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시컬 레퍼토리의 흥미 스토리
클래식 애호가들도 알고 있어야 할 내용들을 소개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작품둘이지만 보다 정확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아서 소개하는 것이다.
프란츠 슈베르트
○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Unvollendete: Unfinished Symphony)은 미완성이 아니다.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는 10편의 교향곡을 남겼다. 혹자는 9편의 교향곡을 남겼다고 하지만 10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교향곡 10번은 역시 미완성이었다. 그렇지만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라고 하면 8번을 말한다. '미완성 교향곡'(Unvollendete)은 간혹 제7번으로도 불린다. 슈베르트의 작품을 정리하는 학자에 따라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전에는 7번이라고 불러도 통했지만 지금은 8번으로 확정되어 있다. 잘 아는대로 슈베르트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짧다면 짧은 생애를 살다가 간 슈베르트이지만 1818년까지, 즉 21세가 되던 해까지 6편이나 되는 교향곡을 작곡했고 그 이후에 4편을 더 추진했다. 교향곡 9번은 '그레이트 심포니'라고 해서 '위대하다'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레이트 심포니'는 '그문덴-가슈타인 심포니'(Gmunden-Gastein)이라고도 불린다. 아마 오스트리아 서부의 휴양지인 그문덴과 가슈타인에서 지낼 때에 작곡했던 모양이다. 교향곡 10번은 사실상 미완성이다. 3악장까지 피아노 스케치만 해 놓았다. 하지만 훗날 3악장까지를 오케스트레이션해서 하나의 완벽한 교향곡으로 선보이게 했다. 교향곡 8번을 '미완성 교향곡'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 교향곡이 2악장까지만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관례로 보아서 교향곡은 4악장으로 구성되어야 했다. 그런데 슈베르트는 2악장까지만 오케스트라 스코어를 완성해 놓고 그 다음은 추진하지 않았다. 다만, 3악장의 도입부라고 생각되는 첫 두 페이지의 피아노 버전은 남겨 놓았다. 슈베르트는 이 교향곡을 1822년에 2악장까지 완성했다. 그가 25세 때였다. 그리고 그후 겨우 6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는 중에 1823년에 그라츠음악협회가 슈베르트에게 명예 디플로마를 수여했다. 슈베르트는 감사의 표시로 그가 1822년에 2악장까지 완성한 스코어와 3악장에 해당하는 첫 두페이지의 피아노 스코어를 디플로마를 주선한 친구 안젤름 휘텐브렌너(Alselm Hüttenbrenner)를 통해 그라츠음악협회에 헌정했다. 그런데 슈베르트는 그후 어쩐 일인지 이 교향곡의 나머지를 완성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학자들은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이 비록 2악장으로만 되어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완벽한 교향곡으로 전혀 손색이 없으므로 만일 3악장과 4악장을 더 붙인다고 해도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훗날 여러 작곡가들이 이 교향곡을 4악장으로 완성코자 했으나 오히려 호응을 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교향곡 8번은 진실로 '완성된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은 사실적으로 그라츠의 친구인 안젤름 휘텐브렌너에게 헌정했다고 보면 된다.
그러면 어떤 어떤 사람들이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완성코자 노력하였는가? 우선 독일의 펠릭스 봐인가르트너(Felix Weingartner)를 들수 있다. 봐인가르트너라고 하면 1920년대 말에 지휘자로서 이름을 떨친 사람이다. 봐인가르트너는 처음으로 베토벤의 교향곡 전편을 음반으로 취입하였으며 브람스의 교향곡 전편을 스토코브스키에 이어 두번째로 취입한 사람이다. 봐인가르트너는 작곡가이기도 했다. 그는 교향곡도 작곡했는데 교향곡 6번은 '비극'(La Tragica)이라는 제목이 붙은 것으로 슈베르트 서거 1백주년을 기념해서 작곡한 것이다. 그런데 이 교향곡의 2악장은 슈베르트가 교향곡 8번의 3악장으로 생각하고 첫 부분을 스케치 해놓은 것을 인용하여 만들었다. 한편, 콜럼비아 레코드 회사는 1928년에 슈베르트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서 '미완성'을 완성하는 국제 공모를 개최하였다. 약 100명에 이르는 세계 각국의 작곡가들이 응모하였다. 피아니스트인 프랑크 메릭(Frank Merrick)이라는 사람이 영어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프랑크 메릭이 작곡한 스케르조와 피날레는 나중에 레코드로 취입되었다. 그러나 스코어로서는 출판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와 독일 등의 작곡가들은 '미완성 교향곡'이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인데 왜 일부러 완성시키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응모를 보이콧하기도 했다.
