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로베르토 드브러는 누구?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사랑한 사람
그러나 로베르토는 노팅엄 공작부인인 사라를 사랑하다
로버트 드브러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도니체티의 오페라 '로베르토 드브러'(Roberto Devereaux)의 주인공인 로버트 드브러는 실존인물이다. 16세기에 영국에서 살았던 귀족이다. 당시에 영국의 군주는 헨리 8세의 두번째 왕비인 앤 불린에게서 태어난 엘리자베스였다. 로베르토 드브러와 엘리자베스는 먼 친척이 된다. 로베르트의 어머니인 레티스가 엘리자베스의 어머니인 앤 불린의 조카의 딸이 되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로베르토를 대단히 총애했다. 실은 먼 친척간이지만 총애를 지나서 사랑하는 경지였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상당히 많았지만 그런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로베르토보다 무려 32년이나 연상이었다. 그런데도 엘리자베스는 로베르트를 사랑해서 한때는 결혼할 생각까지 했다. 로베르토는 그런 엘리자베스가 부담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로베르토는 사라라고 하는 귀부인을 사랑하여서 장래까지 약속한바 있었다. 그러는 중에 아일랜드에서 영국에 대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당시 아일랜드는 영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일랜드의 반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더 기승을 부리자 로베르토를 사령관으로 삼아서 아일랜드의 반란을 진압토록 했다. 로베르토는 훌륭한 군인이었지만 아일랜드의 반란세력이 너무 강력하여서 진압은 커녕 오히려 실패만 거듭하였다. 한편, 로베르토가 아일랜드에 주둔하고 있는 중에 사라는 노팅엄 공작과 결혼했다. 노팅엄 공작은 로베르토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가까운 친구였는데도 자기의 결혼 이야기를 로베르토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나저나 실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라와 노팅엄의 결혼을 거의 강요하다시피해서 주선했다고 하는데 그 속셈이 무엇인지는 알수가 없었다. 그런저런 사정을 아무것도 모르는 로베르토는 아일랜드에서 반란군과 일단 휴전협정을 맺은 후에 런던의 사정이 궁금해서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여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아일랜드를 떠나 런던으로 왔으므로 로베르토의 행위는 직무유기나 마찬가지였다. 로베르토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런 로베르토를 법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며 난리도 아니었했다. 런던에 돌아온 로베르토는 사랑하는 사라가 이미 자기 친구와 결혼한 것을 알게 되었다. 로베르토는 허탈한 심정이 되었다. 여기에 자기를 질투하고 모함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넘쳐나자 정부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쿠테타를 생각하기도 했다. 물론 쿠테타는 불발로 돌아갔다. 그 일이 알려지자 로베르토는 반역죄의 명목으로 재판을 받아야 했다. 아일랜드에서 반란세력을 진압하지 못하고 오히려 휴전을 맺은 일, 여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임지를 떠나서 런던으로 돌아온 일 등도 고소의 사유에 포함되었다. 재판은 거의 2년이나 끌었지만 오페라에서는 단 하루만에 끝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재판에서 로베르토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총애하던 로베르토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노팅엄의 부인이 된 사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증오심과 질투심에서 마침내 사형집행장에 서명하였ㄴ다. 로베르토는 사랑을 꽃피우지도 못한 채, 정치적인 야망을 이루지 못한 채 39세라는 한창 나이에 이세상을 하직하였다. 로베르토는 현재의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선조이기도 하다.
로베르토 드브러(로버트 드브러: 1565. 11. 10-1601. 2. 25)는 제2대 에섹스 경(2nd Earl of Essex)이다. 에섹스 가문은 16세기로부터 영국에서 가장 훌륭한 귀족 가문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로베르트(로버트)라고 부르지 않고 간단히 에섹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에섹스는 1565년 11월 10일 태어났다. 아버지는 1대 에섹스 경인 월터 드브러(Walter Devereaux)였고 어머니는 레티스 노울즈(Lettice Knollys)였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로베로트의 어머니 레티스 노울즈는 앤 불린 왕비의 조카의 딸(grandniece)이었다. 레티스는 엘리자베스와는 어릴 때부터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촌수로 본다면 레티스와 엘리자베스는 8촌(first cousin twice removed)이라고 할수 있다. 따라서 레티스의 아들인 로베르토와 앤 불린의 딸인 엘리자베스는 먼 친척이 되지만 촌수를 따지면 귀찮으니까 일반적으로는 사촌이라고 불렀고 사촌간에 결혼하는 것은 별 일도 아니던 시대였다.
