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시컬 뮤직 팟푸리/클래시컬 뮤직 팟푸리

위대한 작곡가들의 별난 죽음

정준극 2017. 2. 2. 06:48

위대한 작곡가들의 별난 죽음


죽음을 삶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일상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죽음이 언제 찾아오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 일상적이 아닐 뿐이다. 죽음은 어떤 때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예고를 하고 찾아오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예고도 없이 우연히 찾아온다. 사람들은 기왕에 찾아오는 죽음이라면 '아프지 않고 고통 없이 그저 잠자는 듯이 맞이하면 더 이상의 소원이 없겠다'고 말하지만 사정은 반드시 그런것 만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참으로 이상한 방법으로 찾아와서 어처구니가 없게 만든다. 클래식 음악의 세계에서도 위대한 작곡가 중에서 유별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이상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다. 죽음이란 것은 슬프고 비극적인 일이지만 그러한 유별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 때문에 미안한 말이지만 약간의 웃음을 머금게 한다. 어떤 작곡가들이 예상치 못한 유별난 죽음을 맞이했는지 몇몇 경우만 소개한다. 


○ 요한 쇼베르트(Johann Schobert: 1735?-1767)


요한 쇼베르트. 친구들이 독버섯이니 먹지 말라고 말렸는데도 그렇지 않다면서 고집을 부려서 먹고 죽었다.


지금은 폴란드에 속해 있는 실레지아에서 태어난 요한 쇼베르트는 그의 시대에 뛰어난 작곡가였고 피아니스트였다. 그가 남긴 피아노 협주곡, 하프시코드 소나타 등은 놀랄만큼 아름다워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들이다. 요한 쇼베르트는 이름이 슈베르트와 비슷해서 혼동 중에나마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보다도 한창 나이에 이상하리만치 엉뚱한 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기억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다. 쇼베르트는 어떤 연줄로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루이 프랑수아 1세의 관심을 끌어서 궁정작곡가로서 파리에 와서 살게 되었다. 왕실의 후원을 받고 있는 쇼베르트의 파리 생활은 즐겁고 여유있는 것이었다. 어느날 쇼베르트는 친구들 여러 명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날의 특별 요리는 버섯요리였다. 쇼베르트는 친구들과 식구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서 버섯 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잠시후 버섯 요리가 나오자 버섯을 유심히 보고 있던 친구가 '여보게! 이건 독버섯인듯 하네! 먹지 말게!'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쇼베르트는 한 고집 하는 사람이어서 '아닐세! 그냥 맛있는 버섯이라네! 독버섯이라니 말도 안되네! 내가 먹어보아서 증명을 하겠네'라면서 먼저 먹고 보란듯이 식구들과 친구들에게 먹으라고 권했다. 결과는? 쇼베르트는 물론이고 젊은 부인과 자녀들 중에서 한명, 친구들 네명, 그리고 요리를 서브했던 하녀가 독버섯을 먹고 잠시후에 손을 쓸 사이도 없이 모두 숨을 거두었다. 쇼베르트가 32세였던 1767년 8월 28일의 사건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고집이었다.


○ 장 바티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 1632-1687)


장 바티스트 륄리. 지휘를 하는 중에 지휘봉으로 발을 내려치는 바람에 상처가 덧나서 죽었다.


장 바티스트 륄리는 프랑스 바로크 시대에 가장 뛰어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였다. 륄리는 이탈리아의 투스카니 공국에 속한 플로렌스(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러다가 14세 때에 프랑스의 어느 귀족의 눈에 들어서 파리로 와서 지내게 되었다. 륄리는 춤도 잘 추었는데 어느날 춤을 좋아하는 루이 14세의 눈에 들어서 궁정음악가로서 총애를 받게 되었고 그후로는 프랑스 음악을 이끄는 사람이 되었다. 륄리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을 타파하고 프랑스 특유의 오페라를 창조한 인물로서 유명했다. 륄리는 프랑스 음악의 역사에 있어서 길이 기억되고 있는 인물이지만 그의 유별난 죽음도 아직까지 기억되고 있다. 어느날 륄리는 그의 새로운 작품인 테 데움(Te Deum)을 지휘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지휘봉이 마치 지팡이와 같아서 그것으로 바닥을 탕탕 치면서 지휘를 했다. 지휘봉은 끝이 뾰죽한 것이었다. 륄리는 잘못해서 뾰죽한 지휘봉으로 바닥이 아닌 자기의 발등을 내려 찍었다. 그 바람에 상처가 나고 이어서 상처가 덧나는 바람에 며칠 후인 1687년 3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지휘를 하다가 기진하여서 숨을 거둔 지휘자들은 더러 있지만 지휘봉으로 자기를 때려서 죽음에까지 이른 지휘자는 륄리가 처음이다. 이후로 지휘를 잘못하는 지휘자를 보면 '륄리처럼 죽고 싶은가? 지휘 좀 잘하시오'라는 농담이 꽤 오래 퍼졌었다.


