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시컬 뮤직 팟푸리/클래시컬 뮤직 팟푸리

위대한 작곡가들의 바람직하지 않은 버릇

정준극 2017. 5. 28. 17:59

못된 버릇의 작곡가들


위대한 작곡가들도 사람이다. 사람이라면 실수도 있고 잘못도 있으며 이상한 행동도 할수 있다. 자만과 허영, 욕심과 욕망, 무모함, 공연한 분노 등등....아무리 위대한 작곡가라고 해도 이런 바람직하지 않은 버릇들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작곡가들은 융통성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고집이 세고 남을 포용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기의 잘못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 루드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악성이라고 추앙받는 베토벤은 누가 뭐래도 깔끔하거나 청결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숙집에 갔던 친구들은 방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방 한쪽 구석에는 먹다 남은 음식이 접시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먹다 남은 음식이 있는 접시의 밑에는 베토벤이 작곡한 오선지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놀랄 일도 아니지만 베토벤은 늘상 하숙집 주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숙집 주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저분한 생활은 사실 그다지 문제가 아니었다고 한다. 베토벤이 그저 아무때고 피아노를, 그것도 소란스러울 정도로 두드려 대기 때문에 도무지 시끄러워서 참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또 하나 듣기 싫은 것은 베토벤이 하인에게 소리소리 지르면서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어느 날에도 하인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는데 이유는 하인이 동전 한 닢을 훔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어떤 자료에는 금화 한 닢). 베토벤이 1795년에 작곡한 Rondo a capriccio에는 '잃어버린 동전 한닢에 대한 분노'(Die Wut uber den verlorenen Groschen: Rage Over A Lost Penny)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베토벤이 하인에게 돈 한 닢을 훔쳤다고 화를 내는 내용이다. 이 부제는 베토벤이 써 넣은 것이 아니라 친구인 안톤 쉰들러가 나중에 써 넣은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이 소품 하나만 보더라도 베토벤이 얼마나 돈을 아꼈으며 화를 참지 못했는지 알수 있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 한 성질하게 생기기도 했다.


○ 얀 시벨리우스(Jan Sibelius: 1865-1957). 베토벤에게 필요했던 사람은 인생의 반려자라고 할수 있는 아내일 것이다. 착하고 성실한 아내는 남편이 못된 성격이나 버릇을 고칠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시벨리우스의 아내 아이노(Aino)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현모양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벨리우스의 못된 술 버릇은 고치지 못했다. 시벨리우스는 청년 시절에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였다. 프랑스어로 bon viveur 였다. 그는 청년 시절에 심포지움이라는 클럽을 설립했다. 속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학술토론의 모임인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실은 술마시는 클럽이었다. 핀랜드 사람들은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겨울이 길어서 그런지 술들을 잘 마시는 편인데 시벨리우스도 술이라고 하면 한가닥 하는 사람이었다. 술 퍼마시는 클럽인 심포지움은 헬싱키의 캠프(Kämp) 호텔에서 자주 모였다. 모였다 하면 말도 아니게 법석대는 술판이 벌어졌다. 몇 시간으로 끝나는 술판이 아니라 이틀 사흘이나 계속되는 행사였다. 그럴 때면 시벨리우스는 친구들과 함께 호텔에서 나와서 헬싱키에 있는 술집들을 마치 순례하듯 방문하기가 일수였다. 시벨리우스는 슈납스 또는 샴페인에 생굴 안주를 좋아했다. 어느 때는 콘서트에서 지휘를 하기로 되어 있는데 연주회장에 가기 전에 술집부터 들려서 한잔만 한다는 것이 취하지는 않았지만 입고 있던 연미복이 술세례를 받아서 말이 아니게 되었다. 결국 아내 아이노가 수소문해서 시벨리우스를 찾아내어 새로운 연미복을 입혔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며 웃음꺼리가 될 뻔했다. 아이노는 남편의 친구들에게 제발 제멋대로 고집만 부리는 술꾼 시벨리우스를 잘 좀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일과였다. 그러나 저러나 헬싱키의 웬만한 술집에서는 아이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남편 시벨리우스를 찾아서 술집마다 돌아다녔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헬싱키에 있는 얀 시벨리우스 기념공원


