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시컬 뮤직 팟푸리/클래시컬 뮤직 팟푸리

이들도 작곡가였다

정준극 2017. 5. 27. 12:56

이들도 작곡가였다

작곡을 했던 유명 인사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작곡가들이 작곡 이외의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나면 왜 그런지 그 작곡가들에 대하여 경탄과 함께 존경심을 갖게 된다. 예를 들면, 멘델스존은 상당한 재능의 화가였고 에드워드 엘가는 프로 골퍼에 버금하는 수준이었으며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체스 플레이어였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그들에 대한 생각을 달리 갖게 된다. 작곡가가 작곡 이외에 다른 뛰어난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일단 감탄의 대상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이와 함께 직업이 작곡과는 관계 없다가 작곡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 사람들을 보아도 존경심을 갖게 된다. 러시아 국민주의 음악파 5인의 경우는 대표적이다. 다섯명 중에서 네명이 원래부터 작곡가는 아니었다. 세자르 쿠이는 공병장교로서 사관학교 교관이었다. 알렉산더 보로딘은 화학자로서 의과대학 교수었다.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는 통신부 공무원이었다.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해군 사관이었다. 이렇듯 원래에는 작곡가가 아니었으나 나중에 작곡가로서 입지를 굳힌 사람들은 찾아보면 의외로 많다. 그렇다면 작곡가가 아닌 유명 인사가 작곡가로서의 활동한 경우는 어떠한가? 조사해보니 그런 유명인사들도 상당히 있었다. 그중에서 15명만 소개한다. 대체로 보면 철학자, 사상가, 배우가 다른 직종의 사람들, 예를 들어서 스포츠맨이나 화가보다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물론 지나친 판단일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스포츠맨이라고 해서 작곡을 하지 못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사람들은 보통 니체를 허무주의 철학자라고 부른다. 그래서인지 니체의 철학을 이해하는 것은 허무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결국은 이해하지 못하게 되니 공연히 시간만 버렸다고 하면서 허무하다는 생각을 갖는 모양이다. 하기야 그의 철학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인 Nietzsche를 제대로 스펠링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그는 음악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워서 제대로 연주할 줄 알았다. 니체는 작곡에도 재능이 있어서 피아노 소품들을 작곡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니체가 작곡한 작품들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니체는 바그너와 친구사이였다. 그런데도 바그너는 니체가 작곡한다는 것 자체를 별로 반갑게 여기지 않았다. 니체는 1871년에 '신년 메아리'(Echoes of New Year's Eve)라는 피아노 듀엣 작품을 작곡했다. 어느날 니체의 이 작품을 코지마 바그너(Cosima Wagner)와 한스 리히터(Hans Richter)가 함께 연주한 일이 있다. 바그너는 도저히 듣지 못하겠다는 듯이 신경질을 내며 방에서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이듬해에 '만프레드 명상'(Manfred Meditation)이라는 솔로 피아노 곡을 만들어서 역시 친구인 한스 폰 뷜로브(Hans von Bülow)에게 보냈다. 한스 폰 뷜로브는 '그렇게도 할 일이 없나?'라면서 니체의 작품에 대하여 형편 없다는 말을 대신했다. 그리고는 덧붙여서 니체가 음악의 여신을 능욕했다고까지 말했다. 한편, 바그너를 숭앙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역시 니체에게 감동을 받았던 모양이다. 니체의 저서인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를 내용으로 삼은 교향시를 작곡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의 '선과 악을 넘어서'(Beyong Good and Evil)는 아직 음악으로 번역되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니체


○ 철학자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계몽주의 철학자인 장 자크 루소는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노래, 실내악, 오케스트라 작품,  그리고 오페라도 남겼다. 그가 1752년에 완성한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Le Devin du Village)는 비록 단편이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루이 14세는 이 오페라를 보고 루소의 재능을 크게 치하하여서 평생 연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루소는 역시 루소인지라 루이 14세의 이같은 제안을 거절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훗날 프랑스와 미국의 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루소는 이처럼 음악에 대하여 조예가 깊었고 스스로 작곡도 했지만 초기에는 음악에 대하여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그는 '예술과 과학에 대한 견해'(Discourse on the Arts and Sciences)라는 논문을 통해서 '일반적으로 예술은 인간 본성을 타락시키는 영향을 준다. 예술은 허영과 그밖에 여러 죄악들을 부츠킨다.'고 주장한 일이 있다. 우리나라 개신교 찬송가에서 54장 '주여 복을 구하노니'와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는 장 자크 루소가 작곡한 것이다.


