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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에서 야유와 비난을 받은 작품들

정준극 2018. 4. 4. 17:32

초연에서 야유와 비난을 받은 작품들


1913년 3월 31일 비엔나의 음악협회(무직페어라인) 대연주회장에서 아놀트 쇤베르크가 지휘한 콘서트는 '스칸달콘체르트'(Skandalkonzert)라고 부른다. 이날 많은 수의 청중들은 이른바 제2비엔나 학파에 속하는 작곡가들의 표현주의 및 실험주의 작품들을 듣고 충격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청중들은 너무나 충격에 빠져서 작곡자에게 야유를 보냈으며 개중에는 욕설까지 퍼붓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의 소란은 점점 심해져서 결국은 걷잡을수 없는 소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날의 프로그램은 안톤 베베른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여섯 작품'(Six Pieces for Orchestra, Op 6),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의 '매테를링크의 시에 의한 네개의 오케스트라적인 노래'(Four Orchestral Songs on Poems by Maeterlinck), 아놀트 쇤베르크의 '실내교향곡 1번(Chamber Symphony No 1, Op 9), 알반 베르크의 '페터 알텐버그의 그림엽서 텍스트에 의한 다섯개의 오케스트라 노래 중에서 두곡(Two of the Five Orchestral Songs on Picture-Postcard Texts by Peter Altenberg)이었다. 이들 작품들은 음악에 있어서나 가사에 있어서나 자극적이며 도발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마지막 프로그램은 말러의 '죽은 어린이를 위한 노래'(Kindertotenlieder)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청중들이 너무나 소란을 부리는 바람에 결국 이날의 콘서트는 말러의 곡을 연주하기 전에 막을 내려야 했다. 청중들은 특히 알반 베르크의 노래가 연주되는 중에 작곡가와 시인 모두 정신병원에 보내야 한다고 고함을 질렀다. 시인 페터 알텐버그는 얼마전에 이미 정신병원에 수용되어서 해당사항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중들을 알반 베르크와 페터 알텐버그를 모두 정신병원에 보내야 한다고 소리쳤다. 알반 베르크의 노래는 그후 한번도 연주되지 못하다가 1952년에 가서야 겨우 처음으로 리바이발 될수 있었다. 그리고 스코어는 1966년에 가서야 처음 출판되었다. 아놀트 쇤베르크는 스칸달콘체르트에 앞서서 2월 23일에 같은 장소에서 대규모 칸타타인 '게레리더'(Guerrelieder)의 발표회를 가졌다. 지휘는 프란츠 슈레커가 맡았다. '게레리더'는 지나치게 현대적인 작품이 아니었다. 연주가 끝나자 청중들은 쇤베르크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쇤베르크는 비엔나 청중들이 대체로 보수적인 성향이 있어서 그 전에 쇤베르크의 작풍을 비난했던 것을 생각하고 박수 받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래서인지 청중들은 그로부터 약 한달 후에 같은 장소에서 열린 현대음악 콘서트에서 쇤베르크의 박수 거절에 대한 복수로서 야유와 비난을 보냈다는 얘기도 있었다. 비엔나에서의 스칸달콘체르트가 있은지 두어달 후인 1913년 5월 29일에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The Rite of Spring)이 파리에서 초연되었다. 관중들이 '봄의 제전'을 비난하면서 대단한 소동을 일으켰다. 현대음악 작곡가들은 자기들의 행로가 험난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1913년 3월 31일 비엔나 음악연맹(비엔나악우회건물) 대연주회장에서 열렸던 스칸달콘체르트의 소동을 표현한 그림. 지휘는 아놀트 쇤베르크였다. 오케스트라 멤버들도 흥분한 청중들과 싸우느라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스트라빈스키의 발레음악인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 Vesna svyashchennaya: The Rite of Spring)이 처음 선보였을 때 관중들로부터 대단한 비난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므로 굳이 부연치 않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잘 몰라서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어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코자 한다. 러시아 출신의 스트라빈스키는 파리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스트라빈스키는 파리에 있는 중인 1913년에 발레단인 '발레 뤼스'(Ballet Russes)의 1913년 시즌을 위해 '봄의 제전'을 작곡했다. 초연은 1913년 5월 29일 샹젤리제극장(Theatre des Champs-Elysees)에서였다. '봄의 제전'은 음악이 전위적이었고 안무도 정통 발레를 벗어나는 괴이한 것이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마침내 관중들의 분노를 사서 거의 폭동 직전까지 갔었다. 관중들은 '이것도 음악이란 말이냐? 이것도 발레란 말이냐?'면서 분을 참지 못했다. 참고로 '발레 뤼스'는 러시아 출신의 유명 임프레사리오인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주관하고 있는 순회발레단이다. 1909-1929년의 약 20년 동안 파리에 거점을 두고 활동했다. 발레 뤼스는 글자그대로 러시아 발레단이지만 러시아에서 공연한 일은 단 한번도 없다. 그건 그렇고, 디아길레프는 무명의 젊은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서 발레 뤼스를 위한 발레음악의 작곡을 주문하였다. 스트라빈스키는 발레 뤼스를 위해 '불새'(L'Oiseau de feu: Zhar-ptitsa), '페트루슈카'(Petrushka)를 작곡하였고 다시 '봄의 제전'을 작곡하였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시도들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조성, 박자, 리듬, 비트, 불협화음에 대한 새로운 실험 따위를 시도한 것이었다. '봄의 제전'은 이교도적인 요소를 내포한 작품이다. 물론 러시아의 민속적인 요소도 가미되어 있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선정적이며 우상숭배적인 내용이 표함되어 있다. 관중들은 음악이나 안무의 전위적인 양상에 대하여도 거부감을 내보였지만 전체적인 내용이 지나치게 에로틱하고 우상숭배적이어서 심한 거부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오레곤 발레극장