로베르토의 아버지로서 제1대 에섹스 경은 로베르토가 11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비록 어리지만 로베르토가 제2대 에섹스 경의 자리에 올랐다. 로베르토는 캠브릿지의 트리니티 대학에 들어갔고 공부를 잘해서 1581년, 16세 때에 이미 학사학위(MA)를 받았다. 그보다 앞서서 1578년, 그러니까 로베르토가 13살이고 아버지가 세상 떠난지 2년이 되던 해에 어머니는 뜻한바 있어서 명문 귀족인 레이체스터 경 로버트 더들리(Robert Dudley)와 재혼하였다. 레이체스터 경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오래전부터 총애하던 사람이었고 로베르토에게는 대부(godfather)였다. 그런저런 관계로 로베르토는 어렵지 않게 궁중 출입을 할수 있었고 엘리자베스와도 자주 접촉할수 있었다. 로베르토는 궁중출입을 하고 여왕의 총애를 얻기 전에 계부인 레이체스터 경의 주선으로 네덜란드에 가서 군사훈련을 받았고 실제로 군대에도 복무하였다. 로베르토는 25살 되던 해에, 즉 1590년에 프란시스 월싱엄 경의 딸인 프란세스 월싱엄(Frances Walsingham)과 결혼하였다. 그런데 당시에는 한다하는 귀족이라면 정부(mistress)를 하나 쯤 두는 것이 일종의 묵인된 관례처럼 되어 있어서 로베르토도 그런 분야에 소질이 다분하여서인지 엘리자베스 사우드웰이라는 여인을 정부로 두었고 아들까지 하나 두었다.
로버트 드브러 초상화
로베르토가 궁정 출입을 하기 시작한 것은 결혼하기 6년 전부터였다. 그러다가 3년이 지나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총애를 듬뿍 받는 입장이 되었다. 뛰어난 언변과 그럴듯하게 순진해 보이는가 하면 어떤 때는 멜랑콜리한 모습으로 엘리자베스의 마음을 즐겁게도 해주고 동정심을 갖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로베르토는 쇼맨쉽이 탁월하여서 궁정 여인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가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웃음 꽃이 피었다. 그가 말하는 사랑의 이야기는 여인들의 마음을 들뜨기 만드는 것이었다. 여왕의 총애를 받게 되니 젊은 나이에 승진도 빨랐다. 1587년에는 22세의 젊은 나이에 계부인 레이체스터 경의 후임으로 마스터 오브 호스(Master of Horse)로 임명되었다. 호칭이야 '말의 마스터'이지만 실은 왕실의 예식에서 세번째로 서열이 높은 장관급 직위였다. 계부인 레이체스터 경이 건강이 악화되어 공무를 수행할수 없게 되어 의붓아들 로베르토가 그 직위를 이어 받았언 것이다. 레이체스터 경은 병마와 싸우다가 결국 1588년에 세상을 떠났다. 여왕은 레이체스터 경이 누리던 스위트 와인의 전매권을 로베르토가 이관 받도록 조치해 주었다. 이로써 로베르토는 주세를 받을수 있게 되어 경제적으로도 튼튼한 입장이 되었다. 로베르토는 계속해서 1593년에 추밀원의 멤버가 되었다. 그가 28세 때였다. 그렇게 젊은 추밀원(Privy Council) 멤버는 전례가 없었던 것이었다. 로베르토는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직위가 높아지고 재산도 많으니까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버릇이 생겼다. 실제로 로베르토는 엘리자베스를 과소평가하였다. 예를 들어 여왕의 개인비서인 나이 많은 로버트 세실 경을 공공연하게 경멸하는 경우였다. 그것은 곧 여왕을 경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느날에는 로베르토가 세실 경을 지나치게 경멸하는 바람에 여왕이 로베르토의 뺨을 때린 일이 있었다. 로베르토는 그 자리에서 칼을 빼려고 했으나 참았다. 만일 칼을 빼어 들고 세실 경이던지 누구던지에게 대들었다가는 아마 당장 사형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로베르토의 아버지인 월터 드브러. 1대 에섹스 경
로베르토는 1589년에 프란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의 잉글리쉬 아르마다(English Armada)이라고 불리는 영국 해군에 참여한 바 있다. 그때 영국의 해군은 스페인의 무적함대(아르마다)를 물리치고 기고만장해 있었다. 로베르토는 영국의 아르마다가 스페인 깊숙히 들어가서 아예 스페인의 아르마다에게 타격을 주려한다는 소식을 듣자 이 기회에 영국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생각으로 프란시스 드레이크의 함대에 참여했던 것이다. 여왕은 젊은 로베르토가 혹시라도 무슨 변이나 당하지 않을까해서 만류하였으마 말솜씨로는 로베르토를 당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일약 잉글리쉬 아르마다에 탑승하였던 것이다. 해적 출신인 드레이크의 잉글리쉬 아르마다는 별다른 소득을 올리지 못했지만 젊은 로베르토는 좋은 전투경력을 쌓은 셈이었다. 