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시컬 뮤직 팟푸리/클래시컬 뮤직 팟푸리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위대한 작곡가들

정준극 2017. 2. 16. 11:56

20대와 30대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위대한 작곡가들

페르골레지는 26세에 요절, 30대에 작고한 작곡가들도 다수


고전음악의 세계에는 20-30대의 한창 나이에 어쩔수 없이 작품활동을 접고 작고한 위대한 작곡가들이 의뢰로 여러 명이 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아직 부르지 못한 노래를 가슴 속에 품고 간다'. 만일 이들이 조금만 더 생존했고 조금만 더 작곡활동을 했다고 하면 오늘날 우리의 음악생활은 보다 더 감상적이고 윤택해 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11세. 줄리안 스크리아빈(Julian Scriabin: 1908-1919). 작곡가라고 불리는 사람 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람은 줄리안 스크리아빈일 것이다. 당대에 가장 뛰어난 피아노 작곡가인 알렉산더 스크리아빈(Alexander Scriabin: 1872-1915)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피아노 재능과 작곡에 대한 열성을 가지고 있던 줄리안은 10세 때에 이미 아버지 스타 일의 피아노 전주곡 4곡을 작곡해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너무나 훌륭한 작품이어서 아버지는 그것을 어린아이의 작품이라고 보기에 아까워서 자기의 작품집 리스트에 추가하였다. 물론 모차르트를 비롯해서 몇몇 작곡가들도 열살이 채안되는 때에 작곡을 했다고 하지만 작품의 완성도에 있어서는 줄리안의 피아노 전주곡들을 당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다가 줄리안의 사후 95년 만에 '전주곡'은 별도로 출판되었다. 줄리안은 서구 고전음악의 세계에서 가장 나이 어린 작곡가이며 가장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작곡가로서 기억되고 있다. 음악학자들은 줄리안은 1920년대 러시아의 초기 아방 갸르드 작곡가라고 보았다. 줄리안은 11세에 세상을 떠났다. 줄리안은 1919년 6월 22일 드네프르(Dnieper)강에서 보트를 타고 있는 중에 물에 빠졌고 며칠을 수고했지만 시신을 찾지 못했다. 드네프르강은 스몰렌스크에서 시작하여 흑해로 들어가는 러시아의 몇안되는 긴 강이다. 오늘날 줄리안의 피아노 작품들은 연주회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되고 있다. 그런데 아마 대부분 청중들을 그 작품을 쓴 작곡가의 나이가 몇살인지 알지 못하고 들었을 것이다.


대의 피아노 작곡가인 알렉산더 스크리아빈의 아들인 줄리안 스크리아빈. 11세에 세상을 떠났다.


22세. 마이클 헤밍(Michael Heming: 1920-1942). 영국의 작곡가로서 그의 아버지는 당시 유명한 바리톤인 퍼시 헤밍이었다. 마이클 헤밍은 젊은 나이에 영국 육군에 입대하여서 아프리카 이집트 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러다가 2차 엘 알라메인 전투(Battle of El Alamein)가 한창이던 1942년 11월 3일 소총수였던 마이클 헤밍은 전투에서 전사했다. 2차 엘 알라메인 전투는1942년 10월 23일에 시작되어서 18일만인 11월 11일에 종료된 전투이다. 북아프리카에서의 기득권, 특히 수에즈 운하를 둘러싼 기득권을 장악하려는 추축국(Axis)와 연합국(Allied)간의 전투였다. 추축국의 사령관은 독일의 롬멜 원수였으며 연합국 측은 영국의 몽고메리 원수였다. 마이클 헤밍은 왕립음악원에서 지휘를 공부했다. 그리고 지휘자 겸 작곡가인 존 바르비롤리(John Barbirolli)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입대하여 중위로서 아프리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당국은 마이클 헤밍의 유품을 런던의 그의 집으로 전달했다. 어머니 조이스 새비지가 아들 마이클의 유품에서 작품을 스케치해 놓은 악보를 발견했다. 아프리카에서 받은 소감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마이클의 아버지인 퍼시가 악보를 바르비롤리 선생에게 보여주었다. 바르비롤리는 친구로서 작곡가 겸 지휘자인 안소니 콜린스에게 악보를 보여주었다. 안소니 콜린스는 마이클 헤밍이 스케치해 놓은 작품을 바탕으로 작품을 완성하고 '전사한 어떤 병사를 위한 비가'(Threnody for a Soldier Killed in Action),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 작품은 1944년 1월 14일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바르비롤리의 지휘로 셰필드 시청에서 초연되었다. 런던은 전쟁으로 혼란하여서 비교적 시골인 셰필드에서 초연을 가졌던 것이다. 마침 1월 14일은 마이클 헤밍의 24회 생일이었다. 그후 이 작품은 이탈리아와 그리스 등지에서 연주되어 호평을 받았으나 얼마 후에는 잊혀진 작품이 되었다가 근자에 새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23세. 녜 얼(Nie Er: 聂耳: 1912-1935). 중국의 작곡가인 녜 얼을 클래식 작곡가의 반열에 포함해도 되느냐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고 여기서는 젊은 그의 죽음이 특이하기 때문에 소개코자 한다. 녜얼이라는 이름은 중국인이라면 르모르는 사람이 없다. 오늘날 중국의 국가인 '의용군 행진곡'(义勇军进行曲)을 작곡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23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많은 노래와 행진곡, 원무곡, 그리고 오페라까지 작곡했다. 오페라는 '양자강 폭풍우'(Storm on the Yangtze)이다. 녜 얼은 운난성 쿤밍시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녜수신(守信)이었고 별명으로는 지이(Ziyi: 子藝)라고 불렀다. 그가 얼(Er: 耳)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어릴 때부터 귀가 무척 밝아서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두 흉내낼수 있었으며 또한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를 분간할수 있었기 때문에 '귀'(얼)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녜 얼은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장카이섹의 국민당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수배를 받았다. 어찌되었든 그는 일본으로 갈수 있게 되었고 1935년 7월 17일 가나카와(神奈川)현의 후지사와(藤澤)시에서 친구와 함께 태평양 바다에 들어가서 자기가 무슨 수영선수라고 수영을 하다가 익사해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혹자는 그가 소련에 망명하기 위해 일본에서 바다로 향했다는 얘기를 했지만 그건 신빙성이 없는 얘기다. 아무튼 그가 일본으로 간 것은 국민당의 중국으로부터 피신하기 위해서 였다는 설명이다. 왜냐하면 주로 상하이에 있던 그의 친구들이 공산주의 음악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국민당에 의해 여러명이나 체포되어 곤혹을 치루었기 때문이다.


