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집중탐구 150편

69. 게타노 도니체티의 '마리아 스투아르다'(Maria Stuarda)

정준극 2016. 10. 1. 11:36

마리아 스투아르다(Maria Stuarda)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린 2막 오페라

도니체티의 '3명의 튜도 여왕' 시리즈 중 두번째 작품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마리아 스투아르다). 게타노 도니체티. 원작 희곡 '마리아 스투아르타'를 쓴 프리드리히 쉴러


'마리아 스투아르다'(Maria Stuarda: Mary Stuart)는 게타노 도니체티의 2막 비극 오페라이다. 대본은 나폴리에서 활동했던 법조인(판사)으로 대본가로서도 행세하는 젊은 주세페 바르다리(Giuseppe Bardari: 1817-1861)가 작성했다. 바르다리의 대본은 이탈리아의 시인이며 번역가이고 대본가인 안드레아 마페이(Andrea Maffei)가 프리드리히 쉴러(Friedrich Schiller)의 1800년 독일어 희곡인 '마리아 스투아르트'(Maria Stuart)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것을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마리아 스투아르다'는 도니체티의 튜도 왕조에 관한 네 편의 오페라 중 세번째에 해당하는 것이다. 도니체티는 영국의 튜도 왕조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서 그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오페라들을 만들었다. 첫번째가 '케닐워스 성'(Il castello di Kenilworth)이며 두번째가 '안나 볼레나'(Anna Bolana)이고 세번째가 '마리아 스투아르다'이며 네번째가 '로베르토 드브러'(Roberto Devreaux)이다. 이 네편의 오페라 중에서 '케닐워스 성'을 제외한 세 편은 왕비 또는 여왕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기 때문에 이 세 오페라의 여주인공들을 '스리 도니체티 퀸스'(Three Donizetti Queens)라고 부른다. 여왕이던 왕비이던 영어로는 퀸(Queen)이기 때문이다. '케닐워스 성'에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등장하지만 사실상의 주인공은 여왕의 애인이었던 레이체스터 경과 결혼키로 되어 있는 아멜리아이므로 엘리자베스 1세는 '스리 도니체티 퀸스'에서 제외되었다. '마리아 스투아르다'의 초연은 1834년 10월 18일 우여곡절 끝에 나폴리에서 겨우 이루어졌다. 하지만 제목도 바꾸어야 했고 내용도 바꾸어야 했으며 전체적인 음악도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야 했다. 나폴리에서의 제목은 '부온델몬테'(Buondelmonte)라는 비교적 생소한 것이었다. '마리아 스투아르다'가 오리지널 스코어로 처음 공연된 것은 이듬해인 1835년도 저무는 12월 30일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였다. 타이틀 롤은 스페인 출신으로 당대의 메조소프라노인 마리아 말리브란(Maria Malibran)이 맡았다. 마리아 말리브란은 메조소프라노이지만 오페라에서는 간혹 콘크랄토를 맡기도 하고 소프라노를 맡기도 하는 전천후 성악가였다. 마리아 말리브란은 '마리아 스투아르다'를 공연하면서 간혹 검열에서 금지한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의 대사를 일부러 불러서 명성이 높았다.


아르투르 폰 람버그가 1859년에 그린 마리아 스투아르다


[주세페 바르다리의 대본]

밀라노에서 쉴러의 이탈리아어 번역판인 '마리아 스투아르다'를 읽은 도니체티는 마리아(메리)의 비극적인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어 오페라로 만들 생각을 했다. 도니체티는 우선 당대의 대본가인 펠리체 로마니에게 오페라 대본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펠리체 로마니는 도니체티를 위해 '사랑의 묘약'의 대본을 썼으며 더구나 '안나 볼레나'의 대본을 써서 도니체티를 일약 정상의 오페라 작곡가로 만들어준 사람이다. 그러나 로마니는 내키지 않아 했다. 왜냐하면 그의 다른 대본들로 만든 오페라들이 계속 흥행에 실패를 했기 때문에 더 이상 대본을 쓰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도니체티는 주세페 바르다리를 찾아가서 대본을 부탁하였다. 바르다리는 당시 17세의 법학도였으나 간혹 오페라 대본을 써서 재능을 인정받고 있던 터였다. 도니체티는 바르다리에게 몇자기 주문을 하였다. 하나는 주요 등장인물을 6명 정도로 제한해 달라는 것이었다. 쉴러의 원작에는 주요 등장인물들이 무려 21명이나 되어서 오페라에 모두 등장시킬 경우 혼잡하기가 이루 말할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대사에서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으로 민감한 내용은 모두 제외해 달라고 부탁했다. 할수 없이 그런 내용의 대사를 넣을 경우에는 최소한으로 해 달라고 부탁했다. 바르다리는 그러한 도니체티의 의도를 충분히 반영하였지만 드라마에서 러브 스토리가 빠질수 없으므로 레이체스터경인 로버트 더들리와 메리 여왕과의 러브 스토리를 추가하였다.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는 쉴러의 원작에도 없고 사실에 있어서도 없었던 일이었다. 로버트 더들리는 엘리자베스 1세가 마음에 두고 있었던 인물이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이루어지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 1세는 로버트 더들리를 과부가 된 메리의 새남편으로 적당하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실제에 있어서 메리의 비극이 발생할 당시에 엘리자베스는 53세였고 로버트 더들리는 55세였으며 메리는 44세였다. 한편 대본에는 메리와 엘리자베스가 대단히 극적인 장면에서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오페라이건 드라마이건 대단히 필요하고도 중요한 소재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두 사람은 결코 대면해서 만난 일이 없다.


