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작곡가들의 어머니 - 1
어린 자녀를 훌륭한 작곡가로 만들기 위한 무한의 헌신
세상의 어머니들 치고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는 일반 어머니들과는 조금 다른 특별한 어머니들이 있다. 위대한 작곡가들의 어머니들이다. 그런 어머니들은 자기 자녀의 음악적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채고 지극한 정성과 헌신으로 돌보아주어 마침내 자녀를 위대한 작곡가로 만든 어머니들이다. 물론 자녀의 음악적 재능에 대하여 관심도 없고 보살펴 주지도 않았던 어머니들도 있지만 대부분 위대한 작곡가들의 어머니는 무언지 모르지만 달랐다. 헨델,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 바그너, 차이코브스키, 라흐마니노프, 리스트, 쇼팽, 바르토크, 말러, 프로코피에프, 코플란드, 브리튼(무순)의 어머니들을 소개한다.
○ 조지 프리데릭 헨델의 어머니 도로테아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헨델 기념상. 악보는 오라토리오 '메시아' 중에서 45번 '내 주는 살아계시고'
헨델은 1685년 6월 17일 독일 마그데부르크 공국의 할레(Halle: Saale)에서 태어났다. 헨델의 아버지 게오르그 헨델은 작세 봐이헨펠스(Saxe-Weissenfels)와 브란덴부르크 백작령(Brandenburg Markgrafschaft)에서 궁정 이발사 겸 외과의사였다. 헨델의 할아버지, 즉 게오르그의 아버지 발렌틴 핸델(Valentin Händel)은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구리세공업자였다가 1608년에 할레로 이주하였다. 헨델의 아버지 게오르그는 30년 전쟁(1618-1648)이 시작될 때에 태어났다. 그러므로 사회가 혼란하고 경제가 파탄에 이를 정도의 상황에서 지,내야 했다. 더구나 게오르그는 아버지 발렌틴이 1636년 게오르그가 14세 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가정살림을 도와야 했다. 게오르그는 할레에서 이발사 도제가 되어 서너해를 보냈다. 게오르그는 20세가 되자 할레에서 이발사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의 딸인 안나와 결혼하였다. 안나는 한번 결혼한 일이 있었다. 역시 이발사였던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미망인으로 있던 터였다. 게오르그는 안나와 결혼하여 안나의 전남편이 하던 이발소를 인수받았다. 안나는 1682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해에 게오르그는 루터교 목사님인 게오르그 타우스트의 막내 딸인 도로테아 엘리자베트 타우스트(Dorothea Elisabeth Taust: 1651-1730)과 재혼하였다. 도로테아는 결혼 후 임신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사산하였다. 1685년에 다음 아이가 무사히 태어났다. 우리의 헨델이었다. 그때 아버지 게오르그는 63세였으니 헨델은 늦둥이 중에서도 늦둥이였다. 헨델의 뒤로 누이동생 둘이 더 태어났다. 도로테아 소피아와 요한나 크리스티나였다. 게오르그는 그 후에 장인 등의 도움으로 궁정 이발사가 되었고 당시의 관례대로 간단한 수술도 하는 외과의사로서의 역할도 했다.
스피넷
헨델은 어릴 때부터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헨델의 어머니 도로테아는 목사님의 딸이어서 교회생활에 익숙하였고 그러다보니 스피넷(피아노의 전신)도 연주할 줄 알았다. 어머니는 헨델을 위해 스피넷을 마련코자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버지 게오르그는 무슨 악기든지 집에 들여 놓을수는 없다고 하면서 죽어라고 반대하였다. 아마 헨델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고 그나마 안정된 직업인 이발사로 만들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그나저나 헨델의 아버지인 게오르그는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이 평가해 놓은 것을 보면 헨델의 아버지 게오르그는 '보수적이며 고집이 셌고 검소하여서 절약하는 성격이지만 모험을 두려워하는 안일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아버지였기에 도로테아가 아들 헨델에게 음악을 가르치겠다고 하자 단호하게 반대하였던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머니 도로테아와 어린 헨델의 음악열은 막을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스피넷을 몰래 들여와서 다락방에 두고 아버지가 출타했을 때를 틈타서 헨델이 연습하도록 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다락방에서 스피넷 소리가 나는 것을 아버지가 감쪽같이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소리인것 같다. 그래서 훗날 일부 학자들은 헨델의 다락방 스피넷 연주는 듣기 좋으라고 만들어 낸 이야기일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헨델이 음악을 본격적으로 배울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 헨델은 일곱살인가 아홉살인가 일때에 아버지와 함께 봐이센펠스에 간 일이 있다. 그때 게오르그와 헨델은 지체 높은 요한 아돌프 공작을 만나게 되었다. 공작은 헨델이 음악에 대하여 재능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는 어디 한번 스피넷을 연주해 보라고 청했다. 헨델이 그야말로 전문가 이상으로 훌륭하게 스피넷을 연주하자 공작은 헨델의 아버지 게오르그에게 '아니 여보시게, 이런 훌륭한 아들이 있는데 어째서 음악공부를 시키지 않는단 말이요?'라면서 책망하고는 이어서 '어서 좋은 선생을 구해서 가르침을 받도록 하시오'라고 지시했다. 소시민인 이발사로서 공작의 말에 거역한다는 것을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게오르그는 봐이센펠스 궁정에서 이발사의 자리를 얻고자 하던 때였으므로 공작의 지시를 죽어라고 듣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헨델은 할레 교구교회의 오르가니스트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차호브로부터 오르간과 작곡에 대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위대한 작곡가가 태어나는 시작이었다. 헨델은 영국으로 귀화한 후에 이름을 영국식으로 조지 프리데릭 헨델(George Friderick Handel: 1685-1759)이라고 썼다. 원래는 게오르그 프레데릭 핸델(Georg Frederick Händel)인데 영어에는 ä가 없으므로 그냥 a 를 사용키로 했다.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어머니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의 어머니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결혼전 이름은 안나 마리아 페르틀)
