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작의 세계...작곡자 속이기
자기의 작품을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이 작곡한 것처럼 명의도용하여 발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 알려진 경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작품으로 알려진 경우도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그렇지만 클래식 음악의 세계에서도 자기의 작품을 다른 유명한 작곡가가 작곡한 것처럼 의도적으로 발표하는 경우가 있다. 일종의 자기만족이다. 물론 본인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우연히 잘못되어서 자기 작품이 다른 사람의 작품처럼 알려지는 경우도 있다. 어떤 케이스에 속하던지 그런 경우는 일종의 명의도용이된다. 학자들은 이같은 행위를 '음악적 속이기'(Musical hoax) 또는 '음악적 위조'(Musical forgery), 또는 심지어 '음악적 사기'(Musical mystification)라고 부른다. 간단히 말해서 위작(僞作)의 행위이다. 하지만 거의 모든 경우에 악의가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유명해지고 싶은 작은 소망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재미로 그렇게 하며 그렇지 않으면 관심을 끌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보면 된다. 프리츠 크라이슬러의 경우는 특이하다. '음악적 위조'에 있어서 크라이슬러만큼 자기의 여러 작품을 다른 사람이 작곡한 것으로 소개하며 지내다가 몇 십년 후에 비로소 그것들은 자기의 작품이라고 밝힌 경우이다. 왜 그랬을까? 크라이슬러는 자기의 작품들로 음악회를 구성하게 되면 프로그램의 작곡자 란에 자기의 이름만 연속해서 나오게 되므로 청중들이 지루해 할 것 같아서 다른 작곡가들이 작곡한 곡처럼 올려 놓았다고 설명했다. 한편, 어쩌다보니 자기의 작품인데 다른 사람이 작곡한 것처럼 잘못 알려진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쇼팽의 '봄의 왈츠'(Spring Waltz)이다. 오랫동안 쇼팽의 작품으로 알려졌던 곡이다. 실은 프랑스의 멜로디 작곡가인 폴 드 세느비유라는 사람이 작곡한 '사랑의 결혼'(Mariage d'amour)이라는 곡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쇼팽의 작품인줄 알고, 또는 의도적으로 그랬는지 하여튼 인터넷의 유투브에 그 곡을 쇼팽의 '봄의 왈츠'라는 제목으로 올렸고 그후 수많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클릭하면서 쇼팽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근자에 이르러야 쇼팽의 '봄의 왈츠'라는 곡은 실은 폴 드 세느비유의 '사랑의 결혼'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작품을 쇼팽의 작품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람들은 폴 드 세느비유의 '사랑의 결혼'이 쇼팽의 녹턴(야상곡) B 플랫 단조와 비슷하기 때문에 쇼팽의 미발견 작품 중의 하나로 믿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랑의 결혼'을 조금만 자세히 들어보면 왈츠가 아닌 것을 알수 있다. '사랑의 결혼'은 4분의 4박자이므로 왈츠의 박자가 아니다. 이제 위작의 세계로 좀 더 접근해보자.
마르티니의 '사랑의 기쁨'은 파드레 마르티니가 아닌 장 폴 마르티니의 작품
'사랑의 기쁨'(Plaisir d'amour)이라는 아름다운 곡이 있다. 그리스의 나나 무스쿠리가 아름답게 불러서 대단히 유명해진 곡이다. 마르티니의 '사랑의 기쁨'이라고 알려진 곡이다. 사람들은 마르티니라고 하니까 이탈리아 볼로냐 출신의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부로서 뛰어난 작곡가이며 음악이론가인 파드레 마르티니(Padre Martini: Giovanni Battista Martini: 1706-1784)가 생각나서 '사랑의 기쁨'도 마르티니 신부가 작곡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은 18세기 프랑스의 장 폴 이기드 마르티니(Jean-Paul Egide Martini: 1741-1816)가 작곡한 노래이다. 두 사람의 이름이 공교롭게도 마르티니였기 때문에 혼동을 빚었던 것이다. 장 폴 마르티니는 바바리아의 프라이슈타트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이름은 요한 파울 이기디우스 슈봐르첸도르프(Johann Paul Aegidius Schwarzendorf)였지만 젊은 시절에 프랑스로 건너와서 슈봐르첸도르프라는 독일식 이름보다는 마르티니라는 이탈리아식 이름을 선호해서 바꾸었다. 아마 오스트리아 출신의 요한 요제프 푹스(Johann Joseph Fux: 1660-1741)와 함께 당대 최고의 대위법 작곡가로 알려진 조반니 바티스타 마르티니를 크게 존경한 나머지 그의 이름을 따서 붙였는지도 모른다. 장 폴 마르티니의 '사랑의 기쁨'은 그가 1784년에 작곡한 노래이지만 당시에는 물론 한동안도 세계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었다. 그러다가 1961년에 엘비스 프레슬리가 Can't Help Falling in Love(사랑하지 않을수 없어요)라는 제목의 노래에 '사랑의 기쁨'의 멜로디를 사용하자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서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의 나나 무스쿠리도 '사랑의 기쁨'의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사랑의 기쁨'의 가사에 대해서도 에피소드가 있다. 가사는 프랑스의 소설가 장 피에르 클라리스 드 플로리앙(Jean-Pierre Claris de Florian: 175-1794)의 소설 '첼레스탱'(Celestine)에 나오는 구절을 사용했다. 그런데 플로리앙은 자기의 시가 '사랑의 기쁨'이라는 노래의 가사로 사용되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플로리앙은 이 노래가 나온지 몇 십년 후에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처음으로 듣고서 가사가 자기의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고 한다.
