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집중탐구 150편

78. 쥘르 마스네의 '베르테르'(Werther)

정준극 2016. 10. 25. 11:43

베르테르(Werther)

쥘르 마스네의 4막 낭만주의 오페라

원작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


베르테르와 샬로테의 즐거운 시간. 샬로테의 어린 동생 소피도 함께. 소설의 삽화


'베르테르'는 프랑스 낭만주의 오페라의 거장인 쥘르 마스네(Jules Emile Frederic Massenet: 1842-1912)의 4막 오페라이다. 오페라의 장르로 볼 때에는 드라마 리리크(drame lyrique)에 속한다. 오페라 '베르테르'는 독일의 위대한 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서한체 소설인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nden des jungen Werthers: The Sorrows of Young Werther)을 원작으로 삼은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 자신의 젊은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삼은 작품이라고 한다. 괴테의 이 소설은 1774년에 처음 발간되었다. 1774년이면 미국이 독립한 해이며 우리나라로서는 조선조 영조의 치하였으니 오래 전이긴 오래 전이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나오자마자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 비극적인 사랑의 종말에 공감하여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심지어 훗날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라는 신조용어가 나올 정도였으니 이 소설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는 말 안해도 알만한 일이었다. '베르테르 효과'가 어떤 것인지는 나중에 설명키로 하고, 이렇듯 인기를 끈 소설이므로 오페라로 만들어지지 않을수 없었다. 처음에 오페라로 만들어진 것은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지휘자이고 작곡가인 로돌프 크로이처(Rodolphe Kreutzer: 1766-1831)가 일찍이 1792년에 작곡한 '베르테르'였다. 다음으로는 이탈리아의 빈첸초 푸치타(Vincenzo Pucitta: 1778-1861)가 1802년에 작곡한 역시 '베르테르'라는 제목의 오페라였다. 그러다가 한참 후에 프랑스에서 벨르 에포크 시대가 한창일 때에 마스네가 '베르테르'를 내 놓았는데 어찌나 감동적이고 탐미로웠던지 그 전에 나온 오페라들은 마스네의 '베르테르'의 그늘에 가려져서 잊혀지고 말았다.



'베르테르'(후안 디에고 플로레스). 크리스마스 이브에 샬로트로부터 받은 편지를 태우는 베르테르


괴테의 원작을 프랑스어 오페라 대본으로 만든 사람들은 세사람이나 된다. 세사람이 합작해서 대본을 완성했으니 그만큼 정성을 들이고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썼다는 얘기다. 세사람의 대본가는 에두아르 블라우(Edouard Blau: 1836-1906), 폴 밀리에(Paul Milliet: 1848-1924), 조르즈 하르트만(Georges Hartmann: 1843-1900)이다. 모두 당대의 극작가이며 오페라 대본의 대가들이었다. 에두아르 블라우는 마스네를 위해 '르 시드'의 대본을 쓰기도 했다. 폴 미예는 아마 가장 대표적인 벨르 에포크 시기의 극작가 겸 대본가일 것이다. 대표적인 대본은 칠레아의 '아드리아나 르쿠브러'이다. 조르즈 하르트만은 앙리 제르몽이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사람이다. 마스네를 위해서는 '에로디아드' 등의 대본을 썼다. 마스네는 '베르테르'를 1885년부터 작곡을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신교육의 선구자인 배재학당이 처음 문을 연 해이다. 마스네는 2년 후에 '베르테르'를 완성해서 파리 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레옹 카르발로(Leon Carvalho)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카르발로는 시나리오가 너무나 심각하고 무겁기 때문에 오페라 코미크에는 맞이 않는다고 하면서 공연하기를 거절했다. 그럴 즈음에 마침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불이났다. 공연이고 무어고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게다가 마스네는 주문 맡은 다른 오페라인 '에스클라몽드'(Esclamonde)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래서 '베르테르'는 한쪽으로 밀어 놓아질수 밖에 없었다. 그때 마스네의 '마농'으로 성공을 본 비엔나의 호프오퍼(Hofoper: 현재의 슈타츠오퍼)가 마스네에게 또 다른 작품을 공연하고 싶은데 없느냐고 물었고 이에 마스네는 책장에 넣어 두었던 '베르테르'를 건네 주었다. 그리하여 파리에서 소외되었던 '베르테르'는 비엔나의 호프오퍼(궁정오페라극장)에서 1892년 2월 26일 첫 공연을 가질수 있었다. 작곡을 완성한지 5년 후였다. 대본은 막스 칼베크(Max Kalbeck)라는 사람이 프랑스어를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비엔나 초연에서 샬로테의 이미지를 창조한 메조소프라노는 마리 르나르(Marie Renard)였으며 베르테르의 이미지를 창조한 테너는 에르네스트 반 다이크(Ernest van Dyck)였다.

