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시작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노래

정준극 2017. 5. 16. 09:59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노래

작곡가가 아내 또는 연인에게 헌정한 작품들

 

위대한 작곡가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에게 영감을 주어서 위대한 작품을 창조하게 했다면 더구나 영광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사랑했던 여인과의 사랑이 결실을 맺었다면 축복을 받을 일이지만 슬픔과 번민만 남겨주고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도 더러 있다. 어떤 경우가 되었던지 위대한 작곡가가 사랑했던 여인을 위해 특별히 작품을 헌정한 경우를 살펴본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는 사촌이 되는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Maria Barbara Bach: 1684-1720)와 결혼하였다. 사촌이라고 하지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당숙인 요한 미하엘 바흐의 딸이므로 촌수로는 6촌간이다. , 바흐의 할아버지의 형의 아들의 딸이다. 그러므로 바흐의 당숙인 요한 미하엘 바흐는 바흐에게 장인이기도 하다. 아무튼 바흐 가계의 족보는 대단히 복잡하여서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으므로 심각한 주의가 필요하다. 바흐와 마리아 바르바라는 1706년에 결혼했다. 바흐는 1720년에 주군인 레오폴드 공자를 수행하여서 칼스바드 온천장에 가서 두 달 동안 지낸 일이 있다. 바흐가 칼스바드에서 괴텐으로 돌아와 보니 라이프치히로부터 부인인 마리아 바르바라가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나서 장례까지 마쳤다는 소식이 와 있었다. 마리아 바르바라는 그때 35세였다. 불의에 아내를 잃은 바흐는 기념으로 샤콘느를 작곡했다. 솔로 바이올린을 위한 D 단주 파르티타의 5악장과 마지막 6악장이다. 이 샤콘느는 지금까지도 기악작품 중에서 가장 심오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샤콘느는 스페인 기원의 오래된 춤곡을 3박자의 변주곡으로 만든 것이다.

 

  anna magdalena bach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마리아 바르바라, 그리고 안나 마그달레나 바흐


레오폴드 공자의 쾨텐궁에서 음악감독으로 지내고 있던 바흐는 쾨텐궁에서 소프라노로 활동하고 있는 안나 마그달레나 비케(Anna Magdalena Wicke)를 알게 되어 마리아 바르바라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72112월에 안나 마그달레나와 재혼하였다. 바흐는 첫 번째 부인인 마리아 바르바라에게서 7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4명이 생존하였고 안나 마그달레나와의 사이에서는 13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에서 6명이 어른으로 생존하였다. 소프라노였던 안나 마그델레나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서 바흐의 작곡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안나 마그달레나는 특히 바흐의 카피스트로 활동했고 바흐의 작품들이 후세에 전파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바흐는 수많은 작품을 안나 마그달레나를 위해 작곡하고 헌정하였다. 그렇게 헌정한 작품들을 한데 모은 것이 Notenbüchlein für Anna Magdalena Bach(안나 마그달레나 바흐를 위한 노트북)이다. 바흐의 노트북은 두 개다. 하나는 1722년에 만든 것으로 프렌치 모음곡 등 8곡이 들어 있다. 두 번째는 1742년에 완성한 것으로 무려 42곡이 들어 있는 노트북이다. 키보드 음악, 미뉴에트, 론도, 폴로네스, 소나타, 뮤제트, 행진곡, 가보트 등으로 되어 있는 키보드 음악이다. 그리고 몇 개의 성악곡도 포함되어 있다. 작곡가의 아내로서 이처럼 많은 작품을 헌정 받은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의 부인인 콘스탄체(Constanze)는 사실 전문 성악가이며 작곡에도 관심이 깊었던 여인이었다. 그래서 모차르트와 결혼한 후에 모차르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본다. 모차르트의 ‘C 단조 대미사’(Great Mass in C minor)는 소프라노 솔로가 특별한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특히 첫 번째 곡인 키리에에서 소프라노 솔로인 Christi eleison, 또는 소프라노 아리아인 Et incarnatus est가 그러하다. 모차르트는 ‘C 단조 대미사를 콘스탄체를 염두에 두고 작곡했다. 실제로 콘스탄체는 1783년 잘츠부르크에서 ‘C 단조 대미사가 초연될 때에 소프라노 솔로를 맡았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1782년 비엔나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


모차르트가 콘스탄체와 한창 결혼 준비를 하고 있던 때에 모차르트는 황실도서관장인 고트브리트 반 슈비텐 남작의 부탁으로 그가 소장하고 있던 바흐와 헨델의 악보들을 정리하는 일을 맡아 했었다. 모차르트는 바흐의 헨델의 작품들을 보고 대단히 감동했다. 그래서 자기도 바로크 스타일의 작품들을 작곡하기로 작정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모차르트가 바로크 작품을 작곡할 때에 콘스탄체가 상당한 의견을 주었다. 실제로 그때 콘스탄체는 바로크 대위법 작품을 대단히 좋아했었다. 모차르트가 콘스탄체의 의견을 들어서 작곡한 바로크 음악 중 대표적인 것은 환상곡과 푸가’(K 394)이다. 모차르트는 그의 누이 난네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환상곡과 푸가가 세상에 나오게 된 진짜 이유는 콘스탄체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매주 일요일마다 슈비텐 남작의 집에 가서 바흐와 헨델의 악보들을 가지고 집에 와서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콘스탄체가 이들의 바로크 악보를 보고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콘스탄체가 좋아하기 때문에 환상곡과 푸가를 작곡했습니다.’라고 썼다. 모차르트의 바로크 스타일은 ‘C 단조 대미사에서도, 마지막 교향곡인 교향곡 41번의 마지막 악장에서도, 오페라 마술피리에서도 찾아 볼수 있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생전에 여러 여인들을 사랑했고 그 중에서 몇몇은 결혼까지 생각했었다. 헝가리 출신의 요제피네 폰 브룬스비크(Josephine von Brunsvik: 1779-1821) 백작부인은 아마도 베토벤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여인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베토벤은 요제피네에게 최소한 15통 이상의 사랑의 편지를 보냈는데 이들 편지에서 베토벤은 요제피네를 오직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영원히 헌신하는 사람으로부터’ ‘영원히 충실한 사람으로부터등의 표현을 했다. 베토벤은 1812년에 불멸의 연인에게’(The Immortal Beloved)라는 제목으로 편지를 쓴 것이 있다. 사람들은 오래도록 그 불멸의 연인이 누구인지 밝히고 싶어 했다. 근자의 주장에 의하면 요제피네 폰 브룬스비크가 베토벤이 말하는 불멸의 연인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베토벤은 그만큼 요제피네를 사랑했다고 생각된다. 베토벤이 작곡한 가곡 An die Hoffnung(희망에)와 피아노 작품인 Andante favori in F major(F 장조 안단테 화보리)도 실은 요제피네를 위해 작곡한 것이라고 한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과 요제피네 폰 브룬스비크


요제피나는 동생 테레제와 함께 1799, 20세의 사랑스런 나이에 비엔나에 왔다. 베토벤이 두 자매의 피아노 레슨 선생이 되었다. 그로부터 베토벤은 요제피네에게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요제피네도 이 위대한 작곡가이며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베토벤에게 연애의 감정을 가졌지만 아무래도 사회적인 신분과 품위가 차이가 나서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요제피네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는 나이 많은 요제프 다임 백작이었다. 베토벤의 상심은 컸지만 어찌 할수 없었다. 다임 백작이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자 베토벤은 다시 한번 요제피네에게 접근하였다. 베토벤과 요제피네는 사람들이 보기에 조금 지나칠 정도로 자주 만나고 친하게 지냈다. 이 기간에 베토벤은 오페라 레오노레’(나중에 피델리오라고 변경)의 환희에 넘친 마지막 파트를 작곡하고 있었다. 사랑의 힘과 성실한 부인의 정절을 찬양하는 작품이다. 베토벤의 중기 작품 중에서 가장 격정적인 소나타라고 하는 Appassionata(열정)소나타도 이 기간에 작곡한 것이다. 베토벤은 열정 소나타를 언제나 자기를 지지하였던 요제피네의 동생 프란츠 폰 브룬스비크 백작에게 헌정하였다. 요제피네는 1810년에 에스토니아 출신의 크리스토프 폰 슈타켈버그 남작과 재혼하였다. 하지만 불행한 재혼이었다.

