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위한, 어머니에 대한 대표적인 작품들
많은 작곡가들이 어머니를 위해서 작곡을 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작품들만 골라 보았다.
1. 브람스의 '독일 진혼곡'(Ein deutsches Requiem)
브람스의 '독일 진혼곡'(원래 타이틀은 Ein deutsches Requiem, nach Worte der heiligen Schrift: 성경말씀에 따른 독일 진혼곡)은 평소에 그가 존경하던 스승 겸 친구인 로베르트 슈만을 위해 작곡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얘기이다. 슈만은 1856년 7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브람스의 '독일 진혼곡'은 슈만이 세상을 떠난지 9년 후인 1865년에 완성되었다. 브람스가 슈만을 위해 진혼곡을 작곡해야 겠다는 생각을 가졌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정작 슈만을 위한 것이라면 너무 시간이 많이 흘렀다. 브람스의 '독일 진혼곡'은 실은 브람스가 지극히 사랑하던 어머니인 요한나(Johanna Henrika Christiane Nissen: 1789-1865)가 세상을 떠나자 비탄에 빠져 있는 중에 마침내 어머니를 위해 작곡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슈만이 모티브가 되어서 '독일 진혼곡'이 작곡되었다는 것도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브람스의 '진혼곡'은 7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머니에 대한 추모의 감정은 특히 다섯번째 악장에 표현되어 있다. 가사는 이사야 66장 13절의 말씀을 사용하였다. 기록되었으되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이다. '독일 진혼곡'이라는 명칭은 이 진혼곡이 라틴어 가사가 아닌 독일어 가사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일 진혼곡은 교회에서 전례용으로 사용하는 라틴어 진혼곡과는 달리 일반적인 진혼곡이다. 그래서인지 브람스는 자기의 '독일 진혼곡'이 일반 가정에서도 연주될수 있도록 피아노 듀엣으로 편곡하였다. 물론 성악 파트는 그대로 포함하였다. 브람스의 어머니 요한나는 브람스의 아버지 요한 야콥보다 17세 연상이었으며 결혼 전에는 의상실의 재봉사였다.
브람스와 어머니 요한나, 그리고 슈만
2.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어머니의 속삼임'(Muttertändelei)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어머니의 속삼임'은 그가 35세 때인 1899년에 작곡한 노래이다. '높은 음성과 피아노를 위한 세개의 노래' 중에서 두번째이다. 작품번호 43번이며 작품 분류로는 TrV 196이다. 제목인 Muttertändelei(무터탠덜라이)를 우리말로 '어머니의 속삼임'이라고 했는데 tändelei(탠덜라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재잘거리다'라는 뜻이 강한 단어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아기에게 재잘거린다고 말하는 것은 어색하므로 '부드럽게 속삭인다'라고 말해야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노래 가사를 보면 어머니가 아기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남들에게 자랑하는 내용이다. 슈트라우스는 이 노래를 아마도 자기의 어머니를 생각해서라기 보다는 자기의 부인인 폴랭 드 아나(Pauline de Ahna: 1863-1950)를 위해 작곡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슈트라우스가 이 노래를 작곡할 때인 1899년에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아들 프란츠가 태어난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폴랭 드 아나는 소프라노였다. 노래 부르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여자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는 1894년, 30세가 되던 해에 결혼했다. 그리고 결혼한지 3년 후인 1897년에 아들 프란츠가 태어났다. 그러므로 슈트라우스가 '어머니의 속삭임'을 작곡한 때에는 아들 프란츠가 두살이었다. 슈트라우스와 플랭 드 아나는 프란츠 이외에 더 자녀가 없었다. 슈트라우스의 어머니인 요제피네 프쇼르(Josephine Pschorr: 1837-1910))는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1822-1905)의 두번째 부인이었다. 슈트라우스는 이들의 첫번째 아들이었다. 슈트라우스의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15세 연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이 결혼하고서 첫 아들을 낳았을 때 너무나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쁨은 아마 슈트라우스가 폴랭 드 아나와 결혼하고나서 첫 아들 프란츠가 태어났을 때보다는 덜 기뻤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속삭임'의 첫 절의 가사를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어머니는 아기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모든 형용사를 다 동원해서 아기를 자랑합니다. mein schönes Kind(나의 예쁜 아기), mein süsses Kind(나의 귀여운 아기), mein holders Kind(나의 사랑스런 아기), mein frommes Kind(나의 착한 아기)라고 부릅니다.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듬뿍 담겨 있는 노래이다.
