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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사랑을 주제로 삼은 작품들

정준극 2017. 5. 24. 06:57

조국사랑을 주제로 삼은 작품들

민족주의 시기의 뜻깊은 산물


조국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조국이 싫어서 떠난 사람이라고 해도 마음 속에 품은 조국에 대한 그리움은 지워지지 않는 것이 사람의 심정이다. 작곡가들 중에는 조국을 진정으로 사랑해서 조국을 위한 작품을 만든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조국사랑 작품으로 인하여 국민들의 애국심이 크게 진작된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런 작품들을 소개한다.


○ 베드리치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Ma Vlast: My Fatherland)


체코의 중심도시인 프라하를 가로 지르며 흐르는 블타바(몰다우) 강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체코 작곡가들은 국민주의 정신을 깊이 품고 있었다. 나라가 오랜 기간동안 주변 강대국의 통치를 받아왔고 그러한 고통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베드리치 스메타나(Bedrich Smetana: 1824-1884)의 기념비적인 교향시 '나의 조국'은 다른 모든 체코 작곡가들의 조국사랑 작품들과는 비견할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인 것이다. 이 곡을 들으면 조국 체코(보헤미아)를 사랑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온다. 연주시간이 거의 70분이나 걸리는 '나의 조국'은 여섯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 파트는 Vysehrad(비세라드: 높은 성)이다. 하프 솔로가 한때 강성했던 보헤미아의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어일으키게 한다. 두번째 파트는 Vltava(블타바)이다. 블타바는 체코어이고 몰다우는 독일어이다. 때로는 힘차게 때로는 도도하게 흐르는 블타바 강이 프라하를 가로지르기도 하고 보헤미아의 평야를 적시기도 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그렸다. 세번째 파트는 Sarka(사르카)이다.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권익을 위해 과감히 항쟁을 펼친 전설적인 여전사 사르카에 대한 이야기이다. 네번째 파트는 Z ceskych luhu a haju(츠 체스키츠 루후 아 하유)이다. '보헤미아의 숲과 평야로부터'라는 의미이다. 보헤미아의 아름다운 산하를 그린 것이다. 다섯번째 파트는 Tabor(타보르)이다. 보헤미아의 도시인 타보르를 말한다. 종교개혁 이후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들이 로마 가톨릭과 영광스럽게 투쟁하는 내용을 그렸다. 실상 역사적으로 유명한 유럽의 30년 전쟁은 보헤미아에서 합스부르크가 보낸 로마 가톨릭 대표를 몰아냄으로서 발발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섯번째 파트는 Blanik(블라니크)이다. 보헤미아의 산의 이름이다. 전설에 따르면 체코가 외세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일단의 보헤미아 기사들이 블라니크 산에 운집하여 조국 보헤미아를 수호키로 다짐했다고 한다.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은 너무나 귀중한 조국사랑의 음악이어서 대체로 '나의 조국'을 연주하기 전에는 체코의 국가인 Kde domov muj(나의 조국은 어디에 있는가?: Where My Home Is?)를 연주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다. 국민들이 '나의 조국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으면 '나의 조국'이라고 화답하는 형식이다.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특히 두번째 파트인 '블타바'(몰다우)를 듣고 있으면 조국 사랑에 대한 마음이 저절로 치솟는다.


블타바를 내려다보며 서 있는 비세라드(높은 성)

   

○ 얀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Finladia)


