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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치하에서의 음악활동

정준극 2017. 5. 23. 17:33

나치 치하에서의 음악활동


나치 치하에서는 모든 음악이 독일적인 기준에 합당하는 좋은 음악이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나치화(Nazification)이 되어야 한다. 참으로 애매모호한 기준이지만 나치는 나름대로 해석을 교묘하게 잘 했다. 이를 말은 좋아서 Gleichschaltung(글라이히샬퉁)이라고 불렀다. 동등(同等) 또는 타협(妥協)이라는 의미이다. 아무튼 나치의 기준에 따라서 나치의 이상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작곡가들은 물론 그들의 작품들, 그리고 심지어는 연주자들 까지도 억압을 당했다. 주로 유태인 음악가와 그들의 작품이 대상이었다. 나치는 한편으로는 검열을 강화하면서도 음악가들의 창작을 지원하는 교묘한 정책으로서 독일 국민들에게 억압의 당위성을 이해시켰다.

히틀러의 나치 치하에서 음악가들이 생존하는 길은 타협이었다. 독일에 충성하자니 예술가적인 양심이 허락치 않았고 음악활동에만 전념하자니 생활이 되지 않았으며 사회에서 소외만 당하는 처지였다. 그러므로 나치에 협조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굶고 억압을 당하더라도 자기만의 길을 갈 것이냐라는 두가지 명제에 대하여 균형을 가지는 것은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일 균형을 잡기에 실패한다면 추방을 당하거나 심지어는 죽음도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나치는 과거의 음악가들도 만일 그들이 유태계라고 하면 그들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대표적인 경우가 멘델스존과 마이에르베르였다. 쇤베르크의 음악은 그가 유태계라는 이유도 있지만 히틀러가 그의 음악을 독일의 고전음악은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금지되었다. 파울 힌데미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힌데미트는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는 작곡가였지만 나치는 그의 음악을 지나치게 실험적일 뿐만 아니라 퇴폐적이라고 규정지어서 금지했다. 괴벨스는 히틀러가 힌데미트의 음악을 거부한다는 것을 알고 한술 더 떠서 '힌데미트의 작품은 무조적인 소음이다'라고 언급했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에 의해 작품 연주가 금지된 작곡가들. 왼쪽으로부터 멘델스존, 마이에르베르, 말러, 쇤베르크, 힌데미트


글라이히샬퉁 정책은 작곡가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오케스트라 단원 중에 유태인이 있으면 쫓겨났다. 히틀러는 바그너와 같은 작품은 순수 아리안만이 연주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저명한 지휘자 중에서도 유태인이면 추방 당하지 않을수 없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 1885-1973)였다. 국제적으로 구스타브 말러의 작품 해석에 뛰어나다는 평을 받은 그였지만 나치 치하에서 추방 당해야 했다. 또 다른 유명 지휘자로서 나치로부터 추방 당한 사람은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1876-1962)였다. 역시 유태인이었다. 발터는 1933년 이전부터 히틀러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발터는 히틀러가 집권하자 독일을 떠나 오스트리아로 도피했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1938년에 발터는 파리에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로 돌아오지 못했다. 프랑스는 그런 그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주었다. 1939년 이전에 나치 독일을 떠난 음악가들은 목숨을 부지할수 있었다. 그런데 일부는 나치화가 적극 진행되고 있는 중에도 독일에 남아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뱅글러(Wilhelm Fuertwangler: 1886-1954)였다. 푸르트뱅글러는 물론 유태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치로부터 소외를 당하였는데 유태인인 힌데미트를 두둔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지만 푸르트뱅글러는 나치와 일부러 다투지 않고 남아 있으면서 베를린 필과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지휘자로 남아 있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독일의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발터 기제킹(Walter Gieseking: 1895-1956)은 괴벨스가 나치의 우수함을 세계에 알린다는 명분아래 해외순회연주까지 가졌었다. 그러면 대중음악은 어떠했는가? 역시 나치가 콘트롤했다. 재즈는 금지되었다. 흑인들의 음악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나치는 흑인을 열등민족으로 보았다. 그래서 재즈를 퇴폐음악으로 규정했다. 괴벨스는 릴리 말렌(Lili Marlene)이 공연히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트린다고 보아서 금지코자 했다. 그러나 전선에 나가 있는 병사들이 한결같이 방송에서 틀어 달라고 요청하는 바람에 금지하지 못했다. 


