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파파 하이든

프란츠 황제 찬가

정준극 2017. 10. 3. 10:21

프란츠 황제 찬가

주제 멜로디는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 국가로 사용. 현재는 독일 국가


'교향곡의 아버지' 또는 '현악4중주곡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요제프 하이든이 작곡한 '프란츠 황제 찬가'의 멜로디는 1차 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오스트리아제국(나중에는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국가처럼 사용되었다. 한편 독일의 경우에는 1922년부터 독일의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중심되는 봐이마르의 국가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비스마르크에 의해 독일이 통일되자 하이든의 멜로디는 통일된 독일의 국가로 사용되었고 계속해서 나치의 제3제국 시대에도 독일국가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2차 대전 후 동-서독이 갈라지자 서독의 국가로만 사용되었다가 1990년 이후에 동서독일이 통일을 이루자 통일된 독일의 국가로 사용되었다. 구체적으로는 하이든이 1796년에 작곡한 '신이시여 프란츠 황제를 보호하소서'(Gott erhalte Franz den Kaiser)의 멜로디이다. 일명 '프란츠 황제 찬가' 또는 '황제 찬가'라고 불리는 음악이다. 하이든은 나중에 이 멜로디를 주제로 삼아서 현악4중주곡 Op 76의 3번, 일명 '황제'(Kaiser)를 만들었다. 하이든의 현악4중주곡 Op 76은 네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1번에는 부제가 붙어 있지 않았지만 2번에는 '다섯번째'(Quinten: Fifths)라는 부제가 붙어 있고 3번에는 이미 설명한대로 '황제'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며 4번에는 '일출'(Sunrise)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하이든은 이 현악4중주 Op 76의 네곡을 평소에 그를 후원해 준 헝가리의 요제프 게오르그 폰 에르되디 백작의 부탁으로 작곡하였으며 그에게 헌정했다. 그런데 이 멜로디의 첫 소절은 하이든이 크로아티아의 민속노래에서 가져온 것이기 때문에 100% 하이든의 창작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엄밀히 따지자면 1차 대전이 끝나기 전가지 오스트리아 제국과 현재의 독일이 사용하고 있는 국가는 크로아티아가 원산지인 멜로디를 사용했었고 또한 아직도 사용하고 있으니 아이러니컬하다. 하기야 구한말의 우리나라도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전체 곡조를 국가처럼 사용했으니 더 할 말은 없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프란시스(프란츠) 2세. 나중에 오스트리아공국을 제국으로 선포하고 프란츠 1세로서 초대 황제가 되었다. 나중에 그의 딸 마리 루이제는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프란시스 황제는 나폴레옹 때문에 많은 곤혹을 겪었다.


하이든이 '신이여 프란츠 황제를 보호하소서'를 작곡하던 당시에는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서  상당한 의기가 소침해 있던 때였다. 나폴레옹의 기세가 하도 대단한 바람에 오스트리아는 부끄럽게도 비엔나를 두어 차례나 점령당하기 까지 했다. 오스트리아의 국민들은 나폴레옹의 군화에 짓밟힌 조국의 모습을 보고 분개하였지만 힘이 약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누군가는 오스트리아 국민들에게 애국적인 감정을 불어넣어 줄 필요가 있었다. 영국을 방문했던 하이든은 영국 국민들이 무슨 국가적인 행사나 축하할 일이 있으면 한결같은 목소리로 '신이시여 우리의 왕을 보호하소서'(God Save the King)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오스트리아도 황제를 위한 저런 찬가(Hymn)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군주에 대한 존경과 사랑과 헌신을 선언하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비엔나에 돌아온 하이든은 우선 뜻을 함께할 사람을 찾았다. 하이든은 친구이며 후원자이기도 한 반 슈비틴(van Swieten)남작과 우선 상의하였다. 반 슈비텐 남작은 제국도서관의 책임자였고 귀족들이 후원하는 음악회인 콘서트 스피리투엘(Concert Spirituel)을 이끄는 사람이었다. 또한 얼마후에는 하이든의 부탁으로 불흐의 걸작인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의 독일어 대본을 만든 사람이다. 하이든은 반 슈비텐에게 외적의 침략을 받고 있을 때에 국민들의 사기를 높여줄 노래가 필요함을 설명했고 반 슈비텐은 당연히 하이든의 뜻에 적극적으로 찬동했다. 반 슈비텐은 하이든이 새로 만들 애국적인 노래가 온 국민들 사이에서 널리 불려지게 되려면 좋은 가사가 필요하고 또한 정부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당시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니더외스터라이히주 의회의장인 프란츠 폰 사우라우 백작에게 도움을 청했다. 폰 사우라우 백작은 영국처럼 국민 모두가 부를수 있는 황제찬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크게 인식하고 즉각적으로 시인 로렌츠 하슈카(Lorenz Haschka)에게 가사를 쓰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하이든에게는 시가 완성되면 음악을 만들어 줄 것을 정식으로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다음과 같은 시가 만들어졌다. 첫 소절만 소개한다.


