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시컬 뮤직 팟푸리/클래시컬 뮤직 팟푸리

죽음을 앞두고 만든 작품들

정준극 2017. 2. 20. 09:56

죽음을 앞두고 만든 작품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또는 최소한 죽음을 예상한 입장에서도 작곡가로서의 의지로서 작곡에 전념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시점에서 작곡한 작품들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한창 때에 작곡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저 그런 작품이라고 볼수 있지만 의외로 그런 절박한 시점에서 작곡한 작품이 그 작곡가의 대표적인 작품이 되는 놀라운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작곡가들은 노년에 들어서다 보면 작곡에 대한 집념을 접어두는 경우가 통상이다. 또 어떤 작곡가들은 뜻하지 아니한 병마와 싸우느라고 작곡에 여념을 둘 처지가 아닌 경우도 있다. 또 어떤 작곡가들은 일부러 여생을 편안하게 지내기 위해 작곡에서 손을 뗀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면 로시니이다. 로시니는 1829년 '귀욤 텔'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고향 페사로로 돌아가서 지내다가 그래도 먹은 물이 있어서 1855년에 파리로 돌아가서 정착해 지내다가 1868년에 파리에서 세상을 떠난 경우이다. 베르디의 경우도 비슷하다. 베르디는 '아이다'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은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겠다고 말라고 고향 부세토로 돌아가서 소일이나 하며 지냈다. 그러나 세상이 그런 그를 가만히 놓아 두지 않았다. 결국 사연 끝에 베르디는 '오텔로'를 만들었고 그리고 정말 마지막으로 '활슈타프'를 작곡하고 더 이상은 작곡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몇 특별한 작곡가들은 죽음을 목적에 두고서 또는 죽음이 곧 닥쳐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중에서도 작곡에서 손을 떼지 못한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야 찾아보면 많이 있겠지만 문제는 그렇게 해서 작곡한 최후의 작품들이 정말로 위대한 걸작으로서 역사에 길이 남아 있는 경우는 극히 드믈다는데 있다. 이제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작곡한 작품들로서 위대한 걸작으로 남아 있게 되어 있는 것들을 찾아본다.


○ 모차르트의 '레퀴엠'(진혼곡)

모차르트가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에 '진혼곡'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완성해야 한다는 부담때문인지 완성하지 못하고 일부를 미완성인채로 놓아두고 세상을 떠나야 했다. 모차르트의 '진혼곡'은 모차르트의 마지막 작품이며 오늘날 진혼곡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모차르트가 임종의 병상에서 살리에리와 함께 '진혼곡'을 완성한 것처럼 그려져 있다. 과연 실제에 있어서도 모차르트가 임종의 병상에서 '진혼곡'의 작곡을 진행하였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보다도 '진혼곡'을 둘러싼 배경이야기가 더 관심을 끈다. 어느날 마스크를 쓴 미지의 사람이 모차르트를 찾아와서 자기 주인의 심부름을 왔는데 진혼곡을 작곡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살림이 곤궁하던 차에 상당한 사례금으로 진혼곡의 작곡을 부탁해 왔으므로 수락하고 그때부터 작곡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작곡을 진행할수록 이 진혼곡이 이제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자기자신을 위한 진혼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모차르트에게 진혼곡을 의뢰한 사람은 프란츠 폰 발제그(Franz von Walsegg: 1763-1827) 백작으로 밝혀졌다. 니더외스터라이히의 글로그니츠 부근의 슈투파흐에 살고 있던 폰 발제그 백작은 당시 28세로서 그의 부인인 안나는 2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폰 발제그 백작은 부인 안나를 지극히 사랑하여서 여생을 재혼하지 않고 지냈다. 아무튼 모차르트가 완성한 진혼곡은 폰 발제그 백작의 이름으로 초연되었다. 그로부터 몇년후 모차르트의 미망인인 콘스탄체가 폰 발제그 백작에게 '진혼곡'을 작곡한 사람은 엄연히 모차르트이므로 주인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설득해서 허락을 받았다. 폰 발제그 백작은 모차르트의 마지막 작품인 '진혼곡'을 '모차르트의 백조의 노래'라고 불렀다. 모차르트의 '진혼곡'은 여러 파트가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으나 모차르트의 제자 겸 친구인 프란츠 사버 쥐쓰마이르가 완성했다고 한다. 어느 파트의 어느 소절까지 쥐쓰마이르가 완성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모차르트의 임종. 두 여인은 아내 콘스탄체와 처제 조피.


