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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곡가들과 어머니 - 2

정준극 2017. 5. 3. 08:13

위대한 작곡가들과 어머니 - 2


○ 프레데릭 쇼팽의 어머니


쇼팽의 어머니 유스티나


프레데릭 쇼팽(Frederick Chopin: 1810-1849)에게 어릴 때에 영향을 준 사람은 당연히 그의 어머니 유스티나(Justyna)이다. 유스티나는 피아노를 연주할 줄 알았기 때문에 어린 쇼팽에게 처음으로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다. 유스티나는 쇼팽이 남긴 귀중한 유산들을 무사히 보존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쇼팽은 임종에 앞서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옆에 있는 사람에게자기의 발표되지 않은 작품을은 모두 불태우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어머니 유스티나가 절대 그러면 안된다고 말하고 모두 보존토록 했으며 나중에 출판까지 했다. 그래서 쇼팽의 작품들이 다행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쇼팽은 1810년 3월 1일 폴란드의 첼라초바 볼라(Zelazowa Wola)에서 태어났다. 바르샤바에서 서쪽으로 약 30km 떨어진 마을이다. 바르샤바 공국에 속한 지역이다. 바르샤바 공국은 폴란드와는 별도로 통치권을 가진 영토이다. 나폴레옹이 바르샤바를 점령하고나서 별도의 공국으로 설치했던 것이다. 쇼팽의 이름은 프랑스식으로 쓰면 Frederick Chopn 이지만 폴란드식으로 쓰면 Fryderyk Chopin 이다. 쇼팽의 아버지는 니콜라스 쇼팽이다. 프랑스식으로는 Nicolas 이지만 폴란드식으로는 Mikolaj 이다. 니콜라스는 1771년에 프랑스의 로레인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100% 메이드 인 프랑스이다. 그러므로 아들 쇼팽이 프랑스에서 살았던 것은 별다른 허물이 될수 없다. 아버지 니콜라스는 16세 때에 일자리를 찾아서 바르샤바로 왔다. 니콜라스는 바르샤바 교외의 첼라초바 볼라에서 사는 어떤 귀족집의 자녀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일을 맡았다. 먹고 자는 가정교사인 셈이었다. 니콜라스는 음악에 소질이 있어서 플루트와 바이올린을 그런대로 잘 연주했다. 쇼펭의 어머니는 폴란드에서 태어난 테클라 유스티나 크르치차노브스카(Tekla Justyna Krzyżanowska: 1782-1861)이다. 유스티나는 첼라초바 볼라에 있는 스카르벡 집의 가정부였다. 유스티나는 피아노도 잘 치는 교양이 있는 여자였다. 니콜라스와 유스티나는 자연히 알게 되어 1806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유스티나는 네 자녀를 생산하였다. 1남 3녀였다. 슈팽은 유일한 아들로서 둘째 자녀였다. 첫딸은 루드비카였고 둘째 딸은 에자벨라, 셋째 딸은 에밀리아였다.


쇼팽이 태어난지 6개월이 되었을 때 니콜라스는 가족들을 데리고 바르샤바로 이사를 갔다. 바르샤바 리세움() 학교의 프랑스어 선생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유스티나는 가정부 생활을 오래 했던 경험을 살려서 시골에서 올라온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숙을 치기 시작했다. 일종의 기숙사나 마찬가지였다. 유스티나는 기숙생들에게 노느니 염불한다고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래서 기숙생들과 함께 작은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서너살이 된 쇼팽도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유스티나는 쇼팽의 피아노 실력이 일취월장하니까 도저히 자기로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체코의 피아니스트인 보이시에크 치브니(Wojciech Zywny)를 쇼팽의 개인 피아노 선생으로 특별 초방하였다. 그때 쇼팽은 고작 여섯살이었다. 쇼팽은 사실상 11살이 될 때까지 치브니 선생으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그러다가 치브니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면서 떠났다. 누이 루드비카도 쇼팽과 함께 츠비니 선생으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루드비카와 쇼팽은 간혹 피아노 듀엣을 연주해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쇼팽은 일곱살 때에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해서 박수를 받았다. 돈 좀 있고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어린 쇼팽의 음악공부를 하는 비용을 대겠다고 나섰다. 쇼팽은 작곡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일곱살 때에 처음으로 폴로네스 G 단조와 B 플랫 장조를 작곡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놀라운 솜씨였다. 쇼팽은 11살 때에 또 다른 폴로네스를 작곡했다. 그것은 스승인 치비니 선생에게 헌정하였다.  