Gott erhalte Franz, den Kaiser, (God save Francis the Emperor). 신이시여 프란츠 황제를 지켜주소서

Unsern guten Kaiser Franz!(our good Emperor Francis!) 우리의 선한 프란츠를

Lange lebe Franz, der Kaiser,(Long live Francis the Emperor) 프란츠 황제 만세

In des Glückes hellstem Glanz!(in the brightest splendor of bliss!) 밝고 찬란한 축복이

ihm erblühen Lorbeerreiser.(May our good Emperor Francis!) 우리의 선한 프란츠 황제에게 임하소서


'선한 왕'이라는 표현은 우리식으로 보면 '성군'이라는 의미이다. 유럽에서는 군왕이 훌륭하면 '선한 왕'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예를 들면 보헤미아의 왕인 벤체스라우스(또는 바클라프)을 찬양하는 '선한 임금 벤체스라우스'이다. 이 노래는 전세계적으로 크리스마스 캐롤로 불려지는 노래가 되었다. 그건 그렇고 그러면 곡조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이든은 작곡할 때에 그가 알고 있는 민요의 멜로디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오스트리아의 민요, 헝가리의 민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민요에서 멜로디를 가져왔다.'프란츠 황제 찬가'는 크로아티아 민요에서 멜로디를 가져 왔다고 한다. 크로아티아의 메디무리에와 북부지역의 민요인 스탈 세 예셈 브 유트로 라노(Stal se jesem v jutro rano: 나는 아침 일찍 깨어났네)에서 가져왔다는 것이다. 과연! '신이시여 프란츠 황제를 지켜주소서'의 멜로디와 '스탈 세 예셈...'의 첫 소절 멜로디는 누가 보더라도 같다. 물론 전체적으로는 '프란츠 황제 찬가'와 다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시가 마련되었고 음악이 붙여져서 1797년 2월 12일 프란츠(프란시스) 2세 황제의 29세 생일에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에서 처음 연주되었다. 이날 부르크테아터에서는 프란츠 2세 황제가 직접 참석한 가운데 칼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Carl Ditters von Dittersdorf)의 오페라 '의사와 약사'(Doktor und Apotheker)와 요제프 봐이글의 발레 '알론조와 코라'(Alonzo und Cora)가 함께 공연되었다. 프란츠 2세 황제가 하이든이 새로 작곡한 '황제 찬가'를 듣고 크게 만족하였음은 물론이다. 악보는 즉시 인쇄되어 오스트리아 전국에 배포되었다. 정부에서는 모든 극장과 오페라 하우스에 지시해서 공연 전에 '황제 찬가'를 연주토록 했다. 그후 하이든은 첫 소절만 되어 있던 이 노래에 세 소절의 가사를 덧붙였다.


하이든의 '프란츠 황제 찬가'가 처음 연주된 비엔나의 부르크테아터. 오른쪽의 낮은 건물이다. 가운데의 화려한 높은 건물은 호프부르크 궁전이다. 부르크테아터에서는 훗날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초연되었다.