슈베르트가 스케르조 스케치를 해 놓은 부분을 자기의 작품에 인용한 작곡가들도 더러 있다. 조셉 홀브룩(Joseph Holbruck)의 교향곡 4번의 1악장은 슈베르트의 스케르조 스케치를 대폭 인용한 파트이다. 그리고 피날레에도 슈베르트가 남겨 놓은 스케로조의 스케치가 인용되었다. 그는 또한 슈베르트의 '로자문데'를 위한 극음악 중에서 B단조 앙트락테(entr'acte)의 상당부분도 그의 교향곡 4번의 피날레에 인용하였다. 인용의 대가였다. '로자문데'에 대한 극음악은 실은 슈베르트가 교향곡 8번, 즉 '미완성교향곡'의 피날레로 사용하려고 했던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편, 영국의 피아니스트이며 슈베르트 전문가인 안소니 골드스톤(Anthony Goldstone)은 슈베르트의 '미완성'을 피아노 듀엣 버전으로 4악장까지 완성하였다. 첫 두 악장은 안젤름 휘텐브렌너가 편곡한 것과 자기 자신이 슈베르트의 스케르조 스케치를 완성한 것, 그리고 독일의 프리드리히 헤르만(Friedrich Hermann)이 '로자문데'의 앙트락테를 편곡을 것을 참고로 삼았다. 이렇게 완성한 피아노 듀엣 버전은 2015년에 골드스톤 자신과 그의 부인으로 듀엣 파트너인 캐롤린 클렘모우(Caroline Clemmow)가 최초로 음반으로 취입하였다. 러시아의 작곡가인 안톤 사프로노프(Anton Safronov)도 스케르조 스케치를 완성하였고 아울러 '미완성'의 새로운 피날레를 작곡하였다. 새로운 피날레에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작품 중에서 몇개의 주제를 인용하였다. 사프로노프가 작곡한 것은 2007년 런던의 로열 페스티발 홀에서,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초연되었다. 캠브릿지대학교의 작곡과 교수인 로빈 할로웨이(Robin Holoway)도 슈베르트가 남겨 놓은 스케르조 스케치를 바탕으로 새로운 스케르조를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2011년 캠브릿지대학교 음악협회에 의해 초연되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슈베르트의 '미완성'은 '미완성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비록 미완성이지만 진정한 '완성'이라는 것이다.
○ 드보르작의 교향곡 제9번 '신세계에서'는 다국적 음악을 사용한 작품이다.
안톤 드보르작(1841-1904)의 가장 유명한 교향곡인 '신세계에서'(From the New World)는 특히 향수를 자아내게 하는 2악장의 멜로디로 유명하다. 실제로 2악장의 주제 멜로디는 나중에 '고인 홈'(Goin' Home)이라는 노래로 가사를 붙여 부르게 되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사람들은 '고인 홈'의 바탕 멜로디가 되는 2악장의 주제를 어메리칸 인디언들이 불렀던 멜로디라고도 했고 또는 미국의 흑인들이 아프리카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르던 멜로디라고 주장했다. 아무튼 미국적인 멜로디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그 멜로디 때문에 교향곡의 타이틀도 '신세계에서'라고 붙였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신세계 교향곡'에는 미국의 멜로디만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보헤미아의 전통 멜로디들도 나온다. 그런가하면 오스트리아의 민속적인 멜로디도 찾아볼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교향곡을 '신세계 교향곡'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라고 말한다. 번슈타도 '신세계 교향곡'이 아니라 '다국적 교향곡'이라고 단언한 것은 그러한 배경에서였다.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은 교향곡 9번이지만 초기에 드보르작의 작품들을 분류할 때에는 교향곡 5번이라고 했다. 그래서 간혹 옛날 서적이나 음반을 보면 드보르작의 교향곡 제5번 '신세계'라고 되어 있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틀린 표현이다. '신세계'는 물론 미국을 말한다. 드보르작이 '신세계 교향곡'을 작곡할 즈음에는 미국이 독립해서 어엿한 국가가 된지도 1백년이 훨씬 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미국을 아직도 신세계라고 불렀다. 드보르작의 교향곡 제9번 E 단조, 작품번호 95 '신세계에서'는 드보르작이 미국에 있을 때에 작곡한 것이다. 그래서 '신세계에서'라는 제목이 붙었는지도 모른다. 보헤미아의 드보르작은 1892년부터 1895년까지 3년 동안 뉴욕의 어메리카국립음악원(National Conservatory of Music of America)의 원장으로 초빙되어 재직했다. 이 기간 중에 미국의 이곳저곳을 여행한 드보르작은 어메리칸 인디언의 음악, 흑인 영가 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신세계 교향곡'의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어메리칸 인디언의 음악과 흑인 영가의 분위기를 찾아볼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가 아니다. 실은 보헤미아의 민속적인 음악들이 곳곳에서 드러나 있다. 보헤미아 작곡가에 의한 보헤미아 음악의 교향곡이므로 '신세계 교향곡'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보헤미아 교향곡'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2악장 라르고에는 고향생각을 나게 만드는 주제 멜로디가 나온다. 나중에 '고인 홈'(Goin' Home: 꿈속에 그려라)이라는 제목의 노래로 더 널리 알려진 멜로디이다. 이 노래를 윌리엄 암스 피셔(William Arms Fisher)라는 사람이 작곡한 것을 드보르작이 인용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출신인 윌리엄스 암스 피셔는 뉴욕의 어메리카국립음악원에 다닐 때에 드보르작의 제자였다. 윌리엄스 암스 피셔는 미국 흑인영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흑인영가를 소재로 한 70편의 노래들을 편곡하고 정리해서 '70곡의 니그로 스피리추얼스'(Seventy Negro Spirituals)라는 제목의 악보집을 출판한 일도 있다. 그때 악보집에 '고인 홈'을 가사와 함께 실었다. 가사는 윌리엄스 암스 피셔가 만든 것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사람들은 '고인 홈'을 윌리엄스 암스 피셔가 작곡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세계 교향곡' 2악장의 멜로디는 분명히 드보르작이 작곡한 것이다. 1969년 우주인 닐 암스트롱이 역사상 처음으로 달에 발을 디딜 때에 그는 '신세계 교향곡'의 음반을 가지고 갔었다. 달을 신세계로 간주해서였다.
드보르작이 미국에 있을 때에 제자였던 윌리엄 암스 피셔. 그가 '고인 홈'의 멜로디를 작곡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 코플란드의 팡파레는 처음에 콘서트 시즌을 소개하는 목적으로 작곡되었다.