○ 알렉산드로 스트라델라(Alexandro Stradella: 1639-1682)


 

알렉산드로 스트라델라. 오른쪽 그림은 로마의 상원의원이 자기 부인을 스트라델라에게 소개하는 장면. 얼마후면 그 부인은 스트라델라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알렉산드로 스트라델라는 바로크 중기시대의 이탈리아 작곡가로서 17세기에는 대단히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스트라델라는 콘체르토 그로소라는 장르의 음악을 개척하고 발전시킨 역할을 하였다. 그로 인하여 훗날 콘체르토가 인기있는 작곡분야가 되었던 것도 지나칠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뒤를 이어 등장하는 비발디 또는 코렐리 등의 그늘에 가려서 점차 잊혀져만 갔다. 그렇다고 해서 스트라델라라는 이름이 아주 잊혀진 것은 아니다. 스트라델라는 카사노바나 돈 후안을 저리 가라고 할만큼 유명한 호색가였고 그 때문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여서 많은 사람들의 기억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스트라델라는 반반하게 생긴 여인이라고 하면 무조건 사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로 권세있는 귀족들의 부인들만을 대상으로 삼아서 더 유명했다. 게다가 로마에서 작곡활동을 할 때에는 어떤 규모가 큰 교회의 돈을 횡령하려다가 뜻대로 되지 않았던 일이 있어서 그런 점에 있어서도 이름이 알려져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나저나 귀족 부인들과의 애정행각이 많아지자 그만큼 그를 증오하는 귀족 남편들도 많아졌다. 귀족 남편들은 스트라델라를 가만 두었다가는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모종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어떤 귀족은 스트라델라를 잡아서 거세해 버리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 눈치를 챈 스트라델라는 로마에서 제노아로 은밀히 피신해 갔다. 그러나 제버릇 누구한테 주지 못한다는 말처럼 제노아에서 다시 귀족 부인들을 대상으로 공작을 펼치려는 중에 어느날 피아짜 방키(Piazza Banchi)에서 미지의 자객의 칼에 찔려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로마의 어떤 귀족이 참지 못하고 자객을 사서 보냈던 것이라는 얘기인데 스트라델라가 죽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지만 다른 사항들은 확실치 않다. 1682년 2월 25일로서 스트라델라가 42세의 한창 나이 때였다.


○ 제레미아 클라크(Jeremiah Clarke: 1674-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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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미아 클라크. 33세의 젊은 나이에 자살했다.


'트럼펫 벌런터리'로 유명한 영국의 제레미아 클라크는 생전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지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 그의 작품들은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어서 세월은 흘러도 이름 석자는 남는다는 말을 실감케 해주고 있다. 그가 생전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그의 대표작인 '트럼펫 벌런터리'가 오랫도록 헨리 퍼셀의 작품으로 알려져 왔던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그러다가 근자에 이르러서 제레미아 클라크의 작품으로 확인되었고 이후 그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졌다. 그런데 그는 안타깝게도 33세라는 짦은 생애를 살다가 갔다. 더구나 안타까운 것은 그가 권총 자살을 하여 스스로 생명의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이다. 제레미아 클라크는 30세의 청년시절에 어느 아름다운 귀부인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물론 그 귀부인은 이미 결혼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한쪽은 귀족 출신이고 다른 한 쪽은 평범한 음악가였으므로 신분의 차이 때문에 더구나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이었다. 클라크는 이룰수 없는 사랑을 비관하여서 절망 중에 자살키로 결심했다. 그는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목매달아 죽기로 했고 뒷면이 나오면 테임스 강에 빠져 죽기로 했다. 그래서 동전을 던졌더니 진흙 바닥에 떨어진 동전이 쓰러지지 않고 똑바로 서 있게 되었다. 클라크는 이것을 목매달아 죽지도 말고 물에 빠져 죽지도 말라는 뜻으로 해석해서 권총 자살을 했다. 클라크가 33세 때인 1701년 12월 1일의 일이었다. 친구들이 클라크의 시신을 그가 봉사했던 성파울성당의 교회묘지에 매장코자 했으나 처음에는 거절 당했다. 교회는 자살을 죄악시하기 때문에 자살한 죄인은 교회묘지에 들어갈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다가 클라크가 교회를 위해 오르가니스트로 봉사했기 때문에 예외로 간주해서 성파울성당의 교회묘지에 입주할수 있었다.


○ 프란티세크 코츠바라(Frantisek Kotzwara: 1730-1791)


   