장 폴 이지드 마르티니. '사랑의 기쁨'은 조반니 바티스타 마르티니가 아니라 장 폴 이지드 마르티니가 작곡한 것이다.
하이든의 '장난감 교향곡'은 에드문트 앙거러의 작품이라는 주장
아직도 작곡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직도 확실히 모르는 유명 작품도 있다. 예를 들면 '장난감 교향곡'(Kindersinfonie: Toy Symphony)이다. 이 교향곡은 오랫동안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하는 요제프 하이든이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3악장의 '장난감 교향곡'은 1700년대 중반에 작곡된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누가 작곡했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그러다가 1800년대에 들어와서 오스트리아의 한 출판사가 이 교향곡의 악보를 처음으로 출판하면서 악보의 표지에 Haydn이라는 이름을 적어 넣었다. 이때의 제목은 '어린이교향곡'이 아니라 Cassation in G major for toys, 2 oboes, 2 horns, strings and continuo(장난감, 2 오보에, 2 혼, 현악기, 콘티누오를 위한 G 장조 카세이션)이었다. 카세이션은 세레나데 또는 디베르트멘토보다 규모가 작은 오케스트라 작품을 말한다. 아무튼 악보에 Haydn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에 그로부터 사람들은 '장난감 교향곡'을 요제프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이 작곡한 것으로 알고 지냈다. 여기에 덧 붙여서 그럴듯한 에피소드까지 나돌았다. 하이든이 에스터하지 가문에서 봉사할 때인데, 어느해 크리스마스 시즌에 시장에서 장난감을 한 아름 사가지고 와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에스터하지 아이들을 위해서 그 장난감들을 이용한 교향곡을 만들어서 연주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하이든은 생전에 자기의 작품들을 꼼꼼히 목록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목록에는 '장난감 교향곡'에 대한 기록이 아무리 찾아 보아도 없었다. 때문에 요제프 하이든의 작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을 했다. 그래서 학자들은 처음으로 출판된 악보에 Haydn이라고 적힌 것은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으로 역시 뛰어난 작곡가인 미하엘 하이든(Michael Hauydn: 1737-1806)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한동안은 '장난감 교향곡'의 진짜 작곡자는 미하엘 하이든이라고 알려졌다. 그런데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 모차르트(Leopold Mozart: 1719-1787)의 작품을 연구하던 사람들이 레오폴드 모차르트의 Musical Sleigh-Ride(뮤지컬 썰매 타기)라는 작품이 '장난감 교향곡'과 비슷한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레오폴드 모차르트가 1775년 경에 작곡한 '농부들의 결혼'(Die Bauernhochzeit)이라는 작품을 보더라도 총소리와 사람들이 환호하는 소리 따위가 나오는 것이 '장난감 교향곡'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레오폴드 모차르트가 '장난감 교향곡'을 작곡했다고 믿었고 그렇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후 다른 학자들은 레오폴드 모차르트가 '장난감 교향곡'을 작곡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뮤지컬 썰매 타기'조차 작곡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했다. 레오폴드 모차르트가 '장난감 교향곡'을 작곡했다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얘기였다. 그러는 중에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의 장크트 요한(St Johann) 출신으로 훗날 베니딕트 수도회의 수도승이 된 에드문트 앙거러(Edumund Angerer: 1740-1794)가 '장난감 교향곡'(Kindersinfonie)를 작곡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그 주장도 더 연구를 해 보아야 한다는 의견들이었다. 근자에는 '장난감 교향곡'의 진짜 작곡자는 자기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익명의 작품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레오폴드 모차르트와 에드문트 앙거러(오른쪽). 어린이를 위한 '장난감 교향곡'은 요제프 하이든이 아니라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 모차르트가 작곡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근자에는 티롤의 작곡가인 에드문트 앙거러가 작곡한 것이라는 주장이 강력하다.