아론 코플란드(Aaron Copland: 1900-1990)의 '일반인을 위한 팡파레'(Fanfare for the Common Man)는 오늘날 올림픽 개막식이나 대통령의 취임식 또는 의회의 개원식 등에서 연주되는 곡으로 사랑을 받고 있지만 원래는 신시나티 교향악단의 1942-43년 콘서트 시즌을 위해 작곡된 것이다. 신시나티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인 유진 구센스(Eugene Goosens)는 영국의 콘서트에서 지휘한 경험이 많았다. 그런데 영국에서 콘서트를 할 때면 시작하기 전에 팡파레를 연주하여 분위기를 돋구는 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물론, 주로 영국 작곡가들이 작곡한 팡파레였다. 미국에 돌아온 유진 구센스는 매번 콘서트 때마다 팡파레를 연주토록 할수는 없으나 2년에 걸친 콘서트 시즌을 시작하는 때에는 팡파레를 연주토록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의 작곡가인 아론 코플란드에게 팡파레의 작곡을 의뢰했던 것이다. 유진 구센스는 코플란드에게 1차 대전때 영국의 작곡가들이 병사들을 위해 작곡한 팡파레 스타일이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침 1942년에는 미국이 2차 대전에 공식적으로 참전키로 선언하였다. 코플란드는 그같은 참전에 작곡가로서 부응하기 위해 팡파레의 작곡에 매진하였다. 코플란드는 또한 자기의 팡파레가 일반 국민들의 네가지 자유를 주창하는 의미를 갖기를 원했다. 네가지 자유란 공포와 기아로부터의 자유, 종교와 언론의 자유를 말한다. 그래서 병사들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을 위한 팡파레를 만들었고 제목도 '일반인을 위한 팡파레'라고 붙였다. '일반인'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은 1942년 초에 헨리 월레이스 미국 부통령이 새해는 일반인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한데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코플란드의 팡파레는 신시나티 교향악단의 시즌 오픈 때인 1942년에 처음 연주되었다. 이후 코플란드의 '일반인을 위한 팡파레'는 올립픽 경기의 개회식에서, 방송의 뉴스와 스포츠 시간의 시그날 음악으로, 기타 수많은 경우에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빌 클링턴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 기념으로 연주된 것이다. 한편, 코플란드는 훗날 그의 교향곡 3번의 4악장에 팡파레의 멜로디를 인용하였다. 락 콘서트에서도 간혹 들을수 있는 곡이다. 예를 들면,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의 노래에도 등장한다.
아론 코플란드의 '일반인을 위한 팡파레' 음반 표지
○ 멘델스존의 '결혼 행진곡'은 결혼식에서 연주된 곡이 아니라 막간의 간주곡이었다.
오늘날 세계의 어느 곳에서던지 결혼의 예식이 끝나고 새로 부부로 탄생한 신랑신부가 인생의 새로운 첫발을 내디딜 때에는 관례적으로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Wedding March)이 연주된다. 이 음악은 실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인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이 연극으로 공연될 때에 극음악으로 사용하기 위해 작곡한 것이다. 멘델스존은 셰익스피어의 코미디인 '한여름 밤의 꿈'을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마침 1826년에 뜻한바 있어서 '한여름 밤의 꿈 서곡'을 작곡했다. 그때 멘델스존은 불과 17세의 소년이었다. '한여름 밤의 꿈 서곡'은 슈테틴(당시에는 프러시아 영토, 현재는 폴란드에 속한 지역)에서 연주되어 놀라운 찬사를 받았다. 11년 후인 1841년에 멘델스존은 포츠담 궁전에서 공연되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의 극음악을 작곡했다. '안티고네'는 극음악으로 인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때 나중에 프러시아의 왕이 되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자도 참석하였는데 멘델스존의 음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듬해인 1842년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자는 부왕의 뒤를 이어 프러시아의 왕이 되었다. 포츠담 궁전에서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이 공연될 예정이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은 멘델스존을 생각하고 멘델스존에게 '한여름 밤의 꿈'의 극음악을 전체적으로 작곡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멘델스존은 왕립예술원장 겸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이고 여기에 나중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결혼행진곡이 나온다.
결혼행진곡은 극중에서 아테네 공작인 테세우스와 아마존의 여왕인 히폴리타의 결혼식과 관련하여서 연주되는 곡이기는 하지만 결혼식을 거행하는 중에 나오는 음악은 아니다. 연극의 4막과 5막 사이에 연주되는 인터메쪼(막간음악, 간주곡)로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식 장면과는 특별히 상관이 없다. 테세우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괴수 미노타우르를 제거한 유명한 용사인데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는 아테네의 공작, 즉 아테네의 왕으로 나온다. 신부가 되는 히폴리타는 아마존의 여왕으로서 아마존은 브라질에 있는 강이 아니라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지대에 있었던 왕국을 말한다. 극중에서 테세우스 공작과 히폴리타 여왕이 결혼식을 올리게 되자 아테네의 장인들은 가만히 있을수 없어서 궁리끝에 축하연극을 공연키로 한다. 연극의 내용은 피라무스와 티스베의 비극적인 사랑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은 테세우스와 히폴리타의 결혼 장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다른 젊은 커플들의 결혼 장면에 나오는 것도 아니다.