로베르토는 이어 1591년에 프랑스왕 앙리 6세를 지원하는 파병에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1596년에는 저 유명한 카디즈 탈환 작전에도 참여하여 이번에는 두드러진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1597년에는 영국함대의 제독으로서 여왕의 지시를 어기고 불필요하게 스페인 보물선을 추격하다가 낭패를 본 일도 있었다. 즉, 스페인 함대는 영국 함대가 먼 바다에 나가 있는 동안에 영국 해안에 접근하여 포탄을 퍼부었다. 영국은 무방비 상태에서 걷잡을수 없는 혼돈에 빠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여왕과 로베르토의 관계가 악화되기까지 했다. 다행하게도 갑자기 바다에서 폭풍이 일어나는 바람에 스페인 함대는 잠시 상륙했다가 철수하지 않을수 없었다. 로베르토의 영국 함대는 며칠 후에 소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식으로 영국 해안으로 돌아왔다. 하여튼 로베르토는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면서 군사 경력을 축적하였으니 그같은 경력이 얼마 후에 아일랜드의 반란을 진압하는 영국군 사령관으로 임명되는 계기가 되었다.
잉글리쉬 아르마다(영국 해군함대). 스페인과의 아르마다 전쟁에서. 1585-1607.
로베르토는 1599년에 아일랜드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아일랜드 총독은 Lord Lieutenant 라고 불렀다. 이 명칭은 1922년 아일랜드가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독립하고 북아일랜드는 영국에 속하게 되던 때까지 사용되었던 호칭이었다. 로베르트의 일생에서 가장 큰 실패는 그가 아일랜드 총독으로 있을 때 발생하였다. 당시에 아일랜드에서는 영국에 대항하여 전부족들이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아일랜드 독립전쟁은 1595년에 시작하여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9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를 '9년 전쟁'(Nine Years' War)라고 부른다. 이 9년동안 어떠한 영국 사령관도 반란군들을 진압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반란군의 총사령관은 타이론 경 휴 오닐(Hugh O'Neill)이었다. 반란군은 영국과 앙숙이던 스페인과 스코틀랜드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영국은 아일랜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1만 6천명이라는 병력을 파견하였다. 로베르토가 1만 6천이라는 대병력을 지휘하였다. 로베르토가 아일랜드로 가기 위해 런던을 떠날 때 많은 궁신들이 로베르토를 열렬하게 환송하였다. 로베르토라면, 그리고 1만 6천이나되는 병력이라면 아일랜드의 반란을 당장 진압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휴 오닐. 영국으로 볼 때는 반란군의 수괴이지만 아일랜드로서는 독립영웅이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사정은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로베르토는 런던의 추밀원에게 전략을 보고하면서 얼스터에서 아일랜드 반란군과 결전을 치루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일랜드의 남부를 공략하였다. 결국 영국군은 지지부진한 전투에서 큰 손실만 입었다. 한편, 아일랜드 반란군은 아일랜드의 다른 지역에서 영국군과 전투를 벌여 상당한 승리를 거두었다. 로베르토는 반란군의 수장인 휴 오닐과 정면으로 대치하여 결판을 내는 대신에 휴전협상을 하였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로베르토의 이같은 조치를 영국 왕실에 대한 모욕이며 영국에 대단한 손해를 끼치는 일이라고 말했다. 여왕 자신도 로베르토에게 아일랜드를 포기할 생각이었다면 로베르토를 파견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서운함을 표시하였다. 로베르토는 아일랜드에 있으면서 여러 명의 휘하 장교들에게 기사작위를 수여하였다. 기사작위는 여왕도 웬만해서는 주지 않는 작위인데 로베르토는 아일랜드 총독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서 휘하 장교들에게 기사작위를 주었던 것이다. 기사작위를 받은 장교들은 로베르토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을수 없었다. 로베르토가 아일랜드에서의 임기를 마칠 즈음에는 영국 본토에서 기사작위를 받은 전체 기사의 거의 반에 해당하는 숫자가 아일랜드에서 로베르토에 의해 기사작위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9년 전쟁에서 아일랜드 반란군이 본대로 귀환하자 백성들이 환영하고 있다.