얀 시벨리우스(Jan Sibelius: 1865-1957)의 교향시 핀란디아만큼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이 스며있는 작품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핀란디아는 북구의 핀란드를 달리 표현한 단어이다. 핀란드도 우리나라만큼 오랜 고난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웃나라들인 러시아와 스웨덴, 심지어는 발트 해의 나라들의 침략을 받아 점령당해서 고통 속에서 지내야 했다. 시벨리우스가 활동하던 당시에 핀란드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러시아는 엄격한 검열을 통해서 핀란드 국민들의 자유를 속박하였다. 러시아는 각종 공연에서도 검열을 앞세웠지만 특히 언론에 대한 검열을 엄격히 했다. 그래서 핀란드 국민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못했고 알고 싶은 것이 있어도 알지 못하고 지냈다. 핀란드의 언론들은 러시아의 혹독한 검열에 항의해서 스스로 언론자유를 선언하고 기념행사를 갖게 되었다. 핀란드의 언론사 대표들은 시벨리우스에게 기념행사에서 연주할 작품을 하나 작곡해 달라고 요청했다.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는 그렇게 해서 탄생하였다.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어1900, 그러니까 시벨리우스가 35세일 때에 헬싱키에서 처음 연주되었다. 그런데 시벨리우스는 제목을 핀란디아라고 하면 러시아 당국이 검열을 앞세워서 승인하지 않을 것을 알고 검열을 피하기 위해 제목을 바꾸었다. 헬싱키에서 처음 연주될 때에는 핀란드에서 봄이 시작되는 행복한 감정이라는 제목을 사용했다. 그후 다른 곳에서 연주될 때에는 스캔디나비아 합창 행진곡이라는 제목으로 위장을 해서 검열을 통과했다.

 

헬싱키에 있는 얀 시벨리우스 기념 조형물


핀란디아는 핀란드 국민들의 독재와 억압에 대한 투쟁을 표현한 작품이다. 활발하고 감동적인 음악이다. 피날레에는 핀란드 찬가라고 알려진 멜로디가 나온다.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차분하고 평화스러운 멜로디이다. 자유와 평화를 갈망하는 핀란드 국민들의 염원이 담겨 있는 멜로디이다. 이 멜로디에 대하여는 사람들이 핀란드의 전래 민요에서 멜도디를 가져온 것이 아나냐는 주장을 했지만 시벨리우스가 창작한 멜로디인 것으로 밝혀졌다.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에 나오는 핀란드 찬가를 핀란드의 국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핀란드 국가는 스웨덴의 작곡가가 작곡한 마아메또는 보트 란드라는 것이다. 보트 란드라는 말은 우리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국가는 독일에서 핀란드로 이민온 작곡가가 작곡한 것이고 가사는 스웨덴의 시인이 쓴 것이어서 스웨덴 말로 되어 있다. 그래서 핀란드 국민들은 그럴바에야 시벨리우스의 핀란드 찬가를 국가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을 내세웠었다. 그런데 사회의 일각에서는 핀란드 찬가핀란디아의 작품 속에 살아 있어야 하며 그것을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리고 더구나 핀란드 찬가는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이 배우기에는 어려운 곡이라는 점도 강조되었다. 그래서 핀란드 찬가는 아직 핀란드의 국가로 채택되지 않았다. ‘핀란디아는 음악적으로 일곱 파트로 나뉘어져 있는데요 핀란드 찬가는 마지막 파트에 나오는 음악이다. '핀란드 찬가'의 원래 제목은 핀란드는 깨어났다였다. ‘핀란드 찬가는 너무나 유명해서 여러 방면으로 사용되고 있다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한 때 존재했던 아프리카의 신생국가인 비아프라는 핀란드 찬가떠오르는 태양의 나라라는 제목의 국가로 삼았었다.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 있는 세계적 명문 대학교인 라이스대학교는 핀란드 찬가를 교가로 삼고 있다. ‘핀란드 찬가의 멜로디는 특히 기독교의 개신교에서는 찬송가로 편곡해서 사용하고 있어서 널리 알려져 있다.



핀란드는 지리적으로 북극에 가깝기 때문에 아름다운 오로라를 볼수 있다. 아름다운 핀란드의 산하이다. 