하이든의 '세레나데'는 로만 호프슈테터의 작품
하이든의 현악4중주곡 F 장조 안단테 칸타빌레는 일명 세레나데로 불리는 아름다운 곡이다. 그런데 이곡은 실상 독일 출신으로 하이든과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로만 호프슈테터(Roman Hoffstetter: 1742-1815)가 작곡한 것이라고 한다. 호프슈테터는 베네딕트파 수도원의 수도승이지만 음악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서 여러 작품들을 작곡했다. 호프슈테터는 하이든을 대단히 존경했다. 그래서 '하이든의 펜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마음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든의 음악을 흉내내려는 마음을 막을수 없다'고 말했다. 호프슈테터가 하이든 스타일로 만든 작품 중에서 현악4중주 F 장조 Op 3의 No 5을 얘기하지 않을수 없다. 2악장이 안단테 칸타빌레이다. 하이든이 작곡했다는 현악4중주 F 장조 안단테 칸타빌레와 똑같은 멜로디이다. 모두들 안단테 칸타빌레를 하이든이 작곡한 것으로 믿고 있었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분명히 호프슈테터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자장가'는 원래 프리드리히 플라이슈만의 작품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작품과 관련해서 쾨헬이 정리한 K 350 이란 것이 있다. '자장가'(Wiegenlied)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자장가이다. 모차르트의 자장가는 오랫동안 아무런 의심없이 모차르트가 작곡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근자에 함부르크 국립도서관에서 자장가 악보가 발견되었는데 1796년에 독일의 베른하르트 플리스(Bernhard Flies: 1770-?)라는 사람이 작곡했다는 자장가였다. 그런데 플리스의 자장가 악보를 보고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모차르트가 작곡했다는 자장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플리스의 자장가가 모차르트가 작곡한 것으로 정리되었던 것일까? 모차르트가 1791년 세상을 떠난 후에 루드비히 폰 쾨헬이 모차르트의 작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자장가 악보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지만 악보를 필사해 놓은 것이었다. 모차르트가 자장가를 작곡했다는 어떠한 기록도 없기에 비록 다른 사람의 악보를 필사해 놓은 것이지만 누구인지 알지 못하여서 그냥 모차르트가 작곡한 것으로 알고 그렇게 정리했던 것이다. 혹자는 플리스가 자장가를 1796년에 작곡했다고 주장하지만 그 자장가가 출판된 것이 1796년이므로 언제 작곡되었는지는 모른다. 플리스는 독일의 극작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고터(Friedrich Wilhelm Gotter: 1746-1797)의 희곡인 '에스터'(Esther)의 극음악의 일환으로 자장가를 작곡했다고 한다. 그런데 플리스의 자장가는 실은 원래 독일의 작곡가인 요한 프리드리히 안톤 플라이슈만(Johann Friedrich Anton Fleischmann: 1766-1798)이 작곡한 것인데 플리스가 조금 손을 대서 다시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모차르트의 자장가를 다음과 같이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다.
Schlafe, mein Prinzchen, es ruh'n
Schlafchen und Vogelchen mm
Garten und Wiese verstamt,
auch nicht ein Bienchen mehr summt,
Luna mit silbernen
잘자라 우리 아가 앞뜰과 뒷동산에
새들도 아가 양도 다들 자는데
달님은 영창으로 은구슬 금구슬을 내리는 이 한밤
잘자라 우리 아가 잘 자거라
모차르트의 자장가의 원래 작곡가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플라이슈만
'트럼펫 벌런터리'는 퍼셀이 아니라 제레미아 클라크의 작품
결혼식과 같은 축하 모임에서 주로 연주되는 '트럼펫 벌런터리'(Trumpet Voluntary)도 오랫동안 영국의 바로크 작곡가인 헨리 퍼셀(Henry Purcell: 1659-1695)의 작품으로 알려져 왔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이르러서 영국의 제레미아 클라크(Jeremiah Clarke: 1674-1707)가 1700년 경에 작곡한 '덴마크 왕자의 행진곡'(Prince Denmark's March)이라는 것으로 확인되어서 그로부터는 제레미아 클라크의 '트럼펫 벌런터리'로 소개되고 있다. 트럼펫 벌런터리라는 것은 오르간에서 트럼펫 소리를 내는 스톱을 사용하여 연주하는 벌런터리 곡을 말한다. 벌런터리라는 단어의 의미는 원래 '자발적'이라는 것이지만 음악에 있어서는 교회에서 회중들이 예배가 시작되기를 기다릴 때에 오르가니스트가 예배의 분위기를 높이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연주하는 음악을 벌런터리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결혼식과 같은 행사에서 예식이 시작되기 전에 축하 분위기를 높이기 위해 연주하는 곡도 벌런터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1981년 런던의 성바오로 대성당에서 챨스 왕자와 다이아나가 결혼식을 올릴 때에도 제레미아 클라크의 '트럼펫 벌런터리'가 연주된 것은 좋은 예이다. 어쨋든 '트럼펫 벌런터리'는 오랫동안 헨리 퍼셀의 작품으로 알려져 왔는데 어느때부터인가 사람들이 '아닌것 같다'라는 생각과 함께 조사를 하다가 결국 이 곡은 제레미아 클라크의 '덴마크 왕자의 행진곡'이라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덴마크 왕자의 행진곡'은 제레미아 클라크와 다니엘 퍼셀이 공동으로 완성한 세미오페라인 '섬나라 공주'(The Island Princess)에 삽입된 곡이었다. 다니엘 퍼셀은 헨리 퍼셀의 동생이었다. 그래서 아마 혼돈이 생긴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다가 리드(Leeds)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인 윌리엄 스파크(William Spark: 1869-1944)가 1870년대에 이 곡을 오르간을 위한 단편곡집 제 7권의 첫번째 곡으로 출판하면서 작곡자를 헨리 퍼셀로 명기하는 바람에 1940년대까지 헨리 퍼셀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졌었다. 당시 헨리 퍼셀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오르가니스트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바로크 작곡가인 헨리 퍼셀
한때는 제레미아 클라크가 작곡한 곡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작곡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흐지브지되었다. 그런가하면 윌리엄 스파크의 작품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건 그렇고, 윌리엄 스파크가 편곡한 것을 헨리 우드(Henry Wood: 1869-1944)가 트럼펫, 현악 오케스트라, 오르간을 위한 곡으로 편곡했고 그것이 오늘날 가장 널리 연주되는 곡이 되었다. 제레미아 클라크는 1700년대 초반에 당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여왕인 앤의 남편인 덴마크의 조지(George: 덴마크어로는 외르겐스) 왕자가 런던에 도착한 것을 환영하여서 '덴마크 왕자의 행진곡'(Prins Jørgens March)을 작곡했다고 한다. BBC방송은 2차 대전 중에 덴마크에 보내는 방송의 시그날 음악으로 이 곡을 방송했다. 한편, 제레미아 클라크는 어떤 아름다운 귀족 부인을 열정적으로 사랑하였으나 도저히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인 것을 바관해서 33세의 젊은 나이에 권총자살을 하였다.