모차르트의 어머니 안나 마리아도 모차르트의 성공을 위해서 무척이나 기도했던 분이다. 안나 마리아의 결혼전 성은 페르틀(Pertl)이며 결혼하여서는 안나 마리아 봘부르가 모차르트(Anna Maria Walburga Mozart)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1720년 12월 25일에 태어나서 1778년 7월 3일 세상을 떠났다. 자녀는 볼피(모차르트)와 누이 난네를(마리아 안나)뿐이다. 안나 마리아는 잘츠부르크 인근의 장크트 길겐(St Gilgen)에서 태어났다. 안나 마리아의 아버지 니콜라우스 페르틀(1667-1755)은 힐덴슈타인 마을의 부(副)촌장이었다. 안나마리아의 친정 어머니, 그러니까 모차르트의 외할머니는 이름도 아름다운 에바 로지나(Eva Rosina: 1681-1755)였다. 아버지 니콜라우스는 잘츠부르크의 베네딕트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하였다. 그는 여러 공직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장크트 안드레아 구청장이었다. 니콜라우스는 원래 음악에 재능이 있어서 음악가가 되려고 했었다. 그러나 40대 말에 중병을 앓고 나서 음악가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아무 직업이나 택하여 살게 되었다. 그러나 벌이가 시원치 않자 세상을 떠날 즈음에는 빚이 많았다. 남아 있던 니콜라우스의 소유물들은 모두 압류당하여 빚쟁이들의 손에 넘어갔다. 어머니 에바 로지나와 두 어린 딸, 즉 언니 마리아 로지나와 안나 마리아는 먹고 살길이 막막했다. 남아 있는 식구들은 잘츠부르크로 거처를 옮겼다. 이들은 잘츠부르크에서 아버지가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자선연금을 받으면서 그저 입에 풀칠이나 하며 지냈다. 한달에 8 플로린을 받아 생활을 해야 했으니 1년에 96플로린밖에 되지 않는 돈이었다. 보통 직장에 다니면 1년에 500-700플로린을 받으므로 그런 것에 비하면 얼마나 적은 돈인지 알수 있다. 결국 언니인 마리아 로지나는 1728년 아홉 살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안나 마리아는 여덟살이었다. 안나 마리아는 잘 먹지를 못하여 병약했다. 항상 병치레였다고 한다.
안나 마리아는 27세 때에 레오폴드 모차르트와 결혼했다. 1747년 잘츠부르크에서였다. 결혼후 이들은 게트라이데가쎄(Getreidegasse) 9번지 집의 3층에 살았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차르트 생가가 된 집이다. 집주인은 레오폴드의 친구인 로렌츠 하게나우어(Lorenz Hagenauer)로 나중에 모차르트와 난네를의 외국 순회 연주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준 사람이다. 레오폴드와 안나 마리아는 거의 30년에 이르는 결혼생활을 통해 7명의 자녀를 생산하였다. 그 중에서 겨우 두명 만이 생존하였으니 잘 아는대로 볼피(모차르트)와 난네를이었다. 안나 마리아는 모차르트를 출산할 때에 거의 세상을 떠날뻔 했다. 그만큼 난산이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태반이 자궁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안나 마리아는 남편 레오폴드, 딸 난네를(마리아 안나), 아들 볼피(볼프강 모차르트)와 함께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여 이들의 연주회를 보았다. 두 아이는 가는 곳마다 천재니 신동이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 레오폴드는 경비 등의 문제로 안나 마리아를 번번히 연주여행에 함께 가지 못했다. 오히려 집에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레오폴드는 모차르트를 데리고 몇 번에 걸쳐 이탈리아 여행을 갔지만 그때마다 안나 마리아는 딸 난네를(마리아 안나)과 함께 잘츠부르크에 남아 있어야 했다. 모차르트가 청년이 되자 안나 마리아는 그나마 모차르트와 함께 여행을 갈수 있었다. 만하임, 아우그스부르크(Augsburg), 파리에 함께 갔다. 파리에 있을 때인 1778년 7월 안나 마리아는 원인 모를 병에 걸려 결국 그해 7월 3일에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파리의 rue du Sentier 8번지 집이었다. 현재 그 집에는 모차르트와 그의 어머니가 이 집에서 1778년에 머물렀으며 1778년 7월 3일에 모차르트의 어머니인 안나 마리아가 세상을 떠났다는 명판이 붙어 있다. 안나 마리아는 파리의 생유스타세(Saint-Eustache)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 루드비히 반 베토벤의 어머니 마리아
베토벤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레나