○ 베토벤의 '게르마니아'(Germania)


루드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교향곡 3번 일명 '에로이카'(영웅)는 처음에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나폴레옹이 공화제를 폐지하고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자 베토벤은 '역시 그도 속물이구나'라고 말하고는 나폴레옹에게 헌정한다는 글이 적힌 교향곡 3번 악보의 표지를 찢어버렸다. 그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난 때에 베토벤은 독일 민족주의 운동에 마음이 쏠렸고 그 운동이 비엔나로까지 밀어 닥치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는 중에 독일은 프랑스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아 오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니 그것이 독일 해방전쟁(Befreiungskriege)이다. 해방전쟁에서 독일(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오스트리아의 프란시스 1세가 협력하여 나폴레옹을 크게 물리치자 독일 내에서는 독일의 단결과 통일을 염원하는 애국적인 사상이 더없이 치솟아 올랐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동하여서 나폴레옹을 물리쳤다는 소식이 비엔나에 전해지자 비엔나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일 라이프치히 출신의 시인이며 극작가인 프리드리히 트라이츄케(Friedrich Treitschke: 1776-1843)는 '기쁜 소식'(Die gute Nachricht)이라는 징슈필 극본을 만들었다. 비엔나의 여러 작곡가들이 '기쁜 소식'의 대본에 음악을 붙이게 되었고 베토벤도 하나의 노래를 작곡해서 기여하였다. 트라이츄케는 베토벤과도 친분이 두터웠던 사람이었다. 베토벤이 트라이츄케의 징슈필인 '기쁜 소식'을 위해 작곡한 노래가 독일, 즉 Germany를 의인화한 '게르마니아'(Germania)였다. 베토벤의 애국정신과 조국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는 노래이다.


 

베토벤과 프리드리히 트라이츄케


게르마니아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전부 5절로 되어 있으나 3절과 5절만을 소개한다.


3. Germania, Germania,(게르마니아, 게르마니아)
Wie stehst du jetzt gewaltig da.(우리 앞에 당당히 서 있도다)
Nennt deutscher Mut sich deutsch und frei,(독일의 용기가 독일과 자유를 외치도다)
Klingt Friedrich Wilhelm Dank dabei.(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에게 감사를 드리자)
Ein Wall von Eisen stand er da.(그는 철벽과 같도다)
Preis ihm, Heil dir, Germania.(그를 찬양하라, 게르마니아 만세)


5. Germania, Germania,(게르마니아, 게르마니아)
Wie stehst du ewig dauernd da.(영원불멸하게 서 있도다)
Was Sehnsucht einzeln still gedacht,(모든 사람의 소망은 무엇인가)
Wer hat’s zu einem Ziel gebracht?(그 누가 소망을 이루어 줄 것인가)
Franz, Kaiser Franz – Viktoria!(프란츠, 프란츠 황제, 승리로다)
Preis ihm, Heil dir, Germania!(그를 높이 찬양하가, 게르마니아 만세)


독일 해방전쟁(Befreiungskriege) 중의 라이프치히 전투.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모슈코프(1792-1839) 그림.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1제국은 독일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에 유럽의 다수 국가들이 참여하여 나폴레옹에게 빼앗긴 자역들을 해방시키려는 전쟁이 벌어졌다. 그것이 독일 해방전쟁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라이프치히에서 프랑스 연합군을 크게 물리친 소식이 전해지자 독일에서는 민족주의가 되살아났다.

 

○ 안토닌 드보르작의 '나의 고향'(Domov muj: My Home)