 

 '베르테르'가 초연된 비엔나의 호프오퍼(현재는 슈타츠오퍼)


프랑스어 대본의 '베르테르'가 초연을 가진 것은 비엔나 초연이 있었던 바로 그해도 저물어가는 12월 27일 제네바에서였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프랑스어의 '베르테르'가 처음 공연된 것은 1년 후인 1893년 1월 16일 샤틀레에 있는 테아트르 리리크에서 오페라 코미크에 의해서였다. 파리 초연에서 샬로테는 마리 델나(Marie Delna)가 맡았고 타이틀 롤은 귀욤 이보스(Guillaume Ibos)가 맡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비엔나와 제네바와는 달리 파리에서의 공연은 당장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베르테르'가 오페라 코미크의 레퍼토리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1903년 유명한 연출가인 알베르 캬레(Albert Carre)가 무대에 올린 때부터였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베르테르'는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여서 오페라 코미크에서만 1천 1백회 이상의 공연실적을 기록하는 대기염을 토했다. 오페라 코미크에 소속된 테너 레옹 바일(Leon Beyle)은 마치 살아 있는 베르테르처럼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미국 초연은 1894년 3월 시카고에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공연한 것이었다. 3주 후에는 메트로폴리탄의 본부인 뉴욕에서 공연되어 만원사례를 기록했다. 영국 초연은 1894년 6우러 코벤트 가든에서였다. 샬로테는 당대의 소프라노 엠마 임스(Emma Eams)가 맡았고 베르테르는 당대의 테너 장 드 레츠케(Jean de Reszke)가 맡은 공연이었다. 그러나 1회로서 끝났다. 오늘날 '베르테르'는 세계 각지에서 빈번하게 공연되는 스탠다드 레퍼토리가 되었다. 그리고 레코딩 기술의 발달과 함께 여러번 음반으로 취입되었다. 베르테르는 테너이지만 마스네는 1902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공연에서 바리톤 마티아 바티스티니(Mattia Battistini)를 기용하기 위해 몇가지 아리아들을 바리톤에 맞게 조정한 일도 있다. 베르테르를 바리톤이 맡는 공연은 그후 겨우 한두차례 더 있었을 뿐이었다.


  

1892년 비엔나 초연에서 샬로테를 맡은 마리 르나르와 베르테르를 맡은 에르네스트 반 다이크. 오른쪽은 파리 오페라 코미크의 테너인 레옹 바일. 우수에 넘쳐 있는 듯한 모습과 미성의 베르테르로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등장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시기는 1780년대 어느해의 7월부터 12월까지이다. 장소는 독일의 베츨라르이다. 베츨라르는 독일 중서부의 헤센주에 있는 고도이다.