○ 벨라 바르토크의 '피아노 협주곡 3번'

벨라 바르토크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피아노 협주곡 3번'은 바르토크가 죽음을 앞둔 시기에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작곡한 것이다. 바르토크는 헝가리 출신의 미국 작곡가로서 특히 헝가리,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민속음악의 발굴을 위해 평생을 노력한 사람이다. 바르토크는 1881년 3월 25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헝가리 왕국에 속한 바나티안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은 1920년 1차 대전의 여파로 루마니아에 속한 지역이 된 곳이다. 바르토크는 파치스트를 증오하고 헝가리가 나치의 편에 서서 손을 들어 준 것을 비판했다. 바르토크는 결국 나치 치하의 헝가리에서는 음악활동을 할수 없다고 판단해서 1940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뉴욕에 정착했지만 그가 미국 시민권을 받아 들인 것은 세상을 떠나기 두어달 전인 1945년 여름이었다. 바르토크는 미국에 있으면서 보스턴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작곡가이기도 한 러시아 출신의 세르게 쿠세비츠키(Serge Koussevitzky: 1874-1951)로부터 작곡의뢰를 받았다. 그렇게 해서 바르토크의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Concerto for Orchestra)이 탄생했다. 이 작품은 바르토크의 가장 뛰어난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작품이 바르토크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피아노 협주곡 3번'이 마지막 작품이다. 바르토크가 1945년 여름에 백혈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작곡한 것이다. 바르토크는 그해 9월 26일에 세상을 떠났다. 바르토크는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완전히 완성하고 세상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17개 음표는 완성하지 못했다. 바르토크는 이 작품을 부인인 디타에게 헌정할 생각이었다. 디타의 42회 생일이 한달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르토크는 디타의 생일을 축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그리고 바르토크는 세상을 떠나가 약 한달 전에 마침내 미국시민권을 얻었다.  


벨라 바르토크와 부인 디타 파츠토리. 미국에서. 바르토크는 28세 때인 1909년 당시 16세였던 마르타 치글러(Marta Ziegler: 1893-1967)와 결혼하였고 이듬해에 아들 벨라 3세가 태어났다. 두 사람은 결혼생활 15년만인 1923년에 이혼하였다. 바르토크는 이혼한지 두 달 후에 피아노 제자인 디타 파츠토리(Ditta Pasztory: 1903-1982)와 재혼하였다. 청혼한지 열흘만의 일이었다. 당시 디타는 19세였고 바르토크는 42세였다. 결혼한 이듬해에 아들 페터가 태어났다.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네개의 마지막 노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 6. 11 - 1949. 9. 6)는 80대 중반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작곡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가 생애의 마지막으로 작곡한 작품은 '네개의 마지막 노래'(Vier letzte Lieder)이다. 사실 이 노래들은 슈트라우스가 생애의 마지막 작품으로 생각하고 작곡한 것은 아니다. 어쩌다가 보니 마지막 작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네 노래 중에서 세 노래는 죽음을 다룬 것이기 때문에 우연의 일치치고는 이상하리만치 마치 생애의 마지막 작품으로 예상하고 작곡한 것같은 느낌을 주었다.  슈트라우스는 네 노래를 일관되게 작곡하지는 않았다. 따로따로 시간을 두어서 작곡했다. 첫 세 노래는 독일계 스위스의 시인인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의 시에 의한 노래이다. '봄'(Fruhling), '9월'(September), '잠자리에 들때'(Beim Schlafengehen)이다. 마지막 노래인 '저녁노을'(Im Abendrot)은 독일의 서정시인인 요셉 폰 아이헨도르프(Joseph von Eichedorff: 1788-1857)가 가사를 쓴 것이다. 슈트라우스는 '네개의 마지막 노래'를 세상 떠나기 1년 전에 완성했다. 하지만 노래의 제목을 붙이고 악보를 출판하고 빌헬름 푸르트뱅글러가 지휘하는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노르웨이의 소프라노인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Kirsten Flagstad)와 함께 초연을 한 것은 모두 슈트라우스 사후인 1950년에 진행된 일이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네개의 마지막 노래'를 완성한 후에 솔로 음성과 피아노를 위한 노래인 '말벤'(Malven: Aus Rosen)을 작곡코자 했으나 미완성으로 남겼다. TrV 297로 분류되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949년 봄에 혼성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제정신'(Besinnung)이라는 곡을 작곡코자 했으나 역시 미완성으로 남겼다. TrV 298이다. 그러므로 슈트라우스의 마지막 작품은 역시 '네개의 마지막 노래'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가 지휘하고 소프라노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가 노래한 슈트라우스의 '네개의 마지막 노래' 세계 초연 실황취입 음반