장 자크 루소


○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 권위 있는 New Grove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s(음악- 음악가 신그로우브 사전)에 의하면 에드라 파운드는 아마추어 작곡가로서는 드믈게 가장 개성적인 작곡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시인으로서 작곡을 한다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독특한 스타일의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니 더욱 놀라운 일이다. 영미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하면 당연히 에즈라 파운드의 중국적 영향의 시집인 '카타이'(Cathay) 또는 '칸토스'(Cantos)를 섭렵하지 않을수 없을 정도로 에즈라 파운드는 뛰어난 시인이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오페라도 작곡했다. 그것도 두편이나 된다. 하나는 1923년에 내놓은 '프랑수아 빌롱의 증언'(The Testament of Francois Villon)이며 다른 하나는 1932년에 발표한 '카발칸티'(Cavalcanti)이다. 에즈라 파운디의 시는 간결한 문장으로 매력을 끌고 있다. 그런데 그의 음악은 어떠한가? 복잡하기가 이를데 없다. 리듬만 해도 그렇다. 프로방스 지방의 음유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프랑수아 빌롱'의 경우만 보더라도 16분의 7박자 또는 32분의 19박자로 되어 있다.


에즈라 파운드


○ 일기작가 사뮈엘 피프스(Samuel Pepys: 1633-1703). 17세기 영국의 해군력 강화에 지대한 기여를 한 사뮈엘 피프스는 상원의원까지 지낸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일기작가로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일기는 문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한 그는 또한 열정적인 음악가였다. 그는 작곡을 했고 노래를 불렀으며 악기를 연주했다. 심지어는 하인들도 음악적인 소양이 있어야 한다면서 직접 음악레슨을 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가정에서 무슨 행사가 있으면 하인들이 노래도 부르고 악기를 연주해서 손님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작곡 이외에도 악기에 재능이 있어서 루트, 비올라, 바이올린, 리코더, 스피넷, 플루트 등을 훌륭하게 연주할수 있었다. 또한 그는 음성이 좋아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독창을 하기도 했다. 그는 몇곡의 노래를 작곡했다. Beauty, retire 라는 노래는 당시에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것이었다. 그는 이 노래가 그렇게도 자랑스러웠던지 초상화를 이 노래의 악보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리도록 했다.


자기가 작곡한 노래의 악보를 들고 있는 사뮈엘 피프스


○ 문호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로서 유명한 톨스토이는 음악에 대한 열정 또한 놀랍도록 지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선 그의 소설을 통해 음악에 대한 열정을 쏟아 내기를 즐겨했다. 그렇게 한 대표적인 케이스는 아마도 1889년도의 '크로이처 소나타'일 것이다. 음악가 아내에 대하여 비정상적일 정도로 질투하는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그처럼 음악에 대한 열정이 지대하였던 톨스토이었지만 실제로 음악활동은 그다지 활발하게 하지 않았다. 그는 청소년 시절에 이미 간단한 곡을 작곡할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 예를 들면 1906년에 작곡한 'F 장조 왈츠'이다. 이 작품은 훗날 피아니스트 이모젠 쿠퍼와 레라 아우어바흐 등이 음반으로 취입하기 까지 했다. 만년의 톨스토이는 그가 작곡가 피아노 소품들을 연주하면서 여가를 즐겼다고 한다. 톨스토이에게 음악적 영향을 끼친 사람은 음악학자인 알렉산드르 골덴바이처(Alexandr Gol'denveizer)였다.

 

젊은 시절의 레오 톨스토이


○ 배우, 감독 챨리 차플린(Charlie Chaplin: 1899-1977). 희대의 배우인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었다. 영화를 제작하게 되면 음악감독의 역할도 했다. 그러한 차플린인데 악보를 볼줄 몰랐다. 그런데도 그는 노래를 부르고 작곡을 했다. 차플린은 그가 나오는 영화의 음악을 거의 모두 그가 직접 선곡하고 편곡토록 했으며 또 어떤 노래는 직접 작곡하기 까지 했다. 작곡할 때에 차플린이 멜로디를 부르면 스태프들이 그 멜로디를 오선지에 옮기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오케스트레이션을 만들었다. 차플린은 1973년에 영화 '라임라이트'(Limelight)로 오스카 최우수 음악상을 받았다. '라임라이트'는 1952년도 영화였다. 차플린이 주연, 감독한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라임라이트'의 음악은 차플린이 직접 작곡했다. 그 중에서도 '테리의 주제'(Terry's Theme)은 너무나 유명해서 사람들이 거리에서 부를 정도였다. 편곡은 오랜 콤비인 레이 라슈(Ray Rasch)가 맡았다. 아무튼 차플린은 세기의 명배우였고 또한 음악적으로도 뛰어난 재능의 스타였다.