- 샬로테(Charlotte: MS). 20세. 알베르의 약혼녀

- 베르테르(Werther: T). 23세. 젊은 시인

- 소피(Sophie: S). 15세. 샬로테의 동생

- 알베르(Albert: Bar). 25세. 샬로테의 약혼자

- 르 바일리(Le Bailli: B). 50세. 샬로테와 소피의 아버지. 바일리프(Bailiff)

- 슈미트(Schmidt: T). 바일리의 친구

- 요한(Johann: Bar). 바일리의 친구

- 브륄만(Bruhlmann: T). 어떤 젊은이

- 캐첸(Kathchen: MS). 일곱살이지만 브륄만의 피앙세

- 바일리의 아이들, 즉 프리츠(Fritz), 막스(Max), 한스(Hans), 칼(Karl), 그레텔(Gretel), 클라라(Clara); 베츨라르(Wetzlar)의 주민들, 손님들, 하인들, 무대 밖에서 소리를 내는 여인들과 아이들


독일 중서부 헤센주에 있는 베츨라르. 베르테르의 무대가 된 도시이다.


[1막] 아직 7월인데 바일리씨는 자기 집의 정원에서 자녀들에게 크리스마스 캐롤을 연습시키고 있다. 바일리는 얼마전 상처하여 혼자이다. 바일리의 친구이며 이웃들인 슈미트와 요한이 찾아온다. 그날 저녁 마을 여관에서 열릴 무도회에 대하여 논의하기 위해서이다. 바일리의 큰 딸인 샬로테가 무도회에 나오기로 했는데 파트너인 약혼자 알베르가 출타 중이기 때문에 혹시 참석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찾아온 것이다. 바일리는 오늘저녁 무도회에는 베르테르라고 하는 젊은 시인이 샬로테를 에스코트 할것이라고 말한다. 잠시후 베르테르가 도착한다. 베르테르는 샬로테를 만나서 매우 기쁜 모습이다. (O Nature, plein de grace). 베르테르는 샬로테가 동생들을 위해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한다. 샬로테는 저녁을 마치고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어가는 것을 챙겨 준 후에 베르테르와 함께 무도회로 떠난다. 바일리는 아이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마을의 주막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런데 뜻밖에도 멀리 출타했던 알베르가 돌아와서 샬로테의 집을 찾아온다. 알베르는 집안에 어른들은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한다. 알베르는 샬로테의 여동생인 소피와 얘기를 나눈 후에 내일 아침 일찍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 떠난다. 한편, 베르테르는 무도회가 끝나고 샬로테를 집으로 바래다 주면서 마치 오랫동안 가슴 속에 숨겨 놓았던 말을 하듯이 샬로테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런 말을 들은 샬로테는 잠시 당황한 눈빛이다. 베르테르가 샬로테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는데 마침 샬로테의 아버지인 바일리가 주막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 서로 만난다. 그래서 베르테르는 샬로테와 더 이상 속마음을 털어 놓는 얘기를 나누지 못한다. 집에 돌어온 바일리는 알베르의 장갑이 있는 것을 보고 알베르가 왔다 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편, 베르테르는 샬로테의 약혼자인 알베르의 존재를 생각하고 자기가 샬로테를 사랑한다는 것은 부질 없는 짓이라는 생각을 한다. 베르테르는 샬로테가 했던 말을 생각해 본다. 샬로테는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어머니에게 알베르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다는 얘기이다. 베르테르는 샬로테로부터 그 말을 듣고 절망감을 갖게 된다. 베르테르는 샬로테에게 알베르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다.


무도회 장면. 베르테르와 샬로테가 춤을 추고 있다.