로베르토는 1599년 9월 24일에 아일랜드를 떠나 사흘 후에 런던에 도착했다. 로베르토는 아일랜드 총독에게 부여한 권한으로 여행을 하는데 누구의 승인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여왕은 로베르토에게 아직 반란이 진압된 것이 아니므로 돌아오지 말라고 명령을 내린 일이 있다. 그런데 어느날 로베르토가 여왕의 침실에 모습을 나타내자 깜짝 놀랐다. 여왕은 옷을 제대로 입지 않았으며 머리에 가발을 제대로 쓰지 않은 상태였다. 여왕은 기가 막혀서 로베르토에게 당장 나가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날 추밀원 회의가 세차례나 열려 로베르토 문제를 논의했으나 로베르토가 아무리 제멋대로였지만 그렇다고 처벌할 정도는 아니라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여왕은 대단히 화가 나서 '버릇없는 짐승에게는 여물도 주지 말아야 한다'(An unruly beast must be stopped of his provender)면서 로베르토를 자기 거처에서 나오지 못하게 연금하였다. 며칠후 로베르토는 추밀원 회의에 참석해서 다섯 시간이나 심문을 받아야 했다. 추밀원은 '로베르토가 반란군 수괴인 오닐과 휴전을 맺은 것은 변호할 여지가 없는 불복종이며 아일랜드를 떠나 런던으로 온 것은 직무유기와 동등하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로베르토는 10월 1일부터 리챠드 버클리 경의 요크 하우스에 연금되었다. 로베르토는 사람들에게 랄리와 세실이 여왕을 부추켜서 자기에게 적대감을 갖게 했다고 비난하였다. 사람들은 로베르토에게 모든 공직에서 은퇴하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를 했다. 사람은 박수를 받을 때에 무대에서 내려와야 하지만 로베르토는 자기가 대중들로부터 인기가 높다는 점을 내세우며 주저하였다.
오페라에서 로베르토와 엘리사베타(손드라 라드바노브스키). 메트로폴리탄
로베르토는 자기를 그렇게도 총애해 주던 엘리자베스가 싫어졌다. 여왕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로베르토는 요크 하우스에 연금되어 있으면서 마운트조이 경(Lord Mountjoy)을 통해서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와 연락을 취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제임스 6세는 메리 여왕의 아들로서 태어난지 1년 후인 1567년에 스코틀랜드의 왕이 된 인물이다. 1603년에 엘리자베스가 세상을 떠나자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통합되었고 제임스 6세가 제임스 1세로서 통합된 영국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두 왕국이 통합되었다고 해도 각각 의회와 정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군주만이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로베르토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영국의 왕좌까지 차지하게 되기를 바란 듯 싶다. 물론 그 일에 로베르토가 도울 일은 하나도 없었다. 로베르토가 런던으로 돌아온지 한 달 후인 10월에 마운트조이 경이 로베르토를 대신하여 아일랜드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마운트조이 경은 로베르토와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로베르토의 문제도 해결될 전망이 보였다. 여왕도 마음이 누그러졌는지 '로베르토가 아일랜드 반란세력의 대표인 오닐과 휴전을 맺은 것은 센스있는 처사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추밀원의 몇몇 멤버들은 '로베르토가 아일랜드를 떠나 런던에 온 것은 사령관으로서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면서 로베르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여왕의 개인비서격인 세실은 로베르토를 그대로 둘수 없다고 생각했다. 1600년 6월에 로베르토는 18명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에 불려가서 무릎을 꿇고 판결을 들어야 했다. 로베르토는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이에 따로 모든 공직에서 파면되었고 사실상의 연금상태에서 지내게 되었다.
도니체티의 오페라 '로베르토 드브러'에서 타이를 롤을 맡은 지안루카 테라노바
두달후, 로베르토는 자유롭게 다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주수입원인 스위트 와인에 대한 주세 징수권은 갱신되지 않았다. 로베르토의 사정은 점점 절망적으로 변해 갔다. 그는 처음에는 슬픔과 후회의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얼마 후부터는 분노와 반항의 마음으로 넘치게 되었다. 1600년에 들어서자 그는 에섹스 하우스를 하나의 요새처럼 만들고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몇몇 귀족들과 지식인들, 사회지도층 인사들 일부가 로베르토에 합세하였다. 2월 8일, 그는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인사들과 함께 에섹스 하우스를 나와 런던으로 향하였다. 여왕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세력을 과시하고 싶어서였다. 여왕의 개인비서인 세실은 당장 로베르토를 반역자라고 선언하면서 재빠른 방어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세실은 우선 존 레브슨 경(Sir John Leveson)의 휘하에 있는 병사들을 소집하여 러드게이트 힐(Ludgate Hill)의 길을 막고 로베르토 일행이 접근해 오는 것을 차단코자 했다. 로베르트와 일행은 병사들의 방어를 뚫고 전진하려고 했으나 부상자만 생기고 성공하지 못했다. 로베르트의 계부인 크리스토퍼 블라우트 경도 그 과정에서 부상을 당했다. 로베르토는 중과부적이어서 할수 없이 추종자들과 함께 에섹스 하우스로 돌아왔다. 곧이어 왕실 근위대가 에섹스 하우스를 포위하고 개미새끼 한마리도 드나들수 없게 했다. 로베르토는 결국 항복하였다.
