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집중탐구 150편

66. 필립 글라스의 '사티야그라하'(Satyagraha)

정준극 2016. 9. 24. 19:03

사티야그라하(Satyagraha)

필립 글라스의 3막 오페라. 마하트마 간디의 생애 조명

현대음악의 이콘 


필립 글라스


'사티야그라하'는 산스크리트어로 '진리를 주장함'이라는 의미이다. 산스크리트어에서 사티아는 진리 또는 진실을 말하며 아그라하는 노력 또는 열정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티야그라하라는 복합어는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티야그라하'라는 용어는 특별히 간디가 주도한 불의에 대한 비폭력저항운동을 말한다. 혹은 무저항주의라고 말하는 운동이다. 그리고 간디의 그런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을 '사티야그라히'(satyahgrahi)라고 부른다. '사티야그라하'는 1979년에 미국의 필립 글라스(Philip Glass: 1937-)가 작곡한 3막의 오페라이다. 글라스는 이 오페라에 '오케스트라, 코러스, 솔로이스트들을 위한 오페라'라는 해설을 붙였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대본은 힌두어로 된 인도의 위대한 서사시인 마하바라타(Mahabharata)의 한 파트인 '주의 노래'(Bhagavad Gita: Song of the Lord)를 바탕으로 작곡자인 필립 글라스 자신과 미국의 여류 극작가인 콘스탄스 드종(Constance DeJong: 1958-)이 공동으로 완성했다. 필립 글라스는 세계를 변화시킨 세명의 인물들을 주제로 삼은 3부작의 오페라를 구상했다. 이를 '인물 3부작'(Portrait Trilogy)라고 부른다. 첫번째가 아인슈타인이다. 그의 생애를 비유해서 조명했다는 '해변의 아인슈타인'(Einstein on the Beach)은 1975년에 완성했다. 두번째는 1979년에 완성한 '사티야그라하'이다. 비폭력저항운동으로 세계를 감동시킨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생애를 비유적으로 조명한 작품이다. 그리고 세번째가 1983년에 완성한 고대 이집트의 '아크나텐'(Akhnaten)을 주인공으로 삼은 오페라이다. 세 작품의 음악은 모두 현대음악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니멀리즘에 입각한 음악이다. 과거의 전통적인 고전 음악에 비하여 대단히 특이한 음악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에 거슬리는 음악이라면서 거부반응을 보여주고 있는 음악이다. 그런데도 거부할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음악이다. 이 오페라에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 음악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으며 대사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


'사티야그라하'는 마하트마 간디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한 오페라이다. 간디역에 알란 오크(Alan Oke). 잉글리쉬 내셔널 오페라 무대


마하트마 간디의 생애, 특히 그가 비폭력저항운동을 주도한 이야기가 주제이지만 각 막은 간디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내용을 세명의 특별한 사람을 내세워서 비유로 삼고 있다. 1막은 러시아의 문호 레오 톨스토이(1828-1910)를 내세웠으며 2막은 인도의 시성이라고 하는 라빈드라나스 타고르(1861-1941)를 내세웠고 3막은 미국의 흑인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1929-1968)를 비유로 내세웠다. 세사람 모두 억압에서의 자유를 모토로 삼은 위대한 인물들이다. 스토리가 그러할 진대 음악에 있어서도 특이한 점을 찾아볼수 있다. 오케스트라는 현악기와 목관악기로만 구성되어 있다. 타악기와 금관악기는 없다. 대규모 합창단이 등장한다는 것도 특별한 일이다. 그리고 주역을 맡은 성악가들이 소프라노 2명, 메조소프라노 2명, 테너 2명, 베이스 2명, 바리톤은 1명인 것도 흥미있는 구성이다. 주역들은 미스 슐레센(Miss Schlesen), 마하트마 간디, 헤르만 칼렌바흐(Hermann Kallenbach), 그리고 파르시 루스토미(Parsi Rustomji)이다. 헤르만 칼렌바흐는 리투아니아 출신으로 남아공에 와서 건축가로 활동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간디와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 칼렌바흐는 인도인은 아니지만 간디의 비폭력저항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피날레