○ 헨리 퍼셀(Henry Purcell: 1659-1695). 1900년대 초반의 헬싱키가 시벨리우스와 연관이 있다고 하면 1680년대의 런던은 퍼셀과 연관이 있다. 런던에 있는 웬만한 주점에는 퍼셀이 작곡한 노래를 간직하고 있다. 퍼셀이 술집마다 들려서 기분이 내키면 즉석에서 오선지를 그려서 술타령 노래를 작곡해서 기념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근사한 발라드 노래도 있지만 대개는 추잡한 가사의 권주가였다. 퍼셀은 너무나 술을 좋아해서 허구헌날 늦게 집에 들어오기가 일수였다. 가끔씩은 야경꾼이 알아보고 집까지 안내해준 일도 있었다. 그나저나 너무 술을 많이 마시고 주사까지 보이고 있어서 한창 명성을 얻을 시기에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 것은 퍼셀의 어쩔수 없는 운명이었다. 퍼셀의 아내인 프란시스는 시벨리우의 아내 아이노처럼 남편을 항상 감독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프란시스는 남편 퍼셀이 분명히 술을 퍼먹느라고 집에 안들어오면 아예 문을 잠가 버렸다. 그래서 퍼셀은 어느 추운날 밤에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현관 앞에서 쭈구리고 앉아 밤을 지새는 바람에 폐염에 걸렸고 그로 인하여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났다.

 

헨리 퍼셀. 술 때문에 일찍 세상을 떠난 셈이었다.


○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e: 1845-1924). 포레의 술솜씨도 시벨리우스에 못지 않다. 1860년대 어느 때에 포레는 렌느(Rennes)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있었다. 오전 미사를 끝내고 이제 다음 날 아침 미사를 남겨 두고 있었다. 포레는 당연히 술집들을 순례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아침이 되었다. 포레는 오전 미사 때에 입는 옷을 그대로 입고서였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일단 성당으로 갔다. 아침 미사에 입는 옷을 달라야했지만 포레는 어쩔수 없이 전날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포레는 오르간이 있는 별도의 윗층에 올라가서 오르간을 연주했다. 아직 술이 깨지 않아서 음악이 난리도 아니었다. 포레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자꾸 밖으로 나가서 담배를 피웠다. 그 모습을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던 성당의 신부는 강론시간에 음주의 해독에 대하여 특별 강론을 했다. 그러나 포레는 나이가 들어서 일체 음주를 하지 않고 경건한 생활을 했다. 포레의 '진혼곡'은 그가 새로운 사람으로서 작곡한 것이다.


가브리엘 포레. 역시 술에 약했다.


○ 토마스 위클스(Thomas Weekles: 1576-1623). 토마스 위클스는 주로 교회음악을 작곡한 작곡가이며 뛰어난 오르가니스트였다. 오늘날 영국 성공회가 사용하는 찬미가 중에는 위클스가 작곡한 것이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다. 위클스는 마드리갈, 모테트, 그리고 예배 음악들을 주로 작곡했다. 그런데 역시 술버릇이 고약했다. 포레가 교회 뒷편의 오르간이 있는 위층에서 술 취해서 이런 저런 행동을 해서 눈총을 받은 것은 위클스에 비하면 유도 아니었다. 위클스는 1616년에 치체스터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봉사했는데 어느날은 술에 취해서 오르간 있는 곳(고미다락)에서 소변을 보아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 일이 있다. 그런가하면 예배 중인데도 갑자기 고래고래 소리를 치기도 해서 성직자들이 급히 달려가서 겨우 진정시킨 일도 있다. 그런데도 정신이 말짱하면 오르간을 기가 막히게 연주했기 때문에 그가 비록 술병을 꿰차고 예배에 참석한 일도 있고 예배 중에 소란을 피워서 신성모독이라는 비난까지 받았지만 1623년에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대성당 오르가니스트로 봉사했다.


토마스 위클스. 점잖은 사람이 주사가 심했다.