로베르토가 감금되었다가 처형당한 런던 탑. 현재의 모습. 런던 탑에서의 처형은 로베르토 이후 시행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1601년 2월 19일, 로베르토는 반역죄로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죄명은 '여왕을 폐위하고 시해하려 했으며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고소장에는 또한 '로베르토가 스스로 영국의 왕관을 차지하려고 했으며 이로써 유서 깊은 왕실의 존엄을 찬탈하려 했다'고 되어 있었다. 이어 고소장에는 '이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로베르토와 그의 추종자들이 공공연한 반란에 참여하였으며 런던으로 들어와서 수많은 시민들에게 자기들의 반란에 합세하여 달라고 설득했고 그러한 과정에서 여왕폐하의 충성스런 신하들을 사상케 했다'고 설명했다. 고소장에는 또한 로베르토가 키퍼 경과 그외의 추밀원 멤버들을 4시간여 동안 감금했다고도 했다. 로베르토는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아 1601년 2월 25일 사형에 처해졌다. 사형은 런던탑의 그린 타워에서 집행되었다. 로베르토는 런던탑에서 참수형을 받은 마지막 인물이었다. 사형집행인은 토마스 데릭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전에 강간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로베르토가 사면을 주선해 주었던 사람이다. 로베르토는 데릭을 타이번 지방의 사형집행인이 되는 조건으로 사형을 면제해 주었다. 사형집행을 직업으로 갖게 된 데릭은 이번에는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로베르토의 사형을 집행해야 했다. 데릭은 로베르토의 목을 한번에 자르지 못하고 세번이나 내려친 후에 잘랐다고 한다. 로베르토는 반역죄로 사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그의 귀족작위는 무효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아들이 얼(Earl)이라는 작위를 상속받지 못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임스 1세가 새로운 왕이 되지 로베르토의 아들을 제3대 에섹스 경으로 복귀시켜 주었다.
로베르토의 부인인 프란세스 월싱엄과 아들 로버트. 1594년
엘리자베스가 사랑하는 로베르토에게 특별한 반지를 하나 주었다는 얘기가 있다. 만일 로베르토가 대단히 큰 잘못을 저질러서 사형에라도 처해질 위기에 있을 때에 그 반지를 엘리자베스에게 전해 주면 로베르토의 죄가 사면된다는 얘기이다. 로베르토는 추밀원이 그를 반역죄로 선고하여 사형에 처해질 운명에 있자 그 반지를 엘리자베스에게 보내어 사면을 받을 생각이었다고 한다. 로베르토는 그 반지를 노팅엄의 부인인 사라에게 주어서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라는 남편 노팅엄이 로베르토의 적이었기 때문에 반지를 일부러 늦게, 로베르토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후에야 엘리자베스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사라는 그런 사실을 죽기 전에 엘리자베스에게 고백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는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용서할수 없습니다.'라고 말해 주었다고 한다. 오늘날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박물관에는 금반지 하나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것이 엘리자베스가 로베르토에게 주었던 반지라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상당수의 역사학자들은 로베르토의 반지 이야기가 전설일 뿐이며 사실은 아니라고 내세웠다.
'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 > 집중탐구 150편 ' 카테고리의 다른 글
72. 자코모 푸치니의 '제비'(La Rondini) (0) | 2016.10.14 |
---|---|
71. 게타노 도니체티의 '케닐워스 성'(Il castello di Kenilworth) (0) | 2016.10.08 |
70. 게타노 도니체티의 '로베르토 드브러'(Roberto Devereaux) (0) | 2016.10.05 |
69. 게타노 도니체티의 '마리아 스투아르다'(Maria Stuarda) (0) | 2016.10.01 |
67. 아놀트 쇤베르크의 '모세와 아론'(Moses und Aron) (0) | 2016.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