'사티야그라하'는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시가 필립 글라스에게 위촉한 작품이다. 첫 공연은 1980년 9월 5일 로테르담 시립극장(Schouwburg)에서 가졌다. 네덜란드 오페라단이 주축이 되어 공연했다. 합창단은 로테르담 음악원 합창단이 맡았으며 오케스트라는 우트레헤트 교향악단이 맡았다. 북미 초연은 이듬해인 1981년 7월 뉴욕주의 루이스톤이란 곳에서였다. 그해애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서도 공연되었다. 슈투트가르트에서의 공연은 글라스의 3부작을 모두 공연하는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영국 초연은 한참 후였다. 1997년 바스(Bath)라는 곳에 있는 킹스우드학교에서였다. 영국에서는 2007에도 공연했다. 런던 공연은 잉글리쉬 내셔널 오페라가 메트로폴리탄과 공동으로 무대에 올린 것이었다. 런던 공연은 상당한 호응을 받은 것이어서 2010년에도 리바이발 되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에서는 같은 연출로 이듬해인 2011년 11월에 공연되었다. 메트로폴리탄 공연은 DVD로 출시되어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3막의 이 오페라는 각 막을 세계적인 주요 인사를 비유로 내세워 놓았다. 1막은 레오 톨스토이이고 2막은 라빈드라나스 타고르이며 3막은 문학인은 아니지만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를 비유하여 내세웠다. 각 막은 다시 작은 소제목으로 분류하여서 이해를 돕도록 했다. 1막에는 쿠루(Kuru)의 정의의 들판에서, 톨스토이 농장, 서약이라는 세 부제가 붙어있고 2막에는 대결과 구조, 인디안 오피니언(신문 이름), 항의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며 3막에는 뉴카슬 행진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쿠루는 고대에 인도 북부에 있었던 아리안부족의 연맹을 말한다. 필립 글라스의 메리스메릭한 이 걸작은 현대음악의 이콘이 되었다. 마하트마 간디가 변호사로서 젊은 시절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지낼 때의 사건들을 주로 그린 오페라이다. 간디는 남아공에서 인도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정치적인 도구로서 비폭력무저항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오페라는 간디의 생애를 플래쉬 백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견해 주기도 한다.


메트로폴리탄 무대. 간디에 리챠드 크로프트


[1막] 톨스토이. 1장. 신화속의 전쟁터(A mythical battlefield). 쿠루의 정의의 들판(The Kuru Field of Justice). 두 왕가인 쿠루바스(Kuruvas)와 판다바스(Pandavas)가 피할수 없는 대전투를 눈앞에 두고 있다. 용맹하게 보이는 전사들과 부족장들은 나팔을 불며 당장이라도 전투에 나갈 태세가 되어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있다. 전쟁터를 바라보고 있던 아르주나 왕자는 크리슈나 신에게 앞으로 자기가 싸울 상대방 사람들을 좀 더 가까이서 보았으며 좋겠다고 말한다.   2장. 남아공의 톨스토이 농장(Tolstoy Farm). 간디가 유럽 사람들(주로 영국인)의 유색인종(흑인과 인도인 등)에 대한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자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나고 있다. 간디는 이들과 함께 처음으로 남아공의 인도 주민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는 집단 행동을 주도한다. 누구도 이 운동이 얼마동안 지속될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톨스토이 농장의 사티야그라히스들은 저항운동의 일환으로 무슨 일을 할수 있는지 목표를 설정한다. 이들은 협동 집단의 멤버로서 한데 모여 살기로 했다. 이와 함께 서로 조화스럽고 소박한 생활을 하도록 훈련을 받는다. 3장. 서약(The Vow). 영국 정부는 남아공에 거주하는 모든 인도인들이 거소등록을 하고 지문을 찍는 새로운 제도를 추진키로 한다. 새로운 제도에 따르면 모든 인도인들은 거소등록증을 항상 가지고 다녀야 하며 거소증명이 없는 사람들을 단속하기 위해 경찰이 어느때고 필요하다면 인도인의 집에 들어가서 조사할수 있다고 되어 있다. 만일 이에 불응한다면 벌금을 부과하거나 감옥에도 보낼수 있으며 심지어는 남아공에서 강제추방할수도 있도록 했다. 사람들은 그같은 조치를 Black Act라고 불렀다. 이를 반대하는 인도인들의 집회가 열린다. 3천명 이상이나 되는 인도인들이 집회에 참가한다. 집회참가자들은 죽음에 Black Act를 결사반대키로 결의한다.  