Seht mir doch mein schönes Kind(우리 예쁜 아기를 보아요)
Mit den gold'nen Zottel löckchen(곱슬곱슬한 금발머리)
Blauen Augen, roten Bäckchen!(푸른 눈동자, 발그스레한 뺨)
Leuchten, habt ihr auch so eins?(여보세요, 당신들에겐 이런 아기가 있어요?)
Leuchten, nein, ihr habt keins(여보세요, 아니지요, 없지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부인 폴랭 마리아 아나, 아들 프란츠
3. 안토닌 드보르작의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노래'(Songs My Mother Taught Me)
드보르작의 이 노래들은 그가 수집한 보헤미아 집시의 노래 일곱 편 중에서 네번째 노래이다. 드보르작이 1880년에 작곡하였다. 드보르작이 39세 때였다. 드보르작은 어머니를 끔찍히 생각하는 아들이었지만 마찬가지로 자기의 자녀들도 한없이 사랑하였다. 드보르작의 아버지 프란티세크(Frantisek: 1814-1894)는 작은 여관을 경영했고 또한 도축검사관이었다. 어머니 안나 츠덴코바(Anna Zdenkova: 1820-1882)는 평범한 여인이었다. 두 사람은 9명의 자녀를 두었다. 안토닌 드보르작은 첫 아들이었다. 그래서 드보르작은 어머니가 어린 동생들을 위해서 쉬지 않고 힘들게 일하는 모습만 보았다. 드보르작은 32세 때인 1873년에 프라하에서 금세공을 하는 사람의 딸인 안나 체르나코바(Anna Cernakova: 1854-1931)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결혼한 후 연년생으로 자녀를 두어서 첫 3년에 오타카르, 요제파, 루체나의 세 자녀를 두었다. 그런데 이 세 자녀는 안타깝게도 모두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다. 드보르작의 슬픔이 컸었을 것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알수 일이었다. 그후 드보르작 부부는 1878년부터 1888년까지 10년간 여섯 자녀를 더 두었다. 오틸리에, 안나, 마그달레나, 안토닌, 오타카르, 알로이지에였다. 딸 오틸리에는 아버지의 음악적 재능을 받아서인지 작곡가로 활동했다. 오틸리에가 작곡한 피아노 소품들은 아직도 콘서트에서 연주되고 있다. 오틸리에는 아버지 드보르작의 제자인 요제프 수크(Josef Suk)와 결혼하였다. 이들의 손자가 역시 요제프 수크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이다. 드보르작의 딸 마그달레나는 소프라노로서 많은 활동을 하였고 아들 안토닌은 아버지 드보르작의 자료들을 정리하여 출판하는 일을 했다.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노래' 그림
드보르작의 '집시 노래'는 보헤미아의 시인인 아돌프 헤이두크(Adolf Heyduk)가 가사를 만들었다. 가사는 체코어와 독일어의 두 가지로 만들었다. 당시 보헤미아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해 있었다. '집시 노래' 일곱 곡 중에서 네번째인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노래'가 가장 대표적이다. 크라이슬러는 1914년에 이 노래를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 편곡해서 널리 전파했다.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노래'의 독일어 제목은 Als die alte Mutter sang 이다. 번역하면 '늙은 어머니가 (노래를) 불렀던 때에'라고 할수 있다. 제목에 '늙은 어머니'(Alte Mutter)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드보르작의 어머니를 생각해서 가사를 붙인 노래라는 짐작이 간다. 독일어 가사를 소개한다.
Als die alte Mutter mich noch lehrte singen,(늙으신 어머니께서 나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실 때에)
Tränen in den Wimpern gar so oft ihr hingen,(어머니는 눈가에 눈물을 감추셨지요)
Jetzt, wo ich die Kleinen selber üb'im Sange,(이제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게 되었답니다)
rieslt's in den Bart oft, riesel't von der braunen Wange.(그럴 때면 간혹 나의 나이든 뺨에도 눈물이 흘러 내립니다.)
