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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하다가 세상을 떠난 지휘자들

정준극 2017. 2. 3. 21:21

지휘하다가 세상을 떠난 지휘자들


사람이 이 세상에 나왔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오욕의 죽음을 맞이하느냐 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침대에 누워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렇지 않고 음악계에서도 특별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 있어서 소개코자 한다. 음악가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은 연주를 하다가 죽는 것이리라. 무대에서 죽는 것을 말한다. 지휘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지휘를 하다가 그냥 쓰러져서 죽는 것은 지휘자로서 대단한 영광이 아닐수 없다. 우선 지휘하다가 세상을 떠난 지휘자들로는 누가 있는지 점검해 본다.


헤수스 아람바리 가라테(Jesus Arambarri Garate: 1902-1960). 스페인 바스크 출신의 지휘자 겸 작곡가로서 1960년 7월 11일 마드리드의 부엔 레티로 공원(Parque del Buen Retiro)에서 반다 신포니카(Banda Sinfonica)를 지휘하는 중에 심장마비로 쓰러져서 세상을 떠났다. 헤수스 아람바리는 바스크를 빛낸 저명한 지휘자였다. 바스크 출신의 유명 음악인으로서는 작곡가들인 후안 크리소스토모 아리아가(Juan Crisostomo Arriaga), 헤수스 구리디(Jesus Guridi), 루이스 데 파블로(Luis de Pablo),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인 파블로 데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 그리고 '볼레로'로 유명한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도 바스크가 프랑스의 지배를 받을 때에 바스크 지방의 시부르(Ciboure)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당연히 바스크 출신으로 인정받고 있는 음악인이다. 헤수스 아람바리는 빌바오 음악원을 수료했다. 이어 파리와 독일의 바젤에서 작곡 공부를 계속하였다. 빌바오에서는 폴 뒤카(Paul Ducas)의 제자였으며 파리에서는 블리다미르 골슈만(Vladimir Golschmann), 바젤에서는 펠릭스 봐인가르트너(Felix Weingartner)로부터 사사했다. 헤수스 아람바리는 파리와 바젤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빌바오로 돌아와서 작곡보다는 오히려 지휘에 전념하였다. 그리하여 1933년부터는 빌바오교향악단의 지휘를 맡았다. 빌바오교향악단은 스페인 최초의 시민 오케스트라이다. 그후 그는 마드리드음악원의 교수로서 활동했고 스페인지휘자협회의 회장으로도 봉사했다. 1953년에는 1909년에 설립된 반다 신포니카 데 마드리드의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헤수스 아람바리는 반다 신포니카를 이끌고 마드리드에서 시민들을 위한 연주회를 자주 가졌는데 그 중의 하나가 1960년 7월 부엔 레티로 공원에서의 연주회였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지휘가 되었다. 향년 58세였다.


헤수스 아람바리


에두아르드 반 베이눔(Eduard van Beinum: 1901-1959). 암스테르담의 로열 콘세르트헤바우의 수석 지휘자였던 에두아르드 반 베이눔은 1959년 4월 13일 콘세르트헤바우 연주회장에서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의 리허설을 끝내고 지휘자 포디움에서 내려오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모든 단원들이 놀라서 지켜보는 가운데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반 베이눔은 3일 후 벨루웨(Veluwe) 지방의 가르데렌(Garderen) 마을에 안장되었다. 반 베이눔은 가르데렌 마을에 집을 가지고 있어서 가르데렌은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1960년에는 '에두아르드 반 베이눔 재단'이 설립되었다. 반 베이눔은 콘세르트헤바우의 바이올린 주자인 세파 얀센(Sepha Jansen)과 결혼하였고 아들 바르트 반 베이눔은 2000년에 아버지 '에두아르드 반 베이눔: 생애와 작품'이라는 제목의 저서를 출판했다. 에두아르드 반 베이눔은 네덜란드의 아른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과 피아노 레슨을 받은 그는 17세의 젊은 나이로 아른헴 오케트라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음악가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반 베이눔의 음악적 재능은 아마도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 아니겠느냐는 얘기다. 할아버지는 군악대장이었고 아버지는 지방 오케스트라의 콘트라베이스 주자였다.  뿐만이 아니었다. 형인 코 반 베이눔은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래서 형제는 간혹 바이올린-피아노 듀오 콘서트를 가지기도 했다. 반 베이눔은 암스테르담음악원에서 지휘자로서의 경험을 쌓았다. 그가 처음으로 콘세르트헤바우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29년이었다. 처음에는 객원지휘자였고 2년 후에는 부지휘자가 되었으며 1938년에는 멩겔베르그와 함께 콘세트헤바우의 공동 지휘자에 임명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멩겔베르그는 정지휘자의 자리에서 해고되었다. 나치가 네덜란드를 점령하였을 때 나치에 협조적이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반 베이눔은 나치를 싫어하여서 나치의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베이눔은 나치의 활동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았으나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반 베이눔은 콘세트헤바우의 정지휘자로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음악만을 위해 전념했다.