메트로폴리탄 2011 무대. 간디에 알란 오크


[2막] 타고르. 1장. 대결과 구원(Confrontation and Rescue). 간디는 인도로 가서 반년 동안 머무르면서 남아공에서 인도 정착민들이 어떤 환경에 있는지를 널리 알리는 일을 한다. 남아공에 있는 수많은 유럽인들이 신문 등을 통해서 간디의 연설문을 읽는다. 이들은 만일 간디가 남아공에 돌아오면 인도인들의 저항이 마치 커다란 폭발처럼 있을 것으로 짐작해서 두려워한다. 남아공의 유럽인들은 간디의 활동에 대하여 격앙한다. 이들은 간디가 남아공으로 돌아 올 때에 수백명의 인도 이주자들을 데리고 와서 영국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운동을 펼칠 것이라고 떠들며 사람들의 불안감을 조성한다. 그러면서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영국에 반대하는 인도인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난다. 이들의 행동도 점차 폭력으로 기운다. 이들은 간디에게 도시의 대로에서 집단 시위를 벌이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시위를 방어하는 경찰을 타도하자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간디를 둘러싸고 아우성이다. 마치 폭력이라도 휘두를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이다. 마침 경찰청장의 부인인 미세스 알렉산더가 군중들의 반대방향에서 걸어오다가 이 장면을 보고 급히 파라솔을 펴서 간디를 폭도들의 손으로부터 피하도록 해준다. 미세스 알렉산더가 간디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 준다. 2장. 인디언 오피니언(Indian Opinion). 인도인들의 저항 운동의 중심이 있는 것이 주간신문인 '인디언 오피니언'이다. 인디언 오피니언은 신문의 전면을 저항운동에 대한 기사로 할애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티야그라하의 원칙에 대하여 많은 주장을 싣고 있다. 인디언 오피니언은 남아공 뿐만 아니라 세계에 인도인들의 사티야그라하에 대하여 외치고 있다. 인디언 오피니언은 투쟁을 위한 강력한 무기가 되고 있다. 인디언 오피니언의 독자들은 남아공에서만 2만명이 넘고 있다.


3장. 항의(Protest). 운동 주동자들은 남아공을 떠나라는 명령이 있었지만 불복하자 당국은 이들을 체포해서 감옥에 수감하는 판결을 내린다. 인도인 사회는 감옥을 채우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일부러 어떤 형태로든지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간다. 이렇게 해서 주말이 되자 감옥에 갇히는 사티야그라히 죄수들은 150명이 넘게 된다. 남아공 정부 당국은 만일 인도인들의 자진해서 거소등록을 하고 지문을 날인한다면 여행의 자유를 제한하며 경찰 공권력의 강화를 용인하는 Black Act를 재고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정부측에서 Black Act의 철회에 따른 후속조치를 충분히 이행할 태세가 되어 있지 않자 사티여그라히들은 자기들 독단의 최후통첩을 전한다. Black Act를 당장 철회하지 않으면 거소등록증을 모두 거두어서 불태우겠다는 통첩이었다. 드디어 최후통첩의 마지막 날이 돌아온다. 남아공 정부는 사티야그라히들의 요구를 거절한다는 내용을 간디에게 전한다. 간디는 거소카드를 불태우기 전에 동료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 마침내 흥분한 사티야그라히들이 거소카드를 모두 불덩이 속으로 집어 던진다. 그리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서 함성을 높이 지르며 남아공 정부에 대한 저항심을 표현한다. 이들의 함성은 이들이 사티야그라하 운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 지른 함성보다 더 컸다. 이들은 마침내 불의 세례를 가진 것이다.