'한여름 밤의 꿈'에서 오베론, 타티아나, 퍼크, 그리고 춤추는 요정들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이 결혼식에서 널리 연주되기 시작한 것은 1848년,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큰 딸인 빅토리아 공주와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자의 결혼식이 계기가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도 그렇지만 빅토리아 공주도 평소에 멘델스존의 음악을 애호하였다. 그래서 멘델스존이 영국을 방문할 일이 있으면 빅토리아 공주를 위해서 특별 피아노 연주를 해주기도 했다. 그러한 인연으로 빅토리아 공주는 결혼식이 런던의 성제임스 궁전의 왕실교회에서 거행될 때에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에 나오는 결혼행진곡을 연주토록 특별히 당부하였다. 이후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은 영국과 독일은 물론 다른 나라의 왕실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에는 반드시 연주되는 곡목이 되었다. 그러다가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자 멘델스존이 유태계라는 이유로 그의 음악들을 연주하지 못하게 했고 결혼행진곡도 결혼식에서 들을수 없게 되었으나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당연히 회복되었다.
○ 헨델의 '수상음악'과 '왕궁의 불꽃놀이'
무슨 작품이던지 초연의 무대에서 초연되는 작품을 두번도 아니고 여러번 반복해서 연주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헨델의 '수상음악'(Water Music) 모음곡은 초연 때에 네번이나 반복 연주해야 했다. 그것도 특별하게도 오케스트라가 테임스강에서 배를 타고 다니면서 연주를 하는 것이었다. 헨델의 '왕궁의 불꽃놀이'(Royal Fireworks) 모음곡은 처음 연주하는 날 야외 연주회장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큰 혼란이 있었다. 불꽃놀이 한번 단단히 한 셈이다.
헨델은 '수상음악'을 당시 영국의 국왕인 조지 1세(재위: 1714-1727)를 위해서 작곡했다. 조지 1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바꾸어 말하면 조지 1세의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작곡했다. 초연은 1717년 6월 17일 밤 8시에 시작되었다. 연주회를 밤에 하던지 아침에 하던지는 문제될 것이 없지만 문제는 장소였다. 오케스트라 멤버들은 커다란 바지선과 같은 배를 타고 테임스 강을 오르내리면서 연주했다. 조지 1세를 비롯해서 내노라하는 귀족들은 따로 왕실의 배에 탔다. 그러면 오케스트라가 탄 바지선이 조지 1세의 배를 따라가며 연주했다. 런던의 화이트홀 궁전이 있는 곳에서부터 저 북쪽의 첼시를 왕복하면서 연주했다. 런던 시민들은 헨델이 새로 작곡한 '수상음악'이 테임스 강에서 연주된다고 하니까 너도나도 배를 마련해서 타고 조지 1세의 배와 오케스트라가 있는 바지선을 따라 다니며 연주를 들었다. 테임스 강은 때아니게 온갖 배들로 만원이 되었다. '수상음악'의 연주시간은 약 1시간 걸리는 것이었다. 밤 8시에 연주 출발을 했으니 아마 밤 10시쯤 첼시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동안 오케스트라는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면서 수상음악을 웅장하고 경쾌하게 연주했다. 조지 1세는 대만족이었다. 조지 1세는 배가 첼시에 도착하자 잠시 배에서 내려 휴식을 취하다가 밤 11시에 런던으로 돌아오기 위해 다시 배를 탔다. 조지 1세는 오케스트라를 태운 바지선이 그냥 무료하게 런던까지 가는 것이 아쉬웠고 또한 헨델의 '수상음악'이 너무 훌륭해서 오케스트라에게 다시 연주토록 지시했다. 그리하여 오케스트라는 첼시에서 런던까지 돌아오는데 세번이나 반복애서 연주했다. 첼시에서 런던까지 갈 때에는 강물의 흐름 때문에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오케스트라는 런던에서 첼시까지 갈 때에 한번 연주했고 이어 첼시에서 런던으로 돌아올 때에 세번이나 반복해서 연주했으므로 모두 네번이나 연속 연주한 것이다. 세상에 별 일도 다 있다. 오케스트라 멤버들은 저녁이나 먹고들 연주를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정이 넘도록 배를 타고 연주를 했으니 배도 고팠을 것이며 아울러 얼마나 피곤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헨델의 '수상음악' 연주 장면. 왕실 배에는 조지 1세와 귀부인들과 헨델이 타고 있으며 뒷쪽의 배에는 오케스트라 멤버들이 타고 있으면서 연주를 하는 장면이다. 이를 보면 헨델은 오케스트라를 직접 지휘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헨델이 '수상음악'을 작곡하게 된 배경은 당시 조지 1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는데 사실상 조지 1세는 '수상음악'을 대단히 좋아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헨델의 '수상음악'은 일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러면 왜 헨델은 조지 1세의 환심을 사야 했는가? 헨델은 영국으로 건너오기 전에 독일에서 나중에 조지 2세가 된 사람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때 영국의 군주는 앤느 여왕이었다. 조지 2세는 앤느 여왕이 세상을 떠나면 다음 왕위는 자기에게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헨델에게 미리 영국에 가서 지내다가 자기가 왕이 되면 그때 만나서 잘 지내자고 말했다. 그 말을 들어서인지 또는 다른 이유 때문인지 하여튼 헨델은 영국으로 건너갔다. 앤 여왕은 171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조지 2세의 아버지인 조지 1세(제위: 1714-1727)가 왕위를 이어 받았다. 조지 1세는 아들을 라이발로 생각해서 조지 2세의 인기가 많아지는 것을 대단히 싫어했다. 조지 1세는 왕이 되자 헨델이 조지 2세와 친분이 있는 사이라는 것을 이유로 헨델을 멀리했다. 헨델은 뜻하지 아니하게 찬밥신세였다. 헨델은 조지 1세의 후원을 받아야 했으므로 환심을 사야했다. '수상음악'의 배경에는 그런 사연이 있다는 것이 사람들의 주장이다. 조지 2세(재위: 1727-1760)는 아버지 조지 1세가 세상을 떠나자 당연히 다음 왕위에 올랐고 헨델을 적극 후원하였다.