베토벤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어린 시절에 마음을 의지할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예를 들면 어머니는 술에 취해서 들어온 아버지가 어린 베토벤을 구박할 때에 앞장서서 보호해 주었다. 그러므로 베토벤은 17세 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침식을 잃을 정도로 무척 애통해 하였다. 어머니는 병으로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이 비엔나로 가서 장래를 개척하겠다고 하자 장한 일이라고 하면서 오히려 격려하였다. 그리하여 베토벤은 비엔나에 와서 바야흐로 모차르트의 제자가 되어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하려는 중에 고향 본(Bonn)으로부터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베토벤이 비엔나에 온지 두 달 후였다. 베토벤은 짐작은 했지만 이렇듯 빨리 어머니의 병환이 악화될줄은 몰랐다. 베토벤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다시 본으로 갔다. 베토벤은 가까스로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볼수 있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친 청년 베토벤은 인생에 대하여 갈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베토벤에게 ‘너, 그게 무슨 생각이냐? 너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가 될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는 자에게 하늘의 보답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다시 비엔나로 돌아온 베토벤은 온갖 역경을 헤치고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가 되었다. 악성 베토벤의 뒤에는 그를 격려하고 지켜보며 후원한 어머니 마리아의 보살핌이 있었다.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Maria Magdalena Keverich: 1746-1787)는 베토벤의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에 한번 결혼한 일이 있었다. 트레브스 선제후의 개인 발레(Valet: 시종, 특히 마부)였던 사람과 16세의 비교적 어린 나이에 결혼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그러다가 남편이 마리아와 결혼한지 2년후에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는 18세의 젊은 나이에 하루 아침에 미망인 겸 아이까지 있었던 여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베토벤의 아버지인 요한 반 베토벤과 알게 되어 1767년 결혼하였다. 결혼 후 마리아에게는 불행한 일들만 닥치는 것 같았다. 요한과 결혼하고 나서 첫 아들을 낳았지만 생후 6일만에 숨을 거두었다. 마리아는 요한과 결혼하여 모두 여섯 자녀를 낳았는데 그중에서 아들 3명만 살아남았다. 두번째로 태어난 아들이 훗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가 되어 온 세계의 추앙을 받는 베토벤이고 그 다음이 나중에 공무원 생활을 했던 카스파르이며 막내가 나중에 약사가 된 니콜라우스였다. 마리아의 남편 요한은 결혼 전에는 그럴듯하게 생각되는 사람이었는데 정작 결혼하고 나서 보니 사람이 의욕도 없으면서 성질만 부리고 더구나 술을 너무 좋아해서 얼마 후에는 날이면 날마다 술에 절어 지내는 인생이었다. 남편 요한은 테너였고 피아노 레슨도 하는 사람이었지만 술 때문에 음악가로서 성공하겠다는 야망은 접어둔지 오래였다. 나중에 마리아는 친구에게 ‘아, 어찌하여 나의 결혼생활은 슬픔과 비탄의 쇠사슬에 얽매어 있어야 하는가?’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마리아는 착한 어머니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1784년 라인강이 갑자기 범람하여 라인가쎄에 있는 베토벤의 집이 물에 잠기게 되었다. 마리아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속에서 자기의 몸은 돌보지 않은채 소년 베토벤을 비롯한 아들들을 지붕을 통하여 이웃집으로 피신토록 했다. 그 때문에 마리아는 폐렴에 걸렸고 결국 3년 후인 1787년 7월 17일에 가난한 살림에 고생만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 슈베르트의 어머니 엘리자베트
슈베르트의 어머니는 음악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부유하거나 지체높은 집안의 출신도 아니었다. 슈베르트의 어머니 엘리자베트는 비엔나에서 남의 집 하녀로 15년이나 일했던 여자였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비엔나에 와서 그때부터 남의 집 하녀로 29세까지 일했다. 그리고 슈베르트의 아버지를 만나서 결혼하였다. 슈베르트의 어머니 마리아 엘리자베트 카타리나 비츠는 1756년에 실레지아에서 태어났다. 실레지아는 오늘날 폴란드 서남부와 체코 공화국의 동북부에 걸쳐 있었던 지역이다. 엘리자베트의 아버지는 실레지아에서도 북동쪽 시골인 추크만텔이란 곳에서 태어났다. 그러다가 도시로 나와서 자물쇠공이 되었고 총도 만들었다. 엘리자베트의 아버지는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고 또한 사업도 잘 되어서 그 분야에서는 존경받는 장인이 되었고 한때는 지방경찰서에서 근무한 일도 있다. 그러다가 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 비엔나로 왔다. 그러나 그 다음해인 177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엘리자베트는 14세였다. 그로부터 엘리자베트는 비엔나의 이곳 저곳 집에서 하녀 생활을 하였다. 슈베르트의 아버지인 프란츠 테오도르는 1763년에 모라비아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슈베르트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트보다 7년이나 아래였다. 슈베르트의 할아버지는 모라비아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였다. 슈베르트의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르는 20세 쯤에 비엔나로 왔다. 마침 그의 형이 비엔나에서 어떤 교구에 속한 학교를 책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 학교의 교사로서 일할수 있었다. 프란츠 테오도르와 엘리자베트는 그런 중에 만나서 데이트를 했고 드디어 1785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듬해인 1786년에 프란츠 테오도르는 힘멜포르트그룬트 교구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슈베르트는 힘멜포르트그룬트 나중에 슈베르트도 한때 아버지 학교에서 선생을 지낸 일이 있다.