마리아 역의 조이스 디도나토


[부온델몬테가 된 마리아 스투아르다]

'마리아 스투아르다'의 나폴리 초연은 주인공 메리의 운명만큼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리허설에서부터 말썽이 생겼다. 나폴리 초연에서 엘리사베타(엘리자베스)는 소프라노 론치 데 베니스(Ronzi De Begnis)가 맡기로 했고 마리아(메리)는 메조소프라노 안나 델 세레(Anna Del Serre)가 맡기로 되어 있었다. 2막에서 마리아가 엘리사베타에게 이렇게 대꾸하는 장면이 있다. 원본 가사를 소개할 필요는 없고 굳이 번역하면 '볼레나의 불결한 딸, 불명예라고? 매춘부 - 쓸모없고 추잡한 인간, 부끄러운줄 알아야지. 영국의 왕좌는 너의 발로서 더럽혀지고 있다. 사악한 잡종같으니라고'이다. 그런데 리허설에서 안나 델 세레는 이 대목을 대단한 감정을 넣어서 읊었다. 소프라노 론치 데 베니스는 평소에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았던 론치 데 베니스가 자기를 개인적으로 멸시해서 그 대사를 감정을 넣어서 말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저히 참을수 없었던 론치 데 베니스는 다짜고짜로 안나 델 세레에게 다가가서 뺨을 때라고 가슴을 힘있게 밀쳤다. 오페라에서 소프라노는 언제나 메조소프라노보다 더 대우를 받고 더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안나 델 세레는 대들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얼마후 안나 델 세레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어쩔수 없이 리허설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아마 오페라 역사에 있어서 씻지 못할 스캔들로 기록되었다. 아무튼 리허설은 그럭저럭 마무리 되었고  본 공연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갑자기 나폴리의 왕이 공연금지의 명령을 내렸다. 아마 왕비인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메리 여왕의 직계 후손이었기 때문인듯 싶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한 나라의 여왕이 다른 나라의 여왕에게 '사악한 잡종'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것은 나폴리의 정서로 보았을 때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도 작용한 것 같았다. 그리고 메리가 엘리자베스에게 선동적인 어조로 반항하는 것은 프랑스의 영향 아래에 있는 부르봉의 나폴리에서 별로 환영받을 일이 아니라는 점도 있었다.  


마리아와 레이체스터. 조이스 디도나토. 로열 오페라 하우스


도니체티는 나폴리 당국이 공연을 금지하자 다른 제목을 제시하였다. '조반나 그레이'(Giovanna Gray: Lady Jane Gray)였다. 그러나 당국은 이 제목도 거부했다. 할수 없이 도니체니는 스코어의 상당부분을 수정하거나 삭제해야 했다. 그리고 피에트로 살라티노(Pietro Salatino)에게 새로운 대본을 부탁하였다. 살라티노는 완전히 다른 내용의 대본을 만들었다. 살라티노는 제목도 '부온델몬테'로 바꾸었다. 부온텔몬테는 단테의 '낙원'(파라디소)편에 나오는 인물로서 귈프(Guelphs)와 기벨린(Ghibellines)의 전쟁을 유발한 인물이다. 도니체티는 '마리아 스투아르다'의 대대적인 수정변경을 못마땅해 했다. 그래서 '아니, 주인공들이 여섯 명이면 충분한데 새로운 오페라에서는 열 명이나 등장한다. 그러니 성공할지 모르겠다'면서 아쉬움을 표명했다. 아무튼 그리하여 '부온델몬테'는 1834년 10월 18일 나폴리에서 초연을 가졌다. 실패였다. '부온델몬테'는 6회 공연을 가진후 더 이상 공연되지 않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밀라노 공국에서의 초연은 이듬해인 1835년 12월 30일에 성사 되었다. 오리지널 '마리아 스투아르다'가 무대에 올려지게 되었다. 메조 소프라노 마리아 말리브란(Maria Malibran)이 타이틀 롤을 맡았다. 도니체티는 마리아 말리브란을 염두에 두고 여러 군데를 손질하였다. 그리고 서곡도 새로 만들어서 붙였다. 밀라노 당국은 대본을 별다른 이의없이 승인해 주었다. 물론 검열에서 통과하기 위해 오리지널 대본의 몇군데를 고치기는 했다. 초연에서 말리브란은 불행하게도 과거의 화려했던 음성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따라서 밀라노의 초연은 형편없는 것이 되었다. 도니체티가 이날의 초연을 보고서 '괴롭다. 처음부터 끝까지 괴로웠다'라고 말한 것만 보아도 잘 알수 있는 일이었다.