'왕궁의 불꽃놀이'는 헨델이 1749년에 작곡한 것이다. 1749년이면 조지 2세가 왕이 된지도 20여년이 지난 시기였다. 바로 전 해인 1748년에는 8년이나 끌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마무리 되었다. 조지 2세는 이를 축하하기 위해 대대적인 불꽃놀이를 해서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했다. 이를 위해 헨델에게 불꽃놀이 음악의 작곡을 부탁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 왕위 전쟁이란 것은 샤를르 6세의 국사조치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며 오스트리아 대공인 샤를르 6세는 슬하에 아들이 없고 딸만 둘이 있자 그 중에서 큰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및 오스트리아 대공의 자리를 물려주려고 국사조치를 발표했다. 당시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제국 내의 선제후들이 선출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물로 '딸이면 어떠냐'면서 찬성하는 측도 있었다. 그리하여 찬성측과 반대측이 이른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하노버 선제후를 겸했던 영국은 반대의 자리에 있었다. 전쟁은 반대측의 승리로 끝났다. 영국의 조지 2세는 전쟁이 승리로 끝난 것을 축하하여서 대규모의 불꽃놀이를 제안했고 그래서 헨델의 '왕궁의 불꽃놀이'가 작곡되었다. '왕궁의 불꽃놀이'는 1749년 4월 27일 저녁에 런던의 그린 파크()에서 처음 연주되었다. 조지 2세는 이 역사적인 연주회를 위해 공원에 대규모의 무대를 설치하고 또한 무대 양편에 커다란 정자를 세워서 VIP들이 관람토록 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후부터 비가 내렸다. 하기야 런던에서 비는 아무 때나 오는 것이므로 그 정도는 참고 지냈다. 그러나 연주회가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오른쪽 정자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장내는 순식간에 혼란해졌다. 다행히 불길은 얼마후 진압되었다. 불길이 치솟아서 관중들의 우왕좌왕하는 중에도 헨델은 침착성을 잃지 않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혼란이 없도록 노력했다.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 공원의 한쪽에서는 화려한 불꽃축포가 연이어 터져서 런던의 밤하늘을 찬란하게 수놓았다. 하지만 헨델의 '왕궁의 불꽃놀이'가 초연되는 날에 비가 왔으며 연주회 도중에 불이 나서 정자를 태웠다는 것은 오래도록 기록에 남아 있는 사항이다.
○ 베토벤의 교향곡 3번의 타이틀인 '영웅'은 나중에 악보출판사가 붙인 제목이다.
베토벤의 교향곡 3번에는 '영웅'(에로이카)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제목은 베토벤이 처음부터 붙인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이었다. 그러다가 얼마후에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황제로 대관식을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베토벤은 나폴레옹에 대하여 크게 실망하고 '역시 그도 속물이다'라며 보나파르트를 위해 작곡했다고 적은 제목을 펜으로 지우고 스코어의 첫장을 찢어버렸다고 한다. 베토벤은 교향곡 3번을 완성하고 제목을 적어 넣는 첫 페이지에 두개의 제목을 써 넣었다. 첫번째 제목은 이탈리아어로 Intitolata Bonaparte 라는 것이었다. '제목은 보나파트르'라는 뜻이다. 그로부터 네칸 아래에는 독일어로 Geschriben auf Bonaparte 라고 적었다. '보나파르트를 위해 작곡함'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베토벤은 처음에 이 교향곡을 나폴레옹에게 헌정하기 위해 작곡했지만 그에게 실망하여서 그에게 헌정하려던 것을 취소했다. 물론, 나폴레옹이 베토벤에게 작곡료를 주고 교향곡을 작곡해 달라고 의뢰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에 베토벤은 신성로마제국의 몇몇 귀족들로부터 재정적인 후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면 베토벤은 감사의 뜻으로 작곡을 해서 이들에게 헌정하는 형식으로 보답했다. 나폴레옹은 베토벤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베토벤의 작곡활동을 후원한 일은 없다. 그런데 베토벤은 나폴레옹을 대단히 존경해서 새로운 교향곡을 작곡하면서 제목을 '보나파르트'라고 붙였던 것이다. 베토벤은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의 교향곡 3번 E 플랫 장조, 작품번호 55번을 1804년 초에 완성했다. 그런데 그해 5월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 대관식을 가졌다. 그 소식을 들은 베토벤은 나폴레옹에 대하여 너무도 실망하여서 마침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스코어의 첫 장의 제목을 펜으로 죽죽 지워버렸고 그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첫 두장의 악보를 찢어 버렸다. 그리고는 친구들에게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던 것을 취소한다고 말했다. 교향곡 3번은 이듬해인 1805년에 비엔나의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교향곡 6번 '전원'과 함께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처음 연주되었다. 이때에는 스코어를 정식으로 출판하지 않고 필사한 스코어를 오케스트라가 사용했다.
