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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위대한 작곡가들 - 추가

정준극 2017. 2. 19. 18:14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위대한 작곡가들 - 추가


○ 벨기에 출신의 귀욤 르쾨(Guillaume Lekeu: 1870-1894)는 브뤼셀에서 칸타타 '안드로메다'로 벨기에 로마 대상 제2위를 차지한 재능있는 작곡가였다. 파리에서는 같은 벨기에 출신인 거장 세자르 프랑크와 뱅생 댕디에게서 음악을 공부하여 장래가 촉망되었다. 하지만 24세의 나이에 장티푸스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작품은 '바이올린 소나타'가 유명하다. 르쾨는 어느날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보고 집으로 와서는 신발을 벗어서 난로에 집어 던졌다. 그런 세속적인 신발 따위로 트리스탄에 대한 감동을 간섭받고 싶지 않아서였다는 얘기다. 이 에피소드는 그가 얼마나 순수했고 열정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항상 안주머니에 베토벤의 마지막 현악4중주곡 악보를 넣고 다녔다. 그보다 더 높을 수는 없다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르쾨가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보인 것은 겨우 14세 때였다. 그리고 10년 정도를 살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는 자기의 음악에 대해서 '이상할 것이고 결함이 있을 것이며 아마도 공포심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오리지널이다'라고 말했다.   


귀욤 르쾨


○ 네덜란드 출신의 유태계 작곡가인 디크 카텐부르크(Dick Kattenburg: 1919-1944)는 너무나 뛰어난 재능의 작곡가였지만 불행하게도 25세의 나이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카텐부르크가 전쟁 중에 어떻게 지냈는가에 대한 것은 마치 안네 프랑크와 같다. 나치를 피해서 숙모의 집에서 몇년이나 숨어서 지냈다. 그러다가 주변 사람이 배신해서 신고하는 바람에 체포되어 아우슈비츠로 끌려갔고 1944년 어느 때에 그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의 유작으로서는 '플루트를 위한 소나타'가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조카가 카텐부르크가 숨어서 지내던 방을 청소하다가 박스에서 열 몇편이나 되는 그의 작품들을 발견했다. 모두 뛰어난 수준의 작품들이었다. 케텐부르크가 20대 초반에 작곡한 작품들은 위트가 있고 사랑스러운 멜로디가 넘쳐 있는 것으며 리듬은 마치 춤곡 같아서 명랑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전쟁 중에는 드비시, 스트라빈스키, 유태의 민속 멜로디 등에 영향을 받은 순수한 음악들을 작곡했다. 그는 혹시라도 유태인이기 때문에 자기의 작품이 핍박을 받을 것 같아서 제목에 '유태'(Jewish)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에 '팔레스타인' 또는 '루마니아'라는 단어를 썼다.


디크 카텐부르크


○ 독일 본에서 태어나서 독일에서 활동했던 칼로베르트 크라이텐(Karlrobert Kreiten: 1916-1943)은 아버지가 네덜랜드 사람이어서 평생동안 네덜란드 시민권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다. 크라이텐은 대단히 촉망받는 피아니스트였다. 푸르트 뱅글러는 크라이텐을 가장 재능있는 피아니스트라면서 찬사를 보냈다. 그런 그가 어느날 히틀러와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을 비판하는 얘기를 했는데 그 얘기를 들은 이웃집 사람이 게슈타포에 신고하는 바람에 체포되어 플뢰첸제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43년 9월 1일이었고 크라이텐은 27세였다. 가족들과 친구들이 그를 석방시키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오늘날 베를린에는 게슈타포와 SS가 저지른 만행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전시회와 기념물이 설치되어 있느데 그 중에는 칼로베르트 크라이텐을 기리는 기념물도 있다. 꼬한 본, 뒤셀도르프, 힐덴, 쾰른에는 칼로베르트 크라이텐을 기념하는 거리가 있다.