[2막] 샬로테와 알베르가 결혼한지도 3개월이 지난다. 샬로테와 알베르는 손을 잡고서 행복한 모습으로 마을 광장을 거쳐 교회로 가고 있다. 교회 목사님의 금혼식(결혼 50주년)을 축하하는 모임에 가는 것이다. 두 사람의 뒤에 베르테르가 따라가고 있다. 베르테르는 아직도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다. (Un autre est son epoux!). 알베르는 교회에 들어가기 전에 베르테르의 기분을 부추켜 주려고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다. 소피도 베르테르의 미음을 돌려보려고 하지만 소용이 없다. (Du gai soleil, plein de flamme). 얼마후 교회 모임이 끝나서 샬로테가 교회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베르테르가 다가가서 석달 전 처음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던 얘기를 한다. 샬로테는 베르테르가 아직도 자기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걱정한다. 그러면서 베르테르에게 당분간 마을을 떠나 다른 곳에 가서 있다가 크리스마스 때에나 돌아오면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당장 눈 앞에서 보이지 않으면 점점 잊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다. 그러면서도 크리스마스에는 다시 만날수 있다는 힌트를 준 것이다. 샬로테의 제안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후로도 베르테르는 우울하게 지내면서 급기야는 자살하겠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한다. (Lorsque l'enfant revient d'un voyage). 소피가 베르테르를 측은하게 여겨서 어떻게 해서든지 생각을 돌려보려고 노력하지만 그것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베르테르는 소피에게 다 듣기 싫으니 어서 사라지라고 소리치자 소피는 그만 눈물을 떨구면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그런 소피를 샬로테가 위로해 준다. 그런 모습을 본 알베르는 베르테르가 정말로 샬로테를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다. 알베르는 베르테르의 이상하고 잘못된 행동들을 보면 누구든지 알수 있는 노릇이라는 생각을 한다.


번민하는 베르테르. 메트


[3막] 크리스마스 이브이다. 샬로테가 혼자 집에 있다. 샬로테의 마음 속에는 어느덧 베르테르의 존재가 억지로나마 자리잡고 있다. 샬로테는 베르테르가 보낸 편지들을 다시 읽어 보기로 한다. 베르테르의 진심을 파악하고 싶은 생각에서이다. 편지를 읽던 샬로테는 비탄의 심정으로 마음이 흔들린다. (Werther! Qui m'aurait dit...Ces lettres!) 샬로테는 하나님에게 용기를 달라고 기도한다. 샬로테는 전에 베르테르에게 마을을 떠나서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베르테르가 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친다. 샬로테는 불현듯 불쌍하고 가련한 베르테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샬로테를 동생인 소피가 위로하며 힘을 내라고 격려한다. (Ah! le rire est beni). 하지만 샬로테의 마음은 안정을 얻지 못한다. (Va! laisse couler mes larmes). 그때 뜻밖에도 베르테르가 들어선다. 베르테르는 샬로테가 자기의 편지들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본다. 베르테르를 본 샬로테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다. 샬로테는 베르테르에게 편지 내용 중에 오시안(Ossian)의 시를 번역한 구절이 있는데 그 부분을 읽어 달라고 부탁한다. [오시안은 아일랜드 신화에 나오는 대서사시인이다. 갤릭어로 된 오시아의 시를 스코틀랜드의 작가인 제임스 맥퍼슨이 번역하였다.] 베르테르는 오시안이 자기의 죽음을 예견하여 쓴 구절들의 몇 소절을 큰 소리로 읽어준다. (Pourquoi me reveiller?). 그러자 샬로테가 베르테르에게 제발 그만 읽으라고 부탁한다. 베르테르는 샬로테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보낸 편지들을 읽고 있을리가 없으며 더구나 오시안의 구절들을 읽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샬로테는 이미 남의 부인이 된 사람이 아닌가! 베르테르는 샬로테와의 사랑이 이루어질수 없는 것임을 이미 알고서 샬로테에게 마지막 작별을 하러 찾아온 것이다. 베르테르는 여러가지 감정이 북바쳐서 자기도 모르게 샬로테를 포옹코자 한다. 잠시동안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포옹한다. 그러다가 샬로테가 반사적으로 베르테르를 피하면서 저만치 물러선다. 베르테르는 슬픈 마음을 이겨내려고 할수 있는대로의 노력을 하고 있다. 베르테르는 결국 자기의 번민을 끝내기 위해 이 세상을 하직하는 길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며 떠난다.