프란티세크 코츠바라와 그의 죽음 장면을 그린 그림


체코공화국인 보헤미아 출신의 프란티세크 코츠바라(체코에서는 Frantisek Cocvara)는 18세기에 유명했던 뛰어난 더블 베이스 주자였으며 작곡가였다. 그는 바이올린에서도 재능이 훌륭하여서 연주 때마다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작곡가로서 그는 현악4중주곡, 현악3중주곡, 세레나데 등을 작곡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코츠바라의 음악은 거의 잊혀져 있지만 그의 이름은 음악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엽기적이고 가장 웃기지도 않는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한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보헤미아를 떠나 런던에서 지내며 활동했던 그는 가족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심심하면 창녀들을 찾아 다니기를 즐겨했다. 그런데 그는 섹스를 할 때에 남들은 생각치도 못하는 아주 이상한 방법을 즐겨했다. 숨을 쉬지 못하게 상대방이 목을 조르면서 섹스를 하면 죽음의 문턱에서 절정을 느낄수 있기 때문에 기가 막히다는 것이었다. 그날도 코츠바라는 수잔나 힐이라는 창녀를 만나서 고급식당에 가서 멋진 식사를 한 후에 이윽고 섹스를 위해 수잔나 힐을 집으로 데려왔다. 그 집이 자기의 집인지 또는 창녀 수잔나의 집인지는 확실치 않다. 아무튼 코츠바라는 수잔나에게 자기는 섹스의 클라이막스를 더욱 기가 막히게 느끼기 위해 목을 졸라서 숨을 거의 쉬지 못하도록 해주는 것이 좋으므로  섹스 중에 목을 졸라 달라고 부탁했다. 수잔나는 큰일날 소리라고 하면서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코츠바라는 그렇다면 하는수 없이 자기가 스스로 그런 콘셉트를 만들겠다고 하면서 밧줄을 사형수처럼 목에 두르고 그 밧줄의 한쪽 끝을 문의 손잡이에 매어 놓아서 섹스를 하면서 자기가 숨이 막히는 기막힌 순간을 조절하겠다고 제시하였다. 위에 있는 그림을 보면 어떤 내용인지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수잔나는 코츠바라의 그같은 요청마저 거절할 수가 없어서 밧줄을 코츠바라의 목에 감아 주고 밧줄의 끝은 문의 손잡이에 단단히 매어 놓았다. 결론은? 코츠바라는 수잔나와의 섹스 중에 자기도 모르게 밧줄을 잡아 당겨서 그만 정말로 숨이 막혀 그자리에서 죽었다. 나중에 경찰은 수잔나를 체포해서 혹시 코츠바라를 살해하지 않았느냐를 조사했지만 수잔나의 말대로 이상하고도 엽기적인 방법으로 죽었다는 것이 판명되어 무죄석방되었다. 세상에 별 사람이 다 있다.  1791년, 비엔나에서 모차르트가 '마술피리'의 초연을 준비하고 있을 때인 9월 2일에 일어난 엽기사건이었다. 그때 코츠바라는 61세였다. 노인네가 정력도 좋았다.


○ 표트르 일리이치 차이코브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차이코브스키와 안토니나 차이코브스카야 부부. 1877년. 차이코브스키는 동성애자이면서 안토니나와 결혼하였으나 두달 반만에 결열되었고 결국 그의 동성애는 그가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수 없게 만들었다.


차이코브스키는 1893년 12월 6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몇가지 의혹이 남아 있다. 공식적으로는 콜레라가 발생한 시기에 물을 잘못 마셔서 콜레라에 감염되어 죽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과연 정말로 물을 잘못 마셔서 죽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서 자살했는지는 아직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는 사람은 아는 일이지만 차이코브스키는 동성연애자, 즉 게이였다. 그런데도 28세 때에는 벨기에 출신의 소프라노인 데지레 아르퇴(Desiree Artot)와 서로 죽고 못하는 사이가 되어서 결혼을 단단히 약속하고 약혼까지 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헤어졌다. 그로부터 거의 10년 후에는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모스크바음악원에서 제자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Antonina Miliukova: 1848-1917)라는 젊은 여인이 차이코브스키가 아니면 죽어버리겠다고 하면서 결혼해 달라고 어찌나 졸라대는지 그만 결혼식을 올려서 부부가 되었던 것이다. 그때 차이코브스키는 37세였고 안토니나는 29세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은 처음부터 맞지 않아서 결국 결혼한지 두달 반만에 별거에 들어갔고 그러기를 16년이나 지속하다가 법적으로 겨우 이혼이 성립되어 남남이 되었다. 벨기에의 데지레 아르퇴와 헤어진 것도 따지고 보면 차이코브스키의 게이 취향 때문이었다는 얘기가 있고 안토니나와의 결혼생활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못한 것도 차이코브스크의 동성애가 가장 큰 이유였다는 얘기가 있다. 아무튼 차이코브스키는 자기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에 대하여 상당히 부끄러워했고 심지어는 비관하기까지 했다. 로마 가톨릭도 그렇지만 러시아 정교회에서도 동성연애라는 것은 죄악으로 단정하였으며 그런 사람은 천당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고까지 말해왔기 때문에 원래부터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차이코브스키로서는 여간 고민이 아니었다.


차이코브스키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은밀히 퍼지면서 차이코브스키에 대한 압박이 사방에서 조여왔다. 가장 큰 압박은 짜르로부터였다. 제정러시아를 대표하는 뛰어난 작곡가인 차이코브스키가 러이사 정교회조차 배격하고 있는 동성애자라는 것이 점차 사실로 드러나자 짜르는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가만 두었다가는 제정러시아가 망신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제정러시아의 '명예법정'(Court of Honor)도 차이코브스키의 동성애를 문제 삼아서 재판에 넘길 요량이었다. 차이코브스키는 양심상의 문제와 외부로부터의 압박 등으로 번민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콜레라 균에 오염된 물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 오늘날 여러 학자들의 의견이다. 사실상 차이코브스키는 모든 여건과 환경이 자기에게 호의적이지만은 않다고 생각해서 죽음을 운명처럼 받아 들이고자 했다. 그가 생애의 마지막에 작곡한 교향곡 6번 파테티크(Pathetique: 비창)은 그러한 상념이 배어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이코브스키의 교향곡 6번을 차이코브스키 자신의 '레퀴엠'(진혼곡)이라고 말했다. 교향곡 6번은 차이코브스키가 세상을 떠나기 겨우 9일 전인 10월 16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다.  


○ 에르네스트 쇼송(Ernest Chausson: 1855-1899)


에르네스트 쇼송.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벽에 부딪혀서 죽었다.