안토닌 드보르작(Antonin Dvorak: 1841-1904)도 스메타나 만큼이나 조국 체코(보헤미아)를 사랑한 작곡가였다. 드로브작의 '나의 고향 서곡'(Op 62)에는 체코의 국가인 Kde domov muj?(나의 고향은 어디에?)의 멜로디가 나온다. 물론 그 노래가 체코의 국가로 선정되기 이전의 일이다. 드보르작이 1882년에 완성한 '나의 고향 서곡'은 체코의 국민극작가인 프란티세크 페르디난드 삼베르크(Frentisek Ferdinand Samberk)의 연극인 '요제프 카예탄 틸'(Josef Kajetan Tyl)을 위한 극음악 중의 하나이다. 드보르작은 '요제프 카예탄 틸'을 위해 9곡의 극음악을 작곡했다. 연극 '요제프 카예탄 틸'은 체코의 극작가인 요제프 카예탄 틸의 생애를 그린 작품이다. 서곡에는 주인공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두 개의 테마 노래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프란티세크 스코로우프(Frantisek Skroup: 1801-1862)가 작곡한 Kde domov muj(나의 고향은 어디에?)이며 다른 하나는 민속 멜로디인 Na tom nasem dvore(우리집 뒷 마당에)이다. 스코로우프의 '나의 고향은 어디에?''의 가사는 다름아닌 요제프 카예탄 틸이 쓴 것이다. 이 노래는 1834년에 발표되자 마자 사람들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마침내 나중에는 체코 국가가 되었다. '우리집 뒷마당'은 역시 요제프 카예탄 틸이 쓴 희곡인 Strakonicky dudak(스트라코니체의 백파이프 부는 사람)에서 극음악으로 사용된 일이 있다. 드보르작의 '나의 고향 서곡'은 비록 극음악이지만 콘서트에서 별도 레퍼토리로 연주되는 경우가 많다. 조국을 사랑하고,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는 작품이다.


 

안토닌 드로브작과 체코 국가를 작곡한 프란티세크 스크로우프


○ 조르즈 비제의 '조국'(Patrie) 서곡


조르즈 비제(George Bizet: 1838-1875)의 '조국' 서곡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국심을 갖게 해주는 곡임에는 틀림없다. 원래의 제목은 Overture dramatique our Grand Orchestre(그랜드 오케스트라를 위한 드라마틱한 서곡)이다. 비제가 조국 프랑스를 깊이 사랑해서 이 곡을 작곡했는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기록에 나와 있는 내용은 1873년에 지휘자인 쥘르 에티엔느 빠들루(Jules Etienne Pasdeloup)의 요청으로 작곡했다고 되어 있다.  당시는 프랑스가 보불전쟁에서 비록 승리를 했지만 여러가지로 국민들의 사기가 침체되어 있던 때였다. 보불전쟁을 1870년에 시작되어 1871년에 막을 내렸다. 그래서 아마 지휘자인 빠들루가 파리 시민들을 위한 애국적인 음악이 필요해서 비제에게 작곡을 부탁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짐작이다. 아무튼 초연은 1874년에 이루어졌다. 대인기를 끌었다. 당장이라도 전쟁이 벌어지면 총을 들고 전선으로 달려가겠다고 소리치는 사람이 많을 정도였다. 비제는 이 작품을 동료인 쥘르 마스네에게 헌정했다. 당시에 마스네는 무명의 작곡가였다. 마스네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81년 오페라 '에로디아드'와 1884년 오페라 '마농'으로부터였다. 비제가 '조국 서곡'을 마스네에게 헌정한 것은 작곡가로서 앞으로의 성공을 바라는 의미에서였을 것이다.  '조국 서곡'은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파트인 도입부는 격렬한 전투장면을 연상케 하는 음악으로 되어 있다. 두번째 파트는 잠시 총성을 멈춘 평온한 분위기이다. 셋째 파트는 승리의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 웅장한 코다로 마무리 된다. '조국 서곡'은 초연 이래 한동안은 열렬한 사랑을 받았지만 얼마후 부터는 어쩐 일인지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심지어는 비제가 그런 곡을 작곡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마 '카르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국 서곡'과 같은 작품은 잊혀졌던 것으로 보인다.