음악가정. 슈베르트의 가족들은 이러할 것이라고 상상해서 그린 그림. 그러나 슈베르트의 형제자매들은 다섯 명이 나중에까지 생존하였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비록 학교장이라고 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슈베르트는 오늘날 비엔나 9구인 알저그룬트의 길가에 면한 집의 1층(우리식으로는 2층)에서 태어났다. 웬만한 방이 없어서 부엌에서 태어났다. 그만하면 살림이 어느정도인지는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슈베르트의 형제자매는 14명이나 된다. 그중에서 한 명은 슈베르트의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서 밖에서 낳아서 데려온 아이이다.14명 자녀 중에서 9명이나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5명만 생존한 셈이다. 슈베르트는 세번째 아들이었다. 하늘도 무심하여서 슈베르트는 단명하여서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결혼도 하지 않은 입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슈베르트의 어머니는 음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가족들이 모여서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부르면 너무나 기뻐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어린 슈베르트가 비올라를 연주하는 것을 좋아했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정식으로 음악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니지만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 그렇지만 어린 슈베르트에게 기초적인 음악교육을 시킬 정도였고 더누가 슈베르트의 음악적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채려서 정식으로 음악교육을 받을수 있게 주선해 주었다. 슈베르트의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르를 가족들과 함께 음악회를 갖는 것을 즐겨했다.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르는 첼로를 연주했고 큰아들 페르디난트와 작은 아들 이그나즈는 바이올린을 연주했으며 어린 프란츠 슈베르트는 비올라를 연주했다.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르는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2 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엘리자베트는 슈베르트가 15세 때에 세상을 떠났다.
○ 펠릭스 멘델스존 바로톨디의 어머니 레아
멘델스존의 어머니 레아
펠릭스 멘델스존 바로틀디(Felix Mendelssohn Bartholdy: 1809-1847)는 베를린의 부유한 은행가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유태계였으나 일찍이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하지만 나치 시대에는 그가 유턔계인 것이 문제가 되어 그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이 나치 치하에서 금지된 일도 있다. 멘델스존은 천재적인 작곡가였다. 어느때 괴테가 어린 멘델스존을 만난 일이 있다. 괴테는 '독일의 천재 음악가는 펠릭스 뿐이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멘델스존은 수많은 오케스트라 작품과 가곡, 피아노곡, 성곡, 극음악 등을 남겼다. 비록 38세라는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작품은 영원히 빛나고 있다. 그의 그같은 명성 뒤에는 어머니 레아의 헌신적인 보살핌이 있었다. 물론 아버지도 음악을 좋아하여 집에서 사람들을 초청해서 음악회를 갖기를 즐겨했으나 기본적으로 음악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 레아(Lea Mendelssohn Batholdy: 1777-1842)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공개적인 연주회도 자주 가졌다. 바흐의 작품을 널리 알리는 일에 주도적이었다. 그래서인지 멘델스존도 바흐의 음악을 연주하기를 선호했다. 레아는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의 작품도 자주 연주했다. 레아는 집에서 살롱을 마련해서 여러 영향력 있는 예술가들이 드나들며 담소를 나누고 음악을 감상하도록 했다.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을 살로니어(Saloniére)라고 부른다. 멘델스존의 어머니 레아는 뛰어난 살로니어였고 멘델스존의 누이동생인 레베카도 역시 이름난 살로니어였다.
펠릭스의 누이 패니. 역시 뛰어난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였다.
멘델스존의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 바르톨디는 이름난 은행가로서 대개 부유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예술애호가였다. 멘델스존의 할아버지는 유태사회에서 유명한 철학자인 모세스 멘델스존였다. 멘델스존의 어머니 레아는 결혼전 이름이 레아 솔로몬이었으나 결혼하고서 레아 멘델스존 바르톨디라는 이름을 가졌다. 레아는 유태계의 명망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레아는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아브라함과 레아는 네 자녀를 두었다. 모두 어머니 레아의 영향을 받아서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그 중에서도 유일한 아들 펠릭스는 역사에 남는 위대한 작곡가로 성장하였다. 큰 딸 패니(Fanny Mendelssohn Hensel)도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으며 또한 작곡도 했다. 셋째인 레베카(Rebecca Mendelssohn Dirichlet)는 성악을 공부했다. 그리고 앞에서 설명한대로 살로니어였다. 넷째 파울(Paul Mendelssohn Bartholdy)은 첼리스트였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기업을 이어 받아 은행가가 되었다. 자녀들이 어린 시절에 큰 딸 패니가 가장 음악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었다. 그래서 어머니 레아는 실상 패니를 음악가로서 대성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는 여성의 사회 활동이 제약을 받었으므로 패니를 그냥 아마추어 작곡가 및 피아니스트로 남겨두고 대신 펠릭스를 음악가로서 집중 지원하였다. 사실 펠릭스는 큰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기업을 이어 받아야 할 형편이지만 펠릭스는 은행일 보다는 작곡에 더욱 애착을 두고 있어서 어쩔수가 없었다. 네 자녀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 레아로부터 피아노 교습을 받았다. 레아는 1842년 12월에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해 5월에는 사랑하는 딸 패니가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에 사랑하는 어머니와 누이를 한꺼번에 저 세상으로 보낸 펠릭스의 마음은 비통에 가득 찬 것이었다. 펠릭스는 레아와 패니가 세상을 떠난 때로부터 5년 후인 1849년에 세상을 떠났다.