파리의 발레 뤼스가 무대에 올린 '퍼레이드'(Parade)도 초연에서 관중들로부터 대단한 비난을 받은 작품이었다. 프랑스의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5)가 작곡한 이 발레작품은 당대의 지성인이라고 하는 장 콕토(Jean Cocteau)가 시나리오를 제공했고 세트와 의상은 입체파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가 담당한 것이어서 그 자체만으로도 공연전부터 화제에 올랐지만 실제로 막이 올려지자 관중들로부터 심한 거부반응을 받아 실패로 끝난 초연이었다. '퍼레이드'가 완성된 것은 1차 대전이 막바지에 오른 1917년이었다. 장 콕토는 어느 때 에릭 사티의 연주회를 보고 자기의 이상과 맞는 음악을 만들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사티가 음악을 붙인 발레작품을 만들어야 겠다고 다짐했다. 콕토는 1차 대전 중이어서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벨기에 전선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콕토는 벨기에 전선과 파리를 자주 왕복하면서 '퍼레이드'의 완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파블로 피카소는 배경과 의상을 디자인 했을 뿐만 아니라 초연이 이루어진 파리의 샤틀레극장(Theatre du Chatelet)의 무대 커튼의 그림도 그렸다. 무대 커튼의 그림은 공연하는 사람들이 공연 전에 모여서 저녁식사를 하는 장면이다.


피카소가 '퍼레이드'와 관련하여 그린 파리 샤틀레극장의 무대 커튼 그림. 공연자들이 식사를 하는 중에 어떤 소녀가 관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장면


발레 '퍼레이드'는 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5월 18일 샤틀레극장에서 초연되었다. '퍼레이드'에는 대중적인 엔터테인멘트 소재가 사용되었다. 발레와는 맞지 않은 설정이었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한 무리의 공연자들이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쇼를 보아 달라고 여러 방법을 통해서 유혹하지만 실패한다는 내용이다. 피카소가 디자인한 의상 중에서 어떤 것들은 골판지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댄서들의 움직임이 불편했다. 음악에는 소음만을 만들어내는 몇가지 악기들이 포함되었다. 그런가하면 래그타임 음악도 들어 있었다. 래그타임 음악은 특히 피날레에서 출연자들이 관객들을 호객하는 행위에서 래그타임 음악이 중점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러다보니 전통적인 발레를 기대했던 관중들이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을수 없었다. 관중들은 야유를 보내고 휘파람을 불어댔으며 사납게 행동했다. 관중들이 특히 거부했던 것은 피카소의 입체파적인 디자인이었다. '퍼레이드'의 초연은 재앙이었다. 그러나 초연의 소란보다 더 기억에 남은 스캔달은 장 콕토, 에릭 사티, 그리고 음악평론가인 장 푸에이(Jean Poueigh)의 3자가 펼친 소모적인 논쟁이었다. 그래서 '퍼레이드'는 더욱 비참한 평가를 받았다.


