톨릭 귀족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고 있다. 이들이 부르는 합창이 흥겹다. 마치 축배의 노래(브린디시)를 연상케 하는 합창이다. '우리의 젊은 시절을 즐겁게 보내자 모든 것을 잊어도 즐거움만은 잊지 말자'라는 내용이다. 네브르 백작은 연회에 참석한 가톨릭 귀족들에게 이제 손님이 한분 오실 터인데 위그노 귀족이므로 가톨릭으로서 관용을 베풀어서 환대하자고 말한다. 이윽고 낭지스의 라울이 소개된다. 낭지스는 파리 북쪽에 있는 지역이다. 모두들 와인과 여인을 찬양하는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며 자기들의 애인(정부)을 위해 축배를 든다. 당시에는 웬만한 귀족이라면 부인 이외에 정부가 있는 것이 관례였다. 네브르 백작은 라울에게 '그대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그 여인을 위해 축배를 함께 들자'고 권면한다. 라울은 자기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없으며 다만 며칠 전에 우연히 만난 미지의 여인을 깊이 사모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라울이 천사와 같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그 여인을 만나게 된 사연을 아리아로 부른다. 고음과 뛰어난 테크닉을 필요로 하는 아리아이다. 비올라의 반주가 대단히 로맨틱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노래이다. 라울은 그 여인을 앙부아의 거리를 거닐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마침 마차에 타고 있던 어떤 여인이 못되고 거친 학생들에 에워싸여서 곤혹을 치루고 있을 때에 라울이 구출해 주었다는 것이다. 라울의 아리아가 Plus blanche que la blanch hermine이라는 가사의 노래이다.


라울의 하인인 마르셀이 가톨릭 귀족들이 모임을 갖는다고 하자 무슨 음모들을 꾸미는지 궁금해서 연회 장소에 모습을 보인다. 마르셀은 자기의 주인인 라울이 가톨릭 귀족들과 어울려 있는 것을 보고 놀란다. 마르셀은 가톨릭 귀족들의 연회에서 즐거워하고 있는 라울에게 악한 가톨릭과 자리를 함께 하지 말라는 경고하는 노래를 부른다. 루터의 '내 주는 강한 성'의 멜로디를 주제로 삼은 노래이다. 그때 가톨릭 귀족 중의 한 사람인 코세가 마르셀을 알아보고 얼마전 가톨릭과 위그노의 라 로셀르(La Rochelle) 전투에서 마르셀이 자기의 얼굴에 지을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을 상기시킨다. 마르셀은 마치 라 로셀르 전투에서 위그노가 승리한 것을 상기하려는 듯 자기가 코세의 얼굴에 상처를 남긴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인정한다. 코세는 비록 원수이지만 관용의 마음으로 마르셀에게 포도주를 권한다. 하지만 마르셀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거절하며 대신에 교황을 공격하는 내용인 위그노의 군가 '피프 파프'(Piff paff)를 부른다. 종전의 전투에서 가톨릭을 격파한 영광의 노래이지만 가톨릭을 조롱하는 내용이 포함된 노래이다.


잠시후 어떤 여인의 네브르 백작을 찾아와서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가 전달된다. 연회를 하고 있던 가톨릭 귀족들은 네브르 백작을 찾아왔다는 여인이 네브르 백작의 또 다른 애인(정부)라고 짐작하며 누구인지 궁금해 한다. 가톨릭 귀족들은 라울에게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여인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몰래 훔쳐 보자고 권유한다. 라울은 어쩔수 없이 문틈으로 정원의 여인을 보다가 그 여인이 자기가 꿈속에서 사모하던 여인인 것을 알고 깜짝 놀란다. 라울은 그 여인이 네브르 백작의 정부라고 짐작하여서 자기와 사랑을 약속했던 것을 생각하고 배반을 느껴서 복수를 다짐한다. 네브르 백작이 연회장소로 돌아와서 라울에게 그 여인은 왕비가 보호자로 되어 있는 발렌틴으로서 자기의 약혼자인데 왕비의 생각에 의해서 자기와의 약혼을 취소해 달라고 간청하러 온 것이며 왕비의 생각이 그러하므로 어쩔수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는 얘기를 해 준다. 왕비의 시종인 위르뱅이 등장해서 어떤 고귀한 여인으로부터의 메시지를 전하러 왔다고 말한다. 위르뱅의 아리아가 Nobles seigneurs, salut! 이다. 모두들 어떤 귀부인의 메시지를 네브르 백작에게 전하는 것으로 알았으나 위르뱅은 실은 라울에게 전하는 메시지라고 밝힌다. 위르뱅은 라울에게 고귀한 부인을 만나야 하지만 아직은 누구인지 비밀이므로 라울의 눈을 가린채 가야 한다고 말한다. 라울은 이것도 가톨릭 귀족들의 장난의 하나라고 생각해서 머뭇거리지만 일단 위르뱅의 지시에 따라 눈을 가린채 따라가기로 결심한다. 그때 네브르 백작과 귀족들은 위르뱅이 들고온 초대장에서 왕의 여동생인 마르게리트 드 발루아의 인장이 찍한 것을 발견하고서는 라울이 그런 고귀한 여인으로부터 초대를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라울을 존경하는 마음을 가진다.