샬로테와 베르테르. 부다페스트


얼마후 알베르가 집에 돌아온다. 알베르는 부인 샬로테가 슬픔에 가득찬 모습으로 정신이 없는 사람처럼 서있어서 위로하려고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잠시후에 알베르에게 메시지가 하나 전달된다. 베르테르가 보낸 메시지이다. 피스톨을 빌려달라는 내용이다. 샬로테가 알베르에게 빌려주면 안된다고 소리친다. 알베르는 샬로테가 피스톨 얘기가 나오자 이상하리만치 과민반응을 보이자 샬로테가 베르테르에 대하여 아직도 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알베르는 샬로테에게 피스톨을 가져와서 베르테르가 보낸 하인에게 주라고 말한다. 샬로테가 어쩔수 없다는 듯이 피스톨을 찾아서 내어준다. 샬로테가 알베르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급히 베르테르의 집으로 달려간다. 너무 늦기 전에 어서 가서 베르테르를 만류할 생각에서이다. (La nuit de Noel!).


[4막] 샬로테가 베르테르의 아파트에 도착해서 방에 들어서자 끔찍한 장면이 샬로테의 눈에 들어온다. 베르테르는 이미 피스톨로 스스로를 쏘아 쓰러져 있다. 그러나 가슴에서 피가 흘러내리지만 아직 숨은 붙어 있다. 샬로테는 베르테르를 품에 안고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베르테르는 미안하다고 하면서 샬로테의 용서를 구한다. 그 말을 들은 베르테르는 마치 평화를 얻은 듯 마지막 숨을 거둔다. 샬로테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밖에서는 어린이들이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샬로테의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바로 그 캐롤이다.


마지막 순간에 베르테르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샬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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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