○ 니콜라스 공베르(Nicolas Gombert: 1495-1560). 니콜라스 공베르는 프랑스-플레미쉬 출신으로 16세기에 팔레스트리나가 등장하기 전까지 가장 뛰어났던 다성음악 작곡가였다. 그는 10개의 미사곡, 140개의 모테트, 70곡의 세속적인 샹송, 기타 마드리갈과 기악곡들을 작곡한 재능있는 작곡가였다. 그는 스페인의 카를로서 5세(샤를르 5세) 궁정에서 어린이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이른바 maitre des enfants 였다. 그는 궁정소년합창단의 지휘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는 이른바 소아성애자의 기질이 있어서 궁정소년합창단에 있는 어떤 소년을 성폭행하였다. 그 사실이 밝혀지자 카를로스 5세는 당장 그를 저 멀리 대서양의 노예선으로 보냈다. 그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공베르는 노예선의 배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가 되었다. 그런데 공베르는 노예선에서 용하게 살아 남았다. 그리고 틈만 있으면 작곡을 했다. 주로 참회를 내용으로 하는 성가였다. 그러는 중에 공베르는 그가 작곡한 성가와 함께 카를로스 5세에게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카를로스 5세는 공베르의 재능과 참회를 가상히 여겨서 그를 사면했다. 공베르가 사면을 받은 후에 어디서 무얼하고 지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니콜라스 공베르. 노예선으로 끌려간 유일한 작곡가였다.


○ 요제프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 하이든은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는 물론 여러 오라토리오와 미사곡을 만들었기 때문에 신앙심이 깊도 경건하며 진실된 사람으로서 알려져 있다. 사실 하이든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리고 하이든의 생애는 만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신실한 것이었다. 그런 하이든인데 그가 좋아하던 여자와 결혼하지 못하고 그 여자의 언니와 결혼했다. 여자의 아버지가 큰 딸을 두고 작은 딸부터 결혼시킬수는 없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결혼한 하이든은 평안할수가 없었다. 음악이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여자여서 더욱 괴리감이 많았다. 그런 하이든인지라 에스터하지궁전의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들어온 어떤 이탈리아 사람의 부인을 좋아했다. 그 여자는 소프라노여서 하이든이 작곡한 오페라에 출연하기도 했다. 아무튼 하이든은 유부녀인 그 소프라노를 좋아해서 문제가 될뻔 했지만 다행히 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무식하다고 해도 조강지처를 버릴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하이든은 소년 시절에 은근히 장난끼가 많았다. 하기야 그의 교향곡 등등을 보면 코믹하거나 풍자적인 면이 간혹 발견되어 웃음을 짓게 하는데 그런 하이든인지라 소시적에 장난끼가 많았다고 해서 크게 놀랄 일은 아닌것 같다. 한 예로서, 1849년, 그러니까 하이든이 17세 때에 학교에서 앞에 앉아 있는 어떤 학생의 땋은 머리를 가위로 잘라버린 일이 있다. 당시에는 남자들이 머리를 길러서 돼지꼬리처럼 땋아 느려 묶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 돼지꼬리 머리를 잘랐던 것입니다. 장난치고는 심한 장난이었다.


요제프 하이든. 소년시절에 장난꾸러기였다.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하이든도 농담과 해학을 좋아했지만 그의 제자인 모차르트도 농담 및 해학이라고 하면 한 술 더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마술피리'가 비에난의 프라이하우스 극장에서 처음 공연되고 있을 때 모차르트는 파파게노의 노래에 맞추어서 백 스테이지에서 글로켄슈필을 연주하곤 했다. 파가게노는 모차르트의 친구인 에마누엘 쉬카네더가 맡았다. 글로켄슈필은 파파게노가 Ein Madchen oder Weibchen(예쁜 아가씨나 귀여운 아내나)을 부를 때에 반주토록 되어 있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반주를 하다가 중간에서 하지 않고 백 스테이지에서 일부러 사라졌다. 사라진게 아니라 실은 무대 뒤에서 숨어서 쉬카네더라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고 있었다. 쉬카네더는 글로켄슈필 반주가 나오지 않자 당황해서 마치 판토마임을 연기하는 것 같았다. 객석에서 관중들이 '집어쳐라'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제서야 모차르트는 제자리로 돌아와서 히죽 웃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별로 악의 없는 장난이지만 심했다.