에두아르드 반 베이눔


파우스토 클레바(Fausto Cleva: 1902-1971): 파우스토 클레바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고 공부를 했지만 18세 때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미국시민이 된 오페라 지휘자이다. 클레바는 69세의 나이로 1971년 8월 6일에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글룩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지휘하는 중에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공연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당황하였지만 그런 중에도 악장의 지휘로 오페라 공연을 무사히 마칠수 있었다. 사람들은 공연중 마에스트로의 급작스런 죽음을 한없이 애도하였다. 클레바는 아드리아해에 면한 트리에스테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음악교육을 받은 후 밀라노에 가서 계속 공부하였다. 오페라 지휘자로서는 밀라노에 있을 때 처음 데뷔하였다. 밀라노 인근의 카르카노에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를 지휘한 것이었다.그러다가 18세 되던 해인 1920년에 식구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으며 1931년에 정식으로 미국 시민이 되었다. 그런 후에 메트의 직원으로 미국사회에서의 생활을 시작하였고 1934년부터 1963년까지는 신시나티 섬머 오페라에 깊이 관여했다. 1944년부터는 2년 동안 몰락 직전에 있었던 시카고 오페라단의 음악감독이 되어서 많은 기여를 했다. 그리고 1950년에는 메트로 돌아와 약 30편의 오페라를 7백여회나 지휘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도 클레바의 이름은 메트 오페라의 역사에 길이 남아 있게 되었다. 


파우스토 클레바


나르시스 지라르(Narcisse Girard: 1797-1860). 나르시스 지라르는 프랑스의 지휘자 겸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였다. 그는 60세가 지난 때부터 이런 저런 병마에 시달리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휘에 대한 열정은 더욱 높아져서 지휘에 헌신하였으며 특히 오페라 지휘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63세 때에 병마에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해서 파리 국립오페라에서 마이에르베르의 '위그노'(Les Huguenots)를 지휘하게 되었고 3막이 끝날 때 쯤해서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어서 그자리에 쓰러졌고 잠시후 숨을 거두었다. 1월 16일의 일이었다. 지라르는 파리의 라셰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지라르는 1797년 낭트에서 태어났다. 1797년이라고 하면 슈베르트가 태어난 해이며 도니체티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낭트음악원을 수료한 그는 이탈리아로 가서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하여 심도있게 연구하고 돌아왓다. 그는 1830년에 파리에 있는 이탈리아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었고 1837년부터 1846년 까지는 오페라 코미크의 수석 지휘자로 활동했다. 그후에 파리 오페라로 자리를 옮겨서 주로 오페라 지휘를 하였는데 특히 기억해야 할 것은 마이에르베르의 '예언자'(Le prophete: 1849)와 구노의 '사포'(Sapho: 1851)의 역사적인 초연을 지휘했다는 것이다. 지라르는 1849년 10월 30일 쇼팽의 장례식에서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지휘했다. 작곡가로서 그가 남긴 작품 중에는 '안티고네' 서곡과 무대작품인 '두도둑'(Les deux voleurs), '열사람'(Les dix) 등이 있다.


나르시스 지라르


아르비드스 얀손스(Arvids Jansons: 1914-1984). 1965년부터 영국 만체스터의 할레 오케스트라(Halle Orchestra)의 객원지휘자로 활동하였던 라트비아 출신의 아르비드스 얀손스는 1984년 11월 21일 이날도 할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던 중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스테이지 위에서 세상을 떠났다. 얀손스는 평소에 소련 지휘자인 칼 엘리아스베르그(Karl EliasbergL: 1907-1978)를 무척이나 존경하여서 자기가 죽으면 그의 무덤 옆에 묻어 줄 것을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그래서 만체스트의 할레 오케스트라는 얀손스의 당부를 존중하여서 얀손스의 시신을 칼 엘리아스베르그의 묘지가 있는 상트페터스부르크의 볼코보 공동묘지로 보내어 안장하였다. 라트비아의 리에파야 출신인 얀손스는 리가오페라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일하면서 리가음악원을 졸업하였다. 그러다가 1944년에는 30세의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리가오페라의 상임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952년에는 레닌그라드(상트페터스부르크)필하모닉의 순회연주회 담당 지휘자로 활동하였고 이때에 칼 엘리아스베르크와 함께 일하였다. 그러다가 1965년부터는 만체스터의 할레 오케스트라의 객원지휘자가 되어 활동하였으나 만체스터에서 세상을 떠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르비드스 얀손스