  

나치에 의해 제약을 받았던 지휘자들. 왼쪽으로부터 오토 클렘페러, 브루노 발터,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나치의 예술 정책은 다음 세가지에 기조를 두고 있다.


1. 재능있는 음악가로서 충성된 나치 당원이면 직업을 보장받는다. 즉, 먹고는 살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2. 충성스런 나치 당원이라고 해도 음악적 재능이 없으면 직업을 보장받지 못한다.

3. 유태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음악적 재능의 뛰어나고 제국음악협회(Reichsmusikkammer)의 멤버이면 고용이 허락된다.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나 작곡가 겸 지휘자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나치 당원은 아니지만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기 때문에 나치 사회에서 계속 일을 할수 있었다.


히틀러와 나치 선전장관인 괴벨스에 의하면 진실로 훌륭한 독일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는 루드비히 반 베토벤, 리하르트 바그너, 안톤 브루크너의 세사람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세사람은 모두 20세기 이전에 활동했던 작곡가들이었다. 아무튼 히틀러는 베토벤을 가장 존경했다. 베토벤이야말로 영웅적인 독일 정신을 소유한 위대한 인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베토벤은 '인간의 도덕은 힘에서 나온다. 힘이 있어야 다른 사람보다 뛰어날수 있다'라고 믿었는데 히틀러는 그 말에 대단히 공감했다. 비단 히틀러 뿐만이 아니라 독일 국민이면 누구나 베토벤을 가장 존경했다.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서 세계의 음악은 독일-오스트리아 작곡가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흐, 헨델, 베토벤, 모차르트, 멘델스존, 슈만, 슈베르트, 브람스, 바그너 등등...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쇤베르크가 베를린에서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그렇지만 이 모든 음악가들도 베토벤에 필적할수는 없었다. 히틀러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를 무척 좋아했다. 그런데 히틀러는 베토벤을 가장 존경했지만 실제로 히틀러가 가장 좋아한 작곡가는 바그너였다. 히틀러가 바그너를 얼마나 좋아했는가 하면 1차 대전 중에도 전선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음반을 배낭에 넣고 다녔을 정도였다.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마지막 장면. 히틀러는 이 오페라를 가장 좋아해서 전쟁 중에도 배낭에 이 오페라의 음반을 가지고 다녔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음악이 나치즘을 상징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나치당의 집회가 있으면 종종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하거나 음반을 스피커로 틀어 주도록 했다. '뉘른베그크의 명가수'의 서곡이나 '탄호이저'의 서곡을 연주토록 했다. '발퀴레'에서 '발퀴리의 기행'은 자주 연주되는 곡목이었다. 바그너의 음악은 독일 이외의 어떤 음악과도 타협 할수 없는 것이라고 믿었다. 바그너의 음악은 진정으로 튜토닉(독일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그너의 음악이 히틀러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적 구성으로 되어 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그너의 정치적 견해가 히틀러의 것과 일치한다는 것도 대단한 중요한 일이었다. 바그너는 1850년대에 반유태 저서인 Das Judebthum in die Musik(음악에 있어서 유태주의)를 저술하여 유태인들은 일반인들의 예술에 대한 취향에 독소적인 존재라고 주장했는데 그것이야말로 히틀러의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잘 아는대로 바그너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을 설립하였다. 나치는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바이로이트 축제를 반유태적인 선전도구로 사용하였다. 실제로 히틀러는 거의 매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에 직접 참가했고 괴벨스는 히틀러의 바이로이트 참석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실제로 히틀러는 바이로이트 행사가 나치의 연례 행사가 되도록 할 것이며 아울러 아무리 전쟁이 심하더라고 바이로이트에서의 바그너 공연은 중단없이 진행하라고 특별지시했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은 전쟁 중인 1944년에도 개최되었다. 괴벨스의 주장은 간단했다. '휘러(히틀러)가 바그너의 작품을 좋은 음악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한다면 독일은 좋은 음악, 나치의 음악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독일 라디오 방송마다 바그너의 음악을 틀어주느라고 정신이 없었으며 연주회에서는 바그너 작품이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히틀러가 가장 존경하고 좋아했던 세명의 음악가. 베토벤, 바그너, 브루크너