녜 얼


23세. 리카르드 노르드라크(Rikard Nordraak: 1842-1866). 리카르드 노르드라크는 노르웨이의 작곡가이다. 그는 노르웨이 국가인 '예, 우리는 이 나라를 사랑합니다'(Ja, vi elsker dette landet)를 작곡한 사람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폐결핵에 걸려 고생하다가 23세 때인 1866년 3월에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베를린의 키르흐호프 예루살렘에 안장되었으나 1925년에 노르웨이의 주선에 의해 오슬로의 보르 프렐세르스(Var Frelsers)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노르드라크는 오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업가였으나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어린시절에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웠음을 물론이다. 아버지는 그를 기업가로 키우고자 했다. 그래서 15세 때에 코펜하겐의 상업학교에 입학토록 했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버릴 수가 없어서 비즈니스를 배우지 않고 음악공부만 했다. 아버지도 어쩔수 없다고 생각했다. 노르드라크는 베를린에서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했다. 그가 작곡한 Ja, vi elsker는 노르웨이의 국가로 선정되었다. 그가 작곡한 노르웨이 국가가 처음 대중 앞에서 연주된 것은 1864년 5월 17일 노르웨이의 제50주년 제헌절 기념식상에서였다. 가사는 노르드라크의 사촌인 뵈른스티에르느 뵈른슨(Bjørnstjerne Bjørnson)이 썼다. 노르드라크 마지막 작품은 다섯개의 노르웨이 시에 의한 노래이다. 가사는 모두 사촌인 뵈른슨의 시를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그의 또 다른 대표적인 역시 뵈른슨의 희곡인 '스코틀랜드의 마리아 스튜어트'(Maria Stuart of Scotland)를 위한 극음악이다. 노르드라크는 1864년에 코펜하겐에서 에드바르드 그리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그리그에게 노르웨이 멜로디에 헌신해 줄것을 당부했다. 그리그는 노르드라크에게 영감을 받아서 많은 작품을 썼다. 예를 들면 서정적 작품(Lyric pieces)이다. 그리그는 노르드라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애통하여서 그를 위한 장송행진곡을 작곡했다.


노르웨이 국가를 작곡한 리카르드 노르드라크


23세. 렌타로 타키(Taki Rentaro: 용 廉太郞: 1879-1903). 일본 메이지 시대를 살았던 작곡가 렌타로 타키를 역시 중국의 녜 얼과 마찬가지로 클래식 작곡가의 반열에 포함할수 있느냐는 것은 둘째치고 그를 소개하는 것은 일본 서양음악의 선구자라고 할수 있는 그가 참으로 젊은 나이인 23세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어쨋든 20대에 세상을 떠난 작곡가로서 소개하는 바이다. 그는 1901년 도쿄음악원을 졸업하고 그 시대의 일본인으로서는 드믈게 독일 라이프치히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했다. 피아노 소품으로서 그가 죽음을 예견한듯 작곡한 것이 '우라미'(후회)라는 작품이었다. 서구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모음곡 '사계절' 중에서 '꽃'은 그의 가장 유명한 노래작품이다. 또한 '황성의 달'(荒城月: Kojo no Tsuki)은 일본 전통 노래로서 국제적으로 가장 널리 불려진 곡이다. 외국의 여러 성악가들이 이 노래를 음반으로 취입한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최근에는 안드레 류도 '황성의 달'을 연주했다. 렌타로 타키는 일본 전통음악과 유럽의 고전음악의 간극을 뛰어넘은 작품들을 만들었다. 뛰어난 재능의 그는 1903년 6월 29일, 폐결핵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독일에서 유학할 때에 걸린 병이었다고 한다. 요즘같아서는 병도 아닌 것인데 당시에는 백약이 무효한 병이었다.


렌타로 타키

24세. 릴리 불랑제(Lili Boulanger: 1893-1918). 유럽에서 널리 알려진 작곡가 중, 가장 일찍 세상을 떠난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 릴리 불랑제를 먼저 꼽을 것이다. 더구나 여성 작곡가라면 더욱 그러하다. 프랑스의 여류 작곡가인 릴리 불랑제는 성악곡, 피아노곡, 합창곡 등을 작곡했다. 칸타타인 '파우스트와 엘렌'(Faust et Helene)은 요즘도 자주 연주되는 작품이다. 모두들 릴리 불랑제의 뛰어난 재능에 대하여 감탄과 기대를 하고 있는 중에 당사자인 릴리 불랑제는 1918년 3월 15일 프랑스 중부의 멤지 쉬르 세느라는 곳에서 2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병명은 장질환이었다. 그런데 정확한 병명은 아직 모른다. 아마도 크론병(Crohn's disease)이라고 불리는 만성염증성장질환이 아니면 장결핵(intestinal tuberculosis)일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런데 크론병이나 장결핵은 상당히 다른 양상이므로 비슷한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다. 특히 릴리 블랑제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그런 구별조차 어려웠었다. 릴리는 의사가 2년 정도밖에 더 살지 못한다고 말해 주자 이를 자기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는 그때부터 차분히 계획을 세워서 미완성 작품들을 완성하는 일정을 만들어 놓고 하나하나 완성해 나갔다. 릴리의 작품은 사랑스럽고 발할하며 소녀와 같은 청순함이 있다. 하지만 종교적인 합창곡은 장엄하고 화려한 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릴리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피에 예수'(Pie Jesu)이다. 하지만 '옛 불교 수도원에서'(Vielle Priere Bouddhique)도 특별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릴리의 언니는 작곡가 겸 지휘자인 나디아 불랑제(Nadia Boulanger: 1887-1979)이다. 여성으로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는 것은 당시로서 유별난 일이어서 말들이 많았었다. 어쨋든 나디아는 동생의 작품을 널리 전파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결과 오늘날 릴리 불랑제의 작품이 그나마 연주회에서 소개되고 있다고 볼수 있다.


릴리 불랑제.


25세. 비테츨라바 카프랄로바(Vitezslava Kapralova: 1915-1940).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에 브르노에서 태어났고 파리에서 활동한 카프랄로바는 '네개의 피아노 소품'이 대표작이다. 그 중에서 '4월 전주곡'(April Preludes)이 가장 유명하다. 그러나 실은 다른 오케스트라 작품들도 상당한 인정을 받고 있다. 오케스트라 성악곡인 'Waving Farewell'은 라파엘 쿠벨릭도 찬사를 아끼지 않은 작품이다. 카프랄로바의 작품은 낭만주의와 현대를 연결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카프랄로바는 지휘자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체코교향악단 등의 지휘자로서 활동했다. 브르노(현재는 체코공화국 소속) 음악원을 나온 그는 프라하에서 보후슬라브 마르티누 등으로부터 작곡을 배웠다. 그리고 파리로 와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카프랄로바는 1940년 6월 16일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두달 전에는 체코 출신의 작가인 지리 무하(Jiri Mucha)와 결혼식을 올렸다. 카플라로바가 세상을 떠난 날은 공교롭게도 그날은 나치가 파리를 점령한 날이었다. 카프랄로바의 사인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의사는 속립병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증세가 복막염(Peritonitis)과 비슷해서였다. 그러나 추측일 뿐이었다.