드보르작과 부인 안나
4. 안톤 베베른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여섯 작품'(Six Pieces for Orchestra)
안톤 베베른(Anton Webern: 1883-1945)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여섯 작품'(Sechs stücke für die grosses Orchester)은 그의 스승인 아놀드 쇤베르크에게 헌정한 것이지만 실은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베베른의 어머니에 대한 감정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수 있다. 베베른 자신도 '첫번째 곡은 내가 아직도 비엔나에 있을 때에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감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때 나는 이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실 것이라는 두려움을 깊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물론 나는 어머니가 계속 살아 계셨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여섯 작품의 나머지 것들도 베베른의 슬픈 마음을 표현한 것이며 아울러 어머니와 함께 지낼 때에 즐거웠던 추억을 그린 것이다. 음악적으로 볼때 이 작품은 무조음악의 언어를 대규모 앙상블에 적응시키는 첫 시도의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작곡할 때에 베베른은 26세의 청년으로서 창작의욕이 남다르던 때였다. 베베른은 쇤베르크의 음악적 재능을 그대로 이어받은 제자였다. 그래서 쇤베르크의 아이디어인 '톤칼러 멜로디'(Klangfarbenmelodie)를 심도있게 표현코자 노력하였고 그 산물이 '오케스트라를 위한 여섯 작품'이었다. 여섯 작품은 연주지시만 제시되어 있다. 즉, 1. Etwas Bewegte Achtel(어느정도 감동적으로 8분의 1박자) 2. Bewegt(감동적으로) 3. Zart Bewegt(부드럽고 사랑스럽게 감동적으로) 4. Langsam, Marcia Funebre(천천히, 장송곡 풍으로) 5. Sehr Langsam(매우 천천히) 6. Zart Bewegt(부드럽게 사랑스럽게 감동적으로)이다.
안톤 베베른
5. 사무엘 바버의 '1915년의 낙스빌 여름'(Knoxville Summer of 1915)
사무엘 바버(Samuel Barber: 1910-1981)는 아홉살 때에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음악가가 되는 것이 자기의 운명이므로 도와 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머니에게 축구선수가 되라고 하지 말고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고 말해 줄것을 간청했다. 바버의 오케스트라 모음곡인 '1915년의 낙스빌 여름'은 바버가 그의 아버지에게 헌정한 것이지만 악보의 표지에 '나에게 항상 잘해 주시는 어머니에게'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수 있다. 바버는 이 작품을 1947년에 작곡했다.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으로 만들었다. 텍스트는 미국의 작가인 제이스 에이지(James Agee:1909-1955)의 동명 산문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작품은 인기 소프라노 엘레아노르 스테버(Eleanor Steber)가 바버에게 의뢰한 것이다. 1948년 보스턴에서의 초연에서는 당연히 엘레아노르 스테버가 솔로를 맡았으며 세르게 쿠세비츠키가 지휘하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다. 바버는 이 작품을 '서정적 라프소디'(Lyric Rhapsody)라고 불렀다. 그만큼 서정적 분위기의 작품이다.
작곡가 사뮈엘 바버, 소프라노 엘레아노르 스테버, 작가 제임스 에이지
제임스 에이지의 고향은 테네스주의 낙스빌이었다. 제임스가 일곱살 되던 해인 1916년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낙스빌에서 살았던 제임스의 식구들은 고향을 떠나서 다른 곳에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니까 낙스빌에서의 생활은 1915년까지였다. 고향을 떠난 제임스의 식구들은 다시는 낙스빌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제임스는 이 시기가 생의 전환점을 이룬 시기였다고 말했다. 훗날 제임스는 '1915년의 낙스빌 여름'을 완성했다. 아무튼 1915년은 그에게 특별한 해였다. 바버도 그 즈음에 그의 아버지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서 걱정으로 지냈다. 나중에 바버는 제임스를 만나서 그와 여러가지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모두 어린 시절에 대한 짙은 향수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런 감정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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