○ 조지 프리데릭 헨델(George Friderick Handel: 1685-1759). 하이든이나 모차르트나 장난을 좋아했고 농담을 좋아했지만 이번에는 위대한 작곡가가 오히려 당한 경우이다. 헨델은 전설적일 정도로 화를 잘 냈다. 헨델은 청각이 너무 발달했는지 오케스트라석에서 악기를 조율하는 소리를 참지 못했다. 오케스트라 멤버들은 마에스트로가 콘서트 홀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튜닝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어느때 신참 멤버가 그런 내용도 모르고 헨델이 잠시 차한잔 마시러 나간 사이에 오케스트라석에 들어와서 튜닝을 했다. 헨델이 돌아와서 리허설을 하려고 보니 악기 하나의 음이 영 아니올시다였다. 화가 치민 헨델은 쓰고 있던 가발을 벗어들고 갈기갈기 찟기 시작했다. 이어서 헨델은 그 신참에게 다가가서 주먹 한방을 날렸다. 대단한 헨델이었다.


조지 프리데릭 헨델. 신앙심이 대단했지만 한 성질하는 사람이었다.

 

○ 아놀드 박스(Arnold Bax: 1883-1953). 작곡가 중에서 자기 아내에게 성실하지 못한 사람의 명단을 적으라고 한다면 A4 용지가 서너장은 있어야 할 것이다. 드비시, 들리우스, 바그너 등등...리스트의 톱 10을 장식할 사람들이다. 또 한사람 카사노바를 뺨치는 사람이 있다. 영국의 작곡가, 시인, 작가인 아놀드 박스이다. 영국 전역에 마치 은행지점처럼 애인들을 거느리고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아무튼 박스는 처녀건 유부녀건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중에도 가장 히트는 19세의 해리엣 코엔이라는 아가씨와의 러브 어페어이다. 아놀드 박스가 해리엣 코엔과의 농도 짙은 러브 어페어를 교향시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1917년에 완성한 교향시 '11월의 숲'(November Woods)이다. 박스와 코엔이 우연히 숲에서 만났는데 마침 소나기가 내려서 함께 비를 피하게 되었고 이어서 인근에 있는 호텔방으로 자리를 옮겼고...그 다음은 각자의 상상에 맡길 뿐이다. 자기의 여성편력을 음악으로 표현하다니 대단하기는 대단하다.


아놀드 박스. 카사노바의 사촌쯤 되는 사람이었다.


○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869). 여인과 사랑을 한번도 해보지 못한것 보다는 사랑을 했다가 실연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베를리오즈의 경우에는 자기에게 실연의 아픔을 준 여자에게는 복수를 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다. 베를리오즈는 1832년에 피아니스트인 마리 모크(Marie Moke)와 약혼한 처지였다. 그런데 마리 모크의 어머니라는 사람이 딸을 베를리오즈에게는 절대로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하면서 방방 뛰었다. 마리 모크의 어머니가 딸의 신랑감으로 꼽은 사람은 피아노 제작자로서 상당히 부유한 카미유 플라이옐(Camille Pleyel)이었다. 베를리오즈는 가만히 있을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과감한 조치를 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베를리오즈는 마침 이탈리아를 여행 중이었다. 베를리오즈는 여행이고 뭐고 모두 집어치우고 오로지 복수심에 불타서 파리를 향해 떠났다. 베를리오즈는 세 사람을 모두 죽이기로 결심하고 권총을 준비했다. 그리고 만일 권총이 문제가 생겨서 불발이면 안되므로 대비책으로 독약을 별도로 준비했다. 그런데 그냥 마리 모크의 집에 나타나면 들여보내주지 않을 것이므로 옷과 가발과 모자 따위로 변장을 하기로 했다. 베를리오즈가 파리에 거의 도착할 즈음에 보니까 변장용 옷과 가발 등을 어디선가 두고 온 것이었다. 그렇게해서 베를리오즈는 살인범의 기회를 놓쳤고 마리 모크와 그의 어머니와 새로운 약혼자는 아무것도 모른채 목숨을 건졌다. 그러면 마리 모크는 어떻게 되었는가? 카미유 플라이옐과 결혼을 하기는 했는데 남편이란 작자가 한두번도 아니고 바람을 피는 바람에 그만 끝나고 말았다. 그 후에 마리 모크가 베를리오즈를 다시 만났는지 어쩐지는 모른다.