자기가 좋아하고 존경하던 사람이 자살을 하면 그 영향으로 자기도 자살을 하는 현상을 '베르테르 효과'라고 부른다. 다른 용어로는 '모방자살'(Copycat suicide)라고 한다. 최근의 어떤 조사에 의하면 유명 연예인이 자살할 경우 자기도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청소년들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1774년에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나왔는데 여기에는 젊은 시인인 베르테르가 남의 부인인 샬로테(로테)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자 끝내 피스톨 자살로서 생을 마감하는 내용이 나온다. 베르테르는 자살할 때에 노란 조끼를 입었다고 되어 있다. 그후 많은 젊은이들이 베르테르처럼 노란 조끼를 입고 권총 자살하는 경우가 급증했다. 그래서 유럽의 일부 나라에서는 이 소설의 발행을 금지한 일까지 있었다. 일본에서도 베르테르 효과에 따라 자살하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노란 조끼 대신에 빨간 조끼를 입고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의 국기가 빨간색의 원이기 때문에 국수주의적인 사고방식도 반영되었다는 얘기다. 우리나라에서도 근자에 유명 연예인들이 자살을 하면 이에 따라 청소년들의 자살율이 증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베르테르 효과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미국에서는 얼터너티브 락의 창시자인 커트 코베인이 자살하자 많은 젊은이들이 따라서 자살을 한 일이 있고 일본에서는 X-Japan의 기타리스트였던 히데토 마츠모토가 자살을 하자 역시 많은 청소년들이 따라서 자살한 일이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에게는 죽음의 본능이 있는데 이것이 유명인의 죽음과 맞물려 통제 범위를 벗어나게 되면 따라서 자살을 한다고 말했다. 자살을 택하는 청소년들은 대개 가족과의 갈등을 경험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자살을 하면 자기도 자살을 하고 싶은 충동을 더 쉽게 느낀다고 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소설 삽화. 마지막 자살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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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원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서한 소설이다. 어떻게 보면 자서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의 초판은 1774년에 출간되었고 수정본은 1787년에 나왔다. 이 소설은 독일 '슈투름 운트 드랑' 시대를 대표하는 중요한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후기 낭만주의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괴테가 이 소설을 완성한 시기는 그가 24세의 청년이던 때였다. 괴테는 이 소설을 1774년 1월부터 시작하여 3월까지 6주만에 완성하였다. 이 작품으로 인하여 괴테는 그야말로 전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작가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한 때 유럽의 청년들에게는 괴테의 고향인 봐이마르를 순례하는 것이 당연한 일정처럼 된 때도 있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베르테르가 쓴 편지들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소설의 무대는 헤센주의 베츨라르라는 곳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베츨라르의 부근에 있는 가르벤하임(Garbenheim)이라는 마을이며 소설에서는 발하임(Wahlheim)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발하임은 소설 속의 마을일 뿐이다. 예민하고 열정적인 젊은 시인 베르테르는 우연히 발하임 마을에 들렸다고 이곳 농부들의 소박한 생활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래서 발하임 마을에 눌러 지내기로 했던 것이다. 베르테르는 이 마을에서 우연히 샬로테를 만난다. 샬로테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동생들을 보살펴 주고 있는 예쁜 아가씨이다. 베르테르는 샬로테가 열한살이나 연상인 알베르트(알베르)라는 청년과 약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샬로테를 깊이 사랑하게 된다. (오페라에서는 알베르가 샬로테보다 다섯살 많은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베르테르는 다른 남자와 이미 결혼키로 한 여자를 사랑해야 하는 번민 속에서 고통스럽게 지내면서도 그로부터 몇 달동안이나 샬로테와 알베르트와 친밀한 관계를 다지면서 지낸다. 베르테르는 사랑하는 여인을 사랑할수 없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서 발하임을 잠시 떠나기로 한다. 베르테르는 봐이마르에서 샬로테를 잊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프로일라인 베(B 양)이라는 아가씨를 만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어느날 베르테르는 무심코 잘 아는 친구 집을 방문한다. 그러나 베르테르는 그 집에서 뜻하지 아니한 당혹감을 경험한다. 그 집에는 마침 여러 명의 귀족들이 모여서 한담을 하고 있었다. 베르테르가 들어서자 귀족 청년들은 베르테르가 귀족이 아니고 평민이기 때문에 나가달라는 얘기를 듣는다. 크게 실망한 베르테르는 단순하고 소박한 농민들이 살고 있는 발하임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베르테르는 발하임에서 마음의 평안을 얻기는 커녕 전보다 더 심한 번민 속에서 지내게 된다. 샬로테를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때에 샬로테는 이미 알베르트와 결혼하여서 행복한 신혼생활을 하고 있었다. 베르테르의 매일은 샬로테가 자기의 사랑에 응답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고통으로 점철된 것이다. 반면에 샬로테는 베르테르에 대한 동정적인 연민과 남편 알베르트에 대한 존경으로 혼란스러운 입장이다. 결국 샬로테는 베르테르에게 이제 집으로 찾아오는 것은 삼가해 달라고 부탁한다. 베르테르는 마침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닫는다. 베르테르는 마지막으로 샬로테를 찾아가서 만난다. 베르테르가 오시안의 시구절을 낭독하자 두 사람은 그만 그동안 감추어 두었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게 된다.