하이든의 '황제 찬가'는 1797년 이래 오스트리아의 국가처럼 사용되었다. 당시에 오스트리아는 제국이 아니고 하나의 공국이었다. 하이든이 작곡한 '황제 찬가'는 정식으로 국가로 채택된 것은 아니지만 황실의 주요 행사나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에는, 특히 황제가 참석하는 행사에서는 당연히 연주되었다. 그럴 때면 황제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기립해야 했다. 그나저나 '황제 찬가'의 주인공인 프란츠 황제는 누구인지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합스부르크 출신인 프란츠(프란시스)는 저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손자가 된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세상을 떠나자 큰아들 요셉이 요셉 2세로서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요셉 2세에게는 후사가 없어서 그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 즉 마리아 테레지아의 둘째 아들인 레오폴드가 레오폴드 2세로서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레오폴드 2세의 아들이 프란츠(프란시스)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자 프란츠 2세로 불려지게 되었으며 그가 신성로마제국을 폐지하고 오스트리아 공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프란츠 1세 황제가 된 사람이다. 신성로마제국은 라틴어로는 Sacrum Imperium Romanum 이라고 부르며 독일어로는 Heiliges Römisches Reich(영어로는 Holy Roman Empire) 라고 부르는 유럽의 대제국이다. 신성로마제국은 9세기(또는 10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존속했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샬레마뉴 대제가 로마 교황으로부터 대관식을 가진 800년부터 계산하면 거의 1천년에 이르는 역사이며 오토 1세가 정식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962년부터 따지면 8백년이 넘은 긴 역사이다. 그런 신성로마제국인데 합스부르크의 프란츠가 황제로 있을 때인 1806년에 유럽의 험난한 정세를 고려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이 막을 내리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유럽 제패의 꿈을 가지고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나라들을 하나하나 점령해 나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속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합스부르크의 프란츠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그런데 프란츠 2세는 여러 생각을 한 끝에 1804년에 그때까지만 해도 공국의 신분이었던 오스트리아를 제국으로 승격시키고 스스로 첫 황제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첫 황제로서의 프란츠를 프란츠 1세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프란츠는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선포된 때로부터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문을 닫을 때까지 2년 동안 두개의 황제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하이든이 '황제 찬가'를 만들 때인 1796년에는 프란츠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프란츠 2세였으며 오스트리아의 군주로서는 대공이었다.


샬레마뉴 대제는 로마에 가서 800년 12월 25일 성탄에 말하자면 신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로서 교황으로부터 대관식을 가졌다. 그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 역사학자들의 견해이다.


'황제 찬가'는 프란츠 2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있을 때부터 불려져서 그가 오스트리아 황제로 등극한 이후에도 불려졌다. 그러다가 1835년에 프란츠 1세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인 페르디난트가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자 '황제 찬가'의 가사를 바꿀 필요가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오리지널 '황제 찬가'의 첫 소절 가사가  Gott erhalte Franz, den Kaiser, Unsern guten Kaiser Franz!(신이여 프란츠 황제를 보호하소서 우리의 선한 프란츠 황제)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Segen Ost'reichs hohem Sohne, Unsern Kaiser Ferdinand!(오스트리아의 귀한 아들을 축복하소서 우리의 페르디난트 황제)라고 고쳐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848년에 3월 혁명이 일어나서 페르디난트 황제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의 동생의 아들인 젊은 프란츠 요셉이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우리의 페르디난트 황제'를 고펴야 했다. 오리지널 가사가 '신이여 프란츠 황제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 된 황제도 이름이 프란츠이므로 고치고 뭐고도 할 필요 없이 오리지널 가사를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는데 1853년 2월에 비엔나의 거리에서 프란츠 요셉 황제를 암살하려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행히 다치지도 않고 모면했지만 젊은 황제는 백성들이 무언가 정치변화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여러 조치를 취하는 중에 이듬해인 1854년부터는 '황제 찬가'의 가사도 바꾸기로 했다. 그리하여 첫 소절을 Gott erhalte, Gott beschutze, Unsern Kaiser, unser Land!(신이시여 보호하시고 지켜주소서, 우리 황제와 우리 나라를)로 바꾸었다. 가사를 이렇게 바꾼 '황제 찬가'가 1차 대전에서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이 패배하여서 합스부르크 왕조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이어 오스트리아는 공화국이 되기까지 국가처럼 사용되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비가 여러 사절들을 접견하고 있다. 1896년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에는 여러 민족, 여러 나라가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 민족이나 나라는 각기 자기들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오스트리아 이외의 지역에서는 독일어로 된 '황제 찬가'를 뜻도 모르면서 부르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황제 찬가'는 체코어, 크로아티아어, 슬로베니아어, 헝가리어, 폴란드어,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어서 불러졌다.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이 1918년에 막을 내리고 제국에 속해 있던 나라들은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서 각기 독립하여 떨어져 나가고 새로운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지금의 오스트리아 영토로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국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비록 오스트리아에 황제는 없지만 옛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화를 잊지 못해서 일종의 향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국가도 오리지널 '황제 찬가'를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1차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는 공화국이 되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말할수 없는 혼돈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는 국가고 뭐고 찾아서 부를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나고 10여년이 지난 1929년에 비로서 옛 '황제 찬가'의 멜로디를 그대로 사용하지만 가사는 바꾼 노래를 국가로 간주하여 부르도록 했다. 첫 소절을 Sei gesegnet ohne Ende(영원토록 축복받을 지어다)로 바꾼 것이다. 이 국가는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과 합병되던 1938년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오스트리아는 독일 제3제국의 한 행정구역으로 전락되자 국가도 독일 국가를 사용하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한 것은 멜로디가 하이든의 '황제 찬가'였다는 것이다. 다만 가사는 독일의 시인인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활러스레벤이라는 사람이 쓴 것으로 바꾸어 불러야 했다.


