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파파 하이든

하이든의 런던 여행

정준극 2017. 10. 3. 06:54

하이든의 런던 여행


하이든은 영국의 초청으로 두번이나 영국에 갔었다. 하이든이 영국에 가게된 사연을 이러하다. 1790년에 하이든을 높이 대우하던 에스터하지가의 니콜라우스 공자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안톤이 에스터하지가를 계승하였다. 안톤은 에스터하지가의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으므로 경비를 줄이기 위해서 궁정음악가들을 해고하였다. 다만, 오랫동안 가문을 위해 봉사한 하이든만은 야박하게 해고할수 없으므로 월급과 연금을 대폭 줄이는 조건으로 명목상으로나마 음악감독(지휘자)으로 재임명하였다. 안톤은 월급도 적게 주는 마당에 하이든의 봉사를 굳이 받을 필요가 없으므로 하이든이 영국이나 한번 갔다가 오겠다고 하자 두말하지 않고 좋으실대로 하라고 허락하였다. 그때 마침 하이든과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던 독일의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임프레사리오인 요한 페터 잘로몬(Johann Peter Salomon)이 하이든에게 영국에서 새로운 교향곡을 작곡하면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주선해서 연주회를 갖게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에스터하지궁에서 소규모 오케스트라만을 지휘했던 하이든으로서는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지휘할수 있게 해주겠다고 하자 더구나 관심을 가졌다. 당시에 하이든은 이미 런던에서도 유명했기 때문에 하이든이 런던을 직접 방문하면 대환영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하이든 최고의 걸작인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의 작곡을 결심한 것은 잘로몬이 영어로 된 '천지창조'의 대본을 하이든에게 전달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하이든은 비엔나에 돌아와서 '천지창조'의 영어 대본을 당시 궁정도서관장이던 고트프리트 폰 스비텐 남작에게 주어서 독일어로 번역케 했다.]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궁에 있는 하이든 전시실. 하이든은 29세 때에 에스터하지가에 와서 거의 30년을 봉사했다.


영국에서는 과거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작품이 콘서트의 프로그램에 언제나 올라왔었다. 그러다가 1782년에 바흐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하이든의 작품이 콘서트를 지배했다. 런던의 유명 악보출판사들은 너도나도 하이든의 작품을 인쇄하여 판매하기에 바뻤다. 런던의 포스터 출판사는 하이든과 별도 계약을 맺기까지 했다. 롱맨 앤 브로드립은 하이든의 비엔나 전속출판사인 아르타리아의 영국 대리점이 되어 있다. 사실상 하이든을 런던에 한번 초청하려는 시도는 1782년부터 있었다. 그러나 하이든이 에스터하지의 니콜라우스 공자에게 매어 있는 몸이어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안톤이 에스터하지를 책임 맡게 되자 음악에 별로 관심도 없는 처지에 경비를 줄이겠다고 나서자 따라서 하이든도 자유로운 처지가 되어서 런던 초청을 수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이든은 1790년 12월 15일에 모차르트 등 친밀하게 지내던 몇 사람들과 작별을 하고 런던행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떠났기 때문에 이듬해 12월 5일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소식을 들은 후에야 미망인인 콘스탄체에게 애도의 편지를 보냈을 뿐이었다. 하이든은 잘로몬과 함께 1791년 1월 1일에 칼레에 도착했다. 이제 해협만 건너면 그렇게도 가보고 싶었던 영국이었다. 사실 하이든으로서는 이번 영국 방문이 생전 처음 바다를 건너 외국에 나가는 것이어서 가볍게나마 흥분되기도 했다. 런던에 도착한 하이든은 잘로몬과 함께 현재의 피카딜리 서커스 근처의 그레이트 풀트니 스트리트의 어떤 집에 거처를 정했다. 집 근처에는 마침 브로드우드 피아노 회사의 스튜디오가 있어서 그곳을 빌려서 작곡을 했다.


하이든의 런던 교향곡 음반


하이든의 런던 방문은 두번 모두 대단히 경사스러운 것이었다. 첫번째 방문은 1791년부터 1792년까지였고 두번째 방문은 1794년부터 1795년까지였다. 연주회는 모두 대성공이었다. 연주회 때마다 청중들이 몰려와서 혼란스럴 지경이었다. 하이든의 명성은 더 높아졌고 작곡과 콘서트로서 사례도 어지간히 받았다. 에스터하지에 매달리지 않아도 걱정없이 지낼 정도가 되었다. 첫번째 콘서트의 분위기를 어떤 평론가는 이렇게 전했다. '하이든 선생이 직접 피아노 앞에 앉아서 연주를 했다. 청중들을 저명한 하이든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격해 했다. 아마 영국에서 열린 모든 연주회 중에서 가장 흥분되고 가장 기쁨을 주는 시간이었다'. 하이든은 런던에 있으면서 여러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중에선 피아니스트 레베카 슈뢰더(Rebecca Schroeder)도 포함되었다. 레베카는 독일 작곡가로서 런던에서 활동했던 요한 사무엘 슈뢰더의 미망인으로서 아마추어 음악가였다. 하이든은 런던 체재 중에 레베카와 일종의 로맨틱한 관계를 가졌었다. 그러나 그런 대인관계보다도 런던 방문이 하이든의 생애에서 중요하였던 것은 이 기간에 여러 작품을 생산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놀람 교향곡', '군대교향곡', '드럼롤 교향곡', 그리고 물론 '런던 교향곡'이 만들어졌으며 이밖에도 마지막 악장이 말이 갤롭으로 뛰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승마인'(Rider)라는 별명이 붙은 현악4중주곡 Op 74의 No 3, 피날레가 헝가리의 집시 음악 스타일이어서 '집시 론도'(Gypsy Rlondo)라는 별명이 붙은 피아노 트리오 No 39, G장조 등도 런던 방문의 결과물이다.