베토벤이 영웅으로 생각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얼마후 비엔나의 악보출판사가 교향곡 3번을 출판키로 하고 베토벤에게 제목을 무엇이라고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베토벤은 별로 생각도 없이 원래는 '보나파르트'였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출판사의 책임자도 베토벤이 나폴레옹에 대하여 대단히 실망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바가 있어서 '보나파르트'라고 그대로 제목을 붙이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806년에 스코어가 출판될 때에는 타이틀을 이탈리아어로 Sinfonia Eroica라고 붙였다. '영웅 교향곡'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composta per festeggiare il sovvenire di un grande Uomo 라는 글을 덧 붙였다. 영어로 번역하면 composed to celebrate the memory of a great man 이라고 할수 있다. 번역하면 '어느 위대한 인간에 대한 추억을 기념하여서 작곡함'이다. 물론 어느 인간이라는 것은 나폴레옹을 말한다. 그러므로 '영웅', 즉 에로이카라는 단어는 베토벤이 고안해 낸 단어가 아니라 출판사에서 넣은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이다. 한편, 에로이카라는 말은 ‘영웅’이라기보다는 ‘영웅적’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어떤 한 사람의 영웅을 지칭한다기 보다는 인류의 모든 영웅적인 행동과 정신을 가리키고 있는 말이라고 해석할수 있다. 베토벤은 교향곡 3번을 자기를 후원해준 요제프 프란츠 막시밀리안 로브코비츠 공자(Prince Joseph Franz Maximilian Lobkowitz: 1772-1816)에게 헌정했다. 로브코비츠 공자는 보헤미아의 귀족이지만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비엔나의 슈타츠오퍼 뒤편에 있는 로브코비치 궁전은 로브코비치 공자가 살던 저택이었다. 현재는 극장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그건 그렇고, 베토벤은 처음에 나폴레옹을 무척 존경했다. 그때 나폴레옹은 프랑스 민간 정부의 제1집정관이었다. 베토벤은 그런 나폴레옹을 마치 고대 로마시대의 집정관과 같은 역할로 보고 민주주의를 실현한 인물, 전제주의를 반대한 이상적인 인물이라고 보아서 존경했다. 베토벤은 나폴레옹에 대한 존경심으로 나폴레옹에게 헌정하기 위한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1805년 5월에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어 무소불위의 전제군주가 되자 크게 실망했던 것이다. 베토벤은 “그도 역시 속물과 같은 인간 그 이상이 아니다. 그는 이제 자유와 평화를 원하는 인간의 순수한 권리를 모두 짓밟았다. 그는 자기의 야심만 채우려고 하였다. 그는 자기가 모든 인간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독재자가 되었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1821년에 나폴레옹이 세상을 떠났다. 그 소식을 들은 베토벤은 ‘나는 이미 17년 전에 그를 위한 장송곡을 마련해 놓았다’라고 말했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3번의 2악장은 ‘장송행진곡’, 즉 마르시아 휴네브르(Marcia funebre)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악장이다. 베토벤은 교향곡 3번을 1801년부터 구상해서 작곡을 시작하고 1804년에 완성했는데 어째서 베토벤이 그런 악장을 작곡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아무튼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 했던 교향곡의 제2악장이 ‘장송행진곡’이라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닐수 없다. 나폴레옹의 죽음을 예견하고 미리 장송곡을 만들어 놓았다고 밖에 생각을 할수 없는 일이다.
○ 모차르트 마지막 작품인 '진혼곡'(Requiem)을 어디까지 완성했는지는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다.
잘 아는 대로 모차르트는 1792년 12월 5일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진혼곡'(레퀴엠)은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미완성 부분은 모차르트의 제자인 프란츠 사버 쥐쓰마이르가 완성했다. 그런데 모차르트가 과연 '진혼곡'의 어느 파트까지 완성해 놓았는지는 분명치 않아서 학자들 사이에서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다행히 비엔나의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모차르트 '진혼곡'의 오리지널 스코어를 보면 어떤 부분을 모차르트가 친필로 작곡했는지 알수 있다. 이에 의하면 모차르트는 첫번째 파트인 Introitus(개회송)는 오케스트라를 완성했고 두번째 파트인 Kyrie는 세부 초안까지 해 놓았으며 세번째 파트인 Sequentia(속창)에서는 첫번째 곡 Dias irae의 초안을 만들어 놓았고 여섯번째 곡인 Lacrymosa는 첫 여덟 음표를 적어 놓았으며 네번째 파트인 Offertorium(봉헌송)은 첫 소절을 적어 놓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모차르트의 제자 프란츠 사버 쥐쓰마이르가 미완성 부분을 모두 완성했다는 얘기다. 나중에 쥐쓰마이르는 전체 진혼곡 중에서 Sanctus 와 Agnus Dei를 모두자기가 작곡한 것이라고 주장한바 있다. 쥐쓰마이르는 진혼곡을 완성한 후 그해를 넘기지 않고 전체 스코어를 프란츠 폰 발제그 백작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발제그 백작은 모차르트에게 진혼곡을 작곡해 달라고 의뢰한 사람인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일각에서는 쥐쓰마이르가 완성한 것은 마지막 파트인 콤뮤니오(Communio: 영성체송)의 Lux aeterna 뿐이라는 주장을 했다. 한편, 1984년에 나온 '아마데우스'라는 영화를 보면 쥐쓰마이르가 아닌 살리에리가 진혼곡의 상당부분을 모차르트의 지시에 따라 완성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아무리 영화라고 해도 어느정도 근거를 두고 촬영하는 것이니만치 비록 살리에리가 등장하여 진혼곡을 완성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모차르트가 거의 모든 파트를 완성했다고 볼수 있다. 어느 것이 맞는 주장인지 알수가 없다. 아무튼 모차르트의 '진혼곡'은 모차르트가 완성한 것으로 인정할 것이 아니라 쥐쓰마이르와의 공동완성품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모차르트가 임종에 앞서서 제자인 프란츠 사버 쥐스마이르에게 진혼곡의 마지막 파트를 완성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설명하고 있는 장면