비테츨라바 카프랄로바


26세.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1736). 이탈리아의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오르가니스트인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는 음악의 역사를 장식하는 중요한 음악가 중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불과 26세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사인은 폐결핵이었다. 페르골레지는 비록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수많은 종교음악과 세속적인 음악을 남겼다. 종교음악으로서는 '성모애상'(Stabat Mater)이 두드러지고 있고 세속음악으로서는 여러 편의 오페라가 있다. 페르골레지는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의 진정한 마스터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작곡가였다. 그의 오페라 중에서 '하녀 마님'(La serva padrona)과 '자랑스런 죄수'(Il prigionier superbo)는 오늘날 까지도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는 작품이다. 페르골레지는 1710년 이탈리아의 안코나 지방(당시에는 교황청 소속)에 있는 제시(Jesi)라는 마을에서 태어나서 1736년 나폴리 인근, 지중해를 바라보는 항구도시인 포추올리(Pozzuoli)에서 세상을 떠났다. 페르골레지라는 이름은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는 곳에 있는 마르케 지방의 페르골라(Pergola)라는 마을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페르골라에는 페르골레지의 선조들이 살았었다. 페르골레지는 7편의 오페라를 남겼는데 대부분이 오페라 부파이다. 그 중에서 페르골레지가 23세 때에 발표한 '하녀 마님'은 그의 사후인 1752년 파리에서 공연되어 대단한 인기를 끌었지만 반면에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와 프랑스 순수 오페라 중에서 어떤 것이 더 훌륭한지를 가름하는 대결을 불러온 저 유명한 '부퐁 논쟁'(Querelle des Bouffons)의 불씨를 제공해 주었다. 2년 동안이나 지속된 이 논쟁에서 페르골레지는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의 모델로서, 그리고 장 바티스타 륄리와 장 필립 라모는 프랑스 순수 오페라의 모델로서 거론되었다. 페르골레지의 가곡 중에서 '니나'(Nina)는 예전에 우리나라 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널리 알려졌던 곡이다.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폐결핵의 정체를 확실히 알지 못했었다. 사람들은 그저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으로만 인식했었다.


27세. 알렉산드르 레비(Alexandre Levy: 1864-1892). 알렉산드르 레비는 19세기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였으나 요즘들어서는 그의 조국인 브라질은 물론 유럽에서도 그의 작품에 대하여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어서 점점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작곡가이다. 레비는 브라질의 애국적 작곡가로서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레비는 특히 브라질의 전통음악과 서구의 고전음악을 융합하는 작품을 써서 관심을 끌었다. 그의 '탱고 브라질레이로'(Tango Brasileiro)는 피아노 또는 바이올린 연주곡으로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의 생전에 단 한번도 연주된 일이 없다. 그후 사후에 가서야 여러 음반제작사들이 음반으로 만든 곡이다. 그는 한창 젊은 나이인 27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사인은 분명하지 않다. 1892년 1월 17일,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 저녁에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몸이 좀 불편하다고 하면서 드러누웠다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알렉산드르 레비


28세. 마리아 말리브란(Maria Malibran: 1808-1836). 마리아 말리브란은 작곡가라기 보다는 뛰어난 소프라노였다. 당시에 말리브란은 오페라 소프라노로서 너무나 유명해서 사람들은 아직도 그가 음악을 작곡했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지만 실로 그는 40여곡에 이르는 아리아들을 작곡했다. 가장 대표적인 노래가 '라타플란'(Rataplan: 베르디의 '일트로바토레'에 나오는 라타플란과는 다른 음악)과 '일 마티노'(Il mattino), '그대를 사랑해'(La voix qui dix: je t'aime)이다. 마리아 말리브란은 1836년 7월 5일이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뇌진탕(traumatic brain)이나 척추골절을 입어서 세상을 떠났다. 바로 그날까지만 해도 마리아 말리브란은 건강해서 승마를 즐길 정도였으나 움직일수가 없어서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두달 후인 9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근자에 마리아 말리브란의 작품을 재인식하는 운동이 여러 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의 메조소프라노인 체칠리아 바르톨리는 말리브란의 노래를 직접 부르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마리아 말리브란. 승마하다가 떨어져서 뇌진탕과 척추골절로 결국 세상을 떠났다.


29세. 즈앙 알랭(Jehan Alain: 1911-1940). 즈앙 알랭은 20세기 초반, 가장 뛰어난 오르가니스트였으며 아울러 작곡가였다. 그는 오르간곡도 작곡했으나 피아노곡과 합창곡 등도 작곡했다. 그가 활동했을 당시에는 그의 작품이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그의 사후 그의 누이동생인 마리 클레어알랭(Marie Claire Alain: 1926-2013)이 오빠 즈앙 알랭의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바람에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즈앙 알랭은 음악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알베르 알랭은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였다. 또한 오르간 제작가로서도 명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즈앙 알랭이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즈앙 알랭의 남동생인 올리비에 알랭(Olivier Alain: 1918-1994)도 뛰어난 오르가니스트 겸 피아니스트로서 작곡도 했다. 즈앙 알랭은 2차 대전 중에 프랑스 육군으로 입대하여서 전선에 투입되었다. 1940년 6월 20일, 전선에서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그는 독일군이 쏜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그러나 그는 참전한 이래 독일군 16명을 사살한 전공을 쌓은바 있다. 프랑스정부는 그에게 Croix de Guerre를 수여하였다.


즈앙 알랭. 2차 대전중 전사했다.