엑토르 베를리오즈. 셍기기는 점잖게 생겼는데 성질이 보통이 아니었다.


○ 카를로 제수알도(Carlo Gesualdo: 1566-1613). 카를로 수알도는 베를리오즈와는 달리 살인을 실제로 수행하였다. 제수알도는 자기 아내가 안드리아 공작과 자기 집에서 정사를 벌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칼을 빼어 들고 침대에 있는 두 사람을 찔러서 죽였다. 1590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제수알도는 역사상 가장 지독한 작곡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면 살인을 저지른 제수알도는 어떻게 되었는가? 당시의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시기에 접어 들었지만 귀족은 귀족이어서 제수알도는 처벌을 받지 않았다.


카를로 제수알도. 아내와 아내의 정부를 살해한 놀라운 살인자였다.


○ 로우드 버너스(Lord Berners: 1883-1950). 영국의 작곡가인 제랄드 티르위트(Gerald Tyrwhitt)는 로우드 버저스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로우드 버너스는 문화예술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서 작곡가이면서 화가이고 소설가였다. 대표적인 음악작품으로서는 Fantaisie espagnole(1919)와 Fugue in C major(1924)를 들수 있으며 발레작품으로는 '넵튠의 승리'(The Triumph of Nepture: 1926)가 있다. 그는 1차 대전 중에 로마주재 영국대사관에서 근무할 때 전위적인 피아노 음악과 몇 편의 연가곡, 그리고 영화음악도 작곡했다. 그런 로우드 버너스인데 왕립동물학대방지협회로부터 대단한 질책을 받을만한 일들을 했다. 그는 비둘기들을 잡아서 날개와 몸통에 여러가지 칠을 하는 것을 즐겨했다. 그런가하면 비둘기들에게 두건을 만들어 씌어서 방향을 모르게 했다. 그는 성격도 과격했다. 예를 들어서 자기 집앞에 '만일 함부로 마당에 들어오는 사람은 불문곡직하고 고소를 당할 것이다'라고 써붙였다. 그것만 해도 약과이다. '만일 개가 우리 마당에 들어오면 총으로 쏘아 죽여도 아무 말 못한다'고 써서 붙였고 '고양이가 들어오면 죽이지는 않겠지만 채찍으로 훔씬 때려줄 것이다'라고도 붙여놓았다. 그런가하면 자기 집 마당에 약 30미터 높이의 전망탑 같은 것을 세워놓고 '이곳에 올라와서 자살하려는 사람에 대한 책임은 절대로 지지 않는다'라고 써붙였다.


로우드 버너스. 비둘기들을 못살게 굴었다.

 

○ 피터 워로크와 어네스트 존 모에란(Peter Warlock and EJ Moeran). 영국의 작곡가이며 저명한 평론가인 피터 워로크(1894-1930)와 역시 작곡가인 이제이 모에란(1894-1950)은 절친한 친구로서 몇년동안 켄트의 에인스포드에서 함께 살았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 두명의 저명한 작곡가들이 마을에 와서 살게 되어 자랑으로 여기고 크게 환영했다.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이 사는 집에서 창문을 통해 피아노 음악이 흘러나오고 마을 회관에서도 새로운 노래가 흘러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은 집에서나 주점에서나 술판을 벌이기를 좋아했고 주사까지 심해졌다. 게다가 여자관계도 소문이 무성했다. 심지어는 한 침대에서 여자  한명과 두 남자(워로크와 모에란)가 뒹구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에 대한 생각을 고쳐 먹어야 했다. 두 사람 중에서도 모에란이 더 알콜 중독자였다. 그러다가 말년에는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모에란은 음주운전을 자주 했다. 그래서 자기들 집의 벽을 자동차로 박아 버린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면 워로크는 어떠한가? 모터사이클을 즐겨 탔는데 어느 날에는 완전히 벌거벗고 모터사이클을 타고 마을 한가운데를 질주한 일도 있었다. 아무튼 두 사람 다 제정신들이 아니었다.


