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인가 화가인가?
화가가 되었어도 부족함이 없었던 위대한 음악인들
그런데 화가였는데 작곡가가 된 경우도 있었나?
우리가 잘 아는 어떤 음악가들은 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어서 감탄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화가가 되었어도 손색이 없을 위인들이다. 대표적으로는 멘델스존을 꼽을수 있다. 멘델스존이 스위스의 아름다운 마을 인터라켄(Interlaken)의 풍경을 그린 것은 놀랄만한 작품이었다. 얼마나 뛰어난 작품인가는 세계의 미술관에서 가장 소장하고 싶은 작품 중의 하나가 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멘델스존의 작품은 주로 스위스의 경치를 그린 것이다. 그러고보면 멘델스존은 스위스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멘델스존은 세상의 어느 곳보다도 스위스를 사랑하고 스위스에 대하여 애착을 보였다. 멘델스존이 사랑했던 알프스의 산간마을은 1백년도 지난 때에 멘델스존의 후손들이 나치를 피해서 살았던 곳이어서 더욱 깊은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멘델스존의 후손들이 단순히 나치를 피해와서 살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멘델스존의 후손들이 피난해 와서 살았기 때문에 멘델스존의 귀중한 자료들이 나치에 의해 없어지지 않고 보관될수 있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더구나 멘델스존의 후손들은 인터라켄에서 멘델스존을 기리는 음악회를 정규적으로 개최할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멘델스존은 1809년 2월 3일 함부르크의 부유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렇지만 멘델스존의 가족들은 뜻한바 있어서 나중에 기됵교로 개종했다. 이와 함께 Bartholdy라는 기독교식 이름을 추가하였다. 멘델스존은 38세라는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에 약 4백편의 작품을 남겼다. 가장 유명한 곡은 세상의 모든 신랑신부들이 잘 아는 결혼행진곡이다. 셰익스피어의 연극인 '한여름 밤의 꿈'을 위해 작곡한 음악 중에 나오는 곡이다. 또한 이탈리아 교향곡. 스코틀랜드 교향곡, 종교개혁 교향곡도 유명하다. 그런데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작품 중에 '스위스 교향곡'이란 것이 있다. '스위스 교향곡'이란 것은 사실상 멘델스존이 1820년대에 작곡한 열두 편의 스트링 심포니(현악교향곡) 중에서 11번째를 말한다. 11번째 현악 교향곡의 2악장인 스케르쪼에 스위스 민요가 나오기 때문에 '스위스 교향곡'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멘델스존이 스위스에 대한 음악을 처음 작곡한 것은14세의 감수성이 많은 시기에 식구들과 함께 루체른과 베른에 머물면서였다. 멘델스존이 스위스 여행 중에 수집한 민요이다. 이 교향곡에는 또한 에멘탈(Emmental)의 춤곡도 들어 있다.
그림과 같은 루체른 호반. 멘델스존이 가장 좋아하던 곳이었다.