칼로베르트 크라이텐


○ 베니아민 플레이스만(Veniamin Fleishman: 1913-1941)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제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이었다. 전쟁이 터졌을 때 그는 '로트쉴트의 바이올린'(Rothschild's Violin)이라는 오페라를 작곡 중에 있었다. 19세기 러시아의 유태인 집단촌인 스테틀(Stetl)의 이야기를 담은 체호프의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삼은 오페라였다. 그러다가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독일군의 공격을 받자 레닌그라드를 수호하기 위해 민병대에 입대하였다. 나중에 쇼스타코비치는 민병대라는 것이 '총알받이'라면서 신랄하게 비난한바 있다. 플레이스만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총에 맞아 죽었다. 그때 플레이스만은 28세였다. 쇼스타코비치는 레닌그라드에서 피난 나올 때에 제자들의 미완성 악보들을 챙겨서 나왔다. 플레이스만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몇 년 후에 플레이스만의 미완성 작품을 완성했다.


베니아민 플레이스만

 

○ 조지 버터워스(George Butterworth: 1885-1916)는 1차 대전 중인 1916년 7월에 시작하여 몇달이나 계속된 저 유명한 솜(Somme) 전투에 참가했다가 적군 저격수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 영국의 작곡가이다. 버터워스는 소대장이었다. 그때 버터워스는 31세였다. 솜 전투는 전투 첫날 58,000여명에 달하는 영국군 사상자로 인해 잘 알려진 전투이다. 버터워스는 1900년대 초반에 영국에서 가장 촉망받았던 작곡가였다. 그의 작품인 '녹색 버드나무 강둑'(The Banks of Green Willow)은 영국에서 널리 알려진 곡이다. 이 곡이 더구나 유명해진 것은 TV 컴머샬 음악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짧은 곡이지만 영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사랑스런 곡이다.


조지 버터워스


○ 후고 디스틀러(Hugo Distler: 1908-1942)의 기악곡은 나치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성악곡, 특히 합창곡은 독일의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실제로 디스틀러는 20세기 교회음악의 크게 발전시킨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그는 항상 스트레스에 쌓여 지냈다. 친구들이 전쟁에 나가서 계속 전사한 것도 큰 압박이었다. 또한 그 자신도 강제로 징집되어 전선으로 나갈수 있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있었다. 결국 그는 해결책으로 자살을 선택하였다. 집에서 가스를 틀어 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4세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교회음악인 '깨어 일어나라'(Wachet auf)가 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자주 연주되는 작품이다.