31세.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 우리는 보통 음악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요절한 작곡가를 모차르트라고 알고 있지만 실은 슈베르트가 모차르트보다 훨씬 전에 세상을 떠났다. 비엔나에서 태어난 슈베르트는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의 의사들은 슈베르트의 사인을 성홍열이라고 보았지만 그후 논란이 있었고 오늘날에는 매독의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슈베르트는 그가 가장 존경하는 베토벤이 1827년 3월에 세상을 떠나자 크나큰 충격과 함께 슬픔을 가눌수가 없었다. 그래서 베토벤의 장례식에서 제일 앞에서 만장을 들고 운구행렬을 인도하는 역할을 자청해서 했다. 그로부터 몇달 후에는 슈베르트가 가장 좋아하는 낭만시인인 독일의 빌헬름 뮐러가 3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일이 일어났다. 슈베르트는 빌헬름 뮐러의 시를 바탕으로 연가곡인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와 '겨울나그네'를 작곡한바 있다. 슈베르트는 존경하는 베토벤의 죽음과 친애하는 뮐러의 죽음으로 자기도 머지않아 이들을 따라가게 된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고 결국 이듬해인 1828년 11월에 비엔나에 있는 형 페르디난트의 집에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그때 슈베르트는 '겨울나그네'의 후반부 노래들을 수정하는 일을 했다. 슈베르트는 임종에 앞서서 친구들에게 두가지 요청을 하였다. 하나는 베토벤의 현악4중주곡 14번을 마지막으로 듣고 싶다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자기가 죽거든 베토벤의 묘지에서 가까운 곳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두가지 요구사항은 모두 이루어졌다.


31세에 세상을 떠난 슈베르트


32세. 요한 쇼배르트(Johann Schobert: 1735?-1767). 지금은 폴란드에 속해 있는 실레지아에서 태어난 요한 쇼베르트는 그의 시대에 뛰어난 작곡가였고 피아니스트였다. 그가 남긴 피아노 협주곡, 하프시코드 소나타 등은 놀랄만큼 아름다워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들이다. 요한 쇼베르트는 이름이 슈베르트와 비슷해서 혼동 중에나마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보다도 한창 나이에 이상하리만치 엉뚱한 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기억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다. 쇼베르트는 어떤 연줄로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루이 프랑수아 1세의 관심을 끌어서 궁정작곡가로서 파리에 와서 살게 되었다. 왕실의 후원을 받고 있는 쇼베르트의 파리 생활은 즐겁고 여유있는 것이었다. 어느날 쇼베르트는 친구 여러 명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날의 특별 요리는 버섯요리였다. 쇼베르트는 친구들과 식구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서 버섯 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잠시후 버섯 요리가 나오자 버섯을 유심히 보고 있던 친구가 '여보게! 이건 독버섯인듯 하네! 먹지 말게!'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쇼베르트는 한 고집 하는 사람이어서 '아닐세! 그냥 맛있는 버섯이라네! 독버섯이라니 말도 안되네! 내가 먹어보아서 증명을 하겠네'라면서 먼저 먹고 보란듯이 식구들과 친구들에게 먹으라고 권했다. 결과는? 쇼베르트는 물론이고 젊은 부인과 자녀들 중에서 한명, 친구들 네명, 그리고 요리를 서브했던 하녀가 독버섯을 먹고 잠시후에 손을 쓸 사이도 없이 모두 숨을 거두었다. 쇼베르트가 32세였던 1767년 8월 28일의 사건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고집이었다.


어처구니 없는 고집으로 세상을 떠난 요한 쇼베르트


33세. 제레미아 클라크(Jeremiah Clarke: 1674-1707). '트럼펫 벌런터리' 등 여러 작품을 남긴 영국의 바로크 작곡가이며 뛰어난 오르가니스트인 제레미아 클라크는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트럼펫 벌런터리'는 일명 '덴마크 왕자의 행진'이라고도 불리는데 오랫동안 헨리 퍼셀이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던 곡이다. '트럼펫 벌런터리'는 1981년 7월 29일 런던의 성바오로대성당에서 챨스와 다이애나가 결혼식을 올릴 때에도 연주되어서 더욱 널리 알려진 곡이다. 런던에서 태어난 제레미아 클라크는 성바오로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이며 음악감독인 존 블로우(John Blow)의 문하생이 되어 오르간과 작곡을 배웠다. 클라크는 나중에 성바오로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봉사했다. 제레미아 클라크는 20대 후반의 청년시절에 어느 귀부인을 지극히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귀부인은 이미 결혼을 했고 또한 신분으로 보더라도 클라크와 맺어질수 없었다. 이에 절망한 클라크는 자살을 결심하고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밧줄에 목을 매어 죽기로 했으며 뒷면이 나오면 테임스 강에 빠져서 죽기로 했다. 그런데 동전을 진흙 바닥에 던져서 그런지 쓰러지지 않고 서 있게 되었다. 클라크는 두가지 방법으로는 자살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 들이고 권총 자살을 하였다. 그의 친구들이 그를 성바오로 대성당의 교회묘지에 매장코자 했으나 교회측은 자살을 죄악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며칠 후에 클라크가 성바오로대성당을 위해 봉사했던 것을 인정해서 교회묘지에 받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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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미아 클라크


34세. 빈첸조 벨리니(Vincenzo Bellini: 1801-1835). 벨리니는 벨칸토 오페라의 연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한사람으로 높은 존경을 받은 작곡가이다. 벨리니는 마치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듯한 아름다운 멜로디를 놀랍도록 아름답게 만들어냈다. 그것도 아주 긴 아리아들이다. 그래서 보톤 아리아보다 길지만 그래도 멜로디가 너무 아름다워서 결코 싫증을 낼수 없다. 사람들은 벨리니를 '카타니아의 백조'라고 불렀다. 백조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훗날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는 벨리니의 아리아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벨리니 이전에 그처럼 아름답고 긴 멜로디를 만들어 낸 사람은 없다.'라고 말했다. 그것만 보아도 벨리니의 멜로디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수 있다. 벨리니는 당시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들이 대체로 그랬던 것처럼 파리에 와서 지냈다. 그러던중 1834년 여름의 어느날, 그러니까 벨리니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으로 그가 33세 때에, 벨리니는 파리의 어떤 문학모임에서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를 처음 만난 일이 있다. 하이네는 벨리니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당신은 천재올시다. 그런데 뛰어난 재능이 있으면 그에 대한 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위대한 천재들은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지요. 라파엘이 그렇고 모차르트가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 벨리니로서는 말할수 없이 당황스럽고 두려운 말이었다. 그후 벨리니는 하이네를 무척 싫어하게 되었다. 벨리니는 하이네가 나타나는 장소는 일부러라도 피하였다. 그리고 자꾸만 죽음을 예감하였다.