에르네스트 쇼송은 19세기 후반에 프랑스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작곡가이지만 어쩐 일인지 그의 작품은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는 파리음악원에서 마스네에게 사사한 훌륭한 학생이었지만 작곡가로서 성공을 위한 첩경인 프리 드 롬(Prix de Rome)은 차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파리음악원을 졸업한 후에는 작곡가로서 보다는 프랑스국립음악협회에서 사무직을 맡아 활동했다. 그러한 그에 대하여 오늘날까지 기억에 남는 일은 그가 44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어느날 쇼송은 자전거를 타고 누구를 만나러 가고 있었다. 그런데 깜빡 하느라고 길을 잘못 들어서 비탈 길을 내려가게 되었는데 당황해서 그랬는지, 또는 브레이크가 고장나서 그랬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무튼 정신없이 그대로 자전거를 타고 달려 내려가다가 벽돌 담에 부딪혔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다. 1899년 6월 10일이었다.


○ 엔리크 그라나도스(Enrique Granados: 1867-1916)


엔리크 그라나도스. 1차 대전의 와중에서 독일 어뢰정에 의해 희생되었다.


엔리크 그라나도스는 20세기에 스페인을 대표하는 훌륭한 작곡가였다. 그라나도스는 피아노 모음곡인 '고예스카스'(Goyescas)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고예스카스'는 프란치스코 데 고야의 그림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라나도스의 죽음은 아이러니컬하면서도 비극적인 것이었다. 1차 대전 중에 프랑스에 있었던 그라나도스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의 초청을 받아서 미국에 가서 피아노 연주회를 갖기로 되어 있었다.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가려면 배를 타고 영국으로 먼저 간 후에 영국에서 미국으로 떠나는 배를 타야했다. 그런데 런던에서 음반 취입을 위한 피아노 연주를 해야하는 일이 있어서 어쩔수 없이 예약한 미국행 여객선을 타지 못했다. 다행히 며칠 후에 부인과 함께 뉴욕으로 가는 서섹스호를 타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서섹스호는 영불해협을 지날 때에 독일 U 보트의 어뢰 공격을 받았다. 서섹스호는 두동강이 났고 구명정들이 내려졌으며 그라나도스는 선장의 배려로 다른 사람보다 먼저 구명정에 올라 탈수 있었다. 구명정이 침몰하는 서섹스호로부터 되도록이면 멀리 떨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빠져나가려 할때 그라나도스는 사랑하는 아내가 바다에 빠져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허우적 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라나도스는 원래부터 물에 대한 공포증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나도스는 아내를 구하기 위해 앞뒤 가릴 것이 없이 바다에 뛰어 들었다. 실은 그라나도스는 수영을 할줄 몰랐다. 그리하여 불행하게도 그라나도스와 부인은 모두 익사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서섹스호는 비록 어뢰공격을 받아 두 동강이 되었지만 그라나도스 부부가 묵었던 선실이 있는 쪽은 손상을 입지 않았으며 다른 쪽이 침몰하였다. 그래서 침몰하지 않은 쪽의 선실들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승객들은 모두 살아 남았다. 그러므로 만일 그라나도스가 부인과 함께 그대로 선실에 남아 있었다면  말할 나위 없이 살수 있었다. 영국 당국은 파손된 서섹스호를 영국으로 끌고 왔다.


그라나도스와 부인이 프랑스에서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가던 중 독일 U보트의 어뢰공격을 받아서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와는 달리 미국에서 영국을 거쳐 프랑스로 가던 중에 독일 잠수함의 어뢰공격을 받아서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세상을 떠났다는 주장이 있다. 그라나도스는 1911년에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인 '고예스카스'를 초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라나도스는 피아노 모음곡의 초연이 성공한 것에 힘입어서 1914년에 같은 주제로 오페라를 만들었다. 오페라 '고예스카스'는 초연이 계획되어 있었으나 마침 1차 대전이 발발하는 바람에 유럽 초연이 연기될수 밖에 없었다. 대신에 '고예스카스'는 1916년 1월에 뉴욕에서 초연되어 환영을 받았다. 그라나도스가 오페라 '고예스카스'의 초연을 위해 뉴욕에 있자 워싱턴은 그라나도스에게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을 위한 피아노 리사이틀을 열어 달라며 특별초청하였다. 그라나도스는 뉴욕을 떠나기 전에 뉴욕의 이올리안(Aeolian)이라는 음반회사의 요청으로 피아노 연주를 취입했다. 워싱턴에서 연주도 하고 음반회사를 위해 연주를 하게 되자 자연히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일정이 지연되었다. 그라나도스 부부는 며칠 후에 마침 목적지가 프랑스이지만 영국을 거쳐서 가는 서섹스 여객선을 타게 되었다. 서섹스호는 영국 해협을 통과하는 중에 독일 U보트의 어뢰공격을 받았다. 당시는 1차 대전 중이었고 독일은 무차별 잠수함 공격을 일삼고 있었다. 어뢰공격을 받은 서섹스호는 두 동강이 났다. 그라나도스는 다행히 구명정에 올라 탈수 있었다. 그러나 부인 암파로(Amparo)는 어디 있는지 알수 없었다. 구명정을 타고 있던 그라나도스는 바다에서 부인이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라나도스는 수영이라면 개헤엄도 치지 못하는 처지이지만 부인을 구하기 위해 구명정에서 바다로 뛰어 들었고 결국 두 사람은 모두 익사하였다. 그런데 두 동강난 에섹스는 직접 어뢰를 맞은 한쪽만 80여명의 승객과 함께 침몰하였고 어뢰의 피해가 없는 다른 한쪽은 침몰하지 않았다. 그라나도스의 선실을 피해가 없는 쪽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라나도스 부부가 만일 선실에만 가만히 있었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3월 21일의 일이었다. 그라나도스 부부는 여섯 자녀를 두었다.  에두아르드(음악인), 솔리타, 엔리크(수영선수), 빅토르, 타탈리아, 프란치스코이다. 여섯 자녀들은 졸지에 부모를 잃은 고아가 되었다.