멘델스존은 스위스의 요들 송을 좋아했다. 집안에서 요들 송을 부르면 그저 그렇지만 산에 올라가서 부르면 진짜로 메아리 때문에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좋아했다. 멘델스존은 요들 송이 스위스의 아름다운 경치의 한 파트라고 생각했다. 멘델스존은 생애에서 세번이나 스위스를 방문했다. 나중의 방문에서는 등산도 즐겼다. 멘델스존은 아마추어 등산가였다. 멘델스존이 스위스에서 가장 좋아했던 지역은 인터라켄 주변이었다.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그림과 같은 곳이었다. 멘델스존은 1842년에 부인에게 부낸 편지에서 인터라켄(Interlaken) 지역을 '믿을수 없을만큼 아름다운 산하가 신비한 조화를 이룬 곳'이라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은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멘델스존의 또 다른 스위스 인연은 그의 부인 세실에게서 찾아볼수 있다. 멘델스존의 부인인 세실 장르노(Cecil Jeanrenaud: 1817-1853)의 아버지는 프랑크푸르트의 프랑스개신교 성직자였으나 실은 스위스의 노이샤텔(Neuchatel)이 원래 고향인 사람이었다. 멘델스존은 세실과의 결혼에서 다섯 자녀를 두었다. 칼, 마리, 파울, 엘리자베트(릴리), 펠릭스였다. 그중에서 딸 마리(마리안느)와 릴리(엘리자베트)가 아버지 멘델스존의 유업을 이어가기 이해 노력했는데 특히 릴리가 스위스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릴리는 멘델스존의 자료들을 간수하고 나중에 스위스에 정착하여 '멘델스존 협회'를 창설하였으며 여러 기념사업을 펼쳤다. 그 사업들은 지금까지도 계승되고 있다.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 부인인 세실, 큰 딸 마리, 작은 딸 릴리
멘델스존은 어려서부터 여러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을 보아왔고 또한 스스로 그림그리기에 열중하였다. 재능있는 화가인 멘델스존은 스위스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그림과 같은 마을들을 사랑하여서 기회만 있으면 그림을 그렸다. 작곡해야 할 것이 눈 앞에 놓여있었지만 잠시 잊고서 그림에만 열중한 때도 있었다. 어느때는 몇 시간동안 그림을 그리는 바람에 손가락과 눈에 통증이 오기까지 했다니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은 알아 모실만했다. 멘델스존은 1847년에 인터라켄을 마지막으로 찾아갔다. 그가 사랑하는 누이 패니가 세상을 떠난지 얼마 안된 때였다. 멘델스존은 인터라켄에서 13장의 수채화를 그렸다. 그리고 그해 11월 몇차례의 심장마비 끝에 라이프치히에서 세상을 떠났다. 막내 딸 릴리는 장성하여서 라이프치히 법학교수인 아돌프 봐흐(Adolf Wach)와 결혼하였다. 두 부부는 멘델스존을 회상하여서 기회만 있으면 인터라켄을 찾아갔다. 멘델스존은 19세기부터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받아고 그후 20세기에 나치가 정권을 잡자 1백여년이 지났지만 멘델스존의 작품들을 금지했고 심지어 라이프치히에 있는 멘델스존의 동상까지 철거하였다. 나치가 집권하기 오래 전에 독일을 떠나 스위스에 정착한 릴리 부부는 인터라켄 인근의 빌더스빌(Wilderswil)에 스위스 샬레 스타일의 저택을 짓고 살았다. 샬레는 Ried(리트)라는 이름이었다. 리트가 오픈되자 많은 음악인들이 멘델스존을 생각해서 찾아왔다. 클라라 슈만도 찾아와서 피아노 연주를 했다. 클라라 슈만이 연주한 피아노는 아직도 리트의 거실에 보관되어 있다. 멘델스존의 사위인 아돌프에게는 누이 마리가 있었다. 마리도 나중에는 리트로 와서 지냈다. 마리는 라이프치히를 떠날 때에 멘델스존에 관한 여러 자료들을 챙겨 가지고 왔다. 악보도 있었고 서한들도 있었으며 에세이도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멘델스존이 그린 수채화와 유화들도 챙겨서 가지고 왔다. 유명한 인터라켄의 수채화 13점도 가지고 왔다. 마리는 1964년에 세상을 떠났다. 보관하고 있던 멘델스존 자료들은 모두 베를린 박물관과 옥스포드 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리트는 아직도 봐흐-멘델스존 가족들이 소유하고 있으며 현재는 멘델스존의 증손자로서 변호사였던 토마스 봐흐가 관리하고 있다. 봐흐-멘델스존의 후손들은 1997년에 '스위스 멘델스존 협회'를 창설했다. 이협회는 리트에서 음악회를 주관하고 있다.
멘델스존이 그린 루체른. 수채화. 이 정도면 정말 대가급이다.
멘델스존이 스케치한 '인터라켄의 나무들'. 일설에 의하면 멘델스존은 생전에 약 3백점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다 어디로 갔나?