영국인 미세스 알렉산더는 간디의 주장을 이해하여 도움을 준다. 메트로폴리탄 무대


[3막] 뉴카슬 행진(New Castle March). 남아공 정부는 새로운 두가지 법, 즉 '3 파운드 택스'(Three Pound Tax)와 아시아계 이민법(Asiatic Immigration Law)으로 인도로부터 새로운 이민자들이 유입되는 것을 효과적으로 통제할수 있었다. 이와 함께 이미 거주하고 있는 인도 노동자들에 대하여도 마치 족쇄를 채워 놓듯 엄격한 콘트롤을 할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두 법은 인도의 독립운동 지도자인 슈리 고칼레(Shree Gokhale)가 남아공을 순방하고 있을 때에 발효되었다. 그런데 슈리 고칼레는 남아공을 순방 중에 남아공 정부로부터 두 법안의 철회에 대한 약속을 받아냈는데 그것과는 상관없이 발효되었던 것이다. 남아공 정부가 법안 철회를 약속해 놓고 지키지 않자 사티야그라히들은 반정부 투쟁목표를 하나 더 분명하게 정하게 되었으며 또한 사티야그라히들의 세력을 늘리는 구실로 이용할수 있었다. 사티야그라히들은 뉴카슬 광산의 광부들이 인종차별 반대 시위의 첫번째 대열에 서도록 선정하였다. 간디가 앞장 서는 시위대는 뉴카슬로부터 톨스토이 농장이 있는 트란스발(Transvaal)까지 36마일을 행진하기로 한다. 시위대는 5천명 규모이다. 트란스발까지 가려면 주경계선을 통과해야 한다. 만일 주경계 초소에서 여행허가서가 없다고 해서 문제를 삼으면 모두 체포되는 것으로 계획을 세운다. 그러면 감방이 넘쳐나게 되어서 당국에게 적잖은 경제적 부담과 어려운 문제들을 안겨줄수 있다는 계산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톨스토이 농장까지 행진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그곳의 인도인 노동자들과 연합하여 투쟁을 계속하기로 한다. 뉴카슬 광산의 인도 노동자들과 톨스토이 농장의 인도 노동자들을 합하면 거의 6만명이나 되기 때문에 그 규모가 시위를 하면 새로운 악법들을 철폐할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간디를 보호해주는 경찰서장의 부인 미세스 알렉산더. 런던 콜리세움 극장