요제프 카일베르트(Joseph Keilberth: 1908-1968). 오페라 전문 지휘자인 요제프 카일베르트는 1968년 7우러 20일 뮌헨 슈타츠오퍼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를 지휘하던 중에 그 자리에 쓰러져서 의식을 잃었다가 얼마후에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는 1911년에 오스트리아의 펠릭스 모틀이 바로 그 오페라인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다가 쓰러졌고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난 그런 비운의 사건이 있었던 자리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죽음과 지휘자들의 죽음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냐면서 의아해 했었다. 카일베르트는 1950년대에 바이로이트의 단골이었다. 그는 1952, 53, 55년에 링 사이클을 완전 주파했다. 1954년에 취입한 '발퀴레'는 가장 뛰어난 '발퀴레'라는 평가를 받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바그너 소프라노 겸 배우인 마르타 뫼들이 지글린데 역을 맡은 것이어서 더욱 관심을 받은 음반이었다.  


요제프 카일베르트


프리츠 레만(Fritz Lehmann: 1904-1956). 독일의 저명한 지휘자인 프리츠 레만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지휘자였지만 51세라는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경력이 중단된 케이스이다. 레만의 레퍼토리는 바로크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폭이 넓었으며 콘서트는 물론이지만 오페라 지휘에서도 뛰어난 재능의 해석을 보여준 지휘자였다. 레만은 베를린 모테트합창단(Berliner Motettenchor)을 설립했으며 수많은 음반을 취입하여 음악애호가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한 레만인데 1956년 성금요일인 3월 30일에 뮌헨에서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지휘하다가 1부를 마치고 인터미션 시간에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에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세상을 떠났다. '마태 수난곡'의 2부는 다른 사람이 지휘해서 연주회를 마치기는 했다. 성금요일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였으니 하늘의 축복을 받았을 것이다. 프리츠 레만은 음악적 전통이 깊은 만하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회 오르가니스트 겸 성가대지휘자였다. 레만은 만하임음악대학을 졸업하고 이어 하이델베르크와 괴팅겐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음악가로서의 데뷔는 1918년 피아니스트로였다. 레만은 괴팅겐의 슈타트테아터(시립극장) 지휘자로 경력을 시작하여 유럽의 여러나라 뿐만 아니라 남미 교향악단의 객원지휘자로서 활약했다. 1953년부터는 뮌헨음악극-극장대학의 교수로서 후진향성을 위해 기여하였다. 레만은 지휘 중이 아니라 인터미션 시간에 죽었으니까 그나마 혼란을 피할수 있었다.