 

베토벤은 한 때 그의 피아노 제자였던 테레제 말파티(Therese Malfatti: 1792-1851)를 깊이 사랑해서 청혼까지 하였으나 테레제는 받아들이지 않아서 베토벤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테레제는 베토벤보다 22세 연하였다. 청혼이 거절 당한 베토벤의 상심은 대단히 컸었다. 베토벤이 1810년에 테레제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를 보면 그가 얼마나 실연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편지에는 잘 있어요, 사랑하는 테레제, 그대에게 앞으로 좋은 일과 아름다운 일만 생기기를 바랍니다. 나를 잊지 말아 주세요. 어떤 누구도 나만큼 그대의 밝은 행복을 기원하는 사람을 없을 것입니다. 그대가 관심을 두던 안 두던 말입니다. 당신에게 헌신하는 충실한 친구인 베토벤으로부터라고 적혀 있었다. 베토벤의 유명한 바가텔레(Bagatelle) 25A 단조로서 일명 엘리제를 위하여’(Für Elise)는 베토벤이 테레제 말파티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바가텔레 25번은 원래 테레제를 위해서라는 제목이었지만 훗날 악보를 출판하는 사람들이 테레제를 엘리제로 잘못 읽어서 엘리제를 위해서라는 제목이 붙었다는 얘기다. ‘엘리제를 위하여의 첫 악보는 테레제의 개인 서류 묶음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테레제 말파티는 베토벤이 보낸 바가텔레를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테레제 말파티는 오스트리아의 귀족인 빌헬름 폰 드로스디크 남작과 결혼해서 테레제 폰 드로스디크(Therese von Drossdik) 남작부인의 호칭으로 지냈다.

 

그런데 베토벤에게는 엘리제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었다. 엘리제의 원래 이름은 엘리자베트였으나 간단히 엘리제라고 불렀다. 엘리자베트는 독일 출신의 소프라노인 엘리자베트 로켈(Elisabeth Rockel)을 말한다. 음악학자들은 베토벤이 바가텔레 25번을 엘리자베트 로켈에게 헌정했다고 주장했다. 음악학자들은 오리지널 악보에 베토벤이 친필로 Für Elise am 27 April zur Erinnering von L. V. BTHVN 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엘리제는 테레제 말파티가 아니라 엘리자베트 로켈이 분명하다는 주장이었다. 소프라노 엘리자베트 로켈은 유명한 작곡가인 요한 네포무크 훔멜(Johann Nepomuk Hummel)의 부인이었다. 훔멜 부부는 비엔나에서 베토벤과 가깝게 지냈다. 훔멜 부부는 베토벤이 말년에 병상에 누워 있을 때에 그를 찾아가서 위로해 주었고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베토벤의 머리칼 한 줌을 잘라서 평소 우정의 기념으로 간직해 왔다. 훔멜이 간직하고 있었던 베토벤의 머리칼 한 줌은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지 100년도 지난 1934년에 훔멜의 후손이 우연히 발견하여 현재는 미국 산호세 주립대학교의 베토벤 센터에 전시되어 있다. 베토벤이 바가텔레 25번을 사랑해서 청혼까지 했던 테레제 말파티에게 헌정했는지 또는 오랜 우정으로 지냈던 훔멜의 부인 엘리자베트 로켈에게 헌정했는지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바가텔레는 글자그대로 풀이하면 소박한 짧은 기악곡이지만 일반적으로 간단하고 가벼우며 즐거운 내용의 피아노 소품을 말한다.)

 

 

조아키노 로시니와 이사벨라 콜브란


조아키노 로시니(Gioacchino Rossini)는 19세기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오페라 작곡가였다. 로시니는 37세에 더 이상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그후 38년 동안 유유자적하며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로시니는 그때까지 모두 39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19세기에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정상에 있는 오페라 극장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그래서인지 산 카를로는 언제나 정상의 성악가들과 정상의 작곡가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곳이 되었다. 19세기 초반에 산 카를로의 프리마 돈나는 스페인 출신의 이사벨라 콜브란(Isabella Colbran: 1785-1845)이었다. 당시 산 카를로의 임프레사리오는 도메니코 바르바이아라는 사람이었는데 이사벨라는 그의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오페라 공연에서 임프레사리오의 파워는 막강하기 때문에 성악가들, 특히 프리마 돈나가 되고 싶어 하는 소프라노들은 임프레사리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난리도 아니었는데 아마 이사벨라도 그런 소프라노였던 모양이었다. 바르바이아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던 로시니에게 산 카를로의 이사벨라 콜브란을 위해서 몇 편이든지 좋으니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고 요청했다. 로시니는 이사벨라를 염두에 두고 오페라를 작곡했고 그렇게 해서 이사벨라는 바르바이아를 떠나 로시니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그러나 산 카를로의 오페라가 히트를 계속하게 된 것은 이사벨라 때문이 아니라 로시니의 음악이 그야말로 뛰어나서였음을 잊으면 안될 것이다. 아무튼 이사벨라는 로시니 덕분에 1815년경에는 이탈리아 최고 인기의 소프라노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로시니는 이사벨라를 위해서 영국여왕 엘리사베타’(Elisabetta, Regina d’Inghilterra)를 작곡했다. 로시니의 오텔로’(Otello 또는 Il Moro di Venezia)에서는 이사벨라가 데스데모나를 불렀다. 결국 두 사람은 1822년 오페라로 맺어진 부부가 되었다. 결혼 이후에도 로시니는 이사벨라를 위해서 아르미다’(Armida), ‘이집트의 모세’(Mose in Egitto), ‘리키아르도와 초라이데’(Ricciardo e Zoraide), ‘에르미오네’(Ermione), ‘호수의 여인’(La donna del lago), ‘마오메토 2’(Maometto Segundo), ‘첼미라’(Zelmira) 등을 작곡했다. 이사벨라가 이 모든 오페라에서 프리마 돈나로 등장했던 것은 물론이다. 오페라의 역사에서 이만한 영광을 누린 소프라노는 아마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엑토르 베를리오즈와 해리엣 스미드슨(앙리에트)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869)는 격정적인 성품 때문인지 여러 번에 걸친 연애행각은 뭇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화제였다. 그러는 중에 1827, 그가 24세 때에 파리의 오데옹극장에서 아일랜드 출신의 여배우인 해리엣 스미드슨(Harriet Smithson: 1800-1854)이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오펠리아를,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을 맡아 열연하는 것을 보고 그만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사랑에 빠졌다. 그후 3년 동안 베를리오즈는 해리엣의 사랑을 얻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해리엣이 묵고 있는 호텔을 매일처럼 찾아가서 사랑을 호소하고 편지와 꽃바구니를 수없이 보냈다. 해리엣은 베를리오즈가 사랑의 받아 주지 않으면 너 죽고 나 살자라면서 협박조로 나오자 두려운 나머지 마침내 굴복하여 183310월 파리에 있는 영국대사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보다도 해리엣은 1830년에 베를리오즈가 자기를 위해 환상적 교향곡’(Symphonie Fantastique)을 작곡한 것을 알고는 크게 감동하여서 베를리오즈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런데 실상 베를리오즈의 환상적 교향곡은 해리엣이 영국 극단의 매니저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을 듣고 나서 격해진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작곡했다고 한다. 베를리오즈는 환상적 교향곡에서 자신을 실연으로 아편독을 마시고 자살을 시도하는 예술가로 그렸다. 하지만 예술가는 원래대로 치사량의 독을 마시지 않았고 대신에 마약으로 몽롱해진 상태에서 꿈을 꾸는 것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꿈에서 예술가가 사랑하는 여인을 죽이고 그에 대한 죄 값을 치루는 것으로 표현했다.