밀라노 초연의 실패는 말리브란의 빈약한 음성 때문만도 아니었다. 가사 중에 vil bastarda(비열한 사생아)라는 표현이 있었다. 그것을 검열 당국은 donna vile(비열한 여인)이라고 바꾸도록 했다. 그런데 말리브란은 검열 당국의 수정된 가사를 거절하고 원래대로 '비열한 사생아'라는 가사로서 노래를 불렀다. 그 사실을 알게된 검열 당국은 말리브란이 수정된 가사로 노래를 부르던지 그렇지 않으면 공연을 중지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말리브란도 한 고집하는 사람이어서 검열 당국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결국 말리브란은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고 후속 공연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도니체티는 이탈리아에서의 공연이 당분간은 어렵다고 생각했다. 영국 공연을 계획하였다. 하기야 스토리의 배경이 영국이므로 영국에서는 성황을 이룰 것으로 생각했다. 이탈리아에서 미운 털이 박힌 말리브란을 영국에 데려가서 공연토록 하면 더 인기를 끌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말리브란이 갑자기 28세의 젊디 젋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836년에 런던에서 공연하려던 계획은 취소되었다. 영국 초연은 그로부터 130년 후인 1966년에 겨우 성사되었다. 미국 초연은 그보다 2년 앞서서 1964년 카네기 홀에서였다. 그러나 카네기 홀 초연은 콘서트 형식이었다. 미국에서의 무대초연은 1971년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였다. 조앤 서덜랜드가 타이틀 롤을 맡은 것이었다. 미국에서 '스리 퀸스'(Three Queens)가 처음으로 모두 공연된 것은 1972년 뉴욕 시티 오페라에서였다. 소프라노 비벌리 실스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스리 퀸스'를  뉴욕 시티 오페라가 공연하고 부터였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도니체티는 처음에 마리아와 엘리사베타를 소프라노가 맡는 것으로 작곡을 했다. 특히 마리아는 당대의 소프라노인 주세피나 론치 데 베니스를 염두에 두고 작곡했다. 데 베니스는 음역이 저음 G로부터 하이 E까지로 대단히 폭이 넓었다. 데 베니스는 '돈 조반니'에서 돈나 안나를 불렀고 벨리니의 '노르마'에서 타이틀 롤을 부른 경력이 있었다. 데 베니스는 소프라노이면서도 메조소프라노 역할인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로지나를 불러 갈채를 받은바 있다. 그러나 나폴리 초연에서는 '마리아 스투아르다'가 아니라 '부온델몬테'에서 비안카였기 때문에 데 베니스를 마리아의 이미지를 창조한 인물로는 간주하지 않고 있다. 한편 밀라노 초연에서 메조소프라노인 마리아 말리브란이 마리아의 이미지를 창조한 이래 오늘날까지도 마리아의 역할은 메조소프라노가 맡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되었다. 그러다가 1950년대 이후에는 마리아와 엘리사베타 중의 한사람을 메조소프라노가 맡는 것을 관례로 삼게 되었다. 시기는 1587년이며 장소는 런던의 웨스터민스터 궁, 포더링헤이성, 노우스앰턴셔어(Norhamptonshire) 등이다.