파리 사교계의 여류인 마담 주베르가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이듬해인 1835년 어느날 두 사람을 만찬에 초대하였다. 마담 주베르는 친구인 벨조이오소 공주도 초대했다. 하이네와 공주는 참석했지만 벨리니는 참석하지 않았다. 설사가 심하고 열이나서 참석할수 없었다는 것이다. 벨리니를 총애하는 공주는 의사를 보내어 벨리니의 병세를 돌보도록 했다. 의사는 벨리니를 찾아간 첫날 공주에게 '상당히 위중하다'고 보고했다. 다음날도 위중하다는 보고였다. 셋째 날에는 '병세가 호전되었습니다. 위기를 넘겼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날 벨리니는 오랫만에 밤에 잠도 잘 잤다. 9월 22일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9월 23일 오후 다섯시쯤 벨리니는 34세의 젊은 나이로 예상치 못하게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급성대장염으로 여기에 간종양이 겹쳐졌다는 것이다. 벨리니는 오랫동안 내장에 심한 염증을 앓았다. 그로인하여 몇 년동안 이질, 즉 설사병에 시달렸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벨리니가 성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게다가 벨리니는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돌았다. 여러 대상자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은 나폴리음악원부터의 둘도 없는 친구인 프란체스코 플로리모(Francesco Florimo)라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리니는 여러 여인들과 로맨스를 진행하였으니 예쁘장한 여성적인 모습에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났으니 여인들로서는 제발 한번만이라도 데이트 해 달라고 줄을 섰었을 것이다. 벨리니의 음악적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느냐 하면 태어난지 18개월만에 유명한 가수이며 작곡가인 발렌티노 휘오라반티(Valentino Fioravanti)의 아리아를 틀리지도 않고 그대로 따라 불렀다는 것이다. 벨리니는 5살 때에 피아노를 놀랍도록 연주했으며 여섯 살 때에는 작곡을 시작했다. 그리고 일곱살 부터는 라틴어, 논리한, 철학 등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이후의 얘기들은 지면상 생략코자 한다.


빈첸조 벨리니


35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모차르트는 1756년 1월 27일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고 1791년 12월 5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모차르트의 나이는 35세였다. 사람들은 모차르트와 같은 둘도 없는 천재음악가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을 무척이나 애석해 했다. 만일 단 몇년 만이라도 더 살았더라며 어떤 오페라가 새로 나왔을지 모르며 어떤 미사곡이 새로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라면서 애석해 했다. 모차르트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여러 소문이 있지만 대체로는 공식기록에 의하면 급성속립진열(급성속립진열: Severe miliary fever)라고 되어 있다. 나중에 의학계에서 여러 조사연구가 시행되었는데 거의 1백 종류나 되는 사인이 제시되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만 보더라도 류마티즘열(Rheumatic fever), 연쇄상구균 감염(Streptococcal infection), 선모충병(Trichinosis), 인플루엔자(Influenza), 수은 중독(Mercury poisoning), 신장질환(Kidney ailment) 등이다. 그런데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지 거의 40년이 되는 1830년에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더 푸쉬킨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단편을 썼다. 비엔나에서 모차르트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시기해서 독살했다는 내용의 단편이다. 이 단편을 바탕으로 연극이 만들어졌고 러시아의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를 작곡했다. 그리고 1984년에는 미국의 피터 셰퍼가 이 극본을 각색하여 영화 '아마데우스'를 만들었다. '아마데우스'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사람들은 정말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시기하여서 독살했다고 믿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건 다만 연극과 오페라와 영화일 뿐이다. 실세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친하게 지냈다. 모차르트의 음악적 재능은 신이 주신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날 즈음에는 생활이 빈곤해져서 제대로의 장례식도 치루어주지 못했다. 모차르트의 시신은 비엔나 교외의 장크트 막스 공동묘지에 다른 시신들과 함께 집단 매장되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모차르트의 유해가 묻힌 곳이 어디인지 모르며 장크트 막스 공동묘지와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에 가묘가 만들어져 있을 뿐이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35세. 바실리 칼리니코프(Vasily Kalinnikov: 1866-1901). 러시아의 바실리 칼리니코프도 35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친 작곡가였다. 폐결핵 때문이었다. 칼리니코프는 러시아 중부의 오리올 자치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서 14세 때에 오리올신학교 합창단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후 모스크바음악원에 입학하여 바순과 작곡을 공부했으나 학비가 없어서 중퇴해야 했다. 그러자 모스크바필하모닉협회가 운영하는 음악학교가 장학금을 줄수 있어서 공부를 계속했다. 차이코브스키가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헤서 1892년에 모스크바의 말리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추천했다. 칼리니코프는 동시에 모스크바 이탈리아극장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할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폐결핵이 악화되어 도저히 음악활동을 할수 없었다. 칼리니코프는 온난한 기후의 크리미아로 내려와서 얄타에서 여생을 보냈다. 여생이라고해야 5년 남짓의 기간이었다. 이 기간동안 그는 건강이 여의치 않는데도 불구하고 두편의 교향곡과 톨스토이 원작의 '짜르 보리스'의 극음악 등을 완성했다. 얄타에서 칼리니코프의 생활은 버는 것이 없어서 빈궁한 것이었다. 그런 칼리니코프를 친구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가 보살펴 주었다. 예를 들면 칼리니코프의 가곡들을 출판하게 하여 저작료를 받을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칼리니코프는 오페라에도 도전하여 나폴레옹 전쟁을 묘사한 '1812년'을 작곡하려 했으나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겨 놓았다.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칼리니코프의 묘지는 얄타의 폴리쿠로브스키 공원묘지에 있다.


바실리 칼리니코프


36세. 헨리 퍼셀(Henry Purcell: 1659-1695). 영국은 대륙에서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체코, 헝가리 등에 비하여 이렇다할 위대한 작곡가들을 배출하지 못했다. 그래서 항상 클래식 음악의 세계에서 찬밥 신세였다. 그런 영국이 그래도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작곡가가 한사람 있으니 바로 헨리 퍼셀이다. 퍼셀은 바로크 시대에 영국의 음악을 이끌어간 사람이다. 퍼셀은 여러 장르의 음악들을 작곡했다. 국가를 위한 찬가, 일반적인 예술가곡, 교회의 찬송가, 그리고 오페라를 작곡했다. 퍼셀의 시대에 영국에서 오페라는 상당히 생소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셀은 영국의 취향에 맞는, 영국적인 오페라를 만들었다. '디도와 이니아스'(Dido and Aeneas)가 그런 부류에 속한다. 퍼셀 이후에 영국의 클래식음악 위상을 다시 한번 높여준 사람은 퍼셀로부터 2백여년 후에 등장한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뿐일 것이다. 퍼셀은 1695년 11월 21일 런던 근교의 웨스트민스터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문제는 퍼셀의 사인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당시에 알려진 사인은 어느날 극장에 갔던 퍼셀이 늦게 집으로 돌아왔는데 부인이 집문을 잠궈 놓아서 들어가지를 못해 추운 날씨에 문밖에서 떨다가 겨우 문을 열어주어서 들어갔다는 것이며 그때 지독한 감기에 걸려서 결국 감기가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퍼셀의 부인이 현관문을 일부러 걸어 잠궜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지금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만일 의도적으로 문을 걸어 잠궜다면 나쁘게 말해서 살인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론은 퍼셀이 폐결핵에 걸려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퍼셀과 같이 위대한 작곡가가 아주 젊은 시절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큰 손실이 아닐수 없는 일이었다.