 

베를리오즈는 해리엣을 프랑스식으로 앙리에트라고 부렀다. 앙리에트는 베를리오즈의 오펠리아였다. 그러나 결혼 생활 11년 만인 1844년 두 사람은 이혼하였다. 성격이 맞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11년 후인 1855, 해리엣은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베를리오즈는 해리엣과 이혼한 직후부터 소프라노 마리 레치오(Marie Recio: 1814-1862)와 애인관계에 있었다. 마리 레치오는 특별히 뛰어난 소프라노는 아니었다. 오히려 재능이 없는 소프라노였다. 베를리오즈는 1843년에 독일 순회연주를 가게 되었다. 마리 레치오가 함께 가기를 원했으나 베를리오즈는 도무지 내키지 않아서 떼어놓고 떠났다. 왜냐하면 마리 레치오의 노래가 마치 고양이가 울부짓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베를리오즈는 마리 레치오를 떼어놓기 위해 별별 웃기지도 않는 소동을 벌여 몰래 떠났으나 역시 보통 내기가 아닌 마리 레치오는 탐정과 같은 재능으로 베를리오즈의 뒤를 추적하여 마침내 독일에서 만날 수 있었다. 마리 레치오는 자기를 일부러 떼어 놓고 떠난 베를리오즈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화를 냈다. 베를리오즈는 마리 레치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그가 이미 작곡한 연가곡 여름밤’(Les nuits d’ete)에 나오는 그대 없이’(Absence)를 오케스트라 편곡해서 마리 레치오에게 헌정했다. 아무튼 두 사람은 뜨거운 연인사이가 되었고 10년 동안을 그렇게 지내다가 195410월에 파리의 트리니티교회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마리 레치오는 1862, 향년 48세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주세페 베르디, 마르게리타 바레찌, 주세피나 스트레포니


오페라의 황제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은 고향인 부세토에서 어릴 때부터 자기를 후원해 준 안토니오 바레찌(Antonio Barezzi: 1787-1867)의 딸인 마르게리타(Margherita Barezzi: 1814-1840)와의 결혼이었다. 바레찌는 베르디의 아버지의 친구로서 부세토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이지만 아마추어 음악가로서 여러 활동을 하였다. 바레찌는 일찍부터 베르디의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것을 보고 어려운 형편의 베르디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바레찌는 베르디를 도와주는 방법의 하나로서 자기의 딸 마르게리타에게 피아노와 성악을 가르치도록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느덧 사랑이 싹텄다. 두 사람은 1831년에 약혼을 하였고 5년 후인 1836년에 결혼하였다. 베르디가 23세였고 마르게리타가 22세일 때였다. 이듬해에 두 사람 사이에서 딸이 태어났다. 비르지니아 마리아 루이지아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다음 해인 1838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해에 아들 일리치오 로마노가 태어났다. 하지만 역시 안타깝게도 그 다음 해인 183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마르게리타도 모진 병으로 184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에 베르디는 첫 번째 오페라인 오베르토를 작곡 중에 있었다. 베르디는 오페라 작곡가로서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마르게리타가 세상을 떠난 것을 마음속으로 못내 슬퍼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장인인 바레찌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 해서든지 표현하고 싶었다. 베르디는 마르게리타가 세상을 떠난지 6년 후인 1846년에 오페라 막베스를 완성했다. ‘막베스는 베르디가 중병을 앓고 난 후에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여서 완성한 작품이었다. 베르디가 중병을 앓자 사람들은 베르디가 죽을지도 모른다면서 크게 걱정하기까지 했었다. 베르디는 막베스를 바레찌에게 헌정하였다. 베르디는 바레찌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저는 오래전부터 당신에게 오페라 한 편을 헌정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나의 아버지였습니다. 당신은 나의 후원자였고 나의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것은 나의 의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사정으로 지금까지 그 의무를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당신에게 막베스를 보냅니다. 제가 다른 어느 오페라보다도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작품입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헌정하는 것을 보람 있게 생각합니다.’라고 썼다.

 

베르디의 두 번째 결혼은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Giuseppina Strepponi: 1815-1897)와의 결혼이었다. 베르디는 주세피나와 12년 동안 동거하다가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다. 사실 베르디는 마르게리타가 안타깝게 2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크게 상심하여서 다시는 결혼하지 않고 지내기로 다짐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혼자 사는 것이 마땅치 않아서 평소부터 알고 지내던 주세피나와 함께 살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주위의 눈도 있고 해서 1859년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던 것이다. 그때 베르디는 46세였고 주세피나는 44세였다. 주세피나는 베르디와 결혼한 후 38년을 지내다가 1897년에 세상을 떠났고 베르디는 그보다 4년을 더 살다가 190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베르디는 주세피나에게 헌정한 작품이 사실상 하나도 없다. 다만, 1842년 밀라노에서의 나부코초연에서 주역인 아비가일을 주세피나가 맡았으며 이밖에도 베르디의 여러 오페라에 주역으로 출연한 일이 있을 뿐이다. 이듬해인 1843나부코는 파르마에서 공연을 가지게 되었다. 역시 아비가일은 주세피나가 맡았다. 베르디는 파르마에 가서 나부코의 공연을 돌보아 주게 되었다. ‘나부코의 파르마 공연은 베르디에게 있어서 여러 면에서 의미 있는 것이었다. 그 중의 하나는 베르디의 아버지 카를로가 오페라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은 아들 베르디의 오페라 공연을 처음으로 관람하였다는 것이었다. 베르디는 파르마 공연이 끝난 후 곧바로 밀라노로 갈 예정이었으나 어쩐 일인지 몇 주 동안을 파르마에 머물면서 지냈다. 사람들은 베르디가 주세피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느라고 파르마에 계속 머물렀었다고 말했다. 나중에 베르디는 사실 주세피나와의 관계는 1843년 파르마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털어 놓은바 있다.

 

사실 주세피나는 스캔들이 많은 여자였다. 파트너가 자주 바뀌었다. 알려진바로는 여러 번 임신했었으며 적어도 각각 아버지가 다른 세 아이들을 출산했다는 것이다. 그러는 중에 1846, 즉 그가 31세 때에 아무래도 그동안의 복잡한 사생활로 인하여 신체가 부실하게 되고 음성이 파괴되어 결국 무대에서 은퇴할 수 밖에 없었다. 주세피나는 파리로 가서 성악 레슨을 하면서 지냈다. 한편 베르디는 1847년에 런던에서 해적’(I masnadieri)의 공연이 있어서 영국에 갔다가 이듬해에 이탈리아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파리 오페라가 새로운 오페라를 의뢰했고 병까지 나서 이탈리아로 가지 못하고 파리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주세피나를 만나 함께 지내게 되었다. 2년 동안이나 파리에서 지냈던 베르디는 아무래도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1849년에 이번에는 아예 주세피나를 동반하고 고향 부세토로 돌아갔다.