○ 페르골레지의 '성모애상'(스타바트 마테르)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 1. 4 - 1736. 3. 16)가 나폴리의 가톨릭교회 평신도 자선단체인 Confraternita dei Cavalieri di San Luigi di Palazzo의 요청으로 '성모애상'(Stabat Mater)을 작곡할 때에 그는 프란치스코수도회가 운영하는 나폴리 교외의 수도원에서 병마와 최후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페르골레지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당시로서는 불치병인 폐결핵에 걸려 사실상 죽음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페르골레지는 '성모애상'을 1736년 3월 초에 완성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한두주 전이다. 페르골레지의 사후, '성모애상'이 초연되었다.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장 자크 루소는 '성모애상'의 오프닝 듀엣 곡인 '슬픔의 성모가 십자가 아래 서 계시다'(Stabat Mater Dolorosa)를 듣고서는 '세상의 어느 작곡가도 이처럼 완벽하고 감동적인 노래를 작곡할수는 없을 것이다'라며 극찬을 했다. 페르골레지의 '성모애상'은 여러 작곡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조반니 파이시엘로(Giovanni Paisiello)는 '성모애상'의 풀 오케스트라 반주를 완성했다. 요제프 아이블러(Joseph Eibler)는 듀엣 곡 중에서 몇 곡을 합창곡으로 편곡해서 펴냈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는 페르골레지의 '성모애상'을 모방하여서 Tilge, Höchster, meine Sünder라는 칸타타를 작곡했다. 그러나 약간의 비판도 있었다. 이탈리아 종교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파드레 마르티니(Padre Martini)는 페르골레지의 '성모애상'이 엄숙하지 못하고 오히려 오페라 스타일이라면서 비판했다. 그러면서 페르골레지의 오페라 부파인 '하녀마님'(La serva padrone)과 비슷한 요소가 많다고 언급했다.


페르골레지의 '스타바트 마테르'


○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 1. 31-1828. 11. 19)의 연가곡인 '겨울나그네'(Winterreise: D911)는 그의 두번째 연가곡으로 슈베르트의 가장 위대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 슈베르트가 '겨울나그네'를 빌헬름 뮐러의 시를 바탕으로 음악을 완성했을 때 그는 중병 중에 있었다. 매독에 의한 합병증이었다. 슈베르트는 병세가 악화되자 복잡한 비엔나 시내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려고 형 페르디난트가 살고 있는 비엔나 교외의 뷔덴의 집으로 옮겼다. 슈베르트는 병상에 있으면서 '겨울나그네'의 악보를 수정하는 일을 시작했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는 24개 노래로 구성되어 있다. 슈베르트는 전반부의 12곡은 1827년에 완성했다. 1827년이라고 하면 슈베르트가 가장 존경하던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해이며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서정시인인 독일의 빌헬름 뮐러가 세상을 떠난 해이다. 그러한 충격으로 슈베르트는 '겨울나그네'의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해가 바뀌자 병고에 지친 몸을 이끌고 나머지 노래들을 완성하기 위해 헌신하였다. '겨울나그네'의 노래들은 어떤 시인이(아마도 슈베르트 자신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됨) 겨울철 차가운 밤에 자기 생애의 마지막 머나먼 여행길에 나서는 모습을 그린 것들이다. 특별히 마지막 곡인 '손풍금을 돌리는 사람'(Der Leiermann)은 시인이 죽음을 예견하는 내용이어서 가슴을 적셔주고 있다. 이 곡을 비롯한 후반부의 몇 곡은 슈베르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겨울나그네'


연가곡 '백조의 노래'(Schwanengesang: D957)는 슈베르트의 마지막 작품이다. 슈베르트는 1828년 가을에 세명의 시인, 즉 루드비히 렐슈타브(Ludwig Rellstab: 1799-1860),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 요한 가브리엘 자이들(Johann Gabriel Seidl: 1804-1857)의 13개 시를 가사로 삼아 리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슈베르트는 그해 11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다. 전에 슈베르트의 연가곡집인 '아름다운 물방앗간 집 아가씨'와 '겨울 나그네'를 출판하여 인기를 끌었던 비엔나의 출판가인 토비아스 하슬링거(Tobias Haslinger)는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지 몇달 후인 1829년 봄에 13곡의 리트와 여기에 요한 가브리엘 자이들의 시에 의한 '비둘기 통신'(Die Taubenpost)를 붙여서 14곡을 '백조의 노래'라는 제목 아래에 출판하였다. 그러므로 '백조의 노래'라는 타이틀은 출판가인 토비아스 하슬링거가 슈베르트의 사후에 붙인 것이다. 3명의 시인에 의한 13곡의 리트는 D 957로 분류되었지만 마지막에 붙인 '비둘기 통신'은 원래 슈베르트가 의도한 것이 아니고 나줃에 하슬링거가 자이들의 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연가곡에 덧붙인 것이기 때문에 D 965a 로서 분류하기도 한다. 한편, 슈베르트는 요한 젠(Johann Senn)의 시에 의한 '백조의 노래'(Schwanengesang)이라는 별도의 리트를 작곡한 것이 있다. D. 744로 분류된 리트이다. 이 곡은 연가곡 '백조의 노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아무튼 '비둘기 통신'은 슈베르트 최후의 가곡으로 알려져 있다.


백조의 노래를 표현한 삽화



ü ä 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