- 마리아 스투아르다(Maria Stuarda: S). 스코틀랜드 여왕

- 엘리사베타(Elisabetta: S). 영국 여왕

- 안나 케네디(Anna Kennedy: MS). 마리아의 친구

- 로베르토(Roberto: T). 레이체스터 경(Earl of Leichester)

- 구글리엘모 체칠 경(Lod Guglielmo Cecil: Bar: 세실). 재무장관(Chancellor of the Exchequer)

- 조르지오 탈보트(Giorgio Talbot: B). 슈르스베리 경(Earl of Shrewsbury)

- 전령(Herald: T), 궁정 사람들, 병사들


[1막] 1장. 웨스터민스터의 엘리사베타 궁이다. 궁정의 귀족들과 귀부인들이 프랑스 대사를 환영하기 위한 무술시합이 끝나자 홀 안으로 들어온다. 프랑스 대사는 프랑스 왕세자인 프랑수아와 엘리사베타(엘리자베스) 여왕의 결혼을 주선하기 위해 방문했다. 여왕이 홀 안으로 들어서자 모두들 기쁨으로 여왕을 칭송한다. 엘리사베타는 프랑스와 동맹을 위해서는 결혼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하지만 영국의 여왕으로서 프랑스의 왕비가 된다면 그동안 누렸던 자유를 포기해야 할 것 같아서 주저한다. 엘리사베타를 마음을 주저하게 만드는 또 한가지의 일이 있다. 사촌으로 스코틀랜드의 여왕을 지낸 마리아 스투아르다를 과연 반역죄로 다스려서 처형할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 스투아르다는 영국의 왕위를 탐내서 여러가지 반역의 음모를 꾸민 죄목으로 감금되어 있다. 엘리사베타의 아리아가 Ah! Quando all'ara scorgemi(아, 하늘로부터의 고결한 사랑을 제단 앞에서 선택할 때에)이다. 탈보트를 비롯해서 여러 신하들이 마리아를 살려 줄 것을 탄원한다. 엘리사베타의 카발레타가 Non posso risolvermi ancor, Ah! dal cielo discenda un raggio(아직 결정살수 없도다. 아, 하늘로부터 무슨 계시가 내려주었으면)이다. 엘리사베타가 레이체스터는 어디 있느냐고 묻고자 할 때에 레이체스터가 들어온다. 엘리사베타는 레이체스터에게 프랑수아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했다는 내용을 프랑스 대사에게 전하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했는데도 레이체스터가 질투의 마음이 생긴다는 등 어떠한 동요도 보이지 않자 엘리사베타는 직감적으로 라이발이 생겼다는 생각을 한다. 


레이체스터가 혼자 있는 것을 알자 탈보트가 접근해서 조금 전에 포더링헤이를 다녀왔다고 하면서 마리아의 초상화가 들어 있는 작은 메달과 편지를 전해 준다. 레이체스터는 마리아와의 사랑을 기쁨에 넘쳐 회상한다. 레이체스터의 아리아에 이어 탈보트와의 듀엣이 진행된다. Ah! rimiro il bel sembiantel(아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다시 보는도다)이다.  탈보트가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묻자 레이체스터는 마리아를 석방시키기 위해서 노력하겠다고 맹세한다. Vuo liberarla! Vuo liberala!(그녀를 자유롭게 만들고 싶다)이다. 탈보트가 자리를 뜨자 엘리사베타가 등장한다. 엘리사베타는 탈보트와 레이체스터가 무엇 때문에 만났는지를 알고 있다는 듯 레이체스터에게 마리아로부터 편지가 왔을 것이니 보여달라고 요구한다. 레이체스터가 마지못해서 마리아로부터의 편지를 보여준다. 편지에는 마리아가 사촌인 엘리사베타를 만나게 주선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레이체스터는 엘리사베타에게 제발 마리아를 한번만이라도 만나 주라고 간청한다. 엘리사베타는 마리아와 만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레이체스터가 아직도 마리아를 사랑하고 있는지가 관심사이다. 레이체스터는 아직도 마리아를 사랑하고 있다고 솔직히 말한다. 레이체스터와 엘리사베타의 듀엣이 Era d'amor l'immagine(그녀는 사랑의 상징이로다)이다. 레이체스터는 마리아가 감금되어 있는 곳의 부근에서 사냥 파티가 열리니 여왕께서 부디 참석해 달라고 요청한다. 엘리사베타는 승락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복수의 감정이 남아 있다. 엘리사베타의 카발레타와 이어서 진행되는 듀엣이 Sul crin la rivale la man mi stendea(나의 머리 위로 나의 라이발이 손을 뻗치네)이다.