리허설 중인 프리츠 레만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Dimitri Mitropoulos: 1896-1960).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는 아테네 출신의 지휘자, 피아니스트, 작곡가이다.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지휘자 중의 한 사람으로, 또한 가장 중요한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아마 그리스 출신으로서는 마리아 칼라스, 아네스 발차와 함께 가장 유명한 클래식 음악가일 것이다. 미트로풀로스는 1960년 11월 2일 밀라노에서 콘서트를 앞두고 말러의 교향곡 3번을 리허설 중에 스테이지에서 심장질환을 일으켜서 그 자리에서 숨졌다. 향년 64세였다. 그는 많은 음반을 남겼는데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취입되어 나온 음반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바로 이틀 전인 1960년 10월 31일 쾰른방송교향악단과 함께 말러의 교향곡 3번을 연주한 것이었다. 미트로풀로스는 뛰어난 오페라 지휘자였다. 오페라로서 가장 마지막으로 지휘하여 음반으로 남긴 것은 1960년 9월 23일에 비엔나의 슈타츠오퍼에서 베르디의 '운명의 힘'이었다. 주세페 디 스테파노, 안토니에타 스텔라, 에토레 바스티아니니 등 쟁쟁한 성악가들이 출연한 공연이었다. 미트로풀로스는 어찌나 신앙이 깊었던지 마치 그리스정교회의 수도승과 같은 생활을 했다. 그래서인지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는 평소에도 입버릇처럼 '세상적인 결혼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바 있다. 그런데 그런 그는 동성애자로 알려졌다. 그는 몇몇 남자들과 애정생활을 하였는데 알려진바로는 지휘자인 레오나드 번슈타인도 미트로풀로스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것이다. 물론 번슈타인은 결혼해서 자녀까지 두었다. 잘 아는대로 번슈타인의 부인은 칠레 출신인 펠리치아 몬테알레그레였고 자녀는 세명이나 두었다.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미트로풀로스는 오페라 지휘자로서 주로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54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60년까지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수석지휘자로 활동했다. 메트에서 그의 타이틀은 프린시팔 콘닥터(Principal conductor)였는데 메트로서 그런 칭호는 미트로풀로스가 처음이었다. 그는 그가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시도를 음악사상 처음으로 하였다. 1930년에 베를린 필과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을 연주할 때 그런 제스추어를 위하였다. 그후 그의 시범을 따라서 다른 지휘자들도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는데 예를 들면 다니엘 바렌보임이었다. 그는 콘서트와 오페라에서 수많은 지휘를 하였는데 그 중에는 몇가지 기록될만한 지휘도 있었다. 예를 들면 쇼스타코비치의 10번 교향곡 초연(1954), 역시 쇼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초연(1956), 사무엘 바버의 오페라 '바네싸'의 초연(1958), 에르네스트 크레네크의 교향곡 4번 초연(1947), 존 베커(John Becker)의 짧은 교향곡(Short Symphony) 초연(1950) 등이다.  


드미트리 미트로풀로스. 그는 콤퓨터와 같은 기억력이 있어서 리허설은 물론이고 실제 연주에 있어서도 절대로 악보를 보지 않고 모두 암기해서 지휘한 것으로 유명했다.


펠릭스 모틀(Felix Mottl: 1856-1911). 비엔나 교외인 운터 장크트 바이트(Unter Sankt Veit: 지금의 비엔나 13구인 히칭)에서 태어난 펠릭스 요제프 폰 모틀(Felix Josef von Mottl)은 1911년 6월 21일 뮌헨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통산 1백회 기념공연을 지휘하던 중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1일 후인 7월 2일 향년 54세로서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1968년에 요제프 카일베르트가 바로 그 극장에서 바로 바그너의 그 오페라를 지휘하다가 중간에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숨을 거둔 일이 있다. 사람들은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지휘자들까지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니냐면서 의아해 했다. 모틀은 오랫동안 내연이었던 소프라노 츠덴카 파스밴더와 며칠 후에 정식으로 결혼키로 약속까지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원래 어릴때에 성악을 공부했던 모틀은 비엔나음악원을 나온 후에 어찌하다가 지휘를 하게 되었고 곧이어 바그너 음악의 뛰어난 지휘자로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바이로이트로 진출한 그는 처음에는 한스 리히터()가 지휘를 맡은 1876년의 사이클 최초 완전공연에서 한스 리히터를 도와서 리허설 지휘를 맡는 등의 일을 했다. 그러다가 1886년에 처음으로 바그너를 단독지휘하게 되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였다. 그러는 중에 그는 1881년부터 1903년까지 칼스루에 오페라의 수석지휘자로서 활동하였다. 이 기간에 그는 바그너, 베를리오즈, 샤브리에의 챔피언 지휘자로서 명성을 쌓았다. (챔피온이라는 말은 어떤 작곡가의 작품을 널리 전파하는 일을 주도한다는 의미이다.)



felix mottl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펠릭스 모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결국 세상을 떠났다.


주세페 파타네(Giuseppe Patané: 1932-1989).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의 오페라 지휘자인 주세페 파타네는 뮌헨 방송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로 있으면서 1989년 5월 29일 뮌헨의 바바리아 슈타츠오퍼에서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지휘하던 중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쓰러졌고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소생하지 못했다. 향년 57세였다. 주세페 파타네의 아버지도 이름난 지휘자인 프랑코 파타네였다. 주세페 파타네의 딸인 프란체스카 파타네(Francesca Patané)는 무대 위에서 과감한 연기로 유명한 소프라노이다. 무엇이 과감하냐하면 예를 들어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는데 거의 전라로 등장해서 춤을 추어 숱한 얘기꺼리를 남긴 것이다. 주세페 파타네가 지휘자로서 데뷔한 것은 1951년 나폴리에서 였고 지휘자로서 성장한 것은 1961년 오스트리아의 린츠 오페라에서였다. 그후 1985년부터 8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는 뮌헨 방송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였다.