                                               

안톤 브루크너는 그 자신이 바그너의 제자라고 생각했다. 브루크너와 바그너는 거의 같은 시대(1845-1880)에 활동했다. 브루크너는 바그너를 1865년에 뮌헨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초연될 때에 처음 만났다. 그로부터 브루크너는 바그너를 깊이 존경하여서 심지어는 그의 교향곡 3번 D 단조를 바그너에게 헌정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3번은 '바그너 교향곡'이라고 부른다. 한편, 음악사학자들은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에서 아다지오가 어떤 불길한 일의 전조라고 해석했다. 실제로 브루크너는 장례식을 마음에 그리며 아다지오를 작곡했다고 한다. 브루크너가 교향곡 7번을 완성한 직후인 1883년에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것은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는 사실이었다. 히틀러는 그런 브루크너를 존경했다. 히틀러와 브루크너는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브루크너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다. 브루크너는 어린 시절에 정규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아우구스틴 수도사들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자연을 깊이 사랑했던 브루크너는 비록 오스트리아의 린츠에서 태어났지만 독일을 조국으로서 깊이 사랑했다. 히틀러가 보았을 때 브루크너는 위대한 독일 시민의 모범이었다. 1945년 히틀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의 아다지오가 연주되었다.


손끝의 마술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다음의 음악가들은 나치와의 균형 또는 타협을 통해서 음악활동을 계속할수 있었던 경우이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전쟁이 끝나자 이들은 나치에게 부역했다는 오명을 써야 했다. 물론 거의 모두 오명을 씻고 정상적인 음악활동을 다시 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한스 호터. 히틀러가 찬사를 아끼지 않은 음악가였다.


한스 호터(Hans Hotter: 1909-2003)는 히틀러로부터 '앞으로 가장 위대한 바리톤이 될 사람'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한스 호터는 나치 당원이 아니었고 더구나 어떤 파티에서 히틀러를 조롱 비슷하게 해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조리게 했지만 제3제국에서 상당한 특별대우를 받으며 중요한 직위에 있기도 했다. 나치에게 부역했다는 이유로 한동안 고초를 겪었던 음악가로서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08-1989)을 빼놓을수가 없다.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출신인 폰 카라얀은 1930년대에 이미 독일의 유수한 오페라단의 음악감독을 지냈다. 아마 당시 독일 오페라단의 음악감독으로서는 가장 젊은 나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폰 카라얀은 좀 더 나은 직분을 얻으려고 나치당에 입당했다. 그래서 좀 더 규모가 큰 오페라단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폰 카라얀이 새로운 직위를 돈을 주고 샀다고까지 말했다. 전쟁이 끝나자 폰 카라얀은 나치에 협조했다는 명분으로 제재를 받았다. 1948년까지 3년 동안 어느 곳에서도 지휘를 하지 못하는 제재였다. 그러다가 1958년에 그의 능력이 인정을 받아 베를린필의 상임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신화적인 존재로서 고전음악계를 압도하였다. 클레멘스 크라우스(Clemens Krauss: 1893-1984)는 히틀러가 총애한 또 한 사람의 음악가였다. 그렇지만 나치당원은 아니었다. 그는 뮌헨에서 히틀러를 위해

주로 연회나 행사에서 지휘를 하고 바이올린을 연주해야 했다. 크라우스는 히틀러에 사로 잡혀 있는 포로나 마찬가지였다. 크라우스는 히틀러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썼으나 히틀라가 그에게 뮌헨에서 활동하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크라우스는 합스부르크 대공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머니 클레멘티네 크라우스는 어린 나이에 재능과 미모로서 제국 오페라단의 발레리나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5세에 엑토르 발타찌 백작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 그후 어머니는 인기 여배우 겸 인기 오페레타 소프라노로서 많은 활동을 했다. 크라우스라는 이름은 어머니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크라우스의 고모, 즉 발타찌의 누이인 헬레네는 알빈 베체라 남작과 결혼하여 남작부인이 되었는데 이들의 딸인 마리아는 루돌프 황태자와 이루지 못할 사랑을 비관하여 동반자살한 바로 그 마리아였다.