하이든이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옥스포드대학교


하이든의 런던 방문은 대성공이었지만 따져보면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두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하이든을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애를 먹었던 것이다. 하이든의 콘서트에서 연주를 맡은 오케스트라의 라이발 오케스트라인 '프로페셔널 콘서트'는 하이든의 콘서트가 대성공을 거두고 연일 만원사례를 내걸자 은근히 질투가 생겨서 오스트리아로부터 이그나즈 플라옐이라는 사람을 작곡가 겸 지휘자로 초청했다. 문제는 플라엘이 하이든의 제자였다는 것이다.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하이든이 잘 나가니까 배가 아파서 별별 계획을 다 세우는 영국 사람들도 문제는 문제였다. 한가지 다행한 것은 플라옐이 그래도 스승은 스승이니까 하이든에게 식사도 대접하고 자기가 지휘하는 콘서트에 하이든의 작품을 넣는 등 성의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튼 하이든 측으로서는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상태였다. 또 하나의 문제는 하이든의 영국 방문 첫번째 프로제트로서 작곡한 오페라 L'anima del filosofo(철학자의 영혼)가 여러 사정으로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이 오페라의 임프레사리오인 존 갈리니라는 사람이 당국으로부터 극장공연을 허가받지 못한 것이다. 아무튼 이 오페라는 하이든의 생전에 공연되지 못하였다. 하이든으로서는 이 오페라의 작곡을 위해서 무던히도 애썼는데 공연히 시간만 낭비한 셈이었다. 물론 하이든은 오페라 작곡으로 상당한 사례를 받았다. 3백 파운드를 받았다고 되어 있는데 요즘 돈으로 얼마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이든이 오페라에 신경을 쓰다보니 교향곡 작곡이 지연되었다. 그래서 이 기간 중에 교향곡 95번과 96번 (미라클)만을 완성했다. 하이든은 잘로몬과의 계약에 의한 콘서트를 일찌감치 마치고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얼마 동안을 시골(허팅포드베리)에 가서 지냈고 또 옥스포드대학교도 방문했다. 옥스포드대학교는 하이든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이와 관련해서 하이든이 작곡한 교향곡이 92번인 '옥스포드 교향곡'이다. 1789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하이든이 영국 방문 중에 잠시 체류했던 허팅포드베리의 현재 모습


하이든은 1790년 12월에 비엔나를 떠나 런던으로 가는 중에 독일의 본에 들려서 아직 약관인 베토벤을 잠시 만난 일이 있다. 하이든이 런던에서 돌아와보니 베토벤은 이미 비엔나에 와서 있었다. 베토벤은 하이든이 두번째로 런던으로 떠나기 전까지 거의 한달 동안 하이든의 제자로 있었다. 하이든은 베토벤을 데리고 아이젠슈타트로 와서 대위법 등에 대하여 가르쳤다. 하이든은 베토벤이 아직 작곡 초년생인 젊은이었지만 그에게 별로 가르칠만한 것이 없었다. 하이든이 두번째로 런던을 방문했을 때에 그는 영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이면 임프레사리오인 잘로몬이 주선한 1794년도 시즌의 음악회는 하이든의 작품으로 도배되는 정도로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1794년도 시즌에서는 하이든의 교향곡 99번, 100번, 1001번이 모두 역사적이 초연을 가졌다. 1795년도 시즌 역시 하이든의 오페라 하일라이트 등으로 연주회가 꾸며졌다. 오페라 콘서트는 이탈리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조반니 바티스타 비요티가 이끌었다. 1795년 시즌에서는 하이든의 마지막 교향곡들인 102번, 103번, 104번이 초연되었다. 더구나 마지막 콘서트는 '닥터 하이든의 밤'이라는 제목의 것이었다. 이 시기가 하이든으로서는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고 가장 정상에 있었던 시기였다. 하이든은 어느 곳을 가더라도 사람들이 알아보고 환호를 받았다. 마치 새로운 세계가 하이든의 앞에서 열린 듯했다. 하이든이 태어난 해인 1732년에 미국에서는 와싱턴이 태어났다. 그리고 하이든이 세상을 떠난 1809년에는 미국에서 링컨 대통령이 태어났다.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 궁에 있는 하이든 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