헨리 퍼셀. 감기를 조심했어야 했다.


○ 36세. 헤르만 괴츠(Hermann Goetz: 1840-1876). 독일(당시에는 동프러시아)의 쾨니히스버그에서 태어났다. 세일즈맨의 아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지만 음악을 공부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대신 수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음악가로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여 베를린의 슈테른음악원에 입학했다. 유명한 지휘자이며 작곡가인 한스 폰 뷜로브에게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다. 1862년에 슈테른음악원을 졸업하고 이어 스위스의 빈터투르(Winterthur)에서 오르가니스트의 자리를 얻어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후에는 평론가, 피아니스트, 지휘자로서의 생활을 했고 1868년에는 결혼하여 취리히 교외의 호팅겐(Hottingen)으로 이사가서 지냈다. 작곡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873년부터였다. 생애의 마지막 3년을 작곡을 위해 예비했던 것이다. 교향곡 1편을 남겼으며 오페라는 2편을, 나머지는 주로 피아노 작품이었다. 조지 버나드 쇼는 괴츠 음악에 대한 대찬미자였다. 특히 교향곡 F 장조를 높이 찬양하여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의 교향곡보다 뛰어나다는 찬사를 보냈다. 오페라는 셰익스피어 원작의 '말괄량이 길들이기'(Taming a Shrew)를 바탕으로 같은 제목의 독일어 오페라를 만들었고 또 하나는 단테의 '신곡'에서 연옥편에 나오는 리미니의 프란체스카 이야기를 오페라로 만든 것이다. 괴츠는 호팅겐에서 1876년 12월 3일 폐결핵을 이기지 못하여 세상을 떠났다. 향년 36세(독일에서는 35세)였다.  


헤르만 괴츠


37세. 조르즈 비제(Georges Bizet: 1838-1875). 비제는 1838년 10월 25일에 파리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후의 풀 네임은 알렉산더 세자스 레오폴드 비제였다. 그러나 세례를 받고나서 조르즈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비제는 파리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했다. 실제로 비제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다만, 피아니스트라는 것을 자랑삼아 내세우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피아니스트로서 대중 앞에서 연주한 것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비에는 파리음악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어 프리 드 롬(Prix de Rome) 상을 받았다. 파리음악원에서는 작곡가 프로멘탈 알레비의 제자로서 작곡을 배웠다.  비제는 프리 드 롬으로 3년 동안 로마에서 음악공부를 하며 지낼수 있었다. 프리 드 롬을 받은 것은 비제가 19세 때인 1857년이었다. 로마에서 파리로 돌아온 비제는 작곡도 하고 출판사 일도 도와주면서 지냈다. 프로멘탈 알레비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큰 딸 에스더는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둘째 딸 즈느비에브는 예쁘기도 하지만 문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은 재원이었다. 비제와 즈느비에브는 어느덧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는 중에 알레비가 급작히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즈느비에브의 어머니는 딸과 결혼코자 하는 비제를 싫어했다. '무일푼인데다가 좌파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누신론자인데다가 보헤미안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보헤미안이라는 것은 비제가 보헤미아 출신이라는 것이 아니라 보헤미안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비제와 즈느비에브는 우여곡절 끝에 1867년에 약혼하고 1869년에 결혼했다.


1870-71년에는 보불전쟁이 일어났다. 비제는 프랑스 국방군으로 참전했다. 전쟁이 끝나서 제대한 비제는 작곡에 전념하였고 1874년에는 '카르멘'을 완성했다. 비제는 카르멘의 공연을 주저했다. 왜냐하면 '카르멘'이 배신과 살인과 같은 비도덕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어서 관중들로부터 거부반응을 얻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결국 '카르멘'은 이듬해인 1875년 3월 3일 초연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카르멘'의 초연은 여러 이유로 실패였다. 비제는 '카르멘'의 초연이 실패로 돌아갈 것을 확식했지만 어쨋든 실제로 실패로 돌아가자 상심이 컸다. 사실 일설에 의하면 비제는 3월 3일의 공연이 초연이지만 정부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아야 하는 일이 있어서 초연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비제는 오래전부터 인후염으로 고생을 많이 해왔다. 비제가 헤비 스모커인 것도 큰 이유였다. 여기에 비제는 과로를 했다. 출판사 등에서 하루 16시간의 고된 근무를 했다. 그러니 건강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비제는 '카르멘'이 초연되기 며칠 전부터 기관지염을 호소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비제는 사람들에게 '나는 개처럼 고통을 받고 있어'라고 말한 것을 보면 호흡이 힘들었던 것을 알수 있다. 비제는 기관지염 뿐만 아니라 후두염으로 심한 통증을 느꼈다. 발작으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호흡이 곤란하다보니 심장 기능에 이상이 생길수 밖에 없었다. '카르멘'의 실패를 경험한 비제는 한차례 심장마비 증세를 보였으나 무사히 넘어갔다.


비제는 5월에 고향처럼 생각하는 부기발(Bougival)로 휴양을 갔다. 차도가 보였다. 비제는 회복된 것으로 생각해서 세이느강에서 수영까지 했다. 그러나 다음날인 6월 1일에는 고열과 함께 심한 통증을 호소하였다. 그러다가 6월 2일에는 잠시 회복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다가 6월 3일, 바로 이날은 비제와 즈느비에브의 결혼기념일이었는데, 두번째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결국은 숨을 거두었다. 의사가 진단한 사인은 '급성관절류마티즘에 의한 심장합병증'이었다. 그러나 비제의 사인은 상당기간 동안 논란의 대상이었다. 혹자들은 비제가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비제가 세상을 떠난 날 저녁에는 파리에서 '카르멘'이 공연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비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카르멘을 맡은 메조소프라노 갈리 마리(Galli Marie)는 너무나 충격을 받아서 출연할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그날 저녁 '카르멘' 공연은 취소되었고 대신 부엘듀의 '하얀 옷의 여인'(La dame blanche)이 무대에 올려졌다. 6월 5일 파리에서의 비제의 장례식에는 4천명 이상이나 되는 조객들이 운집하였다. 비제는 몽마르트의 상트 트리니테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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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즈 비제. 자살했다는 소문도 돌았었다. 오른쪽은 비제의 부인인 즈느비에브(알레비)