 

피터 워로크와 이제이 모에란 음반


○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8). 여배우인 민나 플라너(Minna Planer)는 바그너의 첫번째 부인이다. 19세기에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여배우이다. 1809년 작소니왕국의 외데란(Oederan)에서 태어났으므로 바그너보다는 4년 연상이다. 바그너와 민나는 1836년에 결혼했다. 바그너가 23세의 청년이었고 민나는 27세였다. 두 사람은 30년 동안 부부로서 지냈다. 다만, 마지막 10년은 여러 사정으로 거의 떨어져서 살아야만 했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겉으로는 바그너와 마틸데 베젠동크의 관계 때문에 깨진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은 처음부터 모든 면에서 맞지 않아서 불화가 계속되었고 결국 결별은 당연한 순서였다. 두 사람에게 한가지 공통되는 점이 있다면 둘 다 사치를 취미로 삼았다는 것이다. 민나는 바그너와 결별한지 8년 후인 1866년 드레스덴에서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가? 민나는 1834년 여름에 마그데부르크의 하인리히 베트만 극단에 속하여 있으면서 할레(Halle) 부근의 바드 라우흐슈태트(Bad Lauchstädt)라는 곳에서 여름 시즌 연극에 출연하고 있었다. 바그너도 마침 바드 라우흐슈태트에 있었다. 바그너는 마그데부르크의 오페라단으로부터 지휘자로 오라는 요청을 받고는 조건이 어떤지를 알아보기 위해 왔다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시간을 두고 좀 더 생각하기 위해 바드 라우흐슈태트에 왔던 것이었다. 바그너는 우연히 민나가 묵고 있는 호텔에 방을 구하게 되었다. 바그너는 민나를 로비에서 민나를 보고 마치 천생배필이라도 만난듯 '아, 저 여자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이 여린 바그너는 민니에게 차마 말을 붙이지는 못하고 지나갔다. 그러나 바그너는 민나가 묵고 있는 방의 바로 아랫층 방에 투숙함으로서 민나를 사모하는 마음을 대신하였다. 다음날, 바그너는 민나가 마그데부르크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고는 민나와 계속 만나기 위해 마그데부르크의 지휘자 제안을 수락하였다. 그때 바그너는 약관의 21세 였다. 그렇게 하여 민나와 바그너의 사랑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당시 민나는 미모의 인기 여배우였고 바그너는 지지리도 못난 음악가에 불과했다. 그래서 민나는 바그너가 너무 집요하게 접근하므로 바그너를 떨쳐 버리기 위해 그야말로 여러 노력을 다 기울였다. 바그너로부터 잠적하여 찾지 못하게 했으며 다른 남자들과 공공연히 애정행각을 벌여 바그너로 하여금 실망하여 제풀에 물러나도록 시도하기도 했다. 민나는 그저 바그너와 자기가 절대로 맞지 않는 커플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바그너도 고집이라면 한 고집하는 사람이었다. 민나가 자기를 멀리하면 할수록 마치 자석처럼 더 달라 붙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만일 나와 결혼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할수 있는 일은 날카로운 칼로 당신의 가슴을 찌르는 일 밖에 없다'면서 위협을 서슴치 않았다. 대단한 바그너였다. 민나는 겁에 질려서 바그너의 청혼을 받아 들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두 사람은 모두 한 성질하는 사람들이어서 데이트하면서 시간만 있으면 죽어라고 싸웠다. 그래서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바그너는 밤새도록 분노로서 고함을 치고 방 안의 물건들을 내 던지는 일이 많았고 민나는 그런 폭력에 견디지 못하고 몇 시간이고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져 있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 바그너는 후회심을 이기지 못하여 민나의 발 아래 꿇어 엎드려 마치 어린 아이처럼 울면서 용서를 빌었다. 결국 민나는 바그너의 요청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가는 제명에 죽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혼을 승낙했다. 민나와 바그너의 관계는 마치 폭풍우가 불어 닥치는 것과 같았다. 민나도 문제가 많았지만 오히려 바그너 쪽이 문제가 더 많았다. 바그너는 질투심이 많았고 소유욕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두 사람은 큰 소리로 자주 싸웠다. 싸움은 대체로 민나의 눈물로서 막을 내렸다.

 

 

리하르트 바그너와 그의 첫번째 부인 민나 플라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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