찰리 차플린


○ 배우,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 1930-). 엔리코 모리코네의 음악과 함께 터프한 모습으로 기억에 남아 있는 배우 겸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작곡에도 재능이 있어서 몇개의 작품을 작곡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2003년에 그가 감독한 영화인 Mystic River의 주제가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노래를 작곡했지만 오케스트레이션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음악적 감각을 뛰어나서 그가 감독한 영화의 음악들은 대체로 그가 주선하고 스크린한 것 들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 배우, 영화감독 안소니 홉킨스(Anthony Hopkins: 1937-). 영화 '양들의 침묵'으로 유명한 안소니 홉킨스는 뛰어난 작곡가였다. 2007년도 영화인 '슬립스트림'(Slipstream)은 홉킨스 경이 멜로디를 작곡했을 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 편곡도 했고 그리고 지휘도 했다. 홉킨스는 자기의 작곡 스타일을 '프리 스타일'이라고 밝히면서 스크리아빈이나 드비시, 또는 라벨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현대적인 기법에만 집착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작곡한 And the Walz Goes on은 마치 클래식 왈츠를 듣는 듯한 느낌이다. 홉킨스의 왈츠는 안드레 류와 요한 슈트라우스 오케스트가 연주하여 더욱 널리 알려졌다. 영국의 작곡가로서 Antony Hopkins,가 있는데 그와 Anthony Hopkins를 혼돈하면 곤란하다. Antony Hopkins는 영화라고 하면 스크린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배우 안소니 홉킨스. 대표작은 '양들의 침묵'이다.


○ 작가 ETA 호프만(Ernst Theodor Amadeus Hoffmann: 1776-1822). ETA 호프만이라고 하면 자크 오펜바흐의 유일한 오페라인 '호프만의 이야기'(Le contes d'Hoffmann)의 원작 소설을 쓴 사람으로, 또는 차이코브스키가 발레음악으로 만든 '호두까기 인형'의 원작인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대왕(Nussknacker und Mausekönig)으로 유명하다. 그런 그가 작곡도 했다. 아마추어 작곡가가 아니라 기성 작곡가는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훌륭한 작품들은 작곡했다. 성악곡과 기악곡이 대부분이며 무대작품도 13편이나 남겼다. 놀라운 재능이었다. 그는 자신이 작가 겸 시인 겸 극작가이지만 오페라를 작곡할 때에는 거의 모두 다른 사람의 대본을 사용했다. 호프만 자신이 오페라의 대본을 쓴 경우는 Die Maske(마스크: 1799)와 Wiedersehn!(안녕!: 1809) 등이 전부다. 호프만의 무대작품 중에서 지금까지도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은 Undine(운디네)것이다. 오페라의 장르로 볼 때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처럼 마법오페라(Zauberoper)에 속한다. 그래서인지 호프만의 음악은 모차르트와 글룩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ETA 호프만


○ 작가 안소니 버제스(Anthony Burgess: 1917-1993). 영국 만체스터 출신의 안소니 버제스는 작가이면서 작곡가였다. 버제스는 생애를 통해서 부단히 작곡을 했다. 그래서 어느때는 '사람들이 나를 작곡을 하는 소설가가 아니라 소설을 쓰는 음악가로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하지만 그는 작가가 본업이었다. 20세기 후반 영국을 대표하는 문인이었다. 그의 대표적 소설을 1971년에 스탠리 쿠브리크가 영화로도 만든 '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이다. 그는 소설 이외에도 영화 각본이나 연극의 대본도 썼다. 대표적인 것이 '나라렛 예수'(Jesus of Nazareth)이다. 뛰어난 어학자이기도 한 그는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대본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작곡가로서 그는 생전에 250여 작품을 작곡했다. 기악곡, 실내악, 교향곡 등 여러 장르의 작품들을 작곡했다. 그의 작곡한 작품 중에서 일부는 그의 생전에 BBC 라디오를 통해서 방송되기도 했다. 교향곡 중에서 '나폴레옹 교향곡: 4악장으로 된 소설'(Napoleon Symphony: A Novel in Four Movements: 1974)은 베토벤의 교향곡 3번인 '에로이카'(영웅)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 1991년의 '모차르트와 늑대 무리'(Mozart and the Wolf Gang)는 모차르트의 교향곡 40번을 참고로 삼아서 모차르트의 소리와 리듬을 반영한 것이다. 버제스는 푸가 스타일을 특히 좋아했는데 그의 자서전을 쓴 폴 필립스는 그의 음악을 '홀스트와 힌데미트의 혼합물'이라고까지 말했다.