오페라 '포기와 베스', 피아노곡 협주곡인 '라프소디 인 블루', 관현악곡인 '파리의 아메리카인' 등으로 유명한 미국의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 1898-1937)도 뛰어난 재능의 아마추어 화가였다. 거슈윈은 많은 작품을 남겼다. 주로 인물화를 그렸다. 존경하는 선배인 아놀드 쇤버그의 초상화를 그린 것은 유명하다. 실상 거슈윈은 현대 작곡가들인 알반 베르크,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다리우스 미요, 그리고 아놀드 쇤베르크의 작품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쇤베르크를 찾아가 작곡 레슨을 부탁했다. 그러자 쇤베르크는 '내가 당신을 가르친다면 아마 또 하나의 나쁜 쇤베르크로 만들지 모른다. 당신은 이미 좋은 거슈윈이 되어 있지 않은가'라면서 거절했다. 그러나 거슈윈은 쇤베르크를 깊이 존경하여서 자주 접촉하였고 나중에는 쇤베르크의 초상화까지 자진해서 그려주었다. 돌이켜 보면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멘델스존도 유태계였지만 또 다시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거슈윈도 유태계였다. 그리고 거슈윈이 그렇게도 존경하던 쇤베르크도 유태계였다.
조지 거슈윈은 형과 누이의 초상화를 그리기를 좋아했다. 사진은 누이 마리의 초상화를 그린 거슈윈.
거슈윈은 미국에서 태어났다.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미국에 이민오기 전에 러시아에서 살았었고 할아버지도 러시아에서 살았었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유태인인 할아버지의 이름은 야콥 게르슈비츠(Jakob Gershwitz)였다. 25년 동안 제정러시아 군대에서 정비공으로 일했다. 유태인으로서 여행과 거주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러시가 군대에 입대하였던 것이다. 당시에 제정러시아는 유태인 및 기타 소수민족을 억압하여서 여행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게 했고 거주도 일정지역으로 한정했었다. 야콥 게르슈비츠는 군대에서 은퇴하여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에 정착할수 있었다. 10대의 아들인 모이셰 게르슈비츠(Moishe Gershwitz)는 여자구두 공장에서 가죽을 재단하는 일을 했다. 그러다가 빌니우스의 모피상인 브루스킨이란 사람을 알게 되었고 그의 10대 딸인 로자 브루스키나(Roza Bruskina)를 알게 되었다. 두 젊은이는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로자의 가족도 유태계였다. 로자의 가족들은 러시아에서 반유태 정서가 높아지자 큰 결심을 하고 뉴욕으로 이민의 길을 떠났다. 미국에 도착한 로자는 이름도 미국식으로 Rose(로즈)라고 고쳤다. 한편, 모이셰 게르슈비츠는 당국의 강제징용에서 피할수가 없어서 러시아에 잔류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저축해 놓은 돈을 털어서 어찌어찌해서 미국행 배에 오를수 있었다. 뉴욕에 도착한 모이셰는 그렇게도 보고 싶던 로자(로즈)와 재회하였다. 모이셰는 이름도 미국식으로 모리스라고 고쳤다. 그리고 마침내 1895년에 로즈와 결혼식을 올리고 이름도 게르슈비츠에서 게르스빈(Gershwine)으로 고쳤다. 큰 아들 아이라가 1896년에 태어났다. 이어 둘째 아들 조지가 1898년에 태어났다. 조지는 아무래도 미국사회에서 활동하자면 러시아 및 이디쉬 스타일의 이름인 게르스빈을 가지고서는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게르스빈을 거슈윈(Gershwin)으로 고쳤다.