2장. 포더링헤이 성이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1막 2장을 2막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2막의 마지막 장면은 3막에 포함한다. 그래서 '마리아 스투아르다'는 2막이기도 하고 3막이기도 하다.) 마리아는 안나와 함께 프랑스에서 지내던 젊은 날을 회상한다. 마리아의 카바티나가 Oh nube! che lieve per l'aria ti aggiri(오 구름이여, 산들바람에 가볍게 떠도는구나)이다. 멀리서 사냥을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들의 외침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니 여왕이 가깝게 오고 있음을 알수 있다. 마리아는 엘리사베타를 생각하고서 기분이 언짢아 진다. 마리아의 카발레타가 Nelle pace, nel mesto reposa(슬프게 외떨어져 있지만 평화스러웠는데 그녀가 새로운 공포로서 나를 괴롭히는 도다)이다. 뜻밖에도 레이체스터가 나타나서 마리아에게 이제 곧 엘리사베타 여왕이 도착할 것이니 제발 공손하게 행동해 달라고 말한다. 레이체스터와 마리아의 듀엣이 Da tutti abbandonata(모두에게 버려진...나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네)이다. 레이체스터는 마리아에게 그녀를 석방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한다. 레이체스터는 엘리사베타를 영접하기 위해 떠난다. 엘리사베타를 만난 레이체스터는 마리아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코자 하지만 기회를 얻지 못한다.


탈보트가 마리아를 데리고 나타나자 엘리사베타는 적대감으로 반응한다. 엘리사베타의 아리아가 E sempre la stessa, superba, orgogliosa(저 여자는 언제나 오만하고 교만하도다)이다. 마리아가 엘리사베타의 앞에 나와 무릎 꿇는다. 마리아의 아리아가 Morta al mondo, e mora al trono(세상에 대하여, 왕좌에 대하여 아무런 생각이 없나이다...용서를 구하고자 왔나이다)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면은 적대적인 것이 된다. 엘리사베타는 마리아가 남편 단리 경(Lord Darnley)을 살해했고 아울러 반역을 꾸몄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면서 비난한다. 그러자 마리아는 엘리사베타의 거짓 비난에 자극을 받아서 엘리사베타를 볼랜의 불결한 딸(Figlia impura di Bolea)이라고 말하고 이어서 Profanato e il soglio inglese, vil bastarda, dal tuo pie!(당신의 발로서 영국의 왕좌가 더렵혀 졌도다, 비열하고 상스러운 사생아 같으니라구)라고 내뱉는다. 그 말에 너무나 충격을 받은 엘리사베타는 경비병들에게 어서 저 여자를 데리고 가라고 말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도끼가 나의 복수를 보여 줄 것이니라'라고 선언한다. 레이체스터가 두 사람의 감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소용이 없다. 마리아는 다시 감방에 갇힌다.


[2막] 1장. 엘리사베타 아파트의 어떤 방이다. 세실 장관이 마리아를 사형에 처한다는 서류를 들고 와서 엘리사베타에게 서명하기를 원한다. 엘리사베타는 당장 서명하지 못하고 주저하면서 상황을 다시한번 곰곰히 생각한다. 엘리사베타의 아리아가 Quella vita, quella vita a me funesta(목숨...나를 위협하는도다)이다. 이어서 엘리사베타는 '하늘이시여 나의 의심많은 영혼을 강건하게 해 주서서'라고 간구한다. 세실이 엘리사베타에게 다시 서명해 달라고 요청하자 엘리사베타는 어쩔수 없다는 듯이 서명을 하려 할 때에 레이체스터가 들어온다. 레이체스터를 본 엘리사베타는 감정이 격해져서 '그대는 마리아의 처형을 서두는구려'라고 소리친다. 그리고는 마침내 사형장에 서명을 한다. 레이체스터는 다시한번 자비를 간청하지만 엘리사베타는 거절한다. 세실이 엘리사베타에게 마음을 굳건히 가져서 흔들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세사람의 트리오가 Ah! Deh! per pieta sospendi l'estremo colpo almeno(아, 제발 불쌍히 여기시어 마지막 타격을 멈추소서)이다. 엘리사베타의 결심은 레이체스터가 잔인한 처사라고 비난함에도 불구하고 흔들림이 없다. 엘리사베타는 레이체스터에게 마리아의 처형을 직접 지켜보라고 명령한다.


2장. 마리아의 방이다. 마리아는 자기의 기구한 운명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본다. 그리고 자기 때문에 레이체스터의 운명도 위험에 처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마리아는 '나로 인하여 모두가 불행하게 되는구나'라며 탄식한다. 세실이 탈보트와 함께 마리아의 방으로 들어온다. 세살은 마리아에게 사형집행장을 가지고 왔다고 말한다. 세실이 나가자 탈보트는 마리아에게 여왕이 레이체스터에게 마리아의 처형장면을 지켜보라고 명령했다는 얘기를 해 준다. 마리아는 단리 경의 혼령이 방에 함께 있다는 것을 상상한다. 마리아와 탈보트의 듀엣이 Quando di luce rosea, il giorno a me splendeal(새벽의 여명이 비치는 동안 나의 생명은 아직 반짝일 것이다)이다. 탈보트가 마리아를 위로하지만 마리아는 깊은 탄식에 빠진다.