안소니 버제스


○ 천문학자 윌리엄 허셸(William Herschel: 1738-1822). 독일 하노버 출신의 윌리엄 허셸은 19세 때에 아버지를 따라서 영국으로 이민을 가서 지냈기 때문에 영국의 천문학자 겸 작곡가로서 알려져 있다. 허셸의 아버지는 하노버에서 군악대원이었기 때문에 허셸도 영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아버지가 속한 군악대의 멤버였다. 그러다가 영국에 가서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했다. 그는 놀랍도록 다작의 작곡가였다. 24개의 교향곡, 7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등 수백곡의 작품을 남겼다. 천문학자로서 그는 1781년에 천왕성(Uranus)를 발견했고 이어 티타니아, 오베론 등 소행성을 발견했다.


윌리엄 허셸


○ 영국왕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 여섯 명의 왕비로 유명한 헨리 8세는 연애와 사냥만 잘 한 것이 아니라 작곡도 했다. Pastyme with good companye(좋은 사람과 함께 지낸 지난날)은 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가장 즐겨부르던 노래였다. 헨리 8세는 30곡이 넘는 발라드를 작곡했고 교회에서 예배 때에 부르는 찬송도 여러 편을 작곡했다. 헨리 8세도 챨리 챠프린처럼 자기의 작품이 공개석상에서 연주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영국의 민요처럼 되어 있는 '푸른 옷소매'는 16세기 초부터 사람들이 부르던 노래인데 오랫동안 이 노래도 헨리 8세가 작곡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역사상 유럽의 군주로서 작곡에 재능을 보인 사람들은 여러 명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헨리 8세가 가장 두드러진다.


영국 튜도 왕조의 헨리 8세


○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 페르디난트 3세(Ferdinand III: 1608-1657)는 1637년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으며 오스트리아 대공이었고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 보헤미아의 왕이었다. 페르디난트 3세는 음악의 파트론이었고 스스로 작곡가였다. 페르디난트 3세는 비엔나 궁정에 있으면서 이탈리아의 작곡가인 조반이 발렌티니(Giovanni Valentini)로부터 음악 수업을 받았다. 페르디난트 3세는 17세기 가장 저명한 키보드 작곡가인 요한 야콥 프로버거(Johann Jakob Froberger)와 함께 음악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두 사람은 평생을 가까운 친구로서 지냈다. 프로버거는 페르디난트 3세가 서거하자 크게 애도하여서 Lamentation faite sur la mort tres douloureuse de Sa Majeste Imperiale, Ferdinand le troisieme(페르디난트 3세 황제 폐하의 서거를 진심으로 애도하며)라는 작품을 헌정했다. 이 작품은 프로버거의 대표작이다. 또한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요한 하인리히 슈벨처(Johann Heinrich Schmelzer)도 장송곡(Teombeau)를 작곡해서 헌정했다. 페르디난트 2세가 직접 작곡한 작품으로서 오늘날까지 악보가 남아 있는 것으로는 미사곡, 모테트, 찬송가 기타 교회음악이 있다. 그리고 세속음악도 몇 작품 남아 있다. 페르디난트 3세의 대표작은 Drama musicum 이란 것이다. 17세기 예수회 신부인 아타나시우스 키르허는 Drama musicum을 대단히 뛰어난 작품이라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작품은 스승인 발렌티니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페르디난트 자신만의 개인적인 스타일과 테크닉을 엿볼수 있는 작품이다. 페르디난트 3세의 작품으로서 음반으로 남아 있는 것은 Jesu Redemptor Omnium, Deus Tuorum, Humanae Salutis 등이 있다. 페르디난트 3세의 아들인 레오폴드 1세는 선친을 위해서 Sonata Piena: Laudate Pueri를 작곡했다. 이곡은 1997년 비너 아카데미가 음반으로 취입했다.