베르테르는 샬로테, 알베르트, 자기와의 사랑의 삼각관계과 해결되려면 셋 중에서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베르테르는 누구든지 상처를 입어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해본다. 어떤 때는 알베르트를 살해할 생각도 해 본다. 그러나 결국은 자기 자신이 죽는 길 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는 생각에 미친다.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에게 편지를 보내어 피스톨을 빌려 달라고 부탁한다. 멀리 여행을 가는데 호신용으로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샬로테는 베르테르가 피스톨을 빌려 달라고 했다는 얘기를 듣고 무언가 두려움에 휩싸인다. 샬로테는 베르테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이 모든 사랑의 번민을 결론지으려 한다는 생각을 한다. 샬로테는 오히려 그것이 모두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는 생각도 한다. 그래서 알베르트의 지시대로 피스톨을 꺼내어 베르테르의 하인에게 들려보낸다. 베르테르는 자기의 머리에 피스톨을 쏜다. 하지만 당장 죽지는 않고 그로부터 12시간이나 지나서야 숨을 거둔다. 베르테르의 시신은 그가 샬로테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주 말했던 보리수 나무 아래에 묻힌다. 베르테르의 장례식에는 교회 목사님도 참석하지 않은 것이었다. 샬로테와 알베르트도 참석하지 않았다. 소설은 샬로테도 상심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암시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렇게 되어 있다. '샬로테의 비통함에 대하여 아무런 얘기도 할수 없다....샬로테의 삶은 절망과 자포자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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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에 끼친 영향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무명의 괴테를 일약 저명인사로 만들어준 작품이다. '베르테르'는 독일의 '노도광풍'시기를 대표하는 작품 중의 하나이며 그후 프리드리히 쉴러와 함게 '봐이마르 고전주의'를 발전시킨 작품이다. '베르테르'가 18세기에 유럽의 전역에서 얼마나 인기를 끌었는가 하는 것은 나폴레옹의 일화로서 짐작할수 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베르테르'를 유럽문학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작품 중의 하나로 간주했다. 나폴레옹은 젊은 시절에 괴테에 감동한 독백적인 글을 쓴 일이 있다. 그리고 이집트 원정 중에는 '베르테르'를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틈만 있으면 다시 읽어보곤 했다. 유럽에서는 '베르테르 열병'(Werther Fever)라는 것이 마치 전염병처럼 번지기도 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소설에서 베르테르가 입었던 옷차림을 그대로 따라 한 것이었다. 베르테르와 샬로테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나 도자기도 유행이었다. 그중에서도 마이센 도자기는 유명했다. 또한 향수에도 베르테르의 이름을 딴 제품들이 나와서 판매되었다. '베르테르 열병'은 여러 지역에서 우려의 대상이 되었다. 젊은이들이 허무주의에 빠져 들어서 본분을 잊지 않을까하는 우려였다. 심지어 라이프치히는 1775년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소설을 판매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이 베르테르 스타일로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금지한 일도 있다. 소설은 덴마크와 이탈리아에서도 판매 금지되었다. '베르테르'가 끼친 영향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모방자살'(copycat suicide)일 것이다. 세계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랑의 괴로움을 해결하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빈번했던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베르테르 효과'를 억제하는 연구를 했지만 시대의 풍조와 함께 두드러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런가하면 소설의 내용이 너무 비통하기 때문에 오히려 반작용으로서 해핀엔딩을 그린 소설도 등장했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니콜라이(Friedrich Nicolai: 1733-1811)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Die Freuden des jungen Werthers)은 대표적이다. 이 새로운 소설에 의하면 알베르트는 베르테르가 절망감으로 자살하리라는 것을 짐작한다. 그래서 피스톨을 빌려달라고 하자 피스톨에 총알 대신에 닭의 피를 장전해서 베르테르가 피스톨을 쏘면 피가 흐르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베르테르와 로테가 정말로 사랑하는 것을 인식하고 로테를 베르테르에게 양보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로테와 결합한 베르테르는 처음에는 사람들의 눈이 있어서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존경받는 시민으로서 생활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런 내용의 새로운 소설이 나오자 괴테는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후로 남은 생애를 통해서 니콜라이와 대설전을 치루었다는 후문이다. 괴테는 심지어 '베르테르의 무덤에 선 니콜라이'(Nicolai auf Werthers Grabe)라는 시도 썼다. 괴테는 이 시에서 니콜라이를 그냥 지나가는 무명의 사람으로 표현했다. 괴테는 니콜라이가 베르테르의 무덤을 오물로서 더럽히는 사람으로 표현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영화로도 여러번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작품들 몇 편만 소개하면, 1976년 독일에서 제작한 '베르테르'로서 한스 위르겐 볼프와 카타리나 탈바흐가 주연한 것이 있고 1986년에는 스페인에서 만든 드라마 영화가 있다. 유세비오 폰클라가 주연을 맡은 것이다. 현대판 '베르테르'이다. 2008년에는 독일에서 TV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 있다. 슈테판 코나르스케와 한나 헤르츠슈프룽이 주연한 것이다. 2010년에는 역시 독일에서 만든 TV 영화가 있다. 요나스 카우프만이 주연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