보불전쟁 중의 세당 전투


○ 알렉산더 보로딘의 '중앙 아시아의 스텝에서'(In the Steppes of Central Asia)


알렉산더 보로딘(Alexander Borodin: 1833-1887)의 교향시 '중앙 아시아의 스텝에서'는 원래 제목이 간단히 '중앙 아시아'(In Central Asia: V srednyeu Azii)였으나 영어로 소개할 때에 '중앙 아시아의 스텝에서'라는 타이틀로 번역되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보로딘이 1800년에 이곡을 작곡하게 된 것은 당시 제정러시아의 짜르인 알렉산더 2세의 치세 25주년을 기념해서였다. 짜르 알렉산더는 치세 중에 러시아의 영토를 동쪽으로 상당히 확장하는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적들도 만들어서 암살의 위험까지 느끼고 지내야 했다. 그래서 원래 연주하려던 1880년 1월의 날짜는 짜르가 암살의 위험 때문에 무기연기하는 바람에 미안한 처지가 되었으나 주위에서 그럴수는 없다고 해서 결국 그해 4월 말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오페라의 오케스트라가 초연을 했다. 지휘는 림스키 코르사코프였다. 보로딘은 이 작품을 당대의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에게 헌정했다. 중앙 아시아의 초원에서 대상들이 낙타를 이끌고 서서히 움직이는 모습, 그 대상들을 보호하

는 러시아 기마대의 모습 등이 그림처럼 표현되어 있다. 이 곡을 들으면 불현듯 중앙 아시아의 넓은 초원에서 말을 달리던 생각을 갖게 한다. 중앙 아시아가 고향인 사람들은 저절로 고향생각을 갖게 된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중앙 아시아의 초원에서


○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An der schönen blauen Donau): 오스트리아 제2의 국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Johann Strauss II: 1825-1859)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간단히 '도나우 왈츠'라고 부름) 1867년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에서 연주하기 위해 작곡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아름다운 오스트리아, 아름다운 비엔나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도나우를 생각했고 도나우의 아름다움을 그린 왈츠를 작곡하기로 생각했다. '도나우 왈츠'는 파리로 떠나기 전에 비엔나 남성합창협회의 콘서트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그때에는 앙상블에 의한 왈츠 연주였다. '도나우 왈츠'는 처음부터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도나우의 아름다움을 너무나 아름답게 그렸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왈츠로서는 예외가 될지 모르지만 가사를 붙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남성합창협회에 소속된 시인인 요제프 봐일(Joseph Weyl)이 아름다운 시를 썼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사람들이 '도나우 왈츠'를 말할수 없이 좋아하니까 '도나우 왈츠'를 조금 더 길게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뒷부분에 음악을 추가했다. 음악이 길어지자 가사도 더 길어져야 했다. 봐일이 가사를 추가하여 완성시켰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도나우 왈츠'를 파리에서 연주하려면 순수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풀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소개된 '도나우 왈츠'는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얼마후 프란츠 폰 게르네트(Franz von Gerneth)라는 시인이 '도나우 왈츠'의 가사를 새로 만들어서 봐일의 가사를 대체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폰 게르네트의 시는 '너무나 푸른 도나우'(Donau so balu)라는 제목이었다.


비엔나의 도나우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도나우 왈츠'를 작곡할 즈음에는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기분이 무척 우울한 때였다. 왜냐하면 오스트리아가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상당한 손해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도나우 왈츠'는 실의에 빠져 있는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마음을 북돋아주는 역할이었다. '도나우 왈츠'가 나오자 사람들은 열광했다. 오스트리아의 국민들은 '도나우 왈츠'를 오스트리아 제국의 제2의 국가처럼 여기고 불렀다. 요제프 봐일의 가사는 그런 배경에서 만들어졌다. 다만, 한가지 흠이 있다면 오리지널 가사에 나오는 도나우는 비엔나의 도나우가 아니라 헝가리의 바자(Baja: 독일어로는 Frankenstadt)를 흐르고 있는 도나우에 대한 것이었다. 가사를 쓴 요제프 봐일은 오스트리아의 칼 이시도르 베크(Karl Isidor Beck)를 존경하였는데 바자는 바로 칼 이시도르 베크의 고향이었다. 나중에 프란츠 폰 게르네트가 쓴 가사는 좀 더 공식적인 표현으로 된 것이었다. Donau, so blau, so schön und blau, durch Tal und Au, wogst ruhig du hin, dich grüsst unser Wien(도나우, 너무나 푸른, 너무나 아름답고 푸르다. 계속과 평원을 지나서 조용히 흐르는 그대, 우리의 빈이 그대를 반기도다) 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비엔나의 노이에 도나우와 강 가운데의 도나우인젤


