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파파 하이든

하이든 좀 더 알기

정준극 2017. 12. 8. 16:17

우리가 잘 몰랐던 하이든에 대한 이얘기 저얘기


에스터하지 궁에서 현악4중주의 리허살을 주관하고 있는 하이든


- 하이든은 어릴 때에 큰일 날뻔했다. 미안한 말이지만  잘못되었으면 남자 구실을 못할 뻔했다. 사연인즉, 하이든이 다섯 살 때에 비엔나에서 합창지휘를 하고 있는 친척 중의 한 사람이 하이든 식구들이 살고 있는 로라우를 찾아왔다가 어린 하이든의 노래를 듣고 나서 '음성이 유난히 맑고 순수하여서 그냥 두기가 아깝다'고 말하고 하이든에게 본격적인 성악공부를 제안했다. 그래서 하이든은 일곱살 때인가 몇살 때인지 하여튼 어릴 때에 부모님 곁을 떠나서 비엔나로 와서 우선 슈테판성당의 소년성가대 멤버로 신청했다. 당시에는 교회 성가대에서 여자가 노래 부르는 것이 거의 금기시되었다. 그래서 여성 파트를 소년들이 맡아서 불렀다. 어떤 경우에는 소년 대신에 카스트라토가 소프라노 파트를 맡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오페라를 공연할 때에도 여성의 역할을 주로 카스트라토가 맡는 것이 유행이었다. 카스트라토는 아빠가 되기를 포기한 남자들을 말한다. 거세를 해서 여성의 음성을 갖도록 한 남자들을 말한다. 하이든의 친척은 어린 하이든을 훌륭한 카스트라토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래서 하이든도 거세의 절차를 거쳐서 카스트라토가 될 뻔한 했지만 다행하게도 하이든의 아버지가 그 소리를 듣고는 결사반대했기 때문에 성사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하이든은 요행히 카스트라도가 되지 않았다. 만일 하이든이 카스트라토가 되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름다운 현악4중주도 못 들었을 것이고 명랑한 교향곡들도 들을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후에 하이든은 어떻게 되었는가? 다행히 슈테판대성당의 소년성가대원으로 들어가서 노래를 부를수가 있었다. 그리고 얼마후에는 하이든의 동생인 미하엘 하이든도 고향 로라우를 떠나 비엔나에 와서 형과 함께 슈테판성당의 소년성가대원으로 노래를 브리게 되었다. 슈테판성당의 소년성가대원은 궁정소년합창단의 임무도 맡았다. 궁정소년합창단은 훗날 세계적인 비엔나소년합창단의 모체가 된다. 사족이지만 하이든보다 훨씬 뒤에 슈베르트도 슈테판성당의 소년성가대원으로 노래를 불렀다.


비엔나의 슈테판성당에서 성가를 부르는 비엔나소년합창단. 비엔나소년합창단의 전신은 슈테판성당 소년성가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이든은 슈테판성당 소년성가대원이었다. 훗날 슈베르트도 소년성가대원이었다.


- 수많은 교향곡과 현악4중주곡과 협주곡과 오라토리오와 미사곡, 그리고 오페라로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한없는 존경을 받은 하이든도 소년시절에는 비엔나의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켜며 지나가던 사람들이 푼돈이나마 던져주는 것으로 먹고 살았던 때가 있었다. 하이든은 변성이 되자 어쩔수 없이 16세에 슈테판성당의 성가대를 떠나야 했다. 슈테판성당의 성가대원으로 있으면 숙식을 해결할수가 있고 약간의 용돈도 받아서 쓸수가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성가대에 있을 수가 없게 되자 거리로 나서야 했다. 그러는데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알수가 없는 것이어서, 마침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으로 비엔나에 와서 활동하고 있던 작곡가 니콜라 포포라(Nicola Popora: 1686-1768)가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하이든을 보고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서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니콜라 포폴라는 미하엘교회 뒷편에 있는 미하엘하우스(Michaelerhaus)에 방 하나를 마련해 주어서 하이든이 지낼수 있도록 했고 또한 음악 레슨도 해주었다. 아마 포포라의 도움이 없었다면 하이든은 훗날 역사에 길이 빛나는 위대한 작곡가로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야기에 의하면 슈테판성당의 성물들을 관리하는 사람이 하이든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가 오갈데 없는 하이든에게 거처를 주선해 주었다고 한다. 하여튼 하이든은 소년고생을 무던히도 했던 사람이었다.