2차 대전 이후에 오스트리아는 독일과의 합병이 무효가 되고 4대강국의 신탁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 때에는 국가고 뭐고가  없었다. 다만, 옛 제국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는 사람들만이 모여서 무슨 행사를 할 때에는 소리를 죽여서 오리지널 '황제 찬가'를 불렀다. 잘못 들렸다가는 왕정을 복구하려 한다느니 하는 오해를 살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는 독립국이 된 이후에 독일과 똑같은 멜로디의 국가를 사용할수가 없으므로 궁리하다가 모차르트가 작곡했다는 마땅한 곡을 하나 찾아냈고 가사는 공모를 하여 선정했다. '산의 나라 강의 나라'(Land der Berge, Land am Strome)라는 노래이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 노래를 공식적인 국가로 채택하였다. 1854년도 버전의 '황제 찬가'가 근자에 공식적으로 불려진 일이 있다. 1989년에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비였던 치타(Kaiserin Zita)의 장례식에서였고 이어 2011년에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오토(Otto von Habsburg)의 장례식 때였다. 오토의 죽음으로 합스부르크는 마침내 대미를 장식하고 종지부를 찍었다.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오토의 장례식이 2011년 7월 11일 비엔나에서 거행되었다. 슈테판성당에서의 영결미사를 마친 운구행렬은 합스부르크의 관레에 따라 카푸친 교회의 지하 영묘에 오토를 안장하였다. 이날 장례식에서 '황제 찬가'가 불려졌다.