제레미아 클라크. '트럼펫 벌런터리'는 오랫동안 헨리 퍼셀의 작품으로 알려졌으나 실은 제레미아 클라크가 작곡한 것이며 원래 타이틀은 '덴마크 왕자의 행진곡'이다.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바빌로프의 작품
오랫동안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가 최근에 이르러서 원래 작곡자가 밝혀진 경우로는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를 빼놓을수 없다. '아베 마리아'라는 제목의 노래는 많이 있는 중에 1970년대 이후부터 애원하는 듯한 외침의 '아베 마리아'가 음반과 방송을 통해서 널리 전파되어서 사람들의 인기를 끌게 되었다.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라고 했다. 슈베르트와 구노-바흐의 '아베 마리아'와는 다른 애절한 '아베 마리아'였다. 에스토니아 출신의 소프라노 이네사 갈란테(Inessa Galante)가 불렀고 이어 리투아니아의 엘리나 가란차(Elina Garanca)도 불렀으며 이탈리아의 카를라 마피올레티(Carla Maffioletti)도 불렀고 스페인의 아우로라 고메스(Aurora Gomez)도 불렀다. 사람들은 '정말 좋은 노래로구다. 카치니라는 사람이 작곡했구나!'라면서 카치니를 기억하게 되었다. 줄리오 카치니(Giulio Caccini: 1551-1618)는 로마에서 태어났지만 플로렌스에서 활동한 작곡가 겸 성악가였다. 그런데 별로 유명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아베 마리아' 한곡으로서 갑자기 유명해졌다. 그러는데 1970년대에 들어서서 러시아의 유명한 기타리스트이지만 작곡가로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블라디미르 바빌로프(Vladimiir Vavilov: 1925-1973)가 실은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는 자기가 작곡한 것이라고 밝혔다. 블라디미르 바빌로프는 작곡가로서 유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의 작품을 발표할 때에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익명으로 했거나 또는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다른 작곡가의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아베 마리아'를 발표하면서 처음에는 익명의 작곡가가 작곡한 것처럼 했으나 1972년에 음반 취입을 하면서 바빌로프의 동료 중에서 한 사람이 '언제까지나 익명으로 할수는 없는 노릇이니 사람들이 별로 신경쓰지 않는 사람 중에서 카치니가 작곡한 것이라고 하자'고 주장해서 그후부터는 아예 카치니가 작곡한 것처럼 알려지게 되었다. 그렇게 밝혀진 이듬해에 바빌로프는 세상을 떠났고 이후 바빌로프의 '아베 마리아'라고 정정보도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직도 바빌로프의 '아베 마리아'를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라고 부르고 있다.
기타리스트이며 작곡가인 블라디미르 바빌로프
크라이슬러는 자기의 작품에 다른 작곡가의 이름을 즐겨 사용했다
자기의 작품을 다른 사람이 작곡한 것처럼 명의도용한 경우가 허다하지만 그 중에서도 대표주자는 아마 오스트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인 프리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 1875-1962)일 것이다. 1차 대전 이후 멜랑콜리한 비엔나의 무드를 바이올린으로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크라이슬러였지만 그는 17세기와 18세기 작곡가들의 이름을 빌려서 자기 작품을 소개하기를 즐겨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당시에 크라이슬러의 연주회 프로그램을 보면 크라이슬러 자신의 작품은 한두개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다른 사람들의 작품이기에 사람들은 그저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서 안토니오 비발디,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 루이 쿠프랭, 루이지 보케리니, 조반니 바티스타 마르티니, 장 바티스트 캬르티에, 게타노 푸냐니, 요한 슈타미츠, 주세페 타르티니,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등등 알만한 작곡가들이 작곡한 것으로 소개되었던 것이다. 실은 그들의 작품이 아니라 모두 크라이슬러의 작품이었다. 나중에 전해진 얘기에 의하면 크라이슬러는 음악회의 프로그램에 자기의 이름만 계속 나오면 사람들이 지루해 할 것 같아서 다른 사람의 이름들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러다가 크라이슬러는 1935년에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이름을 사용했던 작품들은 모두 자기가 작곡한 것이었다고 실토하고 팬들의 양해를 구했다. 팬들로서도 크라이슬러가 악의적으로 그런 명의도용을 했던 것이 아니므로 그저 웃어 넘겼다고 한다.