○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은 영국 교향악협회가 베토벤에게 의뢰한 작품이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 D 단조 작품번호 129번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음악작품 중의 하나이다. 세계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고 있는 스탠다드 레퍼토리 중의 하나라는 것을 보면 안다.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을 모르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사실들도 많이 있다. 어떤 것들인지 몇가지만 소개코자 한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은 1824년, 그러니까 베토벤이 54세 때에 비엔나의 캐른트너토르 극장에서 역사적인 첫 공연을 가졌다. 지금부터 거의 2백년 전의 일이다. 캐른트너토르 극장은 지금의 비엔나 자허 호텔 자리에 있었던 극장으로 인근에 캐른트터토르라는 성문이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극장이다. 캐른트너토르 극장이라고 하면 오레전에 철거되어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수 없지만 수많은 작품들이 초연된 역사적인 장소이다. 몇가지 작품을 들어보면, 1821년에 슈베르트의 연가곡 '마왕'이 초연되었으며 1829년에는 쇼팽이 비엔나 데뷔 피아노 독주회를 가진 곳이다. 그런가하면 베버의 '오이리안테', 도니체티의 '샤무니의 린다', '로한의 마리아', '돈 세바스티안' 등이 초연된 곳이고 플로토우의 '마르타'와 오펜바흐의 '라인의 요정'이 초연된 곳이다. 베토벤은 '합창교향곡'을 원래 베를린에서 초연되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그래서 베를린의 어떤 극장측과도 연락을 했었다고 한다. 베를린을 초연 장소로 생각했던 것은 당시 비엔나의 음악취향이 이탈리아 일변도 였기 때문에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특히 로시니가 비엔나를 휘젖고 있었다. 베토벤이 베를린을 초연 장소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안 친구들과 후원자들은 '그건 말도 안된다'라면서 베토벤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만들어서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감동한 베토벤은 '그러면 비엔나로 하자'고 결정했다.
캐른트너토르 극장에서의 '합창교향곡' 초연 때에는 베토벤의 Die Weihe des Hauses(회관 봉헌곡)와 Missa silemnis(키리에, 크레도, 아누스 데이)가 함께 초연되었다는 것도 기억해야할 사항이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및 솔리스트들은 당시 비엔나의 엘리트 연주자들이 총동원된 것이었다. 또한 베토벤의 작품 연주회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오케스트라가 동원된 것이었다. 오케스트라는 캐른트너토르 극장 상주 오케스트라와 비엔나 악우회 오케스트라(훗날 빈필의 모체), 그리고 일반 아무추어 연주자 중에서 우수한 분들만 초빙하여 구성된 것이었다. 그만하면 규모를 짐작코도 남음이 있다. 솔리스트 중에서 소프라노는 독일 출신의 앙리에트 존타크(Henriette Sontag: 1806-1834)였다. 존타크는 당시 18세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베토벤은 과거에 존타크의 노래를 감동적으로 들은 있다. 그래서 이번 '합창교향곡'의 솔리스트로서 비엔나에서 내노라하는 쟁쟁한 소프라노들을 모두 뒤로하고 존타크를 개인적으로 특별히 초청하였다. 알토 솔로는 콘트랄토로서 유명한 카롤리네 웅거(Caroline Unger: 1803-1877)가 맡았다. 카롤리네 웅거는 몇년 전인 1821년 비엔나에서 로시니의 '탄크레디'의 타이틀 롤을 맡아서 대찬사를 받은 일이 있다. 베토벤은 카롤리네 웅거의 재능을 믿고서 '합창교향곡' 초연에 그를 특별히 초청하였다. 카롤리네 웅거는 '합창교향곡'의 초연에서 알토 솔로를 맡고나서 이탈리아와 파리에서 대단히 유명한 성악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도니체티와 벨리니도 특별히 카롤리네 웅거를 위해 오페라를 작곡할 정도였다.
'합창교향곡'의 초연에서 소프라노와 알토 솔리스트였던 앙리에트 존타크와 카롤리네 웅거
'합창교향곡'은 비엔나의 어느 귀족이 작곡을 의뢰했거나 또는 베토벤이 스스로 작곡하고 싶어서 작곡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은 런던의 필하모닉 소사이어터(교향악 협회)가 1817년에 베토벤에게 작곡을 의뢰한 것이다. 베토벤은 그런 부탁을 받고 오래동안 구상하다가 드디어 1822년부터 작곡에 들어가서 2년 후인 1824년에 완성했다. '합창교향곡'은 교향곡에 성악 파트를 사용한 첫번째 케이스가 된다. 그전까지는 그런 시도가 전혀 없었다. 다만, 베토벤의 경우에는 1808년에 한번 시도한 일이 있다. 작품번호 80의 '합창 환상곡'(Choral Fantasy)라는 곡이다. 이 작품은 교향곡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피아노 협주곡 스타일이며 그중의 피날레 악장에 합창과 보컬 솔리스트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합창교향곡'에서는 성악 주제를 오케스트라가 먼저 연주하여 뒤에 나오는 성악 파트를 리드하는 형식이다. 한편, 모차르트가 1775년에 작곡한 봉헌송(Offertory) D 단조 K 222 Misericordias Domini 에는 Ode to Joy의 주제 멜로디를 예견하는 듯한 멜로디가 나온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보이지 않는 교감이라고나 할까? 4악장 합창 파트의 가사는 잘 아는 대로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쉴러의 An die Freude(Ode to Joy: 환희의 송가)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베토벤도 직접 가사를 만들어서 추가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다.