○ 로베르트 슈만의 어머니 요한나
슈만의 어머니 요한나와 부인 클라라 슈만
슈만은 1810년 독일 동부 작소니 왕국의 츠비카우(Zwickau)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고틀로브 슈만(Friedrich August Gottlob Schumann: 1773-1826)은 독일 동쪽 끝지역의 엔드쉬츠에서 태어났으며 츠비카우에 와서 서점을 운영했고 출판도 하며 지내는 사람이었다. 슈만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문학에 대한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 아우구스트는 슈만이 16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향년은 53세였다. 슈만의 어머니 요한나 크리스티나 슈나벨(Johann Christina Schnabel: 1767-1836)이 어떤 지역 출신이며 어떤 집안 사람이었는지는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아우구스트 슈만과 결혼하여서 다섯 자녀를 두었는데 로베르트 슈만은 막내였다는 사실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슈만의 문학적 소양은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것이지만 음악적 취향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어머니 요한나는 슈만을 40이 넘어서 출산했다. 아버지는 늘 바뻤기 때문에 아이들은 온전히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어머니로부터 교양을 전수받았다. 어머니 요한나는 노래부르기를 좋아했고 음악에 대한 지식도 어느정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특히 로베르트 슈만이 음악에 관심을 갖도록 인도하였다. 슈만은 아주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이후 어머니는 슈만이 장성해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가 될 때까지 끊임없는 격려와 애정을 보여주었다. 슈만이 16세 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슈만의 장래에 대한 결정은 어머니 요한나의 책임이었다. 슈만은 처음에 어머니의 뜻에 따라 법학을 공부했다. 나중에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슈만은 음악을 제쳐 놓을수가 없었다. 어머니 요한나는 프레데릭 비크(Frederick Wieck) 교수와 슈만의 장래에 대하여 의논했다. 프레데릭 비크 교수는 클라라 슈만의 아버지로서 나중에 슈만의 장인이 되는 사람이다. 어머니는 비크 교수의 조언도 있고 해서 슈만에게 꿈을 이루라고 마말하고 축복하였다. 어머니는 슈만이 26세 때에 세상을 떠났다. 슈만의 슬픔은 한이 없었다. 슬픔에 젖어 있는 슈만을 클라라가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슈만은 30세 때에 클라라와 마침내 결혼하였다.
○ 리하르트 바그너의 어머니 요한나
바그너의 어머니 요한나 로지네 패츠
리하르트 바그너는 라이프치히의 유태인 구역에 있는 브륄(Brühl) 거리의 3번지에서 태어났다. '붉고 하얀 사자의 집'이라는 명칭으로 불린 집이었다. 현재 바그너가 태어난 집은 철거되었고 대신 백화점이 들어서 있다. 현재 브륄로 평행으로 연결된 거리의 이름은 리하르트 바그너 슈트라쎄이다. 바그너의 아버지인 칼 프리드리히 바그너는 라이프치히 경찰서의 서기였다. 어머니는 요한나 로지네로서 빵집 딸이었다. 리하르트는 아홉번째 자녀였다. 리하르트의 아버지는 리하르트가 태어난지 6개월 후에 장질부사로 세상을 떠났다. 리하르트의 어머니는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살 도리가 없어서 리하르트의 아버지의 친구로서 극작가이며 배우인 루드비히 가이어(Ludwig Geyer: 1778-1821)의 집에 들어가 살았다. 그 집에 현재 어디인지는 모른다. 리하르트의 어머니는 리하르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 8월에 가이어와 결혼했다고 한다. 다만, 라이프치히의 어느 교회에도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한 증빙서류가 없어서 과연 결혼식을 올렸는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곧이어 리하르트는 어머니를 따라 드레스덴에 있는 가이어의 집으로 이사를 갔다. 리하르트는 14세가 될 때까지 빌헬름 리하르트 가이어라는 이름으로 학교도 들어가고 교회도 다녔다. 리하르트는 그때까지만 해도 가이어가 진짜 아버지인둘 알았었다고 한다. 나중에 나온 얘기들이지만 바그너의 진짜 생부는 가이어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근거는 없다. 어머니 요한나가 이렇다 저렇다 얘기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알수가 없다.
가이어는 배우 겸 극작가였기 때문에 극장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리하르트의 극장사랑은 아마도 계부인 가이어로부터 물려 받은 것인지 모른다. 리하르트는 가이어가 출연하는 연극에 자주 구경을 갔다. 어느때는 어린 리하르트가 가이어가 출연하는 연극에서 천사역할을 맡은 일도 있다. 소년 리하르트는 오페라도 볼 기회가 있었다. 리하르트는 베버의 '마탄의 사수'(Der Freischütz)를 보고 이 오페라의 고틱 분위기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고틱 스타일이란 것은 중세의 괴기하고 음산하며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말한다. 리하르트는 포센도르프(Possendorf)에 있는 베첼(Wetzel) 목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라틴어 선생으로부터 피아노 교습을 받았다. 바그너는 피아노를 악보를 보고 제대로 연주할 줄은 몰랐지만 극장에서 오페라의 서곡을 듣고 그대로 연주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계부인 가이어는 바그너가 여덟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 바그너는 가이어의 동생이 학비를 대주어서 드레스덴에 있는 크로이츠(십자가)중등학교에 나닐수 있었다. 소년 바그너는 극작가가 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소년 바그너가 처음으로 쓴 극본은 로이발트(Leubald)라는 것이었다. 학교 다닐 때인 1826년에 쓴 것이다. 셰익스피어와 괴테의 영향을 받은 극본이었다. 이 극본은 WWV 1(Wagner-Werke-Verzeichnes 1)로서 기록에 남아 있다. 바그너는 이 극본에 음악을 붙이고 싶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설득하여 음악공부를 하는 허락을 받았다. 위대한 작곡가의 탄생을 알리는 시작이었다. 바그너의 어머니는 바그너가 음악가가 되는데에 크게 도움은 주지 못했지만 최소한 방해는 하지 않았다.