나치 집회에 참석했던 클레멘스 크라우스(오른쪽)


나치에 조력했던 음악가로서 한스 피츠너(Hans Pfitzner: 1869-1949)가 있다. 그는 스스로 독일의 천재라고 하면서 음악적인 재능을 과시하였다. 그는 모든 예술가는 조국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믿었다. 어느때 피츠너는 말러와 바그너에 대하여 논쟁을 벌인 일이 있었다. 피츠너는 바그너의 음악이 훌륭하다는 것은 그것이 독일의 음악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말러는 예술가라고 하면 어느 나라 출신이냐를 떠나서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뿐이라고 응대했다. 그러자 피츠너는 화가 난듯 자리를 박차고 자리를 떠났다. 피츠너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버금하는 뛰어난 작곡가였다. 그의 대표작은 오페라 '팔레스트리나'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지나치게 국수주의적이었다. 나치를 맹종하던 또 하나의 음악가가 있었다. 당대의 뛰어난 하프시코드 연주자인 리 슈타델만(Li Stadelmann)이었다. 바흐 음악의 권위자였다. 그는 일찍이 1933년에 나치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반유태주의자였다. 그는 '유태인은 독일 문화와 사회에서 있을 자리가 없다'고 믿었다.


한스 피츠너. 대단한 나치 추종자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의 경우는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다. 그가 과연 나치에 협조하였는지 또는 일부러 협조하는 척 했는지 다를 수가 있다. 슈트라우스는 1933년에 히틀러가 집권하였을 때 라이히무지크캄머(Reichsmusikkammer: 제국음악협회)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슈트라우스가 그 직분을 수락한 것은 독일의 음악가들이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흐르는 추세에서 누군가는 순수 음악가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슈트라우스의 관심은 그저 음악문화를 발전시켜야 겠다는 것이었다. 유태인이건 아니건 그와 친밀한 사이이건 아니건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견해였다. 그는 제국음악협회장으로 있으면서 나치 당국으로부터 유태인들을 협회에서 퇴출시키라는 압력을 받았지만 그럴 때마다 거절한 것으로 유명했다. 제국음악협회의 회원이 되면 일단은 당국으로부터 생활을 보장받을수 있었다. 그는 유태인 대본가인 슈테판 츠봐이크(Stefan Zweig)와 오페라 작곡을 함께 했다. 그는 어느때 츠봐이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치적인 정치를 증오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슈트라우스의 생각이 그러하므로 나치 당국은 그 때문에  속이 편하지 않았다. 괴벨스는 슈트라우스를 기회주의자라고 보아서 신뢰하지 않았다. 그리고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독일이 지향하고 있는 음악과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나치는 슈트라우스가 국제적으로 저명한 음악가이므로 차마 그를 어쩌지는 못했다. 나치로서 슈트라우스는 '달갑지 않는 사람'(Persona non grata)였다. 더구나 슈트라우스의 하나 뿐인 며느리는 유태인이었다. 그 때문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때 슈트라우스의 며느리의 친정 어머니가 나치에 체포되어서 테레친 강제수용소에 구금된 일이 있었다. 슈트라우스는 곧바로 테레틴 강제수용소를 찾아가서 면회를 하려 했지만 경비가 들여보내지를 않았다. 얼마후 며느리의 친정 어머니의 사진 한장이 슈트라우스에게 전해졌다.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한 직후였다. 슈트라우스 1935년에 제국음악협회장의 자리를 강요에 의해서 내놓았다. 그리고 그의 음악도 검열을 받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사정을 보면 슈트라우스는 나치를 싫어했던 것이 분명한 것 같았다.


젊은 시절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독일 제3제국 음악협회장을 지냈으나 그는 오직 음악을 위해서 어쩔수 없이 나치에 타협한 경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