 

부세토의 사람들은 아무리 베르디가 유명하더라도 주세피나와 결혼도 하지 않고 동거하는 것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거리에서나 교회에서나 어디서나 주세피나를 마치 더러운 창녀처럼 대하였다. 하지만 베르디는 그런 눈초리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쓰지 않았다. 작곡도 계속해야 했고 또한 산타가타(Sant’Agata)에 새로 매입한 부동산에 대한 관리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중에 주세피나가 아이를 출산했는데 정식 부부가 아닌 형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아이를 고아원에 맡겼다느니 또는 아예 길에 버렸다는 하는 좋지 않은 소문이 있었다. 베르디의 부모가 주세피나를 차갑게 대하였던 주된 이유 중의 하나였다. 마침내 베르디는 18511월에 부모와의 인연을 끊었다. 그리고 부모를 산타가타 집에서 나가도록 하고 다른 집을 구해 주었다. 이처럼 가정문제가 복잡하던 시기에(1849-1853) 베르디는 여섯 편의 오페라를 작곡하는 열심을 보여주었다. ‘레냐뇨 전투’ ‘루이자 밀러’ ‘슈티펠리오’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였다. 그런데 이 모든 오페라의 여주인공들은 따지고 보면 정절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타락한 생활로 인하여 사회와 가정에서 버림받은 여인들이었다. 어떤 심리학자는 이같은 현상에 대하여 아마 베르디가 주세피나에 대한 연민과 떳떳하지 못한 열정으로 그런 주제를 택한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베르디와 주세피나는 18515월에 산타가타의 집으로 들어가 정착했다. 그리고 그 달에 베니스의 라 페니체는 베르디에게 라 트라비아타를 의뢰했다. 베르디는 이제 더 이상 작곡에 매달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가 생겨서 은퇴하고 싶으면 해도 되었다. 그러한 때에 로마 오페라가 베르디에게 새로운 오페라의 작곡을 부탁했다. 다만, 이번에는 베르디 마음대로 주제를 택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래서 태어난 것이 일 트로바토레였다. ‘일 트로바토레는 베르디가 스스로 스토리를 택한 첫 번째 오페라였다. 그러는데 자기를 끔찍이 사랑했던 어머니가 6월에 세상을 떠났다. 베르디는 어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일 트로바토레의 작곡에 착수했다. ‘일 트로바토레는 베르디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여서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오페라에서는 아주체나)에게 초점을 맞춘 작품이었다. 베르디는 1839년부터 1856년까지 22편의 오페라를 완성했다. 주세피나가 베르디의 작품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주세피나는 베르디의 오페라가 공연되는 곳에는 당연히 베르디와 함께 참석했다. 18593월에 두 사람은 여러 곳을 여행한 후에 다시 산타가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두어 달 후에는 다시 프랑스를 여행하게 되었다. 이제 두 사람은 10년이 넘는 동거생활을 마무리하고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은 프랑스에서 피에드몽에 속한 작은 마을인 콜롱즈 수 살레브(Collonges-sous-Salève)에 머물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이 마을에 있는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859829일이었다. 두 사람이 타고 온 마차의 마부와 교회의 종치기가 증인이었다.

    

 

리하르트 바그너와 코지마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8)18691225일에 두 번째 부인인 코지마 리스트(Cosima Liszt: 1837-1930)에게 실내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시인 지그프리트 전원곡’(Siegfried Idyll)을 생일선물로 헌정했다. (코지마의 이름을 코지마 리스트라고 부른 것은 그가 아직 바그너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지마는 1869년에 바그너와의 사이에서 태어나는 셋째 자녀이며 유일한 아들인 지그프리트를 낳아서 바그너에게 감격을 안겨 주었는데 지그프리트가 태어난 후 처음 맞는 코지마의 생일이었다. 코지마의 생일은 1224일인데 통상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1225일에 함께 기념하였다. 이때 바그너와 코지마는 스위스의 트리브센(Tribschen)에 있는 빌라에 머물고 있었다. 트리브센은 오늘날 스위스 루체른에 속한 곳이다. 바그너는 코지마의 생일선물인 지그프리트 전원곡의 연주를 위해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의 멤버들로 구성된 소규모 앙상블을 빌라로 초청하였다. 유명한 지휘자인 한스 리히터(Hans Richter)도 앙상블의 멤버로서 트럼펫을 불었다. 코지마는 앙상블이 연주하는 오프닝 멜로디를 듣고 잠을 깨어 일어났다고 한다. 이 곡의 원래 제목은 매우 길다. Tribschen Idyll with Fidi’s birthsong and the orange sunrise, as symphonic birthday greeting. Presented to his Cosima by her Richard이다. Fidi는 아들 지그프리트를 식구들이 부르는 애칭이다. orange sunrise는 아침을 찬란하게 밝히는 태양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코지마를 뜻한다. 바그너는 1876년에 초연된 오페라 지그프리트지그프리트 전원곡의 주제음악을 포함하였다.

 

바그너의 여성 편력을 설명하자면 한이 없지만 여기서는 두 번째 부인인 코지마에 대하여만 간단히 설명코자 한다. 코지마는 로맨틱 음악의 거상(巨像)인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의 딸이다. 코지마는 20세 때인 1857년에 아버지 리스트의 제자인 한스 폰 뷜로브(Hans von Bülow: 1830-1894)와 결혼하였다. 폰 뷜로브는 바그너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리스트와 마찬가지로 바그너 음악의 챔피언이었다. 예술에 있어서 챔피언은 어떤 특정 예술가를 후원하고 보호하며 또한 그 예술가의 작품을 널리 전파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바그너는 코지마보다 20여년 전인 1836년에 민나 플라너라고 하는 여배우와 우여곡절 끝에 결혼해서 살고 있는 상태였다. 아무튼 바그너의 결혼생활도 순탄하지 못했지만 코지마의 결혼생활도 그다지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중 바그너와 코지마는 1863년 어느 날 함께 마차를 타고 여행을 한 일이 있다. 물론 두 사람은 전부터 알고 지냈지만 마차를 타고 가면서 두 사람은 마치 운명처럼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코지마는 바그너보다 24세 연하였고 더구나 코지마로 말하자면 바그너의 친구인 폰 뷜로브의 부인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바그너와 코지마가 남의 눈을 피해서 밀회를 거듭하고 있는 중인 1865년에 바그너의 충실한 친구인 폰 뷜로브는 오직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하여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역사적인 뮌헨 초연의 지휘를 맡기도 했다.

 

아무튼 바그너와 코지마는 서로 유부남, 유부녀이었지만 열심히 밀회를 하여서 딸을 둘이나 두게 되었다. 이졸데와 에바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공식으로 부부가 될수 없었다. 코지마의 남편인 폰 뷜로브가 이혼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며 마찬가지로 바그너의 부인인 민나도 비록 별거상태이지만 이혼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코지마는 가출하여서 바그너와 아예 동거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중에 바그너의 부인인 민나가 심장마비로 1866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제 바그너는 민나와의 이혼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몇 년 후인 1869년에는 아들 지그프리트가 태어났다. 폰 뷜로브로서도 코지마와 이혼하지 않고 버틸 자신도 없었고 명분도 부족했다. 결국 폰 뷜로브는 1870년 초반에 코지마와의 이혼을 승낙하였다. 그래서 바그너와 코지마는 스위스의 루체른에서 1870년에 결혼식을 올리고 정식 부부가 되었다.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클래식 음악의 역사에서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과 클라라(Clara Schumann: 1819-1896)의 사랑만큼 순애보적인 것도 찾아 보기 힘들 것이다. 슈만이 클라라를 처음 본 것은 클라라가 여덟살 때였다. 그때 슈만은 17세의 청년이었다. 슈만은 어느 콘서트에서 어린 클라라가 피아노를 기가 막히게 연주하는 것을 보고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알아보았더니 클라라의 아버지로부터 배웠다는 것이었다. 클라라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비크는 라이프치히에서 명성이 높은 피아노 교사였다. 슈만은 헤르 비크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다. 그로부터 10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클라라는 18세의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했다. 슈만은 헤르 비크에게 클라라와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헤르 비크는 자기의 딸을 보잘 것 없는 피아니스트와 결혼시킬수 없다고 하면서 적극 반대했다. 헤르 비크는 슈만과 클라라가 만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두 사람은 어쩔수 없이 헤어져 있으면서 편지만을 왕래했을 뿐이었다. 슈만은 그가 작곡한 가곡이나 피아노 소품의 악보를 클라라에게 보내어 의견을 묻기도 했다. 슈만이 이 시기에 작곡한 작품들은 거의 모두 클라라의 의견이 반영된 것들이었다.