[2막] 투랭에 있는 마르게리트 드 발루아 공주의 성인 샤토 드 슈농소(Chateau de Chenonceaux)의 정원이 무대이다. 마르게리트는 라울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시골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O beau pays de la Touraine!(오 아름다운 투랭의 땅!)이다. 대단한 기교를 요하는 아름다운 아리아이다. 마르게리트가 라울을 만나고자 한 것은 가톨릭인 생브리 백작의 딸 발렌틴과 라울과의 결혼을 주선하고 싶어서이다. 마르게리트 공주는 어머니 캬트리느 모후의 심정처럼 라울과 발렌틴의 결혼으로 기톨릭과 위그노의 내전을 방지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발렌틴을 미리 불러서 네브르 백작과의 혼사를 파기하라고 주문했던 것이고 발렌틴은 마르게리트의 권유를 따르기로 해서 네브르 백작의 저택을 찾아가서 파혼의 의사를 전하였던 것이다.


위르뱅이 라울을 눈을 가린채 데려오자 마르게리트와 함께 있던 귀부인들과 시녀들이 라울의 모습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이 놀린다. 마르게리트는 시녀들에게 라울과 단 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한다. 마르게리트는 라울에게 자기가 주선한 가톨릭 여인과의 결혼을 종용한다. 라울은 마르게리트의 권유대로 결혼하겠다고 약속한다. 마르게리트는 발렌틴을 마음에 두고 그런 제안을 한 것이지만 라울이 이미 발렌틴을 만났던 사실은 알지 못한다. 라울 역시 마르게리트가 설마 발렌틴과의 결혼을 주선하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라울을 마르게리트가 가톨릭과 위그노의 갈등을 종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에 깊이 감동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서약한다. 두 사람의 듀엣이 매우 인상적이다.


잠시후 가톨릭 궁정인들과 개신교 궁정인들이 도착한다. 왕의 이름으로 마르게리트에게 서한이 전달된다. 가톨릭 궁정인들은 중요한 일이 있으니 파리로 돌아오라는 내용이다. 가톨릭 궁정인들이 파리로 돌아가려 하자 마르게리트는 그 전에 양측으로부터 영원한 우정과 평화를 지키겠다는 서약을 받는다. 생브리 백작이 딸 발렌틴을 데리고 도착한다. 라울은 발렌틴이 자기가 사모하고 있는 바로 그 여인이지만 네브르 백작과의 결혼이 예정되어 있는 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라울은 발렌틴이 네브르 백작의 정부가 틀림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마르게리트가 발렌틴과의 결혼을 제안하자 분노에 차서 그렇게 할수 없다고 거절한다. 가톨릭 궁정인들은 내용도 알지 못하고서 라울이 미치지 않고서는 감히 마르게리트 공주의 주선을 거절할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톨릭 궁정인들은 라울로부터 말할수 없는 모욕을 당했다고 믿어서 피의 복수를 맹세한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마르셀은 하나님의 보호를 간구한다. 