○ 샤를르 구노의 어머니 빅투아르 르마쇼아


구노의 어머니 빅투아르


'아베 마리아'와 오페라 '파우스트'로 유명한 샤를르 구노(Charles Gounod: 1818. 6. 17-1893. 10. 18)의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구노의 첫 피아노 선생이었다. 구노가 작곡가로서 대성한 것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가르침과 격려의 덕분이었다. 구노의 경우는 어머니의 사랑이 어린 천재의 소년 시절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구노의 아버지 프랑수아 루이 구노(Francois-Louis Gounod: 1758-1823)은 구노가 다섯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 구노는 나중에 아버지에 대한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어머니 빅투아르 르마쇼아(Victoire Remachois: 1780-1858)이 두 아들을 책임져야 했다. 어머니는 구노를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시키기 위해서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어머니는 어린 구노에게 음악적인 감성을 불어 넣어주기 위해 기회가 있을 때마나 노래를 불러주었다. 구노는 어머니의 노래를 들으면서 자랐다. 그리고 그 노래와 어머니의 피아노 연주가 구노의 마음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사실 어머니는 처음에 구노가 음악을 직업으로 삼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안 계신 가정에서 큰 아들 구노가 생활을 이끌어가야 하는데 음악가로서는 수입이 불투명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친구들과 구노의 장래에 대하여 의논했다. 친구들은 아들이 하고 싶은대로 하도록 하는 것이 어머니의 도리라고 말했다. 여기에 용기를 얻은 어머니는 구노를 파리음악원에 보냈고 구노는 그랑프리 드 롬을 받아 이탈리아까지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후로 구노는 세계 음악사에 길이 빛나는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구노는 1893년 10월 18일 프랑스의 생클루에서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 벨라 바르토크의 어머니 파울라


보이트 파울리나


헝가리를 대표하는 20세기 최고의 작곡가 중 한 사람인 벨라 바르토크(Bela Bartok: 벌라 버르토크: 1881-1945)는 우선 3대가 같은 이름을 쓰고 있다. 바르토크의 아버지도 벨라 바르토크이며 바르토크의 아들도 벨라 바르토크이다. 그래서 1세(시니어), 2세(주니어), 3세(서드)로 구별한다. 우리가 말하는 벨라 바르토크는 2세이다. 벨라 바르토크 2세는 1881년 당시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헝가리왕국에 속한 바나티안(Banatia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바나티안은 1920년부터 루마니아의 산니콜라우 마레(Sannicolau Mare)이다. 바르토크의 아버지인 벨라 바르토크 1세는 헝가리의 농업학교 교장이었고 어머니 파울라 보이트(Paula Voit:  헝가리식으로는 Voit Paulina: 1857-1939)는 일반학교 교사였다. 아버지 벨라 바르토크 1세는 오늘날 루마니아의 서쪽 끝 헝가리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우이바르(Ujvar)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헝가리 왕국에 속한 지역이었다. 바르토크의 아버지 쪽은 헝가리계의 일반 귀족 가문이었고 어머니 파울라는 독일계였다. 어머니는 피아노도 연주할줄 아는 음악애호가였다.  