 

헤르 비크는 딸 클라라와 슈만이 계속 왕래하는 것을 알고는 클라라에게 재산상속을 하지 않겠다고 위협하였고 또한 클라라가 레슨 등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을 모두 압수했다. 이에 슈만과 클라라는 합심하여 헤르 비크의 처사가 부당하다는 소송을 제기했다. 2년이나 끌었던 소송은 결국 슈만의 승소로 끝이 났다. 그리하여 슈만과 클라라는 마침내 1840년에 결혼할 수 있었다. 결혼식은 클라라의 21번째 생일 바로 전날 거행되었다. 슈만은 클라라와의 기쁨에 넘친 결합을 축하하여서 클라라에서 결혼선물로 미르텐’(Myrthen)이라는 제목의 연가곡과 미르틀 꽃으로 만든 부케를 주었다. 미르틀(myrtle)은 도금양(桃金孃)이라는 꽃으로 영어로는 페리윙클(periwinkle)이라고도 부른다. 독일에서는 전통적으로 신부들이 오렌지 꽃으로 만든 화관을 머리에 쓴다. 슈만은 클라라가 그보다는 더 의미 있는 화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르텐을 만들었다. 미르텐은 상록수인 미르틀의 잎과 하얀 꽃으로 만든 화관이다. 미르텐은 그리스 신화에서 비너스를 상징하기도 한다. 연가곡인 미르텐에는 26곡이 들어 있다. 남자와 여자가 모든 역경을 헤치고 기쁨으로 사랑을 이루는 내용을 표현한 노래들이다. 슈만은 클라라와 결혼하여 16년을 지냈다. 두 사람은 그동안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다. 클라라는 슈만이 세상을 떠난 후 꼭 40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요한네스 브람스

 

브람스와 클라라의 40여년에 걸친 플라토닉한 사랑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클라라는 브람스보다 14년 연상이었다. 클라라는 젊은 브람스의 피아노 재능과 작곡 솜씨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브람스의 작품을 연주하며 널리 알리는 노력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 브람스는 슈만의 가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브람스는 클라라와 함께 슈만의 작품을 편집하고 교정하는 작업을 했다. 슈만이 정신질환으로 입원하게 되자 브람스는 클라라와 아이들을 생각해서 아예 슈만의 집으로 들어와 살면서 돌보아 주었다. 슈만이 1856년에 세상을 떠나자 클라라를 깊이 위로한 사람도 브람스였다. 브람스와 클라라가 어느덧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과연 사랑을 완성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브람스가 클라라를 지극히 사모하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서 슈만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인 1855년에 당시 21세의 청년인 브람스는 클라라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기의 솔직한 심정을 고백한 일이 있다. 브람스는 클라라에게 저는 오로지 당신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답니다...나를 어찌하여 이렇게 만들어 주셨습니까? , 당신이 나에게 던져 준 마법의 주술을 벗겨 주실수 없는지요?’라고 썼다. 아무튼 브람스와 클라라는 슈만이 세상을 떠난 후부터 더욱 친밀하게 지냈으며 그러한 관계는 클라라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거의 40년이나 지속되었다. 이 기간에 브람스는 클라라에게 카프리치오 1’(Capriccio No 1), Op 76을 헌정하였다. 로맨틱한 감정이 배어 있는 아름다운 곡이다. 그러다가 1850년대 초반에 두 사람은 헤어지기로 결정했다. 그런 결정을 내린 후에도 두 사람의 사랑의 감정은 변함이 없었다. 예를 들어서 클라라는 브람스를 생각하여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심장은 터질 것만 같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그런 감정을 우정이라고 둘러서 얘기했다. 브람스는 클라라가 18965월에 세상을 떠나자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8974월에 세상을 떠났다.

   

 

프레데릭 쇼팽과 델피나 포토카

 

프레데릭 쇼팽(Frederick Chopin: 1810-1849)이라고 하면 프랑스의 여류 시인이며 작가인 조르즈 상드(George Sand: 1804-1876)를 연상하게 된다. 두 사람의 열정적이면서도 연민에 넘친 사랑은 음악사에 있어서 기록으로 남을 사항이었다. 그러나 쇼팽에게는 20대의 청년시절에 처음 만나 사랑의 감정을 키웠던 여인이 있었다. 델피나 포토카(Delphina Potocka: 1807-1877) 백작부인이었다. 쇼팽은 그의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2번과 매력적인 미뉴트 왈츠(Minute Waltz D flat major Op 64)를 델피나에게 헌정하였다. 폴란드의 귀족인 델피나는 쇼팽의 피아노 제자였다. 델피나는 미모에 지성적이고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난 여인이었다. 델피나는 17세에 폴란드의 귀족인 미에치슬라브 포토키 백작과 결혼했다. 그래서 포토카 백작부인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불행한 것이어서 결국 이혼하였다. 델피나는 생애를 통해서 폴란드의 예술가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그중에서도 피아니스트 쇼팽과 낭만주의 시인 지그문트 크라신스키와 특별히 가까웠다. 그런데 두 사람은 얼마후 조국 폴란드가 러시아의 압정을 받고 있는 것을 한탄하여서 폴란드를 떠났다는 점이 공통이었다. 델피나도 남편과 이혼한 후 외국으로 떠났다. 쇼팽과 델피나의 우정 어린 사랑은 쇼팽이 184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쇼팽은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에 델피나가 노래 부르는 것을 듣고 싶다고 하면서 델피나에게 헨델의 데팅겐 테 데움(Dettingen Te Deum)에서 아리아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쇼팽과 델피나는 1840년대에 여러 번이나 사랑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편지 중에 어떤 것들은 섹스에 대한 노골적인 표현이 있어서 세간의 화제가 되었었다. 그러나 근자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두 사람의 편지에는 섹스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는 것이며 문제가 되었던 편지는 위조였다고 한다. 델피나가 폴란드의 망명 시인인 크라신스키를 만난 것은 183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폴리에서였다. 그후로 델피나는 크라신스키 생애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 되었다. 두 사람의 로맨스는 1846, 크라신스키가 어떤 백작부인과 결홀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물론 그 후로도 델피나는 크라신스키의 뮤즈로서, 그리고 다정한 친구로서 지냈다.

    

 

구스타브 말러와 알마


구스타브 말러(Gustav Mahler: 18601911)1902년에 알마 쉰들러(Alma Schindler: 1879-1964)와 결혼하였다. 말러는 42세였고 알마는 23세였다. 알마는 비엔나 예술계에서 대단한 엘리트였다. 알마의 아버지는 유명한 화가인 에밀 야콥 쉰들러였다. 알마 역시 재능 있는 화가였으며 아울러 재능 있는 작곡가였다. 그리고 미모의 여인이었다. 알마는 비엔나 예술계의 엘리트일뿐만 아니라 유럽 예술계의 엘리트였다. 말러가 알마를 처음 만났을 때 알마는 이미 비엔나 지성인 서클에서 이름을 날리던 인물이었다. 구스타브 클림트는 알마를 소재로 삼아 그림을 그렸고 작곡가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는 알마를 2년이 넘게 깊이 사랑하였다. 그러나 알마는 쳄린스키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척하면서도 애만 태웠다. 쳄린스키의 노래 교향곡인 Lyric Suite는 알마에 대한 미칠 지경으로 안타까운 사랑을 노래한 것이다. 쳄린스키의 작품은 말러의 대지의 노래’(Das Lied von der Erde)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지만 그의 Lyric Suite를 말러의 미완성 작품인 교향곡 10번과 함께 초연하는 것을 거절했다. 왜냐하면 말러의 교향곡 10번은 알마와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의 애정행각에 대한 말러의 말없는 반응이었기 때문이었다.