[3막] 세이느 강 좌안에 있는 프레 오 클레르(Pre aux Clercs) 지역이다. 파리 근교의 프레 오 클레르는 연인들의 랑데부 장소로서, 그리고 결투장소로서 유명한 곳이다. 번화한 거리의 모습이다. 시민들, 병사들, 학생들, 교회가는 사람들, 집시들로 혼잡하다. 일단의 위그노들이 마치 전투에 나가는 사람들처럼 '라타플란'(Rataplan)을 아 카펠라로서 힘차게 부르고 있다. 그들의 지도자인 콜리니(Coligny)제독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여기에서 콜리니 제독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콜리니 제독(또는 장군)은 스페인이 저지대지방(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독립운동을 탄압하자 스페인에 대항하여 저지대 나라들을 지원했다. 이같은 지원은 저지대 나라들에서의 내란을 막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스페인에 항거하는 저지대 나라들을 지원하는 것은 실상 프랑스 국왕인 샤를르 9세도 승인하려던 계획이었다. 그러는 중에 샤를르 9세의 어머니인 메디치 가문의 캬트리느(캐서린)는 국왕에 대한 콜리니 장군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두려워해서, 즉 위그노의 세력이 커질 것을 우려해서 가톨릭인 기즈 가문 사람들을 부추켜서 콜리니 장군을 암살하는 음모를 승인해 주었다. 캬트리느 모후가 기즈 가와 결탁한 것은 콜리니 장군이 1563년에 기즈 가의 프랑수아를 살해한데 대한 책임이 있다고 믿어서 복수를 다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1572년 8월 18일 캬트리느 모후의 딸 마르게리트(마르게리트 드 발루아)와 위그노였던 나바라의 엔리케(훗날 프랑스의 앙리 4세)가 결혼하게 되어 많은 위그노 귀족들이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로 왔다. 그로부터 4일 후 콜리니 장군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콜리니 장군은 다행히 상처만 입는데 그쳤다. 위그노들이 크게 흥분했다. 정부는 위그노들을 달래기 위해 콜리니 장군에 대한 암살음모를 조사키로 했다. 캬트리느 모후는 자기가 이 사건에 연루된 사실이 탄로나면 크게 낭패이므로 일단의 가톨릭 귀족들과 은밀히 만나서 당시 결혼식 축하행사를 위해 파리에 머물고 있던 위그노 지도자들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샤를 9세를 설득해 이 계획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리하여 결국 8월 24일 동트기 직전 생제르맹 로세루아의 종이 울리자 학살이 시작되었다. 최초의 희생자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콜리니 장군이었는데 그는 기즈가의 사람들이 직접 지켜보는 가운데 살해당했다.


위그노들이 가톨릭의 핍박에서 구원해 달라고 간구하는 장면


그건 그렇고, 위그노들이 라타플란을 부르며 행진하는 것에 이어 가톨릭 수녀들의 '아베 마리아'가 뒤따른다. 가톨릭의 수녀들은 발렌틴과 네브르 백작의 결혼을 미리 축하하기 위해 아베 마리아를 부르며 등장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톨릭 사람들, 특히 생 브리 백작 측의 사람들은 발렌틴과 라울과의 결혼이 얘기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생 브리 백작 측의 사람들이 결혼준비를 위해 나타하자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위그노의 마르셀이 생브리 백작 앞에 다가서서 무례한 태도로 대한다. 생 브리 백작 측의 사람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칼을 빼어들어 결투를 하려고 할 때에 마침 한 떼의 집시들이 나타나서 춤을 추는 바람에 싸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마르게리특다 도착해서 발렌틴과 네브르 백작의 결혼식을 주관한다. 마르게리트는 라울이 발렌틴과의 결혼을 거절하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원래 대로의 결혼을 허락한 것이다. 결혼식을 마친 네브르 백작과 발렌틴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퍼레이드를 벌인다. 그러나 발렌틴의 마음은 온전치 못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한데 대한 절망감 때문이다. 발렌틴은 교회에 그대로 남아서 성모에게 자기의 갈길을 인도해 달라고 기도한다. 생브리 백작은 위그노인 라울이 자기의 딸인 발렌틴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라울로부터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해서 라울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바로 그날 밤에 결투를 하자는 전갈이다. 생브리 백작은 당장 칼을 뽑아 들고 라울을 죽일 생각을 한다. 그러나 마침 그때 야경꾼의 통행금지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라울을 죽일 생각을 미룬다.(다른 버전에서는 라울이 먼저 생브리 백작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야경꾼의 외침은 마치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장면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생브리 백작의 친구인 모르베르는 라울과 결투를 하다가 잘 못되어서 실수할 수도 있으므로 다른 방법으로 라울을 처리할수 있다고 말한다. 라울을 암살한다는 것이다. 생브리 백작과 다른 사람들은 교회로 들어가서 세밀한 계획을 짠다. 발렌틴이 이들의 음모를 엿듣는다. 발렌틴은 비록 라울이 자기를 거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에 라울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알려주러 달려간다.  그러나 라울은 이미 생브리 백작과의 결투를 위해 결투 장소로 떠난 후이다. 발렌틴은 가톨릭의 음모를 마르셀에게 얘기해준다. 라울의 충복인 마르셀은 만일 주인인 라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대가를 반드시 치루도록 하겠다고 맹세한다.