○ 요한네스 브람스의 어머니 크리스티아네
브람스의 어머니 크리스티아네
브람스는 1833년에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한 야콥(Johann Jakob Brahms: 1802-1872)은 독일 북단 덴마크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홀슈타인의 하이데 마을의 잡화점에서 일했다. 브람스의 할아버지와 증조 할아버지는 목수일, 마차바귀 수선일, 장사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요한 야콥은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음악가가 희망이었다. 요한 야콥은 3년간의 도제 기간을 끝내고 19세 때에 음악가로서의 직장을 찾기 위해 함부르크로 갔다. 요한 야콥은 여러가지 악기를 연주할수 있었는데 특히 잘 연주하는 악기는 혼과 더블베이스였다. 그는 처음에는 댄스홀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함부르크 야경대에서 나팔 부는 일도 했다. 요한 야콥은 24세가 되던 때에 자기보다 17년이나 연상인 요한나 헨리카 크리스티아네 니센(Johanna Henrika Christiane Nissen)이라는 재봉사와 결혼했다. 크리스티아네는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크리스티아네는 13세 때부터 바느질과 재봉 일을 했으며 나중에는 의상실의 매니저 비슷한 일을 했다. 요한 야콥은 크리스티아네의 집의 방 하나에 세를 들어 지내고 있었다가 크리스티아네와 좋아지내게 되어 결국 1830년에 결혼했다. 요한 야콥은 그해에 함부르크 군악대의 혼 연주자로 임명되었다. 그후 요한 야콥은 함부르크 시립극장(슈타트테아터)의 더블 베이스 연주자가 되었고 이어 함부르크 교향악단의 더블 베이스 연주자가 되었다.
1831년에 브람스의 누이 엘지가 태어났고 다음으로 1833년에 요한네스 브람스가 태어났으며 1835년에는 동생 프리드리히(프리츠)가 태어났다. 프리츠는 피아니스트가 되었지만 형 요한네스 브람스의 그늘에 가려서 이름을 떨치지 못했다. 프리츠는 30세가 넘어서 남미 카라카스로 가서 활동하다가 몇년 후에 함부르크로 돌아와 교사가 되었다. 크리스티아네는 착실한 어머니였다. 비록 음악적 소양이 전혀 없는 어머니였지만 아들 브람스와 프리츠의 음악적 재능을 보고 일찍부터 음악 공부를 시켰다. 다행히 요한 야콥과 크리스티아네가 열심히 노력해서 살림이 점점 나아졌고 집도 더 나은 곳으로 이사하였다. 어린 브람스는 어머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만일 크리스티아네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음악가로서의 길을 걷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요한 야콥과 크리스티아네의 결혼생활은 34년이나 지속되다가 1864년에 이혼하였다. 아마도 요한 야콥이 한눈을 팔았던 것 같았다. 크리스티아네는 이혼한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브람스가 33세 때에 아버지 요한 야콥은 재혼하였다.
○ 피터 일리이치 차이코브스키의 어머니 알렉산드라
차이코브스키의 어머니 알렉산드라. 젊은 시절
표트르 일리이치 차이코브스키(Pyotr Ilich Tchaikovsky: 1840-1893)의 어머니 알렉산드로 안드레예비치 다시에르(Alexandro Andreyevich d'Assier)는 차이코브스키의 아버지 일리야 페트로비치 차이코브스키(Iliya Petrovich Tchaikovsky)보다 18년 아래로서 아버지 일리야의 세 부인 중에서 두번째였다. 차이코브스키의 집안은 대대로 군인 집안이었다. 할아버지는 군의관 보조로 군생활을 마치고 비아트키 지방의 글라조프(Glazov)의 시장을 역임한 사람이다. 차이코브스키의 아버지 일리야는 공병대 중령으로 제정러시아 광산부에 소속되어서 캄스코 보트킨스크(Kamsko-Votkinsk) 철공소를 관리했다. 그래서 차이코브스키는 보트킨스크에서 태어났다. 보트킨스크는 오늘날 우드무르티아(Udmurtia)에 속한 작은 마을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로부터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 살려면 음악을 비롯한 예술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다. 적막한 시골에서 그나마 모여서 나눌수 있는 대화의 제목이 되고 또는 작은 음악회를 통해서 문화생활과 사교를 겸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차이코브스키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음악에 대하여 어느정도 지식이 있었고 특히 어머니 알렉산드라는 피아노도 칠줄 아는 인텔리겐챠였다. 차이코브스키는 어릴 때부터 음악에 대한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다. 어머니는 아들 차이코브스키의 재능을 유심히 보고 다섯살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도록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다. 차이코브스키를 법률학교에 보내어 나중에 공무원이 되도록 할 생각이었다. 어머니는 차이코브스키에게 다정한 존재였지만 아버지는 무섭기만 한 존재였다.
차이코브스키는 아버지의 주장대로 고작 열살 때에 집을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법률학교에 들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입학은 12살 부터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대신 2년 동안 먼 곳에 있는 기숙사 생활을 하고 그런 후에 열두살이 되면 입학을 허가한다는 것이었다. 기숙사는 차이코브스키의 집에서부터 계산하면 1,300 km 떨어진 아주 먼곳에 있다. 어린 차이코브스키는 기숙사에 있으면서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어머니와 떨어져서 살게 된 것이 큰 이유였다. 그런 정신적 공황이 차이코브스키의 평생을 짓눌렀다. 그가 1854년에 콜레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그런 정신적인 외로움은 씻지 못하였다. 그의 작품마다에는 그런 그리움과 외로움이 샅샅이 배어 있다. 하나만 예를 들어보면 그의 피아노곡인 None but the lonely heart 이다. 말할수 없는 그리움과 외로움이 가슴을 저미는 듯 배어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잘 아는 대로 차이코브스키는 법율 공부를 포기하고 작곡가가 되었다.