미국에서의 벨라 바르토크와 부인 디타


바르토크는 말도 하기 전에 각기 다른 음악의 리듬을 구별할수 있었고 피아노로 멜로디를 기억해서 완벽하게 칠수 있었다. 그래서 4세 때에는 이미 40여국에 이르는 소품을 자유롭게 연주할수 있었다. 어머니는 바르토크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차리고 다섯살 때부터 정식으로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러는데 바르토크가 일곱살 때에 아버지가 급작히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바르토크와 누이동생 에르체베트를 데리고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비노그라디프(Vinogradiv)인 나기쵤뢰스(Nagyszölös)로 이사를 갔다. 어머니는 교사였기 때문에 발령을 그곳으로 받은 것이다. 바르토크는 11세 때에 나기쵤뢰스에서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이때 프연주곡목 중의 하나는 그가 아홉살 때에 작곡한 소품인 Course of the Danube(도나우의 물길)이었다. 얼마 후에는 오늘날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인 프레스부르크로 생활기반을 옮겼다. 그후 바르토크는 부다페스트로 옮겨서 라츨로 에르켈(Lászlo Erkel)의 제자가 되었고 결혼도 하였다. 바르토크의 어머니는 전쟁 중인 1939년에 부다페스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바르토크의 상심은 말할수 없이 컸다. 바르토크는 나치에 반대하여 부인과 함께 헝가리를 떠나기로 하여 1940년에 리스본에서 배를 타고 뉴욕에 도착했다. 바르토크의 큰 아들인 벨라 바르토크 3세는 헝가리에 남아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바르토크 3세는 철도청 직원이 되어 일하다가 1980년대에 정년퇴직하였다. 둘째 아들 페터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1942년에 미국으로 건너와서 미해군에 입대하였다.  


○ 구스타브 말러의 어머니 마리


말러의 어머니 마리


20세기에 가장 뛰어난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구스타브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속한 보헤미아의 칼리스트(Kaliste)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체코 공화국에 속한 마을이다. 말러의 아버지 베른하르트 바루흐 말러(Bernhard Baruch Mahler)는 마을 양조장의 직원이었다. 어머니 마리 헤르만(Marie Hermann)은 보헤미아의 레데치 나드 사차보우(Ledec nad Sazabou)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역시 체코 공화국에 속한 지역이다. 어머니는 부유한 상인의 딸이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유태계라는 것이었다. 반면에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아버지 베른하르트는 성미가 불같아서 다혈질이었는데 어머니 마리는 온순하고 순종적이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두 사람은 1857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마리는 베른하르트와의 결혼에서 무려 14명의 자녀를 생산했다. 그중에서 둘째가 구스타브 말러였다. 14명 자녀 중에서 8명은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6명이 남은 셈이다. 살림은 별로 넉넉치 않은데 아버지인 베른하르트는 양조장에서 근무해서 그런지 술을 마시고 취해서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는 연약한 어머니를 상대로 성질을 있는대로 부리고 간혹은 폭력을 휘둘렀다. 어린 말러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학대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고 자랐다. 그리고 그같은 어린 시절의 인상은 훗날 그의 작품 속에 사뭇 영향을 주었다. 말러의 작품에 선과 악, 행복과 슬픔, 강함과 약함이 서로 투쟁하는 내용이 반영되어 있는 것도 그런 배경에서이다.  그러므로 말러의 경우에는 다른 어머니들처럼 어린 시절에 자기 자녀의 놀라운 음악적인 재능을 발견하여 헌신적으로 후원한 것이 아니라 부부간의 싸움으로 어두운 영향을 받았을 뿐이다.