하이든이 '황제 찬가'를 작곡하였고 이후 오스트리아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황제 찬가'의 가사를 몇번이나 바꾸어 불렀으며 마침내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국가처럼 부르게 되는 중에 독일에서도 하이든의 이 음악이 훌륭하다고 생각해서 점차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잘 아는대로 독일은 비스마르크가 통일을 이루기 전까지 수많은 나라들로 분할되어 마치 군웅할거의 시대를 연상케 하는 연혁을 꾸며갔다. 그래서 뜻있는 많은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같은 민족인데 어찌하여 분리되어 살아야 하는가?'라는 한탄과 함께 어서 통일이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시인이며 대학교수인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스레벤(August Heinrich Hoffmann von Fallersleben)이라는 상당히 긴 이름의 사람이었다. 폰 팔러스레벤은 뜻한바 있어서 1841년에 오스트리아에서 국가처럼 사용하고 있는 하이든 작곡의 '황제 찬가'에 새로운 가사를 만들어 붙이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세 소절의 가사가 완성되었다. Deutschland, Deutschland über alles, über alles in der Welt(독일이여 독일이여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도다)라고 시작되는 가사였다. 독일 민족이 다른 모든 민족보다도 우수하다는 약간 자만심 섞인 가사이기는 했다. 이 가사를 사용한 노래를 '독일의 노래'(Das Lied der Deutschen)이라고 불렀다. 새로운 가사의 노래는 상당한 호응을 받았다. 1922년에는 봐이마르 공국이 처음으로 이 가사에 의한 노래를 독일 국가로 채택하였다. 봐이마르의 국가가 아니라 독일 국가라고 표현한 것은 봐이마르가 독일의 중심되는 공국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치당 집회 장면. 이런 집회에서는 '도이치란트 위버 알레스'와 '호르스트 베셀 리트'를 함께 노래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봐이마르의 국가는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에 나치독일의 국가로 계속 사용되었다. 호르스트 베셀 노래(Horst Wessel Lied)는 나치당의 당가(黨歌)로 사용되었고 또한 '모든 것에 뛰어난 독일'(Deutschland über alles)과 함께 나치 독일의 공동국가로 사용되었다. 호르스트 베셀(1907-1930)은 나치가 정권을 잡기 전부터 나치 열렬하게 운동을 하다가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한 사람이다. 나치는 그를 초대 순교자로 간주하여 선전에 이용하였다. 호르스트 베셀 노래는 나치당에 대한 헌신을 내용으로 삼은 것이어서 나치당의 당가로 채택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나치 독일의 국가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졌다. 모두 3절로 되어 있는데 1절과 2절의 내용은 독일의 우수함과 통일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지역차이와 민족차이를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어 평화스러운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가사들은 독일이 이웃 나라들을 침략해서 영토를 확대해도 좋다는 타당성을 심어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전쟁후 몇 년동안은 이 노래를 국가로서 부르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그러다가 1951년에 가서 서독이 Einigkeit und Recht und Freiheit로 시작하는 3절 가사만을 국가로 사용키로 하고 공식적인 국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1990년에 통독을 이룬 후의 독일 국가로도 계속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동독은 '폐허에서 일어서라'(Auferstanden aus Ruinen)이라는 새로운 노래를 국가로 채택하여 1949년부터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사용하였다. 가사는 나중에 동독 문화장관이 된 시인 요한네스 베허(Johannes Becher: 1891-1958)가 썼고 음악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곡가인 한스 아이슬러(Hanns Eisler: 1898-1962)가 만들었다. 동독의 국가는 통독이 되고나서 자연스럽게 폐지되었다. 독일 국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Einigkeit und Recht und Freiheit(Unity and rights and freedom)

fur das deutsche Vaterland!(for the German fatherland)

Danach lasst uns alle streben(Let us strive for it together)

brüderlich mit Herz und Hand!(brotherly with heart and hand)

Einigkeit und Recht und Freiheit(Unity and rights and freedom)

sind des Glückes Unterpfand.(are the basis of good fortune)

Blüh im Glanze dieses Glückes,(Flower in the light of this good fortune)

blühe deutsches Vaterland!(flower German fatherland)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에 무너졌고 서독과 동독은 통일을 이루었다. 통일된 독일의 국가는 서독의 국가를 사용키로 했다. 역시 하이든 작곡의 '황제 찬가' 멜로디이다.


'신이시여 프란츠 황제를 보호하소서'가 처음 발표된 해에 하이든은 헝가리의 에르되디 백작으로부터 여섯 곡의 현악4중주를 의뢰받았다. 하이든은 그중 하나의 현악4중주에 프란츠 황제 찬가의 멜로디를 사용하는 느린 악장을 만들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서 하이든의 현악4중주 Op 76의 제3번 일명 '황제'가 만들어졌다. 의뢰받기는 여섯 곡이었으나 실제로 만든 것은 네곡이었다. 모두 에르되디 백작에게 헌정되었다. 하이든은 '프란츠 황제 찬가'를 특별히 좋아했던 것 같다. 하이든은 연로하여서 쇠약해 있을 때(1802-1809) 자기의 노래들을 피아노로 연주하여서 그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기를 즐겨했다. 하이든이 임종을 앞두고서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은 '프란츠 황제 찬가'였다. 하이든을 돌보아 주었던 하인 요한 엘슬러의 말을 빌리면, 하이든은 하루에 세번이나 '카이저 리트'(Kaiser Lied: 황제 찬가: Kaiser Hymne)를 피아노로 연주했다고 한다. 5월 26일 낮에는 이 음악을 세번이나 연속해서 피아노로 쳤다고 한다. 나이가 많아서 쇠약한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그날 이 곡을 칠 때에는 감정을 넣어서 기쁜 마음으로 쳤다고 한다. 그리고 오후 다섯시쯤 파파 하이든은 이상하게 기운이 없다고 말하고 자리에 누웠다고 한다. 그리고 이틀을 그렇게 지내다가 5월 31일에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하이든은 1732년 3월 31일에 태어났는데 5월 31일에 세상을 떠났다.