'퍼레이드'의 한 장면. 배경과 의상 디자인은 파블로 피카소였다. 관중들은 '이것도 발레냐? 이것도 의상이냐?'라면서 야유를 보냈다.


에릭 사티의 발레로서 관중들로부터 비난과 야유를 받은 또 하나의 작품이 있다. '머큐리'(Mercure: Mercury)이다. 또 다른 제목으로는 '머큐리의 모험'(The Edventures of Mercury)이다. 1924년 6월 15일 파리의 시갈 극장(Theatre de la Cigale)에서 초연되었다. 이날 시갈 극장의 객석은 피카소, 사티, 보몽, 그리고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촘촘이 자리잡고 있었다. 가장 골치꺼리의 무리들은 이제 겨우 파리의 화단에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초현실주의자들이었다. 앙드레 브레통(Andre Breton)과 루이 아라곤(Louis Aragon)이 주도자였다. 이들은 피카소의 세트 데코와 의상 디자인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신고전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초현실주의도 아닌 스타일로서 관객들의 안목을 흐리게 만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자기들이야 말로 진정한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라는 주장이었다. 두 사람 중에서도 특히 브레통은 피카소와 경쟁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에 어떤 다다주의의 모임에서 피카소로부터 말못한 모욕을 당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카소에게 받은 모욕을 갚아주어야 했다. 그래야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사티가 작곡하고 피카소가 오리지널 데코와 의상을 디자인한 '머큐리'의 초연에 일부러 참석해서 혼란을 야기하여 피카소에게 타격을 주려고 했다. 피카소로서는 신고전주의와 초현실주의를 연계하는 단계에 있을 때의 시도였다. 그래서 이 발레를 '화가의 발레'라고 부르기도 한다. 극장 밖에서는 발레가 시작되기도 전에 피카소를 지지하는 초현실주의자들이 '브라보 피카소'를 외치면서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들은 '사티를 타도하자'라면서 사티에게도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자 극장 안에 있던 사티의 팬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사티의 팬들은 피카소가 앉아 있는 박스로 가서 비난과 욕설을 퍼부었다. 2막이 시작되기 전에는 사정이 더욱 묘해졌다. 어떤 사람이 일어나서 '피카소가 제일이다. 보몽은 타도하자'라고 소리쳤다. 에티엔느 드 보몽 백작은 발레 뤼스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라이발 관계에 있는 발레 후원자였다. 경찰이 와서 소란을 피었던 피카소 지지자들을 끌어내려 하자 이번에는 초현실주의자인 프랑시스 제라르가 피카소를 비난했다. 보몽이 경찰을 불러서 우리를 내쫓으려고 하는데 그건 우리가 당신에게 박수를 보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다. 아라곤은 사티에 대한 감정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무대 위로 올라와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경찰을 몰아내자'라고 소리쳤다. 아라곤은 당장 무대에서 끌어내려졌다.


사티의 '머큐리'가 초연된 파리의 시갈극장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1891-1953)라고 하면 오페라 '전쟁과 평화', '수도원에서의 결혼', 관현악곡 '피터와 늑대' 등으로 잘 알려진 소련의 작곡가이다. 프로코피에프를 특별히 기억하는 것은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핍박을 받아 큰 곤혹을 치룬 작곡가라는 것이다. 그런 그는 바로 1953년 3월 5일 모스크바의 크레믈린 인근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바로 그날 스탈린도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프로코피에프는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피아노 협주곡 2번 G 단조 Op 16은 이런 저런 에피소드가 있어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무슨 에피소드냐 하면 러시아 초연에서 '이것도 피아노 협주곡이냐?'는 비난을 받았다는 것이다. 청중들은 현대음악이라는 미명아래에 귀에 거슬리는 삐걱대는 소리를 계속 만들어내자 신경이 날카로워져셔 연주 도중에 야유를 보내고 연주자와 작곡가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아무리 현대음악이라고 하지만 고막을 괴롭히는 음악은 싫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보는 청중들도 있었다. 와일드한 표현이 오히려 인상적이었다는 주장이었다. 아무튼 이로 인하여 프로코피에프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완전히 새로 쓰다시피했다. 그래서 학자들은 새로 쓴 협주곡을 협주곡 2번이라고 부르지 않고 협주곡 4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수난이 많았던 작품이다. 프로코피에프는 이 협주곡을 1913년에 완성했다. 그런데 오리지널 스코어가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서 파손되었다. 전체 악보를 찾을 길이 없었다. 프로코피에프는 기억을 더듬어서 협주곡 2번을 최대한 복구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협주곡 2번은 1924년 5월 8일 파리에서 초연되었다. 프로코피에프는 이 협주곡을 친구 막시밀리안 슈미트호프에게 헌정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함께 공부한 친구로서 1913년 혁명 때에 죽임을 당한 친구였다. 파리에서의 초연은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아마도 파리 사람들은 아방 갸르드에 어느정도 익숙하여서 비록 귀에 거슬리는 음악이 나오더라도 인내를 가지고 수용하는 미덕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해 8월 23일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외인 파블로브스크에서 연주될 때에는 난리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이것도 음악아냐?'라는 비난이었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아무리 피아노의 대가라고 해도 연주하기에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그래서 프로코피에프의 자서전 작가인 데이빗 니스는 2011년에 '예전에 나는 이 협주곡에서 피아노를 연주할수 있는 피아니스트는 세계적으로 열두어명 정도만 있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지금도 그러하다'라고 말했다.