후고 디스틀러


○ 40대에 작고한 위대한 작곡가로서는 러시아의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42세)와 독일의 로베르트 슈만(46세)을 들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재능있는 작곡가인 빅토르 울만도 46세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의 홍난파(홍영후)는 44세에 세상을 떠났다. 난파 홍영후는 1897년에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태어나서 1941년 일제치하에서 늑막염과 결핵으로 경성요양원(현 삼육서울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 1839-1881)는 러시아 국민주의적 주제, 러시아 민속, 러시아 역사에 바탕을 둔 음악을 만든 사람이다. 무소르그스키는 이른바 러시아 국민음악파 5인조의 한 사람이다. 이 5인조가 19세기 말 러시아 음악을 주도한 셈이다. 무소르그스키의 대표작은 아마도 피아노 모음곡인 '전람회의 그림'(Pictures at an Exhibition)일 것이다. 라벨이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만든 것도 있다. '민둥산의 하룻 밤'(A Night on Bald Mountain)은 디즈니의 환타지아의 피날레에 사용되어서 인상에 남아 있는 작품이다. 거대한 박쥐가 죽지 않은 혼령들이 있는 산을 지배한다는 내용이다. 무소르그스키는 생전에 작곡가로서 그다지 명성을 떨치지 못했다. 무소르그스키는 다른 직업으로 생계를 이어 나갔다. 그러나 직장생활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무소르그스키는 30대 후반에 절망감에 빠진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간혹 정신이상의 증세를 보였다. 그러는 중에 심각한 알콜 중독이 되었다. 그리하여 재산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빈곤한 처지에서 향년 42세로 1881년 3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 알콜에 중독되었다.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은 19세기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작곡가 중 한사람이었으며 또한 음악평론으로서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다. 슈만은 음악전문지인 '노이에 차이트슈리프트'(Neue Zeitschrift fur Musik)을 발간하여서 음악평론의 바탕을 다져 놓았다. 당시 음악계에서 슈만의 영향력은 상당하여서 그가 하는 말은 높은 인정을 받았다. 예를 들면 슈만은 '브람스는 베토벤을 이을 작곡가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같은 슈만의 후원은 브람스가 작곡가로서 성공하는데 큰 도움을 준 것이었다. 슈만이 클라라와 결혼에 성공한 것은 당시 대단한 화제꺼리였다. 왜냐하면 당대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와 당대에 가장 뛰어난 여류 피아니스트와의 결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슈만은 정신질환과 투쟁을 하며 살아야 했다. 슈만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하여서 하늘의 천사와 지옥의 사탄을 모두 보았다고 주장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 환상이 점점 심해지자 슈만은 자기 때문에 사랑하는 클라라와 아이들에게 해를 끼치지나 않을까하는 두려움에 싸이기 시작했다. 어느날 밤, 그날도 슈만은 지옥의 환상을 보았고 그것을 견디다 못해서 밖으로 걸어나와서 라인강에 투신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마침 보트를 타고 가던 어떤 사람이 슈만이 물 속에 빠진 것을 보고 구해 주어서 목숨만은 건지게 되었다. 슈만은 도저히 가족들과 함께 지낼수 없다고 생각하여서 스스로 정신병원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2년 남짓 후에 슈만은 정신병원에서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슈만의 사인에 대하여는 몇가지 논란이 있었다. 가장 중심되는 주장은 매독이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뇌에 이상이 있어서 질환이 생겼다고 보았다. 슈만의 시신에 대한 부검 결과, 뇌에서 커다란 종양이 발견되었다. 의사들은 뇌종양이 직접적인 사인이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슈만의 정신이상을 일으키게는 한 원인이 된 것은 분명하다고 내세웠다.


 

로베르트 슈만과 부인 클라라 슈만. 로베르트 슈만은 뇌종양이 발전하여 정신이상을 일으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빅토르 울만(Viktor Ullmann: 1898-1944)은 유태계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에 끌려가서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한 작곡가이다. 1898년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테셴(테신)에서 태어났으므로 45세의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테셰은 오늘날 일부지역은 폴란드에 일부지역은 체코공화국에 속한 곳이다. 울만의 부모는 모두 유태계였다. 그러나 울만이 태어나기도 전에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래서 울만의 아버지는 가톨릭 교도로서 오스트로-헝가리 제국 군대의장요로 복무할수 있었다. 울만의 아버지는 1차 대전 때에 전공을 세워서 대령으로 승진하였다. 쇤베르크의 제자였던 울만은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프라하에서 지내고 있던 울만은 1942년 9월에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다행하게도 울만은 테레지엔슈타트에서 음악활동을 할수 있었다. 음악회가 있으면 피아노 반주를 했고 Collegium musicum 이라는 앙상블을 만들어서 연주했고 또한 작곡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울만이 수용소에서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로서는 카렐 안체를(Karel Ancnerl), 라파엘 샤흐터(Rafael Schachter), 기데온 클라인(Gideon Klein), 한스 크라사(Hans Krasa) 등이 있었다. 울만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바빌론의 강가에 앉아서 울고 있을수 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울만은 1944년 10월 16일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이송되었고 도착한 후에 가스실로 끌려가서 죽임을 당했다.


빅토르 울만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하는 홍난파(洪蘭坡)는 4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898년 4월 10일 현재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태어났으며 1941년 8월 30일 서울 경성요양원(현 삼육서울병원)에서 뇌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홍난파는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고향 생각' '고향의 봄' 등 주옥과 같은 가곡들을 남겼다.  


한국의 슈베르트인 홍난파. 일제의 고문으로 병이 악회되어 42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