'도나우 왈츠'는 미국 뉴욕에서 그해 9월에 처음 소개되었다. 대인기였다. 미국의 팬들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한번 미국에 와서 직접 지휘도 하고 바이올린도 연주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했다. 그러한 소원은 1872년 여름에 이루어졌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그의 오케스트라는 미국의 인기 악단장인 페트릭 길로어의 초청으로 보스턴 음악제에 참석해서 지휘를 했고 또한 뉴욕에서도 여러차례 비엔나 왈츠를 지휘했다. 특히 1천명 연주자가 등장하는 '괴물 콘서트'(Monster Concert)를 지휘한 것은 역사에 남는 기록이다. 이 콘서트는 세계평화 축제와 국제음악제가 주관한 것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이런 연주회를 통해서 당연히 '도나우 왈츠'를 소개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미국을 떠나 조국 오스트리아로 돌아 올 때에 기념으로 Fareweill to America(미국이여 잘 있거라)라는 왈츠를 작곡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도나우 왈츠'는 당시 비엔나에서 활동하던 여러 작곡가들에게도 많은 부러움을 산 것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친구인 브람스도 '도나우 왈츠'와 같은 훌륭한 곡을 작곡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 했다. 이런 에피소드도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공식적으로 세번이나 결혼했지만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수양딸을 하나 두었다. 알리스 폰 마이츠너 슈트라우스(Alice von Meyszner-Strauss)였다. 어느날 알리스는 수양아버지의 친구인 브람스를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부채에 사인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에는 사교 모임에서 그런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브람스는 알리스의 부채에 오선을 긋고 '도나우 왈츠'의 첫 소절의 음표들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는 Leider, nicht von Johannes Brahms 라고 썼다. 그 소절이 아쉽게도 요한네스 브람스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도나우 왈츠'는 영화음악으로도 많이 인용되었다. 대표적인 경우는 1968년 스탠리 쿠브릭의 영화인 2001: A Space Odyssey 에서 사용된 것이다. 특히 선사시대의 인간이 우주시대인 미래로 비약할 때에 '도나우 왈츠'의 첫 소절이 사용되었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오스트리아의 봐하우 지역에서


○ 호세 비안나 다 모타의 '조국 교향곡'(Symphony A Pátria)


호세 비안나 다 모타(José Vianna da Motta: 1868-1948)는 포르투갈 출신의 피아노 비루투오소이며 작곡가이다. 모타는 프란츠 리스트의 마지막 제자였다. 모타의 유일한 교향곡이 '조국 교향곡'이다. 모타는 이 교향곡을 포르투갈의 서사시인인 루이스 바스 데 카모이슈(Luis Vaz de Camões: 1525-1580)의 서사시 Os Lusiadas(우즈 루지아다슈)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 Os Lusiadas는 루수스(Lusus)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포르투갈 국민을 말한다. 우즈 루지아다슈는 15-16세기에 포르투갈의 위대한 탐험으로 인도항로가 발견된 것을 치하하며 아울러 포르투갈의 위대한 탐험가인 바스코 다 가마의 빛나는 업적과 모험을 축하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모타의 '조국 교향곡'은 조국 포르투갈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이다.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도착 장면