위그노의 중심 인물들이 도착한다. 그러나 마르셀이 주위를 살펴보니 라울을 암살하기 위해 둘러싼 가톨릭이 역시 위그노들을 포위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마르셀은 여관의 문을 두드리며 콜리니를 도움을 청한다. 그러자 위그노 병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때를 같이하여 가톨릭 병사들이 도착한다. 양측은 금방이라도 전투를 벌일 기세이다. 마침 그때 마르게리트가 도착하는 바람에 양측은 싸움을 피하게 된다. 교회에서 뛰쳐나온 발렌틴이 모두에게 라울을 암살코자 하는 음모가 있다고 소리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여인이 발렌틴인줄을 모르고 있다. 베일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라울은 자기를 암살에서 구해준 여인이 발렌틴인 것을 깨닫고 발렌틴을 사랑하는 마음이 다시 솟구친다. 생브리 백작은 자기의 딸이 자기를 배반한 것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다른 모든 가톨릭 사람들도 역시 발렌틴의 처사에 대하여 놀람을 금치 못한다. 라울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알지 못하는 네브르 백작은 신부를 데리고 가기 위해서 즐거운 표정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의 증오를 뒤로 접고 결혼에 대한 기쁨을 노래한다. 하지만 위그노들과 라울과 발렌틴은 기쁘지 않다. 이렇듯 서로 상반된 감정으로 인하여 무대가 어수선한 중에 네브르 백작은 발렌틴을 데리고 그를 따르는 귀족들과 함께 자리를 뜬다. 