'합창교향곡'의 초연에서 공식 지휘자는 캐른트너토르 극장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인 미하엘 움라우프(Michael Umlauf: 1781-1842)였다. 미하엘 움라우프는 2년 전인 1822년에 베토벤이 '휘델리오'의 드레스 리허설을 지휘하는 것을 직접 본 일이 있다. 그때 베토벤은 이미 청각이 크게 상실되어서 거의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도 지휘를 하였다. 오케스트라와 성악가들은 베토벤의 일방적인 박자를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리허설은 엉망이 되었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지휘자 움라우프는 '합창교향곡' 초연에서 베토벤이 스테이지에 올라와서 지휘를 하게 되자 오케스트라 멤버들과, 합창단원들과 솔리스트들에게 베토벤의 지휘나 지시를 무시하고 자기만을 주시하도록 단단히 당부하였다. 베토벤은 무대 한쪽에 앉아서 스코어를 한장 한장 넘기면서 오케스트라 멤버들에게 박자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베토벤의 사인과 실제 연주는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모든 출연자들은 미안하지만 베토벤을 무시하고 움라우프의 지휘만을 따랐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베토벤은 보면대을 앞에 두고 서서 템포를 전달해 주었다고 한다. 연주가 끝나고 박수갈채의 소용돌이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듣지 못해서 계속 템포만을 주장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솔리스트 중의 한 사람인 카롤리네 웅거가 베토벤에게 다가가서 관중들을 향하게 했다. 그제서야 베토벤은 관중들의 박수를 치고 환호를 하는 것을 알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고 한다. '카핑 베토벤'(Copying Beethoven)이란 최근의 영화에서는 스코어의 정사()를 맡았던 안나 홀츠가 오케스트라 속에 숨어 있으면서 앞에서 혼자 지휘하고 있는 베토벤에게 계속 사인을 주며 지휘를 돕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건 영화일 뿐이다. 그리고 이날 베토벤의 약식으로 지휘한 것은 12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의 악보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유산으로 기억되어야 할 물건으로 선정되었다. UN Memory of the World Programme Heritage이다. 악보가 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 현재로서는 유일하다.
○ 리스트의 '전주곡'(Les Preludes)은 나치의 선전용으로 이용되었다.
프란츠 리스트(1811-1886)의 '전주곡'은 장엄하고 화려한 곡이지만 이 곡이 나치의 전쟁 선전용으로 이용되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실망하고 혐오감을 가지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리스트의 '전주곡'은 1940년부터 전쟁이 끝나던 1945년까지 독일에서 나치의 주간뉴스(Die Deutsche Wochenschau) 프로그램의 시그날 음악으로 사용되었다. 리스트의 '전주곡'이 연주되는 중에 독일 공군의 폭격기들이 폭탄을 소련진영에 퍼붓는 바람에 산천이 불바다가 되고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가는 장면이 나오는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여간 불쾌한 것이 아니다. '전주곡'을 뉴스시간의 시그날 음악으로 사용한 것은 마치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바그너의 '발퀴레의 비행'이 미군의 베트콩 토벌을 위한 작전에서 헬리콥터가 솟구쳐 올라갈 때의 굉음과 함께 들리는 것과 다를바 없다. '전주곡'에 나오는 주제는 리스트가 1844년에 완성한 합창 사이클인 '4원소'(Les quatre elemens)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로부터 10년후인 1854년에 리스트는 '전주곡'을 완성하고 초연을 직접 지휘했다. 리스트는 전주곡을 13곡이나 작곡했는데 그중에서 나치가 선전용으로 이용했다는 것은 제3번이다. 리스트의 '전주곡' 제3번은 다섯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연주시간은 15분 정도이다. 1) 인트로덕션(Introduction: Quenstion) 2) 사랑(Love) 3) 폭풍(Storm) 4) 목가적인 조용함(Bucolic calm) 5) 전투와 승리(Battle and Victory)이다. 나치가 선전용으로 이용한 파트는 다섯번째인 '전투와 승리'이다. 장엄한 느낌을 주는 음악이다.
나치의 주간 뉴스 프로그램 오프닝. 리스트의 '전주곡'이 연주되었다.
○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Rite of Spring)이 초연될 때에는 음악을 지지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서로 난투극을 벌였다. 주먹싸움까지 해야하는지는 모르겠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이교도 봄축제를 그린 발레곡인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이 1900년대 초반에 처음 선을 보였을 때 관중들은 너무나도 괴이하고 섬찍한 전위적인 음악과 무용 때문에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다. 관중들은 음악 뿐만 아니라 무용수들의 동작 하나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의상도 그랬다. '백조의 호수'에 익숙해 있던 관중들로서는 '봄의 제전'에 혐오감을 가질수 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봄의 제전'을 보면서 무슨 마약에 빠진 것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관중들은 작곡자 뿐만 아니라 안무가도 돌아가면서 비난했다. 심지어는 오케스트라 멤버들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물론 전위음악을 지지하는 층도 있었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전위음악을 이해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수 없었던 것이다. 공연 도중 급기야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이 편을 갈라서 고함치며 비난하고 주먹을 휘날리며 폭력을 쓰는 사태로 발전되었다. '봄의 제전'이 아니라 '봄의 주먹싸움'이었다. 아무튼 세상에 별 일도 다 있었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1913년 5월 29일 파리의 샹제리제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두 파트로 나뉘어졌는데 첫번째 파트는 '대지에 대한 경배'(L'Adoration de la Terre)이며 두번째 파트는 '희생'(La Sacritice)이다. 지나치게 이교도적인 요소가 많아서 기독교 단체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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