○ 일렉산더 스크리아빈(Alexander Scriabin: 1872-1915)


알렉산더 스크리아빈. 면도를 잘못하는 바람에 패혈증에 걸려 죽었다.


모스크바 출신인 알렉산더 스크리아빈은 20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현대음악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였다. 그의 작품은 생전에도 각계로부터 논란의 대상이어서 그런지 사후에도 또 다시 논란의 대상이 되어 잠시 잊혀졌으나 현재는 콘서트에서 자주 만나볼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스크리아빈은 초기에 쇼팽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나중에는 무조 스타일의 쇤베르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대표작은 10곡의 피아노 소나타이다. 그러나 스크리아빈은 그의 유별난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의 얘기거리가 되었었다. 어느날 면도를 하다가 입술을 베인 일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그랬는지는 몰라도 종기를 일으키는 세균이 상처가 난 곳에 감염 되었다. 스크리아빈은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여서 입술의 상처는 곧이어 패혈증으로 발전하였고 얼마후에 세상을 떠났다. 면도 한번 잘못한 죄로 목숨을 잃은 경우이다.


○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


모리스 라벨. 택시 사고에서 뇌를 다쳤으나 수술을 잘못해서 세상을 떠났다.


'볼레로'로 유명한 프랑스의 모리스 라벨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다. 라벨은 드빗시와 함께 인상주의 작곡가로 분류되고 있지만 실제로 라벨은 드빗시와 같은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라벨은 실내악, 솔로 피아노곡, 협주곡 등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앞에서 언급한 '볼레로'와 발레 음악인 '다프네와 클로에'는 현대음악에 대단히 많은 영향을 끼친 작품들이다. 어느날 라벨은 파리에서 누구와의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늦이 않기 위해 택시를 타고 가는 중에 택시 운전기사가 잠시 한눈을 파는 바람에 다른 택시와 부딪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어찌나 세게 부딪쳤는지 라벨은 머리를 택시 유리창에 크게 부디딪쳤고 그바람에 그대로 정신을 잃고 일어나지 못했다. 뇌에 손상이 있었던 것이다. 라벨은 곧 병원으로 옮겨져서 뇌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수술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해서 라벨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37년도 저물어가는 12월 28일에 일어났던 끔찍한 일이었다.


○ 안토 베베른(Anton Webern: 1883-1945)


안톤 베베른. 전쟁이 끝난 직후 비엔나에서 어떤 미군 병사의 총에 맞아 죽었다.


안톤 베베른도 알반 베르크와 마찬가지로 비엔나 제2학파에 속한 작곡가이다. 베베른도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작곡에 인용하여서 유명하다. 베베른은 베르크와는 달리 모든 음악적 요소들을 작곡자의 콘트롤 아래에 두는 노력을 했다. 그래서 베베른을 토탈 시리얼리즘의 선구자라고 부른다. 2차 대전이 끝나자 베베른은 비엔나를 벗어나서 잘츠부르크의 미터질(Mittersill)로 왔다. 전후 비엔나의 혼란을 피해서였다.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연합군은 오스트리아의 주요 도시에서 통행금지를 실시하고 있었다. 야간 통행금지는 밤 10시부터였다. 베베른은 통행금지 시간이 되기 45분 전에 담배나 한대 피려고 밖으로 나왔다. 집에는 손자들이 있었는데 그는 공연히 손자들을 깨우기가 싫어서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당시에 오스트리아의 미군 점령지역에서는 암시장이 활발했었고 미군 당국은 군수물자의 암거래를 강력히 단속하고 있었다. 베베른의 사위도 암거래에 연루되어서 체포되었다. 그러한 때에 베베른은 집에 있기가 답답해서 잠시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마침 그 지역을 순찰하던 미군 병사(레이몬드 노우드 벨 일등병)가 베베른을 통행금지 위반자로 보고 무조건 총을 쏘았다. 베베른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베베른을 쏜 미군병사는 비록 전쟁에 참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총으로 사람을 쏘아서 죽인 것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두운 길에서 혼자 담배를 피고 있는 남자를 보고 암시장에서 군수물품을 밀매하는 사람으로 착각했었다고 고백했다. 그 미군병사는 자기가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나서는 양심의 가책과 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그 미군병사는 그런 일이 있은지 10년 쯤 후에 알콜중독자가 되어 죽었다.


○ 일반 베르크(Alban Berg: 1885-1935)


알반 베르크. 등에 생긴 작은 종기 하나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서 죽었다.