슈테판성당의 소년성가대원 기숙사에서 나온 하이든은 미하엘교회 뒷편에 있는 미하엘하우스에서 몇 년 동안 지냈다. 이 건물의 꼭대기 다락방에서 지냈다. 하늘이 보이고 눈비가 오면 들이닥치는 방이었다. 하이든은 그래도 비록 낡았지만 피아노 한대가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 집에서는 위대한 대본가 메타스타시오도 기거했었다.  


- 모차르트는 하이든보다 24년이나 아래였지만 비엔나에 와서 하이든과 가깝게 지냈다. 모차르트가 프리 메이슨의 멤버였던 하이든의 영향을 받아서 스스로 프리 메이슨에 가입한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그리고 어떤 주장에 따르면 하이든은 1780년대에 비엔나에서 모차르트와 함께 현악4중주를 연주했다고 한다. 그러니 친할수 밖에 없었다. 모차르트는 1791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전 해에 하이든은 영국에 가서 몇 해 동안 지내게 되었다. 하이든이 영국으로 떠나기 전에 모차르트는 하이든을 저녁식사를 대접하면서 '나이도 연만하신데 가시지 않으면 안되겠습니까? 더구나 영어도 모르지 않습니까?'라면서 만류를 했지만 하이든은 약속된 것이니 가야한다고 말했다. 모차르트는 하이든이 영국에 가서 있는 중에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하이든은 곧바로 모차르트의 부인인 콘스탄체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면서 모차르트의 자녀들의 공부를 맡겠다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하여튼 영국에서 돌아온 하이든은 그래도 이모저모로 모차르트의 유가족들을 돌보아 주고 신경 써주었다. 하이든은 작곡으로 돈을 상당히 벌었지만 모차르트는 그렇지 못했다. 하이든은 당시로서는 장수하여서 77세까지 살았지만 모차르트는 고작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는 그래도 잘 생긴 얼굴이었지만 하이든은 그렇지 못했다. 하이든은 어느때 '많은 여인들이 모차르트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수긍이 가지만 별로 잘 생기지도 못한 자기에게 미모의 여인들이 매력을 느껴서 따라다니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에마누엘 쉬카네더의 집에서 모차르트를 위한 만찬. 참석자들은 왼편으로부터 요제프 하이든, 요한 게오르그 알브레헤츠버거(Johann Georg Albrechtsberger: 1736-1809), 모차르트,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 소프라노 카타리나 카발리에리(Katharina Cavalieri: 1760-1801), 서 있는 사람은 에마누엘 쉬카네더(Emanuel Schikaneder: 1751-1812). 얼굴이 안보이는 여인이 소프라노 알로이지아 랑게(Aloysia Lange: 1760-1839), 맨 오른쪽이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Christoph Willbald Gluck: 1714-1787). 1780년 제작

  

- 모차르트도 자기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했던 사람과 결혼하지 못했다. 베토벤도 결혼하고 싶어했던 사람과 결혼하지 못했다. 베토벤은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하이든도 결혼하고 싶어했던 사람과 결혼하지 못했다. 그런데 하이든의 경우는 색다르다. 원래 테레제라는 여인을 사랑했었다. 하이든보다 한살 아래의 여인이었다. 그런데 테레제에게는 네살 위의 언니가 하나 있었다. 마리아 안나였다. 그러니까 하이든보다 세살 위였다. 마리아 안나는 꼴에 어떤 남자와 죽자사자 사귀고 있었다. 마리아 안나의 아버지는 큰 딸이 사귀는 남자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역시 죽자사자 결혼을 반대했다. 그러는 차에 하이든이 둘째 딸 테레제와 결혼하겠다고 나섰다. 테레제의 아버지는 기막힌 생각을 했다. 말썽장이 큰 딸을 하이든에게 시집 보내면 큰 딸 문제가 해결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하이든에게 큰 딸 마리아 안나와 결혼하라고 협박조로 강요하였다. 마음이 여린 하이든은 결국 마리아 안나와 결혼하였다. 문제의 둘째 딸 테레제는 하이든과 결혼하지 못하자 수녀원으로 들어가서 평생을 보냈다. 아무튼 그러다보니 하이든의 결혼생활을 행복하지 못한 것이었다. 게다가 마리아 안나는 음악이라고는 음자도 모르는 여인이었다. 더구나 마리아 안나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하이든은 여러 해 동안 집을 떠나서 지냈다. 영국에 가서 몇년씩이나 지내고 헝가리에 가서도 몇 년씩이나 지냈다. 그러다보니 말이 부부이지 남남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만일 하이든에게 내조를 잘하는 훌륭한 아내가 있었더라면, 더 구체적으로 테레제와 결혼했더라면 더 위대한 작품들이 나왔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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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든의 부인 마리아 안나