물론 어머니가 말러를 위해 노력한 점도 없지는 않다. 말러는 8세 때부터 작곡에 대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어머니 레아가 주장하여서 비록 아버지가 구스렁거렸지만 어린 말러에게 음악을 본격적으로 가르쳐 줄 개인교사를 주선했다. 이어서 어머니는 아버지와 모처럼 의논하여서 말러를 비엔나음악원에 들여보냈다. 말러가 15세 때였다. 말러는 4년 동안 비엔나음악원 다니면서 작곡으로 상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정작 졸업식에서는 다른 사람이 최우수 작곡상인 실버 메달을 받았다. 말러는 자기가 유태계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실력이 아직 못미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래서 다시 비엔나대학교에 들어갔다.  말러는 문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어머니는 말러와 함께 비엔나와서 먹고 자는 것을 챙겨주지는 않았다. 다른 형제자매들을 보살피는 것만해도 벅찬데 비엔나의 말러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머니 마리는 1889년 10월에 보헤미아의 비소시나(Vysocina: 현재는 체코 공화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2세 였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마리가 말러의 작품 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말러는 수많은 우여곡절과 영욕의 세월을 보내고서 1911년 5월 18일 비엔나요양소(새너토리움)에서 세상을 떠났다. 비엔나요양소는 말러가 오랫동안 지휘자 생활을 했던 슈타트오퍼로부터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다. 원래는 안톤 뢰브가 설립하였기에 뢰브요양소라고 불렀으나 1907년부터는 비엔나요양원으로 개칭했고 1938년에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함과 함께 폐쇄되었다.


○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의 어머니 마리아


마리아 프로코피에프.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의 어머니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에프(Sergei Sergeyevich Prokofiev: 1891-1953)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손트소프카(Sontsovka)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오늘날에는 손트시브카라고 부르는 곳이다. 세르게이가 태어난 당시의 우크라이나는 제정러시아에 속해 있었다. 세르게이의 아버지인 세르게이 알렉세예비치 프로코피에프(Sergei Alexeyevich Prokofiev)는 농경학자였다. 주로 농토 이용에 대한 자문을 하는 것이 임무였다. 세르게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리에브나 치트코바(Maria Griporievna Zhitkova)는 전에 어떤 장원에서 농노 일을 했던 사람의 딸이었다. 러시아의 장원에서는 지주들이 농노들의 아이들에게 일찍부터 연극이나 다른 예술을 가르치는 관습이 있었다. 지주의 집에 손님이 오면 나가서 공연을 해야 했고 아울러서 이들이 성장해서 사회에 나가면 먹고 살 방도의 하나로서 예술을 가르쳤던 것이다. 세르게이의 어머니도 어릴 때에 지주의 주선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세르게이의 첫 작곡 선생인 라인홀트 글리에르에 의하면 세르게이의 어머니 마리아는 키가 컸으며 아름답고 초롱초롱한 눈을 가졌고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기쁘고 따듯하게 해 줄지를 아는 여인이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지성적인 여인이라고 보면 된다. 세르게이 알렉세예비치 프로코피에프와 마리아 그리고리에프나 치트코바는 1877년에 결혼하였다. 결혼 후 두 사람은 스몰렌스크의 어떤 규모가 작은 농원으로 이사를 갔다. 이곳에서 세르게이 알렉세예비치는 토양 엔지니어로 일했다. 그러다가 농과대학교 동창생의 주선으로 우크라이나의 스텝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그곳이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가 태어난 손트시브카이다. 