알반 베르크는 아놀드 쇤베르크, 안톤 베베른 등과 함께 비엔나 제2학파의 일원으로서 유명한 작곡가이다. 쇤베르크의 제자인 베르크는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자기 작품에 통합시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현대음악에 대하여 사람들은 놀랍도록 새로운 감각의 음악이라고 하면서 찬사를 보내는가 하면 솔직히 듣기에 거북하고 지루하다면서 거부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오페라인 '보체크'(Wozzek)와 바이올린 협주곡 등은 아직까지도 깊은 관심을 얻어 연주되고 있다. 베르크는 작품활동에 있어서 상당히 성공한 작곡가였으나 생활은 여유롭지 못해서 힘들게 지내야 했다. 가난한 생활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것이었다. 1935년 크리스마스를 하루 이틀 남겨 놓은 날에 우연히 등에 벌레가 물어서 종기(뾰루지)가 생겼다. 별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종기는 잠시후 팥알만큼 부풀어 올랐다. 베르크는 병원에 가는 대신에 아내에게 가위로 종기를 짤라 달라고 부탁했다. 공연히 별것도 아닌 것으로 병원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돈을 쓰기가 아까워서였다. 베르크의 자가치료법은 실패였다. 피가 너무 많이 흘러 나왔다. 베르크의 아내가 가만히 있을수가 없어서 베르크를 데리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병원에서 그랬는지 또는 집에서 아내가 가위로 종기를 짤라 낼 때에 그랬는지 아무튼 혈액에 세균이 감염되어서 결국 얼마 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1935년 12월 24일이었고 베르크가 50세 때였다. 알만한 사람이 왜 그런 원시적인 치료방법을 택하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가난이 죄였다.


○ 에릭 사티(Eric Satie: 1866-1925)


에릭 사티. 독술을 너무 마셔서 간경변으로 세상을 떠났다.


에릭 사티는 20세기 파리 아방갸르드 작곡가 중에서도 선구적인 인물이지만 그보다고 그의 기이한 행동으로 더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다. 사티의 죽음은 그렇게 비정상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술을 많이 마셔서, 그것도 프랑스의 압상트라고 하는 독한 술을 많이 마셔서 간경변이 되어 죽은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릭 사티는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났자. 그것이 특이한 것이 아니라 그의 생활이 참으로 기이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소개코자 한다. 사티는 아르퀴에일(Arcueil)이란 곳에 있는 작은 원 룸 아파트에서 27년을 살았다. 그렇게 오래 한 곳에 살았고 많은 사람들과 모임을 가졌지만 단 한사람도 그의 아파트를 방문한 일이 없다. 그의 아파트가 어떻게 생겼는지 밝혀진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였다. 방 하나짜리의 작은 아파트이지만 두대의 그랜드 피아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피아노를 2층처럼 올려 놓았다. 공간이 비좁아서였다. 두 피아노의 페달은 끈으로 묶어서 아래에서 한번에 움직일수 있도록 해 놓은 것도 특이했다. 사티는 열두벌의 회색 양복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똑같은 디자인에 똑같은 옷감의 양복이었다. 사티는 양복 한 벌이 해져서 입을수 없게 되고 나서야 다음 양복을 입었다. 그래서 열두벌의 양복 중에서 여섯벌은 해져서 옷장의 한 구석에 있고 아직 입지 않은 여섯 벌의 양복은 새것으로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다. 대단한 준비성이었다. 사티는 우산을 좋아했다. 여러 종류의 우산을 무려 100개나 보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수건 사랑도 유별났다. 세어보니 84장을 가지고 있었다. 사티는 이런 수집품 이외에도 많은 편지를 보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 자기가 자기 앞으로 보낸 편지였다. 편지에는 누구와 만날 약속이 되어 있으면 만나는 장소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등등이 세밀하게 적혀 있었다. 편지라기 보다는 조사보고서와 같았다. 


사티의 기이한 행동 중에 하나는 식사습관이다. 하얀 색의 식품만을 먹었다. 예를 들면 하얀 계란, 하얀 설탕, 잘게 빻은 뼈, 죽은 동물의 굳기름, 송아지 고기, 소금, 코코넛, 맹물에 삶은 닭고기, 곰팡이가 핀 과일, 쌀, 순무, 방향제인 장뇌를 섞은 소시지, 파스트리, 하얀 종류의 치즈, 목화씨 기름으로 드레싱한 살라드, 흰색 살의 생선(단, 껍질 없이 속살만) 등등이다. 와인을 끓인 후에 차갑게 식혀서 여기에 푸크시아(Fuchsia) 풀로 만든 주스를 섞어서 마시기를 즐겨했다. 사티는 음식을 먹을 때에는 절대로 얘기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혹시 잘못해서 식도가 막혀서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사티는 상당수의 미출판 작품들을 남겼다. 그런데 어떤 작품에는 기이한, 어떻게 보면 엽기적인 제목을 붙여서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한마리의 개를 위한 진짜 축늘어진 전주곡'(Authentic Flabby Preludes for a god), '말린 태아'(Dried Up Embryos) 등이다. 한편 이상한 연주지시도 있다. 예를 들면 '치통이 있는 나이팅게일 처럼'(like a nightingale with a toothache)이다. 아마 가장 유명한 것은 '번민'(Vexsations)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소품들일 것이다. 똑같은 음악이 840회나 반복되는 작품이다. 나중에 존 케이지가 10명의 피아니스트를 동원해서 '번민'을 공연한바 있다. 원래대로 연주하자면 18시간이나 걸리겠지만 도중에 지쳐서 그만두었다는 후문이다.  