필립 글라스는 인도의 전통악기인 시타르(Sitar)의 거장 라비 샨캬르(Ravi Shankar)와 무려 12년 동안이나 친교를 맺으면서 지냈다. 그 때문인지 글라스는 인도를 자주 여행했다. 인도를 여행하다보니 모한다스 간디에 대하여 무슨 마력처럼 빠져들어갔다. 인도에 가면 간디의 사진이 이곳저곳에 걸려 있는 것을 볼수 있다. 기차역에는 의례 간디의 사진이 걸려 있고 무슨 대합실에도 의례 간디의 사진이 걸려 있다. 글라스는 '인도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간디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울수 있었다. 특히 간디의 자서전인 '사티야그라하'는 몇번이나 읽어보았다. 사티야그라하의 사상은 청년 간디가 남아공에서 저 유명한 비폭력저항주의를 시작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후 글라스는 12음 기법을 이용하여 '열두 파트의 음악'(Music in Twelve Parts), '하모니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Another Look at Harmony) 이라는 작품 등을 작곡했다. 그러다가 글라스는 세계의 평화주의자인 간디에 대한 오페라를 작곡키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80년에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사티야그라하'가 초연되었고 세계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미국에서 '사티야그라하'가 대대적인 관심을 받은 것은 2008년 메트로폴리탄에서의 공연이었다. 글라스는 '사티야그라하'의 무대에 멀티미디어 테크닉을 접목하면 더 훌륭한 공연이 될수 있다고 생각했다. 글라스는 런던의 '임프로버블 극장'(Improbable Theater)에서 활약하고 있는 제작자 겸 무대감독인 펠림 맥더모트(Phelim McDermott)와 줄리앙 크라우치(Julian Crouch)와 협동키로 했다. 글라스가 이들과 협동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이들이 연출하고 제작한 '정크 오페라'(Junk Opera)라는 것을 보고나서 감동을 받아서였다. '정크 오페라'는 초현실 인형쇼로서 독일 어린이 동화에 속하는 '더벅머리 페터'(Der Struwwelpeter)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래서인지 메트의 무대에서는 마치 동화 속의 거인들이 나타난 것과 같은 무대가 설정되어 놀라운 인상을 주었다.


메트로폴리탄 무대. 2011년. 거인 인형들의 등장이 인상적이다.


'사티야그라하'는 확실히 전통적인 오페라와는 다르다. 마치 현대라느 거대한 장벽에 도전하는 것과 같은 공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오페라와 같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전통 오페라에서처럼 고전적으로 훈련된 성악가들이 출연한다는 것이다. 한편, '사티야그라하'에서 간디에 대한 스토리는 시대적인 일관성이 부족하다. 이야기가 나중에 나오는가 하면 현재의 이야기가 미리 나오기도 한다. 이것은 글라스의 3부작인 '해변의 아인슈타인'과 '아크나텐'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기야 영화에서도 옛날을 회상하는 장면이 플래쉬 백으로 나오는 기법이 있으니 오페라라고 해서 그런 기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메트 무대. 2008


간디가 남아공(사우스 아프라키카)에서 경험한 인종차별은 어떤 것들인가? 남아공의 백인들에게 있어서 인도인들은 모두 '새미스'(Sammies) 또는 '쿨리스'(Kulies)였다. 새미스는 영국 속어로서 바보, 얼간이라는 뜻이고 쿨리는 하층의 노동자라는 뜻이다. 간단히 말해서 백인과 인도인은 같은 인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간디가 경험한 몇가지 인종차별의 예를 들어보자. 간디는 이발소(헤어 드레서)에 갔지만 서비스를 받지 못했다. 백인들만 이발소에서 이발을 할수 있었고 인도인들은 스스로 알아서 이발을 해야 했다. 간디는 변호사였다. 법정에 갈 일이 많았다. 간디는 법정에서 인도인들이 모자처럼 쓰는 터번을 써서는 안되었다. 모든 인도인들은 밤 9시 이후에는 집에서 밖에 나가 돌아다닐수 없었다. 꼭 나가야 할 일이 있다면 당국이나 소속 집단 고용주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인도인이기 때문에 밤에 돌아다닐수 없었던 것이다. 간디는 단지 피부색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백인들이 누리는 권리를 하나도 누릴수가 없었다. 인도인에 대한 차별은 개개인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인도인 전체에 대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서 대중교통에 있어서 그러했다. 어느때 간디는 업무를 위해서 나탈에서 프레토리아까지 기차여행을 하게 되어 1등칸 기차표를 사서 탔다. 그런데 인도인이라고 해서 1등칸에서 화물칸으로 쫓겨나야 했다. 간디가 항의하자 차장들은 간디를 기차에서 아예 내리도록 하고 타지 못하게 했다. 그런 예를 들면 끝이 없지만 이만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