피아노 앞의 프로코피에프


루이지 노노(Luigi Nono: 1923-1990)는 이탈리아 아방 가르드(전위) 작곡가로서 20세기에서 가장 뛰어난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한가지 께름직한 면이 있다. 1952년에 이탈리아 공산당에 가입한 것이다. 노노는 작품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이 예술가의 책임이며 의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사회적 이슈와 정치적 이념을 담은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대표적인 오페라가 '불관용 1960'(Intolleranza 1960)이다. 이 오페라에는 파치스트의 압정과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고발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불관용 1960'은 오페라의 제목 치고는 특이하다. 제목에 1960년이라는 년도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1960 이라는 숫자를 넣은 것은 이 작품의 작곡을 1960년부터 착수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불관용 1960'은 어떤 이민노동자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러 경우로 고통을 당하는 것을 줄거리로 삼고 있다.


이름도 없이 그저 이민자 또는 이민노동자라고만 불리는 주인공은 노동자에 대한 불법착취, 거리의 시위, 정치적 희생물로 체포되고 고문당하는 일, 강제노동 수용소에의 수감, 도망, 그리고 사회로부터 버림받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는다. 또한 실제 공연에 있어서는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동원되고 여기에 녹음 테이프와 라우드 스피커가 등장한다. 풍성한 표현주의적 드라마를 위해서라고 한다. 대본은 정치적 슬로간들, 사회고발성의 시들, 브레헤트 또는 사르트르로부터 인용한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노노의 귀에 거슬리는 듯하며 고뇌에 차있는 듯한 음악이 융합되어 있다. 노노의 음악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반자본주의적인 폭발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평을 받았다. 19614월 베니스에서의 초연은 실패였다. 정치적으로 좌익과 우익 사람들이 모두 참석한 초연이기 때문이었다. 관객으로 가장해서 들어온 신나치주의자들과 신파치스트주의자들이 극장 안에서 악취탄을 터트려 장내를 난장판을 만들려고 했다. 그것이 제대로 안되자 야유를 보내며 소란스럽게 행동했다. 특히 이민자가 경찰로부터 고문을 받는 장면이 나오자 '경찰 만세'(Viva la polizia)라고 고함치면서 소동을 벌였다. 그러나 오페라는 계획대로 일단 막을 내렸다. 그런가하면 노노의 반대주의자들은 노노가 이탈리아 음악을 독살하려 한다면서 비난했다. 그래서인지 노노는 3년 후인 1964년에 '불관용 1960'이 보스턴에서 공연될 때에 2막에서 1막으로 수정하였다.