가톨릭 병사들이 위그노를 타도하자고 다짐하는 장면


[4막] 파리에 있는 네브르 백작의 아파트이다. 발렌틴은 이제 남편인 네브르 백작의 아파트에 있다. 그렇지만 발렌틴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데 대하여 애통해 하고 있다. 발렌틴의 애절한 아리아 Parmi les pleurs는 높은 테크닉과 고음을 필요로 하는 고난도의 아리아이다. 라울이 발렌틴을 만나기 위해 어렵게 발렌틴의 방에 나타난다. 죽기 전에 마지막 작별을 고하기 위해서 발렌틴을 찾아온 것이다. 발렌틴은 아버지 생브리 백작과 남편 네브르 백작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당황해서 라울을 조급히 커튼 뒤에 숨도록한다. 생브리 백작은 그 자리에 은밀히 모인 가톨릭 귀족들에게 왕의 어머니인 캬트리느 모후가 당일 밤에 개신교도들을 모두 잡아서 죽이라는 칙령을 발표했다고 전한다. 그날 밤에 개신교의 중심되는 사람들은 모두 네슬레 호텔()에 모여 앙리 드 나바르와 마르게리트 드 발루아의 결혼을 축하하는 모임을 갖기로 되어 있으므로 그 기회를 이용해서 개신교도들을 모두 제거한다는 것이다. 생브리 백작이 그런 내용을 전하자 네브르 백작은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하면서 자기는 이번 일에 결코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면서 칼을 뽑아 부러트린다. 그러자 생브리 백작은 사람들에게 가톨릭의 사업에 동조하지 않는 네브르 백작을 체포하라고 명령한다. 이어 가톨릭 수도승들이 부르는 유명한 '검에 대한 축복'(Benediction of the Swords)의 노래가 나온다. 위그노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 넣자는 다짐을 하는 노래이다. 생브리 백작은 부인들에게 지시하여 가톨릭 세력 모두에게 하얀 스카프를 나누어 주어 팔에 감도록 한다. 이 장면은 전체 오페라에서 가장 하일라이트가 되는 장면이다. 음악도 대단히 드라마틱하게 진행된다. 한편, 이런 모든 사항을 커튼 뒤에 숨어 있던 라울이 듣는다. 가톨릭 사람들이 모두 퇴장하고 방 안에는 라울과 발렌틴만이 남는다. 두 사람은 사랑을 다짐하는 긴 듀엣을 부른다. 라울은 발렌틴에 대한 사랑과 개신교로서의 의무 사이에서 어떤 것을 따라야 할지 갈등한다. 라울의 아리아가 Laissez moi partir이다. 발렌틴은 사랑하는 라울을 잃을 것 같아서 두려워 한다. 생제르망 성당의 종소리가 들린다. 라울은 마침내 개신교도들을 돕기로 결심하고 창문을 통해서 뛰쳐 나간다. 발렌틴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5막] 상당수의 공연에서는 시간상의 제약도 있고 해서 5막을 삭제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오페라 애호가들은 5막이야 말로 전제 드라마 중에서 가장 핵심되는 파트이므로 결코 삭제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의견이다. 5막은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네슬레 호텔(Hotel de Nesle)의 대연회장이다. 위그노들이 앙리와 마르게리트의 결혼을 축하하고 있다. 축하의 분위기는 때아닌 성당의 종소리로 중단된다. 부상당한 라울이 나타나서 지금 울리는 종소리는 가톨릭이 위그노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기 시작하는 신호라고 말하면서 사실상 모든 개신교회가 불타고 있고 콜리니 제독은 살해되었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흥분해서 칼을 뽑아 들고 가톨릭과의 전투를 위해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라울도 이들과 함께 나간다. [어떤 공연에서는 5막 1장의 대학살 징후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는 경우도 있다.] (2장) 어떤 폐허가 된 위그노 교회의 뒷편에 있는 묘지이다. 라울과 발렌틴이 살육과 방화의 와중에서 극적으로 만난다. 수많은 위그노 부상자들이 교회의 이곳저곳에 쓰러져 있다. 라울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어서 가고자 한다. 발렌틴은 라울에게 팔에 하얀 스카프를 두르고 함께 도피하여서 마르게리트 왕비의 보호를 받자고 간청한다. 라울은 발렌틴의 그같은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누군가가 네브르 백작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네브르 백작은 부상당한 마르셀을 보호하려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한 것이다. 


가톨릭의 위그노 대학살. 오페라 드 니스


마침내 발렌틴은 사랑을 위해서 개신교로 개종하고 라울과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선언한다. 두 사람은 마르셀에게 혼인의 주례를 서 달라고 부탁한다. 마르셀은 하인으로서가 아니라 성직자로서 발렌틴의 개종과 두 사람의 혼인을 주관하겠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하늘의 환상을 본다. 잠시후 가톨릭 병사들이 교회 문을 부수고 몰려 들어온다. 이때의 합창이 '살인자의 합창'이다. 가톨릭 병사들은 위그노 사람들을 하나하나 붙잡아서 개처럼 끌고 나간다. (3장) 세이느 강변이다. 라울과 발렌틴과 마르셀은 가까스로 도망쳐 나올수가 있었다. 이들은 자기들고 쓰러질 지경이지만 힘을 다해서 부상당한 위그노 병사들을 돌보고 있다. 어둠 속이기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수 없다. 생브리 백작이 나타나서 세사람에게 신분을 밝히라고 요구한다. 신앙을 지키기로 결심한 라울은 '위그노'라고 소리친다. 생브리는 위그노라는 소리를 듣자 부하들에게 총을 쏘아 죽이라고 명령한다. 가톨릭 병사들의 총이 발사되고 발렌틴도 쓰러진다. 생브리 백작은 자기의 딸을 죽이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마르게리트는 마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길바닥에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란다. 가톨릭 병사들이 위그노들을 모두 죽이자고 다짐하는 중에 막이 내린다. 병사들의 노래가 '신은 피를 원한다'이다. 마지막 장면은 프로멘탈 알레비의 '유태 여인'(La Juive)의 피날레 장면과 흡사하다. '유태 여인'은 '위그노'보다 1년 전에 파리에서 공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오페라 드 니스의 무대