38세.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1809-1847). 멘델스존은 어릴 때에 천재, 또는 하늘이 내린 경이로움 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만큼 뛰어난 음악적 재능의 소유자였다. 괴테는 멘델스존을 만나본 후에 사람들에게 '아직 이만한 천재는 보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모차르트가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자 괴테는 '모차르트는 신동일 뿐이야'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멘델스존의 음악적 재능이 너무나 비상하므로 '모차르트가 다시 태어났다'라고까지 말했다. 멘델스존은 낭만주의 시대를 여는 대단히 세련되고 아름다운 음악들을 만들어서 세상을 더욱 밝고 의미있게 만든 사람이다. 멘델스존은 수많은 작품활동 이외에도 음악을 위한 여러 기여를 하였다. 라이프치히음악원을 창설했고 바흐 음악을 널리 소개하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지휘자로서 오케스트라에 있어서 지휘자의 역할의 중요성을 크게 높였다. 작품에 있어서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세계 3대 바이올린 협주곡의 하나로 꼽힐 만큼 뛰어나며 또한 셰익스피어 원작의 '한여름 밤의 꿈'에 대한 극음악을 작곡하였는데 그 중에 나오는 결혼행진곡은 세계 모든 곳에서 결혼식을 마친 신랑신부가 새로운 걸음을 내디딜 때에 연주되는 음악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멘델스존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서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을 정도로 유복한 생활을 하였고 가정적으로도 다복하였다. 특히 역시 작곡가인 누이 패니(Fanny Mendelssohn: 1805-1847)와 우애가 깊어서 작곡활동을 하는데 서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런 멘델스존인데 스트레스와 피곤함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멘델스존은 성공한 작곡가이며 존경받는 음악인이었지만 성격적으로는 감정에 치우치는 경향이 많았고 일상적으로는 지나칠 정도로 근면한 사람이었다. 멘델스존은 영국 방문이 무척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독일로 돌아온 후부터 기운이 없고 병에 자주 걸렸다. 너무 일을 많이 해서 그런것 같았다. 그런데 영국을 갔다 오고나서 얼마후에 사랑하는 누이 패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1847년 5월 14일이었다. 누이 패니의 죽음은 멘델스존에게 커다란 충격과 깊은 절망을 준 것이었다. 그로부터 6개월여 동안 멘델스존은 거의 병상에서 지내는 생활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4일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뇌졸증이었다. 멘델스존의 이름은 독일에서는 펠릭스 멘델스존 바로톨디라고 부르지만 영어로는 그냥 펠릭스 멘델스존이라고 부른다. 멘델스존의 부인인 세실은 멘델스존보다 6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은 다섯 자녀를 두었다.


  

펠릭스 멘델스존, 누이인 패니 멘델스존, 부인인 세실 멘델스존


38세. 조지 거슈인(George Gershwin: 1898-1937).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1898년 9월 26일 러시아에서 이민온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조지 거슈인은 그야말로 신세계 미국이 가장 내세울수 있는 20세기 작곡가이다. 그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여서 피아노협주곡 등 여러 작품을 남겼지만 아무래도 대표작은 오페라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이다. 흑인도 아니면서 흑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오페라를 만들었으니 대단하지 않을수 없다. 그런데 '포기와 베스'는 초연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아마 흑인들만 출연하는 오페라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전통 클래시컬한 음악은 나오지 않고 아프리커-아메리카 흑인들의 재즈와 영가와 소울 스타일의 음악만이 나오므로 백인들로부터 거부반응을 받아서였는지 모른다. '포기와 베스'의 실패로 낙담한 거슈인은 헐리우드로 가서 영화음악에 전념한다. 첫번째 작품이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서스가 주연한 전설적인 영화인 '샬 위 댄스'(Shall We Dance)의 음악이었다. 그러던중 그가 38세가 되던 해인 1937년부터는 어찌된 셈인지 편두통이 심하다고 호소하기 시작했으며 자꾸 고무타는 냄새가 난다면서 참지를 못하기 시작했다. 그해 2월 11일에는 마에스트로 피에르 몽토(Pierre Monteux)가 지휘하는 샌프란시스코교향악단과 그가 새로 작곡한 피아노협주곡 F 장조를 연주하였다. 그런데 연주회를 주선한 사람들이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았으며 더구나 연주 도중에 정전이 일어나는 사태가 발생했다. 거슈인은 극도로 히스테리가 되어서 도저히 참지를 못할 지경이었으나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모인 연주회였기 때문에 억지로 참으면서 연주회를 마쳤다. 하지만 억지로 참으면 병이 된다는 말과 같이 거슈인은 어느새 히스테리 병세가 짙게 되었다.


헐리우드에서 일할 때에 조지 거슈인은 형 아이라 거슈인(Ira Gershwin)이 비벌리 힐스에 빌린 집에서 형의 식구들과 함께 지냈다. 아이라의 부인인 레오노레는 시동생인 조지 거슈인의 스윙 스타일의 음악도 싫었지만 특히 식사 맨너를 싫어했다. 거슈인은 음식을 먹는 중에 음식이 맛이 없다든지 하면 먹던 음식을 계속 식탁 위에 뱉어 놓는 습관이 있었다. 레오노레는 그것도 하나의 정신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저히 거슈인과 함께 살수 없다면서 다른 집을 구해서 나가 살도록 했다. 혼자 지내게 된 거슈인은 두통이 전보다 더 심해져서 고통을 호소하였고 가끔씩은 환각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특히 냄새 맡는 것때문에 말할수 없이 신경을 썼고 어떤 때는 후각환상으로 쓰러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가 1937년 6월 어느날 차를 타고 가는데 거슈인이 정신착란을 일으켜서 그런지 같이 타고가던 비서를 차에서 갑자기 밀어내는 사소한 사건이 일어났다. 거슈인은 주위 사람들이 아무래도 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로스안젤레스의 '레바논의 백향목 병원'(Cedars of Lebanon Hospital)에 입원하였다. 검진결과 신체적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소견이어서 6월 26일 퇴원하였다. 다만, 히스테리 증상이 있지만 입원까지 해서 장기 치료를 받을 정도는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집에 온 거슈인은 신경과민이 악화되어 7월 9일 밤에는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곧바로 '레바논 백향목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깨어나지를 못했다. 의사들은 그제서야 거슈인이 뇌종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상태가 위급해서 뇌신경수술을 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거슈인은 병원에 온지 이틀 후인 7월 11일, 3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거슈인은 뉴욕의 헤이스팅스 언 허드슨(Hastings on Hudson)에 있는 웨스트체스터 힐스(Westchester Hills)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두어달 후인 9월 8일에는 헐리우드 보울에서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의 지휘로 추모 음악회가 열렸다. 거슈인의 음악이 연주되었다. 거슈인은 결혼하지 않았다. 다만, 케이 스위프트()라는 여류작곡가와 10년이란 세월 동안 관계를 맺으며 지냈다. 그런데 케이 스위프트는 유부녀였다. 케이 스위프트는 아무래도 거슈인과 함께 살기 위해 남편과 이혼하였다. 그런데 거슈인의 어머니가 두 사람의 결혼을 적극 반대했다. 케이 스위프트가 유태인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케이 스위프트는 거슈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거슈인을 위한 일을 하며 지냈다. 예를 들면 거슈인의 음악을 편곡했고 음반 취입을 주선했으며 거슈인의 형인 아이라와 함께 거슈인을 위한 여러 프로젝트를 함께 했다.