크라이슬러는 비엔나에서 태어났지만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크라이슬러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비엔나의 아늑하고 아담하며 약간은 멜랑콜리한 생활스타일을 반영하는 작품들을 썼다. 그러한 분위기를 게뮈틀리히(gemutlich)하다라고 한다. 다음은 크라이슬러가 자기가 작곡했지만 다른 사람이 작곡한 것처럼 발료한 대표적인 곡들이다.
- 알레그레토(Alegretto)를 이탈리아의 작곡가이며 첼리스트인 루이지 보케리니(Luigi Boccherini: 1743-1805)가 작곡한 것으로 발표
- 안단티노(Andantino)를 이탈리아의 조반니 바티스타 마르티니(Giovanni Battista Martini: 1706-1784)가 작곡한 것으로 발표
- 오바드 프로방살(Aubade Provencale)을 프랑스의 바로크 작곡가이며 연주가인 루이 쿠프랭(Louis Couperin: 1626-1661)의 작품으로 발표
- 샹송 루이 13세와 파반느(Chanson Louis XIII and Pavance)를 루이 쿠프랭의 작품으로 발표
- 라 셰스(카프리스)(La Chasse: Caprice)를 장 바티스트 캬르티에(Jean Baptiste Cartier)의 작품으로 발표
- 그라베(Grave)를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큰 아들인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Wilhelm Friedemann Bach: 1710-1784)의 작품으로 발표
- 메뉴에트(Menuett)를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의 바로크 작곡가인 니콜라 포르포라(Nicola Porpora: 1686-1768)의 작품으로 발표
- 프랠루디움과 알레그로(Praeludium and Allegro)를 이탈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작곡가인 게타노 푸냐니(Gaetano Pugnani: 1731-1798)의 작품으로 발표
- 라 프레시유스(La Precieuse)를 루이 쿠프랭의 작품으로 발표
- 기도(프레기에라: La Preghiera)를 조반니 바티스타 마르티니의 작품으로 발표
- 스케르쪼(Scherzo)를 오스트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칼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Carl Ditters von Dittersdorf: 1739-1799)의 작품으로 발표
- 시실리안느와 리고동(Sicilienne and Rigaudon)을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작곡가인 프랑수아 프랑쾨르(Francois Francoeur: 1698-1787)의 작품으로 발표
- 합창 연습곡(Study on a Choral)을 체코의 작곡가인 요한 슈타미츠(Johann Stamitz: 1717-1757)의 작품으로 발표
- 템포 디 메누에토(Tempo di Menuetto)를 이탈리아의 게타노 푸냐니의 작품으로 발표
- 코렐리 주제에 대한 변주곡(Variations on a Theme by Corelli)을 이탈리아 베니스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주세페 타르티니(Giuseppe Tartini: 1692-1770)의 작품으로 발표
- 바이올린 협주곡 C 장조를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의 작품으로 발표
비엔나 출신의 프리츠 크라이슬러. 여러 작품들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Dank sei dir, Herr(주께 감사하라)는 헨델이 아니라 지그프리트 옥스가 작곡한 곡이다
Dank sei dir, Herr는 헨델이 1738년에 완성해서 1739년 4월 4일 부활절에 런던 헤이마크에 있는 왕립극장(King's Theater)에서 처음 연주된 오라토리오 '이집트의 이스라엘'(Israel in Egypt)에 나오는 모세의 기도송으로 알려져 있다. 헨델은 '이집트의 이스라엘'을 나중에 여러번 수정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수정버전은 1759년 헨델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수정한 것이다. 문제는 '이집트의 이스라엘'의 오리지널 버전이거나 수정 버전이거나 어디에도 Dank sei dir, Herr 라는 아리아가 리스트에 올라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집트의 이스라엘'의 모든 노래는 영어 가사로 되어 있는데 Dank sei dir, Herr의 가사는 독일어로 되어 있다. 훗날 학자들은 Dank sei dir, Herr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고 베를린에서 활동했던 지그프리트 옥스(Siegfried Ochs: 1858-1929)가 작곡도 하고 가사도 붙인 곡이라고 주장했다. 지그프리트 옥스는 패로디 작품인 '새는 날아오고'(Kommt ein Vogel geflogen)으로 유명한 작곡가 겸 지휘자이다. 그는 1882년에 베를린에서 필하모닉 합창연맹이라는 합창단을 설립하고 '이집트의 이스라엘'의 베를린 초연을 지휘했는데 그때 Dank sei dir, Herr를 작곡해서 추가했다는 것이다.
지그프리트 옥스. 헨델이 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주께 감사하라'를 작곡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여러 작곡가들이 자기의 작품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이제 어떤 작품들이 의도적으로 다른 작곡가의 이름을 사용을 한 것인지 점검해 보자. 우선 음악사에서 잘 알려진 위대한 작곡가들의 이름을 도용한 경우이다.