마리아는 결혼하고나서 딸 둘을 낳았지만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런 후에 세르게이가 태어났다. 세르게이가 태어난 이후 마리아는 전부터 하고 싶었던 피아노 공부를 이젠 본격적으로 하고 싶었다. 마리아는 어린 세르게이를 보모에게 맡긴 채 1년에 두어달씩 상트페테르부르크, 그렇지 않으면 모스크바로 나가서 피아노를 공부하고 왔다. 세르게이는 그렇게 공부하고 돌아온 어머니가 저녁에 집에서 쇼팽이나 베토벤을 땀을 흘려 연습하는 것을 비록 어린 마음이지만 깊은 감동을 받았다. 사실상 세르게이의 음악적 재능은 다섯살 때부터 시작되었다. 세르게이는 다섯살 때에 첫 피아노 작품을 만들었다. '인디언 갤롭'(Indian Gallop)이라는 곳이다. 아직 악보를 그릴줄 모르기 때문에 어머니가 악보를 그려주었다. 어머니는 세르게이의 음악적 재능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세르게이는 체스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다. 체스야 머리 좋은 사람이나 하는 게임이라는데 세르게이는 이미 일곱살 때에 상당 수준의 체스 실력이 되었다. 아무튼 체스는 세르게이가 평생을 통해서 가장 열정을 가지고 친구로 삼았던 게임이었다. 세르게이의 체스 실력이 어느정도냐 하면 1914년에 비록 시범게임이지만 세계체스챔피언인 호세 라울 카파블랑카와 대전하여서 세르게이가 이긴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세르게이는 오페라도 많은 관심이 있었다. 이런이가 무얼 알겠느냐만은 세르게이는 아홉살 때에 첫 오페라를 작곡했다. '거인'(The Giant)라는 제목의 오페라였다. 세르게이는 아홉살 때에 서곡과 다른 소품들도 작곡했다. 세르게이가 11살 때에 어머니는 세르게이를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시키고자 했다. 모스크바음악원장인 세르게이 타네예프(Sergei Taneyev)는 세르게이의 오페라 스코어를 보고서 '아니, 이걸 어린 네가 어떻게 작곡했단 말이냐?'라고 감탄하고 곧이어 입학을 허가했다. 그 이후로도 세르게이는 어머니 마리아의 도움과 격려를 바탕으로 오로지 음악에만 매진하여 40세가 지나서부터는 세계적인 명성을 쌓게 되었다. 세르게이는 1953년 3월 5일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1세였다. 스탈린도 이날 죽었다. 세르게이는 붉은 광장 부근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3월 5일부터 내리 사흘동안은 군중들이 스탈린을 추모하는 인파 가 붉은 광장을 덮고 있었기 때문에 세르게이의 집에서 소련작곡가현맹으로 시신을 운구하기가 어려워서 장례식이 늦어졌다.  


○ 아론 코플란드의 어머니 사라


코플란드의 부모


미국 작곡들의 교장이라는 별명을 듣고 있는 아론 코플란드(Aaron Copland: 1900-1990)는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리투아니아에서 이민온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해리스 모리스(Harris Morris Copland)와 어머니 사라 미텐탈(Sarah Mittental)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자녀들 중 막내였다. 아버지는 리투아니라를 떠나 미국으로 가려고 게획을 세웠으나 여비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스코틀랜드로 건너가서 2-3년을 일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스코틀랜드에 있으면서 원래 이름인 Koplan을 영어식으로 Copland로 고쳤다. 아론은 그런 사실을 도무지 모르고 있다가 장성해서야 그런 내막을 알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통 애기를 해주지 않아서였다. 미국에 정착한 아버지는 브루클린에서 가게를 열었다. 식구들은 가게의 윗층에서 살았다. 아론의 형제들은 브루클린 토박이들이었다. 아버지의 잡화점 이름은 H.M. Copland's 였다. 아버지는 음악에 별다른 취미가 없었다. 어머니 사라는 노래도 잘 부르고 피아노도 잘 치는 재능있는 여자였다. 피아노를 쳤기 때문에 브루클린에서 다른 집 아이들을 대상으로 피아노 레슨을 했다. '놀면 뭐하나, 한푼이라도 벌어야지'라는 생각에서였다.