 

조지 거슈인. 뇌종양으로 서거했다. 옆은 거슈인과 10년이 넘게 동반해 온 작곡가 케이 스위프트


39세. 프레데릭 쇼팽(Frederick Chopin: 1810-1849). 쇼팽은 폴란드 사람이지만 법적으로는 프랑스 시민으로 태어났다. 쇼팽이 태어난 바르샤바는 당시에 나폴레옹 치하의 별도의 프랑스령 공국이었다. 게다가 쇼팽의 아버지 니콜라 쇼팽은 프랑스의 로레인 지방에서 태어나서 16세에 바르샤바로 일꺼리를 찾아 왔고 얼마후 폴란드 여인과 결혼하여 쇼팽이 태어났다. 쇼팽은 바르샤바 서쪽 약 45km 떨어진 첼라조바 볼라(Zelazowa Wola)라는 마을에서 1810년 2월 22일 태어났다. 그런데 그의 가족들은 바뻐서 그랬던지 쇼팽의 생일을 3월 1일에 지켜왔다. 그로부터 쇼팽은 지금까지도 3월 1일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었다. 쇼팽의 원래 폴란드식 이름은 프리데리크 프란치체크()였다. 그것을 프랑스식으로 프레데릭 쇼팽으로 부르게 되었다. 쇼팽이 20세 되던 해에 바르샤바를 떠나서 프랑스에 정착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며 스페인의 마요르카로 가서 휴양하다가 다시 파리로 와서 지내던 중 세상을 떠났다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므로 그간의 경과는 생략코자 한다. 다만, 쇼팽의 마지막 며칠은 알아두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서 간략히 소개한다. 쇼팽은 1849년 10월 17일에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전에 그해 봄부터 쇼팽의 건강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때 쯤해서 조르즈 상드도 옆에 없었다. 쇼팽은 누군가 가족이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6월에 누이 루드비카가 바르샤바에서 파리로 왔다. 쇼팽은 당분간 회복된듯이 보였다. 그러나 10월에 들어서 상태가 갑자기 악화되었다. 10월 15일에는 위독한 상태였다. 쇼팽은 병상을 지키고 있는 친구들에게 음악을 연주해 달라고 부탁했다. 어떤 친구는 노래를 불렀고 또 다른 친구는 첼로를 연주했다. 쇼팽은 그가 죽은 후에 사람들에게 모습을 보이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쇼팽은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데 매장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쇼팽은 죽은 후에 심장을 바르샤바의 성십자교회로 가져가서 안치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친구인 알칸(Alkan)에게는 미완성으로 남겨 둔 피아노 교본인 Projet de methode를 완성해 달라고 부탁했다. 10월 17일 자정이 좀 지나서는 통증이 무척 심했다. 쇼팽은 '제발 그만'이라고 소리쳤다. 쇼팽은 새벽 두시가 되기 몇분 전에 숨을 거두었다. 쇼팽의 누이인 두르비카, 마르첼리나 차르토리스카 공주, 조르즈 상드의 딸인 솔랑(Solange), 쇼팽의 막역한 친구인 토마스 알브레헤트(Thomas Albrecht)가 임종을 지켜보았다.  


쇼팽의 사인은 당시에 논란의 대상이었다. 사망진단서에는 폐염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폐섬유증, 간경병, 알파 1 항트립신 결핍증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아무래도 폐염이 가장 중요한 사망원인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못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쇼팽의 사인을 정확히 규명하기 위해 유해의 DNA 검사를 요청하였으나 폴란드 정부가 '다른 것은 몰라도 쇼팽의 무덤을 다시 파헤친다는 것은 안된다'면서 그같은 요청을 거부하였다. 쇼팽의 장례식은 파리의 마들레이느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그러나 쇼팽이 세상을 떠난지 거의 2주 후인 10월 30일에나 가까스로 거행될수 있었다. 장례 절차를 어떻게 하느냐, 누구를 장례식에 초청하느냐 등의 문제로 왈가왈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장례식 입장자는 엄격히 제한되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티켓을 발부해서 제한하였다. 조문객들은 비엔나, 런던, 베를린 등지에서도 왔다. 장례식에서는 모차르트의 '진혼곡'이 연주되었다. 쇼팽의 전주곡 4번 E 단조와 6번 B 단조도 연주되었다. 페레 라셰스 공동묘지로 가는 운구행렬은 화가 들라크루아, 첼리스트인 프란숑(Franchomme),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카미유 플레옐(Camille Pleyel) 등이 앞에서 만장을 들고 인도하였다. 묘지에서는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에서 장송곡이 연주되었다. 쇼팽이 프랑스의 여류작가인 조르즈 상드(George Sand)와 오랫동안 관계를 맺고 지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조르즈는 남자 이름이기 때문에 쇼팽이 남자친구와 지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조르즈 상드의 원래 이름은 오로드 뒤드방(Aurore Dudevant)였다. 그러나 아마 필명을 남자이름으로 쓰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해서 조르즈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것 같다. 쇼팽은 부모의 친구의 딸인 마리아 보드친스카(Maria Wodzinska: 1819-1896)라는 폴란드의 귀족 아가씨와 결혼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약혼까지 했었는데 쇼팽의 건강이 악화되는 바람에 취소되었다. 쇼팽은 마리아 보드친스키와 작별하는 날 아침에 '고별 왈츠'(Farewell Waltz)를 작곡했다. 쇼팽의 건강은 생각보다 심각했기 때문에 바르샤바에 있는 사람들은 쇼팽이 1835년에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애석해 했었지만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전해져서 안심들을 했다. 


  

프레데릭 쇼팽, 약혼했던 마리아 보드친스카,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왔던 조르즈 상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