○ 앙리 카사데수스(Henri Casadesus: 1879-1947).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 음악 출판가
- 비올라 협주곡 B 단조를 조지 프리데릭 헨델이 작곡한 것으로 발표
- 비올라 협주곡 C 단조를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가 작곡한 것으로 발표
- 비올라 협주곡 D 장조를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가 작곡한 것으로 발표
앙리 카사데우스
○ 마리우스 카사데수스(Marius Casadesus: 1892-1981).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앙리 카사데수스의 동생)
- 아델라이드(Adélaïde) 협주곡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작곡한 것으로 발표했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8번 D장조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모차르트의 작품을 정리하여 작품번호를 부여한 쾨헬도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모차르트의 작품으로 간주하여 K 목록 3차 편집에서 K Anh 294a라는 번호를 부여하였다. 그후 쾨헬이 다시 마지막으로 목록을 정리할 때에(K6)는 K. AnhC. 14.05라는 복잡한 번호를 부여하였다. AnhC는 모차르트의 작품이라고 알려져 왔으나 다른 사람이 작곡한 것으로 보이는 작품들을 집합해 놓은 항목이다. 말하자면 '부록'이다. 오늘날 어떤 경우에는 '모차르트-카사에수스의 아델라이드'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마리우스 카사데우스
○ 사무엘 더스킨(Samuel Duskhin: 1891-1976). 미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폴란드 유태계)
-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그라베(Grave)를 보헤미아 출신으로 베를린에서 활동했던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요한 게오르그 벤다(Johann Georg Benda: 1713-1752)가 작곡한 것으로 발표. 그라베는 장중하고 천천히 연주하라는 표시이다.
○ 프랑수아 조셉 페티스(Francois-Joseph Fetis: 1784-1871). 벨기에의 음악학자, 작곡가, 음악평론가
- 루트 협주곡을 독일 할레에서 태어나서 슈트라스부르크에서 활동했던 발렌탱 스트로벨(Valentin Strobel: 1611-1669)이 작곡한 것으로 발표
○ 레모 지아초토(Remo Giazotto: 1910-1998). 이탈리아의 음악학자, 작곡가
- G단조 아다지오를 베니스 출신의 토마소 조반니 알비노니(Tomaso Giovanni Albinoni: 1671-1751)가 작곡한 것으로 발표
○ 미하일 골드슈타인(Mikhail Goldstein: 1917-1989). 러시아의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우크라이나의 유태계).
- 알붐블라트(Albumblatt)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알렉산더 글라주노프(Alexander Glazunov: 1865-1936)가 작곡한 것으로 발표
- 임프롬프트(Impromptu)를 러시아의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밀리 발라키레프(Mily Balakirev: 1837-1910)가 작곡한 것으로 발표
- 비올라 협주곡 C 장조를 러시아의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이반 칸도슈킨(Ivan Khandoshkin: 1747-1804)의 작품으로 발표
○ 아서 허칭스(Arthur Hutchings: 1906-1989). 영국의 음악학자, 작곡가
- '신작'(New Works)을 독일 하나우에서 태어나서 프랑크푸르트에서 세상을 떠난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 1895-1963)가 작곡한 것으로 발표. 그러나 실제로 리듬과 다이나믹스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스타일을 표방했지만 아류라는 지적을 받았다.
○ 빈프리트 미헬(Winfried Michel: 1948-). 독일의 작곡가, 뮤직 에디터, 레코더 연주자.
빈프리트 미헬은 자기의 작품도 있어서 출판했지만 상당수의 작품을 18세기 초의 조반니 파올로 시모네티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 여섯 편의 솔로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작곡해서 요제프 하이든의 작품이라고 주장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다. 하이든이 작곡한 것으로 보이는 여섯 편의 솔로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는 1990년대 초반에 발견되었다. 하이든 연구의 1인자라고 하는 로빈스 랜든(Robbins Landon)을 비롯한 많은 하이든 연구자들은 이 곡의 작곡자가 하이든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마후에 하이든 연구자들은 이 곡이 대단히 영특한 음악적 짜집기 대가인 빈프리트 미헬이 작곡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냈다. 정말이지 작품의 내용이 거의 완벽한 하이든 스타일이어서 처음에는 모두들 속았다. 그렇지만 하이든이 생전에 이 여섯 편의 솔로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언급한 것이 없으므로 그로부터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위작이라는 확증을 잡기도 어려웠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들을 했다. 위작이나 뭐니해도 사람들이 하이든의 작품으로 믿을 만큼 하이든 스타일이므로 그렇다면 하이든의 작품으로 인정해도 나쁠 것은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었다. 아무리 위작이라고 해도 좋은 작품이라면 귀중하다는 주장이었다. 위작이라고 해도 진품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라면 진품으로 인정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지금은 빈프리트 미헬의 장난(?)으로 판명이 나서 더 이상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았지만 한때는 하이든의 작품번호로 수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빈프리트 미헬은 실내악을 작곡하고서 이를 조반니 파올로 시모네티(Giovanni Paolo Sominetti)의 작품이라고 발표했다. 시모네티는 실존인물이 아니고 가공인물이었다. 미헬이 시모네티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작품들로서는 여러 편의 트리오 소나타, 샤콘느와 솔로 바이올린을 위한 마드리갈 등이 있다. 1933년에는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하이든 연구의 1인자인 H.C. 로빈스 랜든에게 자기가 작곡한 여섯편의 피아노 소나타를 오랫동안 분실되었던 하이든의 작품인데 자기가 발견했다고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여섯 편의 피아노 소나타는 1995년에 하이든의 작품으로 당당하게 출판되었다. 다만, 악보에는 '빈프리트 미헬이 보완하고 편곡하였다'는 토를 달았다. '클래시컬 뷰'라는 음악전문지는 '좋습니다. 하이든이 작곡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는데 그것이 어떻다는 말입니까?'라고 내세웠다. 빈프리트 미헬은 미하일 글링카가 두 악장의 일부만 남겨 놓았다는 비올라 소나타를 완성해서 발표하기도 했다. 물론, 글링카가 작곡을 시도했던 것이 아니라 빈프리트 미헬의 작품이었다.