○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


vivaldi에 대한 이미지 결과

젊은 시절의 안토니오 비발디. 그의 묘지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안토니오 비발디는 음악의 역사에서 길이 빛나는 너무나 위대한 작곡가이지만 그의 말년은 그 시대의 다른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궁핍한 것이었다. 비발디는 베니스에서 활동하다가 신성로마제국의 샤를르 6세 황제의 관심을 받아 비엔나로 오라는 초청을 받았다. 비발디는 비엔나에 가는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악보들이나 자료들 까지도 거의 헐값에 팔았다. 지금으로서는 값을 따질수 없는 귀중품들인데 말이다. 그런데 비엔나에 온지 얼마 안되어서 그를 초청한 샤를르 6세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 비발디는 그를 후원해 줄 어느 누구도 찾지 못하고 비엔나의 허룸한 하숙집에서 그저 이제나 저제나 자기를 찾을 사람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는 중에 그만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다 보니 가뜩이나 피곤해서 죽을 지경인데 병까지 걸려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741년 7월 28일의 일이었다. 그때 비발디는 지금의 국립오페라극장(수타츠오퍼)의 뒷편 자허 호텔이 있는 자리에 있었던 건물에 기숙하고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를 아는 사람 몇이서 장례를 치루어 주기로 했지만 어려운 여건에 제대로의 장례를 치룰 형편이 되지 못했다. 비엔나에는 사형수들을 처형하고서 그들의 시신을 그 자리에 간단히 매장하는 장소가 있었다. 지금의 4구 칼스키르헤 앞에 있는 비엔나 공과대학교(TU) 자리가 이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현재의 칼스플라츠 한편이다. 비발디는 그곳에 매장되었지만 별도의 묘지가 조성되지 못하고 묘비도 세워지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서 비엔나에서 대대적인 도시계획을 이루어 질때 칼스플라츠도 변화를 맞아야 했다. 사형수들의 공동묘지가 있던 자리에는 비엔나 공과대학교가 들어섰고 다른 건물들도 세워졌다. 오늘날 사람들은 비발디의 시신을 묻은 공동묘지가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히 짚지를 못하고 있다. 그저 현재의 비엔나 공과대학교 본관의 어느 한쪽이 해당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위대한 작곡가의 마지막 가는 길치고는 비참한 것이었다. 비발디가 비엔나에 왔었고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긴 명판(Gendektafel)이 두군데에 있다. 하나는 자허 호텔 건물(필하모니커슈트라쎄 4번지)이며 다른 하나는 비엔나공과대학교 외부 벽면(칼스플라츠 13번지)이다.


칼스플라츠. 가운데 교회가 칼스키르헤이며 오른쪽 앞의 건물이 비엔나공과대학교 본관건물이다. 왼쪽은 비엔나역사박물관이다. 비발디가 매장되었던 곳은 칼스키르헤 옆 비엔나공과대학교와의 중간쯤으로 보고 있다.


● 위대한 작곡가로서 말년에 정신이상 또는 치매를 일으켜서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가 세상을 떠난 분들로서는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 게타노 도니체티(Gaetano Donizetti: 1797-1848),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 구스타브 말러(Gustav Mahler: 1860-1911) 등이 있다.


- 살리에리: 1791년에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이상한 소문이 살리에리의 귀에도 들어왔다. 모차르트가 독살되었으며 살리에리에게 책임이 있다는 소문이었다. 살리에리는 남은 생애 동안 그 소문 때문에 비통과 절망 중에 살아야 했다. 살리에리가 왜 그렇게 힘들어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위대한 천재 음악가인 모차르트가 젊은 나이에 죽자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그로서 일종의 자책감 때문에 비통해 하고 절망 중에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지만 그런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로부터 살리에리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어갔다. 1823년에 건강이 여의치 못한 살리에리는 넘어져서 머리를 다친 일이 있었다. 그때부터 살리에리의 정신상태는 혼돈으로 변해갔다. 마침내 살리에리는 그해 10월에 비엔나 종합병원(AKH)에 입원하였고 때를 맞추어서 모차르트의 독살설은 마치 타오르는 불길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비엔나의 사람들은 두 편으로 갈라졌다. 하나는 살리에리가 분명히 모차르트를 독살했다고 주장하는 측이고 다른 하나는 살리에리가 무고하다는 측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살리에리가 병원에 있을 때에 자기가 모차르트의 죽음에 책임이 있으며 비난을 받아서 마땅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며 마침내 임종의 자리에서는 모차르트를 독살했다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기록이나 문서는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살리에리가 무고하다는 내용의 기록은 남아 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살리에리는 1825년 5월 7일 저녁에 숨을 거두었다. 살리에리의 장례식에는 비엔나의 웬만한 음악가들은 거의 전부가 참석했다. 다만, 베토벤은 참석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병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며칠후 살리에리의 진혼곡 C 단조가 살리에리를 추모하여서 처음 공연되었다.  