 

말러는 처음에는 알마를 한없이 사랑하였다. 말러의 교향곡 5번의 아다지에토는 말러가 알마에게 헌정한 것으로 사람들은 그 악장을 사랑의 선언이라고 말했다. 교향곡 6번은 말러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비관적인 것이라는 평을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말러가 알마와의 결혼 후 그나마 가장 행복했던 시기에 작곡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주제로 나오는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듯한 멜로디는 알마의 주제’(Alma theme)이라고 불린다. 사람들은 교향곡 6번을 비극적’(Tragische)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행복한 교향곡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말러의 교향곡 8번인 천의 교향곡’(Symphony of a Thousand)은 부인인 알마에게 헌정한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말러의 교향곡 10번은 미완성이었다. 말러는 교향곡 10번의 작곡을 1910년부터 착수했지만 알마와 발터 그로피우스의 스캔들 때문에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어서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다. 말러는 교향곡 10번을 작곡하면서 주해 난에 어째서 당신은 나를 버렸는가?’ ‘당신을 위해 살고 당신을 위해 죽으련다.’라는 메모를 남기기까지 했다. 어느날 말러는 번뇌를 이기지 못하여 친구인 지그프리트 프로이트로부터 상담을 받기로 했다. 다른 사람같으면 한두 시간이면 끝날 상당이지만 말러는 프로이트의 상담실에서 하루 종일을 보냈다. 그나저나 프로이트는 말러에게 그날 하루 종일에 대한 상담료를 청구하는 것을 잊었다. 아마 의도적으로 그랬는지도 모른다. 1년이 지나서 프로이트는 말러에 대한 상담료를 청구했다. 그러나 말러가 아닌 알마에게 청구서를 보냈다. 말러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Kamila Stösslová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레오시 야나체크와 카밀라 스퇴슬로바

  

레오시 야나체크(Leos Janácek: 1854-1928)는 해마다 모라비아의 작은 온천 마을인 루하코비체에서 휴가를 보냈다. 바로 이곳에서 20세기 음악사에 있어서 잊지 못할 대단한 러브 스토리가 태어났다. 때는 1차 대전이 소강상태에 이른 1917년이었다. 당시 63세의 야나체크는 루하코비체 온천장에서 이 마을 여인인 아름답고 지성적인 카밀라 스퇴슬로바(Kamila Stösslová: 1891-1935)를 우연히 만났다. 그로부터 두 사람은 거의 10년 동안 사랑의 감정을 키워가며 지냈다. 야나체크에게는 물론 부인 즈덴카가 있었다. 카밀라도 결혼한 몸이었다. 야나체크가 카밀라에게 사랑의 심정을 전하였지만 카밀라는 정확히 37년이나 연상인 야나체크에 대하여 그저 존경하는 작곡가일 뿐, 별다른 연애감정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야나체크가 한결같이 사랑을 호소하자 마침내 마음이 움직여서 야나체크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야나체크는 카밀라에게 수많은 사랑의 편지를 보냈다. 카밀라는 야나체크에게 보내는 답장에서 처음부터 야나체크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그러기를 거의 10년이나 했다. 그러다가 1927년에 보낸 답장에서 비로소 당신의 카밀라’(Tva’ Kamila)라는 표현을 썼다. 그 편지를 야나체크의 부인인 츠덴카가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로 인해서 야나체크와 츠덴카는 격렬한 말다툼을 하였다. 그렇다고 헤어지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1928년 야나체크는 임종을 앞두고 둘러서 있던 여러 사람들에게 카밀라에 대한 심정을 비로소 공공연히 밝혔다. 죽음을 앞두고서도 카밀라를 잊지 못하겠다는 고백이었다. 야나체크의 카밀라에 대한 사랑의 집념은 생각보다도 컸다. 야나체크와 카밀라는 교제하는 기간 동안 약 7백 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다. 야나체크가 세상을 떠나자 츠덴카가 거의 모두 없앴고 다만 그림엽서 몇 장만을 남겨 두었다.

 

카밀라는 특히 야나체크의 후기 작품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야나체크의 3대 오페라는 모두 카밀라를 주인공으로 생각하고 작곡된 것이다. ‘카타 카바노바’(K’at’a Kabanova)의 카타, ‘교활한 암 여우’(The Cunning Little Vixen)의 암 여우, ‘마크로풀로스 사건’(The Makropoulos Case)에서 에밀리아 마티는 모두 카밀라를 염두에 두고 작곡된 것이다. 물론 카밀라는 성악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들 오페라의 주인공으로 출연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나체크가 사랑하는 카밀라를 자기 오페라의 주인공으로 견주어서 삼은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닐수 없다. 야나체크가 카밀라와의 열정적인 관계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곡한 작품들도 여러 편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글라골리틱 미사곡’(Glagolitic mass)이다. 글라골리틱은 아주 오래된 슬라브 알파벳을 말한다. 슬라브 전통에 대하여 애착을 가지고 있던 야나체크는 고대 슬라브 글자로 가사를 삼아서 미사곡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실은 야나체크가 환상으로나마 카밀라와 결혼하는 것을 내용으로 삼은 결혼미사곡이다. 그러니 대단할 수밖에 없다. 이밖에도 사라진 사람의 일기’(The Diarry of one Who Disappeared), ‘신포니에타’(Sinfoniette), ‘현악4중주곡 2등이 모두 카밀라와 관련하여 작곡된 것이다. 특히 현악4중주곡 2번은 친밀한 편지들’(Intimate Letters)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것이다. 카밀라와 주고 받은 사랑의 편지들을 생각해서 지은 작품이다. 카밀라에 대한 야나체크의 사랑은 깊은 것이었지만 어떠한 보상을 바랬던 사랑은 아니었다. 사랑의 완성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이다.

    

 

샤를르 구노와 조르지나 웰던

 

샤를르 구노(Charles Gounod: 1818-1893)는 조르지나 웰던(Georgina Weldon: 1837-1914)이라는 여인에게 한눈에 반하여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조르지나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그런데도 구노는 조르지나와 너무나도 함께 있고 싶어서 결국 조르지나 부부의 아파트로 들어가 함께 살기까지 했다. 구노는 조르지나를 위해서 오페라 폴리왹트’(Polyeucte)를 작곡하여 폴리왹트의 부인 폴랭의 역할을 맡길 생각이었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구노와 조르지나의 관계가 소원해지자 조르지나는 질투의 화신이 되어서 오페라 폴리왹트의 오리지널 악보를 감추고 절대로 내주지 않았다. 구노가 악보를 돌려 달라고 간청했지만 워낙 성격이 괴상해서 구노의 애타는 부탁을 한 귀로 흘려 보냈다. 그 바람에 파리에서 초연을 가지려던 폴리왹트는 연기되지 않을수 없었다. 어쩔수 없었던 구노는 기억력을 되살려서 폴리왹트의 악보를 복원하기 시작했다. 조르지나는 구노가 폴리왹트의 악보를 복원하는 작업을 완성할 즈음에 양심의 가책을 받았던지 구노에게 오리지널 악보를 보냈다. 이런 희귀한 일이 일어나게 된 당사자인 조르지나 웰던은 어떤 여인이며 또한 구노와는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간단하나마 설명코자 한다.