○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Korea Fantasy)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안익태(1906-1963)는 청년시절부터 외국으로만 돌아다니다가 스페인에 정착하였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익태로서는 조국 한국이 항상 마음 속에 그리움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안익태는 일제 강점기 치하에서 서양음악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1930년, 그가 24세일 때에 미국행 배를 탔다. 안익태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교회에 참석했다가 교인들이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의 곡조에 맞추어서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듣고 남의 나라 민요를 애국가의 곡조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안익태는 새로운 애국가의 작곡을 위해 노력하였다. 미국의 신시나티 대학교에서 첼로와 작곡을 공부한 그는 잠시 뉴욕에서 활동하다가 1936년 봄에 베를린으로 떠났다. 안익태는 베를린에서 애국가를 완성했다. 안익태는 애국가 악보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조선독립단체에 보냈고 이 단체는 여러 경로를 통해 안익태의 새로운 애국가를 보급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안익태는 애국가의 멜로디를 주제로 삼아서 교향적 환상곡(Symphonic Fantasy)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한국 환상곡'(Korea Fantasy)이다. 안익태는 한국 환상곡을 베를린에 머물면서 완성했다. 그러나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겸 지휘자인 안익태 선생


안익태는 1936년 가을에 음악의 도시 비엔나로 갔다. 그는 비엔나에서 베토벤 해석의 권위자인 베른하르트 파움가르트너 교수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듬해인 1937년에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로 가서 졸탄 코다이(Zoltan Koday)의 문하에 들어갔다. 안익태는 코다이로부터 한국적인 선율을 '한국 환상곡'에 대입하는 테크닉을 배웠다. 그리하여 '한국 환상곡'은 사실상 완성되었다. 안익태는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부터 '한국 환상곡'의 초연을 주선하겠으니 지휘를 맡아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그리하여 '한국 환상곡'은 1938년 2월 20일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안익태의 지휘로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다. 아일랜드는 당시에도 그랬지만 오래전부터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아일랜드 국민들은 한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서로 감정이 통했다. 그런 연고 때문인지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은 아일랜드에서 많은 찬사를 받았다. 더블린 연주를 마친 안익태는 비엔나로 가서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안익태는 헝가리 정부의 장학생으로 외트뵈스 로란드(Eötvös Rolánd) 대학교를 졸업할수 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멀리 동양에서 온 안익태를 대단히 전도유망한 청년으로 보았다. 어느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지휘해야 하는 부다페스트 연주가 있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안익태에게 대신 지휘토록 했다. 지휘 경력을 위해서였다. 안익태는 지휘 준비를 그야말로 불철주야로 했다. 그러다가 연주회의 마지막 프로그램에서 그만 너무 지쳐서 지휘를 하다가 쓰러졌다. 부다페스트의 현지 언론들을 그런 안익태를 높이 평가하였다.


eak tai ahn and richard strauss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지도를 받는 안익태


1938년 2월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초연된 '한국 환상곡'은 그후 약간의 보완을 거쳐서 1958년 미국 헐리우드에서 연주되었다. 그것이 오늘날에도 연주되고 있는 완성된 작품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한국 환상곡'이 초연된 것은 1961년 이승만 대통령 탄신일을 기념한 음악회에서였다. 안익태가 초청을 받아 지휘했다. '한국 환상곡'은 신화시대에 한국이 탄생한 이야기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내온 한국의 저력, 그리고 외적의 침략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펼치고 마침내 해방을 쟁취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는 그야말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표현해 주고 있다. 목탁소리, 피리소리, 장고소리 등이 들린다. 피날레 파트에서는 애국가의 멜로디와 함께 '대한, 대한, 만세, 만세'의 가사로서 클라이막스를 이루어 감동을 준다. 연주시간은 약 30분이 걸린다. '한국 환상곡'은 중국, 일본, 남미,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연주되었다. 외국 합창단이 우리 말로 '동해물과....만세...'라면서 노래하는 것을 들으면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가슴이 메어질 지경이다. '한국 환상곡'은 조국을 사랑하는 국민 모두의 마음이 담아 있는 작품이다.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 있는 안익태 선생 기념상

 