- 도니체티: 도니체티는 1840년에 비엔나에 어떤 자리가 있으니 오라는 초청을 받았다.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탈리아 북부의 상당부분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는 관계가 나빳지만 도니체티는 그런 것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비엔나의 자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도니체티는 정치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도니체티의 비엔나 생활은 질병으로 인하여 괴로운 것이었다. 어쩌다가 매독에 걸렸던 것이다. 도니체티는 1845년부터는 더 이상 작업을 할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심지어는 말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걷지도 못했다. 도니체티는 자기 마음을 콘트롤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정신이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의 작품에 광란의 장면을 표현하기를 즐겨했다. 광란으로부터 일종의 희열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자신이 광란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사촌인 안드레아는 그를 더 이상 비엔나에 둘수 없다고 판단해서 파리로 데려왔다. 이어 고향인 베르가모로 돌아왔다. 도니체티는 1848년에 그가 태어났던 베르가모에서 숨을 거두었다.


- 슈만: 1854년 2월 말에 슈만의 증세는 악화되었다. 천사의 환영을 보았는가하면 악마의 환영을 보았다면서 무슨 말인지 모를 말들을 했다. 그러면서 슈만은 자기의 환각증세 때문에 혹시라도 사랑하는 아내 클라라에게 해를 끼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며칠후, 정확히는 2월 27일에, 슈만은 다리에서 라인강으로 투신하여 자살하려했다. (슈만의 누인인 에밀리도 1825년에 강에 뛰어들어 자살한 일이 있다.) 마침 보트를 타고 지나가던 뱃사람이 슈만을 구출해서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슈만은 클라라에게 아무래도 정신병원에 들어가서 요양을 하고 치료를 받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슈만은 본의 한 구역인 엔데니히히 있는 독토르 프란츠 리하르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2년 후인 1856년 7월 29일 향년 46세로서 세상을 떠났다. 슈만은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기간 중에 클라라를 볼수 없었다. 클라라에게 충격이 될 것 같아서였고 또한 클라라는 아이들 때문에 시간을 내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브람스는 아무때나 면회할수 있었다. 클라라가 마침내 슈만을 면회한 것은 슈만이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이었다. 슈만은 클라라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한두마디만 했을 뿐이었다. 슈만의 증세는 매독 때문이라는 것이 현대적인 견해이다. 아마도 슈만이 학생시절에 창녀들과 어울리면서 전염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매독의 증세는 클라라와 결혼하고 나서 10년이 넘게 잠복만 하고 있어서 그런 증세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슈만의 담당의사에 따르면 슈만은 수은중독의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수은은 당시 매독치료제로서 사용되었다. 또 한가지 그의 정신이상 증세의 원인은 뇌종양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슈만의 시신은 사망한 후에 해부를 하였는데 뇌의 하부에 젤라틴 모양의 종양이 발달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뇌에 압박을 가해서 이상한 증세를 유발했다는 것이다.


- 말러: 말러는 1910년 여름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보였지만 교향곡 10번의 작곡에 전념하였다. 말러와 부인인 알마는 그해 10월에 뉴욕으로 갔다. 말러는 미국에서 뉴욕필의 시즌 오픈으로 분주한 시간을 보냈고 또한 전국 순회연주회도 맡아 했다. 그러나 12월의 크리스마스 쯤해서는 목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이듬해 2월 21일에는 체온이 40도나 되는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러는 카네리 홀에서의 연주 예정을 강행하겠다고 주장했다. 카네리 홀 연주회는 이탈리아 음악으로 프로그램이 짜여 졌는데 그 중에는 부소니의 '베르체우세 엘레지아크'(Bereceuse elegiaque)의 세계 초연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튼 말러는 힘든 중에도 카네기 홀 콘서트를 치루었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콘서트였다. 말러는 그후 병상에만 누워 있어야 했다. 진단 결과 병명은 세균성 심장 내막염이었다. 심장 판막에 이상이 생겨서 고통을 받는 병이었다. 의사는 생존률이 거의 제로라고 선언했다. 그래도 말러는 '낫겠지'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말러는 사람들과 콘서트 시즌에 돌아가서 지휘하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3월 3일에 부인인 알마가 작곡한 가곡들을 소프라노 프란시스 알다(Frances Alda)가 연주한데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였다. 말러는 유럽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4월 8일, 말러와 가족들은 상주 간호사 한 명과 함께 아메리카호를 타고 뉴욕을 떠났다. 이들은 열흘 후에 파리에 도착했다. 말러는 뉠리(Neuilly)에 있는 아는 사람의 병원에 곧장 입원하였다. 그러나 이곳 병원에서는 어떠한 차도도 보이지 않았다. 말러와 식구들은 5월 11일에 비엔나로 가는 기차를 탔다. 비엔나에 도착한 말러는 곧바로 뢰브(Low) 정신병원에 입원하였고 며칠 후인 5월 18일 저 세상으로 떠났다. 말러의 장례식은 5월 22일에 거행되었다. 말러의 시신은 말러가 미리 요구한대로 그린칭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말러는 묘비를 간단히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런 글도 적어 넣지 말고 그저 MAHLER 라고만 적어 달라고 부탁했다. 왜냐하면 만일 누가 자기의 묘지를 찾아 온다면 그 사람은 이미 자기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니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알마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의사가 꼼짝 말고 집에서 쉬고 있으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장례식 자체는 상당히 화려한 것이었고 많은 조객들이 참석한 것이었다. 아놀드 쇤베르크는 그가 보낸 조화에서 말러를 '성자 구스타브 말러'(The Holy Gustav Mahler)라고 적었다. 지휘자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화가 일프레드 롤러(Alfred Roller), 제체시온을 이끈 화가인 구스타브 클림트 등과 함게 유럽의 유수한 오페라 극장의 대표들도 다수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