차이코브스키는 평생에 세 여인과 인연이 있었다. 어머니와 어린시절 프랑스인 가정교사였던 패니 뒤르바흐(Fanny Dürbach)는 제외하고 새로운 세 여인이다. 첫째는 벨기에 출신의 소프라노 데지레 아르퇴트(Desiree Artot)이다. 차이코브스키는 28세의 한창 시절인 1868년에 상트페페르부르크를 방문한 데지레를 만나서 사랑하게 된다. 차이코브스키와 데지레를 약혼을 하고 결혼을 앞두게 되었다. 그러는데 데지레가 무대를 떠날수 없고 더구나 러시아에 와서 살수 없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결국 두사람의 결혼은 없던 일이 되었다. 두번째 여인은 과거에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제자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Antonina Miliukova)였다. 안토니나가 결혼해 주지 않으면 죽겠다고 하는 바람에 결혼했지만 결국 성격차이로 두달 반 만에 헤어졌다. 일설에는 차이코브스키가 호모이기 때문에 비록 결혼은 했어도 결혼생활을 유지할수 없어서 헤어졌다는 얘기도 있다. 세번째 여인은 마음으로만 연모했던 여인이다. 철도재벌의 미망인인 나데츠다 폰 메크() 부인이다. 차이코브스키를 무려 13년 동안이나 생활비를 도와주는 등 재정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편지는 어느새 연모의 정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편지만 왕래 했을 뿐 단 한번도 만난 일이 없다. 아무튼 그러다가 어느날 소문도 없이 메크 부인이 연락을 끊었다. 아마 재혼했는지도 모르며 또한 차이코브스키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을 듣고 실망하여서 관계를 끊었는지도 모른다. 차이코브스키는 1893년 10월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의 교향곡 6번 '비창'의 초연을 지휘하고 나서 9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얘기로는 동네 식당에서 끓이지 않은 물을 마시는 바람에 콜레라에 걸려 결국 사망했다고 하지만 혹자들은 자살했다는 주장을 했다. 차이코브스키가 가장 사렁했던 어머니 마리는 차이코브스키가 14살 때에 역시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다. 차이코브스키는 어머니를 추모하여서 왈츠를 작곡했다. 그의 첫번재 작품이었다.
○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어머니 페트로브나
라흐마니노프의 어린 시절. 노브고르드에서 부모님과 함께
후기 낭만주의 시기의 러시아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v: 1873-1943)의 선조들은 볼가강에 면한 타타르의 카잔(Kazan)에서 살았다. 그러므로 라흐마니노프에게는 타타르의 피가 흐른다고 볼수 있다. 혹자는 라흐마니노프의 선조들이 루마니아 타타르였다고 말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박약하다. 라흐마니노프가 태어난 곳은 러시아 서북지방인 노브고라드(Novgorad)이다. 라흐마니노프의 집안은 대대로 러시아 귀족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부유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라흐마니노프의 아버지인 바실리 아르카예비치 라흐마니노프(Vasily Arkadyevich Rachmaninov: 1841-1916)가 부유한 가문의 류보프 페트로브나 부타코바(Lyubov Petrovna Butakova: 1853-1929)와 결혼하는 바람에 생활이 훨씬 나아졌다. 페트로브나는 결혼 지참금으로 다섯 개의 농장(에스테이트)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라흐마니노프의 아버지는 제정러시아군의 장교였고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다. 어머니는 부유한 장군의 딸로서 지성적인 여자였다. 두 사람은 결혼으로 3남 3녀를 두었다. 그중에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네번째 자녀였다. 라흐마니노프의 어머니는 남편이 피아노를 잘 쳤기도 했지만 자기도 음악을 애호하여서 어린 라흐마니노프를 네설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도록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여서 아이들을 교회에 갈 일이 있으면 빠짐없이 데려가서 미사에 참석토록 했다. 어린 라흐마니노프는 교회에서 한번 들은 음악을 암기해서 집으로 돌아와서 하나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피아노로 연주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어머니는 라흐마니노프에게 좋은 선생을 주선해 주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안나 오르나츠카야라는 피아노 선생을 일부러 초빙하였다. 훗날 라흐마니노프는 노래곡인 '샘물'(Spring Waters)을 오르나츠카야 선생에게 헌정하였다.
라흐마니노프가 아홉살 때인 1882년, 아버지는 빚이 산떠미 같아 파산지경에 이르자 소유하고 있던 다섯개의 농장 중에서 네개를 경매를 통해 매각하였다. 가족들은 노브고라드를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와서 작은 집에서 지내야 했다. 나중에 라흐마니노프는 아버지에 대하여 '낭비자, 도박 중독자, 병적인 거짓말장이, 치마만 둘렀다고 하면 쫓아다니는 바람둥이(Skirt chaser)'라면서 비난을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라흐마니노프는 10세 때인 1883년 피아노 선생의 적극적인 권유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음악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집안에 불행한 일이 생겼다. 누이 소피아가 장질부사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와 합의하여 집을 떠났다. 아버지는 모스크바로 갔다. 외할머니가 와서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도왔다. 외할머니는 라흐마니노프를 꼬박꼬박 정교회에 데리고 갔다. 라흐마니노프는 정교회의 전례음악을 몸에 배도록 들었다. 타종 음악도 들었다. 라흐마니노프는 나중에 그의 작품에 정교회의 전례음악과 타종 음악을 종종 인용하였다. 1885년에는 누이 옐레나가 18세의 나이로 악성빈혈증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 옐레나는 볼쇼이 극단과 발레단에서 연수중이었다. 옐레나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라흐마니노프에게 차이코브스키의 음악을 처음 알게 해 준 것도 옐레나였다. 어머니는 라흐마니노프가 상트페르트부르크음악원에서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자 모스크바음악원으로 옮기도록 했다.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은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을 간혹 연주해 주었다. 1904년부터 2년 동안은 볼쇼이의 지휘자로 있었다. 이제 음악가로서 라흐마니노프의 이름은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는 중에 세월은 흘러서 1916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 혁명으로 귀족신분에 위협을 느끼자 러시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1917년 12월 라흐마니노프와 나머지 가족들은 썰매를 타고 러시아를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처음에는 스톡홀름으로 갔었다. 그리고 마침내 1918년 11월에 오슬로에서 배를 타고 뉴욕으로 떠났다.