- 하이든은 한 때 베토벤을 가르쳤다. 베토벤은 원래 비엔나에 와서 모차르트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려 했었다. 그런데 비엔나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본에 있는 어머니가 갑자기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본으로 돌아가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모차르트에게 배우려던 계획은 없던 일이 되었다. 베토벤이 어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1792년에 다시 비엔나로 돌아와보니 참으로 한탄스럽게도 모차르트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베토벤은 하이든으로부터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베토벤이 하이든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실은 하이든이 베토벤을 만나서 가르쳐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하이든은 몇 년전에 베토벤이 처음 비엔나에 왔을 때 그가 작곡한 작품의 악보를 보았고 또한 베토벤의 피아노 연주를 본 일이 있다. 이때 하이든은 '아하, 정말 대단한 청년이구나'라고 생각했고 몇 년 후에 베토벤이 다시 비엔나에 왔다고 하니까 베토벤을 만나서 레슨을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안한 얘기지만 하이든과 베토벤은 서로 별로 콤비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베토벤은 하이든을 떠났다. 떠나면서 한 말은 좀 지나친 말이 될지도 모르지만 '하이든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였다. 하이든도 물론 위대한 작곡가였지만 지나치게 고전에 집착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낭만주의 생각을 가지고 있던 베토벤으로서는 정사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 하이든의 교향곡 96번 D 장조에는 '기적'(Miracle)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런던에서 이 교향곡이 초연될 때에 연주회장의 천정에 달려 있던 커다란 샹들리에가 갑자기 객석으로 떨어지는 사고가 있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기적'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얘기다. 샹들리에가 객석으로 떨어진 시간은 연주가 끝나고나서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를 하기 위해 무대 앞으로 몰려갔던 때였기 때문에 객석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샹들리에 사고는 교향곡 96번을 연주할 때가 아니라 교향곡 102번을 연주할 때에 일어났었다는 것이다. 교향곡 102번은 하이든이 1794년에 완성했고 교향곡 96번은 1791년에 완성했다. 


하이든의 교향곡 96번에는 '기적'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음반 표지의 그림은 연주회장에서 샹들리에가 떨어지자 놀래서 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 하이든의 멜로디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람들의 머리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래도 '황제 현악4중주곡'이라고 알려진 현악4중주곡 62번, 작품번호 76의 3번에 나오는 주제 멜로디일 것이다. 이 멜로디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가(國歌)로 사용되었었고 지금은 통일된 독일의 국가의 멜로디로 사용되고 있다. 원래 이 멜로디는 하이든이 1797년에 신성로마제국 프란츠 2세 황제의 생일을 축하해서 작곡한 '신이여 프란츠 황제를 보호하소서'(Gott erhalte Franz, den Kaiser)에 나오는 것이다. 하이든이 이 작품을 작곡하게 된 목적은 물론 프란츠 2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당시에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의 침공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있어서 국민들에게 애국적인 사상을 불어넣어주고 싶어서였다. 하이든의 이 작품은 그런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사실 하이든이 이 노래를 작곡하게 된 배경은 영국에서였다. 영국을 방문했던 하이든은 영국 사람들이 자기들의 군주를 위해 God save the King 이라는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서 '오스트리아도 저런 노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엔나에 돌아온지 얼마 후에 '신이여 프란츠 황제를 보호하소서'를 작곡하였다. 이 곡은 1918년 오스트리아가 제국에서 공화국이 될 때까지 국가처럼 사용되었다. 하이든의 이 노래는 영국과 미국에서 찬송가의 곡조로 사용되었고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도 개신교 찬송가에 수록되었다. '시온성과 같은 교회'이다. 찬송가의 가사는 영국의 존 뉴턴이 1779년에 만들었다.


프란츠 2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스트리아가 제국일 때에 국가처럼 사용되었고 오늘날 아직까지도 독일 국가로 사용되고 있는 멜로디는 하이든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란츠 2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한 노래에서 인용한 것이다.