3장.포더링헤이의 내정(courtyard)이다. 사람들이 처형대의 주변에 모여든다. 사람들은 마리아의 처형이 영국에 수치를 던져주는 것이라며 탄식한다. 이어 마리아가 사형집행인들과 함께 등장한다. 마리아는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자기는 더 좋은 세상, 더 좋은 삶을 위해 떠난다고 말한다. 마리아가 마지막 기도를 올린다. 마리아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합창이 Deh! Tu di un umile preghiera(오, 주여, 우리의 겸손한 기도를 들어 주소서)이다. 처형대 주위에 함께 있는 모든 사람들도 마리아와 함게 주의 자비를 바라는 기도를 드린다. 세실이 나타나서 이제 사형을 집행할 시각이 되었다고 말한다. 세실은 마리아에게 엘리사베타가 마리아의 마지막 소원을 허락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안나에게 처형대에 함께 올라가도 좋다고 전한다. 마리아가 엘리사베타를 용서한다고 말한다. 마리아, 안나, 탈보트, 세실, 군중들의 합창이 Di un chor che more, reca il perdonono(죽어가는 사람이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오니 받아 주소서)이다. 레이체스터가 마지막으로 마리아와 작별을 고하기 위해 등장한다. 두 사람 모두 정신이 없는 듯이 보인다. 레이체스터는 분노의 심정을 표현한다. 마리아가 레이체스터에게 죽음을 앞둔 자기가 용기를 가지도록 지원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의 무고함을 항변한다. 마리아의 아리아가 Ah! se un giorno da queste ritorte(아, 어느날 그대가 팔을 내밀어서 나를 구해줄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제 그대는 나를 죽음의 장소로 이끄도다)이다. 그리고 마리아는 처형대로 걸어 간다.


메트로폴리탄 무대


[마리아 스투아르다의 실제 생애]

'마리아 스투아르다'의 주인공인 마리아(메리)를 영국의 블라디 메리(Bloody Mary)와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블라디 메리라는 별명의 메리는 헨리 8세의 첫번째 부인인 캐서린의 유일한 딸로서 나중에 영국의 여왕이 된 메리 1세를 말한다. 두 메리를 구분하기 위해서 스콜틀랜드의 메리는 메리 스투아트(Mary Stuart) 또는 '스코틀랜드의 메리'라고 부르며 영국의 메리는 블라디 메리라고 부른다. 마리아 스투아르다는 1542년 12월 8일에 태어났고 아버지인 제임스 5세는 그로부터 6일 후인 1542년 12월 14일에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의 위로는 두 오빠가 있었지만 모두 적자가 아니고 사생아였기 때문에 할수 없이 적자인 마리아가 다음 왕위를 이어 받았다. 마리아 스투아르다는 태어난지 1주일도 안되어서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되었고 1567년까지 25년간 여왕으로 있었다. 마리아 스투아르다는 여러 사정으로 1567년에 여왕의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그후 20년을 더 살다가 1587년,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일반적인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숙모뻘이 되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서 처형을 당했다.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은 1559년부터 1년간 프랑스의 왕비이기도 했다. 메리는 앞서 말한대로 1558년, 그가 16세 때에 프랑스의 왕세자와 약혼하였고 이어 이듬해인 1559년에 파리에 가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당시에는 왕세자비였으나 잠시후에 왕세자가 프란시스 2세로서 왕이 되자 당연히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무슨 운명인지 남편인 프란시스 2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 바람에 과부가 된 메리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서 남의 나라인 파리에 눌러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1961년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마리아에 손드라 라드바노브스키. 메트로폴리탄