다른 나라의 저명한 작곡가가 작곡한 '한국 교향곡'이 있다. 폴란드의 크리스토프 펜데레키(Krzysztof Penderecki: 1933-)의 교향곡 5번에는 '코리안'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오페라 '실락원'(Paradise Lost) 등으로 유명한 펜데레키는 '한국 교향곡'을 1992년에 완성했다. 또 하나 한국적인 소재의 교향곡이 있다. 아르메니아계의 미국인인 알란 보바네스(Alan Hovhanese: 1911-2000)의 교향곡 16번에는 '가야금'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알바네스는 1959년부터 1963년까지 인도, 일본, 한국 등 아시아를 여행하면서 직접 그나라의 악기를 배우고 그나라의 전래 민요를 수집하여 자기의 작품에 인용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교향곡 '한국'을 작곡한 폴란드의 펜데레키와 교향곡 '가야금'을 작곡한 미국의 호바네스


○ 에드워드 엘가의 '위풍당당한 행진곡'(Pomp and Circumstance March)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 1857-1934)의 '위풍당당한 행진곡'은 여섯 곡의 행진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첫번째 행진곡에는 아더 크리스도프 벤슨(Arthur Christoph Benson)이 쓴 '희망과 영광의 나라'(Land of Hope and Glory)라는 노래가 나오기 때문에 영국 국민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고 있다. 영국 국민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위풍당당한 행진곡'에서 '희망과 영광의 나라'가 나오면 그자리에서 무릎을 굽혔다 펴기를 반복한다. 마치 제자리 뜀을 하는 것 같다. 특히 연례 행사인 BBC의 프롬스 연주회가 있으면 '위풍당당한 행진곡'은 거의 단골 프로그램이 된다. 그리고 프롬스 연주회장인 로열 알버트 홀에 들어가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하이드 파크의 넓은 광장에 모여서 실황 중계를 보게 되는데 이때 '희망과 영광의 나라'가 나오면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모두 합심해서 애국자들이 된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희망과 영광의 나라' 노래를 '룰 브리타니아'와 함께 제2의 국가로 여겨 시도 때도 없이 소리 높이 부르고 있다. 


로열 알버트 홀에서의 2012년도 프롬스. 엘가의 '위풍당당한 행진곡'에서 '희망과 영광의 나라'가 나오자 모두들 깃발을 흔들며 환호하였다.


영어로 Pomp and Circumstance를 '위풍당당'이라고 번역했는데 그거야 그렇다고 치고 그러면 Pomp and Circumstance 라는 용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알아보자. 셰익스피어의 비극인 '오텔로'에 나오는 구절이다. 오텔로가 베니스의 함선들을 이끌고 지중해에서 해적질을 하는 터키 해적선들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를 벌이기에 앞서 외치는 구절이다. '오텔로' 3막 3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Farewell the neighing steed and the shrill trump,

The spirit-stirring drum, th'ear-piercing fife,

The royal banner, and all quality,

Pride, pomp, and circumstance of glorious war! 


한편, '희망과 영광의 나라'의 1절 가사는 다음과 같다.


Land of Hope and Glory, Mother of the Free,

How shall we extol thee, who are born of thee?

Wider still and wider shall thy bounds be set;

God, who made thee mighty, make thee mightier yet,

God, who made thee mighty, make thee mightier yet.


'위풍당당한 행진곡'은 분명히 영국의 작곡가가 작곡한 것인데 미국의 대학교에서 졸업식 때마다 마치 자기들의 전유물인듯 연주하는 관례가 있다. 엘가는 1905년에 예일대학교 음악교수인 친구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였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예일대학교에서 명예음악박사 학위를 수여한다고 하니까 마지못해 갔었다. 학위 수여식이 끝나자 예일대학교 오케스트라는 엘가의 '위풍당당한 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로부터 미국에서는 여러 대학들이 앞을 다투듯이 졸업식 때마다 '위풍당당한 행진곡'을 연주하였다. 물론 이 곡은 오텔로의 전투를 격려하는 내용의 곡이지만 졸업생들을 격려하는 내용으로서도 크게 잘못은 없다.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의 '위풍당당한 행진곡' 연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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