시모네티라는 가공인물을 작곡자로 내세운 빈프리트 미헬의 '두개의 알토 플루트와 바소 콘티누오를 위한 여섯곡의 소나타집'
○ 에두아르 내니(Edouard Nanny: 1872-1942). 프랑스의 더블 베이스 연주지 겸 작곡가
- 더블 베이스 협주곡 A 장조를 이탈리아 더블 베이스 비르투오소인 도메니코 드라고네티(Domenico Dragonetti: 1763-1846)의 작품으로 발표
○ 알레산드로 파리소티(Alessandro Parisotti: 1853-1913). 이탈리아의 작곡가 및 뮤직 에디터
- 세 투 마미(Se tu m'ami)를 이탈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1736)의 작품으로 발표
○ 마누엘 폰체(Manuel Ponce: 1882-1948). 멕시코의 작곡가
- A 단조 모음곡을 독일의 작곡가인 실비우스 레오폴드 봐이스(Sylvius Leopold Weiss: 1687-1750)의 작품으로 발표
- 프리앰블과 가보트()를 이탈리아 팔레르모 출신으로 나폴리에서 활동했던 작곡가인 알레산드로 스칼라티(Alessandro Scarlatti: 1660-1725)의 작품으로 발표
○ 블라디미르 바빌로프(Vladimir Vavilov: 1925-1973). 러시아의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
- 아베 마리아(Ave Maria)를 처음에는 익명의 작곡자의 작품이라고 소개했다가 나중에는 이탈리아의 줄리오 카치니(Giulio Caccini: 1551-1618)의 작품이라고 발표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이르러서야 바빌로프의 작품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라고 부르고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앞서 설명한바와 같다.
- 기타를 위한 엘레지(비가)를 마하일 비소츠키(Mikhail Vyssotsky)의 작품으로 발표
- 루트를 위한 칸초나(Canzona)를 프란체스코 카노바 다 밀라노(Francesco Canova da Milano: 1497-1543)의 작품으로 발표
- 기타를 위한 마주르카 C 단조를 안드레이 시크라(Andrei Sychra: 1773-1850)의 작품으로 발표
- 기타를 위한 녹턴 C단조를 바실리 사렌코(Vassily Sarenko)의 작품으로 발표
- 리세르카(Ricercar)를 이탈리아의 기타리스트이며 작곡가인 니콜로 니르리노(Nicolo Nigrino)의 작품으로 발표
나중에 알고 보니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이 작곡한 것이라고 내세운 경우, 그런가하면 작곡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도 그 사람이 작곡했다고 내세운 경우도 있다.
○ 비엔나 출신으로 영국으로 귀화한 작곡가, 작가, 음악학자이먄서 정신분석 및 축구 해설가로서도 활약한 한스 켈러(Hans Keller: 1919-1985)와 영국의 피아니스트 겸 작가인 수잔 브래드쇼(Susan Bradshaw: 1931-2005)는 1961년에 Mobile for Tape and Percussion 이라는 작품을 폴란드의 작곡가인 표트르 자크(Piotr Zak)가 작곡했다고 내세웠다. 두 사람은 장난을 치자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던 것이다. 표트르 자크는 가공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자크의 작품이란 것을 BBC 제3방송에서 방송토록했다. 평론가들이 과연 무슨 소리를 할지 궁금해서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위작 소동은 생각대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듣자마자 '아하 이건 아무래도 자크의 작품이 아니고 가짜 같아!'라면서 의심을 했고 그런 내용을 신문에 썼기 때문이다. 이 위작 사건은 당시 사회적으로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었다.
○ 우크라니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작곡가인 미하일 골드슈타인(Mikhail Goldstein: 1917-1998)은 그의 교향곡 21번을 미콜라 오브시아니코 쿨리코브스키(Mykola Ovsianiko-Kulikovsky: 1768-1846)의 작품이라고 발표했다. 미콜라 오브시아니코 쿨리코브스키는 오블라스트(Oblast)에서 살았던 실존 인물이지만 작곡가가 아니고 부유한 지주였을 뿐이었다. 다만, 예술애호가였던 것은 연관이 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이름을 버젓이 도용한 경우이다.
○ 미국의 루트 연주자이며 작곡가이고 화가이며 사진작가이고 또한 비디오 설치 예술가인 로만 투로브스키 사브추크(Roman Turvosky-Savchuk)는 바로크 스타일의 루트 작품들을 만들고서 이들을 요한 요아힘 사우체크(Johann Joachim Sautscheck), 고트홀트 에프라임 사우체크(Gotthold Ephraim Sautscheck), 콘라딘 이밀리우스 사우체크(Konradin Aemilius Sautscheck) 등의 이름으로 번갈아서 발표했다. 이들은 물론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들이었다. 또한 르네상스 스타일의 루트 작품을 작곡하여서 이들을 요안네스 레오폴리타(Ioannes Leopolita), 야코부스 올레브시엔시스(Jacobus Olevsiensis)라는 작곡가들이 작곡했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로만 투로부스키 사브추크의 예명이었다.