'위그노'는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마이에르베르는 '위그노'보다 5년 전에 '악마 로베르'(Robert le diable)로서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시작을 보여주었다. '위그노'보다 1년 전에 발표된 알레비의 '유태여인'은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앞길을 닦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위그노'가 등장한 것이다. 아무튼 '위그노'로부터 파리 오페라는 그 후의 한 세대를 풍미하면서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위그노'의 대성공은 여러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이었다. 대표적으로는 프란츠 리스트와 지기스몬트 탈베르그()를 들수 있다. 이들은 '위그노'의 주제를 바탕으로 화려한 피아노 변주곡을 만들었다. '위그노'의 전주곡을 장식하는 '내 주는 강한 성'은 군악대의 행진곡으로 많이 인용되었다. 예를 들어서 런던에 있는 왕실 기병대가 교체식을 가질 때에는 '내 주는 강한 성'을 주제로 삼은 행진곡을 연주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문학작품에서의 마르게리트 드 발루아]


오페라 '위그노'의 주인공인 마르게리트 드 발루아(1553-1615)를 소재로 삼은 문학작품이 더러 있다. 알렉산드르 뒤마(페레)의 1845년 소설인 '마르고 여왕'(La Reine Margot)은 나바레의 앙리와 마르게리트의 결혼에 얽힌 이야기를 줄거리로 삼고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의 내용은 1994년에 프랑스에서 영화로 만들어졌다. 원작 소설의 제목대로 La Reine Margot라는 제목의 영화였다. 영화에서 마르게리트의 역할은 프랑스의 인기 여배우인 이사벨르 아자니(Isabelle Adjani)가 맡았다. 셰익스피어의 1595년도 초기 코미디인 Love's Labour's Lost는 1578년에 시도되었던 마르게리트와 앙리의 화해노력을 주제로 삼은 것이다. 소피 페리노(Sophie Perinot)의 2015년 소설인 '메디치의 딸'(Medici's Daughter)은 마르게리트의 청소년 시절과 결혼 초기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장 플라이디(Jean Plaidy)의 소설인 '내 자신, 나의 적'(Meself, My Enemy)은 영국 챨스 1세의 왕비인 앙리에트 마리아의 픽션 비망록이다. 젊고 아름다운 앙리에트 공주가 자기 오빠인 프랑스의 루이 13세와 오스트리아의 안나와의 결혼식에서 이제는 나이 많은 마르고 여왕을 만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에서는 마르게리트 드 발루아의 매력적인 성격이 잘 그려져 있다. 마르게리트는 또한 장 플라이디의 3부작인 '메디치'()도 등장한다. 마르게리트의 어머니인 메디치의 캐서린(캬트리느)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지만 마르게리트에 대한 이야기도 뛰어나게 표현되어 있다. 마이에르베르의 오페라 '위그노'에서 마르게리트라고 하면 호주의 조앤 서덜랜드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마르게리트는 서덜랜드의 상표와 같은 역할이었다. 특히 1990년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서덜랜드 고별공연에서 보여준 마르게리트의 역할은 영원히 기록에 남는 것이다.


   

마르게리트 드 발루아 왕비 초상화. 영화 '마르고 여왕'에서 마르게리트 역할의 이사벨르 아자니, 그리고 소프라노 조앤 서덜랜드


[한마디]

마이에르베르가 전주곡과 마르셀의 아리아 등에서 인용한 루터의 '내 주는 강한 성' 멜로디는 멘델스존이 1830년에 작곡한 교향곡 5번 (종교개혁, Op 107)에서 4악장의 주제로 사용하였다. 4악장에는 이탈리아어로 Una firme fortaleza es nuestra Dios(우리 하나님은 강한 요새: 내 주는 강한 성)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