하이든은 말년에 '황제 찬가'를 피아노로 치기를 즐겨했다고 한다. 그림은 피아노를 치는 하이든


하이든의 '프란츠 황제 찬가'의 주제 멜로디는 여러 작곡가들이 자기들의 작품에 인용하거나 변주곡을 만들어서 발표했다.

 

- 베토벤은 독일의 극작가 겸 대본가로서 비엔나에서 활동했던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타라이츠케의 연극 Die Ehrenpforten의 극음악을 작곡했는데 피날레의 대사인 Es ist vollbracht에 하이든의 '프란츠 황제 찬가'에서 네 소절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이 연극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것을 축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이든의 '황제 찬가'도 나폴레옹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민들의 애국심을 북돋아 주려는 의도에서 작곡된 것이어서 그런 의미에서 서로 관련이 된다.- 슈베르트는 그의 1816년도 작품인 '성모애상'(Stabat Mater)에서 '황제 찬가'의 멜로디를 사용했다. 그런데 슈베르트는 나중에 이를 수정하기는 했다.

- 칼 체르니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또는 피아노와 현악 4중주를 위한 '프란츠 황제 찬가 변주곡'을 1824년에 작곡했다.

- 조아키노 로시니는 그의 오페라 '렝스로의 여행'(Il vaggio a Reims)에서 '황제 찬가'의 멜로디를 사용했다. 독일군 소령인 트롬보노크 남작이 애국적으로 부르는 노래이다.

- 니콜로 파가니니는 1824년에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변주곡에서 '황제 찬가'의 멜로디를 사용했다. Maestosa Sonata Sentimentale 라는 제목이다.

- 게타노 도니체티는 그의 오페라 '마리아 스투아르다'의 3막에 나오는 Deh! Tu di un'umile prehiera....에서 '황제 찬가'의 멜로디를 사용했다.

- 클라라 슈만은 솔로 피아노를 위한 '비엔나의 회상'(Souvenir de Vienne: 1838)에서 '황제 찬가'의 멜로디를 사용했다.

- 베드리치 스메타나는 1853년도 '축제 교향곡'(Festive Symphony)에서 '황제 찬가'의 멜로디를 사용했다. 스메타나는 이 교향곡을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에게 헌정할 생각이었다.

- 폴란드의 헨리크 뷔니아브스키(Henryk Wieniawski: 1835-1880)는 1853년에 무반주 바이올린 곡에서 '황제 찬가'의 주제를 사용한 변주곡을 만들었다. 제목은 '오스트리아 국가에 의한 변주곡'이다.

- 표트르 일리이치 차이코브스키는 1874년에 '황제 찬가'를 오케스트라 곡으로 편곡했다. 오스트리아 황제가 러시아를 방문한 것을 기념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편곡은 1970년에 가서야 출판되었다.

- 안톤 브루크너는 1890년에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비의 딸인 마리 발레리 대공녀의 결혼식에서 사용하기 위해 오르간으로 연주되는 '황제 찬가'를 만들었다. 제목은 Improvisationskizze Ischl 1890 이다.

- 헝가리의 벨라 바르토크(Bela Bartok: 1881-1945)는 그의 1903년도 교향시인 '코수트'(Kosuth)에 '황제 찬가'의 멜로디를 인용했다. '코수트'는 1848년의 헝가리 혁명을 위한 애국적인 노래로 작곡된 것이다. 다만, 1848년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서 더 이상 부르게 되지 못했다.