 

조르지나 웰던은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했던 영국의 사회운동가였다. 주로 정신이상자에 대한 법률이 현실을 무시한 것이라고 해서 반대 운동을 벌였던 사람이다. 또한 말로서 해결할수도 있는 문제들을 휘딱하면 법정으로 끌고 갔다. 아무튼 소송하기를 좋아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소송당사자였다. 그런가하면 아마추어 소프라노였다. 조르지나는 1837년에 런던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모간 토마스는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조르지나는 모간 토마스의 일곱 자녀들 중 첫 번째였다. 조르지나는 186023세 때에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병대 장교인 윌리엄 웰던과 결혼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조르지나에 대한 재산상속을 즉시 중지했다. 조르지나는 전문 연극배우가 되고 싶어 했으나 남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아마추어 연극 공연에는 나갈수 있었다. 조르지나는 노래를 곧잘 불렀다. 그래서 소프라노로서 자선 연주회 같은 곳에서 노래를 불렀다. 조르지아의 결혼생활을 그다지 원만한 것이 아니었다. 결혼한지 3년 째 되던 해에 남편은 은밀하게 새로운 애인을 두었다. 말이 애인이지 실은 정부였다. 19살 먹은 애니라는 여자였다. 아무튼 남편 웰던과 애니는 평생의 인생 파트너로서 지냈다.

 

조르지나는 결혼한지 9년이 지났지만 아이가 없었다. 결국 결혼생활은 파탄으로 이어졌지만 그렇다고 남편과 이혼한 것은 아니었다. 그 때에 조르지나는 재능은 있지만 돈이 없어서 음악을 공부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위해서 국립음악훈련학교를 운영할 생각을 했다. 정부 보조를 바랬던 일종의 고아원이었다. 조르지나는 우선 자기 집을 학교로 사용키로 했다. 노래를 잘 불렀던 조르지나는 당시 유명했던 헨리 데이빗 레슬리의 합창단에 들어갔다. 조르지나는 이 합창단에 있을 때에 런던에서 구노를 처음 만났다. 구노는 1870년에 런던에 가서 왕립합창협회(Royal Choral Society)의 초대 지휘자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조르지나는 합창단의 파리음악원과 오페라 코미크 연주회에서 구노가 작곡한 칸타타 갈리아’(Gallia)에서 소프라노 솔로를 맡았기 때문에 구노와 더욱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사실 그로부터 조르지나와 구노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구노는 런던에 있으면서 건강이 매우 악화되었다. 조르지나는 구노에게 런던 교외에 있는 자기의 저택에 와서 요양하며 지내도록 당부했다. 구노는 마음속으로 깊이 사랑하는 조르지나와 함께 있을수만 있다면 런던이 아니라 지옥에라고 갈수 있다고 생각해서 조르지나의 집으로 가서 이들 부부와 함께 기거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당연히 더욱 불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에 구노는 오페라 폴리왹트의 작곡을 구상하고 있었다. 구노는 조르지나에게 파리에서 폴리왹트가 초연을 가지게 되면 여주인공인 폴랭의 역할을 조르지나가 맡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구노는 구노가 유부녀인 조르지나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가십이 프랑스와 영국에서 나돌기 시작하자 상당히 곤혹스러워했다. 그래서 아무래도 조르지나와의 관계를 청산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고 생각해서 1874년에 조르지나의 집에서 나와 파리의 가정으로 돌아갔다. 구노는 1852년에 파리음악원의 피아노 교수인 피에르 조셉 침머만의 딸 안나 침머만(Anna Zimmermann: 1839-1907)과 결혼하였다. 구노와 안나는 아들 장과 딸 잔느를 두었다. 안나는 구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성실한 아내로서 지냈다. 구노는 그런 아내가 있는데 런던에서 조르지나 웰던이라는 결혼한 여자를 만나서 죽자사자 했던 것이다. 그것이 파리와 런던 사교계에서 가십이 되었던 웰던 사건’(Weldon Affair)이었다.

 

조르지나는 파리에 돌아간 구노가 자기 물건들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자 못보내주겠다고 나섰다. 아마 질투심이 발동했던 모양이었다. 구노가 조르지나의 집에 남겨 놓았던 물건들 중에는 폴리왹트의 악보 초안도 있었다. 조르지나는 구노에게 물건들을 갖고 싶으면 런던에 와서 자기에게 가져가겠다고 부탁하라고 대답했다. 속이 상한 구노는 런던으로 돌아가서 조르지나에게 사정해서 악보를 돌려받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기억력을 되살려서 폴리왹트의 음악을 다시 오선지에 그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 쯤 지나서 구노가 폴리왹트의 악보를 거의 다 복원하였을 때에 조르지나가 악보 초안을 구노에게 보냈다. 악보 초안에 여러번 적혀 있던 조르지나의 이름들은 크레용으로 박박 긁어서 지어놓은 상태였다. 조르지나의 앙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르지나는 구노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자기의 집에서 기숙했기 때문에 들었던 경비, 기타 정신적인 위자료 등등의 사유로 무려 1만 파운드를 지불하라는 소송이었다. 물론, 조르지나의 소송은 성사되지 못했다. 조르지나는 오히려 음악활동을 하면서 사기 친 것이 들어나서 1880년과 1885년 두 차례에 걸쳐서 감옥 생활을 했었다


 

에드워드 엘가와 카롤린 알리스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 1857-1934)위풍당당한 행진곡’(Poms and Circumstance Marches)으로 영국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20세기 위대한 작곡가이다. 엘가의 여러 작품 중에서 첼로협주곡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첼로협주곡 중의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엘가의 명성을 더욱 높여준 작품으로서 사랑의 인사’(Salut d’Amour)가 있다.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독일어로 리베스그루스’(Liebesgruss)였다. 엘가가 1888년에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 작곡한 것으로 Op 12이다. 에드워드 엘가는 이 노래를 사랑하는 카롤린 알리스 로버츠(Caroline Alice Roberts: 1848-1920)에게 약혼선물로서 헌정했다. 제목을 독일어로 붙인 것은 알리스가 독일어에 능숙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알리스와 결혼한 후 이 곡이 프랑스와 유럽에서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목을 프랑스어로 바꾸었다. 프랑스의 출판업자가 프랑스어 제목을 붙였다는 얘기도 있다. 에드워드는 작품의 제목을 프랑스어로 바꾸면서 카리스에게’(à Carice)라고 적었다. CariceCaroline Alice를 조합하여 만든 단어이다. 두 사람은 2년 후에 딸이 태어나자 이름을 Carice라고 붙였다.

 

에드워드가 약혼 기념으로 사랑의 인사를 작곡하자 알리스도 역시 약혼 기념으로 새벽의 바람’(The Wind at Dawn)이라는 시로서 감사의 뜻을 전했다. 에드워드는 나중에 새벽의 바람에 음악을 붙여서 알리스를 기쁘게 했다. 에드워드와 알리스는 사랑의 인사가 만들어지고 나서 1년 후에 결혼식을 올렸다. 알리스의 가족은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왜냐하면 알리스는 영국 성공회인데 에드워드는 로마 가톨릭이었고 또한 사회적인 신분이 차이가 나서였다. 알리스의 아버지는 영국 육군의 이름난 장군이었고 인도주둔 영국군 사령관을 지냈으며 그밖에 친척들도 사회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배경이 없는 에드워드와의 결혼을 반대했던 것이다. 결국 알리스는 아무런 재산상속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훗날 알리스는 레이디라는 귀족 호칭을 받았으며 에드워드는 경(Sir)라는 호칭을 받아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알리스는 뛰어난 재능의 시인이었다. 알리스는 인도에서 태어났다. 당시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알리스와 에드워드가 처음 만난 것은 1886년 영국의 워체스터셔어에서였다. 알리스는 홀로 되신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고 에드워드는 워체스터셔어(현재는 글라우체스터셔어)고등학교의 바이올린 교사였다. 에드워드는 알리스의 피아노 개인선생을 했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고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혼하였으며 188958일 브롬튼의 예배처에서 간략한 가톨릭 의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결혼 조찬의 모임(Wedding Breakfast)은 결혼식장 근처에 있는 알리스의 친구 미세스 마샬의 집에서 있었다. 훗날 엘가는 미세스 마샬의 딸에게 감사의 표시로 가을의 노래’(A Song of Autumn)를 헌정하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폴랭 드 아나(파울리네 데 아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1894년 소프라노 파울리네 데 아나(Pauline de Ahna: 1863-1950)와 결혼하였다. 그때 슈트라우스는 30세였고 데 아나는 29세였다. 데 아나는 뮌헨에서 음악공부를 했고 나중에 장래 남편이 되는 슈트라우스로부터 성악 레슨을 받았다. 데 아나와 슈트라우스가 처음 만난 것은 1887년 여름, 뮌헨 남쪽에 있는 슈타른버거제의 호반에서였다. 두 사람 모두 여름 휴가차 이 호수에 왔었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의 감정을 키워왔다. 슈트라우스는 1889년에 봐이마르 궁정오케스트라의 제2 카펠마이스터가 되었다. 그리고 데 아나는 봐이마르 오페라 합창단의 멤버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두 사람은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더 가깝게 지낼수 있었다. 데 아나는 슈트라우스의 후원이 있었는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1890년에 봐이마르에서 마술피리의 파미나를 맡아서 오페라 소프라노로서 첫 데뷔를 하였다. 데 아나는 이듬해에 바이로이트에서 탄호이저의 엘리자베트를 맡았으며 또한 파르지팔에서 꽃처녀를 맡았다. 슈트라우스는 사랑하는 데 아나를 위해 오페라를 작곡키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894년 초에 슈트라우스의 첫 오페라인 바그너풍의 군트람’(Guntram)이 완성 되었고 데 아나는 군트람의 초연에서 당연히 여주인공인 프라이힐트(Freihild)를 맡았다. 그리고 그해 9월에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하였다.