로만 투르브스키
○ 영국의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작곡가인 로언 크리와체크(Rohan Kriwaczek)는 솔로 바이올린을 위한 작품들을 작곡하고서 이들을 영국의 장례음악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작곡한 것이라고 내세웠다. 내세운 이름들은 모두 가공인물들이었다. 그리고 한술 더떠서 장례음악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것처럼 주장했다.
로한 크리와체크. 하기야 장례식장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생겼다.
PDQ Bach는 피터 쉬클르가 만든 가공인물이다
미국의 작곡가이며 음악교육자이고 풍자가인 페터 쉬클르(Peter Schickle: 1935-)는 자기 이름으로도 작품을 작곡했지만 무슨 생각을 했는지 1990년도부터 P.D.Q. Bach라는 가공인물을 만들어서 그가 작곡했다고 내세웠다. P.D.Q. Bach가 작곡했다는 작품들은 주로 고전음악들을 패로디한 것으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연주하도록 했다. P.D.Q. Bach가 작곡했다는 작품들은 음반으로 나왔으며 1990년부터 1993년까지 네번에 걸쳐 그래미상에서 최우수 코미디 앨범상을 받았다.
작곡계의 기인인 피터 쉬클르. P.D.Q. Bach라는 가공인물을 만들어서 그가 작곡한 것처럼 했다. P.D.Q.는 Pretty Damn Quckly의 약자로서 빨리빨리하는 슬랭이다.
모차르트의 '진혼곡'은 자칫했으면 발제그 백작의 작품으로 알려지뻔 했다
작곡가들에게 돈을 주고 작곡을 부탁해서 가져오면 자기가 작곡한 것처럼 발표해서 만족을 느낀 사람도 더러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폰 발제그(Franz von Walsegg: 1763-1827) 백작이다. 모차르트가 활동하던 시기에 살았던 사람이다. 발제그 백작은 재산이 많아서 오스트리아만 해도 여러 곳에 토지를 가지고 있으며 별장도 여러 군데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주로 살았던 곳은 비엔나에서 남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에 있는 니더외스터라이히주의 글로그니츠(Gloggnitz) 부근에 있는 슈투파흐(Stuppach) 성이었다. 그는 프리메이슨이었으며 아마추어 음악가였다. 특별히 음악을 애호하였던 그는 자기의 저택에 소규모이지만 오케스트라를 두고 있었고 그 자신은 플루트와 첼로를 연주할 줄 알았다. 그래서 손님들을 초청해서 간단한 음악회를 가질 때에는 직접 오케스트라의 멤버로서 연주에 참여하는 일이 많았다. 발제그 백작은 작곡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능력이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주로 이름있는 작곡가이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은근히 접촉해서 돈을 주고 작품을 의뢰하고 완성되어서 가지고 오면 마치 자기가 작곡한 것처럼 발표해서 사람들로부터 '와 대단하시네'라는 찬사를 듣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발제그 백작은 부인인 안나를 지극히 사랑하였다. 그런데 그런 안나가 1791년 5월쯤해서 병마와의 싸움에서 져서 결국 숨을 거두었다. 그때 안나는 20세였고 남편 발제그 백작은 28세였다. 발제그 백작은 부인 안나를 위해서 진혼곡을 헌정키로 결심했다. 그래서 당시 인기가 높았던 모차르트에게 연락해서 진혼곡의 작곡을 의뢰하였고 선금으로 50 뒤카트를 지불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프라하에서 '티토의 자비'를 공연해야 했고 비엔나에서는 친구 에마누엘 쉬카네더의 요청에 의해서 '마술피리'를 작곡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결국 모차르트는 진혼곡을 완성하지 못한채 1791년 12월 5일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의 부인인 콘스탄체는 진혼곡을 완성해서 발제그 백작으로부터 잔금을 받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모차르트의 제자인 프란츠 사버 쥐스마이르에게 부탁해서 진혼곡을 완성했다. 그런데 그 전에 모차르트의 친구인 쉬카네더가 주관하여서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지 5일 후인 12월 10일에 비엔나 중심지역에 있는 미하엘교회에서 진혼곡을 미완성인 채로 연주하였다. 모차르트 추모음악회였다. 콘스탄체로서는 발제그 백작에게 진혼곡을 전달해서 잔금을 받아 내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만일 모차르트가 작곡한 진혼곡이 발제그 백작에게 전달되어서 그가 자기의 작품처럼 간직했더라면 영영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임종. 그의 친구와 지인들이 진혼곡을 리허설하고 있는 장면이다. 모차르트의 뒷편에는 부인 콘스탄체와 아들 칼 토마스가 있다.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부인인 콘스탄체가 진혼곡을 의뢰한 발제그 백작에게 그대로 전달했다면 아마 모차르트의 진혼곡은 영원히 존재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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