조지 거슈윈이 그린 작품. 어머니 로즈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조지 거슈윈은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그림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여주었다. 거슈윈은 작곡가로서, 그리고 피아니스트로서 점차 인기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거슈윈은 현대미술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거슈윈의 사촌에 헨리 보트킨이란 화가가 있었다. 거슈윈은 사촌으로부터 미술, 특히 회화에 대한 레슨을 집중적으로 받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얼마 후에는 기성화가에 못지 않는 뛰어난 화가로서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조지 거슈윈의 형인 아이라와 누이동생인 프란시스도 그림을 그렸지만 아무래도 재능은 조지에 미치지 못했다. 거슈윈과 쇤베르크는 여러가지로 의기가 맞아서 친구가 되었다. 더구나 두 사람은 그림에 있어서도 취미가 같았다. 거슈윈은 그림에 있어서 쇤베르크보다 한 수 위였지만 테니스에 있어서는 쇤베르크가 한 수 위였다. 두 사람 간의 큰 차이는 거슈윈은 39세 때인 1937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지만 쇤베르크는 그보다 20년 후인 1957년에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쇤베르크의 이름은 처음부터 Schönberg이고 발음도 쇤베르크였지만 미국으로 건너간 후에는 Schoenberg로 고정시켰으며 발음도 쇤버그를 더 선호했다. 영어의 알파벳에는 ö가 없으므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거슈윈이 그린 쇤베르크. 정말 잘 그렸다.
그런데 아놀드 쇤버그(아르놀트 쇤베르크) 자신도 보통 수준 이상의 아마추어 화가였다. 쇤버그는 거슈윈과도 가깝게 지냈지만 추상화의 선구자라고 하는 러시아의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와도 각별한 사이였다. 두 사람은 종종 서로의 그림을 바꾸어 보면서 '이 부분의 구도는 어떠어떠하다, 저 부분의 색깔을 어떠어떠하다'는 등의 진지한 의견을 나누었다. 두 사람은 '그림에는 그리는 사람의 잠재의식이 표현되는 것이다'라고 믿었다. 아래에 보여드리는 쇤버그의 그림은 아마도 자화상 같은데 아무튼 표현주의가 강하게 보이는 작품이라는 평이다.
쇤베르크의 작품. 붉은 눈동자가 뚤어지라고 앞을 응시하는 모습이다. 혹자는 쇤버그의 자화상이라고 말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가 그림에도 재주가 뛰어났었다고 하면 반산반의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렇다면 그렸다는 그림 좀 봅시다'라고 아우성 칠 것이다. 만일 모차르트가 그린 그림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아마 값은 천정부지일 것이다. 아무튼 모차르트의 그림을 가지고 있다면 여간 생색을 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모차르트 당시의 사람들은 모차르트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으며 그것도 곧잘 그리는 편이었다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남아 있는 작품은 없다. 고작 있다고 하는 것은 자필 악보의 한 페이지에 바르바라 플로이어(Barbara Ployer)라는 여제자의 모습을 스케치로 남겨 놓은 것이다. 그것 하나만 보아서는 모차르트가 그림에 남다른 소질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쩐지는 알수 없다는 것이며 또는 아예 그림 솜씨가 형편 없었는데 주위 사람들이 자꾸 잘 그렸다고 치켜세우는 바람에 화가로서의 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다. 그건 그렇고 모차르트는 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을 바르바라 플로이어에게 헌정했다. 플로이어는 나중에 피아니스트로서 조금 활동을 했지만 남아 있는 자기의 초상화로서는 모차르트가 작곡의 와중에 그린 스케치가 유일하다.
모차르트가 자기의 악보에 플로이어를 스케치 해 놓은 것. 이 정도 그림이야 발로 그려도 그릴수 있을 터인데 사람들은 그래도 뛰어나다느니 어쩌니하는 얘기들이었다. 실제로 모차르트는 뛰어난 그림재능도 있었지만 다른 일로 너무 바뻐서 작품을 남기지 못하였다는 설명이다.