○ 프란츠 리스트의 어머니 안나
리스트의 어머니 안나와 아버지 아담
프란츠 리스트의 어머니 마리아 안나 라거(Maria Anna Lager: 1788-1866)는 오스트리아의 크렘스 안 데어 도나우(Krems an der Donau)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니더 외스터라이히주에 있는 마을이다. 안나의 아버지인 마티아스 라거는 크렘스에서 이름난 제빵장인(Bäckermeister)이었다. 안나가 여덟살 쯤 되었을 때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더니 그로부터 반년 후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천애고아가 된 안나는 나이가 들어서 하녀로 일하기 전까지 비엔나에 있는 친척 집이나 아는 사람의 집을 전전하며 지냈다. 안나는 오스트리아 동쪽, 헝가리와의 국경에서 가까운 마터스도르프(Mattersdorf)로 가게 되었고 이곳에서 1810년에 에스터하지 영지를 관리하는 게오르그 아담 리스트(Georg Adam List)의 아들 아담 리스트(Adam List: 1776-1827)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아담 리스트는 에델스탈에서 지내고 있다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마터스도르프를 방문했었다. 아담 리스트와 마리아 안나 라거는 이듬해인 1811년 1월 11일에 운터프라우엔하이트(Unterfrauenheid)에서 결혼했다. 아담 리스트가 지내던 에델스탈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헝가리 왕국에 속한 지역으로 오늘날의 네메스뵐기(Nemesvölgy)이다. 리스트의 성은 원래 List 였으나 리스트의 아버지 아담이 헝가리식으로 Liszt로 고쳐 쓰기 시작했다. 리스트의 선조들은 독일계, 슬라브계, 마쟈르계가 혼합된 복잡한 혈통이었다. 리스트의 선조들은 마르츠(Marcz: 당시 헝가리 왕국, 오늘날은 오스트리아의 부르겐란트 ), 마터스도르프(Mattersdorf: 오늘날의 Nagymarton), 말라카(Malacka: 현재는 슬로바키아의 Malacky) 등지에서 살았고 아담은 안나와 결혼한 후 헝가리 왕국의 도보르얀(Doborjàn)에서 살았으니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부르겐란트에 속한 라이딩(Raiding)이다. 프란츠 리스트는 라이딩에서 태어났다. 리스트의 할아버지 게오르그 아담은 에스터하지 공자인 헝가리의 니콜라스 2세에게 봉사하는 가신이었다. 리스트의 할아버지 게오르그 아담과 리스트의 아버지인 아담은 모두 헝가리 시민이었다.
리스트가 위대한 음악가로 성장하는 데에는 어머니 안나의 보이지 않는 노력도 컸지만 아버지 아담의 적극적인 후원이 큰 영향을 주었다. 리스트의 아버지는 마치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 처럼 어린 리스트를 데리고 유럽의 여러 곳을 순회하며 연주를 하여 리스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프랑스에 정착하여서 리스트가 정상의 음악가로 성장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리스트의 아버지 아담은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기타를 잘 연주하는 재능있는 사람이었다. 그도 역시 그의 아버지 게오르그처럼 에스터하지 공자인 니콜라우스 2세에게 봉사하다가 리스트의 음악적 재능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리스트를 데리고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로 갔다. 아담은 비엔나에서 하이든, 훔멜, 베토벤 등과 개인적으로 친분을 가지며 지냈다. 아담은 아들 리스트에게 일곱살 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쳤다. 작곡에도 재능을 보인 리스트는 여덟살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다. 리스트는 아홉살 때에 소프론과 프레스부르크(현재는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에서 피아노 연주회를 가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프레스부르크에서의 연주회 후에 부유한 귀족들이 리스트가 비엔나에 가서 음악교육을 받는 것을 재정지원하겠다고 나섰다. 비엔나에서는 칼 체르니로부터 피아노를 정식으로 배웠다. 체르니는 베토벤의 제자였다. 작곡은 안토니오 살리에리로부터 배웠다. 그러는 중에 리스트가 15세 때에 아담이 파리 근교인 불로뉴 쉬르 메르(Boulogne-sur-Mer)에서 장질부사로 1827년에 세상을 떠났다. 1827년은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해이기도 하다. 리스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크게 낙담하여 한때 수도원에 들어가서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머니 안나가 파리에 와서 함께 지내게 되어 마음이 안정되고 더욱 피아노와 작곡에 전념할수 있었다. 리스트에게 있어서 안나는 어머니 이상의 존재였다. 안나는 186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파리에서 지냈다. 향년 78세였다. 리스트와 마루 다구 백작부인의 관계가 소원해지자 이들의 세 자녀는 파리로 와서 모두 어머니 안나와 함께 지냈다. 리스트가 여러 곳으로 연주여행을 다니면 어머니 안나가 아이들을 전적으로 돌보았다. 리스트는 생활비만 보내주면 되었다. 안나와 함께 지낸 리스트의 자녀들 중에서 큰 딸인 코지마는 나중에 바그너와 결혼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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