 

슈트라우스는 데 아나에게 결혼선물로 찬연한 노래인 모르겐’(아침)을 비롯한 네 개의 가곡(Op 27)을 헌정하였다. 데 아나는 슈트라우스의 음악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슈트라우스 자신도 데 아나에 대하여 나의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데 아나는 슈트라우스와 결혼하고 나서 3년 후에 무대에서 은퇴하였다. 그런데도 슈트라우스는 오페라를 작곡하던지 또는 가곡을 작곡하던지 우선 데 아나를 염두에 두었다.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가곡들이 거의 모두 소프라노를 위한 것은 데 아나를 생각해서였다. 오페라에 있어서도 데 아나는 몇 몇 오페라의 여주인공들의 화신처럼 되어 있다. 슈트라우스는 살로메’, ‘아리아드네’, ‘그림자 없는 여인에서 황비’, 그리고 슈트라우스의 마지막 오페라인 카프리치오에서 백작부인을 모두 데 아나를 염두에 두고 작곡하였다. 한편, 슈트라우스는 자기의 이야기를 담은 것과 같은 반자서전적 오페라인 인터메쪼’(Intermezzo)에서 작곡가의 아내로서 크리스티네 슈토르흐(Christine Storch)라는 인물을 등장시켰는데 누가 보더라도 작곡가와 슈토르흐의 이야기는 슈트라우스와 데 아나의 이야기인 것을 알수 있다.

 

데 아나의 아버지는 유명한 아돌프 데 아나 장군이었다. 데 아나는 장군의 딸이어서 그런지 성격이 매우 솔직하고 활달했다. 그런가하면 성미가 급하기도 했고 수다스럽기도 했다. 한마디로 데 아나는 괴짜였다. 슈트라우스는 데 아나를 대단히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대단히 여성적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조금은 고집이 세다. 그렇지만 어떤 때는 아주 아양을 잘 떨어서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이다. 데 아나는 정체를 알기가 어렵다. 조금 전에 보았던 그 여자와 지금 본 그 여자가 아주 다를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행복한 것이었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데 아나는 슈트라우스의 창작활동에 있어서 영감을 주는 원천이었다. 데 아나가 슈트라우스의 작품에 영향을 끼친 예를 허다하지만 다시 대표적인 케이스를 들어 보면, 슈트라우스의 마지막 작품인 네 개의 마지막 노래’(Vier letzte Lieder)이다. 슈트라우스는 이 노래들을 데 아나와의 오랜 부부생활을 견주어서 작곡하였다. 슈트라우스는 영웅의 생애’(Ein Heldenleben)에서는 데 아나를 영웅의 반려자로서 그렸고 또한 가정 교향곡’(Symphonia Domestica)에서도 여러 부분에서 데 아나를 연상케 하는 음악들을 만들었다. 데 아나는 슈트라우스보다 1년 늦게 태어났지만 1년 늦게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백년해로를 함께 한 셈이었다. 두 사람은 아들 하나를 두었다. 프란츠였다. 프란츠는 유태인 기업가의 딸인 알리스 폰 그라브 헤르만스뵈르트와 결혼했다.


벤자민 브리튼(우)과 피터 피어스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 1913-1976)과 테너 피터 피어스(Peter Pears: 1910-1986)는 거의 30년에 걸친 파트너였다. 말이 파트너이지 실은 동성연애를 하는 사이였다. 위대한 작곡가라고 동성연애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차이코브스키도 동성애자였다. 하지만 차이코브스키는 양성애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자기를 열렬히 사모하는 제자와 결혼하였다. 그렇지만 그 결혼은 불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브리튼과 피어스의 경우에는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정말로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런 관계를 유지하며 지냈다. 두 사람은 결혼식만 올리지 않았지 부부나 마찬가지였다. 브리튼이 피어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만 보더라도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편지에 보면 브리튼은 My darling heart I do love you so terribly, not only glorious you, but your singing...You are the greatest artist that ever was. 라고 썼다. 이 글귀의 번역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브리튼은 피어스를 위해서 여러 오페라를 만들었다. 대표적으로는 피터 그라임스’(Peter Grimes)였다. 피어스가 피터 그라임스의 초연에서 주인공인 그라임스의 이미지를 훌륭하게 창조하였음은 물론이다. 브리튼은 피어스를 염두에 두고 알버트 헤링의 미스터 업폴드(Mr Upfold), ‘턴 오브 더 스크루의 피터 퀸트(Peter Quint), ‘베니스의 죽음에서 아센바흐(Aschenbach)의 역할을 작곡했다. 브리튼은 피어스를 위해서 여러 노래들을 작곡했다. 연가곡인 테너와 혼과 현악기들을 위한 세레나데는 대표적이다. 피어스는 브리튼의 노래를 널리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은 리사이틀에서도 완벽한 콤비를 이루었다. 예를 들면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리사이틀에서 피어스는 노래를 부르고 브리튼은 피아노 반주를 한 것이다. 브리튼이 피어스와 처음 만나서 서로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은 1940년대 뉴욕에서였다. 두 사람은 미국 순회공연 중에 호텔에서 방을 같이 쓰게 된 것이 계기였다. 그 후 두 사람은 수많은 편지를 교환하면서 사랑의 감정을 키워왔다. 나중에 공개된 이들의 편지를 보면 대단히 감동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브리튼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2년 후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피어스에게 추모의 메시지를 보냈다. 말하자면 브리튼과 피어스를 부부로 인정한 셈이었다.

 

브리튼이 피어스와 특별한 관계로서 지내기 전에 브리튼은 소년들에 대하여 애착을 가진 사람으로 소문나 있었다. 지금으로보면 소아성애자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할수 있었다. 하지만 난잡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브리튼은 특히 10대 미소년들을 사랑했다. 첫 번째 그런 특별 관계는 13세의 피어스 던컬리라는 소년이었다. 그때 브리튼은 20세의 청년이었다. 이밖에도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던 소년들로서는 데이빗 헤밍스와 마이클 크로포드가 있다. 두 소년은 1950년대에 브리튼의 작품에서 보이 소프라노로서 노래를 불렀다. 그렇다고 해서 브리튼이 소년들과 난잡한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아니다. 헤밍스의 말을 빌리면 브리튼은 절대로 자기를 성적으로 학대한 일이 없다고 말했다. 오직 신뢰로서 지냈다고 덧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