다섯 자녀들 중에서 큰 아들인 랄프가 음악적 재능이 가장 풍부했다. 바이올린 실력도 제일 좋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음악가가 아닌 다른 직업을 택하였다. 그 다음이 아론이었다. 어머니는 아론이 아무래도 특별하다는 것을 알고 큰아들 랄프 보다는 아론에게 더 집중적으로 음악을 가르쳤다. 아론의 누이인 로린(Laurine)도 아론을 무척이나 도와주었다. 로린은 어머니를 대신해서 아론에게 피아노 레슨을 했다. 로린은 노래에 재능이 있어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학교의 학생이었다. 아론은 여덟 살 때부터 작곡했다. 그때만해도 나중에 커서 작곡가가 되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세 때에 폴란드의 이그나시 얀 파데레브스키(Ignacy Jan Paderewski)가 뉴욕에 와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것을 보고 크게 부러워서 마침내 음악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 벤자민 브리튼의 어머니 에디스


벤자민 브리튼의 어머니 에디스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인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 1913-1976)은 1923년 11월 22일 영국 동부해인에 있는 로우스토프트(Lowestoft)에서 태어났다. 이날은 마침 음악의 성자인 성세실리아의 축일이었다. 아버지 로버트 빅터 브리튼(Robert Victor Britten: 1878-1934)은 치과의사였다. 원래는 농토를 마련해서 농장을 경영하는 것이 희망이었으나 자본이 부족해서 희망으로만 접어 두어야 했다. 로버트는 대신에 치과의사가 되는 교육을 받아서 런던에 있는 체어링 크로스 병원(Charing Cross Hospital)의 치과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어쩔수 없이 택한 직업이었기에 만족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체어링 크로스 병원에 근무하면서 인생의 커다란 소득이 있었다. 내무성 관리의 딸인 에디스 로다 하키(Edith Rhoda Hockey: 1874-1937)를 만나 결혼한 것이었다. 에디스는 아마추어 성악가 겸 피아니스트였다. 아버지는 음악에 문외한이었으나 어머니는 음악 애호가였다. 벤자민 브리튼은 이들의 네 자녀 중에서 막내였다. 어머니는 집에서 이브닝 음악회를 갖는 것을 즐겨했다. 어떤 때는 식구들을 동원하여서 작은 뮤지컬을 공연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서 '신데렐라'를 공연하면 당시 세살의 브리튼은 요정 역할로 나오기도 했다. 어머니는 로우스토프트 음악협회의 직원이어서 음악가들과의 교류가 많았고 음악회를 주선하는 일도 맡아서 했다.


브리튼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 에디스가 안고 있는 아기가 벤자민, 큰 딸 샬로테, 형 로버트, 누이 에디스


브리튼은 태어난지 3개월이 되던 때에 폐염에 걸려서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 의사는 폐염 때문에 어린 브리튼의 심장에도 문제가 생겼다고 말했다. 의사는 만일 아기가 살아 난다면 정상인처럼 행동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때문인지 얼마후 브리튼은 씻은 듯이 나았다. 그후로 브리튼은 테니스도 잘 치고 크리켓도 잘 하는 소년으로 성장했다. 어머니의 기쁨은 이루 말할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어린 브리튼에게 음악적 재능이 있는 것을 알고 우선 집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곧이어 브리튼은 다섯살 때부터 작곡을 시도했다. 어머니는 브리튼을 교육하는데 자기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브리튼이 일곱살이 되자 좋은 선생 밑에서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우게 했다. 브리튼은 열살 때에 비올라도 연주했다. 브리튼의 아버지는 완고한 사람이었다. 무신론자여서 남들처럼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지도 않았다. 자녀들과 대화도 거의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집에 축음기를 들여놓자고 하자 불같이 반대하였다. 라디오를 설치하는 것도 반대하였다. 그러나 브리튼은 어머니의 따듯한 배려로 다른 사람에게서부터 음악공부를 계속할수 있었다. 그러한 어머니인데 그에게도 드러내지 못할 사정이 있었다. 당시 영국의 사회는 사회계급이 엄격했다. 부도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무시를 당했다. 그런데 에디스의 아버지는 사생아였다. 그리고 에디스의 어머니는 알콜 중독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디스는 자녀들을 위해서 되도록이면 지성적인 생활을 하였다. 브리튼의 훗날 위대한 작곡가로서 높임을 받게 된 배경에는 어머니 에디스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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