- 하이든만큼 많은 작품을 작곡한 작곡가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물론 하이든이 77세까지 살았다는 것도 다작의 중요한 배경이 될 것이다. 하이든은 106곡의 교향곡, 90곡 이상의 현악4중주곡, 62곡의 피아노 소나타, 32곡의 피아노 트리오, 14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뿐만 아니라 오라토리오, 미사곡, 칸타타도 적지 않다. 하이든의 작품들을 모두 연속해서 연주한다면 340시간이 된다고 한다. 아무튼 역사상 이처럼 많은 작품을 남긴 작곡가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하이든을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사실상 하이든이 작곡한 것들은 오늘날의 안목에서 교향곡이라고 부르기가 어려운 것들이었다. 굳이 말한다면 초기 단계의 교향곡이다. 하이든에게는 '파파'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그것은 하이든이 오케스트라 멤버들을 마치 아버지처럼 자상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었다는 것이다. 모차르트도 하이든을 '파파'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하이든이 노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강건한 마음으로 작곡에 열심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비엔나에 있는 하이든기념관. 하이든은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6구 마리아힐르퍼의 하이든가쎄에 있다.


- 모차르트는 하이든을 무척 존경하여서 하이든에게 여섯 곡의 현악4중주를 헌정했다. 1785년에 출판된 Op 10이다. 하이든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현악4중주곡을 창조한 인물로 간주되고 있다. 하이든도 청년 모차르트를 무척 아끼고 좋아했다. 어느 때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에게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진실된 사람으로서 말씀 드리지만 당신의 아들은 정말이지 위대한 작곡가올시다. 당신의 아들은 자기만의 음악적 향취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곡에 대한 심오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 하이든은 모습이야 점잖기가 이를데 없지만 간혹 음악을 통한 장난끼를 발동하여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안겨주었다. 대표적인 예가 '고별 교향곡'이다. 마지막 악장에서 연주자들이 하나씩 촛불을 끄고 퇴장하여서 끝날 때에는 두 사람만 남도록 하는 연출이었다. 하이든이 이 교향곡을 통해서 고용주인 에서터하지 공자에게 오케스트라 멤버들이 집을 떠나 객지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으므로 휴가 좀 주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하였던 것이다. 이를 눈치 챈 에스터하지 공자는 오케스트라 멤버들에게 보너스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아이젠슈타트 집으로 돌아갔다. 또 하나의 예는 '놀람 교향곡'이다. 모두 조용한 음악이 연주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포르테씨모의 강력한 음을 내도록 해서 졸고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 것이다. 현악4중주곡 E 플랫 장조 작품번호 33의 2번에는 '조크'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청중들은 마지막 악장에서 연주가 모두 끝났는줄 알고 있었는데 잠시후에 몇마디 음이 이어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네개의 음표였다. 그래서 청중들은 다 끝난 줄 알고 일어서서 나가려고 하다가 멈칫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이든은 이렇듯 음악을 통해서 웃음을 선사했다. 하지만 일상생활은 경건하고 근면한 것이었다.


비엔나 남쪽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 궁전. 하이든은 주로 이 궁전에서 활동했다. 오늘날 이 궁전 안에는 하이들 홀이라는 이름의 연주회장이 있어서 주로 하이든의 작품이 연주되고 있다.


- 하이든의 현악4중주곡 F 장조 안단테 칸타빌레는 일명 세레나데로 불리는 아름다운 곡이다. 그런데 이곡은 실상 독일 출신으로 하이든과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로만 호프슈테터(Roman Hoffstetter: 1742-1815)가 작곡한 것이라고 한다. 호프슈테터는 베네딕트파 수도원의 수도승이지만 음악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서 여러 작품들을 작곡했다. 호프슈테터는 하이든을 대단히 존경했다. 그래서 '하이든의 펜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모두가 나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든의 음악을 흉내내려는 마음을 막을수 없다'고 말했다. 호프슈테터가 하이든 스타일로 만든 작품 중에서 현악4중주 F 장조 Op 3의 No 5을 얘기하지 않을수 없다. 2악장이 안단테 칸타빌레이다. 하이든이 작곡했다는 현악4중주 F 장조 안단테 칸타빌레와 똑같은 멜로디이다. 모두들 안단테 칸타빌레를 하이든이 작곡한 것으로 믿고 있었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분명히 호프슈테터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독일의 로만 호프슈테터(1742-1815). 그는 하이든 찬미자였다. 그는 '하이든의 멜로디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한번 듣고 나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가. 하이든의 멜로디는 흉내내서 작곡하고 싶은 생각을 저절로 갖게 해준다. 그래서 모방하지 않을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하이든의 '세레나데'로 알려졌던 곡은 실제로 로만 호프슈테터가 작곡한 것으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