○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드 1세. 레오폴드 1세(Leopold I: 1640-1705)는 페르디난트 3세의 첫번째 부인인 스페인의 마리아 안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로서 아버지 페르디난트 3세와 마찬가지로 음악의 후원자였으며 작곡가였다. 레오폴드는 형인 페르디난트 5세가 1654년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형의 뒤를 이어 1658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선출되었다. 레오폴드 1세의 치세는 동쪽으로는 오토만 제국과 분쟁이 있었고 서쪽으로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경쟁적인 관계에 있어서 혼란스러웠다. 오트만 제국과의 전쟁에서는 유명한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가 탁월한 군사적 능력으로 승전을 거둔 것이었다. 레오폴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고 난 후인 1666년에 스페인의 필립 4세의 딸인 마르가리타 테레자(1651-1673)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같은 합스부르크 가족으로서 서로 사촌간이면서 또한 조카 삼촌사이였다. 마르가리타 테레자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걸작인 라스 메니나스(Las Meninas)에 나오는 블론드의 공주이다. 마르가리타 테레자는 15세에 레오폴드와 결혼하여 네 자녀를 생산하였고 2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레오폴드는 진심으로 마르가리타 테레자를 사랑하였기에 크게 상심하였고 그의 음악 작품에도 그의 비탄의 심경을 반영하였다. 음악을 사랑했고 또한 음악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던 레오폴드는 비엔나 궁정에 당대의 저명한 작곡가들인 안토니오 베르탈리(), 조반니 보노치치(), 요한 카스파르 케릴(), 페르디난트 토비아스 리히터(), 알레산드로 폴리에티(), 요한 푹스() 등을 초빙하여 음악활동을 하도록 했다. 레오폴드의 작품 중에서 오늘날 까지도 남아 있는 몇 작품을 보면 이들 궁정 작곡가 중에서 특히 베르탈리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수 있다. 레오폴드 1세의 오라토리오와 기타 드라마틱한 작품들은 비엔나 작곡가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발레곡과 장슈필 스타일의 독일 코미디 작품들은 요한 하인리히 슈멜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레오폴드의 작품 중에서 아무래도 대표적인 것은 교회음악이다. 레오폴드 1세가 첫번째 부인인 마르가리타 테레자의 서거를 애통해 하여서 작곡한 진혼미사곡인 Missa angeli custodis는 뛰어난 작품이다. 그리고 두번째 부인의 장례를 위해서 작곡한 Three Lections도 유명하다. 레오폴드 1세의 작품들은 대체로 그의 아버지인 페르디난트 3세의 작품과 함께 출판되었다.


  

페르디난트 3세, 레오폴드 1세, 그리고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라스 메니나스에서 마르가리타 공주


○ 천문학자 패트릭 무어 경(Sir Patrick moore: 1923-2012). 패트릭 무어 경은 최근까지도 BBC 4의 인기 프로그램인 The Sky at Night(밤 하늘)의 해설가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러한 천문학자가 자일로폰 연주의 대가였고 또한 작곡가였다. 스콧 조플린 스타일의 래그타임 피아노 곡으로부터 교향시 Phaethon's Ride에 이르기까지 여러 작품을 작곡했다. Phaethon's Ride는 로열 스코티쉬 내셔널 오케스트라가 음반으로 취입하기까지 했다. 패트릭 무어 경의 음악적 진면목은 그의 오페라에 있다. Perseus(페르세우스), Theseus(테세우스), Galileo(갈릴레오) 이상 세 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패트릭 무어 경


○ 알버트 공(Prince Albert: 1819-1861).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인 알버트 공은 뛰어난 오르가니스트였으며 또한 작곡가였다. 멘델스존은 영국을 방문했을 때 알버트 공이 오르간을 연주하는 것을 보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알버트 공의 오르간 연주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정확한 것이었다. 알버트 공은 여러 곡의 노래와 합창곡을 작곡했다. 알버트 공이 작곡한 Jubilate Deum은 간혹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연주되어서 모두를 기쁘게 했다. 누가 그랬는가? 19세기 영국은 음악의 황무지라고! 그러나 알버트 공을 알고 나서는 그런 소리를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알버트 공도 실은 독일 출신이다. 


알버트 공. 런던에는 그를 기념하는 로열 알버트 홀이 있어서 매년 프롬스 음악회가 열린다.


○ 정치가 이보 요시포비치(Ivo Josipovic: 1957-). 트럼프 대통령이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했고 마크롱 대톨령이 교향곡을 작곡했다면 믿을수 있을까? 그럴리가 없다. 그런데 2010년 2월에 크로아티아의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보 요시포비치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전위음악 작곡가이다. 그는 법률가 또는 대학교수 보다는 음악가로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작곡한 Samba de Camera는 1995년 유럽방송연맹상을 받았다.


이보 요시포비치 크로아티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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