그로부터 4년 후에 메리는 여왕으로서 혼자 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변의 적극적인 권고에 따라 그리고 추운 날씨에 잠잘 때면 허리가 시려서 허전하다는 이유로 사촌인 단리 경(Lord Darnley) 헨리 스투어트(Henry Stuart)와 재혼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은 행복하지 못한 것이었다.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가하면 단리경이 카사노바 사촌 쯤 되는 인물이어서 메리가 신경질이 나는 바람에 서로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아무튼 결혼하고 나서 2년이 지난 1567년 2월에 귀족들간의 갈등 때문인지 누가 헨리 스투어트의 저택에 폭탄을 설치해 놓는 바람에 저택이 크게 파손되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집이 폭파되는 틈을 타서 누가  그랬는지 모르지만 헨리가 정원에서 피살된채 발견되었다. 보스웰 경(Lord Bothwell)인 제임스 헵번(James Hepburn)이라는 사람이 헨리 스투어트의 죽음에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채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1567년 4월에 무죄로 인정을 받아 석방되었다. 제임스 헵번은 석방된 다음 달에 메리와 결혼하였으니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 메리와 헵번에 반대하는 쿠테타가 일어났고 메리는 체포되어 로크 레벤(Loch Leven)성에 감금되었다. 그리고 그해 7월에 혁명세력의 강요에 의해 폐위되었다. 메리는 전남편인 단리(헨리 스투어트)와의 사이에 제임스라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당시에 제임스는 겨우 한살이 지난 때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러면 안되는데 한살 짜리 제임스를 메리의 뒤를 잇는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추대하였다. 속이 상한 메리는 다시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두어번 별별 수단을 다 써보았지만 번번히 실패하였다. 메리는 어쩔수 없이 종질, 그러니까 가깝고도 먼 친척인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일신을 의탁키로 하고 영국으로 도피하였다. 메리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 친척간이 된다는 것은 다름아니라 메리의 할아버지인 제임스 4세의 부인, 즉 메리의 할머니인 마가렛이 헨리 7세의 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메리로서는 헨리 7세가 외증조부가 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로 보아서는 헨리 7세가 할아버지이다. 다시 말해서 메리는 엘리자베스에게 있어서 손녀뻘이 되는 셈이지만 복잡하므로 그냥 사촌의 자녀, 즉 종질(從姪)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자료에는 종질(a (first) cousin once removed)이라고 설명되어 있지만 또 어떤 자료에는 촌수를 따지는 것이 귀찮아서 그런지 그냥 사촌(cousin)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일이 좀 이상하게 돌아가느라고 옛날에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헨리 8세의 첫번째 왕비인 캐서린의 딸 메리(블라디 메리)가 영국의 여왕이 되었고 얼마후 블라디 메리가 세상을 떠나자 후임자를 누구로 정하느냐를 두고 논란이 많았었다. 마땅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헨리 8세의 두번째 부인인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가 천거되었지만 일각에서는 엘리자베스가 반역죄로서 처형 당한 죄인이므로 왕비로 간주할수 없으므로 앤 불린의 딸인 엘리자베스는 영국 여왕이 될수 없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런가하면 로마 가톨릭은(스코틀랜드도 로마 가톨릭이었다) 교황이 헨리 8세와 캐서린의 이혼을 승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헨리 8세가 앤 불린과 결혼했기 때문에 이는 중혼에 해당하는 죄이므로 두 사람의 소생인 엘리자베스는 사생아이기 때문에 영국의 정통 왕위를 계숭할수 없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하여 스코틀랜드의 메리가 자기야 말로 스튜어트 가문의 혈통을 이어 받은 최적격 후임자라고 하며 영국의 왕좌를 내 놓으라고 주장한바 있다. 그러다가 그것이 잘 안되어서 결국 앤 불린의 딸인 엘리자베스가 영국의 여왕이 된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여왕이 되기는 되었지만 메리가 미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메리가 엘리자베스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도와주었다가는 나중에 또 무슨 사단이 날지 모르므로 영국의 안위를 생각해서 메리를 연금상태로 두고 감시하였다. 그러기를 18년 반이라는 세월이 무심히도 흘렀다. 마침내 엘리자베스는 자기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주동하였다는 죄목을 걸어서 메리를 참수하였다. 이상이 간단하나마 메리 스투어트(마리아 스투아르다)의 파란만장한 생애였다.


마리아와 체칠. 메트로폴리탄. 조이스 디도나토


앤 불린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지만 메리 스투어트에 대한 이야기도 너무나 비극적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수많은 문화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어왔다. 코미디보다는 비극을 더 선호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인듯 싶다. 메리 스투어트에 대한 이야기를 문학작품으로 다룬 것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독일의 프리드리히 쉴러가 쓴 희곡인 '마리아 스투아르트'일 것이다. 5막으로 구성된 이 희곡은 각 막이 또 다시 여러 장으로 나뉘어져 있는 장편 비극이다. 쉴러의 희곡은 1800년 6월에 독일의 봐이마르에서 연극으로 초연되었다. 그리고 쉴러의 희곡을 바탕으로 도니체티가 1835년에 오페라 '마리아 스투아르다'를 작곡했다. 오페라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쉴러의 희곡의 대강 줄거리는 어떤 것인지 소개코자 한다.