고문받는 이주노동자. 베니스 라 페니체


피에트로 마스카니(Pietro Mascagni: 1863-1945)의 프롤로그와 3막 오페라 '가면'(Le maschere)은 초연을 이탈리아의 유명 오페라극장 여섯 곳에서 동시에 했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1901117일의 일이었다. 오페라의 역사에서 참으로 특이한 경우였다. 밀라노의 라 스칼라, 제노아의 카를로 펠리체 극장, 토리노의 테아트로 레지오, 로마의 코스탄치극장, 베니스의 라 페니체극장, 베로나의 필라르모니코극장에서 동시에 초연되었다. 이날 마스카니는 로마에 있었다. 그는 인터미션 시간에 무전으로 각지의 초연 상황을 보고 받았다고 한다. 이틀후인 119일에는 나폴리의 산 카를로극장에서 초연 아닌 초연을 가졌다. 테너가 선정되지 못하여서 지연되었다.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의 초연은 엔리코 카루소가 주역을 맡았고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지휘를 맡은 것이었다. 그리고 로마의 초연은 마스카니가 직접 지휘한 것이었다. 로마의 초연은 마스카니가 직접 지휘했기 때문에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다. 로마 초연이 열린 코스탄치 극장은 11년전인 1890년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가 초연되어서 폭풍적인 갈채를 받았던 곳이다. 그런 연유로 인하여 로마 코스탄치에서의 '가면' 초연은 상당한 박수를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의 공연은 비참할 정도로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제노아에서는 관중들의 야유로 인하여 공연이 거의 반이나 중단되었다. 관중들은 갑자기 야수가 된 것처럼 시끄러운 소리를 지르며 불만을 표시했다. 출연자들의 노래가 형편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아무튼 그후 이 오페라는 이탈리아에서 간혹 공연되기는 했지만 초연이 있은지 4년후부터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아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마스카니는 초연이 있은지 30년 후인 1931년에 내용을 일부 수정하여 다시 공연하였으나 역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왜 그런지는 아직도 분명치 않다.


관련 이미지

마스카니의 '가면' 음반


바그너의 중기작품인 '탄호이저'()는 1845년 10월 드레스덴의 젬퍼오퍼에서 초연을 가졌을 때에는 그런대로 성공을 거두었으나 16년 후인 1861년 3월 13일의 파리 초연은 그야말로 야유와 비난의 범벅이어서 대실패였다. 바그너는 '탄호이저'의 파리 초연을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하였고 또한 기대도 많이 했다. 우선은 '탄호이저'의 파리 공연을 통해서 돈을 벌어서 당장의 빚이라고 갚아야 하겠다는 생각때문에 성공을 위해 무척 노력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탄호이저'의 파리 초연을 주선해준 어떤 고귀한 부인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성공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부인이 누구냐하면 오스트리아에서 파리에 파견한 고위 외교관의 부인인 파울리네 폰 메테르니히 공녀였다. 파울리네 공녀(프린세스)는 바그너가 '탄호이저'의 파리 초연을 맡아 줄 극장과 후원자를 구하지 못해서 걱정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직접 파리오페라에 연락해서 살 르 플르티에(Salle le Peletier)에서 공연될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기왕에 얘기가 나온 김에 파울리네 공녀가 누구냐는 것을 소개하자면, 당시 유럽에서 이름을 떨쳤던 오스트리아제국의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수상의 손녀이다. 그러니까 파울리네의 어머니인 레온티네가 메테르니히 수상의 딸이었던 것이다. 파울리네는 원래 헝가리의 귀족인 모리츠 산도르 백작의 딸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그러면 되는지 안되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파울리네는 자기의 외삼촌인 리하르트 폰 메테르니히 공자와 결혼하였다. 그러다보니 어머니가 하루아침에 시누이를 겸하게 되었고 외할아버지인 메테르니히 수상은 시아버지를 겸하게 되었다. 파울리네는 외교관인 남편을 따라 피리에 와서 10여년을 지내면서 파리 사교계의 주인공이 되었다. 아는 사람도 많고 영향력도 많아서 바그너가 어려운 처지에 있다고 하자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던 것이다.


바그너는 '탄호이저'의 성공을 위해서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리허설을 무려 164회나 가졌다. 아무리 초연이라고 해도 그만큼 사전에 리허설을 하는 오페라는 없었는데 바그너는 하여튼 온 정신을 초연의 성공을 위해서 온 정신을 쏟았다. 바그너는 '탄호이저'를 파리오페라의 살 르 플르티에에서 최소한 10회를 공연토록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첫날부터 관중석으로부터의 야유와 비난으로 실망을 안겨다 주었다. 이른바 자키()클럽이라고 하는 동원된 야유부대가 공연 도중에 고양이 소리를 내지르고 호르라기를 불어내며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겨우 막을 내릴 수가 있었다. 두번째 공연도 마찬가지였다. 세번째 공연은 3월 24일에 있었다. 자키클럽의 난동은 전보다 더 했다. 공연 도중에