주세페 파타네. 평소에 이발을 잘 했는데도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그를 죽음으로 몰았다는 농담이 있다.


주세페 시노폴리(Giuseppe Sinopoli: 1946-2001). 주세페 시노폴리는 이탈리아 베니스 출신의 지휘자 겸 작곡가이다. 시노폴리는 1984년에 필하모니아(Philharmonia)의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어 1994년까지 10년 동안 눈부신 활동을 했으며 1992년에는 동시에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수석 지휘자로 활동했고 또한 바이로이트의 지휘자 리스트에 들어 있어서 여러차례의 '링 사이클' 지휘를 했다. 그는 수많은 음반을 취입했는데 특별히 엘가의 작품을 해석하는 일에 전념하였으며 또한 말러의 경우에는 교향곡 전부를 취입하여 놀라운 관심을 받았다. 시노폴리는 이탈리아의 오페라와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해석에서 특별한 입장을 보여서 깊은 관심을 받았다. 시노폴리는 19세기 후반으로부터 20세기 초반의 작품들, 특히 바그너, 베르디, 슈트라우스, 말러, 그리고 제2차 비엔나학파의 작품들에 대하여 전문적인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시노폴리였는데 2001년 4월 20일 베를린의 도이처 오퍼에서 베르디의 '아이다'를 지휘하는 중에 심장마비를 일으켜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날의 '아이다' 공연은 도이처 오퍼의 수석감독인 괴츠 프리드리히에게 헌정하는 공연이었다. 그러나 시노폴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아이다' 공연은 중단될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이틀후, '아이다'는 이탈리아 출신의 마르첼로 비오티(Marcello Viotti)의 지휘로 공연이 재개되었다. 다만, 이번에는 주세피 시노폴리를 추모하여 그에게 헌정하는 공연이었다. 시노폴리 장례식은 4월 23일 로마에서 거행되었다. 이탈리아의 대통령과 수상이 참석하였다. 그리고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많은 조객들이 참석하였다.


주세페 시노폴리


시노폴리는 고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고대 그리스의 유물에 대한 지식은 놀랄만한 것이었다. 그의 저서 중에서 '시노폴리 수집품 중에서 그리스의 걸작 도자기'(Masterpieces of Greek Ceramics from the Sinopoli Collection)는 관련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은 것이었다. 시노폴리는 고고학에 대한 공로로 로마의 라 사피엔차대학교(Universita La Sapienza)로부터 명예 고고학 전문가의 타이틀을 받기로 되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이틀 전에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났다. 타오르미나 아르테()는 2005년 이래 매년 10월에 주세피 시노폴리에게 헌정하는 페스티발을 개최하여 왔다. 시노폴리는 1989년부터 1997년까지 타오르미나 페스티발의 음악분야 예술감독을 맡았었다. 주세페 시노폴리 페스티발에서는 유망 음악도로서 시노폴리 실내오케스트라가 구성되어 주로 시노폴리의 작품을 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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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페 시노폴리


이스라엘 이논(Israel Yinon: 1956-2015). 이스라엘 이논은 이스라엘 지휘자였다. 그는 로열 필하모닉과 비엔나 필 등 세계 유수의 교향악단의 초빙 지휘자로서 많은 활동을 했다. 이논은 특별히 나치 시대에 독일에서 퇴폐음악이라고 해서 금지되었던 작품들을 발굴하여 연주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논은 2015년 1월 29일 스위스 루체른의 응영과학 및 예술대학교에서 대학생 및 교수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을 지휘하다가 쓰러져서 숨을 거두었다.  지휘자가 갑작스럽게 쓰러지자 관중석에서 의사가 뛰어 올라와 인공호흡을 하고 응급조치를 취한 후 곧바로 병원으로 옮겼으나 병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이논은 텔 아비브의 '예루살렘 음악무용아카데미'에서 지휘, 음악이론, 작곡을 공부했으며 이어 예루살렘음악원에서 지휘를 전공하였다. 그후 유럽으로 진출한 이논은 영국, 독일, 네덜란드 등지에서 빛나는 활동을 하였다.




이스라엘 이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