다름슈타트.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스튜어트


스코틀랜드의 여왕을 지낸 메리 스투어트는 영국에 감금되어 있다. 명목상으로는 남편 단리 경을 살해했다는 죄목이지만 실제로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차지하고 있는 영국의 왕좌를 내놓으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반역죄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사형에 처한다는 판결문에 서명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메리와는 사촌간이기 때문이다. 메리는 언젠가는 자기의 권리가 회복될 것으로 믿는다. 메리는 엘리자베스의 조카가 되는 모티머(Mortimer)를 알게 되어 자기 편으로 만든다. (모티머는 실제 인물이 아니라 쉴러가 희곡에서 만들어 낸 가공의 인물이다.) 메리는 모티머에게 자기의 목숨을 걸기로 한다. 메리는 레이체스터 경인 로버트 더들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밀서를 보내기로 하고 모티머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다. 메리의 요청은 정치적으로 델리케이트한 것이기도 하지만 잘못하다가는 오히려 큰 낭패를 볼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더들리 경은 엘리자베스를 지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한편, 메리는 엘리자베스에게 직접 탄원하기 위해 만나기를 여러번이나 요청한다. 그리고 마침내 엘리자베스를 만날 기회를 얻는다. 실제로는 메리와 엘리자베스가 만난 일은 없다. 두 사람의 만남은 신랄한 언쟁으로 끝난다. 이로 인하여 메리는 엘리자베스가 바라는 대로 완전히 승복할 생각이 전혀 없게 된다. 메리는 권리를 회복한다는 소망이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 도니체티 페스티발


그런데 일이 더 꼬이느라고 메리를 추종하는 모티머가 메리를 감옥으로부터 구출하겠다는 생각으로 몇몇 부하들과 함게 감옥을 침입하였으나 탈옥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모티머는 어차피 사형 당할 것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에 엘리자베스는 신하들의 강력한 주장에 못이겨서 메리의 사형집행서에 서명을 한다. 사형집행서는 엘리자베스의 비서인 데이비슨(Davison)에게 전달된다. 하지만 사형집행서에는 어떻게 하라는 지시사항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말하자면 엘리자베스는 자기가 져야할 부담을 데이비슨에게 넘긴 것이다. 물론 엘리자베스는 데이비슨이 단독으로 사형을 집행하지 못하고 벌리경(Lord Burleigh)에게 주어서 실제적인 사형집행을 책임맡도록 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결국 메리에 대한 사형은 벌리경이 집행한다. 연극은 엘리자베스가 벌리경과 데이비슨이 메리를 처형한 장본인이라고 비난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엘리자베스는 벌리경을 귀양보내고 데이비슨은 런던탑에 가둔다. 연극에서 처음부터 메리에 대한 사면을 간청했던 슈르스베리 경(Lord Shrewsburgy)은 사직을 하며 레이체스터 경은 영국을 떠나 프랑스로 간다. 이제 엘리자베스는 주변에 아무도 없이 홀로 고독하다. 


[대표적인 음반] 마리아, 엘리사베타, 레이체스터의 순서이다.

- 1971년 비벌리 실스, 아이린 파렐(Eileen Farrell), 스투어트 버로우스(Stuart Burrows). 알도 체카도(Aldo Ceccato)가 지휘하는 런던 필

- 1975년 조앤 서덜랜드, 위게트 투랑고(Huguette Tourangeau), 루치아노 파바로티. 리챠드 보닝이 지휘하는 볼로냐 오케스트라

- 1982년 자네트 베이커(Dame Janet Baker), 로잘린드 플로우라이트(Rosalind Plowright), 데이빗 렌달(David Rendall). 챨스 매커라스가 지휘하는 ENO 오케스트라

- 1989년 에디타 그루베로바(Edita Gruberova), 아네스 발차(Agnes Baltsa), 프란치스코 아라이사(Francisco Arazia). 주세페 파타네가 .뮌헨방송 오케스트라

- 2001년 카르멜라 레미지오(Carmela Remigio), 소니아 가나시(Sonia Ganassi), 조셉 카예야((Joseph Calleja). 화브리치오 카르미나티가 지휘하는 베르가모 도니체티 오케스트라

- 2008년 마리엘라 데비아(Mariella Devia), 안나 카테리나 안토나치(Anna Caterina Antonacci), 프란체스코 멜리(Francesco Meli). 안토니노 폴리아니 지휘의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


엘리자베스와 마리아(손드라 라드바노브스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