'왈츠 킹'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동생인 요제프 슈트라우스도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참으로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둘째 아들 요제프가 군인으로 성공하기를 바랬다. 당시에는 전쟁이 빈번해서 군인이 되면 출세가 빨랐다. 그러나 요제프는 오히려 엔지니어를 선택했다. 비엔나공과대학을 나온 요제프는 시청의 엔지니어가 되어 건축 일을 했다. 요제프는 발명가 겸 디자이너이기도 해서 몇가지 발명을 했다. 예를 들면 자동거리청소장치이다. 롤러 빗자루를 마차 뒤에 장착하여 거리의 쓰레기를 자동으로 수거하는 장치를 개발했다. 그런가하면 요제프는 시인이었고 극작가였다. 그리고 테너여서 콘서트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작곡가이면서 바이올리니스트였고 지휘자였다. 요제프는 형 요한이 의사의 권유에 따라 요양을 해야해서 지휘를 하지 못하게 되자 대신 '요한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포아가이게(Vorgeige)로서 바이올린도 연주했다. 포아가이게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전매특허나 마찬가지인 지휘 폼으로서 지휘를 하면서 바이올린도 연주하는 스타일을 말한다. 사람들은 그런 요제프를 보고 '형만한 아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아우만한 형이 없다'고 말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자신도 동생 요제프에 대하여 '요제프는 나보다 더 재능이 많은 작곡가이다. 나는 다만 요제프보다 더 인기가 더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사실상 작곡가로서 요제프는 왈츠, 폴카, 행진곡 등을 형인 요한보다 더 많이 작곡했다.
요제프 슈트라웃스 초상화
작곡가들 중에서 예비화가가 나왔던 것은 아니다. 피아니스트, 성악가, 바이올리니스도 화가의 재능을 갖고 있지 말라는 법은 없다. 브라질의 피아니스트인 잉그리드 플리터(Ingrid Fliter: 1973-)는 쇼팽의 전문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현대화가로서도 대단한 재능을 보여준 인물이다. 물론 처음에는 사람들이 피아니스트 플리터가 설마 화가로서도 널리 알려진 플러터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않다. 그러다가 플리터가 그린 추상화를 보고 감탄하여서 '대단하기는 대단하다'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플리터는 쇼팽의 음악을 연주하면 할수록 놀라운 새로운 경지를 경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마법과 같은 새로운 세계로 경험한다고 말했다.
잉그릿드 플리터의 추상화 '빛'(Light)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호주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피아니스트 스테픈 하우(Stephen Hough: 1961-)는 차이코브스키와 베토벤의 작품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이름난 작가이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논설가로서 주로 종교문제. 동성애 문제 등에 대한 글을 써왔다. 또한 그는 시인이었다. 아름다운 시를 여러 편이나 남겼다. 그리고 신문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는 컬럼니스트이다. 그리고 그는 재능있는 추상화가이다. 2012년에는 런던에서 개인 전을 가지기도 했다. 이렇듯 다재다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게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을 정도이다. '이코노미스트'지는 가우를 20명의 박식가 중의 하나로 선정했다.
영국의 피아니스트인 스테픈 하우의 '즉흥곡'(Impromptus)
화가로서의 소질을 가지고 있는 색다른 음악인이 있다. 나폴리 출신의 세계적 테너인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 1873-1912)이다. 카루소는 특히 캐리캐추어에 능했다. 아래에 소개하는 캐리캐추어는 카루소가 1909년에 팬들을 위해 그린 자화상이다. 자필 사인까지 들어 있다.
카루소가 그린 자화상 캐리캐추어
또하나의 화가지망생적 성악가는 러시아의 위대한 베이스인 페오도르 샬리아핀(Feodor Chaliapin: 1873-1938)이다. 샬리아핀은 소묘에 능했다. 아래에 소개하는 그림은 미국의 베이스인 로렌스 티베트(Lawrence Tibbett: 1896-1960)를 그린 것이다. 티베트는 샬리아핀과 함께 1923년 11월에 메트로폴리탄에 데뷔하였다. 이후로 티베트는 샬리아핀을 크게 존경해 왔다. 글쎄...이 정도는 웬만하면 그릴수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베이스 샬리아핀이 스케치한 로렌스 티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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