-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그의 행진곡인 '프란츠 요제프 황제 행진곡'(Franz Josef March: Op 67: 1849)과 '프란츠 요제프 황제 구조 축하 행진곡'(Kaiser Franz Josef Rettungs Jubel: Op 126: 1853)에서 '황제 찬가'의 멜로디를 부분 사용하였다.


비엔나 시내 중심의 부르크가르텐에 있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 기념상


하이든의 '황제 찬가' 멜로디는 교회의 찬송가로도 널리 인용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개신교의 '시온성과 같은 교회'(Glorious Things of Thee Are Spoken/Zion, coty of our God)이다. 우리나라 개신교 찬송가 210장이다. 영국의 존 뉴턴이 작사를 했다. 가톨릭 교회의 찬송인 Tantum Ergo도 이 멜로디를 사용한 것이다. 성만찬을 축복할 때에 부르는 찬송이다. Light of ages and of nations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사무엘 롱펠로우의 시에 의한 노래도 이 멜로디를 사용한 것이다. 사무엘 롱펠로우는 미국의 성직자이다. '황제 찬가'의 멜로디는 대학교의 교가로도 사용되고 있다. 주로 미국의 대학교들이다. 미시간 주의 아드리안(Adrian)대학,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의 캴스턴대학, 뉴욕주의 콜럼비아 대학교(Stand Columbia라는 제목), 일리노이주 노말에 있는 일리노이주립대학교, 펜실베이니어주 피츠버그에 있는 피츠버그대학교, 테네시주의 시와니에 있는 사우스대학교, 버지니아주 웨인스보로에 있는 피쉬번(Fishburne) 군사학교 등에서 교가로 사용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예루살렘을 시온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이든의 '황제 찬가' 멜로디는 개신교의 찬송가 '시온성과 같은 교회 그의 영광 한없다...'에 사용되어 있다.


[한마디 더]

서독 수상을 지낸 콘라트 아데나우어(Konrad Adenauer: 1876-1967)가 세상을 떠나서 1967년 4월 25일에 쾰른 대성당에서 영결식을 치룰 때의 일이다. 데어 알테(Der Alte)라는 애칭의 아데나우어 수상은 라인강변의 쾰른 출신이어서 쾰른대성당에서 영결식을 치루게 되었다. 세계 각국에서 조문사절단이 참석했다.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 프랑스 대통령 샤를르 드 골, 서독 대통령 하인리히 뤼브케 등이 영결식의 앞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데나우어는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여서 가톨릭 성당에서 가톨릭 의식에 따라 영결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아직 예식이 시작되기 전이어서 현악 앙상블이 하이든의 현악4중주곡 작품번 76번의 제3번 C 장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2악장에서 저 유명한 '황제 찬가'의 멜로디가 나오기 시작하자 갑자기 드 골 대통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 골 대통령은 서독 국가가 연주되는 줄 알고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일어섰던 모양이다. 국가가 연주되는데 대한 예의였다. 드 골 대통령으로부터 조금 옆에 앉아 있던 존슨 대통령과 서독의 뤼브케 대통령은 하이든의 현악4중주를 연주하는데 그걸 서독 국가를 연주하는 줄로 잘못 알고서 그 큰 키의 드 골 대통령이 혼자 서 있는 것이 민망하게 보여서 동료의식을 발휘하여 함께 일어섰다. 그러자 다른 모든 조문객들도 따라서 일어나지 않을수 없었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현악4중주 중에서 미국, 프랑스, 서독 대통령들을 비롯한 수많은 귀빈들이 기립해서 경청한 경우는 하이든의 현악4중주곡 작품번호 76번의 3번이 유일할 것이다. 드골 대통령은 천연덕스럽게 2악장이 끝나자 자리에 앉아고 다른 모든 사람들도 따라서 앉았다. 드골 대통령이 연주되고 있는 음악이 무엇인지 알고서 일어났었는지, 모르고서 일어났었는지는 당사자만 아는 사실이다. 


쾰른대성당 앞에서의 아데나우어 전서독 수상 장례식. 장례식에서는 하이든의 현악4중주곡 일명 '황제'가 연주되었다. 2악